CRITIC

엄태정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
2022.08.24. – 2023.02.26.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김원영 | 김세중미술관 학예실장

오랜 시간 대리석과 청동은 조각의 전통적 재료로 사용되어 왔다. 1960년대 산업 재료이던 철이 조각의 재료로 유입되며 한국의 현대조각은 추상조각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거친 철은 높은 열을 가하면 녹아내리면서 새로운 형태로 구현되었고 불꽃 튀는 철 용접 과정을 통해 형태를 가감할 수 있었다. 철의 물질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 한국의 추상조각이 금속 조각을 통해 활성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조각가인 엄태정(1938~)은 청년 시절 철의 물질성에 매료되었다. 1967년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절규〉를 통해 금속조각가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후 구리, 철, 알루미늄 등의 물질 탐구를 통해 60여 년간 금속조각가의 길을 걸어왔다.
엄태정 개인전이 8월 23일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의 지하 공간에서 개막해 2023년 2월 26일까지 진행된다. 전시 공간은 1971년 건축가 김수근이 공간(空間) 사옥으로 설립 당시 지하 소극장으로 지어 사용했던 곳이다. 이곳의 전시를 보기 위해서는 건축 구조상 미로처럼 곳곳을 오르내리며 공간(空間)이 유도하는 동선을 따라가야 한다. 전시장 입구에는 엄태정의 〈드로잉   -  시간과 공간 놀이〉(1995) 3점이 걸려 있다. 소품이지만 밀도 있고 절제된 선(線)들이 집약된 작품이다. 미술에서 선을 긋는 행위는 예술가의 내면적 심상이 구체화되어 점차 가시화되는 작업이다. 엄태정 드로잉에서 선들의 구성은 섬세하고 인내심 있는 수행으로써 심연의 선(禪)의 흔적으로 보인다. 더 깊은 공간으로 내려가면 과거 소극장이었던 곳이 나온다. 현재 전시장이 된 그 안에, 무대를 내려다보듯 우리의 시선 아래 설치된 작품들은 고요한 공간 속에서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평면 작품 〈흑백의 공간과 시간〉과 〈만다라   -  시간의 향기를 담다〉 연작, 그리고 은빛 알루미늄의 대형 조각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과 〈철의 향기〉는 마지막 공연을 시작하기 전 설레며 기다리는 주인공처럼 보인다. 비로소 어두웠던 텅 빈 공간(空間)은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진다.
작가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가로세로 1cm 크기의 사각형 한 칸 한 칸을 색으로 채우는 수행 과정을 통해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고 말한다. 평면 회화인 〈흑백의 공간과 시간〉과 〈만다라   -  시간의 향기를 담다〉는 그러한 수행의 결과로써 시간이 겹겹이 쌓인 작품이다. 만다라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원과 중심을 의미하는데, 수행자가 명상을 통하여 우주의 핵심과 합일하고자 하는 깨달음을 얻어 마음속에 참됨을 갖는 것이다. 엄태정의 〈만다라   -  시간의 향기를 담다〉에서 드러나는 단순한 사각의 형상은 정확하고 규칙적인 반복이지만 추상 너머의 무언가를 나타내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결국 규칙적인 반복은 만다라의 근원적 형상인 원으로 드러나고, 원으로 이루어진 둥근 형상은 텅 빈 공간 즉 공(空)으로 환원되는 과정인 것이다.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은 압도적인 크기의 은빛 알루미늄판 사이에 타원형의 검은 철 프레임 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와 달을 상징하는
두 개의 철 프레임은 은빛 사각형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작가는 알루미늄과 철은 다른 금속이지만 내식성(耐蝕性)을 가지고 있기에 외부에 설치되어도 녹이 슬지 않게 서로를 보완하는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특이하게도 이 작품은 좁은 건축물로 지어진 공간 사옥의 외형과 닮아 있다. 유사한 외형이지만 다른 속성을 가진 조각과 건축, 1970년부터의 시간을 담은 공간 사옥의 건축 연한과 비슷한 시기에 한국 추상조각가로 특히 금속조각가로서의 시원을 가진 엄태정의 조각 여정은 마치 함께 걸어온 듯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엄태정은 이미 초기 금속조각에서 실재를 넘어서 시공간을 압도하는 힘, 기(氣)를 드러내고 에너지를 발산해왔다. 각 금속의 속성을 탐구하며 조각하는 행위를 통해 그동안 작가가 추구해온 조각적 사유를 구현해 온 것이다.
이 전시는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조각가의 전시지만 오늘의 비평가는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철학적 관점에서의 사유, 나아가 종교적 차원의 영적 체험에 더 가까운 감동적인 관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엄태정의 정신적 스승이자 현대조각의 거장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명상과 수행을 통해 사물 본질에 접근하고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브랑쿠시가 날개 없는 새 작품을 통해 〈공간 속의 새〉를 드러내고 나아가 날 수 있는 공간(空間)을 창조했던 것이다. 가장 완벽한 금속의 표면은 최고의 연마를 통해 만들어진다. 끊임없는 갈고닦음을 통해 점차 단순해지고 빛이 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공백에 대한 사유를 조각 형식을 빌려 구현해 왔고 이를 통해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엄태정이 브랑쿠시의 단순하지만 숭고한 작품을 통해 깨달은 조각적 사유는 날마다 기도를 통해 비우는 것, 즉 공백으로의 접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작품 앞에 서게 되면 낯선 자로서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고 말한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수행과 기도를 통해 조각적 사유의 시간을 갖게 되고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스스로 조각이 되기를 기도하는 작가는 금속 조각에 어렴풋이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작품과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험을 하며 새로운 탐색을 통한 새로운 발견 그리고 새로운 자신을 소환하고 있다. 엄태정의 조각은 결국 삶을 위한 조각이었다. 엄태정 작가의 이번 전시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은 텅 빈 공간(空間)에 대한 사유이자 은빛 날갯짓을 통해 꿈과 기쁨으로 충만해진 공간(空間)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철의 향기〉(사진 앞) 구리, 철 107×200×100cm 2020, 〈만다라  -  시간의 향기를 담다  -Ⅰ, Ⅱ, Ⅲ〉 캔버스에 아크릴릭 145×145cm(각) 2022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 알루미늄, 철 250×106×200cm 2022
〈삼익조 -  하늘새〉 구리 49×30×33cm(작품), 14×19×20cm(좌대) 1969
〈낯선 자의 휴식〉 구리 50×127×50cm 1975

※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전시 일정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전시 관람에 관해서는 각 기관에 문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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