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시선의 정치, 동물원을 다시본다

탈식민주의적 시선에 대한 고민

정현 미술비평

“그들은 이야기 기법을 이용하고 역사적이고 탐험적인 태도를 취하며 해외 영토를 철저히 조작하거나 활성화했다.”
– 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214쪽

최근 비서구권 국가들은 과거 유럽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서구 중심의 세계사가 아닌 역사 다시-쓰기를 추구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늘날 문화텍스트를 다시 쓰려는 시도가 식민주의의 잔재의 반동으로 나타나는 반제국 투쟁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제3세계 지식인들의 연구가 낡은 규범과 관습의 폐해를 증명하여 세계에 관한 신선한 해석과 새로운 지식의 탄생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수많은 탈식민주의 담론 중 동물원 담론은 시점에 따라 다양한 관측이 가능한 대상이자 주제이다. 여기에서 동물원은 근대식민주의의 잔재이자 유럽제국주의 사상이 펼쳐지는 정치문화적 표상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표상으로서의 동물원은 식민주의의 흔적이자 우리가 극복할 대상이며 나아가 유사한 기획물인 식물원, 박물관, 미술관을 아우르고 있음을 미리 밝힌다.

실재와 가상의 겹침
모던보이 이상은 동물원에 관심이 있었다. <산촌여정>은 경성이라는 대도시를 벗어난 이상이 근대화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 미친 시골을 방문해 목가적인 풍경과 정취에 대한 느낌을 적은 수필인데, 간혹 그곳에서마저 근대 문물의 영향을 목격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산촌여정>에서 이상은 야생에서 뛰노는 동물들을 보고 마치 동물원의 짐승들을 풀어놓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현실과 가상의 관계가 겹친 이러한 인상은 일제에 의한 근대화의 한 단면을 시사한다. 문명이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맞도록 재단하는 기획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상이 야생에서 본 짐승을 동물원에 전시된 짐승으로 혼동하는 것을 통해 근대인이 바라보는 자연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최초의 동물원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한국 최초의 동물원은 식물원·박물관과 함께 창경궁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순종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한 후 그곳에 동물원·식물원·박물관을 개설하고 1909년 11월 1일부터 일반인의 관람을 허가한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창덕궁을 창경원으로 개명하는데 이는 한 국가의 군주의 거처이자 권위의 중심인 궁을 일반인이 즐길 수 있는 유락시설로 격하시킨 것이다. 동·식물원과 박물관이 창경궁 한곳에 설치된 것은 후쿠가외 유이치라는 인물이 일본에 동·식물원과 박물관을 함께 개설하려는 취지를 따른 것으로 일본은 이 장소들을 ‘서구의 근대 시설’이라는 시각으로 도입했다. 그러므로 한국 최초의 박물관은 대상만 다를 뿐 식민주의 지배 담론을 펼치기 위한 장치들로 구성된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제는 동·식물원과 박물관을 궁 안에 개설하여 이른바 ‘근대문명’의 힘을 제시함과 동시에 절대 권력의 상징인 궁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을 개방적인 공간으로 뒤바꾼다.(서태정, <대한제국기 일제의 동물원 설립과 그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2014년 봄호 제68호 참조) 이 사건은 식민주의에 의한 근대화라는 계몽주의 정치학이 피식민지 안에 어떻게 이식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영토의 재구성
제국주의의 권력은 동·식물원과 박물관이라는 장소 안에 희귀한 대상들, 즉 다른 지역의 문물을 비롯한 동식물 등을 한데 모아 세계 영토를 재구성한 후 피식민지인들에게 지식과 견문을 넓히도록 한다. 이 경우 대상의 차이만 있을 뿐 동·식물원과 박물관의 정체성은 거의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문명화란 인간의 지혜와 기술을 바탕으로 자연을 기획하고 포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이 공간에 배치된 희귀한 동식물들은 표본화된 자연으로 근대화라는 유토피아를 구성하는 정치적 요소가 된다. 근대의 가치는 유물론적 관점으로 나타난다. 예술작품의 정신적 가치가 전시 가치로 이동하는 근대에 자본을 통한 예술품의 소유와 수집 문화가 탄생한다. 과거 국가적 차원의 전리품으로 채워진 박물관이 근대로 들어서자 개인의 취향을 과시하는 수집의 시대로 전환되면서 유럽의 부르주아 계층은 수집품을 통해 문화인으로서의 가치를 경쟁적으로 드러낸다. 전시 가치는 단순히 아름다운 예술품을 관람한다는 수동적 향유가 아닌 문화적 유산과 자본이 결합해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가치를 소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문화학적 시각으로 본 전시 가치는 가치의 유형화, 서열화로 가지를 뻗는다. 희귀한 대상도 마찬가지다. 유럽 중심역사관에 의해 탄생한 기념비적 대상들(기념비, 유적, 예술작품 등)은 위대한 인간의 성스러움으로 고양시킨다면, 희귀한 혹은 특이한 대상들 (오세아니아의 민속물, 유색인, 기형아 등)은 야만성이나 원시주의의 대상으로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자연, 야생을 인공적으로 기획된 공간에 위치시킨다는 의도는 다분히 근대적 식민주의의 권위를 드러내는 정치적 태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동물원의 우리에 갇혀 전시물이 된 짐승들, 유리 천장으로 만들어진 수정궁 안에 이식된 열대 식물들은 근대 문명의 힘을 과시하는 전시장과 같다. 식물원을 오랑주리(Orangery)라 부르는 이유다. 자연을 인공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의 발달은 삶의 윤택함과 풍요로움을 제시함과 동시에 과거 불가능했던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재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현실화된 상상의 유토피아는 영토를 정치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또 다른 가능성으로 확장된다. 미셸 푸코가 언급한 ‘헤테로토피아’는 이처럼 현실이 된 유토피아의 장소들을 가리키는데, 미래의 안녕을 책임지는 보험회사를 비롯해 고급 기숙학교, 병원, 박물관 등도 이에 포함된다.

미술관 밖의 미술관
미술관의 원형인 루브르박물관를 비롯해 인류학, 역사, 자연사 박물관 등은 본질적으로 유럽 식민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구성되었기에 유럽과 비유럽, 서구와 비서구를 구분한 위계로 만들어졌다. 현대미술관 역시 서양미술사를 대표하는 역사의 표본 전시장으로 전 세계 미술의 지배 담론을 교육하는 장이기에 시대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구조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변화의 출발은 21세기로 진입하면서 나타난다. 새로운 미술관은 다원주의와 수평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다인종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이를 통해 동시대가 국가가 아닌 도시, 민족이나 인종이 아닌 개인의 시대라는 현실을 반영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현대미술관은 시대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진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기에 단순히 푸코적인 헤테로토피아라 단언하기 어렵고 반대로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는 동시대성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도 없다. 비서구권의 경우 20세기 미술관이 서구사상의 틀 안에서 기획된 모델을 원본으로 삼았다면 최근 비정형적이고 다원적인 복합문화공간을 구축하고 있는 문화적 움직임은 서구적 역사관에 입각한 미술관 개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근대 유럽의 박물관은 일원화된 서구 사상과 역사관의 서사를 구조화한 유형이었다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원적 시점으로 역사를 재해석한 전시를 기획하거나 미술 이외 분야의 예술가, 큐레이터, 학자 등의 협업을 통해 유물의 전시장이 아닌 동시대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네트워크의 장소로 변화를 모색 중이다. 미술에 대한 정의가 불가능한 시대이기에 오늘날 미술관은 ‘과연 무엇이 미술인지를 모색하는 실험의 장’, ‘전 지구화 된 사회문화적 현상이 충돌하는 경계’, ‘현실적 문제들이 충돌하는 사건 지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후에는 이른바 탈형식적인 실험들-매체가 섞이고 언어가 겹치거나 부서지고, 맥락이 깨져버린 동시대예술-이 존재하기에 이러한 시도가 나름의 당위성을 갖는 이유일 것이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이러한 유의미한 도발의 지평에는 역사 속의 식민주의, 현실의 식민주의, 자신 안에 내재하는 식민주의를 극복하려는 아직 온전히 언어가 되지 못한 몸부림이 존재한다. 이른바 포스트식민박물관으로 불리는 프랑스 파리의 케브랑리(Quai Branly)는 유럽 백인 남성 시점의 인류학에 따라 야만인을 발명하고 비유럽권의 인간을 타자화한 식민주의 관점을 극복하고자 문을 연다. 2012년 <인간동물원(Zoos Humains> 전시는 릴리안 튜람(Lilian Thuram)에 의해 기획되었다. 튜람은 알다시피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전 국가대표로 프랑스 식민지인 구아들루프(Guadeloupe, 카리브해 위치) 출신으로 은퇴 이후 반인종차별주의 단체를 설립한 사회활동가다. 그는 <인간동물원>을 통해 비유럽권의 유색인종이 어떻게 이국적인 야만의 존재가 되었으며 유럽 백인이 인종 분류학을 통해 어떻게 인간의 서열을 만들고 이를 서커스, 만국박람회, 동물원 등에 전시했는지를 진술하고자 했다. 전시는 식민주의의 과거 고백을 통해 반성과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누가 야만인인가 자문하게 한다. 서구의 발명으로 개념화된 야만인-타자인가? 아니면 폭력으로 영토를 점령하고 그들의 존재를 유럽인의 시각으로 재단한 유럽인인가? 이 같은 이중적인 물음은 과거를 극복하고 세계 역사를 새롭게 쓰려는 포스트모던박물관/미술관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마치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에서 소수성의 보존만을 강조한 <소수언어박물관>이 변화와 발전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전형을 답습하는 듯한 미래의 묘사가 두렵게 다가오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탈식민주의가 학술적 지식에서 문화와 예술에 의해 실천되는 시대로 바뀌는 즈음이다. 이러한 현실의 움직임을 과연 우리의 미술관이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

칸디다 (1)_2

칸디다 (2)_2

칸디다 회퍼(Candida Höfer)
회퍼는 도서관, 극장, 강의실 등 공공건물의 내부 사진을 통해 시스템화된 사회를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을 배제함으로써 사물 그 자체의 질서를 보여준다. <자연사박물관> 시리즈에서는 유난히 건축적 프레임이 강조되며 동물을 분류하고 보존하고 전시하는 광경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위 <클로츠셰 보관소> C-Print 85×85cm 1999 아래  <로테르담 자연사박물관Ⅱ> C-Print 85×85cm 1999

스투르스 (2)_2

스투르스 (1)

토마스 스트루스(Thomas Struth)
스냅샷을 연상시키는 스투르스의 미술관 사진은 미술작품, 관람객, 전시공간 세 가지 모티프로 구성된다. 이 시리즈는 미술제도에 대한 작가의 인식론을 반영한 작품으로 사진과 미술의 관계, 작품과 관람객, 전시공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위 <루브르 1, 파리> 시바크롬 프린트 183×234cm 1989 아래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2, 시카고> 시바크롬 프린트 219×184cm 1990

김신일 InvisibleMasterpiece-OnlyPhoto

김신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하고 작품 이미지는 제거해 관람객이 감상하는 행위만 남겨 놓았다. 이를 통해 작가는 감상이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의미, 명화가 때로는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현상에 대해 언급한다. 이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관람객들의 윤곽선을 압인으로 표현한 애니메이션 작업도 제작했다.
<보이지 않는 명화> 알루-디본 포토 각 20.5×30.5cm 2004

SPECIAL FEATURE 시선의 정치, 동물원을 다시본다.

유화림  동물원은 대부분 유원지, 놀이공원의 일부로 구성된다. 인간을 위한 오락과 휴양을 위한 시설 한 켠에서 동물들은 야생성과 자유를 잃은 채 삶을 영위하고 있다.   캔버스에 유채 112×162cm 2011

유화림
동물원은 대부분 유원지, 놀이공원의 일부로 구성된다.
인간을 위한 오락과 휴양을 위한 시설 한 켠에서 동물들은 야생성과 자유를 잃은 채 삶을 영위하고 있다.
<동물원 시리즈 > 캔버스에 유채 112×162cm 2011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기존의 관습을 뛰어넘어 예술과 전시, 현대사회 간의 관계를 파고드는 작가는 오브제가 아니라 상황 자체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가진다. 2005년 19세기 과학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남극에 살고 있다고 알려진 희귀한 알비노 펭귄을 찾아 탐험을 떠나기도 했으며, 2008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24시간 숲으로 만들기도 했다. 2013년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에서는 살아있는 개를 풀어 미술관의 화이트큐브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만들었다. 2013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Philippe Migeat, Centre Pompidou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기존의 관습을 뛰어넘어 예술과 전시, 현대사회 간의 관계를 파고드는 작가는 오브제가 아니라 상황 자체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가진다. 2005년 19세기 과학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남극에 살고 있다고 알려진 희귀한 알비노 펭귄을 찾아 탐험을 떠나기도 했으며, 2008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24시간 숲으로 만들기도 했다. 2013년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에서는 살아있는 개를 풀어 미술관의 화이트큐브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만들었다.
2013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피에르 위그> 개인전 광경 ⓒPhilippe Migeat, Centre Pompidou

박미례  작가 특유의 강한 터치감이 살아있어 불안하게 요동치는 배경 아래 박제된 동물의 무표정은 이상한 공포와 예측 불허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는 동물의 외형뿐 아니라 이성의 광기가 만들어낸 시스템의 역사와 흐름도 재현의 영역에 포함시킨다.   캔버스에 유채 130×194cm 2014

박미례
작가 특유의 강한 터치감이 살아있어 불안하게 요동치는 배경 아래 박제된 동물의 무표정은 이상한 공포와 예측 불허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는 동물의 외형뿐 아니라 이성의 광기가 만들어낸 시스템의 역사와 흐름도 재현의 영역에 포함시킨다.
<박제짐승> 캔버스에 유채 130×194cm 2014

사람들이 동물원을 찾는 진짜 이유?

최종욱 광주 우치동물원 수의사

사람들이 동물원을 찾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다소 쌩뚱맞은 질문이지만 현대 동물원의 존재 이유를 밝히는 데 아마도 핵심적인 질문이다. 생태교육 목적? 중요하지만 실상 동물원이 생태교육을 잘 하지도 못하거니와 너무 상투적이다. 동물원의 존재를 합리화하는 데 자주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생태교육 기능은 더 강화해야 하고 동물원 스스로 교육기관으로 인식하는 사고의 전환과 진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야생 종(種) 보존과 복원. 글쎄? 선진국 몇몇 동물원에서 멸종 위기의 콘도르, 몽골 야생마 같은 개체 수가 아주 적은 동물들을 성공적으로 번식하여 자연으로 돌려보낸 적은 있지만 멸종 수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렇더라도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존재 이유이다. 현재 지구상 생물의 멸종 원인 90%이상이 인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일방적이지만 동물의 창구 구실을 수행하는 동물원이라도 나서야 한다. 그러나 전 지구적인 규모에 비해 동물원의 이런 역할은 너무나 소소하다.
놀이. 전시(엔터테이먼트). 동물원이 정말 재밌고 멋진가? 글쎄, 동물원은 중세 유럽 귀족들이 이국적인 동물을 선호하는 데에서 시작되었고(미네저리) 그것이 민간으로 확산 발전한 게 오늘날의 동물원이지만 난 재미로 동물을 보지 않는다. 내가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복합적이다. 불쌍해서, 아름다워서, 신기해서, 그리고 마음이 편해져서 … 그런 감정들이 혼재되어 있다. 아마 많은 사람이 동물원 동물을 볼 때 단순한 재미보다는 마음 한구석에 죄수나 포로를 대하는 듯한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동물원을 대하는 관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일상이 빌 때면 꾸준히 동물원을 찾는다. 왜? 아이들이 좋아해서. 이 대답은 아마도 일차원적인 이유일 것이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동물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안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철창 안의 동물들을 동물모양 장난감과 동일시하는 지도 모른다. 아이가 좋아해서 동물원을 찾는다는 이 말은 또한 어른들이 자기 마음을 감추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실은 동물원은 어른들이 더 좋아한다. 동물원을 한 바퀴 돌며 설명을 하면 어린아이나 청소년들은 집중하지 않고 산만하다. 반면에 보호자로 따라온 학부모와 인솔 교사는 귀 기울여 듣고 리액션이 좋아서 난 늘 고양되곤 한다.
여자친구가 동물을 좋아하니까. 일부 연인들이 대는 주된 이유이다. 실제로 이상하게도 동물원을 찾은 연인 중에서 남성이 동물을 더 좋아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여성은 동물을 남성보다 확실히 더 좋아한다. 여성이 더 순수해서 그럴까? 아니다. 앞에서 순진한 아이들의 산만한 태도에 대해 언급했다. 여성이 감성이 더 풍부해서다. 동물들은 분명 인간 깊숙한 내면을 자극하고 여성들은 그 자극을 남성보다 더 즐겁게 받아들이고 예민하게 반응할 뿐이다. 사회가 각박하지 않다면 가장으로서 생계의 무거운 짐을 진 남성도 동물을 좋아할 만한 감성을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남성이 원해서 여성이 동물원을 따라오는 그 날이 기다려진다. 내 경우처럼.
시간 보내기 좋아서? 한적한 오후에 노부부나 유모차를 끌고 동물원을 찾아 오는 아주머니들이 대는 이유이다. 동물원의 시간은 참 빨리 간다. 나 역시 이곳에서 보낸 10년이란 세월이 다른 곳에서의 10배속으로 흘러갔다. 일이 편해서도 아니고 마음이 편해서도 아니다. 내 경우 동물들의 질병과 죽음마저 책임지고 있는 입장이라 더욱 분주하고 늘 마음이 무겁다. 동물이라지만 죽음 앞에선 너무너무 괴롭다. 한 달에 10번 이상 장례식을 치른다고 생각해보라. 그래도 동물원의 시간은 정말 빨리 간다. 난 상대적으로 빨리 늙겠지만 그 세월이 그리 아깝지도 억울하지도 않다. 내 시간만큼이나 동물원을 방문하는 다른 사람들의 시간 역시 빠르게 흘러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동물원에선 운동량도 매우 많아진다. 아마도 동물은 천천히 살고 우리가 그들 속도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동물들을 보면서 서서히 마음이 비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원에 적응한 동물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어떤 환경에도 순응하고 조용히 움직이며 산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서서히 체념해라!’ 동물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그들에게서 내가 배우고 싶은 점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무념무상 명상의 고수들이다. 당신은 좁은 우리 안에서 사자처럼 그토록 편안하게 오래 잘 수 있나? 코끼리처럼 그 좁은 공간에서 춤추며(몸을 좌우로 때론 앞뒤로 흔드는 동물원 코끼리 특유의 반복동작 / 일부 동물학자들은 정형행동으로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간주한다) 살 수 있나?
일단 싸니까!(우리 동물원 같은 공공 동물원은 입장료가 최고 1,500원이고 조만간 무료화할 것이다.) 오호! 아주 매력적인 유인이지만 비싸도 누군가는 반드시 동물원에 온다. 우리보다 못한 조건의 사설 동물원이나 수족관들은 2만원 이상을 받는다. 그래야 겨우 적자를 면할 수 있다. 공공 동물원은 시민에게 무료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셈이다. 동물원은 유지만 하려 해도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드는 곳(초기 투자비 빼면 동물에게 들어가는 것보다 인건비가 훨씬 많다.)이지만 새로운 트렌드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처음에는 동물을 볼 수 있다는 데 만족했지만 점차 새로운 자극을 원해서 동물의 유인하는 함정을 파고 철창을 없애고 대신 유리를 쓰게 됐으며 나중에 커다란 유리돔(국립생태원 같은)까지 얹지만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이제는 무한한 넓이의 땅을 사서 사파리 식으로 운영하라고 요구한다. 궁극적으로 그 사파리 문을 열고 야생으로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절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이런 걸 왜 못하냐고 요구하고 질책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주장하긴 쉽지만 그걸 실천해야 하는 사람 입장은 정말 어렵다. 그래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동물들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내야 하는 게 동물원의 사명이다. 누가 뭐라해도 동물원 사람들은 동물을 사랑하며 동물원은 그 사람들의 집단이기도 하다. 그들은 동물에 끌려 가까운 동물원에 왔을 뿐이지 동물 해방에 누구보다 더 깊이 생각하고 동의하는 집단이다.
365일 문 닫지 않고 매일 여는 우리 동물원에 지난 20년 동안 아무도 오지 않은 날은 단 이틀에 불과했다.
심지어 나라 전체가 몰입의 극한에 이른 한일월드컵 한국팀 4강전 때도 누군가 우리 동물원을 찾았다. 그분들에게 정말 평생 이용권이라도 주고 싶었다. 그들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동물원을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아이들은 동물 곁이 마냥 좋아서, 젊은 연인들은 자연의 낭만을 만끽하기 위해, 아이를 둔 부부들은 아이들이 좋아해서, 노부부는 어린 날의 추억여행과 더불어 동심으로 돌아가는 듯해서, 가족들은 남녀노소 누구에게 무리 없는 나들이 장소여서, 아픔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아프게 보이는 동물들을 통해 위로를 얻으려고.
실제로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동물원을 찾고 , 갇혀 있는 동물들이 불쌍하다고 하면서도 뭔가 즐거움과 뿌듯한 감을 느낀다고 한다. 일반 놀이공원처럼 아주 즐겁거나 아주 짜증나거나 하지 않는 다소 싱겁거나 밋밋한 즐거움을 주는 곳이 바로 동물원이다. 연인 사이의 방문객이라면 이렇게 걱정할 수 있다. 돈을 럭셔리하게 못 써서 하루 종일 걸어만 다니게 해서 혹시 여자 친구가 안 좋아했을까?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여자 친구는 충분히 만족했지만 남자는 동물들을 바라보지 않고 여자 친구만 바라보았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적이 있었기에 지면을 빌려 그들 심정을 대변한다.
그럼 도대체 동물원의 어떤 요소가 그들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걸까? 그리고 나에게도? 10년 넘게 한결같이 동물원을 지켰지만 동물들하고 함께 하면서 전혀 지루함을 못 느꼈다. 남들은 나에게 만날 동물만 보는 것이 정말 지겹고 따분하지 않냐고 자주 물어오지만 나는 “그럼 한번 와봐!” 하고 가볍게 말한다. 당연히 정답은 아니지만 직접 보면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생긴다. 그리고 대부분 오랜만에 찾는 동물원에서 즐거움과 새로움과 동심을 느꼈다고 한다. 일상이 찌들어 감성이 메마른 그들에게 유년기의 추억과 감성을 되돌려주고 싶다.
나는 오랜 동물원 생활에서 동물원에는 우리가 인위적으로 채울 수 없는 원초적인 즐거움이 도사리고 있음을 느꼈다. 바로 다채롭고 다양한 뭇 생명이 정말 신나게 모여 사는 영원한 생명의 놀이터인 자연의 일부가 여기에 가까이 와 있기 때문이다.
우린 아름다운 동물의 자체에 눈을 못 떼고 원숭이의 재롱에 감탄하고 사자나 호랑이의 위엄에 움츠러들고 기린과 코끼리의 거대함에 압도당한다. 누구나 다 그렇다. 단지 어른으로서 아이들 앞에서 감정을 감추려 할 뿐 느끼는 건 아이나 어른이나 대동소이하다. 이런 비자극적이면서 복합적인 즐거움을 압축해 선사하는 곳은 식물원이나 동물원뿐이다. 식물원은 여유와 편안함을 안겨주는 자연이고 동물원은 다소 불편하지만 야생의 동물들이 놀랍고 역동적인 자연을 선사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그럼 너에게 즐거움과 행복이 넘치리니!” 루소의 말이 아니라도 우리가 종말에 머무를 곳은 딱딱한 콘크리트가 아닌 부드러운 흙 속 즉 자연의 품일 뿐이다. 그래서 동물원을 자신을 제2의 자연(second nature)이라고 칭하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한다. 도심 속에서 압축된 자연의 즐거움을 주는 곳이 동물원이다. 늘 가치와 무가치의 중간에서 비판의 화살에 시달리지만 결코 동물원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동물원이 최초로 생긴 이래(1828년 런던동물원, 1909년 창경궁-지금 과천 서울대공원의 전신, 현재 우리나라는 국공립과 사립을 합쳐서 16개의 동물원, 6개의 수족관이 운영되고 있다. 국토 면적에 비해 과잉상태고 놀이공원이나 이윤 수단으로서도 포화 상태다. 더 이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국가 주도의 동물원, 수족관 정책이 필요한 상황이다.)로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동물들을 통해서 마음껏 자연을 느껴야 하고 잠깐이나마 자연으로 돌아갈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하기에 아니 가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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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동물원은 동물의 가치를 배우는 교육의 현장이다”

양효진 서울대공원 동물원 큐레이터

국내에서 동물원 큐레이터가 근무하는 곳은 서울동물원이 유일하다. 동물원 큐레이터는 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해달라.
원래 수의학을 전공했다. 서울동물원은 전시기획을 전문화하기 위해 2005년 동물원 큐레이터라는 직함을 만들었고, 현재 3명이 활동하고 있다. 동물원 큐레이터는 일단 살아있는 동물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조성하고 관람객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직업이다. 1984년 개원한 서울동물원은 예산부족으로 아직 쇠창살로 된 곳이 일부 있지만 계속해서 서식지를 재현하고 동물복지를 위해 환경을 개선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전체적인 사육 관리시스템을 개선하는 것도 주된 업무다. 하드웨어는 옛날 것이지만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이나 긍정강화훈련 등의 소프트웨어를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설명 패널을 제작할 때도 단순한 정보 제공보다는 동물이 야생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어떤 보존프로그램이 있는지 등을 알려 동물복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또한 중요한 업무가 동물 종 매니지먼트이다. 번식을 하거나, 새끼가 수컷이면 성장해 아빠와 마찰하는 경우도 있고, 같은 공간에 두어 근친 교미의 문제도 생길 수 있다. 이럴 때는 다른 동물원과 종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종 관리도 중요한 문제다.

동물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과 긍정 강화 훈련에 대해 설명해 달라.
동물에게 자연과 유사한 환경을 제공해 자연에서 보이는 행동을 유도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감소시키기 위해 개발된 것이 바로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이다. 동물의 행동뿐 아니라 자연의 상태와 가능한 한 비슷하게 조성해 환경을 풍부하게 하는 개념이 강하다. 시멘트 바닥에서 흙바닥으로 개선한다거나 먹이숲 프로그램을 통해 먹이의 선택권을 넓히는 방식 등 다양하다. 서울동물원은 이 프로그램을 2009년 유인원부터 시작해 현재 전체 동물에 적용하고 있다. 시설을 리모델링할 때도 이 개념이 반영되도록 신경 쓰고 있다.
긍정 강화훈련은 치료나 예방을 목적으로 동물들의 스트레스 줄이기 위해 동물들이 좋아하는 먹이, 칭찬, 쓰다듬기, 놀이 등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현재 동물원이 점차적으로 동물을 의인화하는 일체의 행동이나 프로그램은 가능한 한 줄이려 한다.

동물원이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동물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하는 것에 대해 관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예전에는 동물원에 아픈 동물이 있으면 건강한 동물을 보여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지금은 저 동물이 왜 아픈지, 동물원에서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 것 아니냐 이런 반응이 많다. 동물 복지에 대한 인식이 넓게 확산됐음을 알 수 있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동물에게 과자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동물을 존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동물 복지를 위한 프로그램 등에 많은 사람이 자원봉사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면서 동물의 생명권과 가치를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다.

동물원은 동물의 복지도 중요하지만 오락과 관람의 기능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그렇다면 전시 측면에서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싶은가?
동물원에 오락과 관람의 기능이 없다면 폐쇄하고 동물을 안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사람에겐 동물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고, 동물을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어떻게 전시하고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따라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 통틀어 동물원을 방문하는 인원수가 6억 명 정도 된다. 사실 이건 사람들에게 동물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기회다.

동물원마다 동물을 전시할 때 분류하는 형태가 다르다. 서울동물원의 경우는 어떠한가?
동물원마다 각자 나름의 분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서울동물원의 경우 크게 동물의 서식지별로 아프리카관, 남미관, 동양관 등 실제 세계 지도 위치에 가깝게 배치했다. 서식지별로 온도, 습도 등이 다르기 때문에 동물이 사는 환경과 최대한 비슷하게 맞추기 위해서다. 경우에 따라서는 종별로 나눠져 있거나 여러 종이 섞여 있는데 그런 것도 야생의 상태와 최대한 유사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슬비 기자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먹이통 및 암벽이 조성된 바바리양 관

동물행동 풍부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먹이통 및 암벽이 조성된 바바리양 관

SPECIAL FEATURE 우리 옛 그림 민화의 재발견

*본 기사에 실린 도판과 해설은 《한국의 채색화》(정병모 기획, 다할미디어, 2015)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민화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우리 그림이다 말 그대로 ‘백성(民)의 그림(畵)’ 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특정 계층이 향유하던 문화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남녀노소에게 사랑 받는 하나의 미술장르로 우뚝 섰다 현재 민화 인구는 만 명에 육박한다고 추산되며 그 증가세가 꺽일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최근 세계 곳곳에 소장된 우리의 궁중회화와 민화를 권의 책으로 묶은 한국의 채색화 가 발간되었다.
일부 중년여성사이의 여가활동 대상으로 여겨지던 민화가 이제 주류 미술계의 문을 당당히 두드리고 있다. 바야흐로 민화의 예술성이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민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월간미술 은 근래의 민화 열풍을 이해하기 위해 민화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인 민화 라는 명칭부터 새롭게 접근하고자 한다. 다채로운 고전 민화를 살펴보며 민화 하면 떠오르는 막연한 이미지와 저급한 예술이라는 편견을 깨고자 한다 또한 민화 를 둘러싼 논쟁의 쟁점을 짚어봄으로써 세계미술 속에서 우리 민화가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엿본다 오색찬란한 민화 속 색의 향연이 자연의 색을 입은 봄꽃과 함께 당신의 눈과 흥을 자극할 것이다.

八景圖
팔경도는 특정 지역의 경관을 여덟 가지의 주제로 묶어 이름 붙이고 이를 그린 그림을 말한다 아마추어 민간화가들이 그린 민화 팔경도는 기법적인 편의성으로 인해 완성도는 약하지만 기발한 발상과 해학성이 돋보이고 설화적인 이야기를 통해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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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종이에 채색 73.4×32.4cm(각) 8폭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김세종 소장)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민화 산수화 가운데 가장 빈번히 그려진 그림이다.
이 작품은 기존의 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조형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소상팔경도의 화제가 지닌 특징들을 각각 잘 살리고 있다. 원포귀범遠浦歸帆은 육지로 들어오는 배를 그렸고 평사낙안平沙落雁은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티프가 그려져 있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
“구한말에 이르러 한국적인 팔경도가 꽃을 피웠는데 그중 하나가 관동팔경도다. 그림의 구성이 어린아이들의 그림처럼 상식과 거리가 먼 부분이 있지만, 이런 요소들이 오히려 기존의 화풍에 물들지 않은 참신한 조형세계를 보여준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虎獵圖
호렵도는 세기 이후 유행한 그림으로 그 내용은 청나라 왕공귀족의 군사 훈련을 겸한 대규모 사냥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종이에 채색 74.9×30.5cm(각) 8폭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뉴아크미술관 소장)

<호렵도(虎獵圖)>(부분) 종이에 채색 74.9×30.5cm(각) 8폭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뉴아크미술관 소장)

호렵도(虎獵圖)
“원래 호렵도는 관아에서 무장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돋보이게 하거나 벽사의 용도로 제작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처럼 해학적인 호렵도는 기능적인 측면보다 조형적인 측면에 주력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통적인 기법을 해학적인 표현과 연결시켜 어떤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도드라져 보인다.” – 정병모(경주대 교수)

故事人物圖
역사나 설화 문학에 얽힌 이야기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인물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고사인물도라고 한다.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삼국지연의도와 신선도가 어우러진 것이다. 첫 세 폭은 ‘삼국지연의도’ 중의 장면, 나머지는 다양한 신선의 모습을 담았다. 바둑을 두는 신선의 모습에서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동굴 속에서 두 노인이 바둑 두는 것을 보고 구경하다 집에 와보니 수백 년이 흘렀더라’는 왕질의 고사를 떠올릴 수 있다.” – 유미나(원광대 교수)

冊巨里
책을 비롯하여 그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물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거리란 먹을거리 입을거리처럼 복수의 의미다 책거리 가운데 책가 즉 서가로 구성된 그림을 책가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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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 종이에 채색 355×128cm(각) 8폭 병풍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
“8폭 가운데 두 폭은 표피豹皮를 걷어 올린 공간에 문방구와 기물이 빼곡히 배열되어 있다. 책가 앞에 장막을 설정한 장한종 양식의 책거리와 관련이 깊은 민화 책거리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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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에 채색 161.7×39.5cm(각) 10폭 병풍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가도(冊架圖)> 종이에 채색 161.7×39.5cm(각) 10폭 병풍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가도(冊架圖)
“10칸의 서가를 책으로만 가득 채운 책가도이다. 정조 연간에 책만 빼곡히 채워서 그린 책가도의 초기 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책가도의 제작 시기는 19세기로 본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花鳥圖
화조를 주제로 한 그림은 민화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내용이 다양하고 표현된 물상의 종류와 형태 및 채색의 변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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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도(蓮池圖)> 비단에 채색 177×75.4cm(각) 4폭 병풍 19세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연지도(蓮池圖)
“여러 쌍의 원앙새는 주체할 수 없는 연꽃의 향기에 취해 이리저리 연꽃을 완상하며 분주하게 물결을 가르고 있다, 원앙금침을 수놓아 자식을 많이 낳고 부부 금슬이 좋기를 기원하는 신혼방에 펼쳐졌을 법한 그림이다.” – 이경숙(박물관 수(繡)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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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조도(花鳥圖)> (부분) 종이에 채색 90.4×37.2cm(각) 8폭 병풍 19세기 (일본 개인 소장)

화조도(花鳥圖)
“매화, 파초, 초롱꽃, 대나무, 모란, 소나무, 연꽃, 백일홍으로 구성된 화조화 병풍이다. 화조로 이루어진 자연이지만, 따뜻한 휴머니즘의 세계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묘와 소나무 잎 표현으로 보건대, 제주도 민화일 가능성이 높다.” – 정병모(경주대 교수)

翎毛・魚蟹圖
호랑이의 이미지는 선사시대 바위그림, 고구려 고분벽화 등 이른 시기부터 즐겨 제작되었다 민화로 전해진 호랑이 전통은 상징성이 강해지면서 호랑이는 부패한 관리 까치는 민초를 대변하게 되었다 물고기의 경우 벽사뿐만 아니라 다산을 상징하는 길상적 소재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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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작도(虎雀圖)> 종이에 채색 100.5×60cm 19세기 (이우환 컬렉션,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호작도(虎雀圖)
“민화 호랑이 그림에는 대부분 호랑이와 까치가 등장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참새가 까치 대신 호랑이의 상대역을 담당한 점이 이채롭다. 참새 외에도 토끼나 꿩 등이 호랑이의 상대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 정병모(경주대 교수)

 종이에 채색 87×52cm 19세기 (바라 컬렉션,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 종이에 채색 87×52cm 19세기 (바라 컬렉션,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
“등용문 고사가 충실하게 묘사되어 배경에 패방牌坊 모양의 용문을 표현한 중국의 약리도와는 달리 우리의 어변성룡도는 일출하는 태양이나 태극문, 또는 장식적인 여의주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 조에스더(미국 사우스웨스트대 교수)

文字圖
문자를 소재로 한 민화로서 원래 한자의 상형성에 기인하며 그 시원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민화 문자도는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발전했다 문자도는 다른 소재보다 윤리성과 이념성이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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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도(文字圖)> 종이에 채색 55×40.5cm(각) 8폭 병풍 19세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문자도(文字圖)
“이 효제문자도 8폭은 판화로 글자의 윤곽을 찍은 후에 내부를 흑색 바탕으로 채우고 다시 각종 동물, 새, 화초, 일월日月, 운문雲文 등을 그려넣은 것이다.”
– 진준현(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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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백문자도(飛白文字圖)>(부분) 종이에 채색 95.2×34.8cm(각) 6폭 병풍 19세기 (호림박물관 소장)

비백문자도(飛白文字圖)
“효제孝悌 충신忠信 예의禮意 염치廉恥 국원菊遠 강산江山 등 여섯 폭이 남아 있는 비백서 문자도 병풍이다. 비백이란 큰 붓으로 먹을 묻혀 재빨리 큰 글자를 쓸 때 먹이 묻은 곳과 묻지 않은 곳이 뚜렷이 대비되어 필획 중 흰 부분이 마치 날아가듯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진준현(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관)

 

 

SPECIAL FEATURE 행복을 담은 색깔 그림 길상화吉祥畵 다시 보기

윤범모 가천대 교수

‘미술계의 숙원 사업’이던 우리의 채색화를 집대성한 두꺼운 채색화 도록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한국의 채색화》(다할미디어 발행)가 바로 그것. 우리는 이 책에 소개된 채색화 작품을 통해 우리 민족의 독창성과 감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아, 아름답다! 우리 색깔 그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우리 민족의 회화작품 가운데 이렇듯 아름답고, 멋있고, 독창적이고, 상징적인 그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진정 국제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우리의 그림이다. 그런데, 강하게 치밀어 오르는 의문 사항 하나, 그것은 바로 기존 한국미술사 관련 저술들의 한계이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기왕의 한국회화사 관련 저술에서는 우리 채색화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 정말?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우리 색깔 그림’을 푸대접하고 무시했던가. 작가명과 제작연도를 알 수 없는 ‘민화’는 미술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에 ‘하자’가 있다는 것, 하지만 이는 궁색한 변명일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채색화를 다시 보아야 한다.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다

그동안 한국회화사 연구는 수묵 문인화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의 예술관은 한마디로 예술 천시관賤視觀이었다. 그림 그리기는 취미생활 정도의 여기餘技로 여겼지 직업적 대상이 아니었다. 예술은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애물단지 정도, 그래서 사대부가 가까이 할 대상은 아니었다. 문인 당사자들이 여기라고 주장한 수묵 문인화를 가지고 한국회화사의 골간으로 삼아 기술했으니, 이는 불구의 연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문인화는 중국풍을 기본으로 하여 전개되었으니, 민족 회화의 독창성 문제를 생각할 때 한계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의 그림, 그것은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조선 초상화와 기록화, 불화와 무속화, 그리고 이른바 민화로 이들의 공통점은 채색화이다. ‘민화’는 채색화의 꽃이다. 따라서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이다. 회화사 연구의 시각 교정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한국의 채색화》는 이 점에 대해 절규한다. 절규!
흔히 한민족을 일컬어 백의민족이라고 한다. 어느 순간에는 그랬을지 모르겠다. 현재 한국인은 백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종로거리에서 흰옷 입은 사람 만나기란 매우 어렵다. 실제로 국가 기관에서 한국인의 색채선호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오늘날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색? 그것은 파랑색이었다. (참고로 오늘날 세계 민족의 색채 선호 역시 파랑색이 1순위라는 조사보고서가 있다.) 바닷가 출신 사람들은 완벽할 정도로 파랑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가, 섬 출신 김환기는 파랑색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할 정도로 파랑색을 좋아했다. 통영 출신 전혁림 역시 파랑색을 작품의 기저로 삼았다. 오방색의 단청을 보자. 여기서 바로 한국인의 색채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단청과 같은 원색의 농채濃彩를 좋아한다. 하지만 일본인은 2차색인 간색間色을 좋아한다. 일본 미인도에 보이는 간드러지는 색깔과 필선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한민족은 밝고 짙은 원색을 좋아한다. 그래서 채색화가 한민족의 심성 표현에 적합했던 것이다. ‘민화’는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민화’는 무명의 저속한 하수의 그림이 아니다

민화라는 용어를 만든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민화를 무명의 저속한 하수下手의 그림이라고 개념 정리했다.(물론 하수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민화는 아름답다고 말했다.) 아무튼 민화하면 3류의 그림, 심하게 말해서 시골 장돌뱅이의 막그림 정도로 폄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표현은 민화의 본질을 무시한 것이다. 민화는 그렇게 무명의 하수 그림이 아니다. 더군다나 저속한 그림도 아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민화작품의 독창성과 상징성, 장식성과 해학성 등 특성은 결코 하수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나름대로 훈련된 과정을 거친 수준급 화가가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보하여 그린 작품이다. 하여 민화는 마을 공동체의 눈높이에 맞춘 공동체 사회의 시각적 산물이다. 민화세계의 특성으로 동심童心을 들 수 있는 바, 동심의 표현은 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한 수준이다. 추사 김정희의 〈板殿〉(강남 봉은사 현판)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아프리카 미술의 제작 과정처럼 익명성은 주요한 특징을 이룬다. 아프리카 미술은 마을의 공동의지를 작품에 담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 작가명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미술작품처럼 작가의 개인 브랜드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화의 무명성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여겨진다.
기왕의 민화 걸작전은 상당부분을 왕실회화 작품으로 꾸몄다. 근래 궁화宮畵 관련 연구 성과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궁화와 민화의 구분을 요구하게 되었다. 왕실에서 사용한 궁화를 두고 백성 민民자를 붙이기에는 어폐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화나 민화는 똑같은 채색화이고 커다란 의미에서 형식과 내용이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궁화의 작가는 도화서 화원이었고, 군왕에게 진상하는 그림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수 없는 신하의 신분이었다. 궁화에 작가명이 누락된 것은 시대적 환경의 반영이다. 이런 궁화가 민간에 퍼져 유행하면서 이른바 민화의 세계가 광역화되었다. 궁화와 민화는 재료를 비롯 표현형식 등에서 약간의 차이는 보이지만 크게 보면 같은 맥락에서 평가하게 한다. 민화의 물결은 점차 넓게 파급돼 민화의 독창성과 함께 자생력을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민화라는 용어의 비과학적 부분이다. 민화는 하수의 저속한 그림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궁화와 민화의 경계선 구별 짓기에 어려움이 있다. 궁화와 민화의 완벽한 구별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수용자 중심의 이와 같은 구별이 얼마만큼의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화원이 똑같은 그림을 2장 그려 한 점은 왕실에 진상하고, 또 한 점은 민간의 친지에게 주었다면, 그것은 궁화인가, 민화인가. 더군다나 화원은 중인 출신으로 피지배계층에 속한다. 왕공사대부 계층도 아닌 중인 출신이 궁정화풍을 이룩하면서 그린 것이 궁화이다. 하지만 궁화의 광역화 현상은 민화와 대동소이한 형상을 만들게 했다. 요즘의 현상은 궁화와 민화를 한 형제로 볼 것인가, 남의 집 식구로 볼 것인가, 혼란을 자초하는 꼴이다. 무엇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점이 있다. 현재 민화 그리기 붐은 전국적으로 열광의 도가니를 만들고 있다. 10만 명 이상의 민화인구는 한국 문화현상의 아주 독특한 흐름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들이 ‘민화’라고 그리는 내용을 보면, 대다수가 궁화라는 점이다. 민화공모전 수상작은 궁화를 모본으로 삼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궁화는 민화보다 규모로 보나 내용의 품격으로 보나 고급스럽고 화려하기 때문이다. 궁화 취향은 시대적 추세의 반영이다. 그래서 민화라는 용어를 고집한다면, 궁화라는 보물창고를 잃게 된다. 굳이 민화라는 용어를 쓰고자 궁화라는 전통을 방기해야 좋을까.
이른바 민화의 내용은 대부분 행복추구이다. 가장 큰 사랑을 받은 화조화 부분,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작품이 남은 모란 그림, 이는 바로 부귀영화의 상징이다. 모란병풍 그림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또 장례식도 거행했다. 모란 사랑의 조형적 증거물이다. 책거리, 문자도, 인물화, 산수화 등 민화작품에 내재하는 기본적 심성은 바로 행복 추구이다. 산수화도 넓은 의미로 행복을 추구하는 그림이다. 그래서 한 일본인 학자는 민화라는 용어를 차라리 ‘행복화幸福畵’라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용어의 신선하지 않음, 이런 점을 감안하여 나는 지난 3월 열린 ‘경주민화 포럼’에서 출전이 확실한 ‘길상’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길상화吉祥畵’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러니까 궁화와 민화를 모두 아우르면서 우리 채색화의 특성을 담아낼 용어, 무엇보다 무명의 저속한 그림이 민화라는 야나기 이론의 개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의 산물이었다. 물론 새로운 용어가 자리매김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조선말기 왕실에서부터 시골의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유행했던 우리 식의 그림, 그것의 형식은 채색화였고 내용은 길상화였다는 점이다.

경상북도 상주에 위치한 남장사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물고기를 탄 인물 © 윤범모

경상북도 상주에 위치한 남장사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물고기를 탄 인물 © 윤범모

사찰에서도 길상화를 그렸다

채색화의 전통을 온전히 지킨 곳은 사찰이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억불숭유 정책에 의해 핍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찰은 고려의 찬란한 불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펼쳤다. 채색의 전통을 지킨 공로, 이는 정말 박수 받을 일이다. 어째서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민화’가 대대적으로 그려지면서 유행했을까. 거꾸로 표현하면, 이 시기는 정치 경제적으로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민간의 생활은 글자 그대로 궁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렇듯 살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행복을 담은 그림을 좋아했다. 길상화를 보면서 괴로운 일상생활을 잊고 내일의 행복을 꿈꾸었다. 마치 망자亡者를 위무慰撫하기 위한 감로도甘露圖가 이 시기에 유행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역설적 표현은 세상을 훈훈하게 한다. 길상화 속의 풍자정신과 상징성은 이런 의미에서 더욱 돋보인다.
오늘날 사찰 벽화에 남아 있는 민화풍의 그림들, 사찰이 바로 민화 제작의 모태 역할을 했음을 증거하는 부분이다.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배 물려주는 그림, 이런 내용이 왜 사찰 벽화에 그려졌는가. 산신각의 산신도는 타종교를 배려한 불교의 산물이라 볼 수 있지만, 불교와 무관한 민화풍 소재의 사원 벽화는 정말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조선시대 말기의 사원경제는 매우 열악했다. 제지업이 사찰에서 흥행했던 것도 경제난 타개책의 일환이었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불화를 그리는 화승畵僧이 민화를 그려 경제문제를 해결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찰은 채색 물감을 다루는 전문성을 지니고 있었고, 또 채색물감은 비쌌기 때문에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청 담당 가운데 소묘력을 요구하는 그림, 바로 별화別畵 담당 화가는 민간용 민화를 그릴 수 있었다. 벽에 그린 내용을 종이에 그리면 바로 ‘민화’가 됐다. 이런 민화작품에 작가 이름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까치 호랑이를 그려주면서 굳이 스님의 법명을 밝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증언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고암 이응노가 주인공이다. 그는 1920년대 초 상경하기 직전 고향(홍성, 예산)의 사찰에서 ‘민화’를 그렸다. 당시 사찰에서는 민화를 많이 그렸는데, 고암도 그곳에서 일당을 받고 그림을 그렸다. 건장한 남자의 하루 품삯이 20~30전 할 때 고암은 1원을 받았다. 당시 스님들이 많이 그린 내용은 까치 호랑이 그림이었다. 뒤에 고암은 일당 5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 돈을 가지고 고암은 운동화와 기차표를 사서 상경할 수 있었다. 사찰에서 민화를 그렸다는 증언, 이는 매우 흥미롭다. 화승畵僧이 민화를 그렸다는 증언은 민화작가의 위상을 제고시키면서 민화의 성격을 다시 헤아리게 한다. 사찰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채색 전통을 지켜 온 보루였기 때문이다. 채색화의 위상 재고를 요구하는 작금의 현실이다. 아름답고 독창적인 우리의 길상화를 위하여. ●

〈해학반도도〉 비단에 채색과 금박 714×227.7cm 12폭 병풍 1902년 추정 (미국 호놀룰루미술관 소장)

〈해학반도도〉 비단에 채색과 금박 714×227.7cm 12폭 병풍 1902년 추정 (미국 호놀룰루미술관 소장)

 

 

SPECIAL FEATURE 민화야말로 진정한 우리그림이다

정병모(경주대 교수)는 민화의 매력에 빠져 20년 넘게 민화를 연구하고 민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주저하지 않고 찾아나선다. 그는 〈반갑다 우리민화전〉 〈행복이 가득한 그림, 민화〉 등 많은 다수의 민화전시를 기획했고 《만화보다 재미있는 민화 이야기》 《민화, 가장 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등을 출간했다. 현재는 민화학회 회장이자 한국민화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자타공인 민화전문가 정 교수에게 민화의 모든 것을 물었다.

민화라는 용어 자체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학회나 포럼 등에서 ‘민화’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용어 논쟁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민화라는 용어에 대해 좋아하는 이도 많지만,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지었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보이는 이도 적지 않다. 그 대안으로 한민화, 겨레그림, 생활화, 천인화, 서민회화, 한채화 등 여러 용어가 제안된 바 있다. 하지만 새로 제안된 용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민화를 대체하거나 보편화되지 못했다. 민화라는 용어는 그 타당성 여부보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 애틋한 느낌으로 인해 사랑을 받는 것이다. 결국 명칭은 학자나 연구가들의 뛰어난 이론보다 일반인의 취향과 기호에 의해 생명성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대민화의 예술성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저변이 다양하게 이루어진 토양 속에서 세계적인 예술가가 배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화의 대중화는 세계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예컨대 19세기 중엽 유럽의 사회주의적 성향의 미술이론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이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와 같은 이들이 미술의 대중화를 부르짖었으나 이론과 구호에 그쳤고 실제적인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이론가가 아니라 주부의 취미생활로 시작해 이룩한 민화의 대중화 현상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성공한 예로서 특기할 만하다.

조선후기 풍속화는 서민이나 사대부의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이다. 민화는 서민이 그리던 그림이다. 풍속화와 민화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담론은 무엇이며 두 장르 간 영향관계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풍속화와 민화는 다른 분류기준에서 나온 개념이다. 풍속화는 산수화, 화조화와 같이 제재별로 분류한 것이고, 민화는 궁중회화, 사대부회화와 같이 신분별로 구분한 것이다. 뿌리는 다르지만, 이들은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신분사회가 붕괴되고 하류계층의 서민문화가 발전했다. 그 첫 번째 징후가 18세기의 풍속화로 나타난다. 이 시기 풍속화는 사대부 및 서민의 생활상을 다루고 있지만, 그 수요처는 주로 궁중이고 정치적 목적이었을 때 진정한 서민회화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서민의 생활상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향에 힘입어 19세기에는 진정 서민화가가 제작하고 서민 및 사대부들이 즐긴 그림이 유행했다. 그것이 민화다. 이러한 추세는 20, 21세기에 대중문화로 이어져 오늘날 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즉 풍속화와 민화는 18세기 이후 역사의 수면으로 떠오른 서민문화의 표상이고, 현대에 대중문화의 발전을 가져온 모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민화를 ‘19세기의 문화’로 인식한다.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민화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 만한 대표작품이 있는가. 또한 역사가 긴 민화를 문인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술사에서 주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19세기는 민화가 성행한 시기이지, 민화의 역사가 시작한 시기는 아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선사시대 암각화가 민화 역사의 시작이고, 좁은 의미로 보면 통일신라시대 처용문배가 시작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백성들이 대문 앞에 처용문배를 붙여서 역신을 내쫓았다는 기록이 있다. 진정한 민화인 백성의 그림으로는 기록상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예라 할 수 있다. 원래 한국의 회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와 같이 채색화가 주류를 이뤘다. 그런데 유교국가인 조선이 들어서면서 사대부의 이념에 맞는 수묵화와 문인화가 화단을 주도하면서 채색화는 변방으로 밀려났다. 이후 18, 19세기에 민화를 통해 그동안 소홀히 했던 채색이 기적처럼 부흥했다. 그것이 바로 조선후기 민화의 역사적 의의 중 하나다.

민화를 그린 주체는 서민이지만 그 문화를 서민만이 향유한 것은 아니다. 민화와 궁중회화는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민화와 궁중회화는 기본적으로 수요가 다르다. 민화는 서민이나 사대부들이 즐긴 그림이고, 궁중회화는 왕실에서 쓰인 그림이다. 그렇다보니 민화는 크기도 작고 안료나 종이와 같은 재료도 비싼 것을 사용하지 않지만, 궁중회화는 크기가 크고 재료도 비싸고 좋은 것을 사용했다. 게다가 둘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여부’이다. 민화는 표현주의적 성향을 띠는 반면, 궁중회화는 사실주의적 묘사를 중시한다.

《한국의 채색화》에서 보듯 채색화는 불화, 궁중기록화 등도 포함할 수 있게 범주가 확장된 용어다. 실제로 승려들도 민화를 많이 그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채색화라는 용어에 불화를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가 있는가.

도록의 제목이 ‘한국의 채색화’, 부제는 ‘궁중회화와 민화의 세계’다. 한국 회화는 크게 채색화와 수묵화로 나뉜다. 채색화 가운데 이번 도록에서는 궁중회화와 민화만을 담았다. 따라서 채색화는 민화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상위개념이다.
채색화를 내세운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수묵화 위주로 편성된 화단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일본화 하면 채색화를 가리키고, 중국화 하면 수묵화를 떠올린다. 그리고 한국화 하면 수묵화를 가리킨다. 수묵화는 중국 사대부문화의 산물로서 중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대표적인 중국문화이다. 수묵화 혹은 문인화는 단순한 이미지가 표현된 것이 아니라 고고한 중국의 철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러한 중국적인 성향이 강한 수묵화보다 자신의 개성이 강한 채색화를 내세웠다. 일본에서 수묵화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배울 데가 없어서 한국이나 중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이 문화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 등 화려하게 전개되어 온 전통 채색화가 변방으로 밀려나고 중국식의 수묵화가 조선 화단을 지배해온 것이다.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한국화=수묵화”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이제는 한국적이면서 전통적인 채색화를 부활시켜서 우리의 진정한 회화를 찾자는 취지를 갖는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민화 작가의 맥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조선시대 민화는 6·25전쟁 이후 격동기를 겪으면서 그 전통의 맥이 잠정적으로 끊어졌다. 다행히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이 1970년대 말부터 한국의 조자용, 김호연, 김철순, 이우환, 일본의 이타미 준 등에 영향을 주면서 민화가 되살아났다. 예전의 민화작가는 거의 사라졌지만, 문화재 수리 보수, 수출화 제작 등으로 그림 작업을 하신 분들에 의해 되살려져서 오늘날 민화로 이어진 것이다.

민화는 형식과 틀이 정해져 있다는 편견이 있다. 민화에서 창작성은 어디까지 허용되며,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민화를 모사하는 분들은 대부분 아마추어로서 취미생활로 하거나 문화재로서 기술을 전승하는 분들이다. 요즈음 베스트셀러인 컬러링북 《비밀의 정원》처럼 우리 그림인 민화를 모사하면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주부의 경우 오랫동안 자녀 교육과 집안 살림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민화를 통해서 찾으며 삶의 새로운 활력을 찾고 있다. 그분들에게 무작정 창작성을 요구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오히려 미술의 대중화라는 다른 측면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조선의 민화가 일본의 민화와 중국의 민간연화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

민화는 어느 나라에나 다 있다. 일반 사람들이 피카소나 김홍도의 비싼 그림을 집 안에 걸 수는 없다. 대부분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값싼 그림으로 집안을 장식한다. 그것이 민화가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고, 아시아에도 당연히 나라마다 민화가 존재한다. 그런데 조선민화는 일본 민화나 중국의 민화인 민간연화와 비교할 때 전통적이면서 자유로운 상상력이 뛰어나 매우 현대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해학과 변형이 자유롭게 이루어진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조선민화는 판화 위주로 발달한 일본이나 중국 민화와 달리 주로 붓 그림으로 그렸다. 그로 말미암아 민화는 비슷한 것은 있어도 똑같은 것이 드물고 약간씩 변화를 주어 다양하게 발달했다. 이러한 점이 조선민화가 갖고 있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전국 각지 대학의 부설기관과 민화연구소를 통해 민화강습이 이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식 학과를 개설해 민화를 가르치는 대학은 없다. 작가와 이론가 사이의 관계와 교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기존 미술대학의 교수들께서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 미술계가 어려워지면서 지방 미술대학의 순수미술 학과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그런데 미술시장의 움직임을 보건대 민화계는 놀라울 정도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새롭게 떠오르는 민화 시장을 감당할 수 있는 인력을 당연히 대학에서 키워야 하는데, 정작 미술의 주체들은 이러한 현상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미술대학도 현실적으로 변모해야 한다. 지금의 민화 추세로 보아 전국에 적어도 2~3개의 민화학과가 생겨야 하고, 미술대학에서는 민화에 대한 실기 및 이론 강의를 개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화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시도가 필요할 때다. 민화센터의 수장이자 30년간 민화를 공부해 오신 전문가로서 우리 민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한다.

성철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보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가슴을 친다”라고.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실력으로 팝을 부르는 것보다 우리 가요를 부르는 것이 듣는 이에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은가. 그림도 마찬가지다. 한국적인 특색이 뚜렷한 민화가 오히려 예술적인 감동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민화만큼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예술도 드물다. 민화는 분명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장르이다. 이를 널리 알리거나 이를 토대로 창의적인 그림을 그린다면, 다른 무엇보다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는 그림을 창작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진행・ 정리 임승현 기자

 2004년 민화조사차 일본 구라시키민예관를 찾은 정병모 교수

2004년 민화조사차 일본 구라시키민예관를 찾은 정병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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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콘텐츠는 최고의 감동을 선사한다”

한국 민화를 집대성한 단행본《한국의 채색화》출간

MM_SP_채색화이 책은 일찍이 “민화만이 세계시장에 먹힐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 세계를 다니며 민화를 조사한 정병모 교수의 열정으로 기획되었다. 필자는 정 교수의 부인으로서 1992년 12월 중국의 민간연화를 함께 조사하러 간 적이 있다. 중국과 수교하기 바로 전이었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정말 겁 없이 중국 북경에 내려 20여 일간 중국의 연화를 조사하러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때를 계기로 정 교수는 우리나라 민화가 어느 나라 민화보다(주로 중국과 일본) 세계시장에서 큰 파급효과를 미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정 교수는 2010년부터 명품도록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은연중에 출판사를 운영하는 필자가 출간해주길 바랐지만 비싼 도록이 판매되기 어렵다는 생각에 선뜻 제안하지 못했다. 당시 어려워진 회사 형편상 엄두도 나지 않는 작업이었다. 그러던 중 2013년 봄 우연히 민화작가 두 분과 차를 마시면서 민화명품도록 이야기를 꺼냈고, 그중 한 분이 투자 제안을 했다. 그분의 한마디에 이 책의 기획은 본격화되었다. 1권을 기획했던 것이 3권으로 늘어났다. 그 사이 한 분의 개인투자자가 또 나타났고, (재)가나문화재단에서 선뜻 책값을 선지불하는 식의 투자를 약속했다. 우리 회사의 마케팅팀은 도록에 클라우드펀드를 도입하기로 했다. 즉 민화작가들이 투자자가 되어 선투자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결국 최소한의 제작비를 투자하여, 그 배의 가치를 지니는 책을 받는다는 개념이다. 전국적인 규모의 민화작가회와 전국 지역마다 터를 잡고 있는 민화작가 선생님들이 우리를 믿고(아니 정 교수를 믿고) 사전 예약을 해주었다. 그 결과 출간 전, 예약이 450건에 달했고, 책의 제작비는 전혀 염려하지 않고 최상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정 교수는 그냥 도판수집과 논문의 방향성만 제시하면 되는데, 최고의 명품을 만들겠다는 고집(열정)으로 제작 과정에 개입해 사사건건 부딪쳤다. 정 교수는 정말 “슈퍼갑”이었다. 중요한 사항에서는 정 교수와 편집장, 디자이너 그리고 필자가 합의해서 결정을 내리는데, “이건 아니다” 싶은 사항에 3사람이 동의하면, 나는 맞서 싸웠다. 바로 종이의 결정이고 표지에 대한 결정이다. 지금은 결정에 만족하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출판업을 하면서 가지지 못한 자부심을 느낀다. 어떤 분야건 좋은 콘텐츠는 사람을 감동시킨다. 어려운 시기를 거쳐 출간한 이 책은 더욱 가치있는 작업이었다.
《한국의 채색화》는 여러 가지로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우선 정병모 교수의 필생의 과제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살아생전 자신의 과제를 이루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20여 년 세월을 민화에 미쳐있었던(?) 정 교수 개인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두 번째는 민화계의 큰 업적이다. 좋은 명품을 모아놓았다는 점에서다. 이 아름다운 한국의 채색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모아놓은 책을 출판하는 것은 앞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세 번째는 출판계의 향상된 기술이다. 이 책을 예약하기 전 많은 분이 일본의 《이조의 민화(李朝の民畵)》를
생각하며 과연 그 정도 수준의 책이 나올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다. 몇 해 전만 해도 도록은 수입지를 써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책 시대가 도래한 때에 이러한 미술 도록이 이후에 또다시 출간될 수 있을까. 혹 종이시대의 마지막 작품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최고를 지향해 만들었다. 이 책을 앱북으로도 기획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 주는 아름다움은 인쇄물을 따라가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네 번째, 도록을 통해 우리의 민화가 글로벌한 콘텐츠로 드라마, 음악에 이은 제3의 한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일본의 우키요에가 유럽에 자포니카 선풍을 일으킨 것처럼 말이다. 현재 일본은 물론 미국에서도 민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고 페루에서도 민화 체험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불황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좋은 콘텐츠를 만들게 된 것은 민화인의 열정과 열망덕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을 완성하게 된 것은 순전히 민화인의 열정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애 Sni Factory 대표

 

 

SPECIAL FEATURE 민화民畵, 발화發花하다

(사)한국민화센터(이사장 정병모)에서 주최하는 <경주민화포럼2015>가 지난 3월 20, 21일
양일간 경주 현대호텔에서 열렸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이 포럼은 2013년 논의한 “민화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복기시켜 다시 포럼의 중심으로 삼았다. “같으면서 다른 세계, 궁중회화와 민화”라는 부제와 함께 열린 이번 포럼은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에 대한 논쟁, 궁중 채색화와 민화의 개념 구분, 우리 민화를 포함한 서민/민중들의 문화에 뿌리 박혀 있는 웃음의 미학, 민화에 대한 양식사적 접근 등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첫날 포럼에서, 첫 번째 토론자로 참여한 윤범모(가천대 교수)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1927년 사용하면서 정리한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의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용어의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길상화’를 민화를 대신할 용어로 제시하면서 좌중은 크게 술렁였다. 이후 “한국 웃음문화의 전통”을 발표한 조동일(서울대 명예교수)가 “민요, 민담과 함께 민화는 ‘민民’자 돌림 3형제이다. 민요나 민담이 ‘민’을 낮춰 부른다는 인식을 주지 않듯 민화라는 용어의 변경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용어 문제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현재 전국 민화관련 인구는 약 10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각종 교육기관을 통해 민화를 배우는 일반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민화를 배우고 그리는 많은 이들은 민화에 대한 이론적 토대에 대한 궁금증 또한 상당하다. 그 동안 한국미술사에서 민화에 대한 연구는 문인화에 비해 다소 평가절하 되어왔다. 미술사학계의 개념정의가 확립되기 이전에 일반인들이 역으로 상아탑에 질문을 던지고, 개념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포럼에서 못다한 논의는 포럼 첫날 밤 약 2시간의 ‘번개 토론’으로 이어갔다. 이 자리에는 안휘준(서울대 명예교수), 윤열수(가회박물관 관장), 윤범모(가천대 교수), 정병모(경주대 교수)(왼쪽 사진)를 포함한 민화 이론 및 작가 관계자 약 30명이 참여한 가운데 민화의 개념정의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먼저 ‘민화’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자는 주장을 한 윤범모 교수는 “민화의 개념을 먼저 짚어야 한다며 개념이 변하면 용어도 변해야한다”며 “민화 연구에서 궁화와 민화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덧붙였다. 정병모 교수는 “현대민화의 개념을 포용할 수 있는 상위개념으로서의 용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최근 민화와 궁중화를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 ‘채색화’를 내세워 도록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윤열수 관장은 “‘채색화’는 한국적인 용어가 아니라 어디에도 쓰일 수 있는 독창성이 없는 언어다. 하지만 ‘민화’는 세계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경쟁력있는 용어다”라며, ‘민화’ 명칭 사용을 이어갈 것을 주장했다. 한편 안휘준 명예교수는 ‘서민화’ ‘위민화’ 혹은 ‘전승화’라는 다양한 용어를 제안했다. 민화는 우리의 전통미술을 계승한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전승화’를 사용하면 민화를 떠올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더불어 민화에 대해서도 조선시대에 갑자기 등장한 장르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화원화가 출신이거나 아마추어 화가들이 주변사람을 위해 그린 그림을 민화라고 볼 수 있다며 “어떤 용어든지 시대 변화에 따라 내용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포럼과 특별토론에 참여한 다수의 작가들은 주로 민화란 용어를 사용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민화라는 용어를 오랜 기간 사용해 왔기에 대중에게도 낯익고 오히려 반감도 없다는 것이다. ‘민화’에 담긴 계급요소나, 궁중회화와 민화의 모호한 구별에 대해서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정리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아무래도 작가 입장에서는 소재의 폭을 넓혀 창조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궁중회화와 민화의 구분 짓기를 꺼리는 경향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조선시대의 민화와 현대민화는 그 용어는 같으나 개념은 전혀 다르게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모아졌다. 민화는 궁중이 사라진 후, 궁중회화까지를 흡수했고 신분제가 사라진 이후 민화를 제작하고 향유하는 사람도 변화했다. 민화의 표현은 전통을 충실히 계승했으나 오늘의 시대를 반영하는 미감과 독특한 창조성은 고전민화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요소다.
이날의 토론은 ‘민화’에 대한 개념정의와 그 장르의 분류가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냈다. 민화인구가 10만명에 육박하고 국제 미술사에서 한국미술의 한 장르로서 논의되려면 국내의 미술사적 개념정리는 선행되어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단순히 ‘작명’의 문제를 떠나서 그 개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학문적 접근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민화시장을 확장시키고 그 기반을 튼실히 하기위해서 학계의 활발한 논의와 학문적 정의가 필수불가결하다. ●
임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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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엄재권 (4)“민화에 대한 인식이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

엄재권 (사)한국민화협회 회장

민화가 각광받고 있다. 민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민화는 접근성이 매우 높다. 일단 화실이 전국 각지에 있다. 전국 대학 부설기관 평생교육원만 40곳이 넘는다. 이 회원들이 대부분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기초적인 민화는 초보라도, 열흘 정도만 배우면 한 작품이 완성된다. 기존에 있는 초를 따서 그 위에 색을 칠하면 작품이 탄생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꾸준히 하다보면, 민화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한국민화협회 회원은 어떻게 구성돼 있나.
민화협회 회원만 400명이 넘는다. 입회 절차가 까다로운 편이다. 민화협회 공모전 대상을 받으면 30점, 특선 15점, 입선 8점, 미술대전 대상 10점을 얻는다. 민화협회 공모전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다. 이렇게 30점을 채우면 입회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민화에 입문한 지 최소 5년 이상이 되어야 자격요건을 갖출 수 있다.

협회의 주요 활동과 교육 진행과정이 궁금하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민화로는 우리 협회가 유일하다.
또 구청의 허가를 받은 평생교육원을 운영한다. 지도자과정, 신입생을 교육하는 기관이다. 이론과 실기를 두루 가르친다. 1기의 경우에는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론 강좌를 맡아서 진행했다.

협회 산하 기관 도화원은 어떤 곳인가.
협회에 속한 기관이지만 아직 그 형태가 애매하다. 교육기관은 아니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계속 논의할 생각이다. 공모전 대상 수상자가 도화원에 입회한다고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시스템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고민 중이다.

민화협회 신임 회장으로서 협회를 이끌어갈 계획이 궁금하다.
회장의 임기는 2년, 한번 연임이 가능하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기 때문에 계획을 면밀히 짜서 실행해 나가겠다. 우선 한때 부는 바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민화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아질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첫째 목표다. 그래야 민화가 한 단계 더 도약 할 수 있다. 학회에서 세미나를 할 때, 몇몇 이론가만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민화에 관심 있는 모든 이가 함께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특히 전국에 흩어진 협회들을 모아서 연계하려고 한다. 민화협회 외에도 민화전업작가회, 우리민화협회, 민화센터 등 다수의 민화관련 단체 및 기관이 존재한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가 민화협회 회원과 겹친다.
임승현 기자

SPECIAL FEATURE 우리가 모르는 이슬람문화

이슬람 문화의 어제와 오늘
최근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며 우리 삶에 부쩍 다가온 ‘이슬람’. 그러나 정작 우리는 이슬람문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현재 무슬림 인구는 18억에 육박하고 아프리카 중북부 지역,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에 걸친 57개국이 이슬람회의기구(OIC, Organization of the Islamic Conference)에 가입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슬람’하면 22개의 아랍국가에 국한된 ‘아랍’이나 지역적 의미의 ‘중동’을 떠올리기 쉽다. 또는 일부 지역의 정치적 이슈와 전쟁 및 특정 테러 무장단체 이미지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슬람문화를 떠올리며 혹시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한다면, 그것은 이슬람문화에 대한 무지가 불러일으킨 불안감 때문은 아닐까. 《월간미술》은 이슬람의 문화와 미술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슬람문화 전반, 이슬람 전통문화와 오늘날 미술의 모습,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시선을 포함해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이슬람문화까지 접근해 본다.
이번 특별기획이 이슬람문화에 대한 왜곡 없는 이해를 돕는 최소한의 가이드가 되길 바란다. 우리가 모르면서 알고 있고, 알면서 실체가 없던 세계, 이슬람의 새로운 모습이 펼쳐진다.

서울중앙성원 2층 남성예배실 내부 앞 페이지 서울 용산구 우사단로(한남동)에 위치한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 사진 조영하

서울중앙성원 2층 남성예배실 내부 앞 페이지 서울 용산구 우사단로(한남동)에 위치한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 사진 조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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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문화 용어 사전

임병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 연구교수

국가와 지역

이슬람 Islam 이슬람은 종교적 명칭이다. 이슬람 국가라 하면 이슬람법 샤리아에 따라 이슬람교도(무슬림) 지도자가 통치하는 국가이다. 일반적으로 중동, 지중해, 중앙아시아, 카프카스, 발칸 반도,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이슬람회의기구(OIC, Organization of the Islamic Conference)에 포함된 57개국을 말한다. OIC는 이슬람 국가들의 연대 강화와 교류 촉진, 민족독립을 지향하는 무슬림에 대한 투쟁지원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아랍 Arab ‘아랍’은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아랍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을 통칭하며, 아랍연맹(League of Arab States)에 가입된 22개국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아랍 국가는 국민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 이슬람국가이지만, 민족적으로 아랍인이 아니면서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도 많이 있기 때문에 모든 이슬람국가가 아랍 국가는 아니다. 특히 중동에 있는 터키와 이란은 아랍이 아닌 이슬람국가이다. 이란은 과거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했던 아리아인의 나라로 아랍인과는 민족적으로 다르다. 터키도 13세기에 중앙아시아로부터 이동해 와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건설한 투르크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중동 Middle East 원래는 유럽에서 본 지리적 개념으로 극동(Far East), 근동(Near East)에 대하여 그 중간 지역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현재의 중동은 아랍연맹에 가입한 아랍국가 22개국(팔레스타인 포함)과 아프가니스탄, 이란, 터키, 이스라엘 등의 비(非)아랍국가로 이루어진다. 종교적으로 이슬람이 압도적이지만 기독교 각파가 소수파로 존재한다.

서아시아 West Asia 지리학적으로는 ‘서남아시아’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며 ‘근동, 중근동’ 등의 명칭도 이 지역을 가리킨다.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 있으며, 자연·민족·역사·문화적으로 큰 공통점이 있다. 이 지역의 주요국으로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터키,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스라엘 등이 있다.

아랍에미리트 United Arab Emirates 정식 명칭은 아랍에미리트연합(United Arab Emirates, U.A.E.)이다. 1892년 영국 식민 지배하에 있던 6개 아미르국(토후국), 즉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아즈만, 움무 알꾸와인, 후자이라가 1971년 입헌연방국으로 독립하면서 결성한 연방공화국이다. 1972년 라으스 알카이마가 참여함에 따라 현재는 총 7개 아미르국이 연방을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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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탈레반 Taliban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주(州)에서 결성된 무장 이슬람 정치단체로서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세력이다. 약 2만5000여 명의 학생 (딸리분)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알 카에다 Al-Qaeda 197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아랍 의용군으로 참전한 오사마 빈 라덴(우사마 빈 라딘)이 결성한 국제적인 테러 지원 조직이다. 1991년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반미 세력으로 전환하였으며 빈 라덴의 막대한 자금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파키스탄, 수단, 필리핀,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이고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총 34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대, 본부’란 뜻의 ‘알까이다(al-qā‘īdah)’가 변형된 명칭이다.

이슬람원리주의 이슬람의 성서인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원래의 이슬람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이슬람화운동이다. 이슬람근본주의 이슬람주의, 이슬람개혁운동, 이슬람부흥운동, 이슬람정통주의라는 말로도 사용된다. 이것은 서구 열강이 중근동에 진출했을 때 전통 이슬람이 외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여 이슬람세계의 파탄을 가져온 데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

이슬람국가 IS 이라크·샴 이슬람국가(ISIS : Islamic State of Iraq and al-Sham) 또는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의 줄임말이다. 두 이름이 혼용된 데는 시리아·레바논·요르단 지역의 옛 지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2014년 6월에 시리아와 이라크의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이슬람원리주의 국가를 선포했다. 인질들을 참수하거나 화형하는 등의 장면을 동영상으로 퍼뜨림으로써 전 세계를 공포와 경악에 떨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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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알라 Allāh ‘알라’는 아랍어 정관사 ‘알’과 ‘신’이라는 뜻의 명사 ‘일라’의 결합으로, 이슬람의 유일신을 뜻한다. 그런데 간혹 ‘알라신’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신신’이라는 이상한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슬람의 신을 뜻할 때는 ‘알라’라고 하는 것이 옳다. 간혹 이를 ‘하나님’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유일신과 혼동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알라’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좋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에는 유일신 알라를 지칭하는 이름이 99개가 나오는데, 우리는 이 이름들을 통해 알라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자비로우신 분, 왕, 신성하신 분, 믿는 자들의 보호자, 승리하시는 분, 창조자, 용서하시는 분, 모든 것을 아시는 분, 재판관, 사랑을 주시는 분, 가장 강하신 분, 유일하신 분, 복수를 하시는 분, 상속자, 안내하시는 분 등등.

코란 Koran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슬람의 성서를 지칭하는 용어로 ‘코란, 꾸란, 쿠란, 꾸르안’ 등과 같은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아랍어로는 ‘알꾸르안(al-Qur’ān)’이라고 발음되는데 ‘알’은 정관사이며 ‘꾸르안’은 ‘읽혀야 할 것’이란 의미이다. 아랍어 원음에 맞는 ‘꾸르안’이란 용어의 사용이 바람직하지만,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코란’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겠다. 코란은 114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전 분량이 일시에 계시된 것이 아니라 메카에서 13년, 메디나에서 10년, 총 23년 동안 질문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부분적이고 간헐적으로 계시되었다. 이슬람법 샤리아의 제1법원(法源)으로서 무슬림이라면 코란에 명시된 내용은 반드시 준수해야만 하는 알라의 절대적인 명령이다.

무슬림 Muslim 이슬람을 믿는 신도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간혹 ‘모슬렘’이란 용어도 쓰이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알라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라는 뜻이며, 전 세계의 무슬림 수는 약 16억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무함마드 Muḥammad 이슬람의 마지막 예언자이며, 간혹 ‘마호메트’란 명칭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잘못된 용어이다. 무함마드는 서력 570년에 태어나 632년에 사망한 역사적 인물이며, 그가 건설한 이슬람제국이 인류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인류에 공헌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다.

회교 回敎 종교로서의 이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회교 또는 회회교’는 중국의 회족이 이슬람을 믿은 데서 유래한 용어다. 그러나 전 세계 약 16억 이상이 믿는 종교는 회교가 아니라 이슬람이다. 간혹 ‘무함마드교, 마호메트교’라는 용어들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크게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종교를 의미할 때는 ‘이슬람(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메카 Mecca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이슬람 제1의 성지로 원래 아랍어 발음은 ‘막카(Makkah)’이다. 메카는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무역과 종교 (우상숭배)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메카의 카아바 신전은 이슬람이 도래한 이후 모든 무슬림의 예배 방향(끼블라)이 되었다. 메카 순례는 경제적 능력이 되는 무슬림에게 평생 한 번은 수행해야만 하는 의무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의 메카”라고 하면 ‘중심지, 센터’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메디나 Medina 사우디아라비아 히자즈 지방에 있는 이슬람의 제2성지이며, 아랍어로는 ‘알마디나(al-Madīnah)’라고 발음한다. 원래 명칭은 유대인이 거주하던 ‘야쓰립’이었으나, 예언자 무함마드가 622년에 핍박 받던 추종자들을 이끌고 메카에서 이곳으로 이주(히즈라)한 다음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아바 al-Ka‘bah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하람성원 중앙에 있는 정육면체의 대리석으로, 모든 무슬림이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성소이다. 무슬림들은 매일 5차례의 예배 시간에 이곳을 향해 기도한다. 순례 의식도 이곳에서 시작되고 이곳에서 끝난다. 산 자나 죽은 자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고향과 같다.

샤리아 Sharī‘ah ‘큰 길, 절대자인 알라에게 다가가는 길’이란 뜻으로 이슬람법을 가리킨다. 샤리아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알라에 의해 계시된 것이며 코란, 하디스(순나), 합의(이즈마으), 유추(끼야스)의 4가지 법원(法源)에 기초한다.

이슬람 종파 이슬람의 종파는 크게 수니파, 시아(쉬아)파, 카와리지파로 구분되며, 그 외 열두 이맘파, 일곱 이맘파(이스마일파), 자이드파, 알파위파, 드루즈파, 바하이파 등은 시아파의 소수 종파들이다. 수니파는 무슬림의 약 90%를 차지하는 다수 종파로서 4명의 정통칼리파(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를 예언자 무함마드의 합법적인 후계자로 인정한다. 시아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이며 사위였던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와 그의 후손만을 후계자로 인정한다. 카와리지파는 신에 의한 칼리파 계승을 주장하며 알리 진영에서 ‘이탈한 이들’이다.

수피 Sūfī 이슬람 수도사를 가리키는데, 양털을 뜻하는 ‘수프(Sūf)’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양털 옷을 걸치고 세속적인 삶 대신 금욕생활을 통해 오로지 알라에게 헌신하는 고행의 길을 택했다. 이들은 신에게 가까이 가는 길은 오직 금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코란 구절을 반복해서 외치는 행위(디크르)나 음악과 춤을 통해 알라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춤(수피댄스)을 통해 그들의 간절한 염원을 느낄 수 있다. 12세기경 이슬람 내에서 수피즘이 일종의 사회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이후 금욕주의에 머물지 않고 환희와 기쁨으로 충만한 사랑의 신비주의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사랑을 노래한 많은 시인과 성인을 배출한 수피즘은 메소포타미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지로 확산되었다

지하드 Jihād ‘노력, 투쟁, 성전’이란 뜻이며, 신앙과 원리를 위한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투쟁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이교도들과의 물리적인 싸움을 가리키는 ‘성전’이란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실정이다. 카와리지파와 이바디파는 지하드를 6번째 기둥으로 정하고 있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 Five Pillars, Arkān al-Islām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이 준수해야만 하는 5가지 의무를 말한다. 첫 번째 기둥은 신앙 고백인 ‘샤하다(Shahādah)’이며, 두 번째 기둥이 매일 5차례 수행하는 예배인 ‘쌀라(Ṣalāh)’, 세 번째 기둥이 가난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징수하는 ‘자카트(Zakāh)’이다. 네 번째 기둥은 이슬람력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한 달 동안의 단식인 ‘싸움(Ṣawm)’, 다섯 번째 기둥이 평생에 한 번은 수행해야 되는 메카 순례인 ‘핫즈(Ḥajj)’이다.

아단 Adhān 신도들에게 하루 5번(새벽, 정오, 오후, 저녁, 자기 전)의 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를 뜻한다. 예배 시간이 되면 무앗딘이 이슬람 사원의 첨탑(미나라)에 올라가 메카를 향해 서서 소리 높여 외치는데, 지역에 따라 리듬이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칼리파 Khalīfah ‘후계자’란 뜻이며 예언자 무함마드가 632년 사망한 뒤 그의 지위를 계승했던 지도자를 가리킨다. 무함마드의 뒤를 이은 4명의 칼리파를 ‘정통 칼리파’라고 하며, 칼리파란 칭호는 이후 우마이야조, 압바스조에서도 사용되었다. 칼리파제는 1924년 터키 공화국에 의해 폐지되었다.

술탄 Sulṭān ‘힘, 권위, 통치, 통치자’란 뜻이며 이슬람의 최고 권위자인 칼리파가 지방 총독과 같은 통치자에게 수여하는 칭호이다. 칼리파가 정치, 군사 및 종교의 최고 지도자인 반면 술탄은 군사와 정치 권력을 의미한다. 술탄이 이슬람세계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하게 된 것은 오스만제국의 무라드 1세 때부터였다. 오늘날에는 오만과 브루나이가 정부 형태로 술탄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일부 부족 지도자들이 술탄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맘 Imām ‘지도자 또는 모범’이라는 뜻이며,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의 지도자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금요일에 행하는 집단 예배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수니파에서는 이슬람 교단의 지도자인 칼리파를 가리키며 종교적 기능이 아닌 행정적·정치적 기능을 담당했다. 시아파에서는 공통적으로 제4대 정통 칼리파였던 알리의 자손만을 이맘으로 인정하였다. 학식이 뛰어난 이슬람 학자를 부르는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마흐디 Mahdī ‘인도된 자, 신에 의해 올바르게 인도된 자’를 뜻하며, ‘메시아’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은폐와 현현(또는 재림)을 특징으로 하는 마흐디 사상은 시아파의 핵심 사상이다. 알라가 874년 무함마드 알마흐디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들로부터 그를 은폐하였으며, 언젠가 마흐디가 인류를 인도하기 위해 현현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사라센 Saracen 중세 때 유럽인들이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을 부르던 호칭이다. 그리스·로마에 살던 라틴문화권 사람들이 시리아 초원의 유목민을 사라세니(Saraceni)라고 부른 데서 연유하였다. 7세기 이슬람이 도래한 이후로는 비잔티움인(人)이 이슬람교도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십자군을 통하여 유럽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무어인 Moors ‘피부색이 어두운 자’란 뜻이며, 유럽에서 북아프리카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스페인에서는 아직도 아랍인을 모로(Moros)라고 부르며, 1492년 재정복 이후에도 스페인에 남아 외견상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아랍인을 모리스코스(Moriscos)라고 하였다. 유럽인의 식민지가 점점 팽창하면서 무어인이 무슬림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에 사는 무슬림을 흔히 ‘무어인’이라 부르고, 필리핀에 사는 무슬림 소수 민족도 ‘모로스 또는 모리스코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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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양식

모스크 Mosque 무슬림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슬람사원을 가리키며, 아랍어로는 ‘마스지드’라고 한다. 건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모든 곳이 모스크이며, 어느 곳에서나 근행되는 예배는 효력이 동일하다고 한다. 그러나 카아바 신전이 있는 메카의 하람성원에서는 10만 배, 메디나의 예언자사원에서는 1000배, 예루살렘의 악사사원에서는 500배의 효력이 있다고 한다.

미흐랍 Miḥrāb 이슬람사원의 한 벽에 메카 방향(끼블라)으로 만들어져 있는 아치형 홈을 가리킨다. 이슬람은 우상을 금지한 대신 미흐랍을 메카 방향의 벽에 설치하고 예배의 표상으로 삼았다. 미흐랍은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이 서는 장소이기도 하며 보통은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민바르 Minbar 이맘이나 설교자가 설교하는 연단을 가리키며, 예배 방향을 가리키는 미흐랍 옆에 있다.
피슈타크 Pishitaq 직사각형 틀을 가진 이중의 아치형 입구를 가리키며, 인도에서 기원하였으나 아나톨리아와 이란의 건축 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서체, 아라베스크 무늬, 유약을 바른 타일로 장식되기도 한다.

미나렛 Minaret 이슬람사원(모스크, 마스지드)에 있는 첨탑을 가리키며, 아랍어의 ‘미나라(등대)’에서 유래했다.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 시각에 무앗딘이 올라가 예배를 권유하는 아단을 하는 곳이며, 유사시에는 망루나 전망대 구실도 했다. 미나렛의 형태는 이라크의 사마라모스크와 이집트 카이로의 이븐 뚤룬모스크에 있는 나선형(말위야) 첨탑에서부터 연필 모양의 가느다란 첨탑, 4각형 첨탑 등 매우 다양하다.

끼블라 Qiblah 무슬림들이 행하는 예배의 방향을 가리키며, 이슬람 초기에는 예루살렘이었으나 이후 메카로 변경되었다. 무슬림들은 예배뿐만 아니라 짐승을 도살할 때도 죽은 자를 매장할 때도 얼굴을 메카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이완 Iwan 3면이 벽으로 에워싸인 아치형의 현관을 가리킨다. 사산조 때 유행하였으며 이후 이슬람건축에 포함되었다.

칸 Khān 숙박시설과 무역센터의 기능을 결합한 건물을 가리킨다. 보통 ‘칸’에는 마구간, 창고, 숙박시설, 모스크가 갖추어져 있다. 현재 가장 유명한 곳은 이집트의 최대 전통 시장인 ‘칸 알칼릴리’를 들 수 있다.

아라베스크 Arabesque ‘아라비아풍’이란 뜻이며, 그리스 공예가들에게서 유래했으나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이슬람교의 특성상 살아 있는 신의 형상을 만들지 않는 대신 신을 찬미하는 의미로 매우 정교하고 정형화된 양식을 만들게 된 것이다. 문자와 식물, 기하학적인 무늬가 배합되어 독특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내며, 이슬람 장식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무까르나스 Muqarnas 이란에서 유래한 독창적인 건물 장식 방법으로서, 아랍-이슬람 건축물에서 벽과 천장이 연결되는 모퉁이에 사용되거나, 입방형의 구조물을 아치형으로 바꿔주는 연결 부위를 장식하는 데 사용된다. 무까르나스에는 쐐기를 박아 연결한 나무 조각이나 모퉁이를 둥글게 마무리하기 위해 수직적으로 배합한 석고 주조에 조각을 한 형태 등이 있고, 말벌 집의 모양이나 종유석을 닮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식의 아름답고 독특한 기하학적 설계는 창문이나 출입문, 미흐랍이나 돔 천장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마드라사 Madrasah ‘학교’라는 뜻이며, 전통적으로 이슬람 학자인 울라마를 육성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이다. 법학을 중심으로 코란학, 하디스학, 언어학과 같은 전통 학문 외에도 수학, 천문학, 의학, 철학 등의 외래 학문을 가르쳤다. 마드라사가 이슬람세계의 보편적인 제도로 자리 잡은 것은 11세기 셀죽조 때부터이며, 10~12세기에 존재한 파띠마조가 카이로에 건설했던 아즈하르모스크의 마드라사는 세계 최초의 대학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후 마드라사는 유럽 대학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대학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구분하거나 검은 가운을 입는 것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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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할랄 Ḥalāl 과 하람 Ḥarām 할랄은 ‘허용된 것, 허용할 수 있는, 합법적인’이란 뜻이며, 특히 음식 가운데 이슬람식으로 도살된 고기에 적용된다. 그 외 과일, 채소, 곡류 등 모든 식물성 음식과 어류, 어패류 등의 모든 해산물 같이 이슬람 율법 하에서 무슬림이 먹고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된 제품을 총칭한다. 반면 하람은 ‘금지된 것, 금지된, 신성한’이란 뜻이며 술과 마약류처럼 취하게 하여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 돼지고기와 개 등의 동물, 자연사했거나 이슬람 율법에 따라 도살되지 않은 고기들과 같이 무슬림에게 금지된 음식을 하람이라고 한다.

오른쪽과 왼쪽 아랍인은 악수를 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 선물을 주고받을 때, 코란을 만질 때에는 반드시 오른손만을 사용하고, 왼손은 화장실에서 용변 후 씻을 때, 신발을 닦을 때, 코를 풀 때 사용한다. 잠을 잘 때도 오른쪽 방향으로 자며 왼쪽으로 자는 것을 피한다. 화장실에 갈 땐 먼저 왼발을 화장실 안으로 내딛는다. 손톱을 자를 때는 오른손 먼저, 그 다음이 왼손, 오른발, 왼발 순으로 깎는다. 칫솔질도 입안의 오른쪽부터 한다. 이러한 아랍인의 문화를 ‘오른손 사용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장례문화 아랍인은 이슬람 전통에 따라 장례식을 치르는데, 우선 고인의 몸을 씻기고 흰 천으로 감싼다. 그리고 사망 당일 매장하는데, 고인의 머리를 메카의 카아바 신전으로 향하도록 눕힌다. 보통 매장은 이른 오후 예배를 마치고 특별 장례예배 후 진행되며, 매장이 끝난 후 조문객들은 고인의 가족을 찾아가 위로한다.

마흐르 Mahr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돈으로 ‘신부값’이란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으나 ‘혼례금’이란 용어를 권장한다. 이것은 만약의 경우에 대한 일종의 보험금 성격을 가지며, 신부의 고유 재산이다. 만일 이혼을 할 경우에는 신부가 혼례금의 전체를 다 가지게 되며, 초야를 치르기 전에 혼인 관계가 깨어지면 절반을 신부가 갖는다.

결혼문화 아랍인에게 결혼은 종교적 의무이자 사회적 의무이다. 아랍인이 결혼 상대자를 선택할 때는 혈연적, 종교적 동질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예전에는 사촌 간의 결혼과 무슬림 간의 결혼이 지배적이었다. 무슬림 남성은 기독교도나 유대교도 여성과 결혼할 수 있다. 만일 이교도 여성이 결혼 후에도 자신의 종교를 고수한다면 남편 사후에 상속권을 부여 받지 못한다. 한편 무슬림 여성은 무슬림 남성과만 결혼할 수 있다.

인샬라 in shā’a Allāh ‘알라가 원하신다면’이란 뜻이며, ‘인샤알라’라고 발음하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 보통 미래의 예정된 행위나 약속과 함께 사용되며, 간혹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정당함으로 이해되나 기본적으로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라마단 Ramaḍān 이슬람력(히즈라력) 아홉 번째 달의 명칭이며, 코란이 최초로 계시된 신성한 달로서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의 의무 단식 기간이다. 이슬람력은 태음력이기 때문에 라마단 달은 1년 중 어느 계절이나 될 수 있다. 단식하는 기간은 라마단 달 30일 동안 검은 실과 흰 실이 구분되는 새벽부터 해가 지는 낮 시간 모두가 해당된다.

하렘 Harem ‘신성한 장소, 성소, 여성, 부인’이란 뜻이며, 아랍어 ‘하림(ḥarīm)’이 터키풍으로 변형된 명칭이다. 보통 이슬람사회의 여성과 부인들이 거처하는 방을 가리키며, 특정한 상황을 제외하고 일반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장소이다.

우두 Wuḍū’ ‘세정, 소정’이란 뜻이며, 보통 정규 예배인 쌀라를 하기 전에 행하는 일정한 정화 의식이다. 우두용 물은 흐르는 물이어야 하며, 물이 없는 경우에는 모래, 흙, 돌 등을 사용하는 ‘따얌뭄’이라는 정화 의식으로 대체할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이슬람사원 안마당에는 우두에 사용할 수 있는 분수, 샘, 수도 등이 있다.

아라비아 숫자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는 1, 2, 3, 4, 5, 6, 7, 8, 9, 0의 열 자를 말한다. 원래 인도의 범어 알파벳으로부터 전와되어 아랍인이 유럽에 전파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생겨났다. 피사노 등에 의해 개량되어 15세기 말기에 지금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고 ‘인도-아라비아숫자’라고도 한다.

터번 Turban 인도에서 비롯된 복식으로, 주로 인도인이나 이슬람교도가 머리에 둘러 감은 천을 가리킨다. 긴 천을 머리에 둘러 심한 더위를 피하고, 또 바람을 막기 위해 쓴다.

히잡 Ḥijāb ‘베일, 커튼, 휘장, 장막’ 등을 뜻하며, 무슬림 여성이 사용하는 얼굴가리개를 통칭한다. 히잡은 여성의 머리, 목을 가리지만 얼굴은 가리지 않는다. 눈만 내놓은 얼굴가리개는 ‘니깝(niqāb)’이라고 부르며 ‘부르카(burqu‘)’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체의 모든 부분을 가리며 사물을 확인할 수 있게 눈 부위만 망사로 돼 있다. 이란에서는 머리와 몸을 가리는 베일을 ‘차도르(chador)’라고 하고, 터키에서는 이를 ‘차르샤프’라고 한다.

명예살인 요르단, 이집트, 예멘 등의 이슬람국가에서 간통이나 정조 상실 등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남편이나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해당 여성을 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살해한 가족은 붙잡혀도 가벼운 처벌만 받기 때문에 일부 이슬람국가들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어 왔다.

할례 Circumcision 남성의 성기 일부인 포피를 제거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슬람사회에서는 할례가 의무 사항이 아닌 예언자 무함마드의 권고 사항으로 준수되고 있다.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코란의 계율에 따라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할례를 한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새로운 무슬림에게는 나이에 관계없이 건강에 피해가 없는 한 할례를 권장한다. 여성의 할례는 코란과 순나(하디스) 어느 쪽에서도 권장되지 않으며, 간혹 발생하는 여성 할례는 이슬람의 전통이 아니라 아프리카 일부 부족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히즈라 al-Hijrah ‘이주’라는 뜻이며, 62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 지배층의 박해를 피해 추종자들을 이끌로 메디나(당시는 야쓰립)로 이주한 사건이다. 622년을 히즈라력의 기원으로 정한 인물은 제2대 정통 칼리파인 우마르였다. 칼리파 우마르는 히즈라력의 시작을 음력인 무하르람(히즈라력의 첫 번째 달) 제1일로 했는데, 이날은 서력으로는 622년 7월 16일이다. 영어로는 ‘히즈라 기원으로’라는 뜻의 라틴어 ‘Anno Hegirae’의 머리글자인 ‘A.H.’로 표시한다. 태음력이기에 매 월이 29일, 30일로 번갈아 지나게 되며 1년이 354일이다.

아랍 서체 원어로는 ‘알캇뜨 알아라비(al-khaṭṭ al-‘arabī)’라고 하는데, 이슬람이 피조물의 형상을 그림이나 조형물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사람이나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반면에 기하학적인 문양과 아랍어 서체를 통한 독특한 예술이 발전하였다. 아랍어 서체는 이슬람사원이나 건축물의 벽면, 도자기, 금속이나 목제 세공품 등의 표면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가장 많이 쓰이는 아랍 서체는 쿠파체이고, 나스크체는 인쇄체로, 루끄아체, 쑬루쓰체, 페르시아체, 디완체는 필기체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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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국가 국기에 왜 초승달과 별 모양이 많은가?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는 13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중동을 지배한 오스만제국의 국기에서 유래했다. 오스만제국이 붕괴된 후 탄생한 새로운 국가들이 이를 모방해 국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스만제국의 국기는 붉은색 바탕에 하얀색 초승달과 별을 그린 것이었다. 오스만제국이 초승달과 별을 국기에 넣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기원전 4세기 비잔티움(현재의 이스탄불)이 마케도니아의 공격을 받았을 때 달빛 덕분에 성이 함락되지 않았다, 오스만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베이의 꿈에 초승달과 별이 나타나 제국의 수립을 예언했다, 달의 여신 다이나와 성모 마리아의 상징인 ‘베들레헴의 별’을 나타낸다 등. 또한 초승달이 뜬 밤에 별(천사를 상징)이 내려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려주었다는 설과 메카에서 메디나로 무함마드가 이주(히즈라)할 때 초승달과 별이 지켜주었다는 설도 무슬림에게는 설득력이 있다.

SPECIAL FEATURE 이슬람문화의 이해

최영길 명지대 명예교수

우리는 지금 항공산업의 발달로 하루 정도면 세계 어느 나라든 못 갈 곳이 없을 정도로 지구촌 일일생활권 안에서 살고 있으며 초고속 정보통신망의 발달로 1분 이내에 세계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지구촌 한 가정, 한 가족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종교라는 장벽이 때로는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간 갈등과 불화를 조성하고 나아가 지구촌 이곳저곳에서 마찰과 충돌 그리고 국가와 국가 간에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다행과 불행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문화에 친숙해졌지만 14세기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이슬람문화에 대해서는 너무도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다. 이슬람세계의 미술도 마찬가지다. 동상이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꾸란(코란)》*의 경고에 따라 조형 및 조각미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반면 우주에 관한 사색과 연구를 강조한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기하학적 미술과 꾸란 문구를 인용한 이슬람 서체미술의 발달은 다른 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절정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미술은 여전히 생소하다.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유목민 출신의 두 인물이 있다. 가장 빠른 말을 타고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초원의 유목민 칭기즈 칸과 가장 느린 낙타를 타고 가장 느린 속도로 가장 오랜 기간에 방대한 제국을 건설한 사막의 유목민 무함마드(우리에게는 마호메트로 알려져 있다)가 있다. 13세기 몽골에서 시작한 칭기즈 칸은 세계가 지켜본 가장 방대한 지역을 정복했으나 그 후예들은 지금의 몽골인들이 살고 있는 영토 외에는 별로 남겨놓은 것이 없다. 그러나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한 무함마드의 이슬람 회복운동은 그의 추종자에 의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왕국을 포함한 서남아시아에서부터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등을 포함한 중앙아시아권,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터키 등을 포함한 중동권과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수단 등을 포함한 아프리카 대륙 중・북부에 걸쳐 57개 국가에 달하는 이슬람문화권을 형성했고 전 세계에 18억 무슬림을 남겨놓았다.
우리는 이슬람문화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개문화 내지는 열등한 종교문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서구 방송매체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문화를 테러문화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왜곡됨 없이 세계인에게 올바르게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전 세계 18억 무슬림도 자신들의 문화가 있는 그대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자기 나라의 자연환경과 역사 그리고 그 문화 속에서 생성된 문화적 가치관을 가지고 타문화를 평가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할 때 문명의 충돌, 특히 《성경》이 밑거름이 되어 발전해 온 서구문명과 《꾸란》이 바탕이 되어 성장해 온 이슬람문명의 충돌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18억 무슬림의 문화와 종교를 이해하고 그들의 실체를 인정할 때 그들도 우리의 문화와 종교를 이해하고 우리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친구가 될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친구가 되면 그들이 우리를 찾을 것이요 그들이 우리를 자신들의 세계로 부를 것이다.

이념과 사상
전 세계 거의 모든 문화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때로는 발전하고 때로는 퇴보 혹은 소멸했지만 이슬람문화는 14세기 동안 세계 정세와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른 급속한 변화에도 아랑곳없이 그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민족과 언어를 초월한 단일 공동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슬람은 종교이기 전에 국가 또는 공동체의 체제를 유지시켜주는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이요, 사상이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다양한 상相을 가진 생활양식이요 생활문화이다.
이슬람은 존재와 소멸의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비롯해 지구・태양・우주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偶然이나 어떤 물질의 진화進化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존재케 한 원인자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창조론이 뒷받침된 정치사상이다. 민주주의를 정치사상으로 채택한 국가와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부정하면 반체제 인사로서 제재를 받는 것처럼 이슬람사회도 그와 마찬가지다.

생활문화
이슬람사회는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동이 틀 무렵 드리는 아침예배로 하루를 시작한다. 예배의 첫 조건이 청결이어서 얼굴과 손발을 닦는다. 이슬람사회에서 세수는 우리의 일상적인 세수와 개념과 방법이 전혀 다르다. 우리의 세수 목적은 청결이요 세수 방법은 일상적인 관습이지만 그곳 사회에서의 세수는 신을 경배하기 위한 행위다. 세수를 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는 신이 수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수하는 목적이 우리와 다르듯 방법과 횟수도 다르다. 의무적으로 하루에 다섯 번 예배를 드려야하므로 세수도 다섯 번 해야 하며 닦는 방법도 무함마드의 전통에 따라 오른쪽부터 시작해서 왼쪽 순으로 최소한 세 번 이상 닦아야 한다.
화장실문화도 우리와 다르다. 우리 화장실에는 휴지통이 일반적으로 오른편에 있다. 오른손으로 휴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사회의 화장실에는 휴지통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휴지를 사용하지 않고 왼쪽 손으로 물을 사용하여 닦기 때문이다. 휴지 대신 주전자나 물을 받아 사용할 수 있는 용기 혹은 물 호스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전통음식을 먹을 때는 오른손을 사용한다. 14세기 전부터 물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슬람의 화장실문화가 서구의 수세식 화장실문화로 발전하고 변기 개발의 동기를 마련해주었다.
음식문화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 피를 먹지 말라는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짐승을 도살하는 방법이 우리와 다르다. 피를 최대한 제거 하기 위해, 짐승을 죽인 다음 피를 받아내는 우리의 도살법과 다르게 짐승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짐승의 목, 즉 식도와 정맥을 단번에 절단하여 도살한다. 동물의 피가 식용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우리가 즐겨 먹는 순대나 선지국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 국가에 쇠고기라면이나 즉석 삼계탕, 쇠고기가 들어간 조미료 등 육식 동물의 고기가 들어간 식품을 수출하려면 반드시 이슬람 도살 방법대로 도살된 고기로 만들어진 식품이어야 한다.
돼지고기 역시 《꾸란》에서 식용을 금지한다. 그 결과 이슬람 사회에 돈육산업이 전무할 수밖에 없다. 돼지상像이 들어간 상품은 기능이나 디자인에 관계없이 이슬람사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술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음료수로 여겨질 정도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꾸란》에 의해 술이 금지되는 이슬람사회에서는 술이 악의 근원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곳에는 주류 생산에서부터 그와 관련한 산업이 전무할 수밖에 없고 유흥업이 성황을 이룰 수 없으며 밤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유흥업소의 네온사인 간판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에게는 술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와 사건사고가 있지만 그곳에는 술과 관련된 문화가 없을뿐더러 음주와 관련한 사건사고가 발생하지 않으니 음주운전 단속 경찰이 있을 필요가 없고 폭음으로 인한 술병환자가 없다.
공휴일과 명절도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 대다수 이슬람 국가에서 공휴일은 금요일이요, 이슬람 달력 라마단 한 달 동안의 단식을 종료하면서 다음 달 첫날부터 3일간이 우리의 추석명절 같은 것이요 이슬람 달력으로 12월 10일, 성경과 《꾸란》에 등장한 예언자 아브라함의 전통에 따라 가축을 도살하여 신의 제단에 바친 그날부터 3일간은 우리의 새해와 유사하다. 이슬람사회의 전통 생활문화에서는 양력에 의한 크리스마스와 신년의 기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케르반 스페셜

아랍어 문화
아랍 출신의 무함마드가 이슬람 회복운동에 선봉적 역할을 하고 이슬람문화의 핵심이 아랍어로 기록된 《꾸란》을 일점・일획도 변질됨 없이 원본대로 보존하게 함으로써 《꾸란》의 언어인 아랍어가 인류 언어문화에서 가장 오랜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시작된 이슬람 회복운동은 메디나를 최초의 이슬람국가로 탄생시키고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후 주변 국가로 퍼져나가면서 이슬람과 아랍어가 동시에 전파됐다. 이슬람이 전파된 곳에는 그 지역의 민족어가 차츰 사라지고 《꾸란》의 아랍어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꾸란》을 아랍어로 읽고 암기하는 이슬람 신앙생활이 아랍어 전파에 절대적 역할을 했다. 아랍 무슬림은 《꾸란》을 아랍어 최대 걸작으로 간주한다.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22개 아랍국가가 생겨나고 《꾸란》의 아랍어가 표준어가 되면서 방대한 지역 간 이해할 수 없는 사투리로 인한 분열을 막는다. 《꾸란》의 본래 언어인 아랍어가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생활언어로 남아 18억 무슬림의 종교 및 신앙생활의 공통언어로 전파된 현상을 두고 몇몇 학자는 ‘《꾸란》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18억 무슬림의 정신세계는 절대적으로 《꾸란》의 영향을 받고 있다. 매일 다섯 번의 예배를 통하여 적게는 27번, 많게는 80번까지 《꾸란》의 일부 구절을 암기하며, 특히 라마단 금식월에는 《꾸란》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 분량을 읽거나 암기한다. 남녀노소, 학생과 스승, 농민과 도시인, 일반인과 전문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문맹자와 최고의 학벌을 가진 지성인과 장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604쪽에 달하는 책 한 권의 일부 또는 전 분량을 암기하고 암송하며 노래한다. 인류 역사 이래 책 한 권의 전 분량이 암기되는 유일한 책이다.

종교문화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유대교 및 기독교와 형제자매이다. 이 세 종교는 시발점이자 핵심인 존재론存在論에서 동일한 유신론有神論과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핵심 교리로 채택하고 있으며 모두 아담과 하와를 인류의 시조로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과 《꾸란》은 신이 금기한 열매를 맛본 아담과 하와의 사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가 죄의 구속을 받게 되었으며 죄가 원인이 되어 땅으로 추방되고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면서 인간의 원죄설原罪說을 주장하는 것이 성경의 핵심 내용이다. 《꾸란》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신이 금기한 나무의 열매를 맛본 것은 사실이지만 고의적으로 신과의 약속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망각에 의한 실수였다고 말한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죄의 구속을 받고 창조되었다는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죄인이 들어갈 수 없는 천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죄의 구속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땅으로 내려 온 것은 신을 대신하여 땅을 관리하고 다스리기 위한 신의 예정설에 따른 것으로 죄의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인간의 원선설原善說을 제시한다.
예수와 무함마드의 조상은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비롯되었다. 아브라함이 본처 사라의 몸에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하갈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이스마엘을 낳고 그가 무함마드의 선조가 되었으며 이스마엘이 9~11세가 되었을 때 아이를 갖지 못했던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태어나 예수의 선조가 된 것이다. 이스마엘과 이삭, 즉 배다른 이 두 자식을 중심으로 장자 상속권 문제와 신의 제단에 바쳐진 아들이 누구인지를 놓고 기독교와 이슬람은 서로 다른 견해를 주장함으로써 그에 따른 두 종교문화도 서로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다. ●

*이슬람문화 용어사전에서는《코란》으로 표기했으나 필자의 서술방식을 살려 《꾸란》으로 적는다.

 

SPECIAL FEATURE 비 서구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영화  포스터와 스틸컷 1962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포스터와 스틸컷 1962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구중심주의는 서구를 예외적으로 특권화해 격상시키는 서구(유럽)예외주의와, 서구가 일방적으로 선택한 (보편적인?) 잣대에 의해 비서구문명을 격하하는 오리엔탈리즘으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서구예외주의는 유럽에서 근대성(또는 근대문명)의 출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바, 세 가지 명제로 구성돼 있다. 첫째, 유럽문명에 내재한 ‘독특한’ 요소들이 유럽에서 자본주의, 산업혁명, 계몽주의, 자유주의 등 근대성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둘째, 유럽문명은 오직 유럽 내재적인 독특한 요소에 힘입어 근대성을 ‘자생적으로’ 출현시켰다. 셋째, 근대 유럽에만 존재한 것으로 단언된 독특한 요소들은 서구 역사의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존재해 온 모종의 항구적 속성-고대 그리스문명, 로마문명, 유대교 또는 기독교 정신 등-으로부터 유래한다.
비서구사회에 대한 서구의 지식체계인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예외성을 여타 세계와 구분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E. Said)는 19세기 유럽의 지식인들이 주로 아랍과 이슬람 지역을 대상으로 창안한 지적 구성물을 오리엔탈리즘으로 개념화하고 이를 비판했다. 서구인이 보는 동양은 동양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부정확한 정보와 왜곡된 편견으로 가득 찬 허구일 뿐이라고 통박했다. 나아가 오리엔탈리즘에 내재된 지식과 권력(서구의 동양 지배)의 상호 불가분적인 결탁관계를 폭로했다. 즉 베이컨의 말처럼 ‘아는 것(지식)이 힘(권력)’이기도 하지만, 푸코가 갈파한 것처럼 ‘힘이 지식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비서구사회를 중대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문화적 요소의 ‘부재’ 또는 ‘일탈’을 통해 설명한다(‘부재의 신화’).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서문에서 비서구문명을 과학, 역사연구, 예술, 건축, 전문화된 관리와 행정, 법치, 자본주의 등이 부재한 것으로, 나아가 자본주의를 가능케 한 ‘합리성’이 결여된 것으로 설명했다. 서구문헌에서 궁극적으로 영원한 정체상태에 있는 비서구문명은 총체적으로 ‘역사’가 없는 것으로, ‘문화’가 없는 것으로 빈번이 서술됐다.
또한 서구문명은 그들의 주된 타자인 동양을 새롭게 구성하여 ‘일탈’로 규정하는 오리엔탈리즘을 발전시켰다(‘일탈의 신화’). 그리하여 동양은 “만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아랍인의 성적 욕망” “이국적인 여성” “인파로 붐비는 시장” “신비주의적 종교” 등의 이미지를 떠안게 되었다. 나아가 경제적으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정치적으로는 “동양적 전제정치”라는 일탈적 범주로 구획되었다.
오늘날 서구인이 제작한 아랍이나 이슬람지역 배경의 소설, 애니메이션, 영화 등에서도 오리엔탈리즘은 보이지 않는 무대장치로 기능을 한다. 대표적으로 정지인이 엮은 책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에 소개된 영화이기도 한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아랍 민족의 독립에 적극 참여했던 영국군 장교 T. E. 로렌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로렌스는 분열된 아랍군을 통합하는 데 앞장섰고 게릴라 활동을 진두지휘해, 아카바 기습 점령,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점령 등 혁혁한 공을 세우며 아랍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되었다. 이 작품은 1963년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휩쓸었으며, ‘세계’ 영화사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그 ‘실화’는 점차 사실이 아닌 ‘허구’인 것으로 밝혀졌다. 영국의 작가 리처드 알드링턴은 《아라비아의 로렌스: 전기적 질문》(1955)이라는 책에서 로렌스가 사기꾼이었으며 그의 공적이 부풀려졌다고 주장해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요르단의 역사학자 슐레이만 무서 역시 《T. E. 로렌스: 아랍의 관점》(1966)이라는 저서를 통해 아랍 혁명이 한 영국군의 영웅적인 활약이 아니라 수많은 아랍인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상세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밝혀냈다. 결국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서구인의 시선으로 아랍의 역사와 로렌스의 삶을 그려냈고 그 점에서 (비록 세련된 수준에서지만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을 내장하고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

SPECIAL FEATURE 이슬람 현대미술의 현주소

TR.16402

미트라 타브리치안(Mitra Tabrizian) 〈테헤란 2006년(Tehran 2006)〉(5/5) 라이트젯 C-타입 인쇄 © Mitra Tabrizian © 2014 Museum Associates / Los Angeles Country Museum of Art. (위)아미르 무사비(Amir Mousavi) <잃어버린 원더랜드> 시리즈 중에서<무제, 제8번>(1/5) 광택 사진 인화지 © Amir Mousavi. Photo © 2014 Museum Associates / Los Angeles Country Museum of Art

박진아 미술사

“인간의 두뇌는 (통합이 아닌) 임의적으로 가르고 나눔으로써 세계를 이해한다”고 독일의 철학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글로벌리즘이 정점에 도달해 승승장구하는 21세기는 지역 문화도 지정학적 구분에 따라 브랜딩하고 상품화하는 시대다. 언제부터인가 현대미술계와 미술시장은 ‘이슬람미술’ 또는 ‘아랍미술’이라는 종교적 배경이나 역사적 의미가 함축된 명칭들 대신에 ‘중동미술’이라는 한결 중립적이고 정화된 이름으로 쇄신하고 현대 시각 미술 트렌드를 마케팅하며 21세기 글로벌 문화지도를 재서술하고 있다.
전 세계 미술계가 별안간 아랍권 미술에 관심의 촉수를 세우게 된 계기는 실은 중동 지역이 대중매체를 통해 국제 시사 관심사로 떠오르면서부터였다. Y2K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공포가 괜한 우려로 마감되며 21세기가 기지개를 켠 직후 2001년, 뉴욕 9・11 테러를 시발로 중동 지역은 이슬람 종교의 과격화, 종파 간 분열과 내전, 정권교체 등의 소식으로 국제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일찍이 1970년대부터 시작된 레바논 내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발발한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 이란의 녹색혁명, 알제리에서 촉발해 이집트를 거쳐 북아프리카 도처로 번진 이른바 아랍의 봄Arab Spring 민주화운동, 리비아 전 그리고 최근의 시리아 내전에 이르기까지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아랍권의 많은 나라가 글로컬 위기에 처해 있다.

중동권 현대미술 시장을 선도하는 새 주소
아랍권 이웃 국가들과 형제들이 전쟁, 소요, 트라우마로 신음하는 사이에 아랍에미리트UAE와 카타르 등 걸프 토호국의 부유한 형제들은 산유産油경제로 축적한 막강의 국부펀드와 세계 최대 국내총생산GDP을 자랑하는 신흥 초부유국으로 떠올라 경제다각화 기치 아래 초호화 부동산 개발과 관광 및 소비 서비스 산업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다.
막강한 부에 못지않게 걸프국들은 빠른 시일 내에 국제적인 문화도시로 발돋움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카타르는 2008년 말 수도 도하에 고故 사우드 알 타니 왕자가 수집한 방대한 전통 이슬람미술 컬렉션(현 감정가격 약 16억 달러어치)을 기반으로 이슬람 박물관을 개관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서는 사디얏 문화구역에 루브르 박물관과 구겐하임 미술관 아부다비 분관이 각각 장 누벨과 프랭크 게리 두명의 스타 건축가의 설계로 2015년과 2017년 개관을 앞두고 있고, 이웃 두바이는 현재 30여 사설화랑이 각축하며 연간 3편의 현대미술페어를 주관하는 중동권 미술시장의 중심도시로 급부상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제3도시 샤르자만은 1993년 〈샤르자 현대미술 비엔날레〉를 설립해 비상업적 입장에서 중동 및 걸프권 미술계의 담론을 이끌고 있다.
그 결과 걸프국 신흥 도시들은 명실 공히 초현대식의 기상천외한 마천루로 빼곡한 도심 스카이라인과 호화 숙박 및 소비시설이 갖춰진 관광 목적지로서만 아니라 일년 내내 현대 비엔날레와 박람회 등 세간의 이목을 끄는 행사들이 번갈아 열리며 뉴욕, 런던, 마이애미에 다음가는 국제미술시장의 허브가 되었다. 크리스티 경매소가 2006년 두바이에서 중동현대미술 경매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2008년 소더비 경매소가 뒤따라 도하에 아랍/이란/터키 현대미술 경매실을 열었다. 중동 미술붐을 간파한 사치갤러리는 2009년 런던에서 〈새로운 중동 미술 베일을 벗다전〉(2009.1.30~5.9)을 열어 중동 현대미술 시장 붐을 거들었다. 최근 이곳의 현대미술 페어에는 보다 큰 시장을 찾아 중동지역에서 온 화랑들 외에도 가고시안, L&M Arts, 페이스빌덴스타인 등 국제적 메가급 화랑들도 정기적으로 참여해 피카소, 워홀, 베이컨의 20세기 블루칩 작품들을 장에 내놓고 이곳의 부유한 컬렉터들을 유혹한다.

걸프 익스프레스의 양지와 그늘
급히 먹는 밥은 체한다고 했다. 막대한 액수의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미술을 매개로 삼아 단기간에 글로벌 문화지도에 새 발자취를 남기겠다는 걸프왕국들의 노력은 분명 야심차지만 후유증도 있다. 방글라데시 태생의 문필가 슈몬 바사르Shumon Basar는 중동지역 현대미술계가 자칫 졸부의 자기망상심리를 자극해 오일머니에 눈이 먼 서구 미술시장 세력의 포로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창조활동을 하는 미술인들 또한 급가열된 중동권 현대미술시장의 시류에 휩쓸려 외형만 서구적 무늬를 흉내 내고 내용은 공허하거나 무의미한 작품을 양산하는 데 그치기 쉽다. 영국 월간지 《아트뉴스페이퍼Artnewspaper》의 아나 소머스 콕스 편집장은 2009년 7/8월호 논평에서 돈과 명성을 찾아 이 신개척지로 몰려온 구미권 큐레이터, 평론가, 경매소, 아트딜러, 미술관 기관들이 서구중심적 시각으로 중동의 ‘현대contemporary’ 미술을 임의로 규정하고 서구적 구미에 맞는 중동권 미술가나 작품을 편애・편식하며 연약한 중동 미술계를 식민화하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실제로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유럽과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돌아온 걸프국의 젊고 부유한 인재들은 이른바 ‘에미라티 자아정체성’ 부재를 앓고 있다. 신세대 에미라티 미술가들에게 1960~1970년대 플럭서스 운동의 영향을 받은 개념주의 선구자 하싼 샤리프Hassan Sharif가 유일한 근현대 미술계 선배로 본받을 만한 롤모델이다. 에미라티 자아정체성 부여라는 취지로 2009년 아부다비에서는 에미리트 궁전에서 〈에미라티 표현전〉(2009.1.20~4.16)이 기획돼 제2세대 UAE 출신 작가 6명의 작품을 소개하고 UAE에도 국제미술계에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는 현대미술가가 존재함을 선언했다. 같은 시기 두바이에서는 사설 화랑인 엘레멘타 갤러리가 〈리-소스Re-Source전〉을 열어 UAE의 신인 미술인 10명을 소개했지만 대체로 2009년 봄 〈샤르자비엔날레〉에서 발굴된 작가들을 다시 보여주는데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현대미술 면에서 실질적인 미술 프로덕션은 ‘메나MENA: Middle Eastern Northern Africa’로 불리는 이란, 터키, 북아프리카 등 옛 아랍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거쳐온 메나권 미술인들은 자기정체성 모색이나 구축으로 고뇌하기보다는 거친 현실 속에서 미술가의 정당한 역할을 하고 싶어한다. 근현대 아랍권 미술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이란에서 현대미술은 대체로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 위주로 ‘침착하고 단조로우며 내면지향적’인 경향을 띠나 미술가란 현실 도피를 일삼는 순진무구한 몽상가가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회 참여를 멈추지 않는 현실참여적 직업인이다.
1979년 이란 혁명의 영향으로 지금도 이란에는 신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이 주축이 된 좌파 경도 성향 미술인들의 활동이 눈에 띤다. 이슬람교 규율이 일상과 공공활동을 지배함에도 불구하고 이란에서는 대중 차원의 미술 감상이 정책적으로 장려되고 있어 문화향유에 관심 많은 중산층의 주도로 현재 테헤란에는 50여 군데의 사설 미술화랑이 성업 중이다. 이란의 현대미술계는 종교적 제약을 피해가면서 창조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 보니 화랑 주인들과 전시기획자들은 전시 허가를 받기 전 이슬람교계도부의 검열을 거쳐 최종전시까지 미세조정하며 타협하는 관행에 능숙하다. 그렇다고 이를 피하기 위해 서구 미술시장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자의식이 강한 것도 특징이다.
구미권 현대미술 시장에서 찾는 ‘아랍다움’이라는 개념에 가장 강렬히 저항하는 주체도 이란 미술계다. 현재 중동의 현대미술에 대해 논평하고 작가를 발굴하는 평론가나 큐레이터들은 아랍 혹은 이슬람권 문화의 윤리적 가치관, 정치, 사회, 문화적 코드를 부여해 서구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중동 현대미술이라는 정형화된 틀에 넣어 집단적으로 규정하는데 이란 미술계는 이에 대해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지칭한 ‘오리엔탈리즘’이라 비판한다. 예컨대 이란의 미술계 인사들은 아랍문화 속 여성문제를 부각시켜 서구 미술계에서 호평받는 망명작가 쉬린 네샤트Shirin Neshat의 사진은 서구중심 오리엔탈리즘에 편승한 ‘자기이국화Self-Excoticism’라 본다.
그런가 하면 터키의 현대미술계는 한결 서구친화적인 입장이다. 근대가 도래하기 이전까지 600여 년을 지배한 오스만 제국의 후신이나 1920년대 아타튀르크의 근대화 이후 현재까지 터키의 국민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근대적 개념의 세속적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유럽연합EU의 정식 가입국이 될 비전을 안고 일찍이 1987년부터 이스탄불비엔날레 재단을 발족하는 등 문화 인프라 개발에도 앞섰으나 결국 EU의 정식 가입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슬람 신도 수의 급속한 증가와 친이슬람교 성향의 에르도안 총리가 집권한 후로 현재 터키는 사회문화적으로 점점 이슬람화하는 추세다.
세속주의 원칙에 익숙한 터키 국민과 미술인들은 이슬람화가 자유로운 예술 표현과 자유방임적 미술시장 정착을 방해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실제로 <이스탄불비엔날레>를 비롯해서, 호화 사교클럽과 화랑들이 응집한 베요글루 화랑가와 <컨템포러리 이스탄불> <아트인터내셔널 이스탄불> 아트페어 조직위원회는 이슬람교 정서에 거슬리는 표현이나 논조가 담긴 작품은 전시하지 말 것과 작품 가격 경쟁을 과열시키지 말라는 정부의 당부 혹은 압력을 받고 있다. 터키의 미술인과 화랑계 인사들은 ‘조국에 표현의 자유가 없다면 이민 간다’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터키가 유럽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지만 이주・이민이 쉬워진 글로벌 시대에 노마디즘과 임시변통에 능숙한 미술가들은 창조의 자유가 보장된 곳으로 떠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일테다.

그들만의 시각적 아이덴티티를 찾아서
아랍권 현대미술 큐레이터 잭 페르세키언 Jack Persekian은 오늘날 전 세계 곳곳으로 망명 또는 이민을 가 예술활동을 하는 아랍인이 유독 많아진 원인을 1960년대 불거진 범아랍주의운동의 실패에서 찾는다. 과거 이슬람권 지역을 세속주의 사회주의로 이끌어 근대화를 꾀했던 이집트 정치가 가말 압델-나세르의 계획은 결국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반발로 좌절됐다. 그래선지 이 지역의 현대미술인들은 ‘시대의 목격자’ 역할을 자처하며 주로 사진, 비디오, 설치 등 뉴미디어를 통해 상실, 실패, 실망의 정서가 서린 기록성 강한 작업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레바논 출신의 사진가 커플인 하지토마스와 조레지Joana Hadjithomas & Khalil Joreige는 15년 넘는 내전 끝에 살아남은 자들과 유령들이 공존하며 폐허 속에서 서성이는 고국 레바논의 현실을 기록한다. 이집트 출신의 설치미술가 할라 엘쿠시Hala Elkoussy는 옛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의 사라지고 잊힌 공동체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을 표현한다. 시리아의 흐레르 사르키시언Hrair Sarkissian 역시 황량하고 건조한 사막을 배경으로 짓다말고 방치된 건축 현장을 서늘한 분위기의 컬러사진으로 담아 성장 정지당한 시리아 사회를 은유한다.
고대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역사와 운명을 함께한 북아프리카에서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특히 뉴미디어가 주가된 현대미술을 장려하는 추세다. 튀니지에서는 2011년에 인터넷상으로 <가상 비판미술전>을 시도하는 한편, 라메종디마주La maison d’image Tunis 연구소를 운영하는 등 오늘날 북아프리카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비판성 강한 미술이 전개되고 있다. 모로코는 2005년부터 무함마드 6세 국왕의 후원으로 <마라케시비엔날레>가 열리며, 최근에는 뉴 포토 뮤지엄과 트란캇 아트스페이스가 개장했다. 2014년부턴 <디지털 마라케시 페스티벌>이 열릴 계획이다. 알제리는 알제리 근현대미술관에서 국제현대미술페스티벌을 발족해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고, 말리도 2009년 <바막 사진비엔날레>를 설립해 북아프리카 현대사진과 비디오 예술 육성을 꾀하고 있다. 통치자나 이슬람교에 대한 비판은 법적으로 금지돼 표현의 자유 면에서는 제약이 있지만, 대다수 미술인은 이 대륙이 처한 보다 긴급한 문제들—경제, 관광산업, 후기 식민주의, 이민과 글로벌리즘 그리고 그 속의 자기정체성—을 미술로 논하기에도 바쁘다.
여전히 유럽 현대미술계는 서구적 컨셉추얼리즘과 아랍적 이그조티시즘이 적절히 조합된 현대 작가들에게 주목한다. 2007-2008년 보스턴 ICA 레지던시, 2009년 사치갤러리 전시, 2010년 퐁피두 전시를 통해서 소개된 알제리계 프랑스인 카더 아티아Kader Attia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문화라는 두 의자 사이를 오가며 논평하는 설치작품으로 구미 일급 화랑들과 현대미술 컬렉터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팔레스타인 혈통이면서 레바논인임을 강조하는 설치작가 모나 하툼Mona Hatoum도 서구와 아랍 사이 문화적 차이를 개념주의로 전환시킨 작품으로 주류 미술계와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 이집트 태생인 와엘 샤우키Wael Shawky는 유럽 꼭두각시 인형으로 퍼포먼스나 설치작업을 해 글로벌 시대 종교 대 정치, 유럽 대 이슬람 세계의 대립에서 빚어진 과거사와 갈등상을 이야기로 푸는 작업을 하며, 모로코 출신의 이토 바라다Yto Barrada는 유럽으로의 불법 이민을 꿈꾸는 북아프리카인의 삶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해 서구가 주도한 글로벌화 프로젝트의 실패상을 지적한다.
두말 할 것 없이 현재 중동권 현대미술은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은 <아랍 익스프레스전>(2012.6.16~2012.10.28)을 기획해 일본인에게 최신 현대아랍미술을 소개했다. 특히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서 UAE관이 처음 개설된 이후로 중동권 현대미술에 대한 미국의 관심도 커져서, 보스턴 파인아츠미술관은 〈이야기하는 여자전〉(2013.8.27~2014.1.12)을, 뉴욕 뉴뮤지엄은 〈여기와 다른 곳전〉
(2014.7.16~9.2)을 열었고, 현재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박물관에서도 〈이슬람 현대미술전〉이 올 2월부터 폐막일 없이 계속된다. 로스앤젤레스의 이 오픈엔드 전시가 시사하듯, 중동 현대미술의 추진적 기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

모로코 출신의 모하메드 엘 바즈(Mohamed El Baz) 〈밤일주(La ronde de nuit)〉 2014 © Photo: Mohamed El Baz. Courtesy of Institut du Monde Arabe. Le Maroc Contemporain

모로코 출신의 모하메드 엘 바즈(Mohamed El Baz) 〈밤일주(La ronde de nuit)〉 2014 © Photo: Mohamed El Baz. Courtesy of Institut du Monde Arabe. Le Maroc Contempo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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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프로젝트 비아 아랍에미리트 자유리서치 참여

아랍에미리트의 미술현장

IMG_4295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와 아부다비에서는 3월과 11월에 각각 아트 두바이와 아부다비 아트페어가 열리고, 샤르자에서는 1993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12회를 맞는 샤르자비엔날레가 개최된다. 이와 더불어 ‘문화예술의 섬’을 목표로 아부다비의 사디야트 섬에서 대대적으로 진행 중인 미술관 프로젝트는 장 누벨이 설계한 루브르 아부다비와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아부다비, 노먼 포스터의 자이드 국립박물관과 자하 하디드, 안도 다다오의 퍼포밍 아트센터와 해양박물관을 포함한다.
아부다비의 거대한 미술관 프로젝트 기획이 예술특구지역 구축에 있다면, 두바이에는 이미 많지는 않지만 당대미술을 전시하는 갤러리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 형성됐다. DIFC 게이트 빌리지와 알 쿠오즈(Al Quoz) 지역의 알세르칼 애비뉴(Alserkal Avenue)가 그곳으로 10여 개의 갤러리가 모여 있는 DIFC 게이트에는 중동지역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기획전시를 선보이는 아트 사와(Art Sawa), 아얌 갤러리(Ayyam Gallery), 쿠아드로 파인 아트 갤러리(Cuadro Fine Art Gallery) 등과 같은 국내 갤러리들과 크리스티 두바이 사무실과 오페라 갤러리가 있다. 알세르칼 애비뉴가 위치한 알 쿠오즈는 원래 공단지역으로 이곳의 갤러리들은 빈 창고 건물들을 손봐서 전시공간으로 쓰고 있는데, 물론 그 수나 규모는 훨씬 작지만 뉴욕의 첼시나 베이징의 다산쯔를 연상시킨다. 알세르칼 애비뉴에는 아얌갤러리, 카본 12, 갤러리 IVDE(Gallery Isabelle Van Den Eynde), 그린 아트갤러리(Green Art Gallery), 그레이 노이즈(Grey Noise), 로리 샤비비(Lawrie Shabibi) 등 15개의 갤러리가 모여 있으며 인근의 모타헤단 프로젝트 등을 포함하여 30개 정도이다. 이 지역의 갤러리들이 두바이 또는 아랍에미리트에서 컨템포러리 아트 갤러리를 대표하는 공간이자 아부다비 아트나 아트 두바이는 물론 아트 바젤, 프리즈, 아모리 쇼 등의 국제적인 아트페어에 참가하여 아랍에미리트 및 중동권 작가들을 소개하고 지원한다.
샤르자 예술재단의 새로운 전시 공간은 샤르자 헤리티지 지역(Sharjah Heritage Area) 옛 건물을 훼손하지 않고 이미지에 거스름 없이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가 함께하는 모습이다. 샤르자 예술재단은 여러 예술 활동의 기회를 만들고 국내외의 협력과 교류를 추진함으로써 페르시아만 지역의 예술적 환경을 부흥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샤르자비엔날레> 개최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시와 연계한 이벤트, 교육프로그램, 레지던시 프로그램 외에 해마다 작가와 큐레이터 등 예술계 전문가들이 모여 아이디어와 네트워크를 다지는 3월 미팅(March Meeting)과 같은 프로그램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송희정 PNCO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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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아부다비 아트 레지던시 참가

아부다비의 환대

사막_도로시경기도창작스튜디오에 있을 무렵 뭔가 새로운 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김현정 학예사의 제안으로 한 아트레지던시 공모에 응하게 되었고 10월에 아부다비 아트 레지던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런던 유학시절 두바이를 경유하는 노선 비행기 표 가격이 경제적이어서 가끔 두바이를 경유한 적이 있었지만, 아부다비는 2013년 그때 처음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나는 아부다비가 아랍연합국가(UAE)에 수도인 것도 그때 알았다.
아부다비에 도착했을 때 이미 4명의 한국작가가 더 있었다. 매달 각 나라를 정해서 그 나라의 작가들을 초대하는 식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이었다. 도착한 다음 날은 금요일이라 (무슬림 국가에서 금요일이 일요일과 같아서 그날은 종교적으로 휴일이다) 쉬고 토요일부터 본격적으로 관광을 하기 시작했다. 레지던시 기간은 한 달이었다. 처음 일주일은 아랍문화를 알 수 있을 법한 토속미술관이라던가 아랍현대미술관 등을 보여주고 사막도 체험하게 해주고, 그 다음주부터는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게 하는 식이었다.(특별히 아랍문화에 대한 미술작품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전에도 해외로 레지던시를 다녀본 적은 있지만 이처럼 관광과 음식, 그 나라 문화체험 등을 시켜주는 프로그램은 드물었다. 참 특이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도 외국에서 사람이 오면 한국문화를 못 보여줘서 안달이고 손님이 오면 환대하는데 아랍문화도 약간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또한, 무슬림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는데, 사막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온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 척박한 땅에서 석유가 나고 지금 부유하게 살고 있는 것을 모두 그들이 모시는 신이 주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K-pop이 유명해서 그런지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진, 아랍 젊은이가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었다. 거기서 만난 정말 아름다운 소녀가 한국에서 작가가 왔다는 말을 듣고 와서 하루 종일 자기 차를 몰고 관광을 시켜주었다. 그 당시 시청률이 높았던 소지섭 주연 드라마에 대해서 한국말로 또박또박 이야기를 하는데 한국 연예인들의 스캔들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어서 놀랐다. 하여간,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을 사진으로 찍고 싶어서 4명에게 모델 제안을 했더니 그녀들은 모델이 너무너무 하고 싶지만, 아직 시집을 안간 처녀인지라 집에서 부모님이 사진 모델로 찍히는 것을 결사반대한다고 했다. 그래도 전시 오픈에 꽃과 선물을 챙겨서 와주었다.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 느꼈다. 이렇게 추운 겨울날이면 가끔 그때 따스했던 아부다비의 사막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도로시엠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