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홍도연 푸른 낮의 필사
9.20~10.8 임시공간
김세희 | 현대어린이책미술관 학예사

〈푸른 낮의 필사〉 임시공간 전시 전경

연필을 이용한 드로잉과 반복된 행위로 수행적 작업을 이어온 홍도연은 전시 〈푸른 낮의 필사(Mapping, Walking, Drawing)〉에서 임시공간이 위치한 인천 지역과 걷는 행위로 이루어진 작업 과정을 드로잉 설치로 선보였다. 인천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작가는 현재 미술 교육에 종사하고 있으며 첫 개인전을 이곳, 인천에서 하게 되었다. 작가의 글에는 1990년대 인천의 풍경을 담고 있는 김금희 작가의 소설과 같은 시기에 인천에서 거주했던 작가가 현재 시점에서 당시를 바라보는 소회가 적혀있다. 지금 자신은 어떤 모습의 어른인지 고민한 흔적이 전시장 곳곳에 펼쳐진 가운데 나 또한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홍도연은 2022년 4월부터 9월까지 매주 1회 이상 임시공간을 거점으로 하여 인천역에서 동인천 골목까지 반복해서 걸었고 이 과정을 GPS로 기록하였다. 이번 전시의 모든 작품은 그의 ‘걷는 행위’를 기반으로 제작된 것으로, 시간과 공간이 중첩된 드로잉이 반복적이면서도 변주된 형태로 제시된다. 〈‘임시공간’에서 동인천 골목까지 걷기〉는 동인천까지 걸었던 13번의 1km를 전시장 안에서 걸으며 그 흔적을 남긴 작업이다. 작업의 과정은 연필로 선을 그으며 전시장을 한 바퀴 걷고 나서 지우개로 거칠게 연필 자국을 지운 후, 다시 선을 그으며 걷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는 물리적 공간과 행위의 시간을 포괄한 ‘걷기’를 전시 공간 안에서 다시 구현하며 작가가 걸었던 시공간을 전시장 내부로 소환한다. 한가운데 위치한 낮은 좌대 위, 아코디언 북 형식의 드로잉 〈산책노트〉와 지그재그 형태로 디스플레이 된 시아노타입 작품〈인천역-임시공간-동인천역〉은 평평한 종이가 일종의 공간을 점유하도록 입체화되었다. 모든 작품은 홍도연이 걸어온 자취(walking)의 시간과 공간의 궤적을 그리고(drawing), 종이와 벽면 위에 입힌다(mapping). 〈1호선 방음벽 연작〉은 작가가 인천역에서 부평역까지 걷는 동안 기찻길을 따라 세워진 방음벽과 그 위에 붙은 전단지(혹은 그 자국)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드로잉 15점으로 이루어진 4m가 넘는 길이의 이 작업은 실제 작가가 철로를 따라 걸으며 찾은 장면들이다. 드로잉마다 철로 주변을 두르고 있는 방음 벽체들은 반복되지만 이사할 사람을 찾거나 인력을 알선하는 등 여러 인쇄물의 흔적들이 매번 다른 풍경을 만든다. 각기 다른 시기에 붙은 전단지들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요소로서 풍경들 간의 차이로 작동한다. 이전에도 작가는
〈선 위에서〉(2016~2017) 연작을 통해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이나 보행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이때의 작가는 한 점에서 멈춘 채 도시 속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냈다면 지금의 작업 속 작가는 사람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 움직인다. 또한 마지막 드로잉은 그간 ‘종이 위 연필’이라는 설명으로 표현된 작업과 달리 평면의 종이가 접혀 벽체 자체가 된다.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것은 공간으로 확장된 종이와 그 위를 오고 가는 연필(작가)의 자취다. 종이는 단순히 재료가 얹어지는 표면이 아니라 공간이 되고 전시장의 공간은 다시 종이로 치환된다. 연필이 된 작가는 백지 위 길을 다진다. 그어진 한 획이 비교적 쉽게 지워질 수 있었다면 여러 차례 그어진 연필의 경로는 거친 지우개질에도 불구하고 희미하게 남아 길이 된다. 한편 인천역에서 동인천까지 걷는 행위는 시작점과 끝점이 존재하는 선 운동이었다. 이를 공간 전체에 둘러놓은 작업은 그의 여정을 한 공간에 감아놓음으로써 시작도 끝도 없는 띠의 한가운데 관람객을 위치시킨다. 직선운동이 회전운동으로 전환된 공간 가운데 서서 그가 걷기를 반복하는 구심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가 계속해서 걷고 그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술가로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한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작가의 드로잉 애니메이션 〈예술가로 사는 법〉(2020)의 한 페이지에는 다음의 문장이 적혀있다. “위태로운 곳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는 처지를 떠올린다. 이러한 감각이 나를 흔들고 그림을 그리도록 추동한다… 주저하지 않고 나아간 선과 머뭇거린 자국이 종이에 남는다.” 자신이 딛고 선 세계의 모습과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들, 그리고 끊임없이 마주하게 되는 타인의 고통을 쉬이 소화하기보다는 계속해서 되새김질하는 것. 홍도연이 연필을 들고 무수히 많은 선을 긋고 지우는 반복적 행위는 이것을 잊지 않고 다시 게워 내 기억하고 기록하고, 실천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되새김질로 푸른 한낮의 홍도연은 Walking: 정해진 구획 안의 길을 걷고 걸으며 기억하고, Drawing: 걸어온 자취 속 시간과 공간을 그리며 기록하고, Mapping: 수행적 신체로 내 온 길을 지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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