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 그를 주목하는 이유

변종필·기혜경·안소연·유지원

2월 특집기사 ①

월간미술은 ‘월간미술대상’ 작가 부문 수상자의 작업 세계를 조망하는 특집을 진행해 왔다. 「성능경의 예술 행각_성능경 되기와 망친 예술론」(2024), 「최우람의 메카니컬 오디세이」(2025)에 이어 2026년 은 작가 김범이다.

“1990년대 한국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작가”라는 평가는 과언이 아니다. 김범은 동시대 미술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날카로운 비평적 시선을 작품에 담아 왔다. 회화, 조각, 영상, 아티스트 북 등 매체를 뛰어넘어 인간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의 질서와 규범의 부조리함과 경계를 건드려왔다. 한 작가를 ‘안다’고 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일까? 혹은 한 작가의 작업 세계 를 ‘전달’한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이번 특집은 김범의 작업 세계를 탐험하기 위한 준비운동으로, 그의 작업의 결을 느껴보고자 하는 현대미술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다. 월간미술은 21세기 미술 언어를 적극적으로 수용 및 실천하여 동시대성을 획득해 온 김범의 작품 세계를 독자에게 소개할 방법으로 ‘인지 지도(cognitive map)’를 제시한다. ‘당신은 보아야만 믿는가’라는 그의 말처럼 김범은 당신의 인식 체계의 경계를 두드리며 균열을 비집고 침투하여 감각을 재편하도록 도울 것이다.

기획·진행 강재영 기자


〈서 있는 개 #2〉캔버스에 실 33×66cm 1994
이미지 제공: 작가


김범, 그를 주목하는 이유

김범의 작업은 하나의 키워드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의 작품을 독자 개개인의 시선에서 차분히 감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이미지가 품은 의미는 관람객이 이 구조를 어떻게 작동시키고 수용하는지에 달려있다. 마치 수없이 많은 겹으로 이루어진 한지의 결을 손가락으로 찾는 것 처럼, 김범의 작업과 텍스트는 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또 다른 새로운 결을 드러낸다. 월간미술대상 심의위원, 그리고 그와 전시를 꾸렸던 큐레이터의 언어로 구성된 이번 꼭지는 김범의 작업 세계로 향하는 첫 번째 이정표다.

현실을 자각하는 시선의 중요성
변종필 전 제주현대미술관장 제21회 월간미술대상 심의위원

김범은 수십 년간 회화, 오브제, 설치, 영상 등을 넘나들며 제도와 규범, 고정관념을 비판적으로 해독하는 독자적 조형 언어를 구축해 왔다. 그는 화려한 수사나 과잉된 장치 대신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최대한의 사유를 이끌어내는 절제된 미학을 견지하며, 인간의 인지 구조와 사회 시스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김범이 보여준 무심한 듯 날카로운 유머와 개념, 시각적 배반을 유도 하는 그만의 조형 어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담론을 생산하고 있다. 부조리가 극심하고, 진실과 거짓, 가짜와 진짜의 경계가 모호한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그의 작품은 ‘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틈을 드러내며, 인식의 전복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현실을 자각하는 시선의 중요성을 다시금 환기 시킨다.

심사위원들은 중견 작가로서 이룬 그간의 성취뿐 아니라, 동시대적 발화력을 끊임없이 갱신해 온 김범의 예술적 태도와 그 지속적인 확장 가능 성에 주목하여, 일치된 의견으로 월간미술 대상 최종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특유의 해학과 비판성을 통해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을 다시 보게 하는
기혜경 홍익대 교수 제21회 월간미술대상 심의위원

세계가 인간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믿음을 의심의 눈초 리로 바라보는 김범은 인간/비인간, 주체/객체와 같은 구분법 이 교육, 제도, 언어, 규범 등을 통해 학습된 결과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이유로 김범은 동시대의 문제를 직접 재현하기보다는,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고 분류하는 방식, 즉, 우리의 인식체계가 구조화되는 과정에 문제를 제기 한다. 이 지점에서 김범은 인간이 설정한 기존의 문법, 위계, 구조, 관습적 사고를 상상력과 위트, 해학을 가미하여 교란한다. 또한, 그는 변화의 과정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존재들 간의 관계가고정된 것이 아닌 변형 가능하고 재배치 가능한 것임을 드러낸다. 영상, 설치, 드로잉 등을 활용 하여 작업하는 작가는 시방서, 매뉴얼, 강의 형식, 분류표처럼 읽기나 참여하기를 전제한 요소를 자주 활용하는데, 이를 통해 김범은 “보는 예술”을 “생각하는 예술”로 전환하며 한국 개념미술의 중요한 지점을 형성해 왔다.

재현의 지평을 새로이 연 비범한 통찰과 실천
안소연 아뜰리에 에르메스 아티스틱 디렉터 제21회 월간미술대상 심의위원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의 간극에 대한 김범의 비범한 통찰은 미술 영역의 강력한 외피인 시각성의 빗장을 무장해제시킨다. 보이는 것의 부조 리와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그의 작업들은 미술이 도달하고자 하는 현실 재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현실과 더 긴밀하게 관계 맺는다. 관객들에게 시각성에 의존하지 않고도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제안 함으로써 그의 작업은 삶을 반추하는 일종의 삶의 철학이 되기도 한다. 작가만의 고유한 사유 방식이나 자기복제와는 거리가 먼 전례 없는 예술 실천은 언제나 그의 다음 작업을 기대하게 한다.

신중한 조형으로 읽히는 물성을 창안하는
유지원 독립큐레이터, YPC SPACE 공동 운영자 | 리움미술관 《김범: 바위가 되는 법》 기획

여러 매체를 가로지르는 김범의 작품 속 주인공은 대개 망치, 빗자루, 성냥, 주전자 등 평범한 사물이나 잘 안다고 믿는 동물들, 막대 인간에 가깝게 도식화된 익명 의 인물이다. ‘도구는 쓰이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변모한다’와 같 은 자명한 명제는 쉬이 소모되는 재료로 재배치되고, 소박한 표현법은 보는 이의 경계를 늦춰 눈앞에 놓인 것을 곧이곧대로 따르도록 한다. 이렇게 수월하게 진입한 그의 작업 세계는 보편적으로 적용할 교훈도, 구체적으로 추적할 입장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전시 장을 나올 때 주어진 환경이 미묘하게 뒤틀려 보이 고 다가오는 말과 글의 모순이 도드라져 보이는, 그리하여 씰룩씰룩 실소가 배어 나오는, 다소 각성 된 상태가 될 따름이다.

김범의 작품을 특징짓는 표현의 소박함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사유의 정밀함 간의 낙차로 인해 작업의 핵심이 관념에 있다고 해석되거나 한국식 개념미술의 선두로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가 자아내는 정밀함은 다분히 물질적이다. ‘어떤’ 빗자루가 아닌 수 시간 공을 들인 ‘그’ 빗자루, 제작 당시의 환경을 반영하는 얼룩이 보존되고 특정 한 방식으로 그림자가 지도록 설치된 캔버스, 그리고 관객의 머무름을 헤아려 배치한 쭈글쭈글한 종이가 우리를 예리한 상태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중한 조형이 발휘하는 영민함은 제작 당시의 시대상을 증류해 내는 한편 포용력을 발휘한다. 1990년대 수입되어 열풍을 일으킨 밥 로스의 회화 튜토 리얼을 상기시키는 〈“노란 비명” 그리기〉(2012)가 유튜브를 통해 흔히 튜토리얼 을 접하고 활용하는 현재 젊은 대중 관객 사이에 반향을 일으킨 것이 일례다. 나아가 근대 이후 아시아의 정체성과 국제 정세를 사유하며 인간 독자에게 나무, 표범, 에어컨 등이 되는 법을 일러주는 『변신술』(1996)은 탈고정적인 존재론과 변형의 사유를 촉구하는 현대 철학자 캐서린 말라부의 가소성(plasticity) 개념과 접속할 여지를 주고, ‘교육된 사물들’ 연작(2010)을 비롯한 여러 작품은 당시 ‘애니미즘’ 으로 설명되었지만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을 탈피하고자 한 신유물론적 생기론과 긴밀하게 연결된다.〈무제(뉴스)〉(2002)는 대중매체가 발휘하는 독단적인 영향력을 꼬집는 작품이지만, 지상파 뉴스의 주도권이 와해되고 소셜미디어의 에코 체임버 효과가 시대적 문제로 부상한 오늘날 미디어 초상으로도 작동한다. 김범의 작품은 물질세계에 기반하기를 고집하기에 시대적 감각을 경유하면서도 특정한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은 각기 다른 맥락에 기꺼이 이식 되며, 재치를 잃지 않은 채, 읽히고 또다시 읽힌다.


2023년 싱가포르 STPI 레지던시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김범
제공: STPI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과 이로 구성된 세계의 면면을 회화, 드로잉, 조각, 영상, 출판물 등 매체에 구애받지 않고 조형 언어로 구현한다. 수공예적 접근과 서툰 표현 방식, 가정과 지시, 언어 유희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세계의 부조리함, 불합리성을 말한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바위가 되는 법》(리움미술관, 2023), 《콩고에서 온 신문지로 만들어진 컵 속에 담긴 갠지스 강물》(덴마크 쿤스트할오르후스, 2019), 《무작위 인생》(싱가포르 STPI, 2017) 등이 있다. 또한 타이페이비엔 날레 2023, 제12회 샤르자비엔날레(2015), 제9회 광주비엔날레(2012) 등에 참여했다. 김범의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 홍콩 M+, 클리브랜드미술관, 휴스턴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등에 소장되었다. 현재 싱가포르 STPI 레지던시에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곳에서 2027 년 열릴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2026년 2월호 (VOL.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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