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자본주의-신자유주의 그리고 예술의 딜레마

전복하지 않는 싸움: 신자유주의 시대의 예술가들

안소현 독립 큐레이터

최근 예술인복지법, 작가 사례비, 표준계약서 문제 등을 둘러싸고 본격화된 예술과 노동, 경제적 가치에 관한 논의들은 미술계 안팎의 여러 균열을 드러냈는데, 그중에는 젊은 예술인들과 그들을 우려하는 예술인들(문제가 없진 않지만 편의상 기성 예술인이라고 부르겠다) 사이의 논란도 있었다. 예술인들이 기관들과 견해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지만 생존과 관련하여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거진 이런 ‘세대갈등’은 약간 의외였다. 물론 기성 예술인 중에도 작가 사례비나 계약제도의 정착을 주장해온 경우가 있기에 이런 이원적 구분을 일반화할 수는 없고,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이 대부분 기성세대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 젊은 작가들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온 선배 작가들이나 이론가들에게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젊은 예술가들이 자본 혹은 자본주의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지적이었다.
기성 예술인에게 “미술생산자”나 “예술노동”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었다. 그것은 생활인으로서는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없고 예술시장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이라는 행위는 생산이나 노동 같은 경제적 개념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반면 요즘의 젊은 예술가들은 예술을 엄연히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전개되는 활동으로 보고 오히려 경제활동과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려 하였다. 작가 사례비를 요구하고, 예술노동자가 될 것을 자처하며, 미술시장에 진입하고 싶다는 욕구를 작업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단순히 자본에 대한 인식의 부족일까, 아니면 그들이 근본적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어떤 환경에 속해 있는 것일까?
아주 넓은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일반적 이미지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다. 기성 예술인들에게 자본주의는 제어할 수 없는 탐욕, 무한 축적의 관성, 수시로 축적의 전략을 바꾸는 용의주도함, 자기 파멸을 향해 치닫는 모순 등 하나의 ‘괴물’로 묘사되곤 했다. 1990년대 초 국가체제로서의 사회주의가 무너진 이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은 체제를 선택하거나 정당화하는 문제를 특별히 고민하지 않으며, 기성세대의 그런 태도를 낡은 것으로 생각하고, 공기처럼 당연해진 자본주의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이들은 기성 예술가들 역시 생계를 유지해왔고 오히려 자신들보다 쉽게 미술시장에 진입하였기 때문에 기성세대의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고상한 척하는 위선’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런 변화는 근본적으로 젊은 예술가들이 기성세대가 겪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변화들은 작가 사례비에 관한 공개토론이나 예술노동을 주제로 한 전시, 그리고 SNS 논쟁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는데, 가장 두드러진 징후는 역시 <굿-즈 2015>(이하 <굿-즈>)였다.
이 행사는 통칭 “신생공간”을 중심으로 젊은 작가들이 저렴한 작품을 제작하여 판매하도록 기획된 자리였는데, 모든 참여자가 자본주의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현대미술 장터를 연다는 말에 펄쩍 뛰며 걱정부터 하거나 혀를 끌끌 차는 세대와는 분명 다른 가치관을 보여주었다. <굿-즈>에는 일반적인 미술시장에서 보기 힘든 작품/상품들이 등장했다. 포장에 사진작품을 프린트한 휴지, 페트병을 잘라 만든 나무, 원하는 대로 잘라 파는 그림, 관객에게 구걸을 하는 걸인 퍼포먼스 등이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예술작품의 희소성이나 물질적 지속성은 물론 디자인의 유용성과도 거리가 먼 이런 작품들을 즐기고 또 구매했다. 심지어 기본적인 시장 질서를 비웃듯 거지는 1000원짜리 휴지를 가져와 구겨놓고 두 배의 가격에 팔았고, 또 다른 작가는 그것을 가져다 더 큰 이윤을 남기고 팔았다. 다시 말해 이들의 동력은 주로 기존 미술시장의 속성을 거스르는 재미와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이 행사는 기존 미술시장의 높은 장벽에 대한 풍자로도 읽히고, 또 대안적 미술시장의 모델로도 읽혔다. 그 결과 비록 각 개인에게 큰 경제적 이익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작가들은 관객들에게 자신의 색깔을 각인시키며 상징자본을 얻었고 관객들은 그들의 ‘엉뚱함’을 즐기거나 소유하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젊은 예술가와 관객들의 일견 순수해 보이는, 다시 말해 자본친화적이긴 하지만 기존 미술시장에 저항하는 위와 같은 태도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을 신자유주의의 인지자본이라는 맥락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1978년과 79년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로부터 보호받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경영’하는 주체인 호모에코노미쿠스를 등장시켰다고 했다(《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온 자본주의가 최근 들어 취한 축적의 한 전략인데, 국가가 시장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신이 능력, 기술 등을 스스로 관리하고 경영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인적자본 혹은 인지자본이라 하는데, 그것은 마르크스가 고려한 노동시간으로 환산 가능한 노동력과는 달리 지식, 정보, 상징 등 복합적이고 질적인 노동과 관계된다. 인적자본체제에서 (1)노동생산물은 비물질적이며, (2)노동생산물은 노동 과정과 분리되지 않으며, (3)각 개인이 기업처럼 자기계발을 통해 경쟁하며, 그에 따라 (4)자본 역시 비물질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를 띤다. 이러한 인적자본의 성격들은 <굿-즈>에서 만족을 준 요소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관객들은 비물질적인 퍼포먼스를 구매하고, 작품을 자르고 나누는 과정을 즐기면서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조각들을 구입하며, 작가들은 각자의 개성으로 약간의 판매 수익과 더불어 이름을 알린다.
물론 이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등장한 모든 노동에 해당하는 성격이지만 오늘날의 예술만큼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으며, 예술가들이 도시 젠트리피케이션의 첨병이 되는 상황이야말로 이 현실을 고스란히 압축한다. 때문에 인적자본론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예술을 비롯한 비물질노동을 모델로 삼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같은 학자들은 예술이 비물질노동의 폐단에서 벗어날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반박하긴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예술을 상품화하고 상품은 예술화한다는 비판은 하나의 정설이 되었고, 디자인 시장의 전례없는 팽창과 상품화된 예술의 전형인 ‘굿즈’의 유행은 그런 주장들을 부인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원하든 원치 않든 예술가들은 그런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의 생존 전략
젊은 예술가들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기존의 미술시장에 대안을 제시하려 하지만 오히려 더 힘들어진 자본주의의 형태, 즉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상징자본에 매달리며 끊임없이 스스로 생존전략을 세워야 하는 상황에 대해 비판해야 할까? 그들이 추구하는 당장의 재미와 만족이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매서운 각성을 유도해야 할까? 그러나 자본주의를 벗어나면 어떤 대안이 가능한 지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혁명을 일으키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젊은이들이 자본주의를 전복할 생각은 안하고 자기 행복만 추구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느 쪽도 대안이 못된다. 정치철학자 조정환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주장이 인지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지만 예술이 신자유주의의 잔혹한 경쟁 시스템에서 벗어나게 할 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그 힘을 푸코가 말한 “자기 배려(souci de soi)” 개념에서 찾는다. (조정환, 《예술인간의 탄생》, 갈무리, 2015). 푸코의 자기 배려란 개인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계발에 매달리거나 외부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규칙을 만드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상태이다. 조정환은 이러한 자기 배려의 상태를 위한 예술가 공동체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삶의 태도는 구체적인 대안이나 생존전략이 되기에는 여전히 너무 포괄적이고 이상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예술가들이 자본주의 내부에서 추구하는 가벼운 재미와 만족은 거센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아무런 자발적 동력 없이 떠내려감으로써 얻은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급격히 늘어난 신생공간이나 <굿-즈> 같은 움직임은 이미 어느 정도 취향과 정서를 공유하는 집단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었기 때문에 작가들은 수요자들의 성향과 만족의 지점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구도에 놓인 개인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집단적 대안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신자유주의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예외 없이 모든 삶에 적용되며 삶 전반을 바꾸어놓을 만큼 강력한 자본주의의 전략이라는 점, 또한 젊은이들의 고달픈 삶이 반드시 자신의 노력 부족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런 경쟁이 역사적으로 언제나 당연했던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사실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로 예술을 둘러싼 많은 착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신자유주의 미술시장에서 성공한 작가가 모두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예술성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며, 예술의 상품화가 극단화되면 전통적 작품의 속성(물질성, 지속성 등)과 멀어진 작품이 오히려 더 높은 가격에 판매될 수도 있다. 반대로 미술시장에서 성공한 작가들은 반드시 높은 예술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다만 신자유주의 시장의 속성을 재빨리 간파하여 그에 맞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작품을 공장처럼 ‘생산’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아마도 놀라운 자기계발과 소통 능력을 지니고 스스로 그 경쟁 시스템에서 살아남도록 노력했겠지만, 시스템의 본성상 그들은 극소수일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성공을 위해 일방적으로 예술성을 포기할 필요는 없으며, 죽도록 경쟁하여 살아남는다 해도 그것이 예술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상업성과 예술성의 이분법을 벗어난 작가들은 그들이 구성한 집단 안에서 서로의 생존을 도와주며 불평등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젊은 예술가들이 자본주의의 전략을 날카롭게 파악하거나 신자유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혁명적 시도를 하지 못한다고 해도 각자는 불평등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것과 싸우는 중이다.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도 말하지 않았던가. 부(富)의 분배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며 다행스럽게도 민주주의는 전문가들의 공화국으로 대체되지 않는다고. 즐겁게 살아남아준 모든 것이 감사한 세월, 젊은 예술가들의 생존감각에 작은 기대를 걸어본다. ●

SPECIAL FEATURE 황현욱,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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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5/128전> 창립전에 참여했던 작가들. 왼쪽부터 황태갑, 황현욱, 이묘춘, 이향미, 이명미, 강호은, 김기동, 최병소

황현욱의 대구시절 발자취를 추적하다

이준희 먼저 황현욱 선생의 기사를 준비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죠. 제가 88학번인데요, 대학로 인공갤러리에서 리처드 롱, 정병국, 차계남 등의 전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먼발치에서 황현욱 선생을 직접 뵙기도 했고, 나중엔 카페 말파에도 몇 번 드나들었고요. 당시 말파 커피 값이 무진장 비쌌던 걸로 기억해요. 아무튼 제가 2000년부터 지금까지 《월간미술》에서 일하면서 여러 작가를 만났는데 인공갤러리와 황현욱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듣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직감적으로 황현욱이란 인물과 인공갤러리가 한국현대미술 현장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이자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저는 요즘 개인적으로 일부 젊은 세대에 의해 표출되는 미술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불만이 많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등장한 이른바 ‘신생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움직임과 현상, 즉 동시대 한국현대미술계의 지형 변화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그들에게 황현욱의 존재와 인공갤러리라는 역사적 공간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현대미술 현장에 존재했던 이런 역사적 인물과 전시공간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요. 아주 오래된 과거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던 중 몇 달 전, 대구미술관에서 우연히 황현욱 선생의 미망인이자 대전 비비스페이스 대표 김춘화 선생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제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황 선생 기사 계획을 말씀드렸죠. 처음엔 선뜻 내켜 하지 않으셨지만, 대전 비비스페이스로 직접 찾아가서 다시 간곡히 부탁하고 도움을 청했죠. 그때 김춘화 대표가 그러셨어요. “만약에 황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그분 성격에 이런 기사를 100% 반대하시며 크게 호통쳤을 것이다. 황 선생은 그런 분이다. 그래서 나 역시 처음엔 황 선생의 뜻을 헤아려 내켜하지 않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제 그분이 돌아가신 지 15년도 넘었고,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그분을 재조명하는 일이 의미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취재에 협조하기로 했다”고. 이렇게 해서 이 기사를 본격적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황 선생의 대구시절 활동에 대해 미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과 접촉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황현욱 선생의 초창기 대구 활동을 빼놓을 수 없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선생님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그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황 선생은 1948년 안동에서 태어나신 걸로 조사됐는데, 구체적인 가족관계나 성장 과정은 여전히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이교준 황 선생은 1남 2녀에 둘째예요. 위아래로 누님과 여동생이 계시죠. 제가 듣기로는 6.25 때 부친이 황 선생을 이웃에 맡기고 북으로 가셨다고 해요. 이후로 소식이 끊기고 끝내 아버지를 못 뵌 거죠. 당시 황 선생이 3살 때였는데 자전거 뒤에 실려서 도산서원 쪽으로 피난가는 중에 마을 사람에게 맡긴 것을 기억한대요. 이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가 혼자서 황 선생을 키웠고요.

이준희 이명미 선생님은 황 선생의 초기 활동에 대해 알고 계시죠?

이명미 1973년 <非오브제전>이라는 제목으로 황현욱의 개인전이 서울 명동화랑에서 열렸는데, 그 전시가 끝나는 날 황현욱을 처음 봤어요. 첫 만남이었던 그날 황현욱과 대판 싸웠어요.(웃음) 싸우면서 서로를 알게 된 거죠. 황현욱 전시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저하고 여자 작가 2명이 함께 <시점 73>이라는 전시를 열었거든요. 그런데 황현욱이 <非오브제전>에 출품했던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명동화랑 바닥에 그대로 던져놓았어요. 저보다 먼저 도착한 친구가 그 돌이 황현욱의 작품인줄 모르고 그 위에 자기 작품을 올려놓았어요. 그런데 황현욱이 자기 작품 위에 물건을 올려놨다고 버럭 화를 내서 싸움이 났고 제 친구가 울면서 밖으로 나왔죠. 그래서 봤더니 그 뒤로 못되게 생긴 남자가 나오더라고.(웃음) 우리가 들어가서 삿대질하면서 같이 싸우면서 서로 알게 됐어요. 싸우면서 만난 것이 첫 인연이라 제가 정확히 기억하죠.

이교준 그 이후 황 선생은 1973년 <제2회 S.T그룹전>에 참여했는데, 당시 S.T그룹은 서울대, 홍익대 출신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이죠. 주변에서는 황 선생이 S.T에 들어간 것을 참 이례적이라 생각했어요.

이명미 그리고 1974년부터 <대구현대미술제>에 함께 참여했고, 1975년엔 대구시립도서관화랑에서 열린 <35/128전> 창립전에도 같이 참여했어요. 그때 서문을 이일 선생이 쓰셨고요. 그때 우리는 전시만 한 게 아니라 같이 책 읽고 토론도 하고 그랬어요. 황 선생은 나중에 제 남편이 운영한 대구 수화랑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했는데, 한국 최초의 ‘아트디렉터’라고 《매일신문》에 기사가 실리기도 했어요.

이준희 그럼 수화랑 아트디렉터를 하시게 되면서 작업 활동은 그만두신건가요?

이교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1978~79년 즈음 일거예요. 그때 황 선생은 작가가 작업하면서 동시에 제대로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본인이 직접 작가를 종합적으로 학습시키고 지원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 무렵부터 황 선생은 지금은 아파트가 된 옛 효성여대 뒷산 골목 안 작은 집 골방에서 머리 깎고 영어공부를 하셨어요. 한국에는 변변한 현대미술 서적이 없으니까, 외국 책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죠. 그러던 중에 작가 박현기 선생의 설득으로 수화랑 디렉터를 맡게 됐어요. 저는 그때 군대를 제대하고 20대 후반이었는데, 그런 황 선생을 존경하고 따라다닌 후배 가운데 한 사람이었죠. 그전에 황 선생은 서울에서 활동하다 대구에 이강소 최병소 이명미 같은 작가들이 계시니까 대구로 내려오신 것 같아요.

정병국 아마도 황 선생 누님이 대구에서 결혼해서 산 연고도 있었을 겁니다. 그 무렵 저 역시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80년에 영남대 교수로 발령을 받아 대구로 내려왔죠.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황 선생은 대구에서 큐레이팅을 시작하고 대구미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서 대구지역 미술대학 출신 젊은 작가에 관심을 갖게 됐죠. 미협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요, 제가 영남대에 새로 온 젊은 선생이니까 저한테 기대를 많이 했죠. 그 당시만 해도 현대미술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황 선생이 영어를 해독해서 공부했다는 것은 정보를 적극적으로 획득하려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죠.

이준희 그때 주로 어떤 책을 보셨나요?

이교준 그 당시는 해외여행도 마음대로 못할 때고, 외국 잡지나 책도 검열이 심해서 잘 들어오지도 못했어요. 그나마 미국문화원에 가면 《아트 인 아메리카》 같은 전문지를 볼 수는 있었죠. 황 선생은 수화랑 디렉터로 들어가기 전에 본인이 공부했던 것을 후배들에게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권부문, 박현기, 신용덕을 비롯해 8~10명이 조그마한 2층 방에서 공부하는 스터디모임을 만들었어요. 황 선생이 일주일에 3번 정도 산에서 버스 타고 와서 영어강독을 했죠. 주로 뉴욕스쿨, 비트겐슈타인, 과학혁명의 구조, 토마스 쿤, 박이문, 현상학…, 이런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 쓰고 또 숙제 내주고….

정병국 여러 사람이 같이 번역한 책을 저한테도 몇 권 가져다주고 했어요.

이교준 예. 그 당시에 신용덕 씨도 영문과를 나왔고 황 선생도 번역을 해서 그 모임에서 미술에 관한 어휘를 서로 맞춰가면서 번역을 했었죠. 책 한 권을 다 번역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중에 읽을 만한 거리들을 끄집어내서 번역하고 서로 돌려보곤 했죠.

정병국 책을 한사람이 완역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모여서 토론을 하고 번역을 한다는 것이 고무적인 일이었죠. 미술에 관한 것, 철학에 관한 것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미술의 흐름을 짚고 했던 것을 나도 받아봤어요.

이준희 권오봉 선생님은 황 선생을 언제 처음 만나신거죠?

권오봉 저는 여기 계신 분들보다 좀 뒤에 만났어요. 1982년 수화랑 신축 개관 기념전 <28인의 이미지>에 참여하면서 황 선생을 처음 만났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제 그림을 보고 “왜 이런 식으로 그리냐”고 막 뭐라고 하시더라고. 전시에 작가를 초대해놓고 초대한 작가의 그림가지고 막 뭐라고 하시더라고.(웃음) 저도 그렇게 황 선생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강했죠.(웃음)

이교준 그 당시 황현욱 선생이 학생의 작품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제가 늦은 나이에 복학해서 학교 실기실에 있었는데 누가 와서 휙 돌아보고 가고 그러더라고. 나는 그때 그 분이 누군지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황현욱 선생이더라고요. 수화랑 디렉터로 있을 때 학교 실기실에서 학생들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도 많이 하고 괜찮은 친구들을 끄집어내기도 하셨지요. 그리고 당시 수화랑에서는 곽인식, 이우환, 스가 기시오 등의 전시를 열었죠. 당시 이우환 선생은 서울에서도 익히 알려진 작가는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명미 서울 메이저 화랑에서도 1990년대까지 이우환 선생의 작품을 안 샀어요. 나중에 1990년대 지나서 진화랑에서 일본을 오가면서 이우환 선생 판화작업을 사면서 불이 붙기 시작했고 그전에는 서울에서 홀대를 받으셨어요.

정병국 직접 이우환 선생에게 들어봐야 알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우환 선생에게 대구가 갖는 정서적인 면은 특별한 거 같아요. 서울은 이우환의 가치를 화랑에서 뜨고, 돈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 알게 됐지만, 대구에 있던 황현욱 씨는 그전에 작가로서 이우환의 가치를 알고, 공감했던 거죠.

이명미 이우환의 가치를 알고 먼저 이우환 전시를 한 사람이 이강소 선생이었어요. 대구 대봉동에 리화랑이 있었는데 전시 한 서너 번하고 1년도 안돼 문 닫았죠.

이교준 맞습니다. 이강소 선생 부친이 소유하고 있던 신축 건물 1, 2층에 화랑을 꾸몄죠. 1979년 <대구현대미술제>를 분산 개최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하면서 화랑을 연 것으로로 압니다. 여하튼 수화랑에서는 서울에서도 개인전을 한 적이 없는 곽인식 작가 같은 분들의 전시를 일찍이 했었죠. 그 이후 이우환, 박석원, 이건용 등 많은 전시가 이루어졌죠. 1985년대 당시 스가 기시오 등 일본과 교류하기 시작했어요. 서울에서도 없던 일이죠. 당시 리플릿을 보면 한국과 일본의 교류 관점에 관해 황 선생이 써놓은 글이 있어요.

이준희 황 선생이 당시 남보다 앞선 시기에 현대미술에 관한 독자적인 시각을 확보하게 된 계기랄까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이교준 황 선생은 그전부터 철학 사상 이런 쪽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어요. 《사상계》 등 문학비평에 관한 서적을 즐겨보셨죠. 당시는 문학비평이 미술 쪽보다 관점이 확실하다고 황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이명미 황현욱이라는 인간이 즐겨먹던 음식이라든지 행동의 패턴을 보면 취향 자체가 군더더기가 없었어요. 옷 입는 감각도 아주 깔끔하고 전시 오프닝 때 상 차림도 굉장히 심플했어요. 물론 돈도 없었지만 그 자체가 간결하고 깔끔했어요. 서울에서도 현대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화랑이 1990년대 이후에 나오기 시작하는데 수화랑, 인공갤러리, 갤러리 댓(That) 등 황 선생과 관계있는 화랑을 보면 현대미술 전문 화랑을 지향했어요. 민중미술은 약간 복합적인 측면이 있는데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죠.

이교준 그 당시에 오프닝 상 차림을 보면 수입 주류가 유통되던 시기도 아닌데 미군 부대에서 구한 보드카에 하얀 무, 배추, 채소 썰어놓고 그게 끝이에요. 나중에 서울 인공갤러리 오픈 때 그렇게 하니까 서울사람들이 다 놀라더라고. 어디서 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성향 자체가 그런거죠.

정병국 저는 황 선생의 디테일한 면을 접할 기회는 많이 없었습니다. 《사상계》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접하는 책이라 민중미술하고 연관을 많이 짓는데 황 선생은 사상과 민중미술은 전혀 별개로 생각했습니다. 황 선생은 민중미술은 미술을 이용한 것이지, 미술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것은 본인의 지적 사유에 기반을 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준희 완전 자생적 모더니스트군요.

이명미 그렇지. 그게 맞아요. 그리고 황 선생님이 현대미술, 특히 대구지역 현대미술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1980년대 초에 《공간》에 쓴 글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이교준 1985년에 수화랑을 그만두고, 그해에 갤러리 댓(That)을 바로 열었어요. 그리고 1986년에 대구 인공갤러리를 열고 백남준으로 오픈 전시를 했어요.

이준희 인공갤러리 이름은 어떻게 지은 건가요?

권오봉 인공갤러리 이름을 지을 때 제가 옆에 있었어요. 주변에 몇 명이 있었는데 황 선생이 잘 생각해보라고 하더라고. 그때 박현기 선생도 있었는데 박 선생이 그때 제안한 이름이 ‘컨테이너’였어요. 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를 잘 듣고 있다가 황 선생이 순간적으로 “‘인공’ 어때!” 하시더라고. 그런데 그때 ‘인공’이라는 단어 자체가 굉장히 거부감을 주더라고. 북한 국기를 인공기라고 하잖아요.(웃음) 그래서 거부감을 표시했는데 그래도 황 선생은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을 한 것 같더라고.

이교준 맞아요. 그때 우리가 ‘인공’이라고 하면 북한하고 연관되잖아요, 그랬더니, “그러면 뭐 어때”라고 하시면서 “모든 예술은 인공적인 거야”라고 말하면서 인공을 쓰시더라고. 人(사람인)에 工(만들공)자를 써서 인공이 되었죠.

권오봉 황 선생은 감성, 로맨틱한 거 싫어하시니까. 미술도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든, 인공이라는 이름을 생각하신 거 같아요.

이교준 당시는 컴퓨터가 없을 때여서 수화랑, 인공갤러리 로고타입도 직접 디자인했어요. 손수 식자 뜯어 붙여가며 본인이 직접 제작한 겁니다.

이준희 1986년에 대구 인공갤러리를 오픈하고 1988년에 서울에 인공갤러리를 오픈하셨어요.

이명미 처음 4~5년 정도는 서울과 대구 갤러리를 같이 운영했죠. 그때 대구 인공은 이교준 선생이 같이 하셨죠?

이교준 저는 관리를 맡아서 한 정도지 운영한 것은 아니고요. 대구 인공갤러리를 오픈한지 2년 만에 서울에 왜 오픈하셨는지 확실한 계기는 잘 모르겠어요.

정병국 제가 봤을 때, 황 선생은 대구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본인이 조금씩 갤러리스트가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갤러리스트로서 자신의 꿈, 입지를 확장하고, 이 확장이라는 것은 공간 크기의 확장이 아닌 서울이라는 곳의 의미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윤형근 선생 등 도움으로 서울에 진출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서울 인공은 기초공사 할 때 제가 가봤어요. 모자 쓰고 까만 티셔츠 입고 담배 피면서 줄자 하나 들고 이리저리 혼자서 궁리하고 있는데, 내가 가니까 무척 반가워하더라고요.

이명미 인공갤러리는 당시 진짜 근사했어요. 최고로 근사했던 것 같아. 그 당시에 서울에 테이트모던 사람들이 왔었는데 서울시내 갤러리를 다 둘러보고 인공갤러리가 최고라고 했다는 소문이 일본 도쿄에까지 났었어요. 나중에 갤러리를 접고 커피숍 하면서는 벽에 그림 한 점도 안 걸었어요. 그림, 꼴도 보기 싫다고.(웃음)

이교준 아무튼 황 선생은 자기 주관과 입장이 너무 뚜렷하다보니 늘 주변 사람과 부딪쳤죠. 그 양반이 평소에 하시던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이 세상에 미술작가가 뭐 그렇게 많이 필요하냐! 좋은 작가 100명, 좋은 작품 100점만 있으면 세계 미술 다 이야기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요.

권오봉 황 선생은 한국 작가 중에 아주 소수 몇 명만 좋아하시고 나머지 작가들한테는 작업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작업을 될 수 있으면 못하게 하셨어요. “아직도 모르겠냐?” 하시면서요.(웃음)

정병국 취재하시다 보면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들어서 아시겠죠.(웃음)

이준희 1988년부터 서울 인공갤러리에 집중하면서 대구 활동에 공백이 생기게 됐는데요. 그때 대구 작가들이 섭섭했겠어요?

권오봉 서울에 인공갤러리를 오픈하면서 황 선생 자신이 대구 인공갤러리에 집중할 수 없으니까 대구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이교준 선생에게 맡겼죠. 그렇다고 대구 작가들이 섭섭할 이유는 전혀 없었죠. 서울에 화랑이 있으니 오히려 희망으로 생각했어요.

이교준 대구 인공은 저에게 맡기고 갤러리 댓은 졸업한 후배들에게 너희가 직접 운영해보라고 맡기시고는 서울에만 집중하셨어요. 그래서 대구시대와 서울시대로 크게 나눌 수 있어요.

정병국 맞아요. 일종의 서울 진출이니까. 그리고 저희도 서울 인공에 자주 갔어요.

이명미 인공갤러리 말기에 시공갤러리도 생기고 신라갤러리도 생기면서 대구에서도 나름대로 갤러리들이 돌아갔죠.

이준희 작업을 하시던 황 선생이 본인은 더 이상 작업을 않고 작가를 발굴하고 전시를 하게 된 시점이 언제부터인가요?

이명미 제가 황현욱의 마지막 작품을 기억하는 게 <35/128전>에서 본 건대 송판을 바닥에 놓고 나무톱밥을 그 주위에 뿌려놨어요. 그걸 뿌려놓으니까 사람들 신발에 톱밥이 묻어서 화랑 밖에까지 옮겨지게 되었죠.

이교준 <대구현대미술제> 2회때인지 3회때인지, 제가 군대 있어서 직접 보지는 못하고 이야기만 들었는데, 흐르는 물속에 있는 돌을 끄집어내서 수성페인트로 글씨를 쓰고 다시 집어넣고, 이런 행위를 반복하는 작업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권오봉 두 분은 같이 작업하면서 만나서 그런 걸 기억하시지만, 저는 황 선생을 처음 만날 때부터 기획자였기 때문에 나중에 친해져서도 별의별 이야기 다해도 정작 본인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저는 그게 그분의 속성인가보다 생각했어요. 그래도 기억나는 건 서울 인공갤러리 시작할 무렵 김용익 선생 등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모여서 열띤 토론을 했던거죠.

이교준 그래요 만날 토론했어요. 밤에 술집에 모여서도 했고, 굳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했어요. 그럴 때마다 직접 뭘 써가지고 와서 토론을 했어요.

이준희 그러고 보면 황 선생은 작가 못지않게 당시 평론가나 이론가들에게도 불만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권오봉 그렇죠. 작가에게 불만이 많은 만큼 평론가에게도 불만이 많았어요. 독일에 있던 류병학 씨를 불러들이게 된 계기가 그거죠.

이교준 그래도 이일 선생은 존경하셨죠.

정병국 특히 이론에 대해서 한국이 약하다는 점에서 불만이 좀 있었어요. 윤형근, 이강소 같은 선생들에 대한 책을 잘 만들고 싶어 했어요.

이교준 평소에는 말수가 없는 사람인데 자기가 관심 갖고 호기심 가는 부분에서는 대단히 관심을 많이 가지셨어요. 저희가 스터디그룹 할 때 한번은 서울에서 작가 장경호 선생과 다른 분이 왔는데 그분들도 자기 분야에서는 입이 쎈 분들인데 그분들하고 밤새도록 토론하고 했죠. 우리가 그때 진짜 질렸지.

이준희 술이나 담배를 즐기셨나요?

이교준 초기엔 술도 많이 하셨는데 나중에는 뭐 별로….

권오봉 그래도 웬만한 사람보다는 많이 드셨죠.

이교준 특히 아주 독한 담배를 많이 피우셨죠.

이준희 서울 인공갤러리도 그렇고 대전 비비스페이스도 그렇고 건물 자체가 아주 심플하잖아요. 그런 특징 말고도, 최근 활성화된 미술시장 측면에서 볼 때, 화랑 주인으로서 황 선생은 어떤 분으로 기억될까요?

이명미 화랑 주인으로는 빵점이지.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지금 미술시장에서 봤을 때는 원류나 마찬가지 같은 인물인데도 말입니다. 도널드 저드 개인전 할 때도 홍보를 제대로 하지 않았어요. 그냥 엽서만 보내고. 미술 기자들이 도널드 저드를 모르는 데도 홍보도 안하고 그랬죠.

권오봉 제가 생각할 때 황 선생은 갤러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예술가였던 분인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자기가 생각할 때 웬만한 작가들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리처드 롱이나 도널드 저드 같은 작가만 눈에 들어오고, 한국 작가 중에는 윤형근, 이우환 정도의 작가를 좋아하는데, 그 작가들 전시만 할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다른 작가 전시도 하는데 속으로 부글부글 화가 나고…,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어서 괜히 작가들한테 작업 하지 말라고 하고…. 저는 그분이 진짜 예술을 했다고 생각해요.

이교준 그러고 보니 황 선생이 ‘아닐 비(非)’자를 좋아했던 것 같네요. 첫 개인전 <非오브제>의 비도 아닐 비고, 대전에 비비스페이스도 ‘非非’니까요.

이명미 황 선생은 갤러리스트지만 안동의 유교적인 선비정신이 배어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쪽이 문기(文氣)가 강한 동네인데, 안동 선비의 마지막 세대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물질과 야합하지 않고 배가 고프더라도 때를 안 묻히겠다 그런 면에서 말이에요.

정병국 안동에 대한 긍지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지요.

권오봉 제 생각에는 대전에서 화랑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고, 나중에 안동에 화랑을 하고 싶어 하셨어요. 특히 안동에 이우환미술관을 짓고 싶어 하셨어요. 안동 가서 하려다가 그렇게 끝이 난 것이지요.

이준희 대전 비비스페이스 건물을 짓는 사이에 병을 알게 되신거죠?

이교 2001년 5월 윤형근 전으로 개관을 했는데 건물을 지을 때, 감독 한다고 텐트를 치고 생활하면서 건강을 많이 잃었죠. 공사 중이던 건물 옥상에 올라가다 갑자기 의식을 잃어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쳤어요. 그때 병원에서 간암 판정을 받고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요. 사실 그전에 황 선생이 대구에 있을 때 C형 간염으로 황달 증상을 앓은 적이 있는데 제대로 관리를 안하시다 보니 그렇게 됐지요. 술 드시면 찬송가를 부르시고, 어머니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데 농담처럼 “나는 예수님이 태어난 날 죽을 거야!” 그러셨는데 결국 12월 24일 돌아가셨죠.

정병국 가족 측은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하셨는데, 황 선생이 생전에 화장해서 병산서원 앞 강물에 뿌려달라고 해서 평소에 고인이 뜻한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죠.

이준희 이제 좌담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해주시죠.

권오봉 황 선생은 평소에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자료를 남기는 사람도 아니고, 자기 사생활 얘기하는 사람도 아니고, 평소에 사진 찍으려고 카메라 들이대면 획 고개를 돌려버리고….

이명미 황현욱 씨가 대구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점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현재 세계미술시장에서 뜨고 있는 한국 단색화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황현욱 씨였습니다. 그리고 타협을 잘 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갤러리스트로서는 실패자였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경제관념으로만 화랑을 보지만 황현욱은 경제관념 이전에 예술로 봤던 사람입니다.

이교준 전 황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요즘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정병국 일단 지금 같은 상태의 화랑 경영은 안하셨을 거예요. 안동에서 화랑을 하셨더라도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전시만 1년에 한 번 정도, 누가 오든 말든 신경 안 쓰고 하셨겠지요.

이교준 찾아보니까 전시 오프닝 뒷자리 같은 데에서 황 선생과 같이 술 마시던 사진이 좀 있더라고요. 이상하게 평소 말이 많지 않으셨는데도, 황 선생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였던 것 같아요.

권오봉 보스 기질이 있어요. 주위에 사람들이 저절로 잘 모였어요.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죠.

이명미 수화랑 디렉터였을 때 대구 문인들과도 친분이 두터웠어요. 그들하고 공동의 대화를 이끌어낼 만큼 지적인 분이셨죠.

정병국 기자와는 싸움을 많이 했어요.(웃음)

이명미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일간지 기자한테는 말도 안되는 소리 쓴다며, 아예 기사를 못 쓰게 했지요. 그만큼 사람이 좀 별났죠.

권오봉 약자한테 잘 대해줬고, 강자하고는 무조건 싸웠어.(웃음)

정병국 일종의 순혈주의가 있었죠.

이명미 그 사람, 꽃도 싫어했어요. 성격은 별난데 근본적으로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시들어가는 꽃을 옆에 두면, 신경이 쓰이고 마음을 안 쓸 수 없으니까 아예 옆에 두지를 않았던 거죠. 내가 기억하는 황현욱은 마음이 따뜻하고 선비정신이 남아있는 사람이었어요. ●

좌담일시 2016년 1월 8일 금요일
장소 대구 약전식당
참석자 이교준 작가, 이명미 작가, 권오봉 작가, 정병국 작가
진행·정리 이준희 편집장, 이슬비 기자

 

SPECIAL FEATURE 황현욱,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황현욱의 인공갤러리와 나

김용익 | 작가, 前 경원대 교수

나는 인공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네 번 했다. 1986년과 1994년에 대구 인공갤러리에서, 1989년과 1993년에 서울 인공갤러리에서, 그리고 1990년 서울 인공갤러리에서 4인전과 1994년 대구인공갤러리에서 3인전을 또 했으니 가히 “인공갤러리 작가”였다 하여도 무방하리라.
내가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제1회 청년작가전>에서 나의 출세작인 ‘천(布)’ 작품을 박스로 포장해버리는 작품을 발표하고 당시 화단의 주류였던 소위 ‘에꼴 드 서울’파와 거리를 두는 행보를 한 이래 1997년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기까지의 약 15~16년 동안 나의 주 활동무대는 인공갤러리였다는 것이 화력(畵歷)을 보니 저절로 밝혀진다. 어떤 연고로 나는 이렇게 인공갤러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서울서 작가 활동을 하던 황현욱이 어느 때인지 대구로 내려가 화랑을 하나 맡아서 운영한다며 전시를 하나 기획하였으니 출품해달라는 연락을 해왔었다. 그 전시가 1982년 대구 수화랑의 <논리성 이후전>이다. 그 후 1983년에서 1985년 사이 언젠가 잘 기억이 안나는데 황현욱이 학교로 날 찾아왔었다. 대구서 자기가 직접 인공갤러리라는 공간을 오픈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개인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대담한 제안을 하나 했으니 당시 내가 재직하고 있던 00전문대학 교수직을 조만간 정리하고 인공갤러리 전속작가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대구미술계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인 모 음식점 사장님의 후원을 연결시켜 주었다. 그 후원금만으로는 생활이 안 되었고 또 그것이 1년 만에 끊겨서 그 대담한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를 계기로 인공갤리에 대한 소속감을 굳게 가지게 되었다.
대구 인공갤러리도 그랬지만 서울 인공갤러리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모던한 흰 입방체로서의 화랑공간을 구현하고 있었고, 1988년 당시로서는 거의 무명이던 작가 이기봉을 개관 기념전 작가로 초대하는가 하면 도널드 저드, 리처드 롱 등 현대미술사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개인전을 잇달아 개최하는 등 당시 한국 화랑계에서는 독보적 존재였다. 작가라면 누구나 거기서 전시를 하고 싶어하는 공간이었는데 거기서 네 번이나 개인전을 한 나는 1981년 예의 ‘박스작업’ 이후 화단의 주류에서는 멀어진 듯 보였지만 그 누구도 무시 못할 인공갤러리의 후광을 톡톡히 입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황현욱은 전시기획의 독보적 존재감과 화랑 운영의 성공을 맞바꾼 감이 있다. 운영이 어려워서였는지 어쨌는지 전시가 점점 뜸해지더니 결국 그는 1996년 서울 인공갤러리를 말파(marfa)라는 카페로 바꾸었고 대구 인공갤러리도 문을 닫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이 정말 화랑 운영의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서울 화단의 동료 작가들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는지, 미술신(scene) 자체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는지, 이 셋이 조금씩 다 합쳐진 것 때문이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당시 나는 나대로 모더니즘 미술에 회의를 느껴 공공미술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고 미술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전에 가까이 지내던 사람과의 관계를 끊음으로써 새로운 생각의 순도(純度)를 지키려 하는 습성대로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황현욱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한 심정을 나는 1997년 금호미술관 개인전 카탈로그 맨 뒤에 실린 <narrow based specialist의 노우트 2>라는 에세이에서 ‘결별’이란 제목으로 피력한 바 있다. 그 후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내 기억에 두 번 정도인데 2001년 대전에 비비스페이스(BIBI Space)라는 공간을 오픈할 때, 그리고 같은 해 그의 임종 일주일 전 병문안을 가서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날 알아보는 듯한 그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무 까불었었지…” 무슨 뜻이었을까? 나는 그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일단 그와 멀어진 내 마음은 그의 죽음도 그리 애틋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후 그와 함께했던 시절의 추억을 다 잊고 살아왔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종종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이냐? 황현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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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15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우순옥 개인전 전시광경

1991년 3월15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우순옥 개인전 전시광경

황현욱과 철학자 박이문 선생, 그리고 나

우순옥 | 작가, 이화여대 교수

1990년 가을, 독일 유학 중 잠시 서울을 방문하던 차 서울에 근사한 갤러리 하나가 생겼다기에 찾아가 보았다. 현대미술 전문화랑이며 많은 작가가 선망하는 공간이라는 말을 듣곤 더욱 궁금했다. 옛 추억의 거리 동숭동 사잇길가 단정한 컨테이너 건물 외관이 우선 신선했고 ‘인공갤러리’라는 이름(디키의 ‘예술제도론’에 영향받아 지었다함) 또한 모던했다. 어떠한 장식이나 서술 없이 심플하게 기본 골조로만 이루어진 대담한 공간 감각에서 예술의 본질을 꿰뚫어보고자 하는 의도가 느껴졌고, 시원하게 높은 천장은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현대미술’을 위한 공간임을 실감케 했으며, 침묵의 성소같이 그 공간을 감싸고 있던 쿨하고 적막한 아우라는 작품마다 독특하고 강한 존재감을 안겨주었다. 때마침 갤러리 2층에서 힐끗 내려다보던 검은 양복 차림의 시니컬한 황현욱 선생 역시 어딘지 비밀스럽고 ‘인공’스럽게 그 장소와 잘 어울렸다.
그날 황현욱 선생과는 초면이었지만 이런저런 대화에서 철학자 박이문 선생님을 존경한다는 서로의 공통점을 알게 되자 어떤 신뢰와도 같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난 며칠 뒤 독일로 다시 떠나면서 인공에 간단한 포트폴리오를 남겼고 그해 겨울 황현욱 선생은 뒤셀도르프로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내년 3월에 개인전 합시다. 저는 우선생의 전시에 기대가 큽니다. 박이문 선생님의 사상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서 더욱 그러하거니와 현재 우리 화단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마땅히 기대되는 것입니다…’ 아,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것은 무명작가 독일 유학생이던 나의 첫 개인전이었다. 전시기간 동안 무심한 듯 세심한 황현욱 선생의 배려에 감사했고 시대를 앞서가는 탁월한 갤러리스트의 순수한 열정과 집념에 놀랐으며 척박한 한국 현대미술 상황에서 느끼는 깊은 고뇌와 피로, 고독과 절망에 어떤 연민이 느껴졌다.
1993년 봄, 나는 7년 만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였다.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 서울은 또 다른 낯선 땅이고 난 이방인 같았다. 적응하기 힘들어 혼자 파묻혀 지내던 시절이다. 그때마다 문득 인공갤러리를 찾아가면 황현욱 선생은 동병상련으로 맞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이화여대 후문에서 만나 박이문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다. 박이문 선생님은 나의 대학시절 철학 스승이시고 황현욱 선생은 대구시절 그분의 책으로 현대미술을 스터디했다 한다. 그날 황현욱 선생은 은근한 존경심과 첫 만남의 설렘으로 이우환 선생님의 화집과 김용익 선생의 작품을 정중히 선물로 드렸고, 기뻐하시는 노학자의 순수한 열정과 투명한 정신에 감동했으며, 세상의 부닥침에 점점 희미해져가던 예술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오랜 꿈을 다시금 되새겼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황현욱 선생이 안타깝고 아쉽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에게 무수한 철학적 질문으로 예술과 삶의 진실성을 일깨워 주셨던, 하지만 지금은 노환으로 쓰러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신 채 말없이 깊이 잠들어 계신 박이문 선생님의 슬픈 망각이 또한 너무 아득하고 허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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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갤러리가 있던 동숭동 골목의 과거

인공갤러리가 있던 동숭동 골목의 과거

내가 혜화동 키드였던 시절

고충환 | 미술비평

당시 나는 아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닌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림을 그리다가 벽을 만났다고 생각했고, 실기가 아닌 이론을 통해서 그 벽을 넘거나 우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미술사학과, 예술학과, 미학과처럼 예술이론 관련 학과가 세분화돼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앞뒤 사정을 모르기도 했거니와, 그저 예술이론 관련 학과면 되었다. 그래서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에 응시를 했고, 덜컥 붙었다. 그래서 어떡하든 서울에서 기숙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인공갤러리와의 인연은 그 필요가 만들어준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로 어떻게 인공갤러리에 기숙하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의 중재가 있었을 것이다.
인공갤러리와의 인연은 그렇다 치고, 황현욱 선생과의 인연은 대구 미술대학 시절로 소급된다(앞으로 적지 않은 사람의 이름이 거명될 것인데, 그중에는 이미 작고하신 분들도 있고, 그리고 대개는 쟁쟁한 분들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편의상 선생으로 총칭하기로 한다). 당시 영남대학교 서양화과 출신을 중심으로 한 람이라는 그룹이 있었는데, 그 그룹의 일원으로 갤러리 댓에서 전시를 했었다. 갤러리 댓은 서울인공갤러리 이전에 황선생이 대구에 차린 작은 갤러리로서(물론 그 이전에 수화랑이라는, 보다 중요한 공간이 있었지만), 현대미술을 표방했고, 신진작가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공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치기가 형식을 범했던, 형식의 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 전시에 똥 싸는 그림을 걸었는데, 세로로 긴 그림 위에 엉덩이를 까고 앉은 사람이 똥을 싸면 그 똥이 화면 아래쪽에 쌓이는 그림이었다. 세상을 향해 똥을 싸는 의식 있는 그림도 아니었고, 인격을 똥으로 환원하는 존재론적인 그림도 아니었다. 막연하게 좀 무겁고 꿀꿀한 그림들을 그렸었는데, 그 연장에서 나온 그림이었다. 당시 그 그림을 황선생도 보았을 것이고, 우스개를 자아냈었던 것 같다. 인연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인연 같지 않은 인연이 황선생의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서울 인공갤러리에 둥지를 틀었다. 추운 줄도 모르고 마냥 춥던 시절이었다. 공간은 1, 2층으로 구분돼 있었는데, 층고가 높은 1층이 갤러리 공간으로, 그리고 2층이 사무실공간으로 구분돼 있었다. 그 구분은 황선생 공간과 내 공간의 구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층의 황선생 공간은 출입금지구역까지는 아니더라도, 드문 호출이 아니라면 거의 드나들 일이 없는, 그래서 오히려 호기심을 자아냈던, 그런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1층이 온전한 내 공간도 아니었다. 작품 사진을 찍거나 작품 설치를 하거나 작품 철수를 할 때에만 일시적으로 내 공간이었고, 정작 작품이 전시되는 대부분의 기간 내내 1층은 내 공간이 아니었다. 내 공간은 벽과 똑같은 흰색이 칠해진 문짝에 달린 손잡이가 아니라면 문이 있는지도 모를, 전시공간 구석에 있는 작은 문을 밀고 들어가면 있는, 창고였다. 그 창고에서 작품들과 뒤섞인 잡동사니들과 더불어 살았는데, 겨울이면 어김없이 그릇에 떠놓은 물이 얼어붙는, 그런 곳이었다. 그나마 세면대가 있어서 전시 오픈 때면 주방으로 임시변통되는, 그런 곳이었다.
여느 도시가 그렇듯 혜화동에도 바깥쪽과 안쪽(뒤쪽?)이 있다. 바깥쪽과 안쪽의 구분은 특히 낮보다는 밤에 더 극명해지는데, 바깥쪽이 거사를 치르는 곳이라면, 안쪽은 결산을 위한 곳이다. 밤에 인공갤러리는 결산하기에 딱 좋을, 그런 도심 속의 후미로 변신한다. 일어나면 하는, 하루 일과 중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간밤의 결산의 흔적을 일소하는 일이다. 인공갤러리에는 전면 주차장 옆으로 나 있는, 옆집 벽과 공간 사이에 나 있는, 바깥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그런 좁고 긴 사이공간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밤사이의 결산이 이루어진다. 아침에 청소할 때 보면 버려진 빈 지갑과 주민등록증, 그리고 때로 여자 팬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주차장 구석에 수도가 있었는데, 낮에는 황선생이 사용했지만, 밤에는 술꾼 아니면 싸움꾼 차지였다. 긴 호수를 연결해 마당(주차장)에 물을 뿌리곤 했던 수돗가에 박 터진 머리를 디밀고 피를 씻어내던,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누군가의 황망한 눈빛이 선연하다.
아마도 내가 꼭 필요한 이유였을 것이고, 실제로도 내가 한 가장 중요한 일과 중에 하나였다. 나는 인공갤러리의 지킴이였다. 당시 인공갤러리에는 엄청난 양의 전시 팸플릿이 배달돼 왔는데, 대부분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쓰레기통으로 건너가기 전에 팸플릿은 내 점검을 거쳤는데,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한 일 중 하나였다. 그렇게 나는 인공갤러리의 청소부였다. 맵시 있고 말이 없는, 겉보기와는 달리 혹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그렇게 웃음에 인색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 그런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주인을 모시는 기꺼운 지킴이였고 청소부였다.
이런 지킴이며 청소부와 함께 잔심부름과 같은 소소한 일 외에 내가 딱히 해야 할 일은 없었다. 특히 전시 오픈 때 내가 해야 할 일이 없다 싶으면 대개는 줄행랑을 쳤는데, 그렇게 동숭아트센터와 문화예술회관을 어슬렁거렸고, 갤러리 소나무와 바탕골(지금은 양평으로 이사 간)을 들락거렸다. 동숭아트센터에는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어서 자주 찾았었는데, 사실은 영화를 보다가 잘 때가 더 많아서 지금은 뭘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건물 내에 갤러리도 있었는데, 당시 그곳에서 심영철 선생의 네온설치작업을 본 기억이 난다. 빛을 내는 가시 면류관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종교적인 개념을 작업으로 승화한 것이다. 심영철 선생은 이후 인공갤러리에서도 전시를 했는데, 성경책을 쌓아 만든 피라미드로 형상화된 말씀의 집을 불을 뿜는 뿔을 가진 신성한 사슴이 지키는, 그런 설치작업이었다.
문화예술회관 뒤편에 갤러리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황금사과’ 아니면 ‘타라’와 같은 그룹전을 본 것 같고, 김찬동 선생도 그때 그곳에서 전시를 했다고 들었다. 갤러리 소나무는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 작가들(아틀리에 소나무 소속 작가들)이 국내거점으로 마련한 것이라고도 했고 아니라고도 했다. 여하튼 당시 건물 2층에 있는 전시장에서 이불 작가의 핑크 몬스터 행위작업을 본 기억이 난다. 일종의 성기괴물이라고 해야 할 거대한 봉제인형을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작가의 궤적을 따라 사람들이 자리를 피해주면서 같이 움직였던, 그런 인산인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는 작가가 아니었던 강형구 선생이 운영하는 나우갤러리가 있었고, 그곳도 자주 드나들었던 것 같다. 이후 강형구 선생 첫 전시에 전시 글을 쓰기도 했지만, 아마도 당시에는 서로 보고도 몰랐을 것이다.
다시 황선생 얘기로 돌아오면, 황선생은 원래 서라벌예대 출신의 작가였다. 황선생의 그림을 우연히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뉴욕색면화파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색면구성이었다. 대구 수화랑 시절 스터디를 이끌기도 했다고 하는데, 현대미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대개는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과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에 조예가 깊었고, 박이문 선생의 저작이 그 안내자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실제로 황선생과의 대화를 통해서라기보다는 꽤나 오랜 시간 모시면서 자연스레 드는 감이 그렇다는 말이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말을 삼갔고, 공적인 자리를 싫어했던 사람인만큼 미술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작업에 관한 한 편애가 심했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현대미술이 아니라면 미술로 쳐주지도 않았다. 작가가 너무 많다고도 했다. 공간을 탐낸 작가가 많았지만, 그렇게 탐낸 작가들 중 실제 전시로까지 성사된 경우는 드물었다. 한정된 작가군 내에서 움직였는데, 주로 앵포르멜 계열의 작가들, 단색파 화가들, 미니멀 계열의 작가들, 그리고 물성 위주의 조각가들과 어울렸다.

황현욱이 편애한 이우환과 윤형근
몇날며칠 전시 디스플레이를 했던, 장흥 토탈미술관에까지 가서 철판 위에 놓을 호박돌을 실어왔던 이우환 선생 전시, 홍대 앞 작업실을 방문해 작업을 실어왔던 윤형근 선생 전시(거칠한 막사발에 당신의 그림처럼 묽은 커피와 돌 설탕을 타서 내어주시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오리선생이라는 별명을 안겨준 특유의 무심한 필치로 그린 그림과 점토 덩어리를 되는대로 툭 던져놓은 것 같은 입체작업의 이강소 선생 전시, 사이 톰블리를 연상시키는 권오봉 선생 전시, 프랭크 스텔라의 셰이프트 캔버스가 입체로 화한 것 같은 김용익 선생 전시, 앵포르멜을 연상시키는 파워풀한 검은 그림을 내걸었던 제여란 선생 전시, 색면구성을 각각 평면으로 그리고 입체로도 변주해 보여준 장옥심 선생 전시, 침목 끝을 무슨 젓가락처럼 자른 틈새로 돌과 함께 소형 모니터를 끼워 넣은 박현기 선생 전시, <내일의 너> 시리즈를 그린 박영하 선생 전시, 조각으로는 김청정 선생과 김진영 선생 전시, 그리고 사진에 권부문 선생 전시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돌이켜보면 작가들 중 특히 윤형근 선생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편애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좀체 표를 안 내는 사람임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알 만한 사람들 전시에서도 따로 도록을 만들지는 않았는데, 대개는 간단한 엽서나 접지 형식의 리플릿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윤형근 선생은 예외였다. 사실상 전작을 수록한 도록을 구상했고, 당시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하드커버로 된 제법 두툼한 도록을 제작했다. 인쇄 색깔이 제대로 나왔는지 전전긍긍해하고 몇 번이고 수정하고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 일련의 전시들과 함께 당시 인공갤러리 전시로 치자면 단연 도널드 저드와 리처드 롱 전시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전시를 위해 두 작가 모두 직접 내한했는데, 특히 리처드 롱은 현장작업의 특성상 직접 오지 않으면 아예 전시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무의미한 경우에 해당한다. 당시 인공갤러리의 한쪽 벽면 전체를 일일이 손바닥으로 흙칠해 메우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전시 기간 내내 사람들은 거대한 흙벽과 마주해야 했다. 도널드 저드는 공항에서 작품이 문제가 된 사실이 당시 신문에도 실렸다. 예술작품이면 면세가 되고 공산품이면 세금을 물리는데, 당시 황선생이 직접 공항에까지 가서 전후사정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도널드 저드도 그렇고 리처드 롱도 마찬가지지만 이후 근 10년은 지난 연후에나 국제화랑에서 순차적으로 두 사람을 초대전시한 걸 보면 황선생이 선구적인 사람임을 알 수가 있겠다. 그 시차만큼 황선생이 시대를 앞질러간 혜안의 차이로 봐도 되겠다.
황선생 얘기를 해야 하는데, 결국 내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글을 청탁하면서 이준희 편집장이 아주 개인적인 경험과 추억에 기반을 둔 회고성격의 글을 주문하기도 했거니와, 사실 황선생과 공유할 만한 이렇다 할 추억도 별반 없는 편이다. 모르긴 해도 황선생 당신도 추억을 만들 만한,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추억은 세속적인 사람의 몫이다. 그렇게 새삼스레 추억을 곱씹게 해준 이준희 편집장이 고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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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영 딴판이었는지도 몰라”
– 막다른 공간 – HHW의 선택 가능성

제여란 | 화가

사실 갤러리 공간이란 어떤 가상성에 기반을 두고 설계된 것이다.
항상 머릿속의 궁리 끝에 선택되는 것보다
먼저 발생하는 이 가시성을 위해 경험을 채우는 것이다.
감각적 대상적 관계적 형식적 건축적 비감각적 추상적 취향적 선행 구상에 따라 선택되고 현실화된 그곳에서 항상 더 즉각적인 아이콘으로 기능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소설이나 시보다 경구나 말장난을 더 좋아한다.
개를 좋아한다.
사람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사람다움을 좋아하는 자신을
더 좋아한다.
모든 오류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을 좋아한다.
붉은 색을 좋아한다.
일찍 집을 나서는 것을 좋아한다.
약이나 병이 아닌 다른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기념일보다 하루살이가 기념일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점잖음보다 섣부른 말을 해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
섣부른 악수를 하는 것보다 도덕론자를 좋아한다.
땡땡이 무늬를 좋아한다.
평범한 기적보다는 개소리를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는 교활한 영리함을 좋아한다.
비축보다는 낭비를 좋아한다.
혼돈의 평화보다는 정리된 지옥을 좋아한다.
그림자가 몸보다 더 실재일 때가 많은 경우보다는
그림자도 실재도 없다는 장갑 같은 공간을 좋아한다.
햇빛의 볼륨보다 낙하산의 하강을 좋아한다.
내 눈이 불쌍해 보이므로 귀티 나는 눈매를 좋아한다.
책상 서랍보다는 책상 위를 좋아한다.
자유로운 0보다 1을 좋아한다.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보다 열거되지 않은 다른 많은 것을 좋아한다.
단단한 돌들의 시간보다 풀벌레의 시간을 좋아한다.
우울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발 구르는 것을 좋아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착각의 행간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왼편과 오른편들의 반대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사과씨보다 과수원을 좋아한다.
질문보다는 답을 좋아한다. 감탄과 절망 둘 다 좋아한다.
하늘보다 망원렌즈 안으로 들어와 말린 지평선을 좋아한다.
명확한 것보다는 그럴싸한 것을 좋아한다.
구멍 난 장갑보다는 살을 에는 듯한 냉기를 좋아한다.
화가 ‘K’의 우울증적 불만보다는 그의 헛헛증을 좋아한다.
유아론적 자기 찬양보다 맹목적 충동에의 복종을 좋아한다.
고상한 안달보다는 발칙한 현기증을 좋아한다.
증류주(酒)를 좋아한다.
미래, 침묵, 무(無)보다 낭자한 웃음을 좋아한다.
어릿광대를 좋아하지만 어릿광대로 분장한 익살광대를 더 좋아한다.
짙은 색 코트를 즐겨 입던 그를 좋아하면서 거의 노출증에 가까운 경솔한 인간인 과묵한 엘리트였던 ‘G’를 좋아한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좋아한다. ‘H’의 드로잉보다 밧줄처럼 팽팽한 원고지 한 장을 좋아한다.
과묵하고 느슨한 영혼의 음모보다 치통을 좋아한다.
자신과 겉돌고 있는 무능과 무력감에 대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던 혐오감을 좋아한다.
정신 산란한 지식인의 회절된 머리보다 넉넉하고 호방한 남자의 어깨를 좋아한다.
숲과 안개 별들과 깨진 기와 벌레가 우글거리고 거미줄이 철마다 뒤엉키면서 양감을 더해가면서 꽃뱀이 소스라치던 안동의 병산서원을 좋아한다.
하여 길(교차로) 위에서 언제나 부분적이고 순간적이며 뒤따르면서 앞서 가다가 숨어버렸다. ●

SPECIAL FEATURE 먹고, 요리하고, 예술하라

Food in Art History
서양미술사에서 음식은 주제나 소재, 매체 때론 개념적 의미 등 다양한 측면에서 다뤄졌다. 음식물이 자주 등장하는 17~18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는 다양한 알레고리와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성스러운 ‘일용할 양식’에서, ‘관계’를 맺는 도구의 매개체로 자리 잡기까지 미술과 음식의 ‘맛있는’ 만남의 과정을 살펴본다.

미각의 반격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식사는 식욕의 결과일 뿐 아니라, 몸과 정신을 지탱하는 살과 피가 되므로 삶의 주된 동력원(動力源)이다. 먹은 음식과 남은 음식은 곧 소화되거나 부패할 것이므로 소멸과 죽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알레고리적인 그림이나 종교적인 도상 속에 나타난 날것의 식재료나 조리된 음식은 삶의 유한함을 명심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의미뿐 아니라 인간의 희로애락을 포함한 삶의 다양한 층위들을 드러낸다.

미각의 관능성
프로이트는 식욕과 성욕을 비슷한 본능적 욕구로 보았다. 구강 만족과 성적 만족 사이에는 끊어질 수 없는 연관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먹는 것과 섹슈얼리티의 관련성은 ‘미각(味覺)’을 의인화한 그림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가는 인간의 본성을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오감을 풀이하는 그림을 자주 그렸다. 오감이란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능의 충동에 빠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얀 브뤼헐의 오감 연작은 오감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그린 예이다. 이중 〈미각〉은 식탁 에 앉은 여인이 그리스로마신화 속 반인반수이자 성적 방종의 소유자 사투르누스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받으면서 음식을 맛보고 있다. 화면의 앞쪽에는 고기가 될, 사냥한 온갖 날짐승들이 무질서하게 널려있고, 식탁 위에는 사치스러운 연회에 주로 등장하는 백조와 공작고기로 만든 파이, 석화, 그리고 생선과 과일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미각은 풍요 가운데 리비도가 넘실대는 이미지다.
미각은 후각과 더불어 오감의 체계 중 가장 하위의 감각으로 치부되어 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각과 청각을 이성적이고 남성적인 감각으로 여긴 반면, 후각과 미각은 촉각과 한데 묶어 동물적이고 여성적인 감각으로 여겼다. 후각과 미각, 촉각은 육체의 쾌락과 고통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명료한 생각의 작동을 방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식탐은 성욕에의 탐닉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엄격하게 다루어져야 할 절제의 대상이었다.
교회는 식욕과 성욕을 절제해야 하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일정 기간 동안 느슨하게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축제를 제도적으로 허용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카니발이다. 카니발의 기원은 고대 로마의 사투르누스 제의라고 말해지는데, 사투르누스 제의는 축제 대부분이 그러하듯 무질서와 과잉이 특징이다. 교회에서 카니발은 사순절 기간에는 특히 육류 고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이전에 술과 고기를 과하도록 먹어두는 관행으로 정착하였다.
카니발 중에는 마음껏 먹어 몸에 기름을 넘치게 한 후 토하거나 배설하여 깨끗이 비워내고, 억압된 본능의 찌꺼기까지 모두 발산하여 몸과 영혼을 단정하게 준비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는 사순절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는데, 엄격한 교회가 무질서한 카니발을 제도적으로 허용한 것은 욕망을 모두 발산하여 비워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카니발 기간의 ‘기름진 식탁’과 사순절 동안의 ‘마른 식탁’의 대비는 미술작품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특히 카니발에 즐겨먹는 소시지와 사순절에 먹는 절인 청어의 다툼 장면은 사람들이 식탐과 성욕을 이겨내기 위해 분투하는 것을 풍자한 이미지로서 중세 유럽의 민담에서 기원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카니발과 사순절의 전투〉로는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카니발’은 고기를 꼬치에 꿰어 창처럼 들고, 머리에는 파이를 얹었으며, 둥그런 맥주통에 걸터앉은 배불뚝이 남자로 형상화되어 있는 반면, ‘사순절’은 꿀벌통 왕관을 쓴 깡마른 수사로 형상화되어 청어 굽는 석쇠를 무기로 들고 있다. 이들은 꼬치구이와 청어라는 각각 육욕과 절제를 대표하는 음식을 무기삼아 상대방을 겨누고 있다.
그리스로마신화 속에서도 축제의 신은 절제하지 않고 실컷 먹고 마신다. 바로 술과 축제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인데, 그는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나 충동에 따라 사는 존재이다. 화가들은 바쿠스를 한껏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카라바조(Caravaggio)는 〈바쿠스〉를 청년의 모습으로 그렸는데, 이 청년은 오감을 묘사한 그림들 못지않게 감각적인 요소들로 형상화되어 있다. 청년의 게슴츠레 쳐다보는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기 앞에 앉으라고 유혹하는 듯하며, 잔을 들어 한잔 하고 가라고 권하는 듯하다. 살이 적당히 붙은 그의 피부는 만져보고 싶을 만큼 촉각적이며, 잔에 가득 채워진 포도주는 후각을 자극하여 취하게 만들 뿐 아니라, 혀끝의 미각을 마취하는 것 같다. 〈바쿠스〉의 섹슈얼리티는 보는 이의 오감을 자극함으로써 감각의 통로를 열게 하고, 막혀있던 리비도가 그림 속 인물과 관람자 사이에 흐르게 한다.

Jan_Brueghel_I_&_Peter_Paul_Rubens_-_Taste_(Museo_del_Prado) 1미각

얀 브뤼겔, 피터 폴 루벤스 〈미각(Allegory of Taste)〉 나무에 유채 64×108cm 1618 (프라도 미술관 소장)

peter brueghel_ 2

피터 브뤼겔 〈카니발과 사순절의 전투〉 목판에 유채 118×164.5cm 1559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음식을 통한 관계맺기
그리스도교 문화를 그 뿌리로 하는 유럽사회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식사의 이미지를 꼽으라면 〈최후의 만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성서에서 빵과 포도주는 몸과 피의 나눔이고, 이로써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계약을 맺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베푸는 최후의 만찬이란 구약에서 제시된 피의 희생을 통한 구원의 의식을 몸소 실행하는 식사이다. 〈최후의 만찬〉 도상은 로마식 연회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로마식 연회 이미지는 초기기독교 시기 지하묘지인 카타콤 벽화나 석관에 새긴 부조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고인의 죽음을 추모하여 고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일체감을 경험하려는 로마인의 장례 및 추모 풍습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이미지들은 후에 그리스도교적인 도상으로 흡수되어 성스러운 만찬으로 표현된다.
실제로 요리를 나누어 먹는 만찬이 미술관에 등장한 것은 20세기이다. 예를 들어 태국의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는 1990년 첫 개인전 〈팟타이〉를 필두로 음식 접대하기 시리즈를 선보였다. 예술가가 직접 요리해서 관람객이라면 누구에게나 음식을 대접했고 전시기간 내내 화랑은 식사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시장에는 음식 냄새는 물론 가스통, 요리기구, 갖가지 식재료와 소스, 술병 등이 어지럽게 널렸고, 먹다 흘린 음식물과 설거지가 안 된 그릇들과 요리하다 튄 얼룩까지 보였다. 아무리 미술관 측의 허락을 받았어도, 조리와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반항적인 행위였다. 미술관은 항온항습과 무향무취, 그리고 새하얀 벽과 묵언이라는 엄숙한 금기들을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티라바니자의 작품은 개별화된 관람이라는 기존의 관행을 깨고, 사람들에게 연회나 축제에서처럼 음식을 통한 관계 맺기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음식을 요리하는 과정에서 식재료는 다듬어 썰어지고 양념에 절여지고 불에 익혀지면서 물질적으로 변성하게 된다. 사람의 몸 역시 그 요리를 먹는 행위를 통해, 음식을 잘게 부수고 삼키며 소화시키는 동안 물질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먹는 몸’은 미하일 바흐친이 말하는 ‘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the grotesque image of the body)’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1
먹는 행위는 신체가 그 자체의 한계를 넘도록 침범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삼키고 토하고 세상을 물어뜯고, 즉 세상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 풍요해지고 성장하게 된다.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일은 자르고 조각내고 씹는 벌어진 입 속에서 일어나는데, 이는 인간의 생각과 이미지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세상을 맛보고 그것을 자신의 몸속에 집어넣어 일부로 만든다.2
즉 연회에서 먹는 행위는 입이라고 하는 열린 구멍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육체는 열려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닫혀있고 단절된 개별 육체는 소통 가능한 육체로 변성한다. 닫힌 몸은 그저 하나의 양태로서만 존재할 뿐이고, 그 육체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 단일한 의미만을 획득할 뿐이다. 가령 죽음은 죽음일 뿐, 탄생과 연결되지도 않고 탄생을 도와주지도 않는다.3그러나 열린 몸은 자신의 한계를 침범하고 능가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열리고 축축한 구멍들을 통해 신체와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몸과 몸이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함께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다. 시작과 끝, 새것과 옛것, 탄생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동시성으로 이해되는 것이다.4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요리는 구성원끼리의 감정과 갈등, 상호작용과 그것의 사회적인 맥락들을 식재료로 한다. 예술가들은 요리를 통해 감각적이고 감정적이며 육체적인 것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정신과 관념 중심의 경직된 것들에 대해 저항하는 입장에 선다. 음식체험은 오감에 작용하여 인간의 감각적인 요소들을 열고 확장시켜 몸과 마음을 소통 가능한 열린 상태로 만든다. 즉 음식체험을 통해 미술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구속하는 비인간적인 원칙들에 저항하는 잠재적 파워를 갖게 되는 것이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회벽에 유채, 템페라 460×880cm 1494~1499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밀라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회벽에 유채, 템페라 460×880cm 1494~1499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밀라노)

1 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는 바흐친의 논문 5장을 참조할 것. Mikhail Bakhtin, trans. Helene Iswolsky, 《Rablais and
His World》 (Bloomington: Indiana Univ. Press, 1984), pp. 303~367.
2 Mikhail Bakhtin, p. 281.
3 미하일 바흐친, 이덕형 외 역,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아카넷: 2001, p. 733. 바흐친에 대한 이덕형의 해설에 의하면, 카니발에는 인간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시키는 요소가 있다. 현실은 비현실 속에서 뒤얽히고, 육체들은 자유롭게 뒤섞이며, 육체들이 외부 세계의 사물과 자유롭게 상호 교감하게 된다. 하나의 육체 속에 두 개의 육체가 존재하고, 죽어가는 육체 속에 탄생하는 육체가 존재하게 된다.
4 Mikhail Bakhtin, p. 317.

SPECIAL FEATURE 먹고, 요리하고, 예술하라

Delicious Dishes on TV
2015년 상반기 귓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 눈에 가시가 돋도록 보게 되는 영상이 있다. 바로 ‘쿡방’이다. 이제 음식 프로그램은 단순히 ‘먹는 모습’에서 ‘만드는 행위’의 시각화로 넘어갔다. 시청자는 혀끝을 대지 않아도 화면을 보면서 군침을 삼킨다. 음식과 요리에 대한 끝없는 집착의 과정을 영상매체 중 하나인 방송 프로그램의 흐름과 함께 짚어본다. ‘요리’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흐름 속에서 과연 우리의 밥상은 풍성해지고 있을까?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이다

박성경 도서출판 따비 대표

음식이 미술의 주인공인 적은 드물지만 음식문화 연구자에게 미술은 음식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또 하나의 문헌이다. 예를들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인물보다 식탁 위에 무엇이 차려졌는지를 보고,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당시의 식탁문화를 읽기도 한다. 그렇다면 수프 통조림도 미술이 되는 현대를 읽기 위해 가장 유용한 시각매체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중매체, 그중에서도 방송영상이 아닐까 한다.
요리사 아닌 요리사가 생전 라면도 안 끓여봤음직한 남자 연예인 넷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집밥 백선생〉이 요즘 뜨겁다. 음식 칼럼니스트뿐 아니라 문화·사회학자까지 나서서 〈집밥 백선생〉의 주인공인 백종원 현상을 논한다. 지금 이 순간 미디어를 장악한 가장 핫한 주제가 바로 음식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음식에 열광하기 시작한 것일까? 1970년대까지 보릿고개를 겪은 한국에서, 음식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1980년대 말, 고도경제성장을 이어온 한국에서 드디어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고, 자가용을 가진 인구도 차츰 늘어났다. ‘맛집’이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그 개념은 1990년대 초반 생겼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답사여행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낸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전국의 유적뿐 아니라 답사지 인근의 식당도 소개했다. 이 책에서 소개한 식당 앞에 여행객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만들어졌다. 향토음식의 발견과 지역 맛집의 등장은 이처럼 먹고살 만해진 사회의 여가 활동이라는 사회·경제적인 변화에서 비롯됐다. (이런 현상은 서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레스토랑 가이드북인 《미슐랭가이드》도 자동차의 보급과 여행의 활성화라는 배경에서 탄생했다. 오죽하면 타이어회사가 만들었겠는가.)
이 시기 ‘맛있는 집’을 소개하는 주체는 미식가를 자처하는 작가나 기자들이었고 책과 신문·잡지 등 전통적 미디어였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음식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밝히고 소위 맛집 리스트를 정리하고 찾아다니는 개인들이 나타났다. 하이텔, 천리안 등 PC통신의 탄생과 맞물린 일이다. PC통신에 개설된 식도락 동호회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동호회 회원들은 자신들의 맛집을 소개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부 동호회는 종종 유명식당과 주류회사들의 초대를 받기도 했다. 이 동호회에서 활동하던 일부 필력 좋은 이들 중 본격적으로 음식칼럼을 쓴 이도 있었고, 맛집 블로거로 유명세를 떨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일부러 멀리 있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흔한 것이 아니고, 주변의 맛집을 기억하고 찾는 정도에 그쳤다.
대중이 본격적으로 맛집을 순례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 TV 교양·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음식과 식당이 등장하면서부터다. 2000년 5월에 방송을 시작한 KBS 〈VJ 특공대〉는 VJ(비디오 저널리스트)라 불리는 PD들이 소형 카메라를 들고 화제의 현장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특색 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에 찾아가 음식이 만들어지는 주방과 손님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화면은 맛집 소개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전체 구성 중 맛집을 소개하는 에피소드의 시청률이 높았고 그 비중도 컸다. 화려한 불쇼 등으로 시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화면은 시청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방송의 장점을 잘 살리는 방식이었다. 훗날 등장한 SBS 〈생활의 달인〉도 식당만을 다루는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먹방으로 분류할 수 있는 에피소드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는 점에서 〈VJ 특공대〉의 전형을 따랐다. 이런 프로그램이 맛집을 소개하는 먹방의 전형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출연자는 식당 주인, 요리사와 손님 같은 일반인이었다. 이런 틀을 깬 프로그램이 2001년 11월 시작한 MBC 〈찾아라 맛있는 TV〉다. 이 프로그램은 처음으로 연예인을 출연시키며 본격 ‘음식 버라이어티 쇼’를 표방한다. 연예인의 단골집을 소개하는 ‘스타의 맛집’ 등 다양한 코너가 진행되었지만, 연예인이 직접 식당을 찾아가 음식 맛을 보고 평가한다는 포맷은 이어졌다. 그전까지는 화려한 볼거리와 청각효과로 시청자에게 ‘구경하는 재미’를 제공하는 게 먹방이었다면, 연예인들의 인기를 업고 단골이라는 신뢰도를 바탕으로 소개된 음식은 ‘맛있을 것이다’라는 믿음까지 끌어냈다.
먹방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TV에 나온 집’은 성공을 담보하는 보증서로 통했다. 연예인이 나와 ‘맛있다’라고 한 식당에는 모두가 열광하고, 자신이 느끼는 맛과 상관없이 줄을 서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TV 오락 프로그램을 보는 것으로 끝났다면 이제는 시청자가 지갑을 들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게 만든 것이다. 먹방의 시청자는 곧 맛집의 소비자가 된 것이다.
미디어의 맛집 열풍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블로그와 SNS를 통해서 맛집을 접하기 시작했다. TV에서 정보를 얻은 시청자는 인터넷으로 그 경로를 옮겼고, 연예인이 보증하던 ‘맛’은 개인의 비평으로 무게 중심이 바뀌었다. 2010년을 넘어서면서 TV의 먹방은 블로그와 경쟁하는 처지가 되었다. TV에 소개되는 집은 이미 블로그 등에서 인기를 얻은 맛집의 뒷북에 지나지 않거나, 다큐멘터리 〈트루맛쇼〉에서 폭로된 것처럼 시청자의 지갑을 노린 외식업자와 방송이 조작한 ‘만들어진 맛집’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시청자는 TV의 먹방보다는 개인의 블로그를 더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TV의 주도권이 공중파에서 케이블로 넘어가는 것과 맞물려, 먹방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포맷의 음식 프로그램이 등장하는데, 바로 쿡방이다. 요리사가 연예인의 냉장고 속 재료로 요리를 만들어 대결하는 JTBC〈냉장고를 부탁해〉, 새마을식당으로 알려진 백종원에게 요리를 배우는 tvN〈집밥 백선생〉, 신동엽과 성시경이 요리하는 〈오늘 뭐 먹지?〉 등이 마니아층을 넘어서 폭넓은 시청자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방송 직후에는 소개된 레시피, 요리사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점령한다. 한마디로 쿡방이 대세이다.
그렇다면 시청자는 왜 쿡방에 열광할까? 한마디로, 오늘날의 쿡방은 기존의 예능을 대체하는 프로그램이다. 연예인 못지않은 예능감을 자랑하는 ‘셰프테이너’들의 박진감 넘치는 몸짓과 화려한 영상, 긴박감을 자아내는 시간제한과 대결 구도, 요리를 시식하는 연예인들의 호들갑에 가까운 감탄사는 교양 프로그램이 아닌 오락 프로그램임을 확인하게 한다. 국방은 〈무한도전〉이나 〈1박 2일〉을 대체하는 가족 오락 프로그램이다.
그렇다고 쿡방이 요리 강습의 요소를 버린 것은 아니다. 요리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요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밥 백선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요리를 표방하면서 인기를 얻고 있다. 백종원의 가르침을 받는 남자 연예인들은 누가 봐도 어수룩하다. 그 모습은 시청자에게 나도 저만큼은 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여기에, 뭐든지 잘하는 남자 성시경과 요리 지진아 신동엽이 함께 요리하는 〈오늘은 뭐 먹지〉는 요리하는 남자와 요리를 배우려는 남자에게 호감을 갖는 요즘의 트렌드를 담아내고 있다. 백선생은 요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쉽지유? 빠르지유?” 요리할 줄 모르는 이는 ‘쉽지유?’가, 시간에 쫓겨 사는 이는 ‘빠르지유?’가 유혹한다. 요리할 줄 모르고 요리할 시간이 없는 이유는 저녁이 없는 빠듯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음을 보여주고 백선생은 그 점을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쿡방은 식품회사의 거대한 광고판이기도 하다. 〈집밥 백선생〉의 요리법은 가족이 모여 있는 집의 것이 아닌 대중식당의 것이다. 〈오늘 뭐 먹지?〉는 언뜻 보기에는 쿡방이지만, 두 진행자에게 요리법을 알려주는 이는 대중식당 주인이다. 대중식당의 레시피는 많은 사람의 입맛과 판매가격을 맞추기 위해 달고 매운 자극적인 양념과 MSG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현재 쿡방을 주도하는 tvN과 올리브채널 등을 소유한 CJ E&M의 모기업은 CJ다. CJ는 설탕과 다시다를 팔아 성장해온 기업이다. 이런 기업이 자신의 프로그램에 ‘슈가보이’라는 별명을 가진 외식 프랜차이즈 사업가를 출연시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증권가에서는 쿡방을 보면 주가를 알 수가 있다는 말까지 한다. 〈집밥 백선생〉이 방영된 다음 날 대형마트의 설탕 매출액이 4배 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1964년 미국의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은 미국의 식량원조 프로그램의 영향을 전망하면서 “제3세계의 수많은 이가 미국산 농산물에 맛을 들이는 곳에 미래의 거대 식품시장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형 식품기업은 먹방과 쿡방에서 미래를 본 것일까?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흐는 “네가 먹는 것이 곧 너다”라고 말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먹방과 쿡방이 곧 우리일 것이다. ●

110-129 9월호7110-129 9월호8

9월호 특집4

SPECIAL FEATURE 먹고, 요리하고, 예술하라

Cooking time in Contemporary Art
현대미술에서 요리가 ‘그림의 떡’을 벗어난 지 이미 오래다. 미술관 안팎에 먹을 것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가 직접 장을 보고, 음식을 조리하고, 심지어 식당을 차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작가와 시간을 보내며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 동행, 친구를 뜻하는 영어단어 ‘companion’의 어원이 ‘함께 빵을 먹는 사람’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단순힌 ‘먹는’ 것을 넘어 새로운 장을 이끌어 냄을 알 수 있다. 이 섹션에서는 ‘요리’를 매개로 한 작가들의 작업을 소개한다. 이들의 작업은 미각적 체험을 넘어 타인과 경험을 공유하게 하며 새로운 삶과 예술의 관계항을 이끌어 낸다. ‘관계’를 중심에 둔 그들의 공통된 미학적 태도와 동시에 각각의 작가가 지향하는 다채로운 의도와 맥락을 살펴본다.

컨플릭트 키친
타인을 인식하는 시선

미국 피츠버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룹이다. 존 루빈(Jon Rubin)과 돈 웰레스키(Dawn Weleski)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의 그룹명이기도 한 〈컨플리트 키친(Conflict Kitchen)〉은 미국과 대척점에 있는 국가의 음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 시리즈 작업이다.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북한 등의 음식점을 피츠버그에 차렸다. 북한 버전 〈컨플리트 키친〉을 열기 전 제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에 참여해 〈이북 음식 가이드〉와 〈라이브 식탁〉 등 북한 음식에 관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남북한 평화를 추구하는 여성단체인 ‘조각보’를 만나 음식 조리법을 배우고, 북한이탈주민 인터뷰를 진행했다. 〈라이브 식탁〉은 화상전화를 통해 신청자를 모집해 피츠버그의 컴플리트 키친 스태프 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미국의 워싱턴 등 총 7곳에서 접속한 8팀이 참여해 공유한 조리법을 토대로 요리한 음식을 함께 먹는 프로젝트다. 작가는 “음식의 사회적 관계, 경제적 교류를 통해 국가, 문화 그리고 흔히 정치적으로 양극단에 있다고 말하는 국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논의의 기회”를 제공한다. conflictkitche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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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민에게서 만둣국과 두부밥 등 이북 음식의 조리법을 전수받는 〈이북 음식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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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음식을 판매하는 〈컨플릭트 키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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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연
영혼의 허기를 채우는 자체 제작 포장마차

정착하지 못하는 삶의 불안에서 시작된 유케아(UKEA)는 유목연의 브랜드다. 그가 직접 제작한 〈목연 포차〉는 슈퍼마켓 카트 위에 만들어진 작은 1인용 이동식 선술집이다. 작가는 서울 광주 군산 등에서 소주 한잔과 비엔나소시지를 나누며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철원에서 열린 〈리얼DMZ 프로젝트 2015 동송 세월〉에서는 〈통일 국수〉를 새롭게 선보였다. 장수를 의미하는 국수를 직접 만들어 관객에게 제공하며 통일에 대한 염원과 지역의 역사를 담았다. 오픈된 공간에서 열리는 그의 작업에는 예술계 내부의 유통을 넘어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게 된다. 예술의 영역에 입장하지 않은 채 미술에, 혹은 작가와 관계하게 된 참여자는 미술의 영역을 줄타기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www.mokyon.com

목연포차 (4)

〈목연 포차〉 가변크기 2012~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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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한 교감

〈FREE Flight〉와 〈봉지 속 상자〉는 전시 오프닝이라는 행사 자체를 작업으로 삼았다. 작가는 중요하지만 부차적인 오프닝 행사라는 조연에게 주연의 자리를 내준다. 〈봉지 속 상자〉는 전시 오프닝에 참석할 사람들에게 저녁 식사와 관련해 사전에 던진 질문지를 바탕으로 작가가 저녁 장을 보고 저마다의 저녁거리 식재료가 담긴 비닐봉지를 관객 손에 들려주는 작업이다. 질문지에는 저녁 먹는 시간, 함께 먹는 사람, 즐겨먹는 메뉴, 좋아하는 색상, 치아 상태 등을 묻는 20가지의 질문이 담겨있다. 오프닝 후 관객은 작가가 제공한 식재료로 저녁을 해먹을 수 있다. 한편 〈FREE Flight〉는 오프닝 행사를 위한 김밥과 테이블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후 이들의 제작과정을 책자로 만들어 보여준다. 박보나는 작가가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과정을 통해 일시적 만남보다는 관계와 소통을 통한 ‘교감’을 이끌어낸다. www.bonapark.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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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Flight전〉 오프닝에 사용한 테이블, 테이블보, 김밥 가변크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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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식
지역 공동체와의 관계
현재 ‘무늬만커뮤니티’의 디렉터로 활동 중인 작가는 공동체의 관계성, 지역과 삶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한다. 2007년 선을 보인 〈다기조아 10호점〉은 치킨집 사장님과 함께 택한 키치적 미감의 오브제로 기념비를 세우고 미국 패스트푸드 치킨과 한국의 닭튀김이 섞인, 한국 맛도 미국 맛도 아닌 ‘다기조아’의 치킨을 전시장에 들여와 한국의 서구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드러낸다. 올해 4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최한 퍼포먼스 〈커뮤니티를 위한 모뉴멘트〉에서는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 거주하는 지역민과 예술가들과 함께 단기간 고도로 성장한 우리 근현대사를 열심히 살아온 ‘개인’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냈다. 테이블 제작, 수타 자장면 퍼포먼스 등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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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식 김기만 박기수 류승진 더나라 〈커뮤니티를 위한 모뉴멘트〉 퍼포먼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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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민
교환과 나눔을 통한 관계 맺기

〈밥 먹고 가세요〉시리즈는 인천 남구 숭의동에 위치한 수봉다방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다. 작가는 음식 재료가 그려진 손바닥만한 크기의 캔버스 작품을 수봉다방에 전시했다. 관객은 그림에 해당하는 실제 음식재료를 들고 와 그림과 교환했다. 음식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모아 직접 요리하고 이를 관객과 함께 나눠 먹었다. 총 3회에 걸쳐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밥 먹고 가세요 #1 부대찌개〉부터 〈#2 떡만두국〉, 〈#3 짜장면〉으로 이어졌다. 작가는 적극적인 참여자로 사람들과 관계한다. 관객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마을 사람들과 직접 관계 맺는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억을 공유한다. hparkart.com

〈밥 먹고 가세요〉 2015

〈밥 먹고 가세요〉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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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자
먹을 것을 구하는 노동의 직접적인 행위

음식은 낯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직접적인 경험이 된다. 작가는 〈정통의 맛〉에서 라면, 국수, 레토르트 카레 등의 포장지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고, 조리예에 따라 조리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고 음식을 직접 만들어 전시로 구현하는 방식을 취했다. 작가는 보기 위한 음식으로 디자인된 이미지의 가상성을 다시 실재화한다. 그리고 익숙한 이미지 속에서 실재의 낯섦을 발견한다. 한편 〈겨우-살이〉는 예술가의 노동과 음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2011년 선감도의 경기창작센터에 머물 당시,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돕고 김장 재료를 얻어 겨울을 나기 위한 김치를 담그고 이를 오픈스튜디오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대접했다. 작가는 이 작업에서 “무언가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생산적으로 보이지 않는 미술가로서의 직업, 일이 먹을 것을 구하는 행위와 일치하도록 하려 했다.” www.guminja.com

구민자1

〈겨우살이〉 가변설치 2010

SPECIAL FEATURE 먹고, 요리하고, 예술하라

Eating well with Artist
지금까지 음식과 시각미술을 둘러싼 다양한 조합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내용은 작가의 밥그릇이다. ‘먹는다’는 말은 행위를 넘어 ‘삶’ 그 자체를 의미하고도 한다. 예술가는 어떤 방식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가. 사회는 예술가의 밥그릇을 들여다본 적 있는가. 작가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보자.

화가의 ‘밥그릇을 부탁해!’

배종헌 작가

대학시절 친구 두 명과 함께 어느 초등학교 강당의 대형 입간판용으로 벽화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벽화 비용은 하루 만에 작업을 끝내야 하는 정도였다. 단시간에 작업을 하기 위해 미리 도안이며 재료를 준비해두고 작업 당일 아침 일찍부터 어둑해질 때까지 거의 쉼 없이 일했다. 일이 끝날 즈음, 교감선생님이 오셔서 벽화를 살피시며 한 마디 하셨다.
“칠이 벗겨지거나 하면 곤란한데 이거 얼마나 갈까?”
“글쎄요. 1, 2년은 갈 거예요.”
그 말을 들은 교감선생님은 더 오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셨고, 우리는 고심 끝에 코팅을 하면 벽화가 좀 더 오래 보존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교감선생님은 서비스로 내일 한 번 더 와서 그렇게 해달라고 하셨다. 우리는 추가로 발생하는 재료비며 우리 인건비는 추가 지급될지 여쭈었다. 그때 그 교감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십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예술을 한다는 학생들이 벌써부터 돈을 밝혀? 순수해야지. 예술 하면서 돈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예술가의 밥그릇은 밥 없이 예술만으로 채워져야 옳고 예술가의 밥그릇에 밥을 담으면 그것이 순수하지 못한 것인지. 나는 나의 밥그릇을 한없이 들여다본 적이 있다. 내가 매일 끼니를 해결하는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밥그릇과 국그릇으로 이래저래 탐색을 해보았다. 밥그릇 위에 국그릇을 덮어씌워 밥그릇을 숨겨 보기도 하고, 몇몇 하찮은 측정도구로 밥그릇의 두께며 크기 등을 측정해보기도 하였으며, 밥알을 그릇 안쪽에 일렬로 붙여 밥그릇이 몇 밥알 크기인지 재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를 하여도 예술가의 밥그릇은, 예술가의 국그릇은 내 뱃속에서 울리는 허기를 채워주는 데에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진짜 밥을 퍼서 밥그릇에 담아 내 목구멍으로 넣어야 비로소 배가 불러졌다.
서양미술사에서 음식이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되었을 때, 거기엔 인간의 부질없는 탐욕을 경계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배웠다. 왜냐하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쉬이 부패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고야 말 덧없는 인생의 무상함을 상징함과 동시에 이를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절제된 삶을 요구하는 작품들로 읽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상징성과 교훈적 메시지는 칼뱅이즘(Calvinism)이 주름잡던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에 담긴 전형화된 의미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당시 네덜란드인의 식탁은 비교적 풍성했으리라. 17세기 세계적 지위의 상징이던 동인도회사가 네덜란드를 거점으로 한 회사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네덜란드는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칼뱅이즘은 교회에서 성상 숭배를 금기시하였으니 화가들은 절제를 중시하는 당대의 종교적 입장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장면을 원하는 자본가의 눈높이에 맞는 그림을 그려 생존하였던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음식정물화를 무상(無常)의 알레고리 정도로만 읽는 것은 작품 자체에 머문 감상적 이해의 차원에 머무는 것과 같다. 당시 화가들은 교회의 주문이 끊어진 것을 대체하기 위해, 다시 말해 먹고살기 위해 그와 같은 그림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음식정물화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대한민국. 오늘 우리의 TV프로그램들은 온통 ‘먹방’ 잔치다. 한국 기업들의 위기, 청년실업 문제, 은퇴 후 노후자금 문제 등 온통 생존의 위기의식이 뉴스를 장식하는 이때에 말이다. 그 틈바구니 속에는 분명 예술가들의 삶도 있다. 사실 예술가는 언제나 경제적 위기를 겪어왔다. 하지만 예술가의 굶주림을 빈곤으로 보지 않고 예술의 양분으로 치켜세웠기에, 빈곤한 예술가는 배고프다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술가에게도 냉장고가 필요하고, 배를 채울 양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예술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대다수 예술가의 냉장고 속은 참으로 궁색하기만 하다. 어느 TV프로그램처럼, 이런 보잘것없는 예술가의 냉장고 속 재료들로라도 건강한 음식을 요리할 수 있는 레시피는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TV에서 놀라운 기지를 발휘해서 능력을 과시하는 그런 셰프들처럼 예술가의 빈곤한 냉장고를 열어 감탄스러운 음식을 만들어줄 예술가의 셰프는 없단 말인가.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처럼 스스로 변해야 하는 것일까. 졸업하면 작품 활동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진로를 탐색하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의 예비 예술가들을 나무랄 자격이 나에겐 없다. 새삼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속 감자가 목이 메게 절박하게 느껴진다. ●

배종헌 02

배종헌 〈다 먹다〉 밥그릇 국그릇과 측정도구 1998

배종헌 〈밥_그릇〉 밥으로 만든 밥그릇 2001

배종헌 〈밥_그릇〉 밥으로 만든 밥그릇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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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The Stiff Neck Chamber A/W 2013 Collection > ⓒHenrik Vibskov  아래 < Face Wool Explosion > 2013 ⓒHenrik Vibsko

〈헨릭 빕스코프-Fabricate〉 대림미술관 7.9~12.31

‘아티스트’로서, ‘패션 디자이너’로서

헨릭 빕스코브(Henrik Vibskov, 1972~)는 우리에겐 생소한 인물이다. 하지만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Central St. Martin’s College of Art and Design)을 졸업한 지 불과 2년 만에 파리 패션위크에 데뷔할 만큼 디자이너로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현재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작가이다. 그는 단순히 패션디자이너로서뿐만 아니라 순수미술, 사진, 영상, 퍼포먼스와 음악까지 다양한 형식의 예술적 시도를 선보이고 있고 뉴욕 MoMA PS1, 파리 팔레 드 도쿄, 헬싱키 디자인뮤지엄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그를 초청하여 개인전을 연 바 있다. 또한 그는 뮤지션 비욕(Björk), 시규어 로스(Sigur Rós) 등과 협업하고, 노르웨이 국립오페라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 메인 의상을 디자인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그를 서울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아시아 최초로 열리는 그의 개인전 <헨릭 빕스코브-패션과 예술, 경계를 허무는 아티스트(Henrik Vibskov-Fabricate)전>(대림미술관, 7.9~12.31)을 통해서 말이다.
대림미술관 전관에서 열리는 전시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헨릭 빕스코브’, ‘아티스트로서의 헨릭 빕스코브’, ‘헨릭 빕스코브의 세계’ 3개 섹션으로 나뉘는데 마치 패션쇼의 런웨이를 옮겨놓은 듯한 무대장치, 설치미술, 의상 제작에 있어 다양한 재료와 컬러 등을 제시하고 있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만난 그는 한국과 패션 관련 전시로 몇 번 인연을 맺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본인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질문에 의외로 “패션과 미술은 차이를 갖는다”며 “다만 그 둘 사이의 관계성이 나의 관심사”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 대해서는 “신작을 위주로 작품을 설치했다. 다만 공간이 작아서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며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장소인 이 정원에 작품을 재설치하고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테크닉적으로 발전한 것, 복잡하게 변한 구조, 언캐니한 것 등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에 대해서는 “미술관이라는 공공의 장소에서 여러 부류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만큼 내 작업에 대한 비평의 시각은 경우에 따라 다를 것”이라며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황석권 수석기자
 

HOT ART SPACE

망치질한 그대, 쉬어라

하루 660번 주 5일 쉬지않고 망치질을 해온 망치질의 달인, 〈해머링 맨(Hammering Man)〉이 12년 만에 2달간의 장기 휴식에 들어간다. 지난 6월부터 〈해머링 맨〉은 노후한 부품 교체와 도색 작업을 위해 잠시 멈춰진 상태다. 조각가 조너던 브롭스키(Jonathan Borofsky)의 작품인 〈해머링 맨〉은 2002년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1가 흥국생명 건물 앞에 세워진 이후 광화문 지역의 랜드마크구실을 톡톡히 해왔다. 겨울에는 산타모자를 쓰고 부츠를 신어,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기도 하며 거리를 스치는 많은 이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해머링 맨〉은 실내에 세워진 목조각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미국 시애틀, 스위스 바젤 등 전 세계 11개 도시에 세워진 공공조각이 있다. 서울의 〈해머링 맨〉은 공공조각 중 7번째 설치된 작품으로 높이 22m, 무게 20톤의 거구다. 망치를 든 손은 가슴높이에서 다른 손이 놓인 위치까지 아래위로 움직인다. 모든 창조물이 마음과 손으로 창조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1979년 뉴욕의 파울라 쿠퍼 갤러리(Paular Cooper gallery)에서 〈Worker〉라는 이름으로 처음 탄생한 〈해머링 맨〉은 노동자를 상징한다. 조너던 브롭스키는 “처음에는 세계 곳곳에 〈해머링 맨〉을 세우고 동시에 망치질을 하도록 하려했다. 이 작품을 통해 전 세계의 노동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고 싶었다”고 작업의 의미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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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오_공시네, 양만치 (1)

공시네 양만치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7.9~8.30

공간을 모티프로 작업하는 두 작가의 전시. 공시네는 공간이라는 3차원의 문제에 주목, 공간을 평면으로 보여주는 등의 작업으로 회화와 조각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양만치는 공간에 대한 추상적 사고와 감성을 분석한 결과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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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김영자 (2)

김영자 개인전
사랑아트갤러리 6.20~7.17

색면으로 구성된 추상작업을 하는 작가의 이번 전시 타이틀은 ‘Le Jardin(정원)’이다. 분노와 증오라는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마치 정원을 가꾸는 이처럼 작가의 종교적 의지와 결합하여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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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헌 (1)

배종헌 개인전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 6.5~9.15

작가의 제2회 고암미술상 수상을 기념하는 전시다. 작가는 일상을 맥락화하고 다양하게 해석하여 미술의 문맥으로 옮겨놓는다. 근작을 비롯, 20여 년에 걸친 주요작을 한자리에 모아 작가의 작업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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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득

조원득 개인전
57th갤러리 7.1~6

전시 타이틀 ‘묻다’는 무엇을 숨기거나 감출 때, 그리고 무엇을 알아내기 위한 행위에 대한 의미를 담은 중의적 명명이다. 그 행위를 통해 상황을 극복하거나 회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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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화랑 (1)

송용민 개인전
나무화랑 7.8~21

작가의 아홉 번째 개인전은 ‘한국현대사 4-공순이·공돌이’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타이틀이 암시하듯 노동자와 민중을 향한 작가의 시각이 정면을 노려보는 등장인물의 강렬한 눈빛에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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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석 (1)

김호석 개인전
고려대박물관 7.6~8.16

은은하고 맑은 화풍을 특징으로 하는 작가의 개인전. 이번 전시는 세월호와 윤 일병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업을 비롯, 사회적 이슈가 된 현상을 한 걸음 떨어져 관찰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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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아지한남 (2)

피터팬 신드롬
LIG아트스페이스 한남 7.13~8.14

LIG아트스페이스 한남의 개관전 3부 전시. 손현수 전병철 2명의 작가가 참여해 어른 되기를 기피하고 아이로 머물게 하는 자본의 폐해를 드러낸 작품을 선보인다. 키덜트 문화에 대한 참된 이해를 위해 기획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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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곡_마이어,위노그랜드 (8)

비비안 마이어×게리 위노그랜드
성곡미술관 7.2~9.20

이 전시는 비비안 마이어의 <내니의 비밀>과 게리 위노그랜드의 <여성은 아름답다> 두 개의 전시로 구성됐다. 작가로서 그들의 노정은 극명하게 대비되는데, 이를 통해 동시대를 공유한 이들이 어떻게 다르게 세상을 바라봤는지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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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우 아트
광주시립미술관 6.30~8.16

‘상상과 놀이’, ‘헬로우 백남준’, ‘후아유’ 이렇게 3개 섹션으로 나뉘는 이 전시는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기획됐다. 19명의 작가가 참여해 시각적으로 익숙하고 흥미로운 작품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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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I 양정욱,씬킴 (3)

2015 OCI YOUNG CREATIVES
OCI미술관 6.18~7.14

올해 6기를 맞은 OCI미술관 영크리에이티브스의 두 번째 전시로 양정욱과 씬킴이 참여했다. 양정욱은 개인의 서사와 감정 등을 물리적 장치로 시각화했으며 씬킴은 자연의 웅대함을 담은 캔버스를 통해 인간과의 관계를 환기시킨다.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본격적으로 국가체제를 수립했으나 시간에 맞서야 했다. 국가는 물론 사람이 모였던 사회 각계의 모든 분야가 그러했다. 그 과정은 말 그대로 ‘굴곡(屈曲)’이었다. 때론 꺾이고 때론 굽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흐름은 지금으로 이어졌다. 미술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월간미술》이 바라보는 우리 미술 70년은 단절의 역사가 아닌 연속성을 갖고 흘러왔다. 그래서 10년 전 광복 60주년의 성대한 기억을 호출했다. 당시 주요한 정치·사회적 사건을 기준으로 구획한 6마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요동친 미술판을 정리했던 필자들이 다시 이번 기획에 참여, 1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에 따른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물론 그 이후 미술계의 10년은 사안별로 정리했다. 또한 미술판과 우리 사회가 별개로 움직이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연보와 차트를 실었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도 소개한다.
광복 이후 우리 현대미술사를 정리한 대전시립미술관의 <예술과 역사의 동행, 거장들의 세기적 만남전>(5.23~8.23)과 분단현실에 초점을 맞춘 <북한 프로젝트전>(7.21~9.29)이 그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전>(7.28~10.11)에 대한 프리뷰도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광복 70주년은 말 그대로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변화라는 말의 또다른 표현일 것이며, 우리 미술도 이에 따라 새로운 양상을 선보였다. 그 흐름을 짚어가며 지금의 나, 너,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자.

시민과 함께 하는 광복 70년 위대한 흐름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7.28~10.11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즐비한 가운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도 이에 대한 전시가 열린다.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전> (7.28~10.11)이 바로 그것. 전시 타이틀대로 이번 전시는 3개 섹션, 즉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으로 나뉘었다.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를 형용사로 규정하여 동시대의 규정할 수 없는 삶을 드러내고자 했다. 3개 섹션은 각각 ‘전쟁으로 분단된 조국’,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민주화’, ‘세계화된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삶’을 그 내용으로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비롯, 총 110여 작가의 작품 270점을 선보인다. 전시 공간 디자인은 최정화가,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한 대중음악은 시인이자 대중음악가 성기완이 맡아 선곡, 각 시대의 분위기를 입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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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운
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조국, 떠나온 고향과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전후의 삶이 펼쳐진다. 전시공간은 분단의 상징인 철조망과 조국부흥 기치 아래 진행된 개발을 상징하는 거푸집으로 꾸며졌다. 정창섭, 김혜련의 작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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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1960~1980년대 단기간에 이루어진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부정된 근대성을 극복하려는 민주화를 주제로 했다. 시인이자 대중음악가 성기완이 협업하여 시대를 풍미한 대중음악이 흘러나온다

넘치는
세계화된 동시대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삶을 보여준다. 최정화의 작업과 백남준의 <이태백> 등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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