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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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보 중 Kim Bo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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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7일부터 11월 19일까지 갤러리 인디프레스 _ 서울에서 작가 김보중의 21번째 개인전이〈흐르는 거주지 – 길〉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이 전시엔 ‘숲’을 명상처로 삼아, 숲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세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세계 존재로서의 ‘나’에 천착해 온 최근작이 선보였다. 그는 숲으로부터 나와, 흐르는 ‘길’에 때때로 임시 거처를 마련하면서 외로운 순례의 길을 걷는 화가다. 40년 넘게 ‘나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회화적 어법으로 형상화해온 그는 또다시 새로운 차원의 회화세계로 이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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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의 세계를 존재의 세계로 근접시키는 방식

김보중은 〈성남의 얼굴 – 성남을 걷다〉(2017. 12.8~1.28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기획전시실)에 출품된 작품 <그냥 길>(2017, 15호×54점)에 ‘108걸음 중 54걸음’이라고 제목 붙인 자신의 에세이를 덧붙였다. ‘108걸음 중 54걸음’을 읽고 <그냥 길 2>(2015, 15호×12점)까지 들여다보면 ‘화가로서의 김보중’과 ‘김보중의 그림들’은 ‘예술’을 심도 있는 공동토대 또는 공유지로 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로 ‘그의 그림들’은 예술로 향하는 발걸음을 떼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예술’은 그의 그림들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어 이들(그림들과 예술)의 관계가 순환 고리를 통해 서로에게 종속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예술’은 세계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경험과 의미를 상기시키고 신체를 확장시키는 미학적 공동지대로 비친다. 또는 예술은 예술가와 예술가가 아닌 사람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계-개방의 잠재력을 지닌 공동의 공간, 이해 가능한 공유 지평을 지니고 사람들이 다가설 수 있고 사물과 서로를 의미 있게 하는 공통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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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길〉 캔버스에 유채 53×65cm(37개) 2017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기획전시실 〈성남의 얼굴 – 성남을 걷다〉 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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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길 1, 2> 이전에 그린 <숲의 순례자> 시리즈(1998, 2007, 2010, 2011)와 <숲에서 질주>(2007), 그리고 <숲-거주지>(2000)에서 ‘숲’은 ‘나와 자기’의 물음에 얽매어 있던 김보중에게 자신의 동일성을 보증해주는 존재의 장이었다. 김보중이 거주하는 숲 – 세계는 개방되지 않았고, 때로는 맥락이 닿지 않는 독립적 장이었으며, 그림은 종종 표면적인 현상에 머물렀다. 따라서 외부의 타자인 숲에 기대어 ’나‘의 기억과 신체에 갱신의 흔적을 남기려던 작가의 시도는 충족될 수 없었다.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작가는 사태에 천착하면서, 숲에서 자기를 보존하고 보류하며 안전하게 유지한다.

반면, <그냥 길 1, 2>에서는 존재와 세계가 어떤 가치와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맹목성과 무의미는 어찌되었건 필요한 것으로 자리 잡는다.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또 언제 어디쯤에서 그칠 지를 모르는 채, “한 걸음 한 걸음 매 순간의 전진을 담은 오체투지”의 “무모한 고행”(108걸음 중 54걸음, 김보중)이 이루어진다. ‘고행’은 삶과 생성을 경험하는 존재의 가장 은밀한 본질이면서,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김보중의 수행적 화답이라고 하겠다. 숲-그림을 지나 길 – 그림에 이르러 김보중에게 ‘예술’은 차이 나는 생성의 세계를 존재의 세계로 근접시키는 방식의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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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갤러리 인디프레스_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흐르는 거주지 – 길〉전시광경. 〈그냥 길2〉(왼쪽) 종이에 목탄 15호×12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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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풍경과 도덕적 감각

김보중의 그림들은 재현의 진리나 모방의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일치의 모델이 되어 외관을 갖추지 않는다. 그림들로 향하는 예술도 세계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경험과 의미들을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화가는 예술 작품에 표현되거나 반영되는 세계 속에, 또는 예술이 중재하는 실재 속에 거주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들은 예술 스스로 진리와 권위의 물음을 떠남으로써 파편화되고 부정된 가능성을 얻게 된 대부분의 현대예술과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김보중은 예술의 진리와 권위에 대해 묻는다는 점이 남다르다. 그는 과학과 본능 사이에 위치하면서 끊임없이 갱신되는 진리를 겨냥하는 지적 활동, 즉 사회적 판단력, 또는 정신의 바탕인 인간의 양식을 되돌아본다. 공정한 정신에 기초를 두고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엄정한 정의를 겨냥하고 점점 전문화되고 복잡해져서 서로 협력하는 것도 어려워진 오늘날, 작가는 정의하기 어려운 유연한 생활의 지혜로 지켜보면서 결코 큰 목소리를 내지는 않더라도 그 본래의 힘을 끊임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가 그린 대부분의 무심풍경(<붉은 언덕, 2017>, <건업리 붉은 길, 2016>, <영월 – 마차리, 2015>, <전남 순천, 2015>)에는 생활 속에서 훈련된 지혜가 작동하고 있다. ‘사색하는 사람으로 행동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사색하’(베르그송)는 작가에게서 세계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예술작품을 미적 탐닉을 위한 대상으로 본다든지, 작품의 형식적인 측면을 평가하거나 분석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과잉과 편집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그림에 녹아있는 도덕적 감각은 심신관계의 작용 원리로도 파악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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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왼쪽 〈숲에서 질주〉 캔버스에 유채 162×130cm 2007
위 오른쪽 〈구로동 – 강남아파트〉 캔버스에 유채 156×156cm 2010
아래 〈오래된 강〉(가운데) 캔버스에 유채 162×130cm 1997
2016년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린 〈생생화화2016 산책자의 시선〉 전시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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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중이 2016년에 그린 그림들 – <그냥 땅> 제하에 다양한 부제가 달린 여러 작품과 <오래된 강>을 포함하는데 대부분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졌다 – 은 이전 시기의 작업 대부분이 시각 우위의 통합 형태를 취하고 있는 반면 이 시기의 그림들에서는 촉각이 시각보다 우위에 있다. 많은 사람이 시각과 촉각의 협력 작업을 단지 시각의 기능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실제로 여러 감각이 통합되는 것은 촉각 같은 피부감각과 근육감각을 포함하는 운동감각으로 이루어지는 체성감각에 의해서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필자의 착각이 아니라면 김보중의 회화는 최근 들어 촉각( = 체성감각, 공통감각)의 회복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오래된 강>(2016, 캔버스에 유채, 240호)은 울창한 숲 지대가 기후변화에 따라 건조한 사막으로 변한 화석지대를 공간적이면서 시간적인 복합현상으로 느끼게 한다. 작가는 <오래된 강>에서 체성감각적 통합을 전제로 시각적 통합을 시도함으로써 현실의 중층성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또한 시각의 독주를 막고 감각을 다시 조직하려는 노력은 <그냥 땅 – 핑크>(2014, 캔버스에 유채, 60호)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공통감각에 기초를 둔 상상력과 대응하는 이미지가 다의성을 지닌 언어로 정당하게 회복되어 구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는 시각과 관련되기보다는 체성감각과 관계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회화는 물론이고 영상매체의 확대에 따라 ‘이미지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언어와 관련하여 제기되었다. 이미지, 이미지 = 개념, 개념의 다양한 단계를 거쳐 온 언어는 개념 단계 이후 이미지와 접촉함으로써 새로운 흐름을 위해 새로운 힘을 얻고 있다. ‘개념은 인간만의 문제이지만, 이미지는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서 이미지가 개념과는 달리 멀리 있는 것, 잠재적인 것, 과거와 부재의 세계를 현전케 한다는 생각도 수긍되고 있다. 김보중의 최근 작업에서는 언어가 지닌 다의성과 이미지적 성격을 적극적으로 다시 보려는 노력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숲’을 나와 ‘길’을 걷는 작가는 분할된 예술영역이나 전문 용어에 갇히지 않고 일상적 언어가 감추고 있는 활력을 이미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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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무심 – 분당야경〉 장지에 아크릴 74×210c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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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에로스

운명을 사랑하고 존재하는 것의 존재 자체를 원하는 것이 의지이다. 혼돈의 세계를 마다하지 않고 ‘미래의 영원한 봉인’(니체)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이 의지와 사랑을 통해 스스로의 본질을 인식하는 인간, 반복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에 스스로의 존재를 일치시키는 인간 안에서 허무주의의 극복은 이루어지고 삶에 대한 긍정으로 바뀌어간다. 예술을 “인간의 가장 고귀한 과제, 진정한 형이상학적 활동”(니체)으로 이해하는 것은 삶을 꾸며나가는 의지를 예술의 원천적인 힘으로 보기 때문이다. <길 위의 에로스>(2017, 캔버스에 유채, 120호)는 김보중이 예술이 자연이 되고, 자연이 예술이 되는 지점을 자신의 운명으로 그려낸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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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보 중
1953년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1981)하고,
California State University, Chico(M.A. 과정수료 1989)와
University Of California , Irvine(M.F.A. 1991)을 졸업했다. 1989년
한강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21회 개인전을 열었다.
경기창작센터(2011), 금천예술공장(2012), 토지문화재단(2013)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참여했고, 현재 경기도 용인에서 작업하고 있다.

글:임정희 | 연세대 겸임교수, 미학·미술평론 / 사진:박홍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