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 WIEN German Art since 1960 Selected Works from the Essl Collection
오스트리아의 에슬 미술관(Essl Museum)에서는 이 미술관이 소장한 독일 작품 중 독일 현대미술가 21명의 대표작 80여 점을 선별하여 <1960년대 이후 독일의 미술(Deutsche Kunst nach 1960)전>을 열었다. 2015년 6월 24일부터 11월 15일까지 계속된 대규모 특별전을 통해 제시된 20세기 후반기 독일의 현대미술이란 어떤 미술을 뜻하며 독일미술사에서 어떤 궤도를 구축했을까? 에슬 미술관이 해석하고 제시한 전후 독일 현대미술의 로드맵을 살펴보도록 하자.
독일 현대미술을 정의하다
박진아 미술사
에슬 미술관이 기획한 <1960년대 이후 독일의 미술(Deutsche Kunst nach 1960)전>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의 독일 현대미술은 정치적 역사와 그에 대한 자성의식의 표현으로 요약된다. 에슬 컬렉션의 본 주인인 카를하인츠와 아그네스 에슬 부부가 독일 회화와 조각의 남다른 애호가여서 이 분야 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과연 거창하고 포괄적인 제목만큼 내용 역시 알찬 전시로 미술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항간에는 있었다. 또 이 전시가 개막하자마자 오스트리아의 일간지 《데어 슈탄다르트(Der Standard)》는 에슬 미술관이 이번 전시 카탈로그를 전 세계 유명 미술관에 우송해 홍보했다고 보도하고 전시용 미술작품 대여 사업을 해보려는 카를하인츠 에슬 관장의 비즈니스 속셈이 엿보인다며 이 전시회의 기획 의도에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실제로 이 미술관은 지난 한두 해에 걸쳐 풍랑을 겪었다. 에슬 미술관은 본래 바우막스(Baumax)라는 대형 DIY 건축용 재료 및 장비 소매 체인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오스트리아인 사업가 카를하인츠 에슬 회장이 60년 넘게 수집한 개인소장품을 모아 2003년 현대미술관으로 개관한 사설 현대미술관이다. 지난 2014년 가을, 바우막스 사가 파산 위기를 맞자 에슬 회장은 채무를 이행해 직원 해고를 막기 위해 당시 시세 8600만 유로(한화 1200여억 원) 어치의 개인 미술소장품을 대거 매각해 미술계에 화제가 되었다.
잘 키운 미술 컬렉션은 인생을 살다보면 마주할 수 있는 ‘3D 위기’ 즉, 이혼(divorce), 사망(death), 빚(debt)이라는 인생의 3대 고비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개인 자산이라고 했던가? 카를하인츠 에슬 관장은 값진 미술 컬렉션 덕분에 사업체 부도를 막고 바우막스 사를 둘째아들에게 물려준 후 현재는 미술 큐레이터로 변신해 자신의 소장품을 십분 활용한 전시를 기획하며 미술에 대한 변치 않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독일 미술사조를 조망하는 이 전시는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와 마르쿠스 뤼페르츠(Markus Lupertz) 두 화가를 독일 20세기 후반기 전후 미술계의 귀감이자 모범적 전형으로 정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에슬 부부가 바젤리츠와 뤼페르츠 두 화가와 개인적으로 절친한 사이여서 두 화가의 전 창작기 작품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유별난 바젤리츠와 뤼페르츠 애호가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이 두 화가야말로 20세기 전반기 독일 미술 전통을 이어받아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뒤틀고 전복시켜 독일 회화사의 궤도를 새로 그은 주인공이라고 전시는 선언한다.
여느 오스트리아인들이 그렇듯 에슬 컬렉터 부부가 천착하는 예술적 영감이자 동시에 바젤리츠와 뤼페르츠 두 화가의 영원한 모티프는 인간의 몸이다. 바젤리츠가 인간의 몸을 거꾸로 세워 고전 그리스 미술의 이상적 신체 개념에 도전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시대 유럽 회화와 미의식을 재정의하려는 전략을 취했다고 한다면, 뤼페르츠는 인간의 몸을 동강 내어 회화와 조각으로 재반복해 구현하며 특유의 육중하고 기념비적 조형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받는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직후 냉전기에 접어든 유럽은 이제 더 이상 최첨단 문화예술 사조를 주도하는 예술 아방가르드의 대륙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선 1940년대 중엽부터 1960년대까지 뉴욕을 휩쓴 추상표현주의를 받아들여 엥포르멜 미술(Art Informel)과 타시즘(Tachisme)이라는 대륙권 유럽식 추상표현주의 사조가 유행했다. 특히 라이프치히 출신의 하르트비히 에버스바흐(Hartwig Ebersbach)는 당시 동독에서 행위주의 구상회화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스처럴 회화(gestural painting)를 고집한 외톨이로 꼽히는데, 그의 굵직한 필치로 물감을 두껍게 겹겹으로 덧바르는 기법은 이후 1980년대 독일을 휩쓸 포스트모던기 신표현주의를 예고했다.
한편, 이즈음 동서독을 합쳐 독일에서 주로 실험된 대세적 사조는 기하학적 추상주의 회화였다. 대체로 순수조형 창조라는 냉철한 입장에서 과거 동독권에서 순수추상이나 기하학적 추상이 격려되었는데, 예컨대 오늘날 사진을 능가하는 극사실적인 회화로 더 유명해진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도 본래 제스처 개념을 연구하여 추상적 이미지로 구성해 회화로 옮기는 차갑고 분석적인 기하학적 추상주의로부터 출발했다. 이 시기 독일 기하학적 추상주의 회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두 화가 귄터 푀르크(Gunther Forg)와 이미 크뇌벨(Imi Knoebel)도 표현주의 회화 속 화가의 붓 필치나 물감 칼 등으로 남겨진 인간적 수공 흔적을 일절 제거해낸 듯한 냉철한 추상을 추구했다. 푀르크는 양식적인 면에서 1920~30년대 독일 바우하우스 건축, 이탈리아 파시즘, 소비에트 연방 건축 이론에 담긴 건축적 조화와 비율이론을 추상회화로 번안해 표현하고 싶어했다. 크뇌벨은 유사한 미니멀리즘 추상주의 접근방식을 취하되 2차원 색면회화를 3차원 공간으로 확장하고 싶어했다.
전후 독일의 미술을 거론할 때,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동서 분단 상태는 독일 국민은 물론 미술가들의 역사적 유전자와 기억에서 여간해선 지우기 어려운 집단적 트라우마였다. 이 전시는 1960년대 이후 동독과 서독으로 정치적 제약과 단절을 극복하며 예술적 교감과 우정을 지속하려 애쓴 동서독 미술인들의 노력이 저변에서 면면히 이어졌음을 말한다. 예컨대, 독일의 신표현주의를 주도한 서독 출신 화가 외르크 임멘도르프(Jorg Immendorff)와 동독 출신 화가 A.R 펭크(A.R. Penck)가 나눈 예술적 우정은 잘 알려져 있다.
언뜻 보기에 서로 전혀 달라 보이는 표현양식을 구축했음에도 임멘도르프와 펭크는 모두 전후 냉전기, 동서 분단이라는 독일의 정치적?사회적 현실로부터 영감을 받아 미술을 통해 사회 변혁을 꿰하려 시도했던 지극히 정치적인 미술가였다. 두 화가 모두 미술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끝내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장벽을 넘어 변치 않는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다. 실제로 임멘도르프의 1980년 회화작품 <오스트외르크(Ostjorg)>에는 미래 언젠가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져 독일이 하나로 통일될 그날이 오면 동독 땅을 직접 밟으며 방문할 날이 올 것이란 화가의 희망과 예견이 담겨 있다.
오늘날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는 과거 동독 라이프치히 출신으로서 라이프치히 화파인 펭크의 계보를 이어 중견급에 이른 네오 라우흐(Neo Rauch)다. 1998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동서독이 통일된 후, 전세계 미술시장의 성장세에 힘입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라우흐는 오늘날 자국 내에서보다 미국에서 높은 인기와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다. 그는 독일의 역사, 유독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회화로부터 깊이 영향을 받아 짙은 파토스와 우수에 가득 찬 인물들을 등장시켜 모호한 분위기로 연출한 알레고리 회화로 그려내어 19세기 독일 낭만주의를 현대적으로 부활시켰다고 평가받는다. 독일의 역사를 단선적 내러티브로 이야기해주는 듯 보이면서도 화가 개인의 확고한 정치사회적 선언이나 주장은 일절 배제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도 그의 작품이 지닌 강점이다.
하지만 라우흐보다 한 세대 앞서 ‘가장 독일적인 화가’라는 별명을 얻은 화가는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다. 지난 수십 년 그는 프랑스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지만 독일의 역사와 문화를 테마로 작업한다는 이유로 특히 1980년대부터 국제 미술계에서 가장 독일적인 화가로 평가받아왔다. 키퍼의 회화는 독일 고대 신화, 동화와 전설, 문학작품과 역사에 이르는 실존적 주제부터 옛 독일제국 독수리 휘장, 셰퍼드견, 브란덴부르크 문, 독일 남부 흑삼림지 같은 독일의 전형적 심볼에 이르기까지 어두웠던 근대사를 상기시키며 독일 국민의 마음 깊은 곳 속죄의식에 호소한다. 2차원적 회화에 납, 진흙, 모래, 풀을 뒤섞어 입체적 질감을 더하는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그는 역사란 신의 자연과 창조력의 불가분성과 자연의 순환적 섭리처럼 돌고 도는 외면할 수 없는 힘이라고 말하며 관객의 어깨를 묵직하게 내리누른다.
독일 회화가 창조적인 측면에서나 문화적 파급력 측면에서 가장 다양하고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한 시기는 두말할 것 없이 1980년대였다. 이번 에슬 미술관의 <1960년대 이후 독일의 미술전>의 약점은 컬렉션 소장품 중 핵심인 1980년대 독일 작품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에슬 컬렉션이 이 전시를 개최한 기간에 프랑크푸르트의 슈테델 미술관(Stadel Museum)에서는 <1980년대 서독에서의 구상회화(The 80s-Figurative Painting in West Germany)전>(2015.7.22~10.18)이 열려 1980년대 독일의 현대미술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며 에슬 컬렉션에서 볼 수 없던 이 시대 작품들에 대한 보충 및 주석 구실을 했다.
게다가 <1980년대 서독에서의 구상회화전>은 그 시대를 경험한 세대들이 다시 한 번 유럽 전역을 깊숙이 뒤흔들었던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향수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이 전시는 1980년대를 서독 포스트모던기로 보아 시대적?지리적으로 전시 범위를 한정하고 당시 독일 구상미술을 부활시킨 일명 ‘융게 빌데(Junge Wilde)’ 즉, ‘젊고 거친 청년들의 회화운동’의 최고점이라 규정한다. 유럽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중문화를 뒤흔들던 1980년대 미술은 단도직입적이고 강렬하며 도발적이다 못해 때론 폭력적이며 체제 조롱적이어서 1980년대 융게 빌데의 미술은 ‘나쁜 그림(bad painting)’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매스미디어, 정치를 상징적 코드로 변환하다
사실 표현주의는 근대기 독일 미술에 면면히 흘러온 예술적 에너지이자 잠재력이었다. 일찍이 18세기 말과 19세기 독일 낭만주의는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심오함과 경외로부터 깊은 창조적 가치를 발견했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 낭만주의는 사실상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중세시대의 공동체 위주에 자연친화적이던 과거 인류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이 철학은 20세기 초엽 독일 표현주의 운동으로 폭발적인 창조력을 발휘했고, 다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가 되자 젊고 패기 넘치는 화가 집단들이 주도한 1980년대 후기 독일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로 폭발한 것이었다.
1980년대 융게 빌데 시대는 과거 서독의 4대 도시 함부르크, 쾰른, 뒤셀도르프, 베를린을 창조 중심부로 급부상시킨 시기였다. 또 이때는 혈기왕성한 젊은 미술인들이 각양각색의 목소리와 미술시장에서의 상업적 성공도 거머쥘 수 있던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다. 폴란드 출신이나 쾰른으로 건너와 활동을 시작한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는 자본주의적 사실주의(Kapitalistischer Realismus) 운동을 일으켜 조악한 광고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은근슬쩍 소비사회를 조롱하는 안티-아트를 이끌었다. 오늘날 독일 미술시장의 막강한 세력이 된 알베르트 욀렌(Albert Oehlen)은 고급예술과 서브컬처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 콜라주 회화로 단숨에 독일 회화사의 한 위상을 확보했고, 마르틴 키펜베르거(Martin Kippenberger)는 그만의 천재적 기발함과 표현력으로 1980년대 독일 신표현주의 미술을 국제적 위상으로 끌어올렸다. 1960년대부터 플럭서스, 팝아트, 아르테포베라 영향하에 혼자 묵묵히 작업하던 독일계 스위스 미술가 디터 로트(Dieter Roth)가 드디어 예술성과 재능을 인정받아 거장으로 주목받은 때도 바로 1980년대였다.
1990년대 이후가 되자 독일 회화에선 매스미디어가 정치라는 상징적 코드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다니엘 리히터(Daniel Richter), 요나탄 메제(Jonathan Meese), 팀 아이텔(Tim Eitel) 같이 퍼포먼스, 설치, 뉴미디어 등 새로운 소통 미디어를 역사, 매스미디어, 대중문화라는 주제와 결합해 회화로 끌어들인 젊은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야하고 현란한 색채의 구상회화로 일명 사이키델릭 펑크 화가로 불리 199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다니엘 리히터는 올 초 프랑크푸르트 쉬른 쿤스트할레(Schirn Kunsthalle)에서 개인전 <다니엘 리히터-안녕, 당신을 사랑해(Daniel Richter. Hello, I Love You)전>(2015.10.9~1.17)에서 커리어 중간휴지기를 선언하고 이전보다 더 추상화되고 더 요란한 색채로 강도를 높인 회화 컬렉션을 선보였다. 한편, 스스로를 ‘문화적 주술사’라 부르는 퍼포먼스 아티스트 요나단 메제(Jonathan Meese)는 회화, 드로잉, 조각 장르를 자유롭게 오가며 현대사회 속의 마약 중독자, 펑크족, 신나치주의자 등을 소재로 해 독일 도시에서 창궐하는 여러 하위문화적 어두운 흔적을 고발하듯 격렬하게 표현한다.
국제 미술계는 범주와 마케팅상의 편의를 위해 국가별 전형적 미술가를 찾아 고착화하며 독일 미술가들 또한 미술계 프리즘에 속해 있다. 그 결과 주목받는 독일 출신 미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독일의 역사와 정치라는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이는 특히 젊은 독일 미술가들을 압박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다수의 재능있는 미술가가 여러 미술사 속에서 나타났다 잊혔다.
21세기로 접어든 후부터 독일의 신진 미술가들은 독일의 역사와 과거나 정치 등의 무거운 주제로부터 탈피해 한결 동시대적 주제를 다루려 한다. 일명 ‘저속한 취향’의 화가로도 불리는 악명 높은 마르틴 에더(Martin Eder)는 앙고라 고양이를 안은 채 선정적 포즈를 한 젊은 여인부터 신성 모독적인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고딕 서브컬처 미학을 담은 극사실주의적 회화로 대중적 시각문화를 논한다. 안젤름 라일레(Anselm Reyle)는 화려한 색채와 고광택으로 마감한 회화작품이나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재활용한 조각으로 고급과 저급 예술 또는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유희하며, 안톤 헤닝(Anton Henning)
은 회화를 3D 인테리어 디자인의 연장선상으로 포섭해 2차원적 회화의 3차원적 공간성을 실험하는 작업을 한다. 이 전시는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가 지적재산권의 무의미성을 꼬집으면서 예술은 자유롭게 모방되고 재창조되어 향유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어머니(Mother)> 조각 연작으로 결말을 맺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