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은재필

BEHIND A WORK

1991년 출생. 암스테르담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한다. 한국 전통 음악과 경극에 대한 연구에 기반한 퍼포먼스와 설치 등을 발표해 왔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물에 뜬 달, 물잡이〉(윈드밀, 2022), 〈Riding a Swing〉(Baustelle Schaustelle, 2020) 등이 있고, 2021년에는 Tao Yang과 2인전 〈Catching the water〉(NEVERNEVERLAND, 2021) 를 개최하였다. 또한 〈Butterfly dream〉(If I can’t dance studio, 2022), 〈Blue Moon〉(Sandberg Instituut, 2021), 〈Landscapes: Eye on research labs〉(EYE Film museum, 2021), 〈Slip of the tongue〉(Foundation Perdu, 2020) 등 다수의 퍼포먼스로 전시에 참여한 바 있다.

〈Butterfly Dreams〉 If I can’t dance studio(암스테르담) 퍼포먼스 광경 2022

동아시아 극장 예술과 경극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온 은재필은 여성을 연기하는 남성 배우로서 중국 경극사에 이름을 남긴 메이란팡의 손짓에 주목했다. 작가는 메이란팡의 사회적 타자로서의 정체성과 사라져가는 역사를 다시 그만의 무대에서 새로운 색과 소리, 몸짓으로 풀어낸다.

달에게 보내는 손짓
염하연 기자

〈물에 뜬 달, 물잡이〉(윈드밀 9.15 ~25)에서 19세기 여성의 역할만을 연기했던 베이징 오페라 배우 메이란팡에 관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퍼포먼스 제목의 의미와 내용에 대한 설명 부탁드린다.
처음 메이란팡(梅蘭芳)을 보았던 작품은 ‘하얀 뱀의 전설(白素貞)’이라는 경극이다. 여성으로 변신한 뱀이 인간 남자를 짝사랑하게 되면서 겪는 감정의 동요나 체념 등의 감정이 인물의 연기를 통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이때 주인공의 마음이 동요하며 변하는 강의 물결과 바람, 비, 강을 유영하는 주인공이 탄 배가 흔들리는 이미지를 생각하며 제목을 떠올렸다. 〈물에 뜬 달, 물잡이〉 물에 뜬 예쁜 달을 잡으려 하지만 물은 손에서 빠져나간다. 달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시 예쁜 달이 물 위에 나타나고 다시, 다시 물에 뜬 달을 잡아본다.

한국 전통 음악과 경극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메이란팡의 공연을 작업의 모티프로 사용한 이유가 궁금하다.
2020년부터 동료 작가 타오양(Tao Yang)과 함께 19세기 남성의 몸으로 여성의 역할만을 연기했던 경극 배우 메이란팡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스타일의 대중영화, 셰익스피어식 드라마로 대변되는 주류문화의 내러티브에 의구심을 가졌다. 이야기의 필수 요소인 갈등과 이를 해결하는 영웅적 행동. 왜 이들의 주인공은 백인, 남성, 이성애자였고 이에 대적하는 자들은 야만적이고 무지함이라는 낙인이 찍힌 소수자들 혹은 타자일까?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나는 익숙한 동아시아 극장 예술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선형적 이야기 구조와 구별되는 처음과 끝이 없이 반복되는 이야기 구조, 대화와 표정이 아닌 손동작과 걸음걸이에 부여된 캐릭터, 백인 이성애 남성의 역할과 구별되는 동양인 퀴어 배우의 확장성. 메이란팡은 조사 중에 발견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의 기록물을 모으고 공연을 현시대에 재해석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기를 의도했다.

메이란팡의 손동작으로 구성된 연기 교본을 재해석할 때 어떤 부분을 가장 염두에 뒀는지.
연기 교본에는 몸이 아닌 손만 부분적으로 보인다. 몸 전체가 보였다면 메이란팡이 남성으로서 가진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특징들, 이를테면 넓은 어깨, 좁은 골반 등이 드러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오직 손동작을 통해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메이란팡의 연기는 손동작뿐만 아니라 역할에 따라 걷는 방식, 얼굴에 바르는 화장의 색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이를 참고해서 특정 캐릭터를 구축하고 공연에서 화장, 몸동작, 오브제의 색을 촘촘하게 결정했다.

퍼포먼스에 사용되는 악기의 제작 과정이 궁금하다. 또 무대마다 색이 다른데, 각각 어떤 의미가 있는지.
퍼포먼스에는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북 형태의 악기가 보인다. 원통의 크기가 크면 음이 낮고 진동이 큰 소리가, 원통이 작으면 음이 높고 짧은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 통의 부피를 조절해 음역과 진동이 각기 다른 4개의 악기를 제작했다. 이는 어린 시절 할머니께 배운 박자를 구현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평택시에서 사물놀이 선생으로 일하며 동시에 무당이기도 했던 할머니는 나에게 굿에서 쓰이는 박자들을 몇 개 알려주었다. 어긋나는 박자, 느려지고 빨라지는 속도, 강하고 약한 북의 소리, 북의 크기에 따른 음정의 고저를 통해 그녀가 알려준 박자를 재현했다. 굿이라는 의식은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위로를 통해 한을 푸는 것이라 느꼈다. 이번 퍼포먼스에서는 메이란팡을 연구하며 그의 삶에서 느낀 사회적 타자로서의 외로움과 두려움, 그런데도 환영받고 싶은 소망을 가진 마음에 공감했고 그의 몸짓, 화장, 발걸음을 따라 하며 퍼포먼스에 그를 불러내고 싶었다.
공연에서는 비물질적인 소리가 큰 부분을 차지하므로 그 외의 설치나 오브제를 단순하게 구성했다. 배경과 악기, 옷, 화장의 색을 하나로 정했다. 전에 메이란팡을 연구하며 했던 퍼포먼스 〈나비의 꿈〉에서는 그가 했던 빨간 화장의 색을, 〈파랑 달〉에서는 물의 색인 파랑에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

이주요, 정지현의 〈도운 브레익스, 서울〉 (2017, 아트선재센터)에서 보여준 퍼포먼스 〈개나리 매치〉는 드로잉, 오브제와 퍼포먼스가 결합된 공연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로잉과 퍼포먼스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드로잉과 퍼포먼스는 서로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드로잉은 퍼포먼스의 스크립트로 기능한다. 일시적으로 벌어지고 사라지는 퍼포먼스에 비해 드로잉은 두고두고 보며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일상적으로 조사를 하며 그때그때 감정이나 움직임을 그림으로 기록하곤 하는데 어느새 보면 여러 장의 드로잉이 쌓여 있고 이를 토대로 퍼포먼스를 상상한다. 이번 개인전에서 메이란팡의 아카이브는 서로 모순되는 기록으로 가득했다. 일부 언론은 그를 책임감 있는 가장이자 전통의 계승자로 찬양하고 일부는 지저분한 취향을 가지고 일본에 혼을 판 변절자로 묘사했다. 중립을 지키거나 객관적으로 그를 관찰하기보다 드로잉들을 참고했다. 드로잉은 그의 영상이나 책뿐만 아니라 그를 모델로 제작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이 흘리는 눈물, 현대 경극에서 메이란팡과 같이 남성의 몸으로 여성을 연기하고 있는 머우위안디(Mou Yuandi)의 인물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들이 있다.

2020년 암스테르담에서 진행한 〈Train Performance(트레인 퍼포먼스)〉는 조명과 오브제의 사용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작업인가?
극장의 요소들이 갤러리 공간으로 들어온다면 어떻게 비칠까 궁금했다. 전형적인 극장에서 관객은 고정된 자리에 앉아 한 방향의 무대를 바라보게 된다. 조명도 무대 위쪽에 숨겨져 있다. 하지만 갤러리 공간에서 관객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고, 조명의 전선이나 광원이 관객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Train Performance(트레인 퍼포먼스)〉에는 무대장치와 조명을 숨기지 않고 무대 중앙에 놓았다. 커튼 봉이 설치되고 시간이 지나며 드로잉들이 하나씩 커튼 봉을 따라 입장한다. 기다란 기차를 상상했고 한 칸 한 칸 다른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각각의 칸에는 일에 나간 아빠를 기다리는 소년, 기찻길에서 노는 쌍둥이,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남성이 등장한다. 커튼 봉 위에는 앞뒤로 흔들리는 조명을 설치했다. 이동에 따라 흔들리는 기차 안 조명을 상상했다.

향후 작업 계획은?
한국에서의 9월 개인전을 끝내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11월에 스테델릭 뮤지엄에서 있을 퍼포먼스를 위해 두 명의 퍼포머와 연습에 한창이다. 이후에는 여름부터 중국 베이징, 상하이, 쑤저우에 있는 전통 극장과 정원을 방문할 예정이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동아시아 공연예술의 음악 이론, 극장의 형식 등을 연구하며 서구사회에서 ‘원시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외면받은 전통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제는 연구를 확장해 현장에 방문해 이를 천직으로 삼고 있는 개개인의 삶을 살펴보며 그 삶을 둘러싼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소개하려 한다.

〈물에 뜬 달, 물잡이〉 윈드밀 퍼포먼스 광경 2022
〈Catching the Water〉 NEVERNEVERLAND(암스테르담) 퍼포먼스 광경 2021
〈Butterfly Dreams〉 If I can’t dance studio(암스테르담) 퍼포먼스 광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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