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 THEME 허영만 – 창작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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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만의 <오! 한강>(1988, 왼쪽)과 허영만의 원작 <닭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온다>를 오마주한 이동기의 <95_크래쉬>(1995, 오른쪽)

모든 것이 만화의 소재다

만화가 허영만의 40년 만화 인생을 조명한 전시 <허영만 – 창작의 비밀>이 4월 29일부터 7월 19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다. 허영만은 15만 장의 원화와 5,000장이 넘는 드로잉을 그렸으며 <각시탈>, <날아라 슈퍼보드>, <비트>, <타짜>, <식객> 등 그의 작품 대다수가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로 제작돼 한국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입지를 굳혔다. 이번 전시에서 오마주 작업을 선보인 작가 이동기와의 대담을 통해 만화와 미술의 경계를 떠나 문화의 보편적인 지점을 주목해본다.

이동기(이하 이) 어린 시절 이야기로 대담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여수 출신이시죠.
허영만(이하 허) 어릴 때 매일 바다만 보고 살았죠. 특별히 다른 애들과 다르게 논 기억은 없고, 장난감은 직접 만들었어요. 예를 들어 칼을 만들면 목재소에 가서 나무를 잘라다가 못질해서 칼집까지 제대로 만들었죠. 나무가 워낙 약해서 잘 부러졌지만 만드는 게 재미였죠.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들이 들고 다니는 권총모양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팽이치기, 연날리기 등 남들 노는 거 다했어요. 초등학교 때 만화 <코주부삼국지>에 나오는 그림을 트레싱지로 열심히 따라 그렸던 게 생각나네요.
김용환 선생의 작품이죠.
네. 지금은 돌아가셨죠. 중학교 때 한 친구가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여수로 왔는데 부산에 있는 동안 만화가에게 그림 수업을 제대로 받고 온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만화 그릴 때 먹을 직접 갈아서 그렸어요. 그 친구랑 가까이 지내면서 만화를 많이 그렸죠.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2학년 때 아버지께서 사업을 실패하시는 바람에 대학진학이 어려워졌어요. 그날부터 입시공부는 그만두고 만화만 그렸죠. 미대에 가서 화가가 되려고 했는데 좌절되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만화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1966년 1월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 다음 날 서울로 올라와서 박문윤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선생의 작품 활동이 뜸해지자 화실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죠. 서울 온 지 6개월 되었을 때인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어요. 그래도 선생이 내 실력을 인정해주셔서 한동안 선생과 하숙을 하며 둘이서 팀으로 일했는데, 하숙비도 제대로 못 버니까 저를 순정만화로 유명한 엄희자 선생에게 보내셨어요. 순정만화는 그리기 싫었는데 꽃도 그리고 여자 눈도 크고 반짝반짝 빛나게 그렸죠. 그렇게 8개월이 지났을 때 이향원 선생께서 자기 밑에서 일하라고 연락을 하셨어요. 그 분의 그림체는 마침 내가 원하는 스타일과 비슷했기 때문에 기꺼이 그쪽으로 옮겼죠. 자고로 좋아하는 그림 그리는 선생 밑으로 가야지 밥 먹여준다고 아무한테나 가면 안 돼요.
저도 어릴 때 이향원 선생의 만화를 많이 봤는데 동물이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내가 그린 것도 많지요. 하루는 선생이 나보고 ‘훨씬 잘 그릴 수 있는데 왜 이것밖에 못 그리느냐. 네 마음대로 그려봐라’고 하더군요. 이후 내가 이향원 선생 작품의 주요 부분을 맡아서 그리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는 월급을 타면 명동에 있는 외국서적 파는 데 가서 일본 만화, 미국 마블 코믹스 등을 사서 열심히 연구했죠.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미국에서 출간된 전쟁 만화 시리즈가 있었는데 정말 뛰어난 작품이었어요.
스타일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미국이나 일본 만화 영향을 많이 받으셨나요?
일본 만화 영향은 많이 받았어요. 미국 만화는 그림 위주라서 일본 만화처럼 세심하게 연출하는 만화가 아니에요. 일본 만화는 이동기 선생도 <아토마우스>를 하셔서 잘 아시겠지만 데즈카 오사무, 지바 데쓰야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당시 국내에서는 지바 데쓰야의 <하리스의 회오리바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내가 작업을 하던 하숙집 옆방에 그 작품을 그대로 베껴서 주간지에 싣는 팀이 있었어요.
옛날에는 일본 만화를 그대로 베낀 만화가 많았죠.
네. 그랬어요. 옆방에 있다 보니 서로 왕래가 많았고, 덕분에 일본 만화를 많이 보게 되었죠. 이향원 선생과 작업한지 8년째 되는 해에 독립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만화판의 구조가 이상했어요. 1960년대부터 신촌 지역의 만화 출판사 7곳을 통합한 합동문화사가 전국의 대본소와 전속계약을 맺고 타 출판사의 책을 받지 못하게 해 만화시장을 독점했죠. 그에 대한 대항으로 1970년대 초반 한국일보사가 소년한국도서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합동문화사의 독점시장에 진출했는데, 결과적으로 서로 연합해 만화시장을 반으로 나눠 독점한 거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적인 시기인 것 같지만, 너무 안정적이다 보니 만화가들이 굳이 공들여 만화를 그릴 필요 없었죠. 대강 그려서 정해진 권수만 채워주면 규정된 부수가 유통되니까요. 그렇다 보니 만화가 재미없는 시절이었어요. 만화시장이 독점되면서 신인들이 등단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죠. 단 하나 유일하게 소년한국도서에서 주최하는 만화공모전이라는 게 있었죠. 저는 1974년 2회 수상자로 선정돼 만화가로 공식 데뷔를 했습니다. 데뷔 3개월 만에 <각시탈>을 발표했는데 그 작품이 큰 반응을 일으켜 인기작가가 되었어요. 하지만 원고료는 전혀 오르질 않아 막막하더라고요. 그런데 <각시탈>의 인기로 당시 <무쇠탈> <색시탈> 등의 아류작들이 많이 나왔어요.(웃음) 한창 <각시탈>을 연재하고 있는데 하루는 도서잡지윤리위원회에서 불러서 갔더니 <각시탈> 때문에 만화시장에 탈 투성이라면서 인제 그만 그리라고 하더라고요. 황당했죠. 하지만 당시에는 위원회의 심의필을 받아야 시중에 유통할 수 있었는데 심의를 내 주지 않으니 <각시탈>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 결혼해서 애가 둘이 있었어요. 당시 주변에 만화 잘 그리는 동료들은 전부 애니메이션 쪽으로 전향했죠.
그때가 우리나라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작업을 주로 할 때였나요?
인건비가 싸니까 외국에서 일거리를 마구 들여왔죠. 나도 애니메이션 회사를 한 10개월간 다녔어요. 아침에는 내 만화를 그리고 점심 먹고 출근해 애니메이션 원화를 그렸죠. 주중에는 하루를 반으로 쪼개어 일하고 토요일, 일요일은 만화만 그렸어요.
쉬는 날도 없이 일주일 내내 일을 하셨네요.
요즘도 쉬는 날은 없어요. 근데 애니메이션 일을 하면서 제일 고민이었던 것이 내가 보기에는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그림을 그대로 그려야 하는 거에요. 그보다 잘 그려도 안 되고 못 그려도 안 되고,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통일된 그림이 나와야 하는 거죠. 어렵게 애니메이션을 병행하고 있는데, 1979년에 일본 만화 <캔디 캔디>가 국내에 불법 복제돼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만화가 인기가 있다 보니 여러 출판사에서 해적판을 동시에 마구잡이로 출간했어요. 그러다 <캔디 캔디> 한 작품만으로는 수익이 안 나니까 출판사들이 한국 만화가들에게 눈을 돌리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인기 있었던 작품을 재판(再版)하고 복간하게 된거죠. 이때부터 새로운 출판사도 생기기 시작했어요.
<캔디 캔디>의 인기를 계기로 정체되었던 한국 만화 출판시장이 순식간에 확장된 거군요.
그렇죠. 나도 더 이상 애니메이션 일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이후 만화잡지 《어깨동무》 편집장의 요청으로 연재를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았죠. 연재를 하면서 동료 작가인 김영하, 고유성, 김철호 등을 잡지사에 소개했고, 함께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어깨동무》의 부록으로 연재되었던 <태양을 향해 달려라>를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어린이 야구만화인데 세계선수권대회 나가서 우승하는 내용으로 끝이 났죠.
부록이 32페이지의 단행본 형식이었으니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죠. 지금도 <태양을 향해 달려라>를 얘기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희 또래 사이에서 빅히트 작품이었습니다.
선생님 작품을 보면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서 연출의 리듬감에 독특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연출방법에 1~5단계의 강도가 있다면 5단계는 절대 쓰지 말라고 말합니다. 5단계를 한번 써 버리면 그 다음을 이어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5단계가 계속되면 그것은 액센트가 아니죠. 예를 들어 어머니가 죽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찢어지게 절규하지 않고 ‘어머니가 죽었다’ 한 줄 쓰고 아무 관계없는 배경을 그리고 그냥 덤덤하게 넘어가는 거죠. 주인공은 슬프지만, 독자들은 안 슬프거든요. 슬픔은 강요되지도 않고 강요해서도 안 돼요. 그게 절제이고 자제인 거죠. 그렇지 않으면 독자들의 몫이 없어지죠.
5~6년 전에 소설가 이윤기 선생과 연출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은 작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면 되지 독자를 왜 이해시키려고 하는지, 독자의 몫을 왜 남겨두는지 묻더군요. 나는 그 의견에 반대해요. 낚시를 할 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물고기를 꼬여야 합니다. 낚싯바늘 따로 있고 물고기 따로 있으면 낚시가 되나요. 최소한 근접 거리에 가서 당겨야지 독자들이 따라오죠. 난 이 거리를 어느 정도로 두느냐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동안 수많은 연출을 해왔고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방식을 반복하고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리면서 이전에 그린 느낌이 들면 소름이 끼쳐요. 반복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작품의 리듬을 따라가 보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영화를 많이 보시고 참고 하시는지요.
영화 많이 보죠. 연출할 때 영화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이미지자료1]각시탈초판1권

<각시탈>(1974) 초판1권 속표지

[이미지자료2] 무당거미

<무당거미>(1980) 원화

새로운 환경에 맞춰 진화하는 허영만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품이 <쇠퉁소> 인데요. 완성도가 굉장히 높은 작품이었어요.
<쇠퉁소>는 사실은 <각시탈>을 못 그리게 해서 나온 작품이었어요. <각시탈>과 도입부도 비슷하고 상황 설정도 비슷합니다. <각시탈>을 몇 년 뒤에 다시 그린 것이나 마찬가지죠.
<쇠퉁소>의 한 에피소드에서 늑대를 묘사한 장면이 너무 뛰어나 감탄하며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미술을 했지만 동물 그리기는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서부만화를 보고 그림 연습을 많이 했어요. 총도 많이 그렸지만, 서부만화에는 말이 꼭 등장하죠. 그때 말 그리기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 토니 장이라 불리던 장경국 선생이 말을 굉장히 잘 그렸는데 그분의 그림을 밤새 베껴 그리는 날도 많았죠. 일단 네발 달린 짐승을 그릴 줄 알면 다리 부위만 조절하면 다 그릴 수 있어요.
같이 활동하셨던 다른 만화가들과 지금도 교류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대본소 만화를 할 때는 자주 만났는데 신문, 잡지에 연재하면서 만날 시간이 없어졌어요. 그렇다 보니 지금은 유대가 거의 없어요. 노는 방법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나는 대인관계 폭이 굉장히 넓은 편인데 지금은 등산, 헬스, 골프, 요트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죠. 이들이 언젠가는 꼭 도움을 줘요. 야구만화인 <태양을 향해 달려라>도 그렇게 나왔어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만화를 둘러싼 환경이 계속 변해왔는데요. 최근에는 웹툰이 활성화되었고요.
많이 변했죠. 만화 말고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뀐 것은 어마어마한 변화죠.
지금 전시되고 있는 영상을 보면 종이에 펜으로 그리지 않고 태블릿으로 그리시던데.
여전히 펜에 대한 향수가 있어요. 컴퓨터가 대세니까 태블릿으로 그리지만 나는 예쁘게 잘 안 그려지더라고요. 지금은 몇 개의 포털사이트에서 만화시장을 장악해 작가들에게는 사업해서 원고료를 나눠주고 독자에게 무료로 공개하는 구도죠. 그것이 옳은 것인지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웹툰으로 괄목할 만한 히트작이 나온 게 윤태호의 <미생> 하나뿐이에요. 그래도 저변은 있으니까 윤태호 같은 만화가가 계속 나와줘야 소위 만화 붐이 일어날 수 있어요. 앞으로 그런 작가들이 나올 수 있도록 시장을 만드는 것이 포털사이트, 만화가 등이 해야 할 몫이죠.
요즘에는 만화가 드라마,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는데요. 선생님의 작품도 여러 편이 영화화됐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원작자로서 드라마나 영화가 잘되길 바라죠. 영화 <식객>도 제작자가 처음에는 10편까지 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2편으로 끝났어요. 그런 면은 아쉬움이 있죠.
작품 제작에도 긴밀하게 관여하시나요.
관여 안 해요. 딸 시집보내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일단 시집가면 그집 분위기에 맞춰서 살아야지 간섭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이번 전시를 보니 여행하시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많더라고요. 작가들이 여행을 하면 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던데 선생님은 어떠신지요. 여행하시면서 생각이 바뀐 적도 있었나요.
몇 년 전 출판사에서 만화 <꼴>을 그려보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관상은 미신에 가까운 거라서 명확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거절했죠. 그런데 에베레스트 등반을 하다가 베이스캠프에서 갑자기 그 만화가 생각났어요. 재미있는 소재라면 뭐든지 해야지 미신이냐 아니냐가 무슨 상관있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날 위성전화로 출판사에 바로 전화를 했죠.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관상학 전문가인 신기원 선생을 찾아갔어요. 선생에게 “얼마나 공부를 해야 사람 얼굴이 보입니까”하고 물었더니 3년이 걸린다고 하는 거예요. 만화 그리는 데 3년 투자하는 건 무리인 것 같아 뭉그적거리니까 선생이 하시는 말씀이 “공부를 하든 안 하든 3년은 간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그럼 해야겠다는 생각에 매주 금요일 7시부터 10시까지 3년 반을 공부했죠.
한 작업을 준비하는 데 3년 반을 투자하시다니 대단하시네요.
공부한지 2년됐을 때 연재하기 시작했어요. 데이터는 계속 쌓이니까요. 독자를 좀 더 내 곁에 끌어들이려면 내가 독자에게 뭔가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할 수밖에 없어요.
조금 전에는 연출하는 단계에 관해 얘기하셨는데, 독자와의 소통은 만화나 순수미술 등 장르 구분 없이 보편적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 같네요. 그동안 하신 작품 중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것을 꼽는지요.
출세작인 <각시탈>과 만화로 풀어내기 힘들었던 이데올로기 만화 <오! 한강>, 그리고 내가 제일 재미있게 그린 작품은 <망치>예요. 작가 스스로가 재미없으면 독자는 금방 눈치채요. 그리고 제일 열심히 작업한 <타짜>, <식객>. 워낙 작업을 많이 하다 보니 좋아하는 작품이 몇 개 됩니다.
그럼 아쉬움이 남는 작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들깨 이빨>과 <무당거미>를 제대로 끝맺지 못해 아쉬움이 큽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계획하시는 작품은 어떤 것이 있나요.
지금 《중앙일보》에 <커피 한잔 할까요>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요즘 젊은 사람들이 신문을 안 본다는 겁니다. 10여 년 전 <식객>을 연재할 때와 다르게 인지도가 영 떨어지네요.
30대가 종이신문을 거의 안 보죠.
문제는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다 보면 자기가 선호하는 것만 뽑아서 보니까 다른 분야는 전혀 모르게 되고 말죠. 문화 다양성이 떨어지고 있어요. 일단 연재를 시작했으니 열심히 마무리지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음식 만화를 했으니 앞으로는 돈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돈 번 사람과 재산을 잃은 사람얘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3년 전부터 만화일기를 쓰고 있는데 계속할 거예요.
훗날 만화일기가 선생님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방대한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앤디 워홀도 40대 후반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병원에 실려가기 직전까지 쓴 일기가 책으로 묶였는데 전화번호부 두께 정도 됩니다. 그 작가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지요.
만화일기는 고은 선생의 《바람의 사상》이라는 책을 보고 시작했어요. 3년 동안 22권 그렸으니 앞으로 30년 그리면 200권 나오겠네요.

진행 정리・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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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구단>(1985) 설치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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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발표한 허영만 만화를 총망라한 아카이브 설치광경. 이번 전시 총감독을 맡은 작가 한원석은 허영만의 ‘손’에서 영감을 받은 설치작품(왼쪽 아래)으로 전시장 도입부를 구성했다.

허 영 만 Huh Youngman
(본명 : 허형만) 1947년 출생했다. 1974년 소년한국도서 제2회 신인만화공모에서 <집을 찾아서>로 데뷔했다. <각시탈>(1974), <오! 한강>(1988), <날아라슈퍼보드>(1989), <비트>(1994), <타짜>(1999), <식객>(2003), <꼴>(2008)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현재 《중앙일보》에 <커피 한잔 할까요?>를 연재하고 있다.

이 동 기 Lee Dongi
1967년 출생했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3년 온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일민미술관, 갤러리2, 현대갤러리 등에서 2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1994년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결합한 ‘아토마우스’를 처음 발표했으며 이후 대중문화 속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