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최치원 : 풍류(風流)탄생

최치원 : 풍류(風流)탄생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7.30~9.14

이번 전시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21세기 인문정신의 재발견을 위해 기획한 첫 번째 전시다. 그렇게 10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최치원이 현재 위로 호출되었다. 최치원은 신라 당시 이른 나이에 중국에 유학해 이름을 떨치다가 국내에 귀국한 이후에는 지리산 가야산 등지를 주유산하하다가 빈 신발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이후 신발은 신선을 상징하게 되었다. 전시를 위해 시서화 장르를 뛰어넘어 활동하는  작가들이 초대되었고, 여기에 영상설치와 춤이 가세했다. 작가들은 중국 유학 당시 최치원의 행적을 찾아서, 그리고 귀국 이후 최치원이 주유산하한 지리산 가야산 등지를 답사하면서 최치원의 인문정신을 되불러냈고, 그렇게 되불러낸 인문정신을 저마다의 작업에 담아냈다.
그렇다면 왜 최치원인가. 최치원은 무(巫俗)를 바탕으로 유(儒敎), 불(佛敎), 도(道敎) 삼교(三敎)가 회통하는 우리 문화의 전형을 풍류     (風流)로 처음 정의내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전통적인 종교에 외래 종교를 흡수 통합한 예로 볼 수 있겠다. 보기에 따라선 무속으로 대변되는 종교, 유교로 대변되는 도덕과 윤리 내지는 정치철학, 불교로 대변되는 철학, 그리고 도교로 대변되는 예술의 결합을 시도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견지에 따라선 주관정신에 종교를, 객관정신에 예술을, 절대정신에 철학을 결부시켜 정신의 현상학을 전개한 헤겔과도 비교해볼 수 있겠다. 종교가 지배적인 시대적 배경에서 삶의 다양한 루트와 채널을 종교에 버무려내, 종교와 인문정신의 등치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겠고, 종교를 매개로 한 인문정신의 승화를 꾀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문제는 이런 통합의 정신을 풍류의 개념으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풍류란 바람처럼 흐른다는 말이고, 바람처럼 벽이 없고 경계가 없다는 말이고, 바람처럼 거침이 없다는 말이고, 바람처럼 정처가 없이 떠돈다는 말이다. 흐르는 것은 바람 말고도 또 있다. 물이 그렇다. 그래서 흔히 바람과 물은 자유정신과 예술혼의 귀감을 상징한다. 그 상징적 의미 혹은 보다 적극적으론 실천논리로 치자면 세속적인 지식이 갈라놓은 구별과 분별 너머로 흐르고, 그 경계와 벽 위로 범람하는 가벼운 정신이며 떠도는 정신, 부유하는 정신을 상징한다. 그 정신은 하릴없이 거니는 것을 의미하는 소요와 무목적적인, 그래서 그 자체가 이미 목적인 여기(餘技)를 하부개념으로서 아우른다. 특히 여기와 관련해선 전통적인 사대부 문인화가 바로 이 여기에 그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고, 서양의 논리로 치자면 아마추어 정신이며 딜레당트 개념이 여기에 해당한다.
무슨 말인가. 즉 풍류는 지금 여기서 무슨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가. 풍류의 정신은 한마디로 삶의 다양한 채널과 루트로부터 유래한 이질적인 지점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융합하고 통섭해 들이는 깔때기의 논리에 비유하고 정의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정처가 없이 흐른다는 점에서 보면 유목주의와도 통한다. 최치원의 풍류는 1000년 전에 이미 이런 통합과 융합 그리고 통섭의 논리를, 그리고 유목주의의 실천논리를 선취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 하나를 지적하자면, 이런 통섭이며 융합의 논리가 자칫 차이에 대한 억압의 논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차이를 인정하면서 속으로는 차이를 지우는, 말하자면 무늬만 차이를 양산하는 기제로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풍류와 더불어서 부는 바람은 이런 우려마저 휩쓸어가는 바람일 것이다.
이런 전시가, 말하자면 풍류의 정신을 현재에 계승한 전시가 서예박물관에서 열렸다. 과거로부터 출처를 얻어왔다는 점에서 예사롭고(혹은 박물관답고), 과거를 현재로 되불러온 것 아님 과거를 되불러와 현재를 조망한 것이란 점에서 예사롭지가 않다(혹은 미술관답다). 보통 박물관은 박물관으로서의 몫이 있고, 미술관은 미술관 나름의 됨됨이가 있다. 그러나 이건 선입관에 지나지 않는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박물관을 과거의 무덤으로 내몰고, 미술관을 현재에 붙박아 두는  생각이며 기획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미래마저 앞당겨 포개져 있는 것이 현재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다층적이고 다공적인 현실인식을 되새길 일이다.
나아가 박물관은 시간의 아우라를 고스란히 간직하는, 그런 시간의 집이다. 그 집에 현재가 탑재될 때, 어쩌면 미술관 전시가 간과하고 있을 어떤 미학적 공백을 채워줄지도 모를 일이며, 실제로 이번 전시는 그 일을 성공적으로 실현하고 있거나 최소한 예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에 전시는 시서화가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연유했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주는 한편, 풍류의 인문학적 정신을 통해 이미 1000년 전에 동시대적 담론의 중추를 담지하고 있었음을 설득력 있게 전해주고 있다.
고충환・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