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액체문명

액체문명
서울시립미술관 3.20-5.11

이 전시에서 가장 먼저 우리의 눈길을 잡아채는 작업은 ‘액체문명’이라는 전시 명명 자체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모더니티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키워드 ‘liquid’에서 큐레이터가 착안했다는 이 전시 콘셉트는 관람자들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으면서 머릿속을 호기심으로 가득 채운다. 액체문명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증을 안고 다가간 전시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한국과 중국 현대작품들의 다양한 면면들이 그 ‘액체성’에 대해 조금씩 감을 잡게 해준다.
중국 작가들의 작품은 대체로 직설적이다. 표면에서 읽히는 의미들. 그에 비해 한국 작가들의 작품 의미는 중층으로 결정되어 있거나 은유적이다. 이면 탐색을 요청한다. 이원호의 동냥그릇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껴야 할까. 한진수의 기계장치들의 그 기이함은 작품에 대한 이해 여부에 앞서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어두운 벽면을 동식물들의 빛나는 이미지들로 채워 우리의 눈을 잡아끄는 이창원의 작품은 멀리서 볼 때는 사뭇 아름답지만, 다가가 그 빛의 근원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그처럼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참담한 기사들로 우리의 마음을 묵직하게 한다.
단순하기 짝이 없었던 표면적 감상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꽃으로 중무장된 이용백의 탱크처럼 선명하게 말을 거는 작품도 있지만,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은 성조기 이미지가 구성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그 진의가 드러나는 한경우의 작품처럼 시간차를 두고 곱씹어야 한다. 작품들은 신형섭의 뿌리 형상들처럼 기묘하게 의미를 뻗어나가며 머릿속의 물음표를 지우기보다는 더해간다. 그러나 이 물음표야말로 액체성의 원동력이다.
그에 비하면 중국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들에 선명한 마침표를 찍어둔 듯 보인다. 물론 장샤오타오의 애니메이션처럼 시간을 들여 그 마침표를 찾아야 하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흐릿해진 이미지를 통해 현대인이 겪는 정체성 혼란의 문제를 드러낸 쉬융의 초상들, 바니타스나 바쿠스 등의 미술사 모티프들을 차용하고 변용하여 현대문명의 무상함을 지적하려는 먀오샤오춘의 회화와 영상작업들, 마구잡이로 유입된 서구문명에 압도된 우스꽝스러운 추종자들을 보여주는 왕칭쑹의 작품들에서 현대문명 비판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의식의 선명함이 작품의 매력을 앗아가는 것은 아니다. 전시장과 전시장 사이 공간이라는 절묘한 장소를 택한 쑹둥은 현대문명 속에서 사소하게 다루어지는 옛것들을 층층이 쌓고 그 위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장소특정성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실제 촬영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매우 위태로워 보이는 순간들을 얼려버린 리웨이의 거대한 사진들은 기묘한 희극성마저 자아내며 단숨에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가 주도한 <액체문명>전의 오프닝 퍼포먼스는 마치 시뮬라크르처럼 보이는 리웨이의 작품들에 깃들인 나름의 진정성을 체감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화룡정점의 구실을 했다.
<액체문명>전에 참여한 한・중 작가들의 작품들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액체성’은 우리가 일견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액체의 자유롭게 유동하는 성질이기보다는 도리어 솔리드에 저항하는 몸부림, 그 견고함을 녹여내려는 액체화의 열망 같다. 어떤 액체는 언제나 액체 상태를 유지하지만, 또 어떤 액체는 열을 잃으면 고체로 굳어지기도 한다. 현대문명은 바우만이 보았듯 액체성을 통해 형성되었으나 어느덧 고체로 굳어져버렸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번 전시 참여 작가들은 고체화된 현대문명 사이로 액체화의 물꼬를 트려 애쓰고 있다. 그들은 언제까지 그 뜨거움을 간직할 수 있을까. 그들의 물길이 계속 흘러가기를. 그 흔적이 현대문명의 지형도에 의미 있게 남겨지기를.

정수경・미학

쉬융  연작 피그먼트프린트 80×60cm(각) 2013

쉬융 <초상사진> 연작 피그먼트프린트 80×60cm(각)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