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Artist-Bernd Halbherr

웰컴 투 코리아!
한국의 외국인 작가들

통계청이 2013년 10월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국내체류 외국인은 150만 7000명. 인구대비 3%가 넘는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제 대중매체나 일상에서 이들을 마주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한국미술은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작가들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가. 한국현대미술을 ‘한국인이 만든 현대미술’로 이해한다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작가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만든 현대미술’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국외에서 활동하는 한국작가는 포함되지 않을 수 있다. 국가 간의 물리적ㆍ심리적 이동이 가속화되고 국가 간 경계가 흐릿해진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한국현대미술의 화살표는 누구를 혹은 어떤 곳을 향하고 있을까.
《월간미술》은 너무나 일반적인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와 작품을 소개한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함께 지켜보며 같은 장소의 문화를 공유하며 살아간다. 한국에 기반을 두고 해외 각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외국인 작가들은 한국에 대한 색다른 시선을 갖는 동시에 한국인 작가와 공통된 고민을 하고 있다. 이번 특집은 외국인 작가를 소개하며 또다시 이들을 타자(the other)로 구분짓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과 해외를 오가는 한국작가들처럼 이들도 한국미술계의 당당한 일원으로 읽혀지기를 바란다.

베른트 할프헤르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은 예술이 언제나 요구해왔던 지점이다. 물론 할프헤르의 작업도 그러하다. 원구와 사진을 접목한 작업 시리즈는 방 안 전체를 촬영하고 이를 원구의 조형물에 옮긴 것이다. 이 시리즈의 작업에서 거울이미지란 바뀌는 것이 아니라서 인간의 인지 메커니즘은 제거되고 일시적인 가변성 바깥에 고정된 사진이미지로 존재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이해의 근원에 의문을 제시한다.”
– 스태판 본 비즈(뒤셀도르프 예술궁) 관장

급격하게 변하는 도시 속의 소외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1993년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서 수학하고 많은 곳을 여행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문화적으로 막연하게 궁금했다. 당시 여자친구(현재 부인)의 영향도 있다. 그러던 중 2003년 서울의 레지던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2006년에는 하제마을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한국의 어떤 문화가 특히 신선한가 한국사회는 정말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내가 한국에서 산 지 채 10년이 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그동안 내가 작업했던 숭례문은 불탔고, 현재는 그 자리에 복원된 숭례문이 서있다. 나의 집 앞에는 일년 사이에 6채의 빌라가 세워졌고 그 과정에서 집 앞을 둘러싸고 있던 숲은 딱 한나절만에 사라졌다. 그 정도로 한국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빨라 작가로서는 신기하고 독특한 체험의 공간이다. 또 한 가지 인상깊은 점은 아이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다. 독일에서는 타인의 아이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나 한국은 아이에게 굉장한 관심과 사랑을 전한다. 아이에게는 모두가 열린 마음을 갖게 되고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온다.
독일과 한국은 생활뿐 아니라 작가로서 작업 환경이 다를 것 같다 물론 다르다. 유럽의 현대미술은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차근히 밟아온 흐름이 있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현대미술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도 인식되기 시작했다.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한국보다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전시 공간, 컬렉터 등 많은 부분에서 독일의 시장이 더 클 수 밖에 없다.
외국인 작가로서 한국에서 전시하고 활동하는 데 제약은 없는가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힘들다기보다는 여느 작가와 같은 고민을 한다. 아이의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갖게 되는 어려움이지 외국인 작가이기 때문에 갖는 고민은 아니다. 사실 한국에서 외국인 작가는 전시에 첫발을 들이기는 오히려 쉬운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가지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업하면서 좀 더 다양한 지역에서 전시를 하려고 하면 그때부터 어려움에 봉착하곤 한다. 서울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서 전시하기가 쉽지 않다.
사진을 보이는 방법이 독특하다 구형의 사진작업을 학생 때부터 해왔다. 사진을 찍으면 내가 원치 않게 앵글에 다 담지 못하고 놓치는 부분이 생겼다. 소외되는 부분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파노라마를 선택했고,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구상하다가 구형을 선택했다. 사실 파노라마 방식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 성당의 반구형태 천장화에서도 나타난다. 비디오를 사진으로 풀어내는 작업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기본적으로 대학 때부터 과학, 기술을 작업에 접목시키는데 관심이 있었다. 최근에는 5월 14일부터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에 참여하기 위해 최근에는 3D 프린터를 사용하는 작업을 준비 중이다.
기본적으로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들었다. 한국에서 작업하면서 특히 관심을 가진 장소가 있는가 한국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이곳의 풍경과 공간을 담는다. 그러나 그 나라의 특정한 장소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예가 여러 나라에 있는 축구경기장이다. 독일에서 작업할 당시에 축구장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축구장은 수천명 관중의 시선이 경기하는 운동장으로 향한다. 나는 수많은 시선이 집중되는 운동장의 자리에서 카메라라는 하나의 시선으로 그곳을 둘러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를 볼록한 구형태로 나타냈다. 다수와 소수의 시선이 교차하는 것 자체가 흥미롭지 않은가. ●

베른트 할프헤르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독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학사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6-2009년에 파주의 하제마을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12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중앙대 조형예술학과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www.berndhalbherr.de

 photography, coated with plastics 2013

photography, coated with plastics 2013

[Sight & Issue] 제주 4・3, 기억 화해 치유

제주 4・3, 기억 화해 치유

1894년 갑오년의 동학민중혁명으로부터 두 갑자가 돌았다. 새날 새 세상이 올 것인가? 하늘 모심이 사람 모심이고(侍天主),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며(吾心卽汝心), 내 안에 하늘 기르기(養天主)의 철학이 들 싹으로 피어야 한다. 나(주체)와 너(타자)를 폭력적·강제적으로 구분했던 위험사회의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동학의 포접제(包接制)는 계급적 조선사회를 변혁하려는 사회적 대전환이요, 아방가르드 운동의 요체였다. 접(接)마다 접주(接主)를 두었던 것은 신라 최치원의 접화군생(接化群生)과 상통한다. 모든 생명과 만나서 관계를 맺고 변화하라는 그 정신! 하늘·땅·사람·정신·마음을 공공(公共)하는 철학으로서 “지극한 기운이 오늘에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빕니다. 하늘님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됩니다(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를 주문했던 그 실심(實心)을 위해서!
동학 100주년이던 1994년 제주 4・3미술제는 시작되었고 올해 20주년이 되었다. 1948년 4・3사건이 터진 뒤 46년이 흐른 뒤였다. 1988년 무렵 제주 미술동인 ‘바람코지’ 작가들이 미학적 접근을 시도했으나 본격화한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올해 4・3미술은 새로운 방향타를 제시하고 나섰다. 동학의 접화군생과 다르지 않다. 첫 접화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샌타로사시(市)다. 그곳 소노마카운티미술관에서 지난 2월 7일부터 5월 4일까지 <동백꽃지다 : 제주 4・3을 다룬 한국의 현대미술가들전>이 개최된 것이다. 소노마카운티는 제주와 자매도시를 맺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4・3사건이 미군정기의 일이라 전시 장소의 상징은 매우 컸다. 기억, 화해, 치유 등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된 이 전시는 로비와 아트숍을 비롯해 기획전시실과 소전시실까지 1백여 평의 1층 공간을 가득 채웠다. 아트스페이 씨의 안혜경 디렉터가 기획하고 다이앤 에반스 관장과 소노마카운티의 작가 마리오 우리베가 서로 공공하는 예술기획으로 협력해서 탄생시킨 전시는 향후 4・3미술 국제교류의 신호탄이 될 것이 분명하다. 소노마카운티미술관은 전시개막 후 첫 토요일과 일요일을 ‘특별주간’으로 기획했는데, 토요일 오전에는 강요배 작가의 4・3미술 연작 작품으로 4・3사건의 전개과정에 대한 강연과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낸 김종민의 “제주 4・3민중항쟁과 미국” 주제 강연이 진행되었고, 오후에는 캘리포니아대 크리스틴 홍 교수의 “한국전쟁” 주제 강연과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상영회가 있었다. 일요일에는 소설가 현기영의 “기억투쟁으로서의 문학” 주제 강연, 임흥순 감독의 시적 다큐멘터리 <비념> 상영회, 필자와 캘리포니아대 민영순 교수, 작가 강요배의 토론회, 그리고 딘 볼세이 리임과 램지 리임 감독의 다큐멘터리 <잊혀진 전쟁의 기억> 상영회가 진행되었다.
두 번째 접화는 4월 1일부터 20일까지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개최한 <오키나와 타이완 제주 사이 : 제주의 바다는 갑오년이다!전>이었다. 4・3미술제 20년 만에 처음으로 예술감독제가 도입되었고 필자가 그 역할을 맡았다. 그동안 4・3미술제는 탐라미술인협회의 프로젝트형 기획전시였으나 이번 전시에서는 제주미협, 한라미협을 비롯해 국내외 작가들을 대거 초대하여 국제전으로 치렀다. 접화군생의 핵심이 다른 생명들과의 만남, 관계 맺기, 변화이기에 4・3을 제주로부터 아시아로 확대해 전유하고 공유하는 공공지(公共知)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66년이 된 4・3사건은 이미 한국사회에서 잊혀진 지 오래일뿐더러, 제주 밖의 사회가 4・3사건을 회억하거나 또는 그것을 미학적 사건으로 기획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중 10만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타이완에서는 1947년 2월 28일 중화민국 통치에 맞선 본토인들의 항쟁으로 3만여 명이 희생했던 2・28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1948년 제주 4・3사건이 벌어졌다.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동아시아 세 섬에서 벌어진 이 비극적인 학살은 21세기 새로운 동아시아를 상상하기 위해서 반드시 풀어야 할 평화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40여 명이 참여한 이 전시도 또한 제주 내에서 시작한 국제교류의 첫 신호탄이라 할 것이다. 안팎으로 제주 4・3미술이 확장되고 있다. 공공하는 예술로서 4・3미술은 홀로주체가 아니라 서로주체의 서로 삶을 위한 미술운동이 되고 있는 것이다.

김종길・미술비평

제인 진 카이젠  5채널 비디오 설치 2011

제인 진 카이젠 <거듭되는 항거> 5채널 비디오 설치 2011

[핫피플] 제5회 ‘홍진기 창조인상’ 문화부문 수상자 서진석

제5회 ‘홍진기 창조인상’ 문화부문 수상자 서진석

대안공간 1세대, 혁신적인 창의성을 인정받다
서진석 대안공간 루프디렉터가 제5회 ‘홍진기 창조인상’문화부문을 수상했다. ‘홍진기 창조인상’은 재단법인 유민문화재단과 <중앙일보>가 제정한 시상제도로 매년 과학·사회·문화부문에서 “혁신적인 창의성을 바탕으로 기존 가치를 넘어선 새로운 가치를 선도한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해 시상한다. ‘홍진기 창조인상’은 공적 중심의 시상에서 탈피하여 앞으로의 부문별 기여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시상한다고. 대표적인 역대 수상자로는 반크(사이버 외교사절단, 1회,사회부문), 박종선(가구디자이너,2회,문화부문), 이자람(공연예술가,3회,문화부문),박재상(PSY,대중음악가,4회,사회부문)등이 있다. 상금은 500만원.
1999년 대안공간 루프를 개관한 이래 우리 대안공간의 산증인 역할을 했던 그이기에 이번 수상의 감회가 남달랐을 터. 그 소회를 물었다. 꼭 수상을 계기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 현재 별다른 담론 제기가 전무해 동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미술계가 과거로부터 무엇인가 취득할 단서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사실 15년 전과 지금의 한국 미술계는 너무나도 다르다. 1990년대 한국 미술계는 유형적, 무형적 미술의 향유시장이 부재했기 때문에 창작과 매개영역이 심하게 왜곡되는 현상이 팽배했다. 대관화랑의 비율이 95%가 넘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이러한 199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대안공간들의 초기 활동은 그 공유되는 목적의식이 뚜렷했다. 젊은 작가 발굴, 지원과 이를 통한 창작-매개-향유의 거시적인 순환구조 확립. 즉 형식이 내용적 대안이 될 만큼 젊은 작가 지원이 절실한 시기였다”며 “결과적으로 루프를 비롯한 초창기 대안공간들과 참여 작가들은 서구 주류 미술계와 한국미술의 간극을 줄였다”고 말했다.
물론 당시에 기치로 내걸었던 ‘대안’이 지금 2014년에 통용되는 ‘대안’과 그 뜻을 같이할 리는 없다. 아니 시간을 거치면서 그 의미는 매번 달라졌을 것이다. “예전에 대안성은 한국 미술계의 대안성이었지만 지금의 대안성은 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미술계의 대안성이 되어야 되는 시기가 되었다.” 글로컬 시대 한국미술은 세계와 교유하며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설명이다. “대안공간 루프도 2005년 이후 디지털기술의 발달, 후기자본주의 시작, 아시아성의 재정립이라는 시대적 어젠다를 중심으로 또 다른 대안성을 모색해왔다. , <비디오아카이브 네트워크포럼>, <아시아 창작공간 네트워크>, <예술과 자본> 등의 국제 행사들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이 답변에서 디렉터가 열거한, 대안공간 루프가 변화의 시기에 수행했던 프로그램이 바로 이번 수상의 이유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 디렉터는 이에 덧붙여 “미술계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생태계를 형성하고 다양한 예술 창작활동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안공간 루프의 발전적 활동을 위해서는 예술정책, 예술교육, 국내외의 전시기획 등등 예술 사회의 다면적인 환경 변화도 매우 중요하다”며 그간의 능동적인 행적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간의 공적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속가능한 문화분야에 대한 기여도도 참작해 수상자로 선정된 만큼 이후 행보를 물었다.
“8월 말 광주에서 문화관광부가 주최하는 아시아 창작공간 네트워크 행사의 일환으로 <아시아 민주주의의 거울과 모니터전>을 준비하고 있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다양한 양상과 공공예술을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중국에서 한국의 신진작가 그룹전도  개최될 예정이다.
황석권 수석기자

서진석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원대 응용미술과와 시카고 미술대학원, 필라델피아 텍스타일 과학대학 PCT&S를 졸업했다. 1999년 대안공간 루프를 설립 현재까지 디렉터를 맡고 있다. 대구사진비엔날레 운영위원, 인천아트플랫폼 운영위원, HOMA 운영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경원대(2007~2010), 경희대(2009)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2001년 ‘티라나비엔날레’(2001), ‘리버풀비엔날레’(2010) 등 다수의 국제 비엔날레의 기획에 참여했고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 센트럴이스탄블, 카사아시아, ZKM 등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또한 《150아시아현대미술작가》, 《예술과 자본》, 《동양적 은유》 등의 미술서적을 기획, 발간했다.

SSS-7

2001년 대안공간 루프 구관(舊館)에서 열린 ‘작가 만들기 매니저’ 김홍석 기획 <레트로비스트로전> 광경

 

[핫피플] 2015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이숙경

2015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이숙경

커미셔너와 작가의 파트너십을 기대한다
1995년 건립된 베니스비엔날레의 한국관이 2015년 건립 20주년을 맞이한다. 한국관은 그동안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 미술의 맥락에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2008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역임한 오쿠이 엔위저(Okui Enwezor)가 진두지휘하는 2015년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5. 9~11. 22) 한국관 커미셔너로 이숙경 영국 테이트미술관 큐레이터가 선정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커미셔너를 지명하는 종래의 방식에서 탈피해 최종후보 4명이 작가 및 전시 기획을 제안하고 이를 토대로 선정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로써 이 커미셔너가 제안한 문경원 전준호 작가가 2015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최종 선정됐다.
이숙경 신임 커미셔너는 “이번 기회를 통해 동시대미술의 가장 첨예한 이슈들을 다룰 뿐 아니라 그 미래 또한 이끌 수 있는 선각자적 시각을 제안하고 싶다”며 “중심과 주변이라는 틀이 깨지고 상대성과 다양성이 중시되는 오늘의 미술계에서 한국 미술 또한 전지구적 미술 담론의 중요한 일부임을 강조할 생각”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문경원, 전준호를 한국관 작가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두 작가는 카셀 도쿠멘타, 올해의 작가상, 광주비엔날레 등 국내외 다양한 플랫폼에서 지난 수년간 주목할 만한 작품을 보여주었다. 미술뿐 아니라 디자인, 건축, 영화, 문학 등 미술 외적 분야 전문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광범위한 인류 생존의 문제, 미술의 본질적인 역할 등 한국이라는 지리적, 문화적 조건을 넘어서는 보편적 이슈들을 다룬 점이 내게 긍정적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2015년 한국관 전시를 위해 두 작가는 이전에 보여온 작업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예술적 도전이 될 만한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신작의 내용과 전시로 구현되는 방식은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되진 않았다. 작가 문경원 전준호는 2012년 카셀 도쿠멘타에서 첫선을 보인 프로젝트 <미지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부터 공동작업을 해왔으며 후속작 <순수존재(AVYAKTA)> 이후 특히 영상작업을 통해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최근 두 작가는 분단국의 특수한 상황을 통해 삶과 예술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반영한 단편영화 <묘향산관>과 루이비통코리아의 후원으로 전통 악기장 이영수·이동윤 부자의 ‘장인정신’을 현대미술 다큐로 풀어낸 <공무도하가>를 제작 중이며 올해 하반기에 발표할 예정이다.
문경원, 전준호를 비롯해 최근 미디어아티스트들이 다양한 협업의 과정을 통해 영화를 선보이는 현상에 대해 이 커미셔너는 이렇게 말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등장한 비디오아트가 시간적 요소에 바탕을 두고 기계적으로 생산된 이미지를 기본 개념으로 했다면, 최근 보이는 영화적 영상 작품들은 확장된 혹은 해체된 시네마 등, ‘영화’의 내러티브 및 시각적 관행에 대한 질문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문경원 전준호 또한 주류 시네마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도입하여 익숙한 듯하면서도 비관습적인 시각적 내러티브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현재 이 커미셔너는 올해 하반기 테이트 모던에서 열릴 백남준 신소장품 전시를 준비하고 있으며 테이트 모던의 신관 개관을 위한 소장품 전시와 기획전 큐레이팅에 참여하고 있다.
이슬비 기자

이숙경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았다.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영국 에섹스 대학교에서 미술사와 미술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홍익대학교 강사 등으로 활동했으며 2006년 영국예술위원회 펠로우 큐레이터로 한국 현대미술전을 포함한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2007년부터 테이트 미술관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백남준, 더그 에이트킨 등 대규모 기획전과 다수의 소장품 전시를 기획했으며 테이트 아시아태평양 작품 구입위원회 큐레이터를 겸임하고 있다.

준호경원 (2)

문경원 전준호 <세상의 저편> 2012 광주비엔날레 전시광경

 

[컬럼] 필요와 신뢰 그리고 자생의 공간

필요와 신뢰 그리고 자생의 공간

1997년 여름, <(가칭)300개의 공간展>은 아주 단순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고 있음을 감지한 작가를 비롯 미술계 젊은 일꾼들이 그나마 가능한 정보를 서로 자발적으로 교류해보자는 의도였다. 당시의 환경은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몇몇 작가에게는 등기우편 또는 전보로 전시참여 의사를 묻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며, 그나마 신세대인 젊은이들에게는 삐삐라는 무선호출기가 보급되어 비교적 수월하게 업무를 진행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큐레이터 명함을 지닌 이들은 손에 꼽혔으며, 대부분 전시공간에 컴퓨터는커녕 팩스조차 없었다. 그 흔한 기관의 지원은 경력이 미천한 젊은 작가들에게는 무의미했으며 기금공모 기간조차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20여 명의 전시공간 ‘실무자’가 모여 자신들이 알고 있는 작가들의 목록을 서로 교환하며 현장에서 진짜로 쓸모 있는 데이터를 만들어보고자 힘을 모았다. 각 실무자들이 5~10명 내외의 작가를 추천하여 중복된 작가들이 있을 경우 300명이 될 때까지 계속 추천을 더 받는 복잡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을 추진했다. 혹 물의가 있을 수 있어 다수 중복 추천된 명단은 실무자들끼리만 공유하며 되도록 외부에 공개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했다. 당시 대부분 기관장이나 전시공간의 관장들은 권위를 내세워 특정 학력 또는 공모전 특선 이상 경력을 가진 작가를 선호하던 시기여서 기존의 모든 타성을 버리고 오직 실무자의 소신으로 작가를 추천하도록 유도했음은 물론이다. 단, 이 행사의 가장 큰 걸림돌은 소요경비였다. 어떤 정치적 이슈도 조형적 이념도 아닌 미술현장 실무자들의 단순한 정보교류 성격의 자발적 행사에다 어떤 기관의 지원과 관여도 없는 탈권위적 행사였기에 재원을 마련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고육지책으로 십시일반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실무자와 작가 모두에게 일정의 비용이 부담되었다. 돌이켜보면 작가와 실무자들의 ‘필요와 신뢰’가 소요경비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큰 비결이었던 셈이다.
농담으로 미술현장에서는 양식산과 자연산을 구분한다. 주는 것만 받아먹어 수렵과 채취에는 허약하지만 곱게 자라 고귀한척 하는 부류와 어디에 갖다 놓아도 굶어 죽지는 않으나 길들지 않아 다소 엉성하고 거친 야생의 부류를 의미한다. 어차피 미술현장은 현대미술 초기부터 굳건하게 유지된 사다리 구조에 속하지 못한, 불만과 불안에 가득 찬 대다수 자연산들로 득실댄다. 그래서 개체수로 보아 자연산이 더 우세일 것 같으나 막상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은 양식산 성향이 더 짙다. 아마도 양식산은 가늠이 가능하나 자연산은 이름 그대로 야생이기에 그들의 성깔과 습성 또한 제각각인지라 파악하기 난해한 탓이리라. 이제 와서 굳이 <(가칭)300개의 공간展>의 성과를 들추자면 딱딱하게 굳은 메마른 땅에 아직 덜 갖춰진 유연한 창작의 감성을 작가와 실무자가 힘을 합쳐 ‘내 땅 갈아 내가 먹기 식’으로 대거 주입시킨 일이었다.
요사이 넓어진 문화지평에서 흔히들 창작 또는 예술활동과 단순 문화행사를 너무 쉽게 혼동한다. 특히 기관의 지원을 받는 행사인 경우, 자신들이 행정 그리고 복지 차원의 일에 복무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물며 일정 비용을 받고 투여되는 행사인 경우 그 목적에 부합한 용역을 요구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개별 창작자나 행사 주관자 또는 실무자에게 행사에 참여 할지 결정하는 데 신중함이 요구된다. 그리고 자신의 습성과 어울리지 않다면 가볍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행사 참여로 개인적으로 얻는 성과 또는 실적 올리기에 급급함을 떠나 그 결과의 득실이 행사에 참여한 모든 이에게 본의 아니게 영향을 주기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더구나 구태의연한 행정이나 얍삽한 처세술을 예술행위 또는 권위라 착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은 탓에 작가나 실무자 모두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다.
부실한 난파선에서 그나마 서로에 대한 신뢰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건강한 환경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요즘 현실의 면면에서 체감되는 남한 사회를 비롯한 창작환경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신뢰에 선행되어야 할 의사소통 자체가 어긋나고, 행정 또는 여론의 과잉으로 비판의 대상자가 잘못 설정되거나, 생산 없이 유통 경쟁만 부풀려지는 식상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분단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를 낳는 세대단절은 한동안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모두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 절실하다.

최금수·이미지올로기연구소 소장

Editor’s letter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마음이 먹먹하고 답답하다. TV를 끄고 괜스레 넓지도 않은 집안을 서성였다. 책꽂이에 꽂힌 책 가운데 불현 듯 눈에 들어 오는 책이 있었다.《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한겨레출판, 2010). 혹여나 오해는 마시라. 제목만 보고 남녀사이 시시콜한 연애사 쯤으로 치부하지 말란 말이다. 이 책은 ‘비겁하게 살지언정 쪽팔리게는 살지 말자’는 마음가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여성 언론인 김선주 선생의 칼럼 100여 편을 모아 놓은 책이다. 김선주 선생은 20대에 처음
《 조선일보》에 입사한 후《 한겨레》 창간부터 줄곧 거기서 활동하며 논설주간까지 지낸 인물이다. 현역에서 은퇴했음에도 여전히 후배 기자들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언론계 선배로 손꼽는다. 책에 실린 글은 김 선생이 20여 년 동안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던 것들이다. 한사코 자신의 글이 부끄럽다고 말하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과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한 통찰의 문장이 빼곡하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은 김 선생의 글을 일컬어 “자신의 부끄러움에서 출발해 자기성찰로 이어진”, “김선주라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지금 우리-시대-존재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는 동시에 자기성찰을 위한 시간을 절대적으로 가져야한다.
이별에 대한 또 하나의 단상. 그러고보니 벌써 10년이 지났다. 2004년 4월 26일, 작가 박이소 선생이 이 세상과 이별한지 말이다. 당시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건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나는 그해 9월호에 부랴부랴 특집기사를 만들었었다. 나는 거기서 문학평론가 故김현 선생이 시인 기형도의 유고시집에 쓴 문장을 큰따옴표로 인용했었다. 앞서 먹먹한 마음을 김선주 선생의 책으로 갈음한 것처럼, 그 따옴표를 오늘 이자리에 다시 옮겨 적는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한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그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실제로 없다는 점에서, 그의 육체는 부재지만, 머릿속에 살아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육체는 현존이다. 말장난 같지만,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완전한 사라짐이 사실은 세계를 지탱한 힘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동안 그(들)의 사라짐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박이소 10주기 개인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Something for Nothing)>이 6월 1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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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 이목구비 확인할 수 있게 밝게 해주세요)
김종길 미술비평
올해 4・3미술제 20주년 기념전 전시감독을 맡았다. 그는 10년 넘게 <4・3미술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진 4・3항쟁을 호출하는 데 앞장서왔다. 그는 4・3을 비롯한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예술과 행동에 대한 사유를 몸소 실천하는 대표적인 비평가이자 전시기획자다. 최근 ‘샤먼/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비평적 개념을 제안함으로써 한국 미술사의 주체적인 시각에서 4・3항쟁과 같은, 국가폭력과 야만에 대항하는 궁극적 해방에너지를 탐색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김지연
김지연 예술감독
‘2014부산아트쇼’의 성공적인 마무리 뒤에는 김지연 예술감독이 있었다. 분명히 여타 아트페어와의 차별화에 성공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아트페어 곳곳에 전시를 진행해 관람객을 미술장터와 함께 진중한 전시를 경험하도록 유도했다. 아트쇼 폐막 후 며칠 휴식을 가져봄직도 하지만, 그녀는 ‘지리산프로젝트’, ‘제2회 창원조각비엔날레’ 등 다양한 프로젝트와 전시를 준비하느라 바로 출근했다고. 행사 준비도 좋지만 몸도 잘 챙기시길.

 

MM_CO
조아라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입사한 후 연속해서 다양한 전시를 담당하고 있는 큐레이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도 이번 호 특집과 유사한 기획의 전시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에 다짜고짜 연락을 취했다. 업무량이 많아 야근을 반복한 피곤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대화가 오가며 열정적이고 힘이 넘치는 젊은 큐레이터의 모습을 보았다. 6월에 열릴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 작가들의 그룹전 을 기대해본다.

Art Journal

근대 파리의 삶을 서울에서 엿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오르세미술관전> 역대 최대 규모로 선보여

19세기 후반 인상주의 이후 새로운 흐름을 선보인 미술가들과 근대 도시 파리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는 전시가 개최했다. 5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에서 열리는 기획특별전 <근대 도시 파리의 삶과 예술, 오르세미술관展>이 그것. 국내에서 오르세미술관전을 선보인 것은 이번이 네 번째지만 역대 최대 규모다. 이번 전시에서는 클로드 모네,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등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한 거장들의 회화를 비롯하여 조각, 공예, 드로잉, 사진 등 175점에 달하는 다양한 작품이 선보인다.
클로드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 폴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 오딜롱 르동의 <감은 눈> 등 모네의 후기 작품부터 광학적 시각을 반영한 신인상주의, 도시와 문명을 떠나 원시적 삶을 찾아 나선 폴 고갱과 퐁타방파,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한 빈센트 반 고흐와 폴 세잔을 비롯하여 세기말적 시각을 반영한 상징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후기 인상주의를 풍미했던 화가들의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강렬한 색채와 평면적인 화면으로 자연의 구조와 원시적 삶,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그린 이들의 작품은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미술사적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또한 인상주의 이후 다양한 줄기로 변천하는 미술의 흐름은 근대의 기틀을 다지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후기 인상주의 거장들의 작품과 더불어 이번 전시는 건축 드로잉, 사진 등을 통해 19세기에 새롭게 정비된 파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아름다운 시절(벨 에포크)’로 불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제작된 초상화와 드로잉, 아르누보 공예품들은 이 시기 파리인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외에도 화폭에 담긴 파리인들의 거리의 삶, 근대성의 상징으로서 에펠탑이 지닌 다양한 모습을 포착한 작품들을 통해 근대 도시 파리의 다양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전시 개막에 맞추어 내한한 오르세미술관 기 코즈발 관장은 “이번 전시는 지금까지 해외에서 진행했던 전시회 중 가장 큰 규모이다. 그동안 특별 관리된 앙리 루소의 <뱀을 부리는 여인>은 반출 금지 목록에 올라가 있었다”며 “이번 전시가 해외 첫 나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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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회화의 모색

커먼센터 개관전 성황리에 막 내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작은 금속 공장들 사이의 한 건물에서 지금, 여기의 회화를 조망하는 전시가 열렸다. 커먼센터 공식개관을 알리는 전시 <오늘의 살롱>(3. 27~5.18)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는 동시대 회화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로 총 69명의 작가들의 회화 150여 점을 전시했다.
벽이 유난히 많은 커먼센터 전시장의 특징을 최대한 살린 전시로 드로잉을 포함 크고 작은 규모의 평면회화가 자리를 빼곡히 채웠다. 전시 의미에 대해 커먼센터측은 “오늘, 한국의 회화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동시대의 미술에서, 미술사를 저술하거나, 매체에 기반을 둔 전시를 꾸리는 것을 ‘촌스러운’ 일로 여기는 동안, 단색화와 민중미술 이후 몇몇 선배의 활약이 있었음에도, 전반적으로 최근까지 한국 회화의 역사는 파편적으로 이어져왔다. 그렇기에 현재의 회화적 상황을 조망하고 점검할 수 있는 형식적 얼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전시서문에 밝히고 있다. 전시장에는 작품과 작가를 알리는 어떠한 표시도 없었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한 장의 종이에 전시도면과 작가 이름과 작품명을 나열한 것이 전부. 이러한 전시구성은 생경한 공간에 놓인 회화만을 돋보이게 했다. 이번 전시에 맞춰 커먼센터에서는 참여 작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다양한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토론은 회화에 드러나는 재현, 망상, 의식체계와 형태 표현, 서사와 가상성, 이미지 구축을 위한 행위 등 6가지 주제로 진행되었다.
지난해 11월 개관한 커먼센터는 미술가가 운영하는 공간을 표방하며 3년간 버려졌던 건물에서 전시를 시작하였다. 커먼센터는 기존의 미술관, 갤러리 혹은 대안공간의 틀에서 벗어나 현대미술 전시공간을 모색하고자 개관한 공간으로 ‘센터’라는 명칭을 달았다. 이곳은 독립출판지《  도미노》의 동인 함영준 씨가 디렉터를 맡고 그래픽 디자이너 김영나·김형재, 미술가 이은우가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개관전 이후 6월에는 네덜란드 작가 마크 오스팅의 개인전<one more time>과 칼아츠 그래픽 디자인 단체전이 비슷한 시기에 개막하여 6월 29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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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춘천 상상마당 (1)

춘천의 기록을 담다

KT&G 상상마당 춘천 개관

KT&G 상상마당이 서울 홍대, 충남 논산에 이어 지난 4월 29일 세 번째 공간을 춘천 의암호 주변에 개관했다. 개관전은 2013년 3월부터 2014년 4월까지 진행된 <KT&G 상상마당 춘천 기록 프로젝트 “기억하다”>의 결과물을 토대로 기획됐으며 사진가 염중호가 참여한 <내 눈앞에는 오로지 창의 푸른 커튼뿐이었다> (4.29~6.15)와 김인숙, 김명권 이상규가 참여한 아카이브 상설전 <봄내의 기억과 기록>이 전시된다.
전시가 진행되는 KT&G 상상마당 춘천 건물은 한국 현대 건축사에 큰 획을 그은 김수근이 1980년 설계한 춘천시 어린이회관과 인근 강원도 체육회관을 리모델링한 곳이다. 김수근 건축의 특징인 붉은 벽돌과 자연주의 미학이 드러나는 건축물로 큰 보존가치를 지님에도 그간 시설 노후로 공간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번 개관전에서 염중호는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건축물의 모습을 닳거나, 구석이 부서진 벽돌, 오래된 게시판 위에 남아있는 포스터 종이 등 놓치기 쉬운 부분을 카메라에 담았다. <봄내의 기억과 기록전>에서는 KT&G 상상마당춘천의 리모델링 과정을 담은 사진과 역사책에는 나와 있지 않은 춘천의 이야기를 어르신들에게 듣고 기록한 후 춘천 어린이들에게 그 내용을 전달해 직접 재현해보도록 하는 설치작업 등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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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독일의 최신 경향 소개한다

독일계 화랑 보데갤러리 개관

미술시장의 장기 불황으로 국내 화랑들의 해외 진출이 주춤하다. 이미 진출한 갤러리들이 해외 지점에서 철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고, 외국 갤러리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 독일계 화랑이 대구에 지점을 열어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대구 대명동 산기슭에 자리 잡은 보데(Bode)갤러리가 그곳이다. 일종의 스페이스 프로젝트 성격을 띤다. 보데갤러리가 개관하면서 하리 마이어(Harry Meyer) 초대전을 선보였다.
지난 4월 16일에 시작하여 한 달 동안 이어진 개관 전시회의 주인공 하리 마이어는 캔버스에 물감을 두껍게 발라서 풍경을 묘사하는 회화작품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보데갤러리 본점이 위치한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하리 마이어는 본인의 발걸음이 닿은 자연 경관을 매우 속도감 있게 그려낸다. 캔버스 위에 풍부하게 남은 물감의 질감은 과감한 색의 선택과 선명한 붓놀림 자국으로 관객에게 에너지가 꿈틀대는 느낌을 전한다. 그는 서구 미술사에서 알프레드 뒤러 이후 전통적인 풍경화에 내재된 이성적인 계산 가능성을 배제하고 자연 그 자체의 인상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런 재현 방식은 동시대미술에 의하여 그 의미가 흥미롭게 해석되고 있다.
보데갤러리는 6월 전시로 독일 조각가 클레멘스 하이늘(Clemens Heinl)의 입체작업 개인전을 준비했다. 대구에 독일갤러리 지점이 대구에 개관한 일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외국 화랑이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전시 활동의 근거지를 두게 되었다는 점은 국내 미술시장의 판도 변화와 더불어 지역문화 분권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사례로 읽힌다. 대구 보데갤러리는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독일의 예술 경향을 직접 소개하는 동시에,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현지에 진출시키는 일을 다각도에서 진행 중이다. 대구=윤규홍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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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조선화 145x523cm,1958년

월북화가의 미술사적 여백 어떻게 채울 것인가

정종여 100주년 기념 세미나 열려

월북작가 청계 정종여(1914~1984)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5월 21일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정형민) 덕수궁관에서 학술세미나가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서 가천대 윤범모 교수는  ‘남북종화의 혼합 혹은 소야(疏野)’라는 주제로 정종여의 예술세계를 조명했으며,《  아트인컬처》 김복기 대표는 정종여의 활동면모와 미술사적 평가를 다루었다. 그리고 청계의 손자인 정단일 씨는 2013년 부산 토성초등학교에서 발견된 정종여의 <독수리>, <지리산> 대작 2점을 비롯해 최근 1년간 정종여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발굴한 성과와 작품 목록은 정리해서 발표했다. 발표자들은 아직 정종여의 생애와 예술세계가 상당 부분 공백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많은 작품 및 자료 정리가 여전히 미술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2013년부터는 유족과 연구가들이 기념 사업회를 발족하고 작품 조사 발굴 등 재조명 작업을 펼치고 있다.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한 정종여는 조선미술전람회에 특선을 차지하는 등 동양화단의 촉망받던 신예작가로 산수, 인물, 화조, 풍속화, 불화 등 다양한 소재를 넘나들며, 분방한 필력과 섬세한 사실 묘사력을 겸비한 화가였다. 해방 직후 진보적인 미술단체에서 활동했으며, 6·25전쟁 때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부역 활동을 하다 9·28수복을 전후로 북으로 건너갔다. 정종여는 북한에서도 정통 수묵 산수화와 섬세한 필치의 사실적인 채색화에 모두 뛰어난 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그는 북한에서 1947년 평양미술대학을 창설하고 북한이 민족적 주체적 양식이라 내세우는 조선화 분야의 이론적 체계를 구축했다. 1974년 공훈미술가, 1984년 인민미술가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1978년 이후 동맹현역미술가, 만수대창작사 소속으로 활동했다.
월북 이후 한국에서 ‘금기(禁忌)의 작가’로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988년 해금조치 이후 1989년《  월간미술》에서는 그를 <해금작가 작품 발굴> 시리즈의 첫 번째 화가로 조명했으며 같은 해 서울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첫 회고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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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방의걸  (2)

60년의 화업을 조명하다

원로화가 목정 방의걸 화백 개인전

오랜 세월 한국의 산수를 화폭에 담아온 목정 방의걸 화백이 5월 14일부터 19일까지 인사아트센터 에서 11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산수화와 문인화에 대한 깊은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수묵 산수에 문인화적 요소가 공존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방의걸 화백은 서양화로 미술에 입문하였지만 홍익대학교 재학시절에 한국화의 거장 청전 이상범과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영향을 받아 전공을 바꾸게 되었다. 방 화백은 은사인 이상범 교수의 “우리의 그림에 우리 분위기와 우리 공기, 우리 뼛골이 배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어떤 미술형식에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의 산과 들에서 만나는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풍경을 화면에 담아왔다.
방 화백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나는 거창한 회화적 이론이나 철학적 사상도 없다. 다만 그리고 싶어 그리고 그냥 그린다. 그림으로 ‘시’를 쓰고 삶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상념 속에서 끌어내어 그림으로 말을 한다. 그러므로 나의 그림은 곧 나의 심상의 언어요 삶이라 하겠다” 면서 모든 사람이 작품에 친근하게 다가서서 기쁨과 감동을 공유해야 한다는 작업관을 이번 전시에서도 진솔하게 드러내었다.
방의걸 화백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전주대학교 대학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지냈고, 2003년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미술과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전주=최정환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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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마도 이현무 (3)

사진의 회화성

이현무, 2014 아마도 사진상 수상

<제 1회 아마도사진상>에 작가 이현무가 선정됐다. 작가는 디지털 복제시대에 사진의 고유성과 회화성에 대해 고민한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특히 필름 사진이 아닌 페이퍼 네거티브에는 사진의 원본성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담겨있다. <제1회 아마도사진상>은 아마도 예술 공간 주최로 진행되었으며 심사위원으로 윤범모, 유진상, 오형근, 신수진, 서진석 관장이 참여했다. 수상자에게는 1만 U.S달러(한화 약 1000 만원)의 상금이 수여되었고 아마도 예술공장에서 전시기회가 주어졌다. 이현무의 개인전은 5월 19일부터 6월 17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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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박승예_인물사진9 이만나_얼굴사진

신진작가들의 도약을 위한 기회

종근당 예술지상 선정작가 김효숙 박승예 이만나

한국메세나협회가 주최하고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가 주관, 종근당이 후원하는 ‘2014 종근당 예술지상’ 작가로 김효숙, 박승예, 이만나   (왼쪽부터)가 선정됐다. 2012년 제정된 ‘종근당 예술지상’은 최근 2년간 주요 국공립 및 비영리 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와 비영리전시공간의 전시회 참여작가 중 만 45세 이하의 회화작가를 지원대상으로 작가 3명에게 창작지원금과 전시 기회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김효숙, 박승예, 이만나는 올해 158명의 대상자 가운데 2차례에 걸친 심사를 거쳐 선정됐다. 이들은 앞으로 3년간 매년 1000만 원씩 모두 3000만 원의 창작지원금을 받고 작업하며 2016년 선정작가전을 통해 그 결과물을 선보이게 된다. ‘종근당 예술지상’은 앞으로 장기적으로 작가를 지원하고 대상 부문도 조각, 사진, 설치미술 등으로 다양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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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우 PO1 100x133cm Pigment Print 2014

현대 기계도구의 시간적 단명

막스 드 에스테반, 갤러리 나우 작가상 수상

사진 전문 갤러리인 갤러리 나우(대표 이순심)가 주최하는 제6회 ‘갤러리 나우 작가상’에 스페인 출신 막스 드 에스테반(Max de Esteban)이 선정됐다. 수상을 기념해 막스 드 에스테반의 개인전이 5월 14일부터 27일까지 갤러리 나우에서 열렸다.
막스 데 에스테반의 연작 <단명(Only the ephemeral)>은 예술 소통과 제작을 위해 쓰였던 구식 기계들을 엑스레이 사진으로 촬영해 제품 내부에 구조적으로 남아있거나 없어진 흔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각 사진은 제품의 개별적인 특성을 제거함으로써 부패와 죽음을 포괄적으로 상징한다. 사진평론가 진동선은 “현대 기계도구들의 시간적 단명성을 통찰하는 미학, 이미지를 구현하는 탄탄한 구성력, 전체적으로 현대사진의 트렌드를 견지하면서도 아날로그 전통성의 감각을 선보인다”며 높이 평가했다.  이 상은 2009년 다양한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외 사진예술의 새로운 변화와 활로를 여는 것을 목표로 제정됐다. 1회 수상자 이상엽, 2회 신은경, 3회 이준, 4회 파야, 5회 캐서린 넬슨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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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전원길 (1)

하늘을 담다

자연미술 작가 전원길 개인전

자연을 화폭에 담는 작가 전원길의 개인전 <하늘, 안으로 들어오다>가 5월 9일부터 6월 1일까지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동탄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다. 화성시문화재단이 가정의 달 특별전으로 준비한 이 전시에서 작가는 푸른 바탕으로 하늘을 연상시킨 <영원한 풍경> 연작을 선보인다.
평론가 윤진섭은 그의 작품에 대해 “전원길의 예민한 감성은 아마도 오랜 기간에 걸쳐 자연의 사물들과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 같다. 거기에는 길이 있고 그 길은 감각적인 붓질로 이루어진 색의 계조(gradation)로 이루어져 있다. 전원길이 그려내는 이 환상적인 풍경은 현실의 자연을 떠나 이상향의 세계를 그리는 작가의 내면적 풍경이다”라고 말했다. 화성시문화재단은 전시기간 다양한 체험활동을 통해 지역주민들이 자연에 새로운 해석을 더한 작품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한다.
전원길은 1999년 첼시미술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18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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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자작나무이야기 116.7X91.0 혼합재료

푸른 빛의 자연

김연화 개인전

김연화의 개인전이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충무아트홀 충무갤러리에서 열렸다. <자작나무 이야기 “블루에 취하다”>란 타이틀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푸른 빛으로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표현했다.
자연의 강, 바다, 하늘의 파란색이 조금씩 다르듯 작가 역시 자연을 표현하는데 공통된 푸른색을 사용하지만 같은 빛깔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벽, 하얀 자작나무, 영롱한 달빛을 그려 현대인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불안, 소외, 고독의 감정에 쉬어갈 수 있는 힐링의 시간을 제공한다. 가상과 실재 사이를 오가는 풍경이 쪽빛과 합쳐져 작가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번 전시는 김연화의 14번재 개인전이다. 이외도 작가는 200여회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으며 LG, 중구문화재단, 숭실대학교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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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보타닉

식물과의 교감을 그리다

보타니컬 아트 공모전 수상작 전시 열려

한국식물화가협회에서 주최하고 253년 전통을 가진 파버카스텔(대표 이봉기)이 주관, 서울여자대학교 플로라 아카데미가 후원하는 <제6회 보타니컬 아트 공모전> 수상작 전시가 5월 14일부터 20일까지 경인미술관에서 열렸다. 자연친화적인 문화 활동을 이어가고자 2009년부터 파버카스텔과 한국식물가협회가 뜻을 합하여 추진하고 있는 행사이다. 공모 참가자들은 파버카스텔의 알버트 뒤러 색연필로 ‘또 다른 자연의 아름다움을 식물’을 표현했다. 보타니컬 아트란 식물학적인 미술화를 뜻하며 꽃을 식물학적 시점에서 관찰하고 이를 세밀하게 표현하는 그림을 말하지만 정밀한 묘사보다도 미학적 교감에 초점을 맞춘다. 이번 전시의 대상 수상의 영광은 리기다소나무를 그린 이정인에게 돌아갔다. 꽃양배추를 그린 송은영은 금상, 감을 그린 손미숙과 에스포스토아 쿠엔테리를 그린 최백선은 은상을 수상했다. 이외 32개의 작품이 당선되어 함께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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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세월호 (2)

아픔을 함께한다

세월호 참사 추모전 열려

수원민족미술인협회와 세월호를 생각하는 미술인들이 세월호 참사로 인한 희생자들의 영면을 빌고, 참사에 책임이 있는 모든 구조와 사람을 밝혀내길 원하는 마음을 모아 세월호 참사 추모전 <세월아 세월아 가슴 아픈 세월아>를 열었다. 전시 작품은 5월 10일부터 수원역 광장 시민분향소 앞에, 5월 24일부터 6월 10일까지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 일대에 프린트아트 야외설치 형식으로 설치된다.
협회 측은 “분향소를 찾는 많은 국민과 유가족들이 안식을 찾고 치유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우리가 매순간을 기억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아픔을 함께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권은비, 손현선, 오은주, 이오연, 이윤엽, 정세학, 최정숙, 황정경 등 참여작가 35명의 작품 40여 점이 전시돼 미술인들의 추모와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Portrait in jazz 12

돌격대원으로 위장한 신전통주의자

황덕호  재즈 칼럼니스트

1950년대 말 오넷 콜먼(Ornette Coleman), 세실 테일러(Cecil Taylor)로부터 시작된 소위 아방가르드 재즈의 파장은 그 음악을 무시하려던 사람들의 예상보다 훨씬 지속적이었다. 평론가 존 타이넌(John Tynan)은 이 음악을 두고 ‘안티-재즈(Anti-Jazz)’라고 불렀지만 1960년대 재즈의 기수였던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마저
이 기류에 합세함으로써 아방가르드는 이름 그대로 1960년대 중반 이후 재즈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실 그 모습은 위태로웠다. 왜냐하면 이미 비틀즈이후로 새롭게 변모된 로큰롤은  재즈 연주자 대부분이 무시했던 1950년대의 단순한 모습에서 벗어나 재즈가 청중에게 제공했던 만족감의 대부분, 그러니까 음악의 역동성과 즉흥성을 대신해 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재즈는 아방가르드라는 이름 아래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길을 택하고 있었으니 재즈 시장의 자멸은 불 보듯 자명했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가 재즈-록 퓨전으로 급선회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마일스가 록 혹은 솔(soul) 음악의 힘을 빌려 재즈의 생명을 연장하려고 했던 시도는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마일스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갈래를 쳐나가기 시작했다. 마일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 칙 코리아(Chick Corea)가 이끌었던 그들의 밴드들은 이 시기 재즈보다는 록에 더 가까워진 모습을 보였으며 재즈와 팝 음악이 뒤섞여 재즈의 즉흥연주가 거의 질식된 스무드 재즈가 등장했을 때 재즈의 외연은 확대를 넘어 거의 해체되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 재즈의 전통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인물들은, 역설적이게도 아방가르드 재즈 진영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문 닫은 재즈클럽들을 대신해서 맨해튼 남쪽 소호가 혹은 브루클린 공장 지대의 다락방을 그들의 작업실 혹은 공연장으로 개조하여 평론가들로부터 ‘로프트 재즈(Loft Jazz)’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으면서 퓨전시대에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재즈의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 나가기 시작했다. 재키 바이야드(Jaki Byard)는 1920년대 할렘 스트라이드 피아노와 당대의 전위 재즈 기법을 연결했으며 색소폰 주자이자 작곡가인 앤서니 블랙스턴(Anthony Braxton)은 재즈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고적대 음악을 아방가르드 빅밴드 음악의 재료로 활용했다. 그런 면에서 이들의 성격은 음악학자 존 스웨드(John Szwed)의 지적처럼, 아울러 평론가 휘트니 발리에트(Whitney Balliett)가 오넷 콜먼을 “진정한 혁명가들이 그렇듯이 원시인으로 변장한 지식인”이라고 평했던 것과 유사하게, “돌격대원으로 가장한 신전통주의자들”이었다.
그러한 흐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인물은 테너 색소폰 주자 데이비드 머리(David Murray)였다. 그의 사운드에는 1960년대 프리재즈 세대의 마지막 인물 앨버트 아일러(Albert Ayler)와 아치 셰프(Archie Shepp)의 영향이 확연하지만 그는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폴 곤잘베스(Paul Gonsalves), 벤 웹스터(Ben Webster), 콜먼 호킨스(Coleman Hawkins)의 주법을 복원함으로써 테너 색소폰의 계보를 하나로 연결했다. 피카소의 <비스킷이 있는 정물화>를 표지로 내건 머리의 앨범 <피카소>는 현대미술의 비조(鼻祖)를 통해 색소폰과 재즈의 본질을 들여다본 역작으로, 데이비드 머리는 테너 색소폰의 아버지 콜먼 호킨스가 1948년에 남긴 최초의 무반주 테너 색소폰 독주녹음 <피카소>를 8중주를 위한 7악장의 모음곡으로 확대해 모든 재즈란 사조, 스타일과 상관없이 현대적이며 전위적이란 명제를 설득력 있게 증명해 보였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재즈의 역사성이기도 했다.
그래서 윈턴 마살리스(Wynton Marsalis)와 같은 순수 복고주의자들의 냉소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포함한 인습타파주의자들이 가장 진지한 재즈의 옹호자였다는 점은 부인할 길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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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Picasso〉 (DIW/ DIW-879)
휴 레이긴, 라술 시딕(이상 트럼펫), 크레이그 해리스(트롬본), 제임스 스폴딩 (알토 색소폰), 데이비드 머리(테너 색소폰),
데이브 버럴(피아노), 윌버 모리스 (베이스), 타니 타발(드럼)
1992년 9월 녹음

[World Report] 같은 언어, 다른 문화, 하나의 전시

<비엔나 베를린-쉴레에서 그로스까지 두 도시의 미술전>이 베를린(2013.10.24~1.27)과 비엔나(2.14~6.15)에서 순차적으로 열린다. 비엔나와 베를린의 예술을 통한 교류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로 20세기 초 근대미술을 매개로 두 도시가 주고받은 영향과 그 전개의 차이점 등을 보여준다. ‘독일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만 문화적 차이가 확연한 두 도시의 거리와 그곳을 거니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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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벨베데레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비엔나 베를린 두 도시 이야기전> 전시 광경 © Belvedere, Vienna.
위.비엔나 벨베데레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비엔나 베를린 두 도시 이야기전> 전시 광경 © Belvedere, Vienna.

 

같은 언어, 다른 문화, 하나의 전시

박진아  미술사

베를리니쉐 갤러리 시립미술관과 오스트리아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는 사상 최초로 비엔나와 베를린의 근대미술이라는 공통 주제로 협력 기획한 <비엔나 베를린-실레에서 그로스까지 두 도시의 미술전(Vienna Berlin: The Art of Two Cities. From Schiele to Grosz)>을 베를린(2013.10.24~1.27)과 비엔나(2.14~6.15)에서 차례로 개최한다. 일찍이 19세기 말엽부터 국제적 메트로폴리스이자 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라 독자적인 정체성을 구축한 두 도시 사이에서 활발히 전개되던 창조적 교류관계를 새롭게 고찰해보는 전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세기전환기 무렵, 비엔나와 베를린 두 메트로폴리스가 문학, 무대예술, 음악 영역에서 강도 높은 예술적 실험과 상호협력 관계를 이루었던 사실은 근대문화사 연구와 문헌을 통해서 잘 알려져있다. 미술영역에서도 이 두 도시는 긴밀한 창조적 협력관계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오늘날까지 미술사학계에서 사각지대로 남은채 더 많은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 같은 사실에 착안하여 베를리니쉐 갤러리와 벨베데레 갤러리는 이번 전시 <비엔나 베를린-두 도시의 미술전>을 기획해 20세기 초엽 미술과 장식예술 영역에서 이 두 메트로폴리스가 지닌 공통점, 차이점, 창조적 교류활동과 상호영향 성과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공유하는 독어 문화권이지만 두 나라의 국가적 정체성은 매우 다르다. 독일어만을 사용하며 단일민족 의식을 지녔던 독일과는 달리,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는 일찍이 중세부터 서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국의 변함없는 고도(古都)였다. 중유럽권과 발칸을 포함한 동유럽권에서 온 이민자들로 수도 비엔나는 인구구성 면에서나 언어 면에서 다인종·다언어가 들끓던 다문화 멜팅포트였다. 도시 풍경도 널찍하게 뻗은 블르바드 대로와 위풍 당당하고 육중한 낭만주의풍 건축물에서부터 초현대식 신건물들이 어깨를 맞댄 채 공존하는 베를린은 그 첫인상부터 남성적이다.
반면, 바로크풍의 휘황찬란한 장식과 아르누보 곡선 장식의 건축으로 수놓아진 비엔나는 한결 여성적 인상을 준다. 두 도시 시민들의 성향도 매우 달랐다. ‘베를리너는 합리주의 지향적이고 실리주의적이며 흘러간 과거에 대한 감상주의를 질색하고 급속으로 미래를 향해 질주하려는 침착 냉정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 반면, 비엔나인들은 아늑함을 좋아하고 사탕발림 대화와 세련된 사교생활을 중시하는 오연하고 퇴폐적인 사람들’이란 평판을 받았다.
20세기가 개막하자마자 비엔나는 베를린보다 앞서 중유럽권 예술의 허브(hub)로 급부상하며 유겐트스틸과 아르누보, 표현주의를 두루 실험하며 베를린으로 전파했다. 독일 모더니즘의 기수 헤르만 무테지우스(Hermann Muthesius)는 “1908년 ‘비엔나 공방운동(Wiener Werkstätte)’은 과거 비엔나 시각문화 정신을 이어받아 이 시대에 이룩할 수 있는 시각언어와 색채로 활력있고 우아하고 생의 환희를 환기시키되 절제있고 공격적이지 않은 그야말로 비엔나다운 양식을 이룩했다”(<Die Architektur auf den Ausstellungen in Darmstadt, München und Wien>,《   Kunst und Künstler》, 1908년 제6년 12번 호, pp.491~495)고 칭찬하면서 비엔나 공방운동을 독일 모더니즘이 본받아야 할 미적 모델이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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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 라세르스타인 <식당에서> 1927년 © Private Collection, Photo: Studio Walter Bayer.

상반된 성향의 두 도시
하지만 베를린의 미술가들은 문화정책 기관에서 수입을 인가한 근대주의 미학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베를린 분리파는 한결 반항적이고 전투적인 성향을 띠었는데, 특히 막스 페히스타인(Max Pechstein)과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는 과거 정부주도하에 창설된 베를린 분리파에 대항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신베를린 분리파(Neue Berlin Secession)를 창설하고 독일적 근대미술운동을 표방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오이겐 슈피로(Eugen Spiro)나 막스 리버만 (Max Liebermann)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파리 인상주의에 기대어 초기 베를린의 미술정체성을 구축하려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친불(親佛)주의 유대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비엔나에서는 프레데릭 모튼(Frederic Morton)의 소설《  황태자의 마지막 사랑(A Nervous Splendour)》풍의 세기말적 멜랑콜리가 대기를 감싼 가운데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문학, 사상, 미술에 폭넓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ilmt), 에곤 실레(Egon Schiele),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안톤 파이스타우어(Anton Faistauer) 같은 화가들은 모두 정신분석학에서 언급하는 성적억압과 무의식의 관계를 그림으로 탐색했는데, 그래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회화 속에는 공손을 우선하는 구시대적 예의범절과 적대적 정면충돌을 기피하는 비엔나인들의 오랜 집단적 무의식이 억압되었다가 폭발 직전의 순간에 이른 듯 팽팽한 긴장감이 담겨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은 나란히 싸우다 패망한 독일과 오스트리아 두 국가에 실존적 위기였음과 동시에 두 도시를 더 가깝게 연결해준 촉매제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전달된 표현주의 회화에 담긴 인간본능과 무의식이라는 주제는 어쩐지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고방식을 지닌 베를린 화가들에게 그다지 어필하지 못했다. 그 대신 베를린 화단에서는 루드비히 마이드너(Ludwig Meidner), 콘라드 벨릭스뮐러(Konrad Felixmüller), 루돌프 벨링(Rudolf Belling) 같은 신예 베를린 표현주의 화가들을 발굴해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광란의 시기를 목도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움이라는 포장지로 미화하기보다는 무자비하게 전개되던 근대 도시의 변화상과 그 속을 배회하는 도회군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미술은 본질적으로 도시미술(urban art)이라 했다. 만사가 합리적 이득에 입각해 좌지우지되고, 수많은 익명의 도시인이 공생하며, 초고속 개발과 변화가 가능했던 베를린은 분명 오랜 역사와 전통의 무게를 못이겨 정체돼버려 ‘죽어가는 도시’ 비엔나보다 근대적 생리가 잘 갖춰진 도시였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다시 한 번 경제회복을 서두르던 베를린의 모습은 신즉물주의 회화 속에서 신시대 대중교통, 공장, 레스토랑과 카페, 상가와 아케이드로 북적대는 거리와 그 속을 배회하는 도시빈민과 익명의 군중이 얼버무려진 대도시 풍경화로 기록되었다. 그런가 하면 베를린의 신즉물주의 회화 속에는 당시 무대예술의 중심지로서 베를린인들이 자각했던 문화적 우월감이 드러나 있다. 화가들은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큐비즘의 조형언어를 즐겨 차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예컨대 오토 딕스(Otto Dix). 루돌프 슐리히터(Rudolf Schlichter), 게오르크 그로스(George Grosz),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Albert Paris Gütersloh), 안톤 콜릭(Anton Kolig), 로돌프 바커(Rudolf Wacher)는 그 같은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이들의 회화에는 메트로폴리스 베를린 특유의 거침없는 대립적 성향과 전투적 성향이 엿보인다.
급속한 근대화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는 법이던가. 전에 없이 커진 사회문제도 떠안고 있었다. 더 벌어진 빈부의 격차, 구시대와 신시대 간의 갈등, 도시빈민으로 내몰린 수많은 군상과 그들의 고통을 더 첨예하게 경험한 베를린의 화가들은 날 세운 사회비평적 관찰 결과를 사실주의 그림으로 기록했다. 베를린의 도시 변화상을 날카로운 눈으로 포착했던 크리스티안 샤트(Christian Schad)는 실은 오스트리아의 사회비평적 화가 헤르베르트 뵈클(Herbert Boeckl)로부터 크게 영향 받았다.
전통의 고도시 비엔나의 미술계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타고난 성향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비엔나는 이제 미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다. 미의 역영에서 베를린이 비엔나를 제치는 날이 오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단 말인가! 미적 본능이란 손톱만큼도 없이 오직 분석적이고 실리적이어서 한 톨의 상상력도 없는 베를린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노력 끝에 비엔나를 제쳤다. 정신적 노력이 천부적 재능을 능가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비엔나의 여류 미술평론가 베르타 추커칸들(Berta Zuckerkandl)은 1889년 빈분리파(Wiener Secession) 출간 예술평론지《   베르사크룸(Ver Sacrum)》에서 이렇게 한탄하는 글을 썼다. 100년 전과 현재,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한 쌍의 오드커플처럼 매우 다른 기질과 세계관을 지닌 두 도시 비엔나와 베를린은 미술의 생산지이자 창조적 중심지로서 어떻게 달라졌을까?
125년 전, 저물어가던 비엔나의 예술적 우세를 탄식했던 추커칸들이 우려했듯, 또 “오스트리아의 미래는 과거에 있다”고 비엔나 출신의 카바레 휴머리스트 헬무트 콸팅거가 풍자했듯이 비엔나인들의 집단적 무의식은 흘러간 과거의 영광과 황홀이란 향수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조나 레러(Jonah Lehrer)는 창조성의 비결을 논한 책《  이매진(Imagine)》에서 문화와 출신 배경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도시 속 마찰’이 벌어지는 환경 안에서 창조적 생산력이 늘어난다고 했다.
일찍이 20세기 초 비엔나와 베를린에서 ‘문화계에서 성공하려면 메트로폴리스로 나가라’고 했다. 대도시와 창조적 생산력 사이의 연관관계를 암묵적으로 시사한 것이었다. 그래선지 오늘날 수많은 야심찬 젊은 미술인은 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작업하고 있으며, 인터넷 스타트업을 꿈꾸는 인터넷 전문가들 역시 속속 베를린으로 가 창업한다.
현재 유럽연합 내 실질적 정치주도국이자 경제최강국이 된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예술과 정보통신기술을 정책적으로 장려하는 소프트파워 1번지로 재부상했다. 20세기 미완의 과제를 풀면서 ‘영원히 건설 중인 도시’임을 베를린은 재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

오토 루돌프 샤츠  1929년 Belvedere, Wien, © Michael Jursa.

오토 루돌프 샤츠 <풍선 장수> 1929년 Belvedere, Wien,© Michael Jursa.

[New Face 2014] 민진영

유년의 기억, 그리고 집

어둡지 않지만 밝지 않다. 작가 민진영은 집, 공간, 빛, 어릴 적 기억 등에 중심을 두고 작업해왔다. 집하면 마음을 놓고 푹 쉴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을 떠올릴 수 있다. 재료로 사용되는 빛은 어둠과는 대비되는 감각으로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감성적인 소재와 재료를 사용함에도 민진영의 작품은 꽤나 이지적이고 차가운 면이 강하다. 개인의 유년시절 기억에 기반을 둔다는 그녀의 작품에서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순진무구한 동심의 꿈동산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집은 사실 상징적인 소재일 뿐 작가의 본질적 관심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개인의 이야기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최소단위의 공공집단이자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을 다루고 있다. 그들만이 알고 있고, 경험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집에서 작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속에는 안락하고 행복한 추억과 영영 잊고 싶은 과거가 공존한다. 민진영의 집은 단단하고 굳건한 건축이라기보다는 비닐하우스, 텐트 등 입체적이고 가변적인 요소가 강하다. 불안전한 집에 대한 그녀의 어릴 적 기억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가학적으로 폭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다친 살을 부드러운 연고로 치료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연민이라는 감정으로 자신의 상처를 살며시 드러내다가 또다시 억누르기를 반복한다.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는 그녀의 감정은 기나긴 터널을 지나는 어린 민진영을 떠올리게 한다. 강원도 삼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어느 늦은 밤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무거움을 얹고 산길을 건너는 떨리는 발걸음, 멀리 집에서 뻗어 나오는 빛을 갈망하는 눈망울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어둠의 터널이 언젠가 끝나 밝은 빛의 세상이 오기를 열망하는 소녀의 바람이 작품과 작가에게서 나타난다. 작가는 이러한 기억이 ‘치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치부’라는 감정은 타인에게 보여주거나 알리고 싶지 않은 과거이면서 누군가 알아줘서 토닥여주기를 바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설까. 작가는 유독 ‘상처’와 ‘어린아이’에 관심이 많다.이번 6월 12일부터 7월 9일까지 OCI에서 열리는 <민진영, 박경진전>에서 선보이는 신작에서 상처받고 치유가 필요한 어린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불안한 심리의 어린이들이 미술심리치료를 받으며 그린 그림들을 모아 영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작가는 예술작품이 아닌 심리치료의 방편으로 그린 그림에서 예술이 가진 치유의 감정을 공유했다. 작가가 생각하는 가장 큰 감정 중 하나는 ‘연민’이라고 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큰 힘이 있는 단어라고 생각하며 공감 코드의 가장 적절하고 기본이 되는 요소라고 본다”고 말했다. 개인사를 작품의 소재로 삼지만 작가가 말하는 연민은 단순히 자기연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크든 작든 상처를 받고 아물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상처는 연민이라는 관심으로 공감을 만들어내고 치유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인터뷰 말미에 그녀는 “주변에서 작품이 점점 밝아진다는 말을 듣는다”며 미소를 지었다. 곧 태어날 둘째와 함께 앞으로는 길고 긴 마음의 터널을 빠져나와 어린잎 같이 여리고 따뜻한 연민으로 개인과 타인을 밝혀낼 작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임승현 기자

민진영은 1981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고 2012년에는 신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3년 ‘2014 OCI YOUNG CREATIVES’에 선정되었다. 현재 난지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 작업하고 있다.

 혼합 재료 280×45×135cm 2009

<집을 읽다> 혼합 재료 280×45×135cm 2009

연약함, 위대함> 혼합 재료 365×146×80cm 2014

연약함, 위대함> 혼합 재료 365×146×80cm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