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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민 기자

여성 글쓰기를 조명하는 일이 더 이상 낯설거나 새로운 기획은 아닐지 모른다. 그럼에도 3월 8일, 여성의 날을 계기로 각기 다른 자리에서 다른 형식으로 여성 글쓰기를 수행해 온 사례들을 소개한다. 철학과 소설, 집단 창작과 시론에 이르기까지, 이 책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흔들리고 확장되는 여성적 사유의 궤적을 보여준다.

『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강선형 김분선 김애령 김은주 노성숙 양창아 이선현 이솔 지음 봄날의박씨 · 256쪽 · 2026
18500원

『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는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여성철학자 8인의 글을 통해 철학과 삶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철학을 추상적 이론이 아닌 삶의 언어로 번역해낸다는 점에서, 이 책은 입문서이자 동시대적 사유의 기록이다.

이 책의 기획은 “왜 우리는 이렇게 많은 한국 여성철학자들의 존재를 거의 알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철학자의 이름이 호명되는 방식에는 특정한 역사와 제도의 맥락이 작동해 왔으며, 그 결과 우리가 떠올리는 철학자의 얼굴은 대개 남성으로 고정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은 기존의 철학적 지형을 비판적으로 되묻는 하나의 실천으로 제시된다.

책은 두 층위로 구성된다. 하나는 철학과 만난 개인적 경험을 담은 에세이이고, 다른 하나는 전공한 철학자의 이론을 풀어낸 글이다. 이 두 층위는 서로를 보완하며, 철학자의 사유가 구체적인 삶의 맥락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연대의 현장, 공부와 토론, 우연과 실패, 사랑과 상처 등 다양한 경험은 사유의 출발점으로 작동한다.

한나 아렌트, 폴 리쾨르, 테오도어 아도르노, 장 폴 사르트르,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주디스 버틀러, 로지 브라이도티 등 현대철학자들의 사유는 각 필자의 문제의식 속에서 다시 읽힌다. 이론은 개괄적으로 정리되기보다 현재의 삶과 맞닿는 지점에서 선택되고 강조되며, 이를 통해 철학은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지금을 성찰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한다.

『에프 (f.)』
유타 쾨터 지음 · 제니조 옮김 미디어버스 · 84쪽 · 2025
20000원

『리나 스폴링스』
버나뎃 코퍼레이션 지음 김무영 김여명 조은정 한지형 황재민 옮김 미디어버스 · 336쪽 · 2025
20000원

‘여성회화 글쓰기 총서’는 여성, 회화, 글쓰기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번역 프로젝트다. 여성이자 이주자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회화 작업을 이어온 제니조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시리즈는, 제1권으로 1958년생 미술가이자 작가, 시인, 퍼포머인 유타 쾨터(Jutta Koether)의 소설 『에프 (f.)』를 소개한다. 『에프 (f.)』는 회화를 회화로 만드는 것,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것, 여성을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텍스트다. 벨벳, 꽃, 산호 목걸이, 오렌지, 돈, 립스틱 등의 모티프를 경유하며 전개되는 이 글은 자전적 서사와 허구가 뒤섞인 채, 이해보다는 오인의 가능성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벤웨이 부인’이라는 이인화된 화자의 개입으로 작가의 자리는 단일한 중심을 잃고, 글쓰기는 연결과 단절, 미끄러짐을 반복하며 탈중심화된다. 이 책은 회화와 퍼포먼스를 넘나드는 쾨터의 실천에 접근하는 하나의 통로이자, 예술을 만드는 것과 예술이 만들어낸 것이 단선적인 목적지를 향하지 않고 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탈구축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서지적 실험으로 읽힌다.

‘여성회화 글쓰기 총서’ 제2권 『리나 스폴링스』는 9·11 이후 뉴욕을 배경으로, 집단적이고 익명적인 글쓰기를 통해 예술계와 도시, 정체성과 자본의 풍경을 교란하는 소설이다. 미술관 경비원이던 리나 스폴링스가 예기치 않게 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되는 서사를 따르지만, 여기서 리나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작가명’이자 ‘상품명’이며, 파편화된 자아의 기호로 기능한다. 특히 리나는 고정된 젠더와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 수행적인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를 통해 젠더 자체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며, 이러한 문제의식은 포스트구조주의적 페미니즘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버나뎃 코퍼레이션은 고정된 멤버나 폐쇄적 구조 없이 집단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며 창작의 고유성과 소유 개념을 의심해 왔고, 『리나 스폴링스』는 이러한 실천이 집약된 프로젝트다. 개인 작가 중심의 예술 시스템, 브랜드와 저자, 예술가와 상품의 경계가 뒤섞이는 세계를 이 소설은 급진적이면서도 유령 같은 방식으로 비춘다.

『제4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위수정 김혜진 성혜령 이민진 정이현 함윤이 지음 다산책방 · 372쪽 · 2026
18000원

1977년 제정 이후 한국 현대문학의 흐름을 대표해 온 이상문학상이 49년 역사상 처음으로 수상자 전원을 여성 작가로 선정하며 주목을 받았다.『제4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담아낸 책으로, 대상 수상작과 우수상 수상작을 함께 수록해 동시대 소설의 감각과 문제의식을 한 권에 압축하며, 현재 한국 문학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대상 수상작 위수정의 「눈과 돌멩이」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 그리고 애도와 이별의 감각을 설경 속 이미지로 풀어낸 작품이다. 눈과 돌멩이가 겹쳐지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흔들고, 독자를 서사의 내부로 끌어들인다. 이 작품을 중심으로 수록된 수상 소감, 문학적 자서전, 자선 대표작, 작가와의 대담, 작품론은 작가의 세계를 다층적으로 조망하게 하며, 한 편의 소설을 보다 입체적으로 읽도록 돕는다.

우수상 수상작들 역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동시대의 감각을 포착한다. 김혜진의 「관종들」, 성혜령의 「대부호」, 이민진의 「겨울의 윤리」, 정이현의「실패담 크루」, 함윤이의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와 작품 뒤에 이어지는 작가와 평론가의 대담은 창작의 배경과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작품의 또 다른 층위를 형성한다. 여기에 심사평과 심사 경위가 더해지며, 한 해 동안 발표된 소설들 가운데 어떤 기준과 논의를 거쳐 수상작이 선정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제4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단순한 수상작 모음집을 넘어, 동시대 한국소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질문들을 집약한 기록이다. 특히 수상자 전원이 여성 작가로 구성된 이번 결과는 최근 두드러지는 여성 작가 약진 흐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문학장의 구성과 독서 환경의 변화를 함께 보여준다. 전통성과 권위를 지닌 이상문학상에서 이러한 변화가 처음으로 가시화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수상은 앞으로 한국문학의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하나의 징후로 읽힌다.

『공중의 복화술』
김혜순 지음 문학과지성사 · 330쪽 · 2026
18000원

『공중의 복화술』은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독일 국제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하며 아시아권 시인 가운데 노벨문학상 수상에 가장 근접한 시인으로 거론되는 김혜순의 네 번째 시론집이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2002), 『여성, 시하다』(2017), 산문집 『여자짐승 아시아하기』(2019)에 이어 펴낸 이 책에는 2020년 가을부터 약 2년간 문예지 『악스트Axt』에 연재한 산문 13편과, 2022년부터 2025년 사이 국내외 강연 및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한 산문 6편이 함께 묶였다. 오랜 시간 사유해 온 시와 글쓰기의 조건을 집약한 이 책은 복화술, 목소리, 슬픔, 침묵, 불안, 죽음, 다시쓰기, 딸꾹질, 반복, 미장아빔, 방언, 동물, 고백, 고통, 덩어리, 사이, 시간, 사막, 받아쓰기 등 열아홉 개의 키워드를 축으로 시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집요하게 탐문한다. 시를 하나의 형식이나 장르가 아니라 언어 이전의 감각과 신체적 경험에서 도래하는 사건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이 책은 김혜순 시 세계의 이론적 토대를 밀도 있게 드러낸다.

책에서 시는 모국어의 공백과 침묵을 통과하며 발생한다. 특히 베를린 시 연설의 키노트였던 「Tongueless Mother Tongue」을 비롯한 글들은,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목소리와 그것이 시로 번역되는 과정을 사유한다. 여기서 복화술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타자의 목소리와 얽히며 서로를 생성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시는 말해지는 것이기보다,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흔들리며 드러나는 순간에 가까워진다.

책은 특정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보다, 시인이 통과해 온 경험과 사유의 경로를 따라 구성된다. 팬데믹의 시간, 가족의 죽음, 신체적 고통과 불안, 글쓰기의 위기와 반복 속에서 시는 끊임없이 다시 시작된다. 이러한 경험들은 ‘죽음의 시학’, ‘고백과 다시쓰기’, ‘동물성과 타자성’ 등의 문제로확장되며, 시가 개인의 내면을 넘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드러낸다. 김혜순의 시학에서 문학은 재현이나 위로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실패와 불가능성, 그리고 언어의 균열을 끌어안는 행위에 가깝다. 복화술이라는 개념이 가리키듯, 문학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껴가며 타자의 목소리를 호출하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감각과 리듬을 생성한다. 이는 고정된 주체의 표현이 아니라, 흔들리고 분열된 목소리들의 집합으로서의 시를 지향한다.

『공중의 복화술』은 김혜순의 시를 읽기 위한 가장 정밀한 길잡이이자, 시가 어떻게 생성되고 변형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시를 처음 쓰려는 이에게는 글쓰기의 출발점을, 이미 시를 읽어온 이에게는 언어와 감각을 다시 사유할 계기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문학이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며, 그 시작이 언제나 각자의 몸과 경험 속에 있음을 드러낸다.

2026년 4월호 (VOL.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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