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Wien
고로古老파 화랑과 신세대 화랑이 공존하는 현대미술 그린하우스
박진아 미술사
지난 4, 5년 간 빈은 런던, 파리, 로마에 이어 세계인에게 인기 있는 관광도시로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영국 시사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0위’ 랭킹 최상위를 놓치지 않을 만큼 ‘삶의 질이 높은 도시’이다. 그 같은 정평에 걸맞게 빈 도심 핵심권의 부동산 가격은 부르는게 값이 됐을 만큼 천정부지로 뛰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내벽을 드러낸 채 방치되었던 역사주의풍 고건축물들은 오늘날 말끔히 복원되고 산뜻하게 도장돼 시민들과 관광객들을 반기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빈을 찾은 해외 관광객이나 문화 순례자는 음악회와 무대공연 극장은 즐겨 찾지만 화랑가를 찾는 일은 별로 없다. 화랑가라고 부를 만한 거리나 구역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일찍이 근대기 이전 합스부르크 황실 시절부터 빈은 고전음악과 무대예술의 중심도시인 반면, 시각미술 분야는 그에 비해 덜 주목받았던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최근 빈의 미술계는 그 어떤 문화영역보다 큰 순풍을 받고 앞으로 항해 중이다. 예컨대 2003년 발족한 디파처departure 예술후원에이전시를 비롯해, 2009년 창설돼 빈 시정부와 은행이 후원하고 디파처가 조직하는 연례 화랑계 페스티벌인 큐레이티드 바이 빈curate by_vienna, 빈 갤러리 주말Vienna Gallery Weekend, 빈 아트 위크Vienna Art Week, 빈페어 현대미술 박람회Viennafair 같은 행사들을 통해 빈 시는 시각미술 분야에 취약한 도시라는 과거 인식을 불식하고 앞선 현대미술 도시라는 인상을 널리 알리려는 노력에 한창이다. 그 결과 특히 1960~1970년 빈의 화랑들은 근현대 미술사조와 문화정책 변천과 더불어 외양적 변화를 거쳤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직후 빈에서 문을 연 최초의 아방가르드 화랑은 갤러리 넥스트 상크트 슈테판Galerie nächt St. Stephan이다. 이는 전설적인 화랑업자 오토 니렌슈타인이 개업한 노이에 갤러리(1923년)의 후신 격으로 오토 마우어Otto Mauer가 1954년에 설립했다. 빈 최초의 여성화랑주이자 근대 빈 화랑계의 대모인 로제마리에 슈바르츠벨더Rosemarie Schwarzwälder가 지금도 운영하고 있는데 이 화랑은 종전 직후 유럽 앵포르멜계 회화와 빈 행위주의 퍼포먼스에 주력한다.
빈 도심의 이른바 ‘제1구역 빈 화랑계’는 1970년대 초 소수의 선구적 화랑이 개업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도시 전체에 약 70군데가 운영 중이다. 1971년, 빈 화랑계의 여족장 우르술라 크린칭어가 크린칭어 화랑Galerie Krinzinger을 정부부처 건물들이 앞뒤로 들어차 있는 도심 제1구역 남서쪽과 빈 응용미술대학 사이 자일러슈테테Seilerstätte 거리 16번지 건물 2층에 차렸다. 역시 빈 화랑계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엘리자벳 & 클라우스 토만 화랑Galerie Elisabeth & Klaus Thoman(본점 인스브루크)은 같은 거리 7번지에, 그리타 인삼 화랑Galerie Grita Insam이 암 호프 거리에 둥지를 틀었고 이어서 1976년 마이어 카이너Meyer Kainer 화랑이 개업했다. 이 두 화랑 주변과 사이사이로 난 골목에 크로바트 갤러리Galerie Krobath, 갤러리 슈타이넥Galerie Steinek, 갤러리 메차닌Galerie Mezzanin, 갤러리 카림Galerie Charim, 갤러리 힐거Galerie Ernst Hilger, 갤러리 후베르트 빈터Galerie Hubert Winter(7구역으로 이전)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1998년, 자유 큐레이터 겸 기획자로 일하던 4인방이 기존 자일러슈테테 화랑판과 차별화하자는 뜻에서 의기투합해 새 화랑가 구축을 선언했다. 게오르크 카르글Galerie Georg Kargl, 크리스티네 쾨니히Galerie Christine König, 젠Galerie Gabriele Senn, 엥홀름Galerie Kirstin Engholm 네 곳 화랑이 개업하자 이 거리서 50년 넘게 장사해 온 안첸그루버 카페Café Anzengruber는 미술인, 작가, 지성인들이 모여 차와 대화를 나누는 예술가 아지트로 유명해졌다. 나슈마르크트 재래시장과 세세션Seccession 미술관 근처 한산한 제4구역에 허름하던 슐라이프뮐Schleifmühl 이 거리는 오늘날 레스토랑, 카페, 바, 부티크들이 들어선 ‘트렌디’한 거리가 되었다.
2000년 슐라이프뮐 거리의 탄생과 국제현대미술 붐이 본격화하자 제1구역 자일러슈테테 거리를 중심축으로 흩어져있던 기존 화랑들은 저마다 재편성 전략에 바빠졌다. 자일러슈테테파 화랑들은 슐라이프뮐 거리 새 화랑가로 대거 이주하기보다는 저마다 색다른 아이덴티티 전략을 취했는데, 그 전략은 대략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본래 화랑 자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른 구역에 프로젝트 전시 용도로 분관 공간(7구역)을 차리는 전략인데, 크린칭어 프로예테, 힐거넥스트와 힐거브롯쿤스트할레(10구역)가 그런 예다. 둘째는 본래 자일러슈테테 거리 인근 화랑 자리를 버리고 새 자리로 이동하되 원 화랑 위치와 슐라이프뮐 거리 중간의 절충 지점(1구역과 7구역 경계)인 에센바흐 거리로 이전한 전략으로 슈타이넥, 메차닌, 크로바트가 그런 예다. 셋째는 제1구역 선구화랑의 본산지로서 자일러슈테테의 브랜드를 활용해 자일러슈테테 인접 골목으로 이전한 경우로 그리타 인삼, 마리오 마우로너Mario Mauroner Contemporary(본점 잘츠부르크)나 에마뉘엘 라이르Emanuel Layr 화랑이 그러하다.
이렇게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맞춰 지난 10년 사이 이합집산을 거친 빈의 화랑가는 뉴욕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나 소호, 런던의 메이페어나 세인트 제임스 화랑구역 같은 집중된 영미식 화랑가에 비하면 느슨하고 비상업적인 인상을 준다. 종전 직후 화랑은 국립미술관, 컬렉터, 국가급 대표인사들의 문화적 동반자 겸 협력자 역할을 담당했고, 전시 기획 및 작가 후원에 정책을 반영하는 일이 이윤추구보다 급선무였다. 정부 차원에서 현대미술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게된 후 빈의 미술계는 많이 달라졌다. 지난 2010년 8월호 독일의 월간 《아트Art》는 “빈은 새로운 베를린?”이라는 제하에 오스트리아 수도의 미술계를 진단하는 기사를 실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연방정부와 빈 시정부는 2000년대 초엽부터 빈 미술계의 세계화와 역동성을 장려하기 위해 현대미술가 지원책을 펴왔다. 부동산 개발업자 겸 미술컬렉터인 마르틴 레니쿠스 같은 인물은 아예 정부부처나 일부 화랑과 협력해 미술인용 공동거주 아파트를 지어 저가에 제공하고 있고, 빈 쿤스트할레는 5년에 한 번씩 <빈에서 살며 작업하기Lebt und arbeitet in Wien전>(2000년 10월, 2005년 5월, 2010년 3월, 2015년 예정)을 기획해 국제 수준의 현대미술 창조 도시로서 빈을 점검해왔다. 과거 빈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국경이 인접한 동유럽권 국가에서 온 미술가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스위스, 러시아, 불가리아, 터키, 미국 출신 작가 수도 증가하는 추세다.
빈의 화랑계는 경쟁적인 실험주의 분위기로 미술가들을 압박하는 베를린과도, 그렇다 해서 냉철한 돈의 원리가 지배하는 상업지상주의적 뉴욕이나 런던과도 다르다. 빈의 미술시장은 소규모인데다가 오스트리아에서 거래되는 미술작품 수의 80%는 해외 기성 작가 작품들이 차지한다. 반면에 신진 작가들이 화랑의 높은 문턱을 넘어 전시 기회를 얻기란 여전히 쉽질 않다. 한시바삐 전시 경력을 쌓아야 할 젊은 미술가들은 클럽, 창고, 지하실 같은 버려진 공간서 게릴라 전시회나 아틀리에 오픈하우스를 연다. 그만큼 그들의 마음은 조급하다. 이 모두 아랑곳없이 예나 지금이나 빈 미술계와 화랑가는 언제나 그랬듯 느긋하고 한산하다.
빈은 유럽 근대기 프로이트 심리분석학의 고향이다. 미술 창조의 동기와 결과물로서의 작품은 억압된 인간의 무의식세계가 시각화돼 외부로 표출된 인간의 몸부림이며, 그 같은 미술은 하루아침에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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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마르틴 프리츠는 법학을 전공하고 빈에서 활동하고 있는 큐레이터, 문필가, 미술 컨설턴트다. 본래 1980년대에 빈의 무대공연예술 제작 활동을 시작했으나 시각미술 분야로 관심을 전향해 미술관 및 정부부처 미술기관과의 협력으로 다수의 공공 미술프로젝트 조직 운영을 담당했다. 뉴욕 MOMA P.S.1 재개관 운영부 디렉터, 2000년 독일 하노버 엑스포 아트 프로젝트, 2002년 마니페스타 유럽 현대미술 비엔날레, 빈 퀸스틀러하우스에서 미술과 미술제도권을 비평적으로 조망한 전시를 운영했다. 마니페스타 조직 상임위원회(2001~2007), 버외스터라이히 지역 페스티벌Festival of Regions 디렉터(2004~2009)를 역임했으며, 현재 빈 쿤스트할레 감사위원과 빈포헤WienWoche 이사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현대미술시장에 대한 이모저모를 분석비평하는 ‘causeries du lundi’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마르틴 프리츠Martin Fritz와의 인터뷰
“빈 미술계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운영”
전 세계 대표적인 미술 중심 도시의 화랑계와 비교할 때 미술 도시로서 빈의 특징이라면?
글로벌화라는 배경에서 볼 때 글로컬적 빈 화랑계는 이 도시의 지리적 배경과 연관이 깊다. 첫째,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시대를 거치면서 빈은 근대기 빈 문화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유대계 문화인사들을 잃는 막대한 문화적 상실을 겪었다. 둘째, 빈의 미술계는 시장주도적이기보다는 국가주도적이라는 구조적 특성을 지녔다. 국가 차원의 예술가 후원제도patronage는 일찍이 합스부르크 왕정 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으로 과거 음악과 무대예술 분야에 치중되었으나 20세기 종전 이후부터 오스트리아 정부는 시각미술 분야를 집중적으로 후원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1980~1990년에 빈에서는 뮤지움스쿼르티에MuseumsQuartier 같은 공공 종합 미술관 단지가 개설되어 지역적 차원에서 미술붐이 일기 시작해 오늘날 빈 미술에 대한 대외인지도가 향상되었다고 본다.
당신은 1980년대부터 줄곧 빈 화랑계와 미술계를 관찰해왔는데 20세기를 거쳐 문화의 글로벌화・세계화가 만연한 현재에 이르기까지 빈 화랑계의 특징이라면?
빈의 화랑계는 종전 직후 빈 제1구역에서 로제마리에 슈바르츠벨더의 갤러리 넥스트 상크트 슈테판을 초대 화랑으로 해 크린칭어, 마이어 카이너, 페터 파케시 같은 몇몇 선구적인 미술딜러가 주축이 돼 형성되었다. 특히 지난 10여 년 사이 제4구역 슐라이프뮐 거리가 생겼고 인근 구역에 여러 화랑이 들어섰다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 국제급 수준으로 자리잡은 빈 화랑은 15~20군데로 꼽는다. 제1구역에 선구적으로 개업한 설립자들이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고 그렇다보니 빈 화랑계의 중심 세력은 변함없이 제1구역에 집결되어 있다.
지난 몇 년 큐레이티드 바이 빈, 빈 갤러리 주말, 빈페어 등 오스트리아 연방정부와 빈 시정부가 유독 시각예술, 특히 현대미술을 국가적 차원에서 활발하게 후원하는 목적은? 21세기 국제관광업, 도시환경 개발사업 같은 경제적 의도도 있는가?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 정부가 문화예산을 할당하여 거행되는 미술행사들은 시민의 의식수준을 높인다는 교육적인 목적과 사회 공공문화 수준 개선이라는 공리적인 목적이 우선이다. 물론 리처드 플로리다식 창조도시론 선상에서 도시 미술을 통해 정체된 도시 일부 지역이나 거리를 활성화하려는 노력은 지난 몇 년간 제2구역(전통적으로 유대인 게토 구역이었다)과 최근 제10구역(전통적으로 공장이 많아서 육체노동자들과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구역)에서 시도된 바 있다.
최근 베를린 화랑계가 주춤하면서 빈을 새로운 현대미술 중심지로 보고 잠재력을 평가하기도 하는데?
베를린과 빈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하는 미술인은 일찍부터 많았다. 특히 여행이 쉽고 값싸진 요즘, 임대료가 싸고 박진감 있는 도시 환경에서 영감을 받아 베를린과 빈을 오가며 작업하는 미술인이 많다. 베를린은 최근 급속한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은 반면, 빈은 그 같은 무자비한 부동산 개발과 그로 인한 임대료 상승 현상이 덜하고 일반적인 생활환경이 안정적이다. 창조활동을 위해서 도시환경적 충돌과 자극적 영감도 필요하지만 안정성이 중요하다.
한국을 비롯해 최근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창조산업 및 창조경제론을 국가 및 도시 핵심정책으로 내세워 추진하고 있다. 빈의 경우는 어떠한가?
오스트리아 연방정부와 빈 시정부 차원 미술후원제의 65%는 여전히 합스부르크 황실부터 해 오던 전통적 국가주도식 후원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창조산업 분야 후원을 위해 2003년 발족한 빈 시립 디파처 에이전시는 지난 몇 년간 지속해온 부터 미술과 디자인 분야 비영리 단체 후원을 그만두고 그 대신 우수한 예술적 창조력과 상업적 잠재력을 겸비한 미술가 혹은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전략으로 방향선회했다. 최근 국제 미술시장 붐에 힘입어 빈 화랑계도 국가 후원을 받는다. 그 결과, 빈의 화랑계 현황은 ‘강한 제도권 대 미약한 시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다수 인구가 미술 구매자가 아니다보니 빈페어 현대미술박람회의 경우 이 행사만의 독특한 틈새시장을 개척했으나 출품작들은 여전히 저가대가 주를 이룬다.
미래 빈의 화랑계, 더 나아가 빈과 국제 미술시장에 대한 당신의 전망은?
고가와 저가 미술의 가격 차이가 한층 더 벌어질 것이라고 본다. 현재 국제 현대미술시장 전개 양상을 보건대 현대미술의 상품화에 따라 고급화/고가화된 인기 미술품과 이른바 예술지향적/콘셉트 및 지성지향적 미술품은 초저 가격대를 형성하며 극과극 가격대를 이룰 것이라 본다. 물론 오늘날 저가 현대미술품이 훗날 값진 미술품으로 인정받아 초고가 대열로 지위 전환할 수 있겠으나 미래 스타를 미리 점치기는 매우 어렵다. 미술품 가격대의 양극화 현상은 화랑계에 던져진 결정적인 도전거리가 될 것이다.
빈=박진아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