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HT & ISSUE 故임영방 제12대(1992~1997)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대쪽 같은 작은 거인의 귀천

지난 1월 31일, 관장님 부음을 접하고 잠시 멍해졌다. 언제나 찾아뵈면 반가이 맞아주실 줄 알고 바쁘다는 핑계로 뵙기를 미루고 시간을 보내다 관장님이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아뿔싸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있어, 삶에 있어 은인 같은 분이 있게 마련이다. 내게 임영방 관장님은 은인을 넘어 부모님 같은 분이다. 세상의 고마운 분들로부터 늘 은혜를 입어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추고 살고 있지만 관장님은 오늘의 나를 만들어주신 분이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마친 나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불러 학예실장이라는 과분하고 무거운 짐을 주셨다. 그 부름에 조금이라도 답하고자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지만 부딪쳤다. 가끔 힘이 들고 어려운 기색을 보일라치면 저녁에 퇴근하면 소주 한잔하자고 슬그머니 이끄셨다. 허름한 대폿집에 들어서면 늘 미술관 직원들이 함께 있었다. 미술관 구석구석에서 소리 없이 자신의 일에 열심인 직원 몇을 저녁 술자리에 불러 스스럼없이 대해주시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때는 엄한 관장이 아니라 동지적 관계(?)에서 새로운 미술관 시스템을 이야기하고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는 자리였다. 덕수궁미술관 시절부터 근무해온 그들에게 관장님이 그리는 선진적인 미술관의 시스템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설명하시면서 함께 새로운 미술관을 만들어갈 것을 당부하셨다. 그런 점에서 인간적인, 귀천과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람답게 대해주는 그런 소탈한 분이셨다. 그런 관장님이 2015년 유난히 매섭던 겨울이 꼬리를 감추고 봄이 오려는 즈음에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 관장님은 늘 섬기고 따르던 하느님의 품에 안기어 행복하실지 모르지만 속세에 남은 장삼이사들은 그 서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사실 임영방에게 세상은 너무 많은 임무를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어렵던 시절 홍콩과 프랑스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남다른 기회에 대해 국가와 민족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선 학문적으로 보면 한국미술사에 근대적 개념의 미학과 미술사의 개념과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는 근대기 지식인이었으며, 국민을 계몽해야 한다는 의지로 지사적 실천을 행했다. 하지만 그는 인문학이라는 틀을 지키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학문적 원칙주의는 그의 삶에서도 그대로였다. 그는 자신의 가치와 철학에 따라 주도적으로 원칙을 만들고 이를 스스로 지킨 사람이다. 그 원칙 때문에 때로는 오해도 샀지만 자신의 원칙을 잠시 미룰지언정 허무는 법은 없었다. 이런 그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스로 만든 원칙을 지키면서 힘들고 때로는 거추장스러웠을까, 아니면 행복했을까’. 그럼에도 그는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원칙의 삶을 살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사표이자 대한민국에서 21세기까지 존재한 마지막 선비였다.
특히 한국 미술관에서 임영방은 변곡점이다. 그 이전의 미술관은 근대적인 미술관 아니면 개발도상국가형 미술관이었다면 그 이후의 미술관은 현대적인,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는 미술관으로 전이해나간 과정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는 큐레이터 중심의 미술관을 꿈꾸었고 그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삶과 유리된 구름 위의 미술을 세상의 미술, 사람들의 미술로 변화시킨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가 학문과 삶에서 추구했던 것처럼 미술이 삶 속으로 들어온다고 해서 그 가치와 격이 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맡고 그 이듬해 <93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을 논란을 물리치고 개최했다. 단색조회화라는 전대미문의 집단 개성화된 한국화단에 다문화적 당대미술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한국미술에 새로운 국면을 불러일으켰다. 또 <민중미술 15년전>을 열어 산발적인 미술운동차원의 미술을 한국미술사에 편입시켰다. 또 <올해의 작가>라는 제도를 통해 미술의 영역을 확대하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기를 희망했다. 또 <일본현대미술전>을 통해 정치와 문화를 구분해서 일본을 대하고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고자 했다. 사실 그는 오늘날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베니스비엔날레의 한국관 건립에도 막후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광복 후 홍콩에서 동문수학한 후배 백남준과 함께 이탈리아와 베니스시를 설득하고 한국 정부를 이해시켜 건립 예산을 확보하기까지 안살림을 맡아 동분서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국 현대미술의 격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킨 1995년의 광주비엔날레도 그의 작품이다. 첫 비엔날레의 조직위원장으로 그는 자신의 유학시절 인맥과 경험을 최대한 가동시켜 척박한 불모의 땅에 비엔날레라는 씨앗을 움 틔웠다. 이후 그가 떠난 후의 광주비엔날레를 떠올려보면 그의 혜안과 지도력 그리고 실천의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미술사에서 그의 족적을 살펴보고 이를 서술한다는 것은 내겐 역부족일지 모른다. 미술사, 미학 등의 이론분야는 물론 문화정책과 박물관학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구석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이론 또는 책상에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에 옮긴 문화운동가였다.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단구의 거목이었다.
인천에서 태어나 일찍이 개화된 가풍으로 인해 열린 세상을 누구보다 먼저 접한 그. 지사적 자세로 파란만장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헤쳐 나오면서, 가끔은 기뻐했으나 많은 시간을 통분하고, 혹은 질주하고, 때로는 돌아오면서 역사와 현재의 화해를 통해 미래를 그리고자 고군분투했던 임영방 관장에게 가장 큰 힘은 거침없는 용기와 강단 있는 명철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굽히지 않는 자신감과 소명의식이었다. 이런 지사적 풍모와 대쪽 같은 그의 기개는 조선 선비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관장님을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드리고 나서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겠습니다. 계실 적 그리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던 제가 이제야 깨우쳤지만 결코 관장님처럼 격과 결이 있는 삶을 살 수 없음이 더욱 부끄럽습니다. 부디 누구도 당신이 세운 올곧은 뜻을 거스르는 자 없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평안하소서.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취임식을 마치고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취임식을 마치고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임 영 방 Lim Youngbang
고 임영방(1929~2015)은 경기도 인천 출생이다.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1871~1940년 사이 파리시의 공공건물 내의 벽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미술대학 및 인문대학 교수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역임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아 국내 최대 규모의 국제미술제를 이끌었으며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에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저서로는 《서양미술전집》 《미술교육》 《현대미술의 이해》 《미술이 걸어온 길》등과 중세부터 바로크시대까지 시대별로 미술을 정리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미술》 《중세미술의 도상》 《바로크》가 있다. 서울신문비평상(1986), 프랑스 일급문화예술훈장(1996), 제36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 문화훈장(2006)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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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50년 동안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기리며

선생님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 제가 스무 살 학생 때였으니 벌써 50년 전 일입니다. 그 당시 저는 미술대학에 대해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니 당연히 미술에 관련된 논의가 활기차게 흘러넘치고 ‘미술로 세상을 열어’ 갈 저에게 빛이 되어줄 곳이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허기진 지식욕을 채워주기에는 실기 위주의 미술대학 분위기는 기대와 영 딴판이었습니다. 게다가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매 학기 정상적으로 수업이 이뤄진 적이 거의 없던 때였습니다.
바로 그러할 때 선생님이 미술대학(저에게)에 나타나셨습니다. 지성적인 면모의 패션, 걸음걸이까지 멋지던 선생님은 저에게 막연히 동경하던 미술의 나라 프랑스 그 자체였습니다. 해맑은 미소는 말할 것도 없고 서투른 모국어까지 멋있어 보였으니 선생님의 뭔가가 제게 씌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학보사 편집을 맡고 있던 저를 선생님은 퇴근길에 자주 데리고 다니시면서 세상 보는 시각을 넓혀 주셨습니다. 심지어 동베를린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 저를 데리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을 통해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졸업한 뒤 한참 지나 문리대 미학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당신이 원하던 인문학의 자리로 옮기신 것을 축하드렸지만 당신은 그래도 미술대학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셨으니 보람 있는 자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선생님과 저의 특별한 인연이 다시 시작된 것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님으로 재직하실 때였습니다. 과천의 산속에 뚝 떨어져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관장으로 계시면서 〈휘트니 미술관전〉과 〈아! 고구려전〉 등 몇 개의 특별전으로 미술관의 대중화에 대성공을 거두셨습니다. 그 직후에 당시 운동권미술인 ‘민중미술’ 전시회를 개최한 것은 선생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큰 결단으로 지금도 제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그 당시 선생님의 주위에는 불온한(?) 민중미술전을 열지 말라는 따가운 시선과 만류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러한 시선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전시회의 개최를 밀고 나가셨습니다. ‘민중미술’은 허구가 아니라 분명히 이 땅에서 만들어진 리얼리즘미술이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빛나는 업적은 은퇴 후 세검정 시절에 이룩한 인문학적 저술 활동입니다. 르네상스미술과 중세미술, 바로크미술에 이르기까지 거의 800~1000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저작들을 80세 전후의 고령에 펴낸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아깝게도 선생님은 낭만주의 미술에도 손을 대시다 영면하신 걸로 전해 들었습니다. 미처 완성하지 못한 원고들은 저희 제자들이 능력이 되는 대로 출판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러한 저술은 그 자체로 인문학적 학술활동으로서의 가치만이 아니라 미술의 지평을 인문정신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는 데 큰 의미가 있어 미술학도로써 또 제자로써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데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선생님은 많은 일을 하시면서 알게 모르게 후학들에게 모범으로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한 인간이 참다운 스승을 모실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은사로 모실 수 있는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은 저희 제자로서는 정말 행운입니다. 저희는 이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선생님의 인문정신의 가르침을 우리들 스스로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이제는 편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김정헌 작가,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스승의날 모임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앞줄 왼쪽부터 김정헌, 임영방 부부, 안필연, 뒷줄 왼쪽부터 최태만, 임옥상, 박영남)

스승의날 모임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앞줄 왼쪽부터 김정헌, 임영방 부부, 안필연, 뒷줄 왼쪽부터 최태만, 임옥상, 박영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