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신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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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 캔버스에 유채 122×200cm(각, 총16점) 1998~2002 마로니에미술관에서 열린 <신학철-우리가 만든 거대한 (像)전>(2003.11.21~12.21) 전시광경

엄혹한 시절, 작품으로 시대를 정의했던 작가가 있다. 혹자는 그의 작품을 “당대 민중운동의 공간 속에 가장 우뚝 높이 걸린 제단화”에 비유했다. 신학철은 그 제단화를 걸기 위해 시대가 발한 소용돌이에 기꺼이 투신했고, 그것은 필자의 말대로 “죽임의 현실”로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작업은 시대가 낳은 ‘괴물’ 앞에서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들이대는 사제의 종교적 행위와 같다. 지금도 신학철은 시대에 대해 순수하게 분노하며 작업을 통해 그 감정을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이제 신학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해 시대가 답할 차례다.

신의 소리, 넋이 하는 말

김종길 미술비평

“철학자들은 창조적인 손으로 미래를 붙잡는다. 이때 존재하는 것, 존재했던 것,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는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며 해머가 된다. 그들의 ‘인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입법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중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사이, 신학철의 회화적 현실은 ‘일하는 노동자’ 화가로서 “내가 섬기는 것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의 재인식으로부터 다시 시작되었고1 그것은 구체적 현실에의 응전이었다. 그 응전의 결과로 ‘근대사 연작’을 새겼다. 1981년 <한국근대사-3>을 <방법전>(1981,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 첫 출품했을 때 그는 1970년대 A.G의 개념미술 작가가 아니라 화가로서 현실의 앞뒤를 꿰뚫어보는 사제였다.2 그는 A.G 시기를 회억(回憶)하며 “나 혼자 공중에 떠 있었다”거나, “현실과 관계가 없으니 공허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다가 “현실계로 내려왔다”고 했는데 그 말이 내게는 ‘신내림’으로 읽혔다.3 그것은 ‘개념적 상상계’에서 ‘비판적 현실계’로의 미학적 신내림일 것이다.
그의 비판적 현실주의 미학은 1970년대 후반의 <피난길>(1978)과 같은 작품들에서 시작되어 포토콜라주로 완성된다. 1980년의 <묵시> 연작, <여인> 연작, <상황> 연작 등이 그것인데 그의 포토콜라주 양식은 근대사 연작에 반영되었다. 미학에서 포토콜라주는 환상과 풍자를 표현하는 효과적 장치다. 그렇다면 신학철의 작품에서 환상과 풍자의 미학은 도시 샐러리맨들의 목에 검은 구두를 세워서 콜라주하거나(<묵시-802>), 푸른 술병의 목에 자본주의 상품들을 머리로 붙인 뒤 부릅뜬 눈을 콜라주 하고(<묵시-801>), 성의 상품화 또는 과도한 자기애적 욕망을 광고 이미지로 콜라주한 것들에서 생생하다.
샤먼리얼리즘은 샤먼의 눈으로 꿰뚫는 지금 여기의 현실주의 미학인데, 그의 작품들에서 자본주의를 꿰뚫는 ‘눈’이 발견된다. 동아시아인들에게 현실은 언제나 눈앞의 현실이면서(前景), 동시에 눈 뒤의 초현실을 마주했다(後景). 보는 현실은 물론이요, 보이지 않는 초현실을 맞붙여서 사유해 왔던 것. 그의 미학적 구조에서 현실이 풍자라면 초현실은 환상이다. 나는 그것을 ‘우물구조’로 이해한다. 우물면의 위가 현실이고 우물면 아래의 심연이 환상인 셈. 자, 그렇다면 위아래의 두 세계가 접점을 이룬 우물면은 무엇일까? 나는 바로 그 지점이 신학철의 샤먼 미학이 터지는 ‘생성지’라고 생각한다.
그가 섬기는 미학적 ‘현실’은 눈앞의 비루한 현실에 엉겨 붙은 그림자들이다. 그림자는 우물 밑에 존재했다. 그의 우물은 우물면을 형성하는 ‘시대현실’과 그 현실로 표상되어 올라 온 숱한 과거의 ‘서사들’로 이뤄진다. 그는 역사의 그림자에서 현실의 실체를 역추적 하듯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처음 보았던 우물 속의 실체는 《사진으로 보는 한국 100년, 1876~》4에 실린 흑백의 이미지들이었다. 그 이미지들의 끊어진 서사와 사건을 꿰매는 방식으로 그는 콜라주하고 몽타주했다. 사진이라는 오브제는 그가 굳이 외쳐 말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근현대사의 형상과 그림자가 차고 넘쳤다.
그림자(後景/幻想)의 시간은 직선도 회귀를 반복하는 나선형도 아니다. 하나의 후경에는 몇 개의 직선과 곡선과 나선형이 몽타주로 펼쳐진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듯이 장면들은 불일치하고 연속되지 않으며 사건들만 남아서 무질서를 이룬다. 일관성이나 통일성, 장면 구성의 치밀함, 사건의 기승전결 따위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현실은 일관되지 않고 삐죽거리듯 튕겨나가며 예고 없이 불쑥 튀어 오르는 사건들로 진창이다. 샤먼 미학의 사제로서 신학철은 그런 초현실과 비현실의 그림자를 현실에서 이어붙이는 영적, 미학적 실험을 해왔다. 왜? 바로 그것이 또한 삶으로서의 지극한 현실이요, 초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림을 ‘잡설이나 논설 또는 소설’이라 했고, ‘공격목표를 향한 무기’라고 강조했다.5
공격과 무기의 언어로서 그의 회화는 샤먼의 공수라고 할 수 있다.6 잡설로, 논설로, 소설로 터지는 그의 ‘설(說:회화)’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예술(藝術)의 본래적 ‘뜻/상징’을 상기시킨다. 예술은 기예와 학술의 ‘예’와 ‘술’을 따 붙인 것이다. 예술의 몸은 ‘예(藝)’가 본래 뜻하는 ‘심다, 기예, 궁극’의 생태성?창조성?철학성이 술(術)로 드러나는 실체적 ‘환(幻)’이다. 그의 작품에서 종종, 아니 가로 20미터의 거대한 <갑돌이와 갑순이>(1998~2002)에 등장하는 “군사기갑시설과 공장의 중간쯤 되는 불길하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거대한 기계 구조물들과 그 사이사이에 배치된 민중들의 소용돌이”(성완경)는 ‘술의 환 이미지’로밖에는 해석할 방법이 없다.
20세기 서구 모더니즘의 유입으로 동아시아의 예술은 ‘예’만 강조하고 ‘술’은 괴이하게 생각하거나 미신 따위로 몰아버리는, 그러니까 유물론으로서 ‘작품’이라는 ‘예’의 물성에 사로잡힌 꼴이 되었다. 초현실과 비현실의 샤먼미학은 완전히 저급하고 저속한 것 따위의 문화로 치부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술’이 없이 어떻게 예술작품의 판타지가 가능하고 영적 교감이 가능할 것인가? 신학철의 회화는 술(사건/서사/作)로서 예[品]를 완성하는 놀라운 전환이다. 작품은 예를 앞세워서 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술을 일으켜서 예에 이르는 투쟁이다. 그 사실을 신학철의 회화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술(術)’이야말로 21세기에 다시 호명해야 하는 ‘창조술’의 다른 이름이요, 공자(孔子)가 그토록 싫어했으나 일연스님이 《삼국유사》 들머리에서 꺼내든 ‘괴력난신(怪力亂神)’의 미학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자, 그렇다면 ‘술의 환’이라는 이미지의 실체는 무엇일까? 성완경은 그것을 “기계-야수, 그리고 남근적 에로티시즘”7이라 했고, 김윤수는 “우리의 근대사가 상처투성이요 몸부림치는 거대한 육체로서, ‘마성을 띤 존재’”8라 했으며, 심광현은 “한국 근?현대사의 트라우마”라고 했다. 그런데 작가는 인터뷰에서 “기(氣)의 에너지”, “올라가는 것”, “표적을 향한 화살”과 같은 말로 그것의 실체를 표현했다. 세 평론가의 비평언어는 현상학(성완경, 김윤수)과 심리학(심광현)에 바탕을 둔 해석이다. 실제로 신학철의 회화들에서 불끈 솟은 듯이 보이는 ‘남근적’ 형상과 괴물처럼 보이는 마성의 이미지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트라우마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가 “모든 사물들이 내가 아닌 관념이나 외부적인 것의 영향에 의한 베일”로 보이고 급기야는 “대항하기 힘든 괴물로 둔갑해버렸”을 때, “높은 산정에서 내려와 현재 속에서 나 자신을 던져야겠다”고 다짐했던 그 시대로 돌아가 ‘신학철’이라는 한 작가가 보았던 통시적 ‘현재’를 재사유할 필요가 있다.9 동학에서 식민지, 미군정, 6·25전쟁, 이승만 자유당 독재와 4·19혁명. 5·16군사정변, 그리고 1970년대의 유신독재와 1980년대 신군부 독재를 살아야 했던 현실을. 게다가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세계화로 이어진 디스토피아의 현실이었고 그것은 또-한 늘 죽임의 현실이었다. 신학철의 회화 바탕은 그런 모순의 한국적 현실이 핵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용오름(혹은 용솟음)의 구조로 형상화 되었다.
옛 동아시아 북방 샤먼의 머리에는 사슴뿔 관이 있었다. 진인(眞人)이 된 부처는 사슴벌에서 첫 설법을 터트렸고 반야세계로 가는 용배[般若龍船]를 만들었다. 용의 뿔은 사슴뿔이어서 사슴과 용은 동일한 상징으로 만난다. 동아시아에서 ‘사슴용’의 상징은 치유의 굿판을 벌이는 샤먼이다. 그와 인터뷰하기 위해 작업실을 찾았을 때 그는 광주항쟁을 형상화 한 ‘진혼굿’을 그리고 있었다. 오월의 넋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용솟아 하늘로 솟아오르는 형국이었다. 별(星)-빛(光/明)-사슴(鹿)이 모두 용(龍/미르/은하)의 상징과 만나고 그것이 ‘빛’을 은유한다는 측면에서 신학철의 회화는 새롭게 재사유되어야 한다.●

리얼리즘_가나 (21)

<한국현대사-초혼곡>(왼쪽 두번째) 캔버스에 유채 244×122cm 1994

신 학 철 Shin Hakchul
1943년 태어났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69년부터 1975년까지 <AG전>에 참여했으며,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서울방법전>에 참여했다. 1987년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민미협 주최 <제1회 통일전>에 출품한 <모내기>가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는 혐의로 구속되었고, 2000년 사면복권됐다. 제16회 금호미술상(1999), 제1회 민족미술상(1991), 제1회 미술기자상(1982) 등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1 이 글에서 인용한 신학철의 ‘말’은 별도의 괄호표시가 없는 한 <오늘의 작가연구/신학철>(《계간미술》, 1983년 겨울호)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2 신학철은 당시 작가노트에 “나는 누구를 위하여 일하는 노동자이고 싶다. 즐김, 그 자체를 위해 그리기보다는 내가 섬기는 것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고 적었다.
3 올해 1월 15일 밤, 서울시 동대문구 장안동 자택에서 2시간가량 인터뷰를 진행했다.
4 동아일보사에서 1978년 11월에 발간한 책이다.
5 작가노트에서. “나의 그림은 잡설이나 논설 또는 소설이다. 달콤하거나 씁쓸한 맛과 같은 것을 즐기려는 것도 아니고, 고상한 척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공격목표를 향한 무기가 되었으면 할 뿐이다”가 전문.
6 1월 15일 밤 인터뷰에서 작가는 “표적을 향한 화살”이라는 말을 했고, 심리적 풍경으로서 내면적 리얼리티일 터인데 자신의 회화는 전달하려는 이야기가 명확하다고 강조했다.
7 성완경, <삶의 폭력성을 보는 두 시선>, 경기도미술관 기획전 <사람아, 사람아-신학철과 안창홍의 서민사전>에서 재인용.
8 김윤수, <일상과 역사에 대한 충격적 상상력>(《계간미술》, 1983년 겨울호, 111쪽)
9 나의 새로운 시도는 하나의 회의에서 출발했다. 모든 사물들이 내가 아닌 관념이나 외부적인 것의 영향에 의한 베일을 통하여 보여졌으며 그러한 감각에 의하여 작품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점점 뚜렷해졌고 현실화되었으며 마치 대항하기 힘든 괴물로 둔갑해버렸다.… 이젠 외진 곳에서 내면의 심연 속에서 그리고 높은 산정에서 내려와 현재 속에서 나 자신을 던져야겠다. 진정한 작가는 몸담고 있는 생활터전의 장소적 시간적 공간의 삶에 충실해야 하며, 역사적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장소적 시대적 공감의 언어감각을 통해서 표현(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인간의 삶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고 이것은 영원으로 통하는 순간이다.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삶을 확인하는 것이고 삶을 사는 예술이 되는 것이다.

ARTIST REVIEW 정정엽

여성의 삶을 주제로 일관된 작업을 선보인 작가 정정엽은 1980년대 <두렁> 멤버로 민중의 삶을 성찰했으며 이후 여성주의 미술 운동을 이끌면서 여성의 노동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자기 갱신을 거듭해왔다. 갤러리 스케이프에서 열린 <벌레전>(1.21~2.27)에서는 싹, 나물, 벌레 등 미약하고 징그럽게 보이는 사물에 내재된 특유의 생명력을 포착해 이를 시각화한 신작을 선보였다.

경험하는 그림의 정치

김강 미술가, 미학 연구자

현대미술에서 작품 생산자나 감상자 모두에게 ‘보는 것’ 즉, ‘시각적 경험’은 중요한 문제이다. 전시장은 ‘전시’가 제공하는 시각적 경험의 각축장이다. 전시장은 ‘보이는 것’에 대한 감각의 분배가 일차적으로 예술가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증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떤 것은 가시성의 영역에 남아 우리에게 시각적 경험을 주고, 어떤 것은 보이지 않기에 경험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 존재. 시각적 경험의 층위에서 감각되지 못하는 존재. 망각되거나 삭제되는 존재. 존재들의 분할과 배치 혹은 식별은, 전시라는 시각적 경험의 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러한 사태를 전시라는 작은 메커니즘이 아니라 ‘사회’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현대사회에서 존재하는 것들에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질서는 과연 타당한가. 정정엽은 2016년의 개인전 <벌레>를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 2016년 1월 21일부터 2월 27일까지 삼청동의 스케이프갤러리 전관에는 나방, 싹이 난 쭈글쭈글한 감자, 썩은 과일 등이 28점의 캔버스에 그려져 전시되었다. 정정엽이 2011년 안성의 시골로 작업실 겸 살림집을 옮긴 이래 마주친 것들이다. 사소하고, 쓸모없는 것들. 도대체 이것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방은 나비와 달리 환영받지 못하는 벌레일 뿐이고, 싹이 난 감자는 단 한 끼 식사에도 도움이 안 되기에 버려지며, 생채기가 난 과일은 상품으로 팔 수 없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해 현대자본주의에서 기어이 폐기되는 존재들. 정정엽은 이 폐기되는 존재들, 즉 우리의 시각성의 영역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다시 ‘시각의 영역’으로 불러들였다. 줄리앙 크리스테바는 자신의 저서 《공포의 권력(부제:아브젝시옹(abjection)에 관한 에세이)》(1980)에서 더럽다고 여겨지는 것들, 늘 배제되고 추방되는 존재들, 체제 또는 관념이 밖으로 밀어내려는 존재들을 ‘아브젝트(abject)’로 명명한 바 있다. 정정엽에 의해 포착된 아브젝트들은 대형 화면 위에 여왕과도 같은 자태로 징그러운 속살을 드러낸 나방으로, 세련된 도시의 건축물 실내외를 부유하는 싹 난 감자들로, 혹은 다 썩어빠진 과일로 우리의 시각을 붙잡는다. 자본주의적 식별의 질서에서 추방되었기에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보이는 존재’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정엽의 아브젝트가 단순히 현 질서의 대립물로 설정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브젝트를 실재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가시성의 영역으로 등장시키는 정치를 펼치고 있다. 정정엽에 의해 선택된 아브젝트들이 그림을 통해 시각화되면서, 기존의 질서가 중단되고, 랑시에르가 언급한 ‘정치’가 발생한다.
1980년대 두렁과 함께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정정엽은 ‘노동’, ‘여성’, ‘살림’, ‘일상’ 등을 우리의 시각 안으로 불러 모았다. 1980년대 ‘두렁’ 활동을 하면서 ‘노동’을 화두로 삼아 그림을 그린 것은 ‘노동’이 그 시대의 ‘아브젝트’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시대의 아브젝트였던 노동자들은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1907)에서 언급한 생명의 도약을 이루는 근원적인 힘인 ‘엘랑 비탈(elan vital)’로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다. 억압받던 존재들이 스스로 자신의 근원적인 힘을 분출시키며 사회혁명을 도모하던 시절, 정정엽은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그 한가운데서 생명감의 봉기를 그림으로 보여주었다. 캔버스에 그려지던 그림들은 노동 현장에서 대형 걸개그림으로 변환되고, 개인 이름은 ‘두렁’이라는 집단의 이름 속에 익명이 되었다. 아카데믹한 그림은 만화로, 판화로, 포스터로 변주되고 노동자 교육의 교재가 되기도 하였다. 기존에 예술이라고 믿었던 것의 기준들은 의심되고, 예술일 수 없는 것들이 예술의 무대로, 가시성의 영역으로 등장했다. 사회가 들끓기 시작했고, 예술도 들끓기 시작했다. 그 들끓음의 한가운데서 정정엽은 ‘두렁’과 함께 그것을 주도했다. 당시의 들끓음이야말로 시대의 아브젝트들이 제 몸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순간, 비등점을 넘어섰다.
1980년대의 아브젝트는 현재에도 여전히 아브젝트로 존재한다. 노동자는 더욱 미시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아브젝트가 시각의 층위로 올라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때 이미 세계는 그전과는 다른 감각을 분배한다. 정치의 장으로 재구성된다. 1987년 두렁이 산개(散開)하고 시대의 비등점은 허울 좋은 ‘민주화’에 의해 가라앉았지만, 정정엽은 또 다른 시대의 현장을 정치의 장으로 맞이한다.
1995년 이십일세기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에서 정정엽은 여성의 ‘노동’에 주목한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 애써 외면하고 싶은 아브젝트가 여성이자 여성의 노동이었기 때문일까. 일상에서 ‘여성의 노동’은 언제나 비가시적이다. 감추어진 노동, 배제된 노동, 안 보이는 노동, 무시하고픈 노동, 그 모든 노동이라는 단어를 수식하는 부정적 언어를 정정엽은 ‘살림의 노동’으로 다시 호출한다. <식사준비>와 <밥상>은 가족의 생명을 살리고 <어머니의 봄>은 콩, 팥, 나물 등 무수한 생명을 아우른다. ‘두렁’과 더불어 1990년대 초부터 여성미술연원회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정정엽은 여성인 자기 자신의 삶의 현장을 바로 자신의 작품과 정치의 현장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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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1>(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62×130cm 2016

식사준비l, 1995, oil on canvas, 162 x 372 cm

< 식사준비l > 캔버스에 유채 162×372cm 1995

변방과 중심 사이에서 춤추는 예술가
1998년부터는 ‘팥’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팥이 우리가 보는 그 모양을 갖추는 데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수한 노동이 작용했다. 정정엽은 그 노동을 캔버스 위에 팥알 하나하나를 그려가는 자신의 노동으로 가시화했다. 2000년 그것들은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봇물전>이 되었다. 2006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지워지다전>에서는 이 사회가 지우고 있는 ‘존재’들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오히려 멸종되는 존재. 노동, 여성에서 좀 더 시야를 넓혀 생명을 가진 존재 전반을 검토하면서 이 시대의 아브젝트를 발견한다. 정정엽은 ‘지구의 촉감’을 느끼며 ‘멸종’되어가는 무수한 생명체에 주목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많은 것을 생산하는 것 같지만, 많은 존재를 삭제해 나간다. 자본주의의 속도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제 쓸모도 증명하지 못하는 존재들. 전시장 벽면 전체를 가득 채운 다수의 드로잉에는 북극곰도, 도롱뇽도, 히잡을 쓴 여인도, 작가 자신도 얼굴이 지워진 채 등장한다.
2000년 종로점거 ‘아방궁(아름답고 방자한 자궁들)’ 프로젝트는 여성주의예술그룹 ‘입김’이 주최한 축제였다. 정정엽과 ‘입김’의 예술가들이 보여주려 한 것은 ‘여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이다. 한국적 가부장의 질서에서 배치되고, 분할되고, 이미지화된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 한국적 가부장제의 상징적 장소인 ‘종묘’에서 진행된 이 축제는 이씨 종친회 및 유림과 정면충돌했다. 존재 그 자체로서의 여성을 가시성의 영역으로 옮겨오자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문화들은 폭력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분배의 권한을 행사하던 가부장 질서가 감추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여성이 아니라 자신들의 폭력이었음을 그 스스로 드러나게 한 사건이었다. 폭력적 대응은 재판으로 이어져 종국엔 ‘입김’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보여서는 안되는 것들이 보이자마자 ‘보여줌’의 경계선을 결정했던 것들은 일제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의 사건은 시각적 경험을 넘어서 우리의 감각 전체를 건드리며 정치의 경험을 가능케 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정정엽은 1980년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줄곧 느끼고 성찰한 시대의 아브젝트들을 시각화해왔다. 20대의 정정엽은 대변자이기보다는 노동자이기를 원했다. 공장에서 전자기기 부품을 조립하며 사회 변혁과 예술의 관계를 고민하는 노동자-예술가로 살았다. 또한 여성미술위원회, 입김 등 여성주의적가들과의 소그룹 활동에서는 여성이자 예술가인 자신의 문제들을 시각화했다. 한국적 가부장질서와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 ‘모성’이라는 신화 속에서 ‘거룩하게’만 존재하는 모순적 타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존재 그 자체’를 가려버리는 이미지에 갇힌 여성을 현실 그대로, 존재 그대로 이 사회에 드러내길 바랐다.
타자를 대변하거나 재현하기보다는, 스스로 직접 경험한 현실과 자신의 삶의 현장을 시각화하는 정정엽은 매 시기 시대의 주류적 질서와 부딪히며 긴장을 발생시켰다. 노동현장 예술가, 페미니스트 예술가의 대표 작가로 지칭되던 정정엽은 2006년 아르코미술관에서의 초대전 <지워지다>를 시작으로 한국 제도 미술권의 영역으로 스며들었다. 갤러리에서도 초대전을 활발히 개최한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출한 입지전적인 예술가인가. 이런 의문은 오히려 정정엽이 의도한 질문일 것이다. 정정엽에게 변방과 중심 사이에는 어떤 슬러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를 가르는 슬러시가 어떤 질서를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그것을 횡단, 교란하는 방법론을 선택한다. 정정엽은 그 슬러시 위에서 춤을 춘다.
정정엽은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보여줌으로써 전시장을 새로운 정치의 무대로 만들었다. 2016년 ‘전시장’에서 ‘벌레’와 춤을 추는 정정엽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도 조금은 들썩거렸다. 우리는 정정엽을 통해 갤러리라는 시각의 장에서 정치를 경험한다. 정정엽의 작업이 ‘경험하는 그림’인 이유이다. ●

정 정 엽 Jung Jungyeob
1962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95년 이십일세기화랑에서 열린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전>을 시작으로 12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제주, 후쿠오카, 시카고 등에서 열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1980년대 ‘두렁’, ‘갯꽃’, ‘여성미술연구회’의 회원으로 현장미술 운동과 여성주의 미술 운동을 이끌었으며, 2000년에는 여성주의 그룹 ‘입김’의 멤버로 <아방궁 종묘점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EXHIBITION TOPIC Reinstatement of Realism

예술에서 리얼리즘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진정한 면모를 담아내기 위해 현실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적 상황을 드러낸 작가 권순철, 고영훈, 신학철, 황재형, 민정기, 이종구, 임옥상, 오치균이 참여한 전시가 열려 눈길을 끌고 있다.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Ⅱ- 리얼리즘의 복권전>(1.28~2.28)이 그것이다. 2016년 지금 우리에게 이 전시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주목해보자.

리얼리즘의 복권? 시장의 호출과 시대 요구의 틈새

김미정 미술사

가나아트가 기획한 <리얼리즘의 복권전>이 2016년 벽두에 미술계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이라는 부제를 단 이 대규모 전람회는 철저하게 작가 중심으로 기획된 단체전으로 1980년대 한국 리얼리즘을 복권시키기 위해 권순철, 고영훈, 신학철, 황재형, 민정기, 이종구, 임옥상, 오치균, 8명의 미술가를 초대해 대형 회화와 부조, 조각 등 100여 작품을 선보였다.
가나인사아트센터 1층부터 5층까지 거의 전관에 펼쳐진 100호 이상의 대형 캔버스는 저마다 비상한 작가정신과 능숙한 완결성으로, 이전의 어떤 리얼리즘 미술전시보다 회화적 광채를 내고 있었다. 신학철의 <한국근대사> 연작은 파편화된 일상을 가볍게 사는 이들에게 거대 서사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광부화가 황재형이 삶의 거처로 삼았던 광산촌 풍경은 근대화의 이면으로 추방된 것이 뿜어내는 처연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보여준다. 임옥상의 초현실적 풍경화는 1980년대 청년작가의 예민했던 시대감각을 보여주는가 하면, 이종구가 곡물 포대에 그린 기념비적인 농부의 얼굴은 새삼 묵직한 삶의 무게로 육박해 다가온다.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동시대적인 울림이었다. 또한 권순철이 거친 질감으로 해체해대는 인체와 개발시대에 유린당한 땅을 인문 지리적으로 복원하려는 민정기의 고지도 풍경화는 1980년대 현실주의 미술 운동의 지평이 넓고 깊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육순을 넘겨 완연한 거장의 풍모를 보이는 화가들이 농익은 물감과 붓, 종이, 목탄으로 노련하게 구현한 대작들의 뛰어난 회화적 완성도는 관람자의 눈과 마음의 갈증을 풀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리얼리즘의 복권>과 같은 대규모 리얼리즘 전시가 2016년 벽두를 장식한 것이 단색화 이후 또 다른 성장 동력을 찾으려는 한국 미술시장의 요구에서 기획된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2015년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그을만한 의미 있는 해였다. 뉴욕 블룸 앤 포, 파리 페로탱 갤러리 기획전과 뉴욕 크리스티 옥션의 내부 세일전시 그리고 지난 11월 홍콩에서 있었던 ‘서울’과 ‘K’ 양대 옥션의 성공적인 판매에 이르기까지, 1970~1980년대 한국 단색조 추상화에 대한 국제적 관심에 힘입어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윤형근의 그림 값은 크게 올랐다. 이쯤 되자 단색화 이후 새로운 트렌드의 한국미술이 필요하다는 것은 시장의 문제를 넘어 한국 미술계의 역량을 가늠하는 문제가 되었다. 현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으로서의 미술 정책 역시 이러한 고민에 당위성을 실어주었다. 한국 미술시장이 이제 다음 주자로 민중미술을 무대에 올릴 거라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전>으로 미술사적 자리매김을 일찍 해버린 이후, 본격적인 1980년대 현실주의 미술전이 거의 없었다는 것도 시의 적절했다. 1980년대 현장미술로서의 민중미술을 개인적으로 수집하고 후원했던 가나가 다음 목표를 리얼리즘 미술로 잡은 것은, 모노크롬 추상화를 그리는 젊은 미술가들을 끼워 넣어 단색화 특수를 연장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정직한 방향이었다.
그렇지만 1980년대 리얼리즘 미술의 호출이 시대의 요구가 아닌 시장의 필요였다는 사실은 양날의 검처럼 위험해 보인다. 예상된 위험은 이번 전시의 제목과 선정 작가의 구성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전시를 공동 기획한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전시의 의도가 민중미술이 아닌 포괄적 리얼리즘 미술의 재조명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시에 초대된 작품 하나 하나가 수준 높은 회화작품임을 거듭 언급하였다. 이는 1980년대 현실주의 미술운동은 예술이기보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이며, 그 수준이 형편없다는 모더니즘 미술진영의 비판에 대한 선방어 전략처럼 들린다. 단색 추상화 이후 새로운 주력 상품이 필요하다는 미술시장의 고려가 기획자로 하여금 ‘민중’이라는 불온한(?) 용어를 스스로 지우고 맥락보다는 회화의 물질성에 이목을 집결시키는 방식을 선택하게 한 것이다. “민중” 이라는 논쟁점을 은폐하고 리얼리즘이라는 헐거운 그물로 시대정신을 빌미 삼아 새로운 미술 패키지를 꾸리려는 것인데, 이는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달리 한국 고유의 미학을 담고 있어서 굳이 “단색화(Dansaekwha)”라는 고유 표기법을 고집했던 것과도 사뭇 다른 전략이다.
“민중”이라는 용어는 1960년 4·19혁명 이후에 다시 점화된 역사 변혁의 의지를 담아, 미술가들로 하여금 계급과 노동같은 사회 갈등의 진원에 에두르지 바로 않고 진입하게 했던 핵심어였다. 현실주의 미술가들은 ‘민중’ 이라는 언어를 거울 삼아 역사적 주체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봤으며, 자본주의로부터 뒷걸음쳐 결국에는 다가올 소비사회를 잠시나마 통찰하고자 했다. 당시에 “민중”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살벌함은 냉전 콤플렉스라는 전후 한국사회의 집단 무의식의 금기를 건드렸다. 당대에 현실운동의 일원이었던 미술비평가 성완경은 비평가 엄혁과 함께 1988년 뉴욕 아티스트 스페이스에 <민중미술전>을 올려 당대 한국 정치미술을 소개한 바가 있었다. 이후 독일 프랑크푸르트 쿤스트 할레에서 열린 <시각의 전쟁전>과 1993년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개최된 <태평양을 건너서전>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정치적 논쟁과 미술계가 진영으로 나뉘어 격돌했던 비평적 파열은 민중미술의 프리즘을 통해 소개되었다.

리얼리즘_가나 (1)

민정기 <토교 우리촌>(왼쪽) 캔버스에 유채 245×467.5cm 2013

리얼리즘_가나 (13)

임옥상 < 보리밭 Ⅱ >(가운데) 캔버스에 유채 137×296cm 1984

현실 비판을 담보한 리얼리즘
리얼리즘은 현실에 닻을 내리고 사회 비판적 의지를 갖춰야 생명을 갖는, 우직한 미술 사조이다. 그러니 적어도 리얼리즘 미술 기획이라면, 개인적 완결성의 미학을 추구하는 단색화의 기획과는 다른 형식이었어야 했다. 예민한 정치 비판과 사회 논평, 문화 운동을 이끌었던 1980년대 민중미술의 저항성을 건드리지 않고, “시대의 눈과 정신”의 복권을 말하는 것은 사실 낯간지러운 일이다. 작가 선정도 그렇다. 1970년대 사물과 언어의 문제에 천착하며 단색화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다른 행로를 모색했던 고영훈을 시각성을 강화하기 위해 단체전의 곁다리로 초대하는 것은 전시의 진정성뿐만 아니라 독자적 자기 세계를 가진 고영훈 작가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또한 그간 대중이 좋아하는 풍경화로 경매에서 쉼 없이 거래된 오치균의 풍경화가 새삼스럽게 리얼리즘의 복권이라는 이름으로 포함된 것도 수긍하기 힘든 부분이다. 무엇보다 이 전시가 명품전을 추구하느라 1980~1990년대 민주화 과정과 동반하며 정치적 투쟁의 날을 세웠던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미술사적 맥락을 스스로 단절해버린 것은 아쉬운 일이다.
과거가 더 좋았다는 식의 추억을 더듬을 생각은 없지만, 미술시장이 미분화 상태였던 초기 한국 현대미술의 생태계에서 비평과 문화담론은 관제미술에 대항하는 전복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장이 주도하는 세계적 상황에서 최근의 한국 미술계는 가격 상승과 진위 논란을 둘러싼 가십거리나 만들어내는 진흙탕처럼 취급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몇몇 단색화 미술가의 성공을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화로 자위하는 사이, 윤리성의 부재와 여전히 열악한 시스템으로 내적 추진력이 꺼지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의 문제점을 이 전시회에 딴죽 거는 식으로 거론하는 것도 미술사가로서 무책임한 일이다. 돌이켜 보자면 1950년대부터 화상과 시장은 비평과 학술에 앞서 한국 현대미술을 구성하고 ‘기획’해온 미술계의 주축이었다. 시장에 의해 박수근의 미술이 평가되고, 이중섭이 국민화가가 되었으며, 1970년대 근대미술품을 수집, 거래하며 20세기 한국미술사의 첫 길을 놓은 것도 살펴보면 화상들이었다. 그들은 한국 모노크롬 추상화 판매에 성공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 태동기부터 오매불망했던 세계 미술로의 진입을 막 이루어낸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사실 상업화랑의 전시가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는 비판은 순진할뿐더러 형용모순이다. “상인은 자신의 영리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사회의 영리도 효과적으로 높인다”고 했던 고전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말대로라면 “화상은 그림을 팔아 미술의 공적 가치를 높이는 이다. 그 사회적 영리성이란 결국, 자본의 선순환으로 미술계에 전위 아방가르드 미술의 토대를 깔아주는 일일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 시장에서 한국미술의 지분을 확보하는 것은 단순히 원로작가들에게 지난 삶에 대한 보상의 배당금을 나누어 주는 일이 아니라, 미래 한국 미술계의 생산력을 확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색화에 이어 1980년대 한국 리얼리즘 미술을 중국의 “정치적 팝(Political Pop)” 미술처럼 분명한 세계사적 위상을 가진 현실 비판적 미술로 소개하기 위해서는 그저 ‘명작’의 후광을 씌우기보다는, 이 날선 미술운동을 둘러싼 현대사의 맥락도 복권해야 한다. 어느 때보다도 혁명적인 미술이 필요한 작금에 ‘민중미술’이 지나간 시절을 회고하는 추억의 사조로 다루어져서도 안 될 것이다. 뭐라고 둘러대도 자본에 무방비로 투항한 현실 참여미술은 볼썽사납기 때문이다. 그건 “시대의 눈과 정신의 복권”은 고사하고, 민중 미술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EXHIBITION FOCUS SeMa Blue 2016 Seoul Babel

청년, 중진, 원로로 구분되는 SeMA 삼색전 시리즈 중 하나로 동시대 한국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청년 작가들의 움직임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가 열렸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서울 바벨전>(1.19~4.5)이 그것.
서울시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생성되고 있는 공동체 형태로 예술 창작활동을 선보이는 예술 플랫폼 총 17팀, 70여 명의 기획자 및 작가들이 참여했다. 이들 대부분은 일시적 임차 공간을 공유하거나 혹은 온라인, SNS상의 비물질적인 공간을 넘나들며 한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등 비정형화된 활동을 선보인다. 800/40, 아카이브 봄, 지금여기, 청량엑스포, 합정지구 등 참여 플랫폼은 전시 안에 전시를 구성하며 저마다의 개성을 연출한다. 필자는 최근 청년 작가들의 움직임을 예술의 사회화 과정에서 주목되는 흐름으로 보고 심층적 해석을 시도한다.

미술관에 입성한 신생공간의 딜레마

신현진 미술비평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서울 바벨전>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신세대 미술가의 예술실천을 한자리에 모아 놓음으로써 2013년부터 달구어진 ‘청년작가,’ ‘세대론,’ ‘신생공간’ 등의 이슈를 다시 한 번 무대의 중앙에 세우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바벨’이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서울 바벨>이 그렇다고 신세대의 예술실천을 시원하게 정의해주는 전시는 아니었는데 필자는 이 지면을 빌려 신세대 예술인의 실천경향이 혹시 예술의 사회화 연장선에서 해석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자 한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신세대를 다룬 이전의 글들에서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고 프레임의 충돌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1990년대 대안공간 세대를 “이젠 우리가 알아서 뜰거야!”로, 현재의 젊은 세대를 “이젠 우리끼리 터잡고 놀거야”로 대조하면서 신세대가 성찰과 저항이라는 비평적 시각을 잃었음을 한탄한 글이다.1
1990년 말에서 2000년대의 청년에 의해 주도된 ‘대안공간’의 활약을 지켜보았고 최근 청년 중 상당수가 전시공간이나 일시적 프로젝트를 마련하고 있음을 알게 된 기성 예술계가 이들을 ‘신생공간’이라 부르며 어떤 대안을 제시할지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너희의 정체를 밝히라’는 요구에 대한 신세대 당사자들의 대응 또한 의미심장한데 이들은 첫째, 신생공간이란 명칭은 누구를 계승하는 사고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둘째, ‘청년’이라는 용어가 조만간 중년이 될 자신들의 개별성을 담보하지 못함을 지적했다.2 덧붙여 이러한 요구가 기성세대의 욕망이라며 이렇다 할 미학 없음이 왜 보편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세대에게 부과되는 과제여야 하는가를3 되묻기도 했다. 옳은 말이다. 신세대는 대안공간처럼 공간을 구심점으로 활동하지도 않으며 SNS를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질 뿐이다.4
더구나 “개별적인 예술실천을 함께 할 뿐, 균질성을 경계하면서 공동체를 작동시키는 통일된 포지션을 갖지 않는다”5는 이번 전시에서 더해진 ‘작동하지 않는’ 공동체라는, 신세대를 정의하는 표현은 ‘무위’6와 같은 유럽 후기구조주의 이론과 공명하고 있다. 이를 감안했을 때 ‘너희의 목표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그저 미술사를 통해 미술운동의 흥망성쇠를 꾸준히 접해왔고, ‘대안’을 찾아 어딘가로 발전해가야 한다는 변증법의 강박에 시달리는, 그리고 상업화된 예술계에 실험미술의 활력을 수혈 받고 싶은 욕망을 가진 기성세대의 구조주의적 사고 프레임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입장을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고체계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결론도 내려질 법하다.
한편, 신세대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할 때 이들은 자신의 미술을 보여주는 대신에(혹은 미학이 아직 정리될 단계에 있지 않거나일 텐데) 왜 존재하는 방식을 표현하는 단어인 ‘작동하지 않는’ 일시적 연대, ‘인스턴스(instance),’ 혹은 ‘노드(node)’를 사용할까?7 필자는 현대판 신구 논쟁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발전 도상에서 ‘사회화’를 겪는 예술을 반영한다고 해석한다. 달리 말하자면 예술은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현실세계로 내려오는 사회화 과정을 겪고 있으며 초월적 관념이 더 이상 예술계가 행사할 규범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술은 상대적 가치체계라는 맥락 안에 놓이게 되었다. 정치 행동을 유발하는 상대주의라는 현실에서 예술인은 스스로의 예술실천을 사회와 조율하는 정치, 제도적 과제도 함께 떠안게 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미학의 내용을 규정하는 일만큼이나 혹은 그보다도 중요한 현실적 사안이 된 것은 아닐까?
1960년대 미국의 대안공간이 포스트모던 예술을 가장 먼저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안공간을 포스트모던 미학과 동일시하지 않고 ‘공간’이라는 제도적 용어로 아우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대안공간 이래 사회 안에서 예술의 위치를 조율하는 활동은 미학만큼의 비중을 가지고 평행하게 이뤄져왔다. 사회화의 내용으로는 당연히 자본주의와의 협상이 주를 이룬다. 1960년대 개념미술은 행정의 미학으로 표현되고8 1960년대 미국 대안공간은 국가가 지원금 수혜의 기본조건으로 전제한 대로 운영위원회-디렉터-큐레이터로 구성된 위계질서를 갖춘 관료화를 택하면서 기업 운영 논리를 수용하였다. 1990년대 유럽이나 한국의 대안공간은 자본주의의 승자 독식 개념을 내면화한 자기 프로모션 개념을 확산하였으며 대표적인 예가 신진작가 스타 만들기이다. 그리고 2010년대 신세대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청년관 건립(2013)으로 경쟁우위라는 정치적 지원을 요구하고, 작가피(2014)로 예술이 노동임을, 예술 활동의 파생 산물을 굳-즈(2015) 라고 명명하면서 예술의 경계가 흐려짐을 알려주었다. 이들이 철학적으로는 각각 다른 입장을 표방하는 탓에 누가 누구를 계승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예술과 정치, 경제 논리를 점점 더 근접하게 하는 예술의 사회화 측면에서 보면 동일한 발전 경로에 놓인다.

서울바벨_서울시립 (7)

전솔비, 김양우, 오유진, 이지원, 김정화가 운영자로 활동 중인 ‘800/40’은 전시, 공연,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발표하는 플랫폼으로 을지로 대림상가에 위치해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청년 세대의 불안을 반영한 < 27 Club전 >을 마련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예술실천
대안공간이나 신생공간이 풀뿌리 예술기관이라는 규모에 근거하여 비교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자본주의 논리를 수용하는 활동 측면에서는 미술관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레베카 고든-네스빗은 파리 근대미술관의 <삶/생활>(1996), 광주비엔날레의 <멈춤>(2002), 스웨덴 루지움의 <발틱 바벨>(2002)을 비교한 논문을 발표하였다.9 이들 전시는 수도권의 거대 규모 미술관이 대안공간들을 대거 초청하여 당시의 역동적인 새로운 기운들을 해석하고 정리해 보여주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한 맥락에서 <서울 바벨>은 영국 테이트 모던이 기획한 (2010)와 함께 고든-네스빗의 논지와 많은 유사 지점을 보여준다. 고든-네스빗은 논문에서 대규모 미술관의 행동 양식이 맥도날드와 같은 다국적 기업이 전 세계 지역의 상권을 확보할 때 지역의 자생적 산물을 메뉴에 활용하면서 맥도날드의 서비스가 식당문화 기준으로 자리 잡도록 유도하고 종국에는 지역의 소규모 식당을 대체하는 활동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미술관은 지역의 자생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실천을 미술관 프로그램으로 활용하고 혼란처럼 보이는 예술실천을 거대 기관들이 정의한 큰 그림으로 제시한다. 이로써 미술관은 예술실천을 통제하고 재분배하는 권위를 행사할 기회를 얻는다. 따라서 서울시립미술관이 신세대를 대체할 생각도 없겠지만 “기획자들 및 작가들의 독립적이고 유기적인 행보를 지원하려는”10 본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신세대의 실천을 활용한 서울시립미술관에 동시대 예술실천을 정의하는 권위와 예술계 안에서의 헤게모니를 자본주의 방식으로 부여한다.
사회화의 과정에서 대안공간의 역사가 자본주의에 많은 것을 내어주는 편이었다면 신세대의 활동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개별적 예술인의 실천이 좀 더 민주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도모하는 정치에 가깝다. 작가 수의 과부하로 기존 예술계 기관들이 이들을 소화할 수 없게 되자 소통의 기회를 임의로 제공한다는 인스턴스와 예술계가 중앙에서 이미지를 프로세스하고 재분배하기 이전의 단계에서 관객과 예술계에 이미지로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한다는 노드의 개념은 예술계 바깥의 예술인들에게 대외적 예술실천의 기회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또한 “제도의 승인 이전에 동료의 승인에 만족”11 한다는 그들의 선언은 예술이 예술계의 권위 바깥인 사회로 확장되어 주관적인 예술실천이 유의미함을 알려주는 지시자이다.
이들의 활동은 예술계 바깥의 예술에 호환성을 부여함으로써 좀 더 민주적인 예술 환경을 만든다. 다만 이들이 동료의 승인에 만족하는 행위는 비전공 미술인 동호회가 “터잡고 노는” 행위와의 구별도 모호하게 만든다. 이들의 실천이 예술의 민주화라는 사회적 기능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인스턴스’와 ‘노드’로 좁혀지는 신세대의 활동은 신세대가 생각만큼 래디컬하지 않음을 알게 해주는데 제도의 승인 ‘이전’이라는 표현은 예술계에 간택되기 이전의 시간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예술계로의 입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술적 체험이라는 뜻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세대가 “터잡고 논다”는 야유에도 일리가 있는 셈이다.
경계가 모호해진 현재 예술의 사회화된 여건을 인지한 신세대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지만 이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듯하다. <서울 바벨>류의 전시가 예술계로부터의 승인을 행사함으로써 참가자들이 예술계에 입성하는 공생의 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들이 예술계를 의식하는 예술인이고 예술계의 법칙에 적응하려 한다면 동호회 활동과의 차이(우위)도 증명하는, 즉 미학을 가시화하는 책임도 스스로에게 있음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예술의 민주화라는 사회적 기능을 인식한다면 <서울 바벨>류의 전시는 기성 미술관들에 의해 형식주의로 정리되기 때문에 신세대의 예술실천은 예술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 조율하는 기능으로부터 멀어질 공산이 크다는 점을 환기하고 싶다.●

위 전솔비, 김양우, 오유진, 이지원, 김정화가 운영자로 활동 중인 ‘800/40’은 전시, 공연,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발표하는 플랫폼으로 을지로 대림상가에 위치해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청년 세대의 불안을 반영한 을 마련했다.
아래 ‘정신과 시간의 방’은 오은, 정재용, 정홍식, 최중호로 구성된 ‘그룹789’가 서울 성산동의 임시 공간을 거점으로 삼아 작가 되기 훈련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한시적 프로젝트다. 2주에 한 번씩 자율적으로 작업을 교체한다는 그룹 내부의 규칙을 이번 전시에도 적용했다.

서울바벨_서울시립 (9)

‘청량엑스포’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가동하는 한시적 프로젝트 공간으로 퀴어문화를 조명하는 전시와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최진용 <깨끗한 거리 캠페인>(오른쪽) 캠페인 운영, 홍보 부스, 웹사이트, 책자 가변크기 2015

1 노형석, <이젠 우리가 알아서 뜰거야!>, 《월간미술》(2015, 08), p.71.
2 현시원, <국립현대미술관을 박차고 나온 젊은 예술가들>, 《프레시안》(2015.07.31).
3 윤율리, <하나의 유령이 미술을 배회하고 있다>, 반지하 블로그.http://vanziha.tumblr.com/tagged/text 2월 14일 접근)
4 강정석, <서울의 인스턴스 던전들>, 반지하 블로그 (http://vanziha.tumblr.com/tagged/text)
5 하마, <이미지 공유지로서의 신생공간 ‘노드’ 혹은 ‘대안공간 2.0’>, 하마 블로그 (http://artcomics.tistory.)
6 신은진, <서울 바벨전> 도록, p.13. 예술가 모임 ‘활활’을 설명한 부분.
여기에 낭시를 적용할 수 있는데 <서울 바벨>의 기획자 신은진은 부제로 작동하지 않는 공동체를 고려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7 강정석, 하마, 같은 글.
8 Benjamin Buchloh, ,《October》, Vol. 55 (Winter, 1990), pp.105~143.
9 Gordon-Nesbitt, Rebecca. , 《Life/Live: The Artistic Scene in the UK in 1996》, exhibition catalogue
(Paris: The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1996).
(출처: https://shiftyparadigms.wordpress.com/non-fiction/surprise-me/2016년 2월 18일 접근)와 Gordon-Nesbitt, Rebecca. , 《Verksted #1》, Jonas Ekeberg, Ed.
(Oslo: Office for Contemporary Art, 2003), pp.59~87 참조.
10 <서울 바벨>(2016) 보도자료.
11 신혜영, <지속가능한 구조를 위한 작은 움직임>, 《굳-즈 2015》 행사도록 (2015), p.93.

WORLD REPORT | WIEN German Art since 1960 Selected Works from the Essl Collection

외르크 임멘도르프  캔버스에 유채 230×170cm 1992 ⓒ Sammlung Essl, Klosterneuburg / Wien, Foto: Mischa Nawrata, Wien

위 외르크 임멘도르프 <기다리는 꿀벌 II(Wartebiene II) > 캔버스에 유채 230×170cm 1992 ⓒ Sammlung Essl, Klosterneuburg / Wien, Foto: Mischa Nawrata, Wien 아래 <1960년 이후 독일미술전> 전시광경 2015 ⓒ Photo: Peter Kuffner / Essl Collection Klosterneuburg / Vienna.

오스트리아의 에슬 미술관(Essl Museum)에서는 이 미술관이 소장한 독일 작품 중 독일 현대미술가 21명의 대표작 80여 점을 선별하여 <1960년대 이후 독일의 미술(Deutsche Kunst nach 1960)전>을 열었다. 2015년 6월 24일부터 11월 15일까지 계속된 대규모 특별전을 통해 제시된 20세기 후반기 독일의 현대미술이란 어떤 미술을 뜻하며 독일미술사에서 어떤 궤도를 구축했을까? 에슬 미술관이 해석하고 제시한 전후 독일 현대미술의 로드맵을 살펴보도록 하자.

독일 현대미술을 정의하다

박진아 미술사

에슬 미술관이 기획한 <1960년대 이후 독일의 미술(Deutsche Kunst nach 1960)전>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의 독일 현대미술은 정치적 역사와 그에 대한 자성의식의 표현으로 요약된다. 에슬 컬렉션의 본 주인인 카를하인츠와 아그네스 에슬 부부가 독일 회화와 조각의 남다른 애호가여서 이 분야 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과연 거창하고 포괄적인 제목만큼 내용 역시 알찬 전시로 미술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항간에는 있었다. 또 이 전시가 개막하자마자 오스트리아의 일간지 《데어 슈탄다르트(Der Standard)》는 에슬 미술관이 이번 전시 카탈로그를 전 세계 유명 미술관에 우송해 홍보했다고 보도하고 전시용 미술작품 대여 사업을 해보려는 카를하인츠 에슬 관장의 비즈니스 속셈이 엿보인다며 이 전시회의 기획 의도에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실제로 이 미술관은 지난 한두 해에 걸쳐 풍랑을 겪었다. 에슬 미술관은 본래 바우막스(Baumax)라는 대형 DIY 건축용 재료 및 장비 소매 체인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오스트리아인 사업가 카를하인츠 에슬 회장이 60년 넘게 수집한 개인소장품을 모아 2003년 현대미술관으로 개관한 사설 현대미술관이다. 지난 2014년 가을, 바우막스 사가 파산 위기를 맞자 에슬 회장은 채무를 이행해 직원 해고를 막기 위해 당시 시세 8600만 유로(한화 1200여억 원) 어치의 개인 미술소장품을 대거 매각해 미술계에 화제가 되었다.
잘 키운 미술 컬렉션은 인생을 살다보면 마주할 수 있는 ‘3D 위기’ 즉, 이혼(divorce), 사망(death), 빚(debt)이라는 인생의 3대 고비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개인 자산이라고 했던가? 카를하인츠 에슬 관장은 값진 미술 컬렉션 덕분에 사업체 부도를 막고 바우막스 사를 둘째아들에게 물려준 후 현재는 미술 큐레이터로 변신해 자신의 소장품을 십분 활용한 전시를 기획하며 미술에 대한 변치 않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독일 미술사조를 조망하는 이 전시는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와 마르쿠스 뤼페르츠(Markus Lupertz) 두 화가를 독일 20세기 후반기 전후 미술계의 귀감이자 모범적 전형으로 정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에슬 부부가 바젤리츠와 뤼페르츠 두 화가와 개인적으로 절친한 사이여서 두 화가의 전 창작기 작품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유별난 바젤리츠와 뤼페르츠 애호가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이 두 화가야말로 20세기 전반기 독일 미술 전통을 이어받아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뒤틀고 전복시켜 독일 회화사의 궤도를 새로 그은 주인공이라고 전시는 선언한다.
여느 오스트리아인들이 그렇듯 에슬 컬렉터 부부가 천착하는 예술적 영감이자 동시에 바젤리츠와 뤼페르츠 두 화가의 영원한 모티프는 인간의 몸이다. 바젤리츠가 인간의 몸을 거꾸로 세워 고전 그리스 미술의 이상적 신체 개념에 도전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시대 유럽 회화와 미의식을 재정의하려는 전략을 취했다고 한다면, 뤼페르츠는 인간의 몸을 동강 내어 회화와 조각으로 재반복해 구현하며 특유의 육중하고 기념비적 조형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받는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직후 냉전기에 접어든 유럽은 이제 더 이상 최첨단 문화예술 사조를 주도하는 예술 아방가르드의 대륙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선 1940년대 중엽부터 1960년대까지 뉴욕을 휩쓴 추상표현주의를 받아들여 엥포르멜 미술(Art Informel)과 타시즘(Tachisme)이라는 대륙권 유럽식 추상표현주의 사조가 유행했다. 특히 라이프치히 출신의 하르트비히 에버스바흐(Hartwig Ebersbach)는 당시 동독에서 행위주의 구상회화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스처럴 회화(gestural painting)를 고집한 외톨이로 꼽히는데, 그의 굵직한 필치로 물감을 두껍게 겹겹으로 덧바르는 기법은 이후 1980년대 독일을 휩쓸 포스트모던기 신표현주의를 예고했다.
한편, 이즈음 동서독을 합쳐 독일에서 주로 실험된 대세적 사조는 기하학적 추상주의 회화였다. 대체로 순수조형 창조라는 냉철한 입장에서 과거 동독권에서 순수추상이나 기하학적 추상이 격려되었는데, 예컨대 오늘날 사진을 능가하는 극사실적인 회화로 더 유명해진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도 본래 제스처 개념을 연구하여 추상적 이미지로 구성해 회화로 옮기는 차갑고 분석적인 기하학적 추상주의로부터 출발했다. 이 시기 독일 기하학적 추상주의 회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두 화가 귄터 푀르크(Gunther Forg)와 이미 크뇌벨(Imi Knoebel)도 표현주의 회화 속 화가의 붓 필치나 물감 칼 등으로 남겨진 인간적 수공 흔적을 일절 제거해낸 듯한 냉철한 추상을 추구했다. 푀르크는 양식적인 면에서 1920~30년대 독일 바우하우스 건축, 이탈리아 파시즘, 소비에트 연방 건축 이론에 담긴 건축적 조화와 비율이론을 추상회화로 번안해 표현하고 싶어했다. 크뇌벨은 유사한 미니멀리즘 추상주의 접근방식을 취하되 2차원 색면회화를 3차원 공간으로 확장하고 싶어했다.
전후 독일의 미술을 거론할 때,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동서 분단 상태는 독일 국민은 물론 미술가들의 역사적 유전자와 기억에서 여간해선 지우기 어려운 집단적 트라우마였다. 이 전시는 1960년대 이후 동독과 서독으로 정치적 제약과 단절을 극복하며 예술적 교감과 우정을 지속하려 애쓴 동서독 미술인들의 노력이 저변에서 면면히 이어졌음을 말한다. 예컨대, 독일의 신표현주의를 주도한 서독 출신 화가 외르크 임멘도르프(Jorg Immendorff)와 동독 출신 화가 A.R 펭크(A.R. Penck)가 나눈 예술적 우정은 잘 알려져 있다.
언뜻 보기에 서로 전혀 달라 보이는 표현양식을 구축했음에도 임멘도르프와 펭크는 모두 전후 냉전기, 동서 분단이라는 독일의 정치적?사회적 현실로부터 영감을 받아 미술을 통해 사회 변혁을 꿰하려 시도했던 지극히 정치적인 미술가였다. 두 화가 모두 미술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끝내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장벽을 넘어 변치 않는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다. 실제로 임멘도르프의 1980년 회화작품 <오스트외르크(Ostjorg)>에는 미래 언젠가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져 독일이 하나로 통일될 그날이 오면 동독 땅을 직접 밟으며 방문할 날이 올 것이란 화가의 희망과 예견이 담겨 있다.
오늘날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는 과거 동독 라이프치히 출신으로서 라이프치히 화파인 펭크의 계보를 이어 중견급에 이른 네오 라우흐(Neo Rauch)다. 1998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동서독이 통일된 후, 전세계 미술시장의 성장세에 힘입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라우흐는 오늘날 자국 내에서보다 미국에서 높은 인기와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다. 그는 독일의 역사, 유독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회화로부터 깊이 영향을 받아 짙은 파토스와 우수에 가득 찬 인물들을 등장시켜 모호한 분위기로 연출한 알레고리 회화로 그려내어 19세기 독일 낭만주의를 현대적으로 부활시켰다고 평가받는다. 독일의 역사를 단선적 내러티브로 이야기해주는 듯 보이면서도 화가 개인의 확고한 정치사회적 선언이나 주장은 일절 배제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도 그의 작품이 지닌 강점이다.
하지만 라우흐보다 한 세대 앞서 ‘가장 독일적인 화가’라는 별명을 얻은 화가는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다. 지난 수십 년 그는 프랑스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지만 독일의 역사와 문화를 테마로 작업한다는 이유로 특히 1980년대부터 국제 미술계에서 가장 독일적인 화가로 평가받아왔다. 키퍼의 회화는 독일 고대 신화, 동화와 전설, 문학작품과 역사에 이르는 실존적 주제부터 옛 독일제국 독수리 휘장, 셰퍼드견, 브란덴부르크 문, 독일 남부 흑삼림지 같은 독일의 전형적 심볼에 이르기까지 어두웠던 근대사를 상기시키며 독일 국민의 마음 깊은 곳 속죄의식에 호소한다. 2차원적 회화에 납, 진흙, 모래, 풀을 뒤섞어 입체적 질감을 더하는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그는 역사란 신의 자연과 창조력의 불가분성과 자연의 순환적 섭리처럼 돌고 도는 외면할 수 없는 힘이라고 말하며 관객의 어깨를 묵직하게 내리누른다.
독일 회화가 창조적인 측면에서나 문화적 파급력 측면에서 가장 다양하고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한 시기는 두말할 것 없이 1980년대였다. 이번 에슬 미술관의 <1960년대 이후 독일의 미술전>의 약점은 컬렉션 소장품 중 핵심인 1980년대 독일 작품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에슬 컬렉션이 이 전시를 개최한 기간에 프랑크푸르트의 슈테델 미술관(Stadel Museum)에서는 <1980년대 서독에서의 구상회화(The 80s-Figurative Painting in West Germany)전>(2015.7.22~10.18)이 열려 1980년대 독일의 현대미술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며 에슬 컬렉션에서 볼 수 없던 이 시대 작품들에 대한 보충 및 주석 구실을 했다.
게다가 <1980년대 서독에서의 구상회화전>은 그 시대를 경험한 세대들이 다시 한 번 유럽 전역을 깊숙이 뒤흔들었던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향수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이 전시는 1980년대를 서독 포스트모던기로 보아 시대적?지리적으로 전시 범위를 한정하고 당시 독일 구상미술을 부활시킨 일명 ‘융게 빌데(Junge Wilde)’ 즉, ‘젊고 거친 청년들의 회화운동’의 최고점이라 규정한다. 유럽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중문화를 뒤흔들던 1980년대 미술은 단도직입적이고 강렬하며 도발적이다 못해 때론 폭력적이며 체제 조롱적이어서 1980년대 융게 빌데의 미술은 ‘나쁜 그림(bad painting)’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매스미디어, 정치를 상징적 코드로 변환하다
사실 표현주의는 근대기 독일 미술에 면면히 흘러온 예술적 에너지이자 잠재력이었다. 일찍이 18세기 말과 19세기 독일 낭만주의는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심오함과 경외로부터 깊은 창조적 가치를 발견했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 낭만주의는 사실상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중세시대의 공동체 위주에 자연친화적이던 과거 인류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이 철학은 20세기 초엽 독일 표현주의 운동으로 폭발적인 창조력을 발휘했고, 다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가 되자 젊고 패기 넘치는 화가 집단들이 주도한 1980년대 후기 독일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로 폭발한 것이었다.
1980년대 융게 빌데 시대는 과거 서독의 4대 도시 함부르크, 쾰른, 뒤셀도르프, 베를린을 창조 중심부로 급부상시킨 시기였다. 또 이때는 혈기왕성한 젊은 미술인들이 각양각색의 목소리와 미술시장에서의 상업적 성공도 거머쥘 수 있던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다. 폴란드 출신이나 쾰른으로 건너와 활동을 시작한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는 자본주의적 사실주의(Kapitalistischer Realismus) 운동을 일으켜 조악한 광고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은근슬쩍 소비사회를 조롱하는 안티-아트를 이끌었다. 오늘날 독일 미술시장의 막강한 세력이 된 알베르트 욀렌(Albert Oehlen)은 고급예술과 서브컬처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 콜라주 회화로 단숨에 독일 회화사의 한 위상을 확보했고, 마르틴 키펜베르거(Martin Kippenberger)는 그만의 천재적 기발함과 표현력으로 1980년대 독일 신표현주의 미술을 국제적 위상으로 끌어올렸다. 1960년대부터 플럭서스, 팝아트, 아르테포베라 영향하에 혼자 묵묵히 작업하던 독일계 스위스 미술가 디터 로트(Dieter Roth)가 드디어 예술성과 재능을 인정받아 거장으로 주목받은 때도 바로 1980년대였다.
1990년대 이후가 되자 독일 회화에선 매스미디어가 정치라는 상징적 코드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다니엘 리히터(Daniel Richter), 요나탄 메제(Jonathan Meese), 팀 아이텔(Tim Eitel) 같이 퍼포먼스, 설치, 뉴미디어 등 새로운 소통 미디어를 역사, 매스미디어, 대중문화라는 주제와 결합해 회화로 끌어들인 젊은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야하고 현란한 색채의 구상회화로 일명 사이키델릭 펑크 화가로 불리 199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다니엘 리히터는 올 초 프랑크푸르트 쉬른 쿤스트할레(Schirn Kunsthalle)에서 개인전 <다니엘 리히터-안녕, 당신을 사랑해(Daniel Richter. Hello, I Love You)전>(2015.10.9~1.17)에서 커리어 중간휴지기를 선언하고 이전보다 더 추상화되고 더 요란한 색채로 강도를 높인 회화 컬렉션을 선보였다. 한편, 스스로를 ‘문화적 주술사’라 부르는 퍼포먼스 아티스트 요나단 메제(Jonathan Meese)는 회화, 드로잉, 조각 장르를 자유롭게 오가며 현대사회 속의 마약 중독자, 펑크족, 신나치주의자 등을 소재로 해 독일 도시에서 창궐하는 여러 하위문화적 어두운 흔적을 고발하듯 격렬하게 표현한다.
국제 미술계는 범주와 마케팅상의 편의를 위해 국가별 전형적 미술가를 찾아 고착화하며 독일 미술가들 또한 미술계 프리즘에 속해 있다. 그 결과 주목받는 독일 출신 미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독일의 역사와 정치라는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이는 특히 젊은 독일 미술가들을 압박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다수의 재능있는 미술가가 여러 미술사 속에서 나타났다 잊혔다.
21세기로 접어든 후부터 독일의 신진 미술가들은 독일의 역사와 과거나 정치 등의 무거운 주제로부터 탈피해 한결 동시대적 주제를 다루려 한다. 일명 ‘저속한 취향’의 화가로도 불리는 악명 높은 마르틴 에더(Martin Eder)는 앙고라 고양이를 안은 채 선정적 포즈를 한 젊은 여인부터 신성 모독적인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고딕 서브컬처 미학을 담은 극사실주의적 회화로 대중적 시각문화를 논한다. 안젤름 라일레(Anselm Reyle)는 화려한 색채와 고광택으로 마감한 회화작품이나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재활용한 조각으로 고급과 저급 예술 또는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유희하며, 안톤 헤닝(Anton Henning)
은 회화를 3D 인테리어 디자인의 연장선상으로 포섭해 2차원적 회화의 3차원적 공간성을 실험하는 작업을 한다. 이 전시는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가 지적재산권의 무의미성을 꼬집으면서 예술은 자유롭게 모방되고 재창조되어 향유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어머니(Mother)> 조각 연작으로 결말을 맺는다. ●

WORLD TOPIC | TOKYO Simon Fujiwara < White D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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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도쿄 오페라 시티 아트 갤러리 전시광경 Installation view at Tokyo Opera City Art Gallery 2016 ⓒ Simon Fujiwara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RO NASU photograph: MISHIMA Ichiro 아래 < Untitled(Plum Tree) > 2016 ⓒ Simon Fujiwara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RO NASU photograph: MISHIMA Ichiro

사이먼 후지와라의 개인전 타이틀이 왜 <화이트 데이>(도쿄 오페라 시티 아트 갤러리, 1.16~3.27)로 명명되었는지 전시장에 들어서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속적이며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이른바 ‘화이트 데이’는 그야말로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현대 소비사회가 만들어낸 극단화된 ‘감정 소비’의 한 단면이다. 지금을 정의하는 요소인 역사, 사회, 정치, 문화 등을 바라보는 후지와라의 시선은 직접적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빌리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하얀 전시장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그 누구의 시선도 수용하는 거대한 용기(容器)처럼 보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비추는 거울

마정연 미술비평

1982년 런던에서 태어난 사이먼 후지와라 (Simon Fujiwara)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프랑크푸르트 국립조형미술대학에서 건축과 미술을 전공한 뒤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다. 2010년에 프리즈 아트페어에서 카르티에상을, 같은 해 아트바젤에서 바로워즈상을 수상하고 2012년 테이트 세인트 이브스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여는 등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젊은 작가는, 베니스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싱가포르 비엔날레, 타이베이 비엔날레, 상하이 비엔날레 등의 국제전과 파리 퐁피두센터, 런던 헤이워즈갤러리,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등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가했다.
2016년 1월 16일부터 3월 27일까지 신주쿠에 위치한 도쿄 오페라 시티 아트 갤러리에서 가 개최 중이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 이어 이듬해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소개된 바 있기 때문에, 건축가인 일본인 아버지와 무용가인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그의 출생 배경이나 게이로서의 성적 아이덴티티는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다만 후지와라가 일본에서 미술관 규모의 개인전을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외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적지 않을까 싶다. 큐레이터 시노부 노무라가 개인전을 제안, 후지와라의 승낙을 받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본 전시의 타이틀은 기획 초기 단계에서 이미 유력한 안이었다는 화이트데이.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 생각하는 그 화이트데이가 맞다. 작가는 왜 이 단어에 주목했을까? 그는 사랑과 감사라는 행복과 가장 밀접한 감정을 초콜릿이나 선물 교환을 통해 표현하는 풍습을 개인의 감정과 소비를 연관시킨 시스템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보았다. 본 전시에서 작품으로 제시된 제품(product)의 생산 과정과 디스플레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해당 미술관에서 그간 열린 다른 전시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설정된 동선을 따라가면 새하얀 카페트가 깔린 긴 통로로 이어진다. 오프닝 직후 관객들의 마음속에는 막 내린 눈길을 처음 걷는 것 같은 설렘과 죄책감이 교차했다. 스포트라이트가 두 개의 사물을 비추고 있다. 하나는 영국의 고급 백화점 쇼핑백에 담긴 모피, 또 하나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꽃봉오리가 맺힌 매화나무 가지로 그 주변에는 동전들이 흩어져있다. 일반 시민의 손이 닿지 않는 고급 백화점이 몰락한 광산업과 섬유 산업의 도시에서 시작되었다는 아이러니와, 작은 대가를 지불하고 큰 보상을 기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담긴 동전을 던지고 기도하는 신사의 풍습이 후지와라가 보여줄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들을 예고하고 있다.
동전들을 따라간 곳 역시 새하얀 공간이다. 곳곳에 구멍이 뚫린 바닥의 흰 카페트는 물론, 화이트큐브의 특징인 흰 벽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 전시장 공간의 약 절반이 여백에 가깝게 활용되었다는 점이 새롭다. 익숙한 동전들 사이에 19세기 멕시코의 플랜테이션에서 사용되던 자체 화폐와 일본이 점령 중인 필리핀에서 발행해 종전(終戰)과 동시에 쓸모없는 종잇장이 되어버린 지폐로 만든 부채가 눈에 띈다. 식민지배가 계속될 거라 믿은 일본과 식민지배의 잔재를 취미생활로 연결시키는 필리핀인들에게서 각기 다른 낙관주의를 볼 수 있다. 화폐는 바닥에 놓인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가면, 나치가 ‘예술행위’로서 파괴한 탑의 고철을 덧댄 탭댄스 슈즈, 그리고 독수리의 모티프로 이어진다. 독일의 동물원에서 가져온 독수리 석조와 미술관 소장품에서 차용한 독수리의 그림에서 동서양이 공유하는 권력의 상징을, 전후 나치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훼손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게 된 독일 지하철의 독수리 부조에서 권력과 역사에 대한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권력과 역사에 대한 시선은 북한의 만수대예술단 화가들에게 의뢰, 제작한 회화작품 시리즈 (2015)로 이어진다. 공식적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북한에는 신선한 우유가 유통되지 않는다고 하니 이 화가들은 본 적이 없는 소재를 하이퍼리얼리즘으로 그린 셈이다. 우유라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그림 뒤에는 거대한 명함이 걸려 있는데, 읽어보면 전형적인 중소기업의 말단 영업사원임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원치 않는 명함을 건네며,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이 남자는 24시간 내내 일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일본 사회의 가장 작은 부품이다. 후지와라는 각기 다른 높이로 천장에 걸린 캔버스와 패널, 모니터가 겹치는 이 공간을 일본 건축의 특징인 장지 미닫이문에서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전시회장 중앙에는 투명한 작업실이 설치되어, 흰 가운을 입은 스태프가 수작업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2015~) 시리즈는 모피 표면의 털을 제거함으로써 드러난 피부를 캔버스화한 작품이다. 후지와라는 털로 덮여있을 때는 럭셔리한 상품이었던 모피가 생물학적 속성을 감추지 못하는 죽은 짐승의 피부로 돌아가는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 특정 문화권과 사회계층에 속한 관객들의 반응이 매우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짐승의 피부 건너편 전시실에는 권력의 피부가 전시되어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한 여성이라고 인식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의 피부다. 그녀의 메이크업을 담당하고 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의뢰해 메르켈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파운데이션으로 색칠한 리넨을 캔버스에 고정한 작품 (2015)은 권력자의 겉껍데기와 미디어를 통해 주입된 권위의 피상성을 언급한다.
또 한 명의 강한 여성,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2020년 도쿄올림픽 국립경기장 모델이 뒤집힌 채 전시되어 있다. 제목은 (2016). 우연의 일치이지만, 본 전시의 담당 큐레이터는 국립경기장 건립 백지화 논란이 일어나기 전인 2014년에 하디드의 첫 개인전을 담당했었다. ‘배송 사고로 더럽혀진 부분을 가리기 위해’ 오프닝과 전시 첫날에는 작품 위에 생오징어가 놓여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투명한 흰색으로 변해가는 죽은 오징어의 피부는, 오징어라는 별명을 가진 하디드의 건축에 대한 야유와 국립경기장 사태를 둘러싼 국민적 수치심을 연상시킨다. 후지와라는, 일본 사회가 문제를 지우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 더러움과 얼룩을 직면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아나가길 바란다고 말한다.
강한 두 여성 사이로 보이는 것는 익명의 소녀들이다. 2011년의 런던 폭동에 참여해 체포된 빈곤층의 16세 소녀 레베카는 2주간의 갱생 지도 여행으로 세계의 공장인 중국에 보내져 대량생산공정과 수천 년 전 대량생산되어 진시황릉에 묻힌 테라코타 군대를 견학한다. 여행의 끝에 그녀를 같은 방식으로 대량 복제해 만든 것이 테라코타 색의 석고상 시리즈 (2012)다. 현재까지 약 130명의 레베카가 제작되었는데 그 가운데 약 100명이 전시에 참여했다.

형식적 제약이 없는 것이 미술
두 번째 전시실에서 레베카들이 바라보고 있는 영상의 제목은 (2015)다. 새하얗게 표백된 공간에서 석고 조각상의 받침대 위에 앉아 쓰레기를 주우며 살아가는 자신의 가족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리아의 스페인어는 음악처럼 아름답다. 그녀는 실존하는 인물인가? 실제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 3D CG의 손이 화면을 터치하고 넘기고 고정하고 있기 때문에 마리아조차 CG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곳에 또 다른 창이 뜨고, 3D CG의 손을 제작한 독일인 막스의 인터뷰가 시작된다. 그 역시 일상적인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카메라가 조금 물러섰을 때, 영상을 보고 있는 관객들이 거의 동시에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그 직후 조심스럽게 주변의 시선을 살핀다. 막스가 팔이 없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장면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심리적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끔 교육받은 일본인들이 여지껏 의식한 적 없었던 행복에 대한 고정 관념과 그 잠재된 폭력성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영상 속에는 쓰레기 분리수거통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뒤돌아 보면 영상을 지켜보고 있는 레베카들 사이에도 같은 형태의 검은 오브제가 늘어서 있다. 이들의 타이틀은 (2015), 독일어로 ‘나’를 의미하는 단어다. 사회 전체의 생산소비 사이클의 일부분인 개인이 그 시스템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분리의 윤리는 독일 사회 속에 200종류가 넘는 분리수거통이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작가가 무기를 연상시키는 검은 동으로 색을 덧칠한 순간, 쓰레기통은 인종 분리를 둘러싼 20세기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장치로 변모한다.
혼인에 의한 인종 간 유전자의 교환에 대한 인식은 서서히 변화해왔다. 일본어에서는 혼혈을 의미하는 단어로 영어의 ‘하프(half)’가 쓰인다. 누군가를 ‘반쪽’ 취급하는 차별어인 줄 알았던 이 단어는 독특한 선천적 매력을 갖고 있다는 뉘앙스로도 사용되는 일상용어이다. 일본 사회는 혼혈에 대해 얼마만큼 관용적인가. 전시장 바닥의 카페트가 잘려나간 부분 사이로 보이는 얼굴의 주인공은 아프리카계 혈통을 받은 혼혈이라는 이유로 일본을 대표하는 미인이 될 수 없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미야모토 에리아나이다. 관객들은 ‘순수한 일본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의 위기를 가져온 ‘검은 미인’의 얼굴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거대한 눈은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손꼽혀 온 하얀 피부의 정치성을 고발한다.
아름다움의 정치성이라는 면에서 후지와라의 소속 갤러리 타로 나스(TARO NASU)에서 동시 개최되고 있는 전시 을 언급하고 싶다. 미키모토가 발명한 양식진주에는 인공적으로 삽입된 이물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조개의 자기치료 시간이 응축되어 있다. 순결과 원만함의 상징이기도 한 이 하얀 보석은, 남성이 혼인을 약속하는 증거로 여성에게 건네는 보석으로 사랑받아왔다. 조개에 이물질을 삽입하는 장면을 표현한 조형물에서 잔혹함을 느끼는 것은 감성의 문제이겠지만, 성인 여성이라면 산부인과의 금속 의료기구가 몸 안에 들어오는 차가운 이물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작가가 직접 진주를 삼키고 X선 사진을 찍은 작품 (2015)을 선보인 이 전시는 화이트데이와 더불어 일본의 발명품인 양식진주를 통해, 인공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폭력성 그리고 폭력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후지와라는 한 인터뷰에서 무엇인가를 온전히 완성하는 것을 꺼려 온 자신에게 형식적인 제약이 없는 분야가 미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현대미술에 정해진 형식이 없다는 말은 곧 모든 형식을 가진 분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 전시에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나의 작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캡션 없이 뒤섞여 있는 오브제, 캔버스, 설치, 조각, 영상들은 각기 다른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철저하게 계산해서 배치한 것은 작가지만, 개념 간의 연상을 통해 이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성을 발견해내는 것은 온전히 보는 이의 몫이다. 이 비결정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작품 기능을 하는 의 본질적인 힘이다.
출품작 가운데는 큐레이터인 노무라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아이가 동물원에서 본 동물 중 마음에 드는 동물을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가 그 그림을 보고 만든 인형을 크리스마스에 선물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한다. 유치원의 선생님은 아이가 보라색으로 그린 봉고가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는 대신, 어머니가 따라 만든 인형의 꼬리 부분이 그림과 조금 다르니 고쳐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후지와라는 크게 기뻐하며 그림과 인형을 빌려 (2009~2013)와 의 사이에 배치했다. 단 하나의 잣대를 강요하지 않고 아이가 보는 세상의 리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시점,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 다양한 가치관이야말로 ‘반쪽’의 일본인인 작가가 일본 사회 전체에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이 전시를 통해 후지와라라는 아티스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듣고,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인지 아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그를 다시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

WORLD TOPIC | GUANGZHOU The 1st Asia Biennial and The 5th Guangzhou Triennial

최근 ‘아시아’라는 키워드는 서구에 대항하는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시대 글로벌 현상과 밀접하게 연동되며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는 또 다른 움직임으로 주목받고 있다. 중국 남서부 광둥성의 성도(省都)인 광저우에 위치한 광둥미술관에서는 기존에 진행해온 <광저우트리엔날레>와 더불어 <아시아비엔날레>(2015.12.11~4.10)를 새롭게 개최했다. 이번 행사에는 17개국 5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해 지리적, 역사적 정의를 뛰어넘은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안했다.

아시아비엔날레가 의미하는 것

이슬비 본지 기자

중국 남서부에 자리 잡은 해양도시 광저우는 베이징, 상하이에 비하면 미술 관련 기관, 갤러리도 많지 않고, 새로운 미술에 대한 활동도 미미한 편이다. 하지만 이곳은 고대부터 해양실크로드의 거점이자, 중국이 영국의 끈질긴 통상 요구에 따라 외국에 개방한 최초의 개항장으로 서구 근대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창구 노릇을 했다. 현재는 베이징, 상하이와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이자 국제 무역 중심지 역할을 맡고 있다. 홍콩과 바로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며 이른 시기부터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서구와 대결하는 장소이자 근현대 혁명의 발상지로서 앞으로 광저우 현대미술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광저우 현대미술의 대표 기관인 중국 광둥미술관(Guangdong Museum of Art)이 기획한 <제1회 아시아비엔날레/제5회 광저우트리엔날레>가 지난해 12월 11일 개막해 올해 4월 10일까지 계속된다. 1997년 개관한 광둥미술관은 2002년부터 광저우트리엔날레를 네 차례 개최했다. 이번에는 제5회 광저우트리엔날레이자 동시에 이번에 처음 열리는 아시아비엔날레를 통합한 행사로 진행됐다. 광둥미술관 뤄이핑(Luo Yiping) 관장은 “지금까지 미술 담론이 서구 중심으로 주도된 상황에서 아시아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경험을 아시아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비엔날레가 필요하다”며 이번 행사의 개최 사유를 밝혔다. 그의 발언에는 광저우가 아시아비엔날레를 통해 21세기 해양 실크로드의 중심이자 문화예술 허브로 발돋움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번 비엔날레는 전시라는 하나의 축과 심포지엄과 세미나라는 학술적 행사가 또 다른 축으로 구성되었다. 미술관은 아시아에 관한 담론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2013년부터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각국의 큐레이터 50여 명을 초청해 수차례 큐레이터 포럼과 국제 학술대회를 진행하며 아시아비엔날레의 당위성을 검토하고 이를 확립하고자 힘써왔다. ‘아시아 타임(Asia Time)’을 중심 주제로 내건 이번 행사는 ‘월드 타임(Wolrd Time)’으로 대변되는 서구적 시간에 대비되는 개념을 제시했다. 서구적 속도의 미학, 선형적 발전 개념에 대립되는 동양적 관조와 멈춤의 미학, 비진화론적 회귀의 지혜로 풀이할 수 있다. 행사에 참여한 많은 학자와 큐레이터들은 아시아 타임은 아시아의 독자적인 시간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월드 타임과 긴밀한 연동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전시는 장칭(Zhang Qing) 중국국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헹크 슬래거(Henk Slager) 네덜란드 위트레히트 비주얼아트 및 디자인 대학원 원장,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우테 메타 바우어(Ute Meta Bauer) 싱가포르 현대미술관장이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헹크 슬래거는 월드 타임과 아시아 타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동양 출신 작가, 서양 출신 작가의 구분을 넘어 시간성 자체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다양한 작업을 선보였다. 특히 뉴욕에서 거주하며 활동 중인 사라 지(Sarah Sze)는 신문 1면과 마지막 면에 등장하는 기사 사진을 자연 풍경 이미지로 대체하고 다양한 일상용품을 사용한 설치작업 <달력 시리즈(Calendar Series)>를 출품해 시공간을 인식하고 측정하는 방식에 관해 의문을 던졌다. 장칭은 그룹 Big Dipper, 페이융메이(PEI Yongmei) 등 특별한 주제는 없지만 현재 중국 미술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를 중심으로 급격한 변화 속에서 빠르게 도약하는 중국 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우테 메타 바우어는 아시아 역사의 다양한 순간을 담은 5명의 작가/팀이 꾸미는 퍼포먼스를 선정해 이번 행사 폐막식에 선보일 예정이다. 김홍희 관장은 ‘아시아’와 ‘여성’을 서구 역사와 부계(父系) 문명에 기재되지 않는 비가시적 타자로 범주화하고, 이 둘의 애매모호한 특성에 내재된 전복적인 힘을 포착해 아시아 페미니즘을 재해석한 큐레이팅을 선보였다. 이 기획은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동아시아 페미니즘 : 판타시아전>에 압축적으로 선보인 것으로 국내 전시가 외국 미술관에 수출된 사례로 손꼽힌다.
특히 작가 함경아는 서양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명화 <모나리자>를 매개로 탈북자들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경험을 인터뷰로 풀어낸 작업을 선보였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 북한의 지도자 이외에 누구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금지된 북한이기에 모나리자에 대한 개념은 쉽게 수용되기 힘들다. 작가는 서양 고전풍의 복식을 입은 탈북자들이 모나리자와 비슷한 포즈를 취하며 남북을 벗어나 새로운 영역에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도록 유도함으로써 현지의 주목을 받았다.

P1080073

웨민쥔 <묵의(Ink Shirts)> 혼합재료 2015 미술관 중정 계단에 먹물이 묻은 붓으로 칠한 셔츠를 걸어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이 작업은 중국 동시대 미술에서 전통 문화와 사회주의 문화의 복합적인 관계가 어떠한 심리효과로 작용했는지 이야기한다.

아델 아비딘  비디오 16분2초 2015 작가는 팝 문화의 아이콘인 마이클 잭슨의 부활을 가정하는 가상 인터뷰를 통해 글로벌 시대 동시대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담론을 비판적으로 점검한다. Courtesy of the Artist, Work commisioned by Qutar museums Authority

아델 아비딘 <마이클> 비디오 16분2초 2015 작가는 팝 문화의 아이콘인 마이클 잭슨의 부활을 가정하는 가상 인터뷰를 통해 글로벌 시대 동시대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담론을 비판적으로 점검한다. Courtesy of the Artist, Work commisioned by Qutar museums Authority

‘아시아’라는 또 하나의 흐름
그러나 이번 비엔날레는 중국 특유의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미술관 측은 이번 행사가 민감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출품작에 자체 검열을 시행한 것이다. 일상의 오브제들과 유사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통상적인 성의 개념을 해체하는 작가 정금형의 <피트니스 가이드>는 외설적이란 이유로 퍼포먼스가 금지되어 설치와 영상작품만 선보였다. 또한 한국 입양아 출신 네덜란드 여성작가 사라 반 더 하이데(Sara Van Der Heide)의 프로젝트 <독일 평양 열람실 및 정보센터>는 제대로 된 홍보 없이 조용히 공개됐다. 주최 측이 남한과 북한, 중국과 북한 사이의 민감한 관계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시기간 동안 쑨원도서관 3층에 있는 광저우 괴테 인스티튜트를 평양의 독일문화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작가는 2004년 개관했다가 북한 정부의 압박에 의해 2009년 폐쇄된 평양 독일문화원 소장 도서색인카드와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와 김일성의 교류 문서, 세계 169곳에 있는 독일문화원 주소가 찍힌 괴테의 명함 등을 선보임으로써 서구 중심의 보편주의와 아시아의 상이한 맥락을 드러냈으며, 이와 관련해 분단과 통일, 남북한의 경계를 다룬 작가 10명의 작품을 함께 소개했다.
글로벌리즘 확산 이후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비엔날레급 대형 미술행사들은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동시대 미술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 아시아 지역에서는 아시아의 특수성에 집중하는 흐름이 눈길을 끌고 있다. 물론 이 같은 흐름은 최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의 경제적인 급성장을 배경으로, 글로벌 맥락에서 아시아가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는 현상을 반영한다.
아시아는 더 이상 지리적 범주로서 구분되거나 서구에 대항하는 정치적 개념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아시아를 하나의 구호처럼 피상적으로 접근한다면 이것은 상상 공동체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에 관한 탐구는 공동의 역사와 문화적 경험을 공유한 아시아가 자발적인 목소리를 모아 아시아의 다양한 가치를 함께 고민하고, 연대의 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할 수 있다.
다시 이번 행사 이야기로 돌아가서, 한 미술관에서 비엔날레급 행사를 하나만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을 텐데 앞으로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를 동시에 진행하겠다니 다소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비엔날레는 2년에 한 번씩, 트리엔날레는 3년에 한 번씩 열며, 두 행사가 겹치는 해에는 이번처럼 연합전으로 개최하겠다는 계획이다. 광둥미술관의 경우 1년에 60회의 전시가 열릴 만큼 국제적인 규모의 블록버스터전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다. 비엔날레가 우후죽순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중국의 현실에서 앞으로 이 미술관의 행보를 지켜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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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융메이 <듀얼 타임 No.2> 캔버스에 유채 2015 급격한 정치, 경제, 문화적 변화와 맞물려 다양한 충돌과 모순을 경험하는 중국의 현재적 상황을 대변한다.

 

 

CRITIC 백현진 들과 새와 개와 재능

PKM갤러리 1.27~2.27

진휘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자유분방한 표현, 활달하고 거침없는 터치, 다양한 이미지의 조합, 강렬하고 경쾌한 색감 등으로 설명되는 백현진은 인디밴드를 이끌었던 대표적 홍대키드이다. 조소과에 입학했으나 대학교육 대신 주변의 젊은 문화에 관심을 가진 그는 실험성이 강한 어어부 프로젝트를 결성하면서 음악과 미술을 넘나드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최근 회화작품 위주로 활발하게 전시를 이어가는 백현진은 여전히 영화 음악가이자 작곡가, 연주자로 활동한다. 이런 이력은 그를 동시대 대중문화의 이단아, 융합・통합적 문화제작자의 표상이자 예술의 미래를 보여주는 캐릭터로 이해하게 만든다.
이번 PKM갤러리 개인전에서 그는 회화를 20여 점을 보여주는데, 대부분 앞서 서술된 보편적인 평가에 부합하는 모습이다. 모든 사물과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듯 보이는 무심함과 동시에 내면을 관찰하는 감성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성향이 잘 배합된 작품들은 다소 현란한 제목과 함께 전시되었다. SNS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그의 작품은 ‘회화로 그려낸’ 일상이자 수다의 소재들로, 심각하지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내용들이다.
이런 동시대성을 갖는 그의 회화 안에는 의외로 20세기의 미술 사조들이 숨어있다.
초현실주의 작가로 미국에 이주, 추상표현주의를 태동시킨 아쉴 고르키가 보여준 유기체의 생명감이 부각되기도 하고, 활달한 브러시 워크와 대담한 구성은 추상표현주의의 액션페인팅과 색면추상의 특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 추상적이거나 초현실주의적인 스타일 위에 일상에서 만나는 이미지들과 글자, 기호로 치환된 실루엣의 오브제가 섞여서 그의 작품은 팝아트 이후 익숙해진 대중적인 회화의 범주도 만족시킨다. 한마디로 백현진의 작품은 초현실-추상-팝(sur-abstract-pop)이 융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완성한 후 붙인다는 긴 구절의 제목들은 작가의 심리적 상황을 따라가면서 작품을 개인적인 기록으로 제시하려는 의도를 반영하는데, 상황을 재치 있게 풀어낸 표현과 다소 긴 구절들은 인터넷 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백현진 작품은 이런 다면적인 형식과 전통적인 미술의 역사를 개인적이고도 기록적인 대상으로 치환하고 오늘날의 친근한 어법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동시대 문화 전반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혼성모방과 다양한 레퍼런스 안에서 편집자로서의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현대 예술인에게 가장 익숙한 선택 방식이다. 단일한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기 어려운 복합성과 이질성의 공존은 그가 다른 장르의 예술에서도 추구하는 개별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성격과도 관계있다.
동시에 그를 둘러싼 환경에 존재하는 소비적인 소통방식, 첨단 기술과 욕망 안에서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불편함, 또는 슬픔과 어두움에 대한 명상이 투영된다는 점에서도 형식과 내용, 제목의 결합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런데 그의 개성 있는 활달한 터치, 산만하게 느껴질 정도의 스펙트럼 넓은 색의 사용, 소소한 디테일이 이번 전시에서는 밀도 높게 구현되지는 못한 듯 보인다. 구도의 무게와 구성의 전형성에 갇힌 그림은 자유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데 주저하는 듯하고, 화면 안에서 중심과 주변 간의 조화와 균형에 의존함으로써 소통을 유발하는 무수한 촉수를 잃은 듯한 모습도 보였다. 전달력을 잃지 않기 위한 자기경계의 확장이나 해체가 다시 한 번 진행될 수 있을지 주목해본다.

위 백현진 <어떤 동물에게 도구로 인식되기 이전의 물질>(가운데) 캔버스에 유채, 그래피티 2015

 

CRITIC 주도양 Insect Eyes

사비나미술관 1.15~3.18

장정민 미술비평, 한국사진문화연구소 연구원

주도양은 그동안 세계를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다양한 방식을 제시해왔다. 그의 작업 대부분은 인간의 눈이 인지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변주되어 있었다. 특히 둥근 원 안에 세계를 욱여넣은 것 같은 작업 방식은 언젠가부터 그의 대표적 기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래서 <곤충의 눈- 시선의 기원>이라는 전시 제목은 그가 이번에는 곤충의 입장이 되어 세계를 재현했으리라 쉽게 짐작하게 한다. 문제는 곤충의 눈으로 본 세계를 재현한 이 ‘충감도(蟲瞰圖)’가 단지 또 다른 방식의 시각적 재현의 실험에 그치고 말았는지, 아니면 ‘보는 행위’와 관련된 의미 있는 문제를 제기했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우선 주도양의 이번 작업은 인간중심적 사유 방식을 돌아보게 한다. 그의 작업이 단지 세계를 인지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사실 지금까지 그의 사진을 수식하는 데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말은 아마 ‘왜곡’이라는 단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적 왜곡은 관객들에게 일종의 감각적 유희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왜곡을 통한 유희의 생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각적 왜곡’ 그 자체가 아닌 ‘본다는 것’, 즉 ‘시각적 인지’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항상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그의 작업 전반을 수식하던 ‘왜곡’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인간중심적인 것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온통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만약 곤충이 본 세계의 실상이라면 그것을 과연 왜곡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다시 말해 왜곡이란 말은 언제나 인간이라는 관찰자를 기준으로 삼아 사용될 뿐이며, 곤충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시각적 인식이 왜곡된 것으로 전도될 수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주도양의 이번 전시는 융복합 매체로서의 사진에 대해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일차적으로 이번 전시는 예술과 과학의 융복합적 양상을 드러낸다. 실제로 그는 곤충의 시각적 인지 방식을 재현하기 위해 여러 곤충학자를 만났다. 이를 통해 곤충의 눈이 지닌 낱눈과 겹눈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것을 사진 촬영에 적용하기 위해서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카메라 렌즈의 화각을 결정하고 기준점으로부터 몇 장의 사진을 찍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로부터, 핀홀 카메라의 제작을 위해 카메라로 사용될 원통에 몇 개의 구멍을 얼마만한 크기로 뚫을지 결정하는 일까지 ‘충감도’의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는 생물학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시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융복합적 특성일 뿐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전시가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가 지닌 융복합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도양은 전시장 내에서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원리를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했으며, 이는 사진이 광학과 화학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이차평면에 인화된 이미지만을 가리켜 사진이라 하지 않는다는 인식으로 곧장 이어진다. 실제로 이번 전시와 동시에 발행된 책을 통해, 그는 ‘빛’의 작용을 이용한 것을 모두 사진이라고 보며, 메인보드 기판, 인쇄활자, 장판의 나무 무늬, 꽃무늬 벽지 등 다양한 형태로 사진이 활용되고 있다고 말한다.(주도양, 《곤충의 눈-시선의 기원》, 사비나미술관(2016.1), pp.192~193.) 다시 말해 사진은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될 수 있는 융복합적 성격을 이미 배태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인간’이 ‘카메라’라는 도구를 빌려 ‘곤충’의 시각을 모방해 본 것에 불과하다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시각도 아니요, 곤충의 시각도 아니며, 결국 카메라의 시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를 단순한 모방으로 깎아내리는 것은 지나치다. 여기에는 분명 생물학적 근거, 작가의 상상력, 그리고 사진의 기계적 성질 등이 하나로 뭉쳐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에는 인간과 곤충의 사이를 매개하는 수단이자 예술 작품의 생산 도구이기도 한 다재다능한 사진이 있다.

위 주도양 <LotusⅢ, Ⅱ> (왼쪽) C 프린트 2016

CRITIC 이주리 미끼대왕

갤러리 2 1.28~3.12

박경린 독립 큐레이터

이주리의 환상의 세계는 평면에서 시작해 공간으로, 애니메이션으로 그리고 다시 평면으로 향하는 실험 안에서 형태를 변화하며 모습을 드러내왔다. 그간의 작업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한 개인이 직면하는 부조리, 그 속에서 드러나는 개인의 감정, 그리고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충돌하는 지점을 시각적인 형태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다루어왔다. 딱 잘라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암묵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올바름에 대한 기준에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고 틀 속에 오롯이 자신을 끼워 넣을 수 없었던 순간에서 비롯된 감정의 틈은 점차 확장되어 상상하는 어떤 세계-마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는 환상의 세계와 같은-에 곁을 내어주는 매개가 된다.
이주리의 두 번째 개인전 <미끼대왕>은 이러한 매개, 다시 말해 이질적인 두 세계가 만나는 틈을 낚는 미끼가 되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을 투영한다. 지그문드 프로이트가 햄릿 속 플로니우스를 빌려 언급한 “진실이라는 잉어를 낚아 올리는 허구적 미끼”로 정의된 환상성에 대한 정의는 작가가 전시장에서 보여주게 될 자신의 환상 세계에 대한 은유다. 동시에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에서처럼 개인의 경험을 넘어 수많은 이분법적 대립이 충돌하는 무대로 이끌고픈 의지가 담겨 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 <다크 판타지>에서보다 색은 더 대담해졌고, 회화의 숨은 층은 늘어났으나 화면 그 자체는 보다 추상적으로 환원되었다.
전시장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골무인간 서식지>(2016)는 색에 관한 작가의 변화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형광노랑색의 배경에 빨강색 선이 그어진 오브제들과 여타의 회화 이미지들로 채워진 그림이다. 지금까지 흑백을 주조색으로 하는 드로잉과 회화적 표현을 통해 비정형의 세계에 대한 탐닉을 보여주던 작업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색이 주는 강렬함은 뒤이어 선보이는 다른 작업에서 원색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확장된다. 색의 충돌 속에서 물속에 가라앉았던 물건이 떠오르듯 회화 속 각 요소들은 형태를 가지되 이야기의 서사성은 거세되어 있다. 첫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드로잉 속 요소들, 부지불식간에 떠오르다가 사라진 이미지들을 자유연상법, 그리고 작가 개인의 집적된 자료들 속에서 추출했다. 이로써 이야기는 분절되고 작가가 의도하는 이야기를 관람객이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단위별로 보이거나 충돌되거나 관람객이 스스로 조합하거나 혹은 화면 그 자체만 남도록 한다. 관람객이 화면 앞에서 자기만의 상상으로 부족한 이야기를 채워 만들어내거나 회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환영 그 자체에 보다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비록 상상의 세계이지만 어디에 있든 그것은 적어도 작가에게만큼은 존재하는 세계다. 이전에 작가는 공사장, 꿈, 다크라이드와 같이 특정한 내러티브나 현실에 기댄 공감각적 경험을 통해 설명되지 않는 경험, 감정, 상상의 잉여물들을 설명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화면 안에서, 평면 그 자체로, 어떠한 이야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롯이 상상의 세계를 통해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부조리함의 세계로 미끼를 드리운다. 그것은 환상이자 곧 현실이다.

위 이주리 <골무인간 서식지>(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펜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