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예술가의 권리: 표준계약서와 아티스트 피
“예술은 이상주의자가 되어 세상을 바꾸는 꿈을 꿀 수 있는 곳이자 상업주의와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 예술하는 사람치고 예술로 생계를 꾸리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술평론가이자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배우자인 바버라 로즈(Barbara Rose)의 회고다. 그렇듯 예술은 돈벌이에는 관심 없는 낭만적 이상주의자들의 피난처 같은 곳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이 소명 의식을 가지고 예술 활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강요’가 아닌 ‘자발적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자발적 선택이나 예술의 특성이 예술가 나아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유예해도 된다는 의미는 될 수 없다. 예술가라면 경제적 보상이나 상업성에 무관심해야 한다며 순수성과 도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정당한 대가와 권리를 인정하는 시스템의 부재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향한 의지를 꺾을 수 있다.
미술품의 시장 가치나 경매가 기록 경신이 미디어의 헤드라인으로 오르내리고 예술의 가치와 예술품의 거래 가치가 혼재하는 시기, 예술은 산업이나 상업의 영역이어서는 안 된다거나 예술가는 창작 활동에 따른 감정적 보상과 사회적 존경심으로 먹고산다는 말은 공허하다. ‘2012 문화예술인 실태조사’(문화체육관광부, 2013)에 따르면 미술 창작 활동을 통한 월평균 수입이 전혀 없다고 응답한 미술인은 약 33%, 경제적 보상에 대한 만족도는 1.29(5점 만점)로 매우 낮았다. 불공정한 보상과 경제적 불안정성, 저작자로서의 권리 침해 등이 예술창작 활동을 방해한다는 증거는 많다. 예술 창작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권위마저 보장받지 못한다면 더욱 문제다.
예술생태계 개선을 위해선 예술가 복지에 앞서 적법하고 ‘정당한’ 권리 보장과 ‘정당한’ 보상체계 구축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나서서 계약관행에 대한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시각예술분야 표준계약서를 개발·보급하고, 미술인보수지급제도(artist fee) 연구를 진행한 사실은 긍정적인 일이다. 아티스트 피는 전시라는 형태로 공공의 장 안에서 작품 공표와 전시 참여에 대해 지급하는 보수의 성격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예술창작도 최종 결과물뿐만 아니라 참여와 활동에 대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 예술가의 창조적이고 지적인 노력과 노하우를 사회문화적 기여 또는 공공재적 성격으로만 치부해 희생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예술가의 정당한 보상 지급 문제는 공정한 계약 체결과도 직결된다. 계약문화의 전통이 부재한 한국 사회에서 특히 예술계의 경우, 구두 형태의 간단한 합의 또는 동의서 수준의 일방적 계약서 사용이 관행이 됐다. 내용적으로도 합리적이고 정당한 수준을 보장받지 못하거나 불공정 계약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된 데는 낮은 권리 의식과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예술가들 책임이 있다. 불공정 계약문화는 궁극적으로 미술계 전체의 발전을 저해하고 예술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저해한다. 예술가 역시 자유계약 원칙에 따라 자유의사에 의한 거래와 경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각예술분야 표준계약서 개발은 정부가 나서서 예술계에 건전하고 공정한 계약 및 거래 관행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시도이다. 표준계약서는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한다. 특정분야 또는 직군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계약 내용에 대한 표준 양식이자 불공정한 계약을 예방하는 준거로서의 기준을 제시한다. 시각예술분야 표준계약서는 저작재산권, 저작인격권, 정보요구권 등을 포함한 저작자로서 당연한 권리 주장이 어려운 예술가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계약 불이행이나 운송 및 보관 시 미술품의 훼손이나 멸실 등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조항들을 담았다.
물론 표준계약서는 거래의 모델이 되는 서식이자 표준화된 내용을 모아놓은 문서에 불과하므로 그대로 적용해야 하는 법적구속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다만, 부당하게 계약기준을 하향하거나 삭제하는 것은 불공정 금지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표준계약서를 토대로 하되 계약당사자의 여건, 계약의 목적 및 성격, 세부조건 등에 따라 계약당사자 간 협의를 통해 계약서를 수정·변형하여 활용해야 한다. 계약서의 조건과 내용에 대한 완벽한 이해 없이 경솔하게 서명을 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표준계약서든 미술인보수제도든 예술가와 예술계종사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동반돼야 한다는 점이다.
캐슬린 김 법무법인 중정 변호사, 홍익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