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경: 버들 북 꾀꼬리》

구조 틀로 조림된 숲의 풍경

2023. 9. 7 – 12. 31
리움미술관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강서경: 버들 북 꾀꼬리》(9.7~12.31)는 다양한 매체와 방식으로 회화의 확장 가능성을 탐구하는 강서경의 개인전으로, 초기 대표작부터 신작까지 총 13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의 제목인 ‘버들 북 꾀꼬리’는 전통가곡 이수대엽(二數大葉)의 〈버들은〉을 참조한 것으로, 마치 실을 짜듯 버드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꾀꼬리의 움직임과 소리를 풍경의 직조로 읽어내던 선인들의 비유를 가져온 것이다. 이는 시각·촉각·청각 등의 다양한 감각과 시·공간적 차원의 경험을 아우르는 작업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전시는 한 폭의 풍경화가 3차원으로 펼쳐진듯 공감각적으로 공명하며, 관람객은 그 사이의 여백을 거닐며 각기 다른 존재들이 연결되고 관계 맺는 풍경을 경험하게 된다.

《강서경: 버들 북 꾀꼬리》 리움미술관(M2 B1) 전시 전경 2023 사진: 박홍순

구조 틀로 조림된 숲의 풍경

고원석 | 독립기획자, 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교육과장

많은 이가 강서경의 이번 전시를 기다려왔을 것이다. 한동안 해외 위주의 활동을 보여준 작가가 출산과 투병 등으로 인해 거듭 연기해 왔던 이번 개인전은 프로젝트적 성격이 강했던 북서울미술관 어린이갤러리 전시를 제외하면 2015년 이후 첫 국내 개인전이며, 뮤지엄 규모의 대형 전시로는 처음 열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사실을 증빙하듯 이 전시에는 복층으로 구성된 리움미술관의 M2 전시장은 물론, 상당한 면적의 로비 공간과 벽면, 그리고 대형 스크린 등에 2010년대 초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그의 작업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130여 점의 작품이 놓여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작지 않은 공간을 조밀하게 채운 작품의 스케일과 양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높은 천장고와 큰 유리창을 통해 유입되는 외부 풍경이나 자연광과 이질감 없이 어울리는 작품들은 첫눈에 보기에도 입체화된 산수의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입구에서 관객이 처음 조우하는 것은 외부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서 있는 〈정 井- 버들#22-01〉이다. 정(井)자의 격자 틀로 음의 길이와 높이를 표기한 조선 초기의 악보인 정간보(井間譜)에서 착안한 작가의 대표적 시리즈인 〈정 井〉에 속하는 이 작업을 전시장 입구에 배치한 것은 평면으로서의 회화를 입체적 시공간으로 확장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와 그 전개 과정을 이루는 조형적 단위를 안내할 뿐만 아니라 그 내부의 텍스트와 전면에 비치한 헤드셋을 통해 작품과 작품 사이의 공간을 음유하듯 걸어볼 것을 제안하는 의도일 것이다.

전시에는 시간을 담고 서사를 쌓아 올린 회화 작업 〈모라〉와 조선시대 1인 궁중무인 춘앵무(春鶯舞)를 추는 공간의 경계를 표시하는 화문석을 변형한 〈자리〉 등 작가가 이전부터 발표해온 시리즈 작업들이 보다 확장된 스케일로 배치되어 있다. 〈자리〉 연작에는 전통적 공예형식에 가까운 화문석 작업들을 펴 놓아 회화적 속성을 강조한 것도 있지만, 리움미술관 특유의 건축구조인 화이트 큐브 박스의 입구에 문처럼 세워놓은 〈자리#22-01〉과 같이 건축적 속성을 도입함으로써 영역과 공간의 경계성이라는 연작의 본질을 더 잘 표현하는 작업들도 있다.

한편 이번 전시에는 기존에 발표되지 않았던 신작의 비중이 높다. 〈그랜드마더타워〉, 〈좁은 초원〉, 〈둥근 유랑〉 등 기존 연작에서 응용, 확대된 시리즈 작품들과 더불어 〈산〉, 〈귀〉, 〈아워스〉, 〈기둥〉, 〈바닥〉 등 다매체적 형식의 새로운 연작들이 전시의 많은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들 중 〈산〉이나 〈귀〉는 입체의 형식이나 다분히 선적 속성이 두드러지는 것들로 공중에 거치되거나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 산수화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산이 주로 능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으로 표현되듯 강서경의 〈산〉은 구부러진 형태에 다양한 재료를 동원하여 시각과 촉각의 물성을 동시에 표현한다. 한편 모빌 형태의 신작인 〈귀〉는 중앙이 비어 있는 형태로 중간중간에 거치되어 마치 빈 공간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소통의 채널을 여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두 연작은 회화의 평면성에서 나아가 공간 전체를 입체적으로 포용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에 반해 〈바닥〉, 〈기둥〉, 〈좁은 초원〉 등의 연작은 보다 육중한 프리 스탠딩 조각의 형식에 가깝다. 축소 혹은 생략된 신체의 형식을 통해 개인의 한계적 존재성을 드러내는 〈좁은 초원〉과 대조적으로 〈바닥〉은 불완전하게 쌓인 채 공간을 향하는 대형 스케일의 철판 조각작품으로 불안한 욕망을 유비한다.

〈자리#22-01〉철에 도색, 실, 나무 프레임, 볼트, 가죽 조각, 와이어 약 596.2×351×24cm 2021~2022 사진: 홍철기 제공: 강서경 스튜디오, 리움미술관

〈귀#21-01〉(사진 가운데) 철에 도색, 실, 볼트, 가죽 조각 194×140.6×40cm 2020~2021 《강서경: 버들 북 꾀꼬리》 리움미술관(M2 1F) 전시 전경 2023 사진: 박홍순 

전술한 것처럼 이 전시는 회화의 확장과 입체적 풍경에의 수렴이라는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여러 장치를 동원해 조밀한 풍경과 그 사이의 여백을 구획하고 관람자가 그 사이를 소요하듯 걸어볼 것을 제안했다. 이 때문에 작가의 손길은 전시장을 가득 채운 130여 점의 작품을 제작하는 데에 멈추지 않고 그 작품들이 놓이는 공간의 면밀한 구조화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가 회화의 기초적 단위로 제시했던 정(井)의 개념은 자연스럽게 개별 작품의 영역을 넘어 전시장 전체 공간을 축조하는 기하학적 구조 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정(井)이라는 글자의 기하학적 형식은 다분히 모던한 느낌을 풍긴다. 그래서인지 장식적이고 여성적인 속성을 지닌 개별 작품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축조하고 풍경을 직조하는 작가의 태도는 대단히 건축적이고 의욕적이다. 전시장에 고밀도로 들어찬 작품들의 양적 특징이나 다양한 연출을 통해 공간 전체를 조밀하게 점유하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시선을 멀찍이 올려놓는 기단의 스펙터클이나 작품과 보조물의 경계선상에 있는 오브제들을 배치하여 관객이 앉아 휴식할 수 있는 ‘자리’의 육중함 등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다. 때문에 전시는 이미지의 본질적 영역에서 시작하여 이미지의 평면성을 거부하고 풍경과 구조를 축조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천장고가 높은 지하 전시장보다는 좁은 면적의 위층 전시장으로 올라가면 그러한 속성은 더 강화된다. 검은색으로 마감된 전체 벽면과 역시 짙은 검은색 카펫으로 덮인 바닥의 공간에 휴먼스케일의 입체작품들이 촘촘하게 서 있다. 완벽한 무중력의 중립 공간 혹은 블랙박스를 의도하는 공간디자인은 전시장 전체를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어진 하나의 극장으로 변모시킨다. 위층 전시장의 연출효과는 더 강력하고 그림자마저 의도된 것처럼 세밀하다. 그러한 무대에서는 회화조차 풍경 혹은 구조로 수렴된다.

재료를 동원하고 장악하는 작가의 실천은 이러한 공간을 구획하고 속성을 변모시키는 주요한 힘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평면적, 회화적 속성이 강했던 이전 작업에서 나아가 조각의 본질적 언어를 완벽하게 포섭한 입체작품들을 의욕적으로 선보였다. 돌, 나무, 철, 체인, 가죽, 끈, 실, 볼트, 비닐, 바퀴 등에서 안무와 비디오까지 다양한 재료가 면밀하게 제어되어 조화된 형태로 수렴되어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재료들이 조화를 이루며 완성된 작품에서 작가의 집요한 집중의 흔적이 보인다. 작품의 미적 기저에는 제조 기술의 기계적 미학이 깔려 있지만, 표면이나 디테일, 심지어 면에 뚫려 있는 구멍들까지 섬세하게 조절되어 있다.

전시장을 메운 작품들은 미술관 로비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는 신작 영상 〈버들 북 꾀꼬리〉에서 부분으로 해체, 재조합되어 생명력을 획득한 퍼포머로 재탄생한다. 작품의 부분들이 소리와 함께 암흑의 무중력 공간에서 움직이거나 부유하는 영상은 전시장 공간에서 작품들 사이를 걸으며 떠올렸을법한 공감각적 심상을 표현하는 것 같다. 거기에 등장하는 손은 작품의 부분들을 펴고, 밀고, 들고, 잡으며 움직이게 한다. 신작의 아이디어는 흥미롭지만, 실제 공간에서의 심상을 안고 나온 관람객의 상상력에는 일정한 제약이 더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버들 북 꾀꼬리〉 3채널 비디오, 컬러, 소리, 15분 20초 2021~2023 제공: 강서경 스튜디오

〈정井- 버들#22-01〉 철에 도색, 나무 프레임, 거울에 각인, 염색된 왕골, 실, 볼트, 가죽 조각, 바퀴, 나무 둥치 가변 크기 2020~2022 사진: 김상태 제공 : 강서경 스튜디오, 리움미술관

〈따뜻한 무게 610 #23-02〉(사진 맨 오른쪽) 철에 도색, 실, 약 62×46.5×18cm 2022~2023
〈따뜻한 무게 610 #23-03〉(사진 맨 왼쪽) 철에 도색, 실, 약 62×46.5×18cm 2022~2023
《강서경: 버들 북 꾀꼬리》 리움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사진: 박홍순

요컨대, 강서경의 전시에서는 전통의 시공간과 회화의 평면성에서 호출된 주제적 요소들이 부조로, 산수로, 건축으로 현현되어 공간을 축조한다. 전통이라는 모티브의 동시대적 재현은 강력한 고미술 소장품을 근간으로 하는 리움미술관의 정체성과도 잘 부합한다.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작품의 밀도와 물량에 압도당한 시선은 그사이 공간을 걸으며 이내 적응을 경험하는데 그것은 제작과 공간을 장악한 작가와 디자인의 집요한 제어 덕분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전시는 회화의 공간을 공감각적으로 확장하고 또 체험하는 시공간을 제안한다.

그러나 전시에서 개별화된 시공간의 상상을 배려하는 여백이 부족한 점은 아쉽다. 전시장을 작품에서 확장된 환경으로 만들고 있는 이번 전시는 다수의 작품으로 전체 공간을 의욕적으로 메웠지만, 산수풍경 특유의 사이 공간이 지닌 자유로운 상상의 시공간이 구현될 여지는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 상상의 공간은 작품과 관객의 근본적인 상호작용이 창출되는 내밀한 곳으로서 일정 부분 보는 사람의 여유와 자율성을 견인할 배려와 장치가 필요한 데 반해, 조밀하고 인위적으로 구획된 동선은 그러한 여지를 많은 부분 차단한 것 같다.

《강서경: 버들 북 꾀꼬리》 리움미술관(M2 1F) 전시 전경 2023 사진: 홍철기 제공: 강서경 스튜디오, 리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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