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의 화려하고 불길한 전개:
다시 공회전? 새로운 퇴행의 시작?

이정우(임근준) |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SPECIAL FEATURE

2004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홍승혜의 개인전 《복선(伏線)을 넘어서》의 후속 전시. 작가는 네모의 그리드를 탈피해 래스터(raster) 파일을 생산하는 포토샵과 벡터(vector) 문법의 일러스트레이터를 새롭게 구사하면서 다시 한번 새로운 차원의 확장을 선보였다. 《복선(伏線)을 넘어서 II》 국제갤러리 전시 전경 2023

오른쪽 강서경의 초기 대표작부터 신작까지 총 13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 대규모 전시. 전통가곡 이수대엽의 〈버들은〉을 참조해, 실을 짜듯 버드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꾀꼬리의 움직임과 소리를 풍경의 직조로 읽어내던 선인의 비유를 가져와 작품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버들북 꾀꼬리》 리움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제공: 강서경 스튜디오, 리움미술관

2008년부터 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매해 상/하반기로 나눠 주요 전시를 결산해왔다. 미술관계의 큰 전시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역시 청장년 작가들의 문제적 개인전이나, 청장년 큐레이터의 진보적 기획전을 기록하고 그 성좌(星座)를 통해 변화의 동학을 분석, 제시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그러나, 2023년 상반기엔 결산 결과를 차마 발표 할 수가 없었다. 청장년 세대에서 이렇다 할 개인전과 미술관계 바깥의 기획전을 찾아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주요 전시는 거의 모두(안정적으로 예산을 운용하는) 대형 미술관의 제도적 움직임을 통해 이뤄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선, 1980년대생 주요 작가들의 급속한 기성화와 신생공간/콜렉티브 운동의 유효성 만료를 원인으로 지목할수 있다. 왜 아무도 신생공간/ 콜렉티브의 시대를 결산하고 새로운 목표를 도출해보자고 이야기하지 않는가?신생공간/ 콜렉티브의 수혜자인 몇몇 대표작가들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어떤 비전을 제시했는가? 이쯤에서 만족해버린다면, 2010년대의 신생공간/콜렉티브 운동은 기득권 쟁탈을 위한 세대 투쟁으로 기록되고 말것이다.

또한 1990년대생 작가들이 1980년대생의 활동 방식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며 인스타그램 친화적 전시를 반복한 것이 현재의 위기 상황을 야기하고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생 작가들은 왜 이렇다 할 혁신을 제시하지 못할까? 1980년대생 미술인들은 잠시 불공정한 기성세대 탓을 할 수 있었지만, 1990년대생들에겐 2010년대 이후 개선된 여러 기회의 시공이 열려 있으니 그런 핑계를 대기 어렵다. 작업량은 극히 적은데 지원금을 받아 유사한 개인전을 자주 여는 모습을 보면, 전시를 인스타그램용 이벤트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미술관의 대규모 예산집행 전시들과 주요 상업갤러리의 원로작가 개인전 등을 제외하면, 2023년의 한국 현대미술계는 거의 최악의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1997년 12월의 외환위기 직후였던 1998년도 세계금융위기의 해였던 2008년이나 그 직후였던 2009년도 이 지경은 아니었다. 젊은이들보다 일부 나이 먹은 미술가들이 더 치열하게 일하고 더 진보적인 예술을 펼치는 상황은 극히 우려스럽다. 한데,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일본의 현대미술계가 바로 이렇게 서서히 침몰해갔기 때문이다. 한국미술계는 그런 퇴행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2023년을 빛낸 전시들
올해 최대 화제의 전시는 이수균 큐레이터가 기획한 <그너머_원계홍탄생 100주년 기념전> (성곡미술관 1관, 3.16~5.21)이었다. 원계홍 (1923~1980) 회고전은 서울시립미술관의 <에드워드호퍼: 길 위에서>전과 비교되며 예외적 호응을 이끌어냈다.호퍼는신화와 명성에 비하면 실견했을 때 실망스럽기 마련인데, 원계홍은 유사한 정조를 다툼에도 비교해보면 은근히 더 멋졌던 것. 1972년에 현대화랑에서 개막한 이중섭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의 <현대독일미술전>과 기간이 겹치며 한층 더 뜨거운 열풍을 일으켰던 것과 유사한 대조 현상이었다.

반면, 올해 최대 화제의 미술가는 실험미술가 성능경(1944~)이었다. 전시 《아무것도 아닌듯… 성능경의 예술 행각> (백아트서울, 2.22~4.30)전이나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갤러리현대 본관, 8.23~ 10.8)전이 특별했다기보다는 과장이나 허세가 없는 그의 존재가 한국실험미술의 국제적 재조명 흐름 속에서 유달리 빛을 발했다.

하지만 내가 최고의 전시로 꼽는 것은, 2세대 추상조각가 김윤신(1935~)의 소회고전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1, 2층과 정원, 2.28~5.7)다. 짧은 준비 기간에도 불구하고 방소연 큐레이터는 열정적으로 전시를 준비해 거장의 작업세계에 마땅한 빛을 비웠다. 현재 김윤신과 김란 김윤신미술관장은아르헨티나로 돌아가 1,000여 점에 이르는 작업들을 정리하는 과정에 있다.

여성미술가의 재조명 차원에선, 송예진과 장연우가 큐레이팅한《정강자: 꿈이여 환상이여 도전이여》(아라리오뮤지엄 인스페이스, 3.30~9.3)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정강자(1942~2017)의 존재를 온전하게 실감할 수 있는 참으로 감사한 기회였다.

장년 작가 가운데 특기할만한 전개를 이뤄낸 경우론, 홍승혜 (1959)의 개인전 <복선(伏線)을 넘어서 II(국제갤러리 K1, K3, 2.9~3.19)를 이야기할수 있겠다. 서울과학기술대 대학원의 조형예술학과를 서울대와 홍익대, 한예종 미술원보다 더 각광 받는 곳으로 일궈낸 그는 2021년 교수직에서 은퇴하더니, 작업세계에 일대 변화를 시도했다. 25년간 지속해온 픽셀 추상의 확장된 세계를 다시 작업 초기의 문법으로 치환시켜놓은 것. 도돌이표로 앞뒤가 연결된 세계는 장차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중견작가 가운데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준 인물은 박미나(1973~)와 강서경(1977~)이었다. 암투병 중인 강서경은 리움미술관에서 대규모 미드 커리어 서베이 《강서경: 버들 북꾀꼬리》(9.7~12.31)를 열며 전통적 매체에서 벗어난포스트-한국화의 한극단을 제시했고, 박미나는 개인전 <아홉 개의 색, 아홉 개의 가구》(아뜰리에 에르메스, 7.28~10.8)와 <하우스》(원앤제이갤러리, 9.1~10.22)를 연이어 개최하며 작업세계의 심화, 확장을 입증했다.

청년작가들의 전시로는 《N ARTIST 2023 더 느리게 춤추라》(경남도립미술관, 3.17~8.27)이 으뜸이었다. 청년작가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네 작가 모두 크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동박부식 등 매체 실험을 통해 새로운 한국화의 가능성을 개척한 조현수와 북한에서 받은 미술교육을 바탕으로 타자들의 목소리를 포용하는 메타 회화의 제3지대를 창조하고 있는 이혁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한편, 청년기획자의 기획전으론 <조각여정: 오늘이 있기까지》 (WESS, 2022.6.10~7.9)를꼭 언급해야 하겠다. 큐레이터 노해나와 청년 작가들이 여성 조각가 김정숙과 윤영자 등을 개척자로 다시 호명해내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2023년을 통틀어 가장 야심만만한 큐레이터십은 《아카이브 리듬: 이건용, 방정아, 안규철(경남도립미술관 1, 2층,7.21~10.29)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영 학예사는 이건용, 방정아, 안규철의 작업세계에서 모종의 공통된 뿌리(모더니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식)를 발견하고, 그를 입증하기 위해 작가들의 아카이브를 비평적 렌즈로 삼아 각 작가의 작업들이 전개돼 온 과정을 역추적했다. 얼핏보면, 개인전 세 개가 각각 펼쳐진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세 명의 작가를 관통하는 성장궤적을 (재)해석해냄으로써 자신이 제시한 가설을 입증해내는 큐레이터 이미영의 연구 개인전이었다.

그러나 2023년을 빛낸 보석 같은 전시라면 근대 문예인 위창 오세창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서화실 202-4-5호, 9.1~12.25)을 제외할 수 없겠다. 한국근현대미술의 정신적 뿌리를 제시한 오세창의 전시를 나는 열심히 추천하고 다녔지만, 이상할 정도로 현대미술 전공자들은 무관심한 모습이었다.

《N ARTIST》는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격년제 전시다. 2023년의 전시는 각자의 자리에서 ‘느리게 춤추고 있는’ 청년 작가 김예림, 이혁, 정현준, 조현수, 한혜림이 기록하는 세상과 그 안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소개했다. 한혜림〈파도라도〉 5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분 20초 2023《N ARTIST 2023: 더 느리게 춤추라》 경남도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제공: 경남도립미술관

유족의 소장품으로 꾸린 전시. 중기작〈껍질〉(1969)부터 후기작 〈비상〉(1986)까지 총 9점의 작품을 소개했으며,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불꽃〉(1970년대 말)을 최초로 전시했다. 《조각가 김정숙: 나의 어머니, 나의 애장품》권진규 아틀리에 전시 전경 2019 제공: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23년을 주도한 대규모 대예산 기관 전시들
2023년을 규정한 전시는 역시다 대규모 대예산기관 전시였다. 《무라카미 다카시 무라카미좀비>(부산시립미술관 본관2층 대전시실 및 이우환공간 1층, 1.26~3.12)전이 부산에서 화제몰이를 하는 사이, 서울에선 마우리치오 카텔란 개인전《우리(WE)>(리움미술관, 1.31~7.16)가 예약불가의 인기몰이를 이어갔다.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君子志向)> (리움미술관, 2.28~5.28)이 대화제를 모았고, <안도 타다오-청춘>(뮤지엄산, 4.1~7.30)도크게 호평을 받았으며, <한점 하늘_김환기》(호암미술관, 5.18~9.10)는 우아하고 품위 있게 감동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1년 반 간의 리노베이션 이후 재개관한 호암미술관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호암미술관처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장소마저 동시대미술공간처럼 바꾼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없지 않았다.)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오직 젊은이들 한국의 실험미술, 1960-70년대)》(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9.1~24.1.7)로 이어진, 국립현대미술관과구겐하임 미술관의 공동기획전 《한국실험미술 1960-197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5.26~7.16)은 기대와 달리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큐레이팅으로 빈축을 샀다. 실험미술의 리더 김구림 회고전 《김구림>(국립현대미술관 서울, 8.25~2024.2.12)에서 작가는 미술관과 충돌하며 여러 문제를 노출하기도 했다.

<페터 바이벨: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3~5.14)과《게임사회》(국립현대미술관 서울5.12~9.10)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뉴미디어아트 편애를 잘 보여줬지만, 비평적 경험과 거리가 먼 어수선한 전시장의 성격상, 온전한 관람- 경험이나 플레이-경험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관의 이런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체면을 세운 전시는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국립현대 미술관 덕수궁,9.14~2024.2.12)과 <올해의 작가상 2023》(10.20-2024.3.31) 전이었다. 올해의 작가상전시는 연이어 실패작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탓인지, 개막식이 한산한 편이었다. 하지만 전시는 오랜만에 흥미진진한 긴장감을 띠었고, 네 작가 모두 최선을 다한 모습이었다. 한데, 한국 사회의 남녀노소 누구나 사랑하는장욱진을 지금까지의 방식 그대로 봐도 괜찮은 걸까? 이제는 조금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장욱진의 예술을 뭐라고 소개해야 좋을까? 미래사회를 염두에 둔 포석이 필요한 단계 아닐까?

미술관 전시 가운데 또 특기할만한 경우론 대구미술관의 2023 어미홀프로젝트 《칼 안드레》(9.26~12.31)와 제23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자전《윤석남》(9.26~ 12.31)을 논외로 하기 어렵다. 세 번째 부인이자 페미니스트 작가였던 아나 멘디에타를 창밖으로 떨어뜨려 사망케 한 혐의를 벗지 못한 미니멀리즘조각가칼 안드레와 한국 페미니스트 미술의 상징인 화가/조각가 윤석남의 전시가 같은 시기, 같은 미술관에서 맞물린 것은 슬픈일이었다. 칼 안드레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이라는데, 어떤 쪽으로도 논쟁이 활성화되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갑갑함을 느꼈다. 한국미술계,이래도 되는걸까?

추신) 2021년은 추상조각의 개척자 김정숙의 작고 30주기였지만, 아무런 전시가 열리지 못했다. 2019년 권진규 아틀리에에서 조각가 김정숙 나의 어머니, 나의 애장품>전이 열린 이후 조용한 편이다. 이제 다시 새로운 각도에서 회고전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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