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클리프 아펠: 시간, 자연, 사랑》

전시 큐레이터 알바 카펠리에리

11.18 ~ 2024.4.14

SIGHT & ISSUE

《반클리프 아펠: 시간, 자연, 사랑
(Van Cleef & Arpels : Time,
Nature, Love)》 ‘시간- 정밀성’
섹션 전시 전경
제공: 반클리프 아펠

‘패트리모니얼’은 개인이나 기관이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을 의미하는 용어로 통용된다. 1906년에 설립되어 하이주얼리 메종의 자리를 지켜온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은 밀라노, 상하이,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 지난 1세기 이상 보유해 온 컬렉션을 선보이는 패트리모니얼 전시를 디뮤지엄에 마련했다. 전시된 작품에는 메종이 설립되던 시기부터 만들어져 브랜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보석, 시계 및 다양한 오브제뿐 아니라 이집트 나즐리 여왕이 소유했던 컬렉션과 같은 진귀한 보물도 포함되었다. 이와 함께 반클리프 아펠이 아카이브로 보존하고 있는 제작노트, 드로잉, 스케치, 홍보물, 제품 카드와 같은 주요 자료 및 제작 각 단계의 전문가가 등장하는 영상도 함께 제공되어, 지난 100여 년간 유럽 사회를 풍미한 보석 작품을 통해 흥미진진한 역사의 탐미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과 같은 공간이 연출됐다. 전시를 위해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이나 마들레네 디트리히,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의 유명인사가 즐겨 착용했던 보석들도 공수되어 ‘보물찾기’의 여정에 즐거움을 더한다.

전시를 기획한 알바 카펠리에리는 첫 번째로 ‘시간’의 속성에 주목하여 과거의 보석 작품과 시간의 흐름이 서로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을 10개의 섹션으로 구성했다. 그는 이탈로 칼비노가 쓴 『다음 천년기를 위한 여섯 가지 메모』에 제시된 5개의 개념 -가벼움, 기민함, 시각적 구현, 정밀성, 다양성-에 패션, 무용, 건축의 요소를 더하고, 머나먼 곳과 파리를 각각의 섹션으로 조명했다. 전시는 파리에서 시작되는데, 반클리프 아펠이 탄생한 이 도시는 20세기의 문화예술과 사회적 관습이 혼합된 장소로 제시되며 작품과 시간이 공유하는 다양한 접점을 탐구하는 전시의 여정을 이끈다. 이후 두 번째 테마인 ‘자연’에서는 동식물에서 영감을 받아 우드, 자개 등의 재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장신구를 만날 수 있으며, 마지막 테마 ‘사랑’은 기하학적 형태의 투명 조각들이 사랑의 감정을 반영하는 상징으로 표현됐다. 브랜드 가치의 가시성을 높이는 이러한 전시는 한국 소비층의 구매력 성장에 따라 규모를 키워가며 꾸준히 개최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보석은 그 상업적 가치가 함께 거론되며 대중의 호기심을 쉽게 자극할 수 있는 소재가 된다. 그러나 반클리프 아펠의 전시는 표면적인 아름다움이나 가격에 쏠린 관심을 보석의 역사와 장인들의 이야기에 돌릴 것을 권유한다.

interviewㅣ보석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ㅣ전시 큐레이터 알바 카펠리에리

알바 카펠리에리(Alba Cappellieri)는 밀라노 폴리테크닉대에서 주얼리 및 패션 액세서리 국제 마스터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밀라노, 상하이,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반클리프 아펠의 패트리모니얼 전시를 기획했다.

큐레이터 알바 카펠리에리

〈지프(Zip) 네크리스〉 옐로우 골드, 로즈 골드, 루비, 다이아몬드 1951 지퍼를 닫으면 브레이슬릿으로 변형이 가능한 작품이다

〈댄서(Dancer) 클립 제품 카드〉
1945 반클리프 아펠 컬렉션
제공: 반클리프 아펠

반클리프 아펠의 전시는 개최 도시에 맞춰 기획된다. 서울을 반클리프 아펠의 유산과 연결하기 위해 염두에 두었던 부분이 있다면?

전시는 도시마다 작품 구성, 공간디자인, 그래픽 디자인을 모두 달리한다. 이 과정에서 현지 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는다. 나는 한국 문화와 예술을 좋아하고 예전에도 두 차례의 전시를 진행한 적이 있다. 이번 전시에는 재료, 영감, 미학적 측면에서 아시아 문화를 반영하는 작품을 선별했다. 특히 그동안 한 번도 전시되지 않은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시공간은 요한나 그라운더와 함께 작업하며 전시의 테마인 시간, 자연, 사랑에 따라 세 가지 방향으로 디자인했다. 미할 바토리는 한국에서 자생하는 꽃과 식물을 기반으로 그래픽 비주얼 디자인을 진행했다.

서울이 주는 영감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우아함이다. 이번 전시에도 드러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현대인은 모든 것이 큰 소리를 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요소에 높은 볼륨이 설정된 것 같다. 하지만 반클리프 아펠의 작품과 정신은 매우 다른 성격을 지닌다. 이번 전시에서는 주얼리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반클리프 아펠은 주얼리의 소재, 기술, 미학, 기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몇 안 되는 메종 중 하나지만 이 점을 소리높여 외치지 않는다. 조용한 혁신이랄까.

주얼리는 시대의 미학, 사상, 국제교류, 때로는 지배층의 성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영속성을 전제한다는 면에서도 예술작품과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예술품이 가진 전위성, 사회변화의 주도성과 같은 가치와 역할을 주얼리로부터 기대하기는 어렵다. 동시대성을 담보로 하는 미술관에서의 주얼리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가?

이 질문은 기획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보석 작품들이 시대를 반영하면서도 이를 초월할 수 있을지 자문한다.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의 계승을 뜻하기 때문에 일시적인 유행이 될 수 없다. 반클리프 아펠의 아카이브를 공부하면서 메종이 시간의 정신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메종과 시간이 가진 어려운 관계를 풀어내기로 했다. 이 전시는 보석의 크기나 경제적 가치를 보여주고자 기획된 것이 아니다. 관람객들이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전시를 통해 사고하고 반추하며 통찰력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젊은 세대가 서사를 읽는 방식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감상법과 다르다. 이에 전통적인 미술기관도 젊은 층을 위해 비주얼, 언어, 엔터테인먼트의 요소를 전시에 반영한다. 이번 전시에서 메시지를 여러 층위에 두어 심도 있는 감상을 유도했다고 했는데, 이 외에 젊은 세대의 흥미를 끌기 위한 특별한 요소가 있는가?

젊은 세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뛰어난 감각을 가졌다. 그들의 관심을 끌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디지털 효과나 인스타그램이 아니라, 300점이 넘는 웅장한 작품 사이를 걸으며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디지털화된 도시 중 하나이다. 전시장 밖에서 온갖 미디어를 통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볼 수 있지만, 유서 깊고 아름다운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다. 상하이에서의 전시는 팬데믹 기간에 진행되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많이 방문해서 놀라웠다.

김소정 기자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