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YUN HYONG-KEUN

한국 추상 회화의 거장 윤형근(1928~2007)의 개인전이 4월 15일부터 5월 17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PKM갤러리가 개관 14주년을 맞아 삼청동에 새 공간을 마련하고 연 첫 전시다. 군더더기 없는 전시공간과 사색의 깊은 울림을 주는 회화의 만남으로 주목 받고 있다. 개관전으로 윤형근의 회화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고유의 표현양식과 예술세계를 집중적으로 주목하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그의 회화를 최근 회자되는 ‘단색화’라는 개념을 넘어 ‘윤형근’이라는 인물을 집중 조명하여 살펴본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는 은은한 농담(濃淡)과 서정적 정취를 느껴보자.

언제 보아도 물리지 않는 그림

류병학 미술비평

지난 4월 15일 PKM갤러리는 개관 14주년을 맞이하여 안국동에서 삼청동으로 이전하고 재개관 특별전으로 〈윤형근 개인전〉을 개막했다. 재개관 특별전으로 〈윤형근 개인전〉을 기획한 이유는 무엇일까? 갤러리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윤형근을 “한국 ‘단색화’의 거장”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이번 〈윤형근 개인전〉은 최근의 ‘단색화 열풍’을 타깃으로 삼은 전시란 말인가? 갤러리 측은 이번 전시를 “2007년 윤형근 화백이 작고한 이후 국내외에서 처음 개최하는 개인전”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이번 윤형근 개인전은 사후 첫 회고전이란 점에서 일종의 ‘유작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윤형근의 초기부터 말기까지 40여년에 걸친 작품세계를 망라하는 ‘회고전’은 지면(地面) 전시가 아닌 지면(紙面) 전시인 영문판 ‘윤형근 화집’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윤형근 8주년 회고전이 미술관이 아닌 상업갤러리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재조명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윤형근과 스승 김환기
윤형근의 대표작 <다-청(茶-靑)> 회화는 흔히 ‘담백하면서도 웅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그 담백함과 웅대함은 작가의 풍모와 기질을 담아낸 것으로 간주된다. 윤형근은 친구들 사이에서 ‘자이언트’로 불렸다고 한다. 물론 그는 큼직한 체구를 지녔다. 하지만 그가 ‘자이언트’로 불린 것은 체구보다는 대범한 성격 때문이다. 그의 대범성은 당대 현대미술의 거장인 김환기를 만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1947년 윤형근은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는데, 당시 그의 주임교수가 김환기 화백이었다. 1949년 그는 국가 반체제운동으로 중부경찰서에 42일간 구류되고 이 일로 서울미대를 휴학한다. 이후 복학을 희망했지만 거부당했고 당시 홍익대 미대로 자리를 옮긴 김환기 교수의 배려로 홍대 미대로 편입한다. 그는 홍대 미대 재학 중 김환기 교수의 장녀 김영숙을 만난다. 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1960년 청첩장을 받는데, 결혼 당사자가 다름 아닌 김영숙과 윤형근 자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스승은 장인이 된다.
1966년 윤형근은 38세에 신문회관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196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측 커미셔너 이일이 그를 출품작가로 선정한다. 하지만 1960년대 윤형근의 그림은 스승 김환기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그는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된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73년 명동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연다. 당시 전시된 작품이 그의 대표작인 <다-청> 회화이다. 도대체 그는 <다-청> 회화를 어떻게 시작한 것일까? 1973년 그는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당시 부정입학사건에 항의했다가 1달간 서대문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한다. 출옥 후 수년간 근무했던 숙명여고 미술교사직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택한다.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73년도부터 내 그림이 확 달라진 것은 서대문교도소에서 나와 홧김에 한 것이 계기였지. 그전에는 색을 썼었는데 색채가 싫어졌고, 화려한 것이 싫어 그림이 검어진 것이지. 욕을 하면서 독기를 뿜어낸 것이지. 그림에는 내가 살아온 것이 배인 거야.”

윤형근pkm (6)

〈Umber〉(왼쪽) oil on linen 205×333.5cm 1988~1989

윤형근과 도널드 저드
1974년 윤형근의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 화백이 별세한다. 자신을 지탱해주던 거목이 쓰러진 심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승에게 보답하기 위해 작업에 몰두한다. <다-청> 회화는 그의 성격처럼 더욱 담백해지고 스케일도 웅대해진다. 그리고 그의 활동도 활발해진다. 197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1976년 <제8회 까뉴국제회화제>, 1977년 <한국현대미술 단면전>(도쿄 센트럴미술관), 1978년 <제2회 파리국제현대미술제>와 <인도트리엔날레>, 1980년 <아시아현대미술전>(후쿠오카미술관), 1981년 <한국현대미술전>(교토미술관), 1983년 <한국현대미술전>(도쿄도 미술관) 등 다수의 해외전시에 초대받는다. 1984년 그는 경원대 미대 교수로 부임한다. 1990년 경원대 총장이 된다(화가가 대학 총장이 된 사례는 그가 최초가 아닐까).
만약 누군가 윤형근의 작품을 언급하고자 한다면 (지금은 윤형근처럼 모두 고인이 되신) 인공화랑 황현욱 대표와 도날드 저드를 관통해야만 할 것 같다. 1986년 윤형근은 대구 인공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그는 인공갤러리 황현욱 대표의 미적 감각을 높게 평가하여 서울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주선한다. 1989년 황 대표는 윤형근의 지원으로 서울 대학로에 인공갤러리를 오픈한다. 1991년 황 대표는 이곳에서 도날드 저드 개인전을 개최한다. 저드는 당시 인공갤러리에 소장된 윤형근의 그림을 보고 황 대표에게 작가를 만나고 싶다고 하여, 윤형근과 저드가 만나게 된다. 저드는 윤형근의 작품에 대해 ‘구조적이고 담백하다’면서 극찬한다. 그들은 곧 친구가 되었고, 저드는 윤형근에게 자신의 뉴욕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제안한다. 1993년 윤형근은 뉴욕 도널드 저드 파운데이션(Donald Judd Foundation)에서 개인전을 연다. 당시 미국 미술계 인사들은 윤형근의 작품을 극찬했고 저드는 윤형근에게 텍사스에 있는 자신의 또 다른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 다음 해인 1994년 저드가 사망한다. 저드는 임종 전에 텍사스 파운데이션의 윤형근 개인전 추진을 아내 마리안에게 당부하여, 1994년 윤형근은 텍사스 치나티 파운데이션(The Chinati Foundation)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윤형근은 당시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 3점을 기증한다. 치나티 파운데이션은 윤형근의 기증 작품을 위한 파빌롱(Pavillon)을 칼 앙드레(Carl Andre) 파빌롱 옆에 만들어 영구 소장한다.
1993년 필자는 인공화랑 황현욱 대표의 주선으로 이우환과 윤형근을 만난다. 당시 이우환은 다음 해인 1994년 대대적인 전시회(국립현대미술관, 현대화랑, 인공화랑)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황 대표는 이우환 개인전을 위한 도록의 서문을 제안한다. 필자가 1년간 집필해서 발행한 단행본이 《이우환의 입장들》(1994)이다. 1995년 필자의 젊은 시절 작품을 거의 모두 소장하고 있는 독일의 구체미술을 위한 파운데이션(Stifuetung fuer Konkrete Kunst)의 반델(Bandel) 관장이 필자에게 개인전을 제안한다. 하지만 당시 필자는 이미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평론과 기획을 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반델 관장에게 거꾸로 윤형근 개인전을 제안한다. 반델 관장은 필자에게 윤형근 작품에 대한 세미나를 요청하여, 그 세미나 준비를 위해 필자는 인공화랑 황 대표의 주선으로 윤형근의 작업실 겸 주거지인 서교동 자택을 방문하여 그동안 작업된 거의 모든 작품을 보고 긴 토론을 한다. 필자는 1년간 집필하여 세미나를 개최하고 그 자료를 모아 단행본 《윤형근의 다-청 회화》(1996)를 발행한다.
1996년 윤형근은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해 윤형근 가족과 박명자 갤러리현대 대표 그리고 이화익 실장(현재 이화익갤러리 대표)과 필자는 윤형근 파빌롱 오픈에 초대되어 텍사스 치나티 파운데이션을 방문한다. 1997년 윤형근은 독일 구체미술을 위한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개막식에는 윤형근 가족과 갤러리현대 도형태 대표부부 그리고 김창열 화백 등 국내외 인사들이 참석했다.
1993년부터 2000년까지 필자가 만난 윤형근은 한마디로 ‘거목’이었다. 그는 필자에게 늘 지식보다 인간됨이 먼저임을 상기시켰다.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예(禮)는 무엇하겠는가.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미술을 한들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윤형근의 대표작 <다-청> 회화는 작가의 꾸밈없는 담백함과 대범한 기질을 담아낸 웅대함으로 나타난다. 윤형근은 자신의 작품관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은 언제 보아도 소박하고 신선해서 아름답다. 나의 일도 그 자연과 같이 소박하고 신선한 세계를 지닐 수 없을까. 그것은 어렵다. 안된다. 가령 그렇게 원한 대로 된다 하더라도 자연과 같이 언제 보아도 물리지 않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