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SHIN’S DESIGN ESSAY 10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 <프랑크푸르트 부엌> 1926~1827
2011년 MoMA에서 열린 <Counter Space: Design and the Modern Kitchen> 전시광경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성건축가 리호츠키가 선보인 프랑크푸르트 부엌은 붙박이 싱크대와 찬장을 갖춘 현대식 주방 시스템의 효시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Gift of Joan R. Brewster in memory of her husband George W. W. Brewster, by exchange and the Architecture & Design Purchase Fund

분 바르는 여자들이 학교 많이 오면 안 된다고?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20세기 초에 바우하우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학교였다.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는 그야말로 최전선의 모더니스트였다. 하지만 그런 진보 인사조차 당시 바우하우스에 여학생이 너무 많이 입학하는 것을 우려해 그 수를 제한하려고 했다. 바우하우스에 입학을 해도 여학생들은 전공이 편중되었다. 주로 직조와 도자기에 집중되었다. 금속이나 가구와 같은 전공에는 여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었다. 마리안느 브란트는 금속을 전공한 극도로 예외적인 여성이었다. 남성 중심의 금속공방에서 브란트는 차별을 받았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만 시켰다. 오늘날 바우하우스의 금속공방을 대표하는 사람은 바로 마리안느 브란트다. 그녀가 디자인한 찻주전자와 탁상용 조명, 재떨이는 마르셀 브로이어의 금속 파이프 의자들과 함께 바우하우스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 제품들은 당시 독일 산업체에서 생산돼 가난한 학교 바우하우스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로피우스가 제한하려고 했던 여학생에게서 바우하우스의 지속성이 보장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마리안느 브란트뿐만 아니라 초기 모더니즘 디자인의 역사에서 여성은 배제되거나 차별을 받았다. 프랑크푸르트 주방으로 현대적 시스템 키친의 원조를 탄생시킨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는 디자이너이기 전에 뛰어난 건축가였다. 그러나 남성 중심의 건축계는 논쟁적이고 정치적 신념이 강한 리호츠키의 건축적 능력을 폄하했다. 그녀는 자신이 단지 주방기기 디자이너로만 기억되는 것에 한이 맺힌 삶을 살아야 했다. 아이노 알토는 본인도 건축가였지만 남편인 알바 알토가 건축가로서 위대한 길을 갈 수 있도록 조력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스스로 건축에서 벗어나 가구와 인테리어 분야로 자신의 재능을 제한했다. 레이 임스는 남편 찰스 임스와 함께 모든 가구 디자인에 참여했다. 남편은 주로 공학적인 부분을 책임졌고, 레이는 미학적인 부분에서 더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1946년에 뉴욕 현대미술관의 초청 전시회가 열렸을 때 제목은 ‘찰스 임스의 새로운 가구’였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레이의 이름은 배제되었다가 지금은 모든 디자인이 찰스와 레이 임스의 이름으로 표기되고 있다.
초기 모던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의 위대한 성과 뒤에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일한 여성들이 있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는 마리온 마호니 그리핀이라는 출중한 직원이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LC 시리즈 의자들은 샬롯트 페리앙이 없었다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네덜란드 데스틸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자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슈뢰더 주택은 게리트 리트벨트가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주택의 혁신적인 개념은 이 집의 여주인인 트루스 슈뢰더로부터 나온 것이다. 리트벨트는 디자인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트루스 슈뢰더의 범상치 않은 디자인 능력을 알아보고 그 뒤로도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만약 이 여성들이 20세기 중반 이후에 태어났다면 자하 하디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세기에 기득권자인 남자들은 여성을 감정적이고 예민하고 변덕스럽고 수줍어하고 덜 솔직하기 때문에 사회적 활동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하고 노동의 영역에서 제외시켰다. (값싸고 반복적인 공장노동에서만 여성이 까다로운 남성을 대체할 자원으로 환영 받았다.) 여성은 부드럽고 순종적인 존재로서 가정을 지키고 남성을 위해 헌신하는 일로 그 역할이 조정당했다. 서구 사회에서 그런 고정관념을 깨는 데 10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고정관념이라는 사실은 남성들이 더 우월하게 한다는 모든 분야에서 수많은 여성이 똑같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기회를 주지 않았으므로 여성이 남성보다 재능과 능력이 떨어진다는 관념과 신화가 생긴 것이다. 여성이 핑크색을 좋아하고 부드럽고 조용하고 소극적이라는 건 교육과 미디어가 만들어낸 신화일 뿐이다.
박용성 전 중앙대 재단이사장이 2015년 대입 전형 과정에서 여학생보다 남학생을 더 뽑으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증언이 나왔다. “분 바르는 여학생들 잔뜩 오면 뭐하나”라는 그의 말에 이게 과연 21세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인가 귀가 의심스럽다. 그는 정말 남성이 일을 더 잘한다는 신화가 기회 균등의 상실에서 온 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한국은 이 남성우월주의 신화가 완전히 사라지려면 여전히 투쟁이 필요한 후진적인 사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