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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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균 : In the midst of shiny dust

9.14~12.30 우민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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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균 〈For the Palm Readers〉(사진 왼쪽) 캔버스에 시퀸 198×198cm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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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균이 청주의 우민아트센터에서 회고전 성격의 개인전을 열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지명도를 가진 중견 작가가 청주 시민들에게 새로운 시각 경험을 제공하고, 크게는 미술을 둘러싼 서울과 지방의 차이, 중앙과 지역의 차별을 줄인다는 견지에서 이번 전시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작가 개인적으로도 창작의 추동력을 부여 받으며 미래적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유익한 전시라고 여겨진다. 전시회란 청년 작가 뿐 아니라 중견, 원로 작가에게도 발전과 변화를 모색하는 자기검증의 무대이자 재창조와 재충전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필자에게도 오랜만에 대하는 노상균의 이번 전시가 작가의 생각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노상균의 작품을 알 만큼 안다고 자처하는 터였지만 이번에는 그의 작품들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며, “태도가 형식이 될 때”라는 헤럴드 제만의 1969년 전시 제목이자 이제는 전설이 된 명구를 떠올리게 하였다. 작자 개인의 삶의 태도와 예술 형식의 일치를 역설한 제만의 화두가 노상균을 작품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노상균의 작품이 결국은 자신의 성찰적 삶의 산물이라는 점을 새삼 인식시켜준 것에 다름 아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어느 고대 철학자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사유하고 사색한다. 예리한 통찰력으로 역사적 정설과 전통 관례를 의심하고, 나와 우주, 미시와 거시,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등가적 상호관계를 인식하며, 성과 속, 고급과 저급 등 이분법의 허구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비판적 각성을 격앙된 발언 보다는 관조적 침묵과 무언의 예술로 전달한다. 다양하고 복잡한 생각에 질서와 체계를 부여하는 성찰적 과정이 그에게는 자기형식을 개발하고 고유의 조형세계를 구축하는 창작 과정인 것이다. 노상균의 형식논리와 조형미학은 시퀸이라는 뜻밖의 재료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기지에서 비롯된다. 우주는 신체와 같은 아미노산 합성체, 지구는 살아있는 세포, 우리는 “star stuff ”, 그리하여 원소, 세포, 인간, 우주가 하나의 윤회적 총체를 이룬다는 칼 세이건의 신비주의 학설을 반영하듯, 그는 시퀸 한 알, 시퀸 한 줄을 세포 단위처럼 반복, 연결하여 무수한 별자리와 무한한 우주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 제목 〈In the Midst of Shiny Dust〉는 우주와 같은 거시세계와 먼지 한 톨 , 티끌, 세포와 같은 미시세계를 동일화하는 작가의 비전을 예시한다. “빛나는 먼지 한가운데에서”는 결국 “빛나는 우주의 한가운데서”가 아닌가.

하찮은 먼지를 숭고한 대우주의 메타포로 승화시키듯, 그는 저속하고 대중적인 인공 재료 시퀸을 현학적 순수예술, 고급 엘리트 미술의 기본 재료로 등극시킨다. 이 역시 재료에 대한 작가의 성찰적 태도에 기인한다. 그는 시퀸을 단순한 물질적 재료가 아니라 현대성, 시의성, 대중성을 담보하는 미학적 징표이자 그 자체가 메시지인 매체로 인식한다. 물고기 비늘에서 출발하여 부처와 예수의 표피, 광활한 우주의 단면에 이르기까지 시퀸은 빛나는 표면으로 내부를 감추고 동일 단위의 반복으로 차이를 은폐하는 위장술로 알레고리 수사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옵티컬하고 키네틱한 시퀸의 시각 효과로 회화에서의 평면성 문제를 소급해 환기하는 한편, 내러티브를 함의하는 올오버 추상 화면을 통해 재현과 제시의 문제를 제기한다. 시퀸과 함께 작가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축을 왕래하는 특유의 양면가치 미학을 정립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제 우주에서 나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려는 듯, 자화상으로 풀이되는 2점의 신작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는 부처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부처 좌상이다. 작가는 3년 전 작업하다 미완성으로 남은 부처의 상반신을 시퀸줄 8가닥을 꼬아 만든 두꺼운 밧줄(?)로 포박하듯 과감하게 돌려 감았다. 질서 있게 부착된 시퀸으로 정교한 표피를 자랑하는 기존 하반신과 극단적 대조를 이룬다. 분리자아의 고뇌를 수련하는 이 부처는 그에 버금가는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는 작가 노상균의 자화상이 아닌가?

다른 하나는 붓과 시퀸으로 지문을 선묘한 자화상이다. 일종의 스케치 드로잉이지만 지문이 정체성의 신체적 흔적으로서 재현예술에 도전하는 지표예술의 새로운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호와 지시 대상의 유사관계에 근거하는 ‘도상’이나, 그 둘 간의 규약을 의미하는 ‘상징’과 다르게, ‘지표’는 발자국, 그림자, 거울 이미지처럼 기호와 대상 간의 물리적, 존재론적 일치를 뜻한다. 사진, 비디오와 같이 재현 대상의 물리적 흔적에 의거하는 지표예술은 재현의 붕괴라는 맥락에서 중요한 미학적, 미술사적 함의를 지닌다. 시퀸 사용으로 이미 재현의 영역을 떠난 작가가 이번에는 지문과 같은 지표의 등용으로 단호한 제시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노상균은 화면에 시퀸을 일일이 붙여나가는 수공적 부착 행위로 그리기와 모방을 대신하며 재현에서 제시로 향하는 탈회화를 시도한다. 고도의 몰입과 인내력을 요구하는 노동집약적 부착 행위는 그에게 고통과 희열을 안겨주는 동시에 자신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사유와 성찰을 허용하는 무념과 무상의 시간을 제공한다. 성찰이 창작으로 어어 지고 창작이 성찰을 이끄는 이러한 순환적 작업 여정에서 노상균 시퀸 작업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의미가 발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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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홍희 | 전서울시립미술관장,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