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서울미술관, 그 외침과 속삭임》사전 세미나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1층 2.18 14:00~16:30
노재민 기자
Sight & Issue

왼쪽 위 1981년 서울미술관 전경
아래 서울미술관 개관전을 열며 (왼쪽부터) 강명희, 김윤수, 임세택, 권순철
오른쪽 서울미술관 전시《프랑스의 신구상회화》(1982) 도록
제공: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서울미술관을 돌아보다
서울미술관은 ‘현실동인’(1969)의 창립회원 임세택이 1981년 서울 종로구 구기동 88-2에 설립한 미술관이다. 개관 당시 멕시코대사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화제를 모았으며, 개관 이래 60여 회의 전시와 강연회, 공연 등 문화행사를 열며 당대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미술문화를 선도했다고 평가받았다. 서울미술관은 유럽의 다다와 초현실주의, 프랑스 신구상회화 등 해외 현대미술을 국내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앞장섰다. 특히 마르셀 뒤샹, 만 레이, 메레트 오펜하임, 로베르토 마타 등 유럽 주요 작가들의 전시를 국내 최초로 개최하며 국제적 미술 담론을 한국에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더불어 신학철, 임옥상, 권순철, 민정기 등 사회참여적 경향이 강한 민중미술 작가들의 개인전을 기획하여 민중미술의 제도화와 정착을 촉진했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재정난이 심화되었고, 국내외 문화 예술인 100여 명이 구명운동을 벌였음에도 서울미술관은 2001년 문을 닫았다. 이후 구기동에 위치했던 미술관 건물은 2023년경 철거되었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지난 2월 18일, 서울미술관 회고 전시《서울미술관, 그 외침과 속삭임》(3.7~5.2)의 사전 세미나를 개최했다. 사전 세미나에는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미술관에서 기획실장으로 근무했던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가 발표를 시작했다. 그 다음 기혜경 홍익대 교수와 김종길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팀장이《문제작가전》(1981~1988)과 《프랑스의 신구상회화전》(1982)1에 대해 발표하고, 뒤이어 최열 미술사가, 김영호 중앙대 명예교수, 최태만 국민대 교수가 패널로 참여한 종합 토론이 진행됐다.
1. 심광현 ‘서울미술관을 회고하다: 1985-1993’
1980년 광주항쟁 이후 한국 사회에는 반미 반제국주의 정서가 확산되었고, 미국 중심의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회의도 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미술관은 유럽 현대미술의 비판적이고 개방적인 특성을 국내에 유입하며 대안을 선보였다. 심광현 교수는 1985년 이후 마타, 코발스키, 마르셀 뒤샹, 만 레이, 질 아이요 등의 개인전과 임세택·강명희 작가의 퐁피두센터 전시(1986)는 서울미술관의 트랜스내셔널한 (초국가적) 역할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심 교수는 당시 서울미술관이 미국식 모더니즘이 현대미술의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예술이 민중의 삶과 현실 문제를 자유롭게 다루는 매체로 기능하게 했음을 언급했다. 이는 민중미술운동과도 긴밀히 연결됐다. 또한 김민기와 함께한 ‘에고이스트 콘서트’와 임세택·강명희 전시의 부대행사 ‘오페라마(오페라+파노라마)’ 등은 예술·과학·철학을 아우르는 복합문화 행사의 시도로, 서울미술관이 복잡계적이고 통섭적인 활력을 지닌 공간이었음을 보여줬다며, 피요트르 코발스키와의 협업도 그러한 지향을 구체화한 사례로 꼽았다.
발표자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미술 운동의 현장성이 두드러지면서 서울미술관의 매개적 역할은 다소 감소했다고 술회했다. 그에 따르면, 1993년 이후 민중미술운동이 퇴조하고, 미국식 신표현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국내 미술계에 확산하면서 비판적 유럽미술에 대한 관심 역시 줄어들고, 서울미술관의 트랜스크리틱한 역할도 점차 약화되었다. 심광현은 이를 “트랜스크리틱 사이-공간의 역동성이 소멸하던 시기”라고 회고했다.
2. 기혜경 ‘《문제작가전》과 형상미술’
기혜경 교수는 서울미술관의 《문제작가전》을 중심으로 1980년대 형상미술의 흐름을 조망했다. 《문제작가전》은 국전이 민간에 이양되며 작가 등용문의 기능이 축소된 가운데 신진작가 발굴과 비평의 장을 제공한 대표적인 전시다. 40세 이하 작가를 학력과 지명도가 아닌 작업 성과에 따라 선정하고, 비평가 추천과 책임비평 제도를 도입해 비평의 권위를 강화하고 논점의 다양화를 꾀했다.
발제자는 《문제작가전》이 모더니즘 중심의 미술계에서 형상미술과 민중미술의 플랫폼으로 기능했으며, 비평가와 작가 모두에게 권위 있는 플랫폼으로 작동했음을 짚었다. 아울러 이후 《동향과 전망전》을 통해 큐레이터와 주제기획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진단했다. 또한 서울미술관이 전시와 연계한 프로그램 및 문화 행사를 통해 미술관의 지향점과 정체성을 전시 및 관련 활동으로 풀어내는 복합문화기간의 선례를 제시했다고 말했다.
기 교수는 현재 1980년대의 복합적인 흐름이 민중미술로 단일하게 인식되고 있는 점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하며, 80년대 미술의 다층적 흐름을 재조명하는 계기2가 마련되기를 기대했다.
왼쪽 서울미술관 전시《81문제작가 작품전》(1982) 도록
오른쪽 ‘서울미술관 회고 세미나’ 발표자 및 패널 단체 사진.
왼쪽부터 김종길, 기혜경, 심광현, 김정업(고 김윤수 부인), 김달진, 최태만, 김영호, 최열
제공: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3. 김종길 ‘서울미술관 전시: 《프랑스의 신구상회화전》 중심으로’
김종길 학예연구팀장은 1982년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프랑스의 신구상회화전》을 중심으로 발제를 구성했다. 이 전시는 프랑스 외무성과 주한 프랑스대사관, 그리고 알랭 주프루아3가 조직한 전시로, 1950~1960년대 앵포르멜 이후 프랑스 회화의 전환을 보여주는 주요 작가 25인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김 학예연구팀장은 1970년대 후반 한국 미술이 단색조 화풍의 주류에서 형상 회화로 전환되던 시기에 《프랑스의 신구상회화전》이 당시 청년 작가들에게 새로운 회화에 대한 욕망을 촉발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제라르 프로망제, 자크 모노리, 에로 등의 작품은 민중의 삶과 현실을 강하게 드러내며, 광주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맞물려 신구상회화가 현실 참여적 성격을 강조한 점에 주목했다.
그는 또한 이 전시가 임술년과 두렁 등 민중미술 그룹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의 신구상회화전》은 단순한 유럽 회화 전파를 넘어 ‘삶의 진실’을 향한 한국 회화의 실천적 전환점을 제안한 사건이었다고 평했다.
이번 전시 사전 세미나는 서울미술관의 전시와 활동을 통해 1980~1990년대 한국미술의 다층적 흐름과 국제적 연계를 재조명하는 자리였다. 민중미술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형상미술과 트랜스내셔널 담론이 교차했던 서울미술관의 역사적 의미를 재해석하며, 동시대 미술관의 역할과 과제를 다시 묻는 계기가 되었다.4 이번 사전 세미나는 50여 명이 참여하여 성황리에 종료됐다. 전시 종료 후 서울미술관에 관한 기초 연구자료는 온라인에 무료로 배포될 예정이다.
1 기혜경은 이날 두 전시에 대해 자타가 공인하는 서울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전시라고 밝혔다
2 이날 김종길은 후속 발표에서 “민족·민중미술론이라는 통일적 개념이 정착되기 이전, 초기부터 중기로 넘어가는 시기까지 각각의 소집단마다 서로 다른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3 심광현은 이날 발표에서 파리 화단에 임세택, 강명희를 발굴 소개하고 이후 유럽미술과 한국미술을 매개했던 알랭 주프루아의 역할을 설명했다. 알랭 주프루아는 프랑스 철학자들, 초현실주의자 로베르토 마타, 신구상회화 화가들, 크리스토와 코발스키 등 확장된 조각 작가들과의 “스케일프리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4 기혜경은 서울미술관이 1981년에 개관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당시는 미술관과 갤러리라는 용어가 혼용되어 사용되던 시절이었고, 국립현대미술관은 전문 학예사 제도가 도입되기 전이라 대관전 위주였으며, 행정직이 관장을 했었다. 그는 서울미술관이 당시 척박했던 한국미술의 환경에서 선진적인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뮤지올로지적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하는 지점들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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