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나에게 그림은 현장이다_주영하

나에게 그림은 현장이다

민속학 교수 주영하

어릴 적에 그림을 그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사생대회에 나가서 제법 큰 상을 받은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릴 적 일이지 대학원에서 음식의 문화인류학을 공부할 때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미술은 추억이었다. 그런데 옹기 장인을 조사하면서 그들이 펼치는 미학에 빠져서 전국의 장독대를 뒤진 적이 있다. 아무리 사물이라도 자주 보면 더 자세히 보이기 마련이다. 매번 만나는 옹기의 문양과 형태를 필드노트에 그리다 보니 어느새 옹기 그리는 일은 밥 먹듯이 쉬웠다.
1990년쯤, 옹기 때문에 만난 그림이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다. 너무나 매력적인 기산 풍속화에 빠져들면서 먼저 옹기와 관련된 그림을 선별하였다. 그것을 화집으로만 보니 옹기를 그릴 정도로 깊이 빠져들지 않았다. 제법 큰돈을 들여 몇 장의 기산 그림을 큰 그림으로 인화 하였다. 이것을 공부방 벽에 붙여 놓고 매일같이 내 얼굴 들여다보듯이 보았다. 처음에는 보기만 하다가 점차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나왔다. 바로 ‘독점’이란 화제의 그림이었다.
급기야 이 그림을 벽에서 떼어내어 옹기 장인을 찾아 나섰다. 마침 그해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충남 홍성 갈산의 고 이종각 장인을 알고 있던 터라 그 일은 쉬웠다. 이종각 장인도 처음 이 그림을 보고는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술술 터져 나왔다. 가마의 제작과 창불구멍의 기능, 그리고 일꾼들의 역할 분담까지. 이 인터뷰가 바탕이 되어 나는 기산의 ‘독점’ 그림 하나를 가지고 200자 원고지 80매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사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오로지 백성을 배 불리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 대안으로 음식을 다루었다. 비록 허균과 같이 전국의 맛있는 음식을 짧은 글로 적은 선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식정(食政)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실학자라고 불리는 학자들이 적어놓은 음식 관련 기록이 실제로 행해진 일인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실제로 행해진 것이라 해도 그 현장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2000년부터 다시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기산의 ‘독점’을 두고 했던 작업 방법을 떠올렸다. 먼저 중앙일보에서 펴낸《한국의 미-풍속화》편에서 음식과 관련된 그림을 선별하는 작업을 했다. 고구려 때의 고분벽화는 물론이고 안중식의〈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까지 수십 편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spec10이들 그림 역시 매일 거울을 보듯이 읽었다. 그래도 미술사를 전공하지 않은 입장에서 남의 밥그릇을 넘보는 듯하여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일본의 가나가와(神奈川) 대학 비문자(非文字) 연구센터(당시 상민문화연구소)에서 진행하던 기록화 자료 읽기 작업이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 연구소에서는 그림 자료와 사진자료를 사료로 보고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이용했다. 특히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일반 백성의 일상생활을 그림 자료를 통해서 읽어내는 작업은 마치 현장을 복원하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그러던 차에 국내의 한 식품회사 사보 담당자가 음식을 주제로 연재를 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나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 자료를 가지고 음식의 역사를 풀어보자고 응답했다. 그 편집자가 작명한 연재의 제목이 그 이후 단행본의 책 제목이 된《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이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그림 속에 음식 자체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지는 않다. 화원들이 사진 찍듯이 그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상 식사 장면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러니 나의 입장에서 조선시대 음식과 관련된 그림은 음식을 소비하는 현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현장감은 조선시대 음식사를 연구하는 데 너무나 중요하다. 더욱이 음식의 색감은 그림 속에서 분명히 감지된다. 이런 면에서 나에게 그림 자료는 현장은 물론이고 음식의 색과 음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몸짓을 이해하는 데 없으면 안 되는 사료이다. ●

주영하는 1962년 경남 마산의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풀무원 김치박물관에서 근무하며 음식사를 접했다. 1993년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교수로 재직 중이다. 음식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김치, 한국인의 먹거리-김치의 문화인류학》《음식전쟁 문화전쟁》《음식인문학 》《맛있는 세계사》 등의 저서가 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고양이를 부탁해_고경원

고양이를 부탁해

고양이 전문기자 고경원

‘길고양이’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도시의 무법자, 혹은 달갑잖은 불청객. 언론매체에서 길고양이 뉴스를 다룰 때 묘사하는 방식은 대개 그랬다. 사람들은 흔히 사진이 진실만을 기록한다고 믿지만, 어떤 관점으로 편집되느냐에 따라 사진의 메시지는 달라진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기자로 일하면서 편집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경험했기에, 부정적인 필터를 거쳐 편집된 길고양이가 아닌,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웹진 기자로 일하던 2002년 여름부터 길고양이를 찍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길에서 만나는 고양이들이다 보니 꼬질꼬질한 얼굴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세상모르고 곱게 자란 집고양이보다 고단한 삶을 의연하게 이어가는 길고양이들이 내겐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 감정은 단순한 연민이기보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동지를 발견했을 때의 연대감에 가깝다.
고양이에게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 사진이 별 감흥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고양이 사진을 찍는 이유가 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길고양이의 삶을 더 생생하게 전하니까. 그리고 그 사진이 무심했던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니까. 거리의 고양이에게도 사연과 감정이 있고, 소중한 삶이 있음을 눈으로 보게 된다면 생명의 무게가 좀 더 묵직하게 와 닿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찍은 길고양이 사진은 1인 미디어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catstory.kr)에서 공유되며, 단행본으로 제작되어 오프라인에서도 독자들과 만난다. 첫 책《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갤리온, 2007)를 펴낼 때만 해도 길고양이를 주인공으로 다룬 한국 작가의 사진 에세이가 전무했기에, 출판기획자로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보람이 있었다. 최근에는 지난 10년간의 길고양이 관찰기를 모아《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앨리스, 2013)을 펴내기도 했다.
고양이라는 소재는 다양한 분야와 접목될 때 이야기가 더욱 풍부해진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고양이와 여행, 예술 이야기를 접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2007년 여름부터 ‘세계 고양이 여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고양이 여행자의 눈으로 각국의 애묘(愛猫)문화와 고양이 명소를 소개하는 작업인데《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행복한 고양이를 찾아가는 일본 여행》(아트북스, 2010)은 그 첫 번째 결과물이다.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공존’이라는 주제가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올 수 있도록, 일본 외에 타이완, 스웨덴, 프랑스 등 다른 나라의 고양이 여행기도 순차적으로 쓰고 있다.
spec12고양이를 작품의 소재로 삼아 창작하는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작품세계를 알리는 것도 요즘 주력하는 일 중 하나다. 고양이를 사랑한 예술가의 작업실 탐방기《 작업실의 고양이》(아트북스, 2011)가 그것이다. 최근에는 순수예술 작가뿐 아니라 고양이 만화를 그리거나, 길고양이를 위한 제품 디자인을 하는 분들도 인터뷰하고 있다.
길고양이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물운동가처럼 활동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고양이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꾸준히 한 목소리를 낼 때, 길고양이 문제는 동물운동의 영역에 갇히지 않고 사람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2009년 9월 9일에 시작한 ‘고양이의 날’ 기획전도 그런 마음을 담은 것이다. ‘고양이 목숨은 아홉 개’라는 민간 속담이 있지만, 그 말이 무색할 만큼 길고양이들의 삶은 짧고 고단하기만 하다. 1년에 하루만이라도 그들의 생명을 생각하는 날이 있기를 바라며 9월 9일을 ‘고양이의 날’로 삼아 매년 기획전을 열고 있다. 9월 9일은 고양이의 강한 생명력을 뜻하는 아홉 구(九)와, 고양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오랠 구(久)의 음을 따 정한 날이다. 또한 동음이의어인 구할 구(求)의 뜻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자비로 진행하는 행사이다 보니 예산이 빠듯해 무상대관이 가능한 전시장을 섭외하는 게 가장 어렵지만, 올해도 뜻 맞는 분들을 찾아 나설 예정이다. ●

고경원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2001년부터 웹진 및 잡지기자로 일했다. 2002년부터 여름 길고양이의 삶을 글과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고양이와 관련된 저서로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하다》 《고양이, 만나러갑니다-행복한 고양이를 찾아가는 일본여행》 《작업실의 고양이》등이 있다. 국내외 고양이 문화와 길고양이 이야기를 그녀의 블로그 ‘길고양이 통신’에서 자세히 만나볼 수 있다. 블로그: http://www.catstory.kr/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흐르는 물이 담긴 어항_신현림

흐르는 물이 담기는 어항

시인 신현림

푸른 물고기떼가 내게 헤엄쳐오듯 미술에 대한 즐거운 기억부터 떠올려보자. 중3때 반장이었던 나는 잔소리 심한 담임의 수업시간이면 반항한답시고, 일종의 미술의 역사 개략서인 교재를 읽곤 했다. 몰래 먹는 찹쌀떡처럼 야릇한 기쁨에 떨기도 했다. 고흐, 구스타프 크림트, 마티스, 뭉크, 마그리드, 자코메티를 통해 미술의 마력에 이끌렸고, 들판을 뛰어다니듯 자유한 미술세계의 신비한 매력을 맛보았다. 하지만 코믹하게도 미술대회마다 학교 대표로 나가 상을 타도 방학 때와 졸업 후에 후배로부터 상장만 전달받던 일이나 고1때 미술학원을 돌며 가격만 묻고 돌아온 쓸쓸한 날과 우리 반이 특별 구급반으로 뽑혀 미술반 가입 기회를 삭제당하는 등등 우울한 기억들이 참 많다. 예술가는 밥을 굶는다고 엄마는 미대 진학을 반대하셨고,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투사였던 아버지의 국회의원 출마와 낙선의 반복으로 고단해진 엄마의 인생 앞에 미술대학 진학의 내 꿈은 사치였고 죄였다. 그러다 재수시절 엄마에게 떼를 써서 싸게 서양화과 입시를 위한 데생과 수채화를 배웠다. 낙방과 도전 끝에 응미 쪽에 합격했으나 반년 다니다 자퇴, 원하던 학교 진학에 실패한 4수생은 심각한 불면증을 얻어 병원과 성당을 오가며 13년을 죽을듯이 앓아봤다.
국문과 선택은 단지 내가 무식한 거 같아 책을 읽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인생에는 반드시 세렌티피티가 있다. 2학년 문예사조사 수업 때 바로크사조 발표를 준비하며 나는 ‘모든 예술은 한곳에서 만난다’ 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통섭에 감을 잡은 것이다. 이후 시, 소설만이 아닌 허버트 리드, 곰브리치 예술사……. 무엇보다 철학책은 필독서라 여겼으므로 쉬운 책부터 독파해나갔고, 전보다 더 열심히 전시장을 찾으며 카탈로그도 꼼꼼히 읽곤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니 보이더라. 예술이 먼지, 내가 뭘 해야할지. 이제 불행은 행복의 시작이며 절망은 한 가닥 희망의 빛을 찾는 시작이라고 나는 간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지리도 불면증을 떨치지 못한 채,의원직을 딱 한 번 하신 아버지 덕에 취직하여 번 월급으로 판화 1년, 유화 1년을 배울 정도로 미술에 압도되는 애착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다 31세 때 사진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사진을 찍고싶은 갈망이 장작불처럼 타올랐다. 이번에는 사진에 미쳐서 어머니께서 해주신 아파트 전세비를 빼서 사진 공방을 다닐 때 새로 이사간 흉가 같은 데서 부들부들 떨며 살기도 했다.
낮엔 애들을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고 틈틈이 시를 쓰고 밤에는 사진 공부하면서 3수 때는 지원 대학원을 바꿔 들어갔다. 사람이든 학교든 인연이든 금세 풀리더라. 편집증적일 정도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 방구석에는 아직 정리 못한 사진파일이 가득하다. 남은 어렵지 않게 입학하는 학교를 나는 왜 이다지도 지지리 힘들게 들어갈까. 나는 왜 이럴까, 회의하며 정말 남다른 인생을 산다는 건 눈물겹게 싫었다. 하지만 고뇌와 고통은 인생을 깊이로 파헤쳐가는 과정이며 기회였음을 이제 나는 고개 숙여 감사한다. 늘 내 인생의 표어처럼 냉장고 문에 붙여둔 마르쿠제의 글메모가 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래 부드럽게 가슴에 비쳐들지만 글은 예리한 문 모서리같이 슬쩍 가슴을 긋고 지나간다. “예술적 진실과의 만남이란, 일상생활에서 아직껏 느껴지지도 이야기되지도 또 들리지도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을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만드는 낯설음을 자아내는 언어와 이미지 속에서 이루어진다.”
낯설음, 새롭게 하기. 예술에서 진정성과 함께 너무나 귀한 덕목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으나 새롭게 발견하는 시선들은 계속 있을 것이다. (나는 세계 사진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사진 영상에세이를 세 권 냈다. 중앙일보에 1년5개월 연재를 다시쓴 현대 세계사진사를 주제별로 묶은《 나의 아름다운 창》 외에《 희망의 누드》《 슬픔도 오리지널이 있다》이 있다. 또한 사진과 미술의 구분이 무의미한 시대에《 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이란 책도 낸 바 있다.)
우리 존재는 흐르는 물이며, 물고기며, 물풀이다. 예술은 그렇게 연약하고 사라져가는 우리 존재를 환기시키는 고민이며, 되살리는 기억이고, 그 기억을 담으려는 어항이다. 시와 미술, 사진의 어항 모습은 다르나 인생의 관점과 진실의 이미지를 다룬다는 면에서는 다 똑같다. 넉달 전에 쓴 내 시를 읊어보면 조금은 쉽게 가닿을지도 모른다. ●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신현림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어 사랑의 역사를 담고 싶어해
세상에 사랑 주며 떠난 사람들의 역사를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느는 시대에
우리가 물고기인지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시간에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으려고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시간에
죽은지 33년이 지나도 그 아들과 사는 어머니
헤어진지 3년이 지나도 그 애인과 사는 사내
죽은 남편따라 무덤의 제비꽃으로 핀 아내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에 다 담지못해
죽어서도 그의 은어떼를 품고 싶어해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고 싶어
정든 추억을 품고 싶어
흔들리고 싶어
천천히
모우빌처럼

spec13-2

신현림은 시인이자 사진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상명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순수사진을 전공했다. 미술관련 저서로는 사진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창》, 《희망의 누드》 미술 에세이 《신현림의 너무 매혹적인 현대 미술》 등이 있다. 사진작가로서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사과밭사진전>등 3회의 사진전을 열었다. 2012년에는 울산국제사진 페스티벌 한국작가 대표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판소리와 풍속화, 조선후기 아방가르드 예술

판소리와 풍속화, 조선후기 아방가르드 예술

국어국문학과 교수 김현주

판소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나에게 그림은 더 이상 한가롭게 감상하고 즐기는 여기적 대상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풍속화는 내 학문 속 깊숙이 들어와 앉아 자기를 학술적으로 대우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건 어찌보면 불행한 일이다. 학문적으로 연결되면 그림이라는 즐거움의 대상도 괴롭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풍속화를 학문적인 시선으로 골똘하게 바라봐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판소리와 풍속화가 지닌 비슷함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풍속화가 판소리 연구자인 내게 의미를 지닌 존재로 다가온 건, 처음에는 신기한 현상일 뿐이었다. 대학 시절 서예와 동양화를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산수화도 좋았지만 풍속화에 관심이 더 많이 갔다. 풍속화에 보이는 유려한 붓놀림을 흉내내면 붓글씨를 활용한 새로운 묵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품어봤던 것이다. 어쨌든 김홍도와 신윤복을 비롯해 윤두서, 조영석, 강희언, 김득신 등 많은 풍속화가의 작품을 뜯어봤던 그때 경험이 판소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되살아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특히《춘향전》에서 이도령과 방자가 광한루 구경을 나갔다가 그네 뛰고 목욕하는 춘향을 발견하고 혹하는 묘사 장면이라든가, 야밤에 춘향집으로 은밀하게 이동하고 춘향과 통정하는 모습을 그리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곧바로 혜원의 <단오풍정>, <월하정인>, <야금모행>, <연소답청>, <삼추가연> 등의 그림들을 머리에 떠올렸던 것이다. 마치 춘향전 작가가 그런 그림들을 보고 서술한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화공이
《춘향전》을 읽고 그런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다는 거꾸로의 논리도 가능하다. 이렇게 신기한 그림과 사설의 연상작용이 판소리와 풍속화를 연결하는 내 이력의 첫걸음이 되었다.
spec16처음엔 정황상의 유사함에서 시작되었지만 좀 따져보니 판소리와 풍속화 양자가 만나는 지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상을 클로즈업한 상태에서 아주 자세하게 뜯어보는 사실주의적 성향을 보인다든지, 당시 금기시되는 환경 속에서 과감하게 성적 노출을 감행한다든지, 대상을 희화화하여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든가, 여러 각도의 시선들을 배치하여 자유분방하고 발랄한 관점을 드러내는 구조상의 상동성 같은 것도 볼 수 있었다. 양자가 비슷해진 것은 시대적인 상황과 분위기가 밑바탕이 되었겠지만 둘 사이의 상상력 차원의 교류도 작용하지 않았겠나 판단된다. 소설 작가에게 당시의 풍속화나 민화가 주는 회화적 상상력이 어느 정도는 작동하지 않았을까.《춘향전》의 언어 자질을 정밀하게 따지다보면 강렬한 시각적 어휘소(語彙素)들이 널려 있음을 보고 놀라기도 한다. 어떻게 이런 강렬한 원색의 색채소, 매우 역동적인 형상소와 동작소가 나타나게 된 것일까? 그건 당시의 색채와 운동감각을 주도했던 풍속화와 민화를 빼고 말하긴 어렵다고 본다.《춘향전》 언어의 이러한 회화성은 춘향전의 영상화 작업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난 보고 있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에서 춘향이 그네를 뛸 때 흰색 붉은색 꽃들이 어지럽게 떨어지는 장면을 카메라가 잡고 있는데, 그건 ‘백백홍홍난만중(白白紅紅爛漫中)’이라는《춘향전》 언어를 가지고 고민한 결과가 아닌가. 소설 작가에게 회화적 상상력이 작동한다면, 풍속화가에게는 소설적 상상력이 작동하지 않았을까.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소재 그림 대다수는《이춘풍전》이나《왈자타령》,《절화기담》 등과 같은 당시의 세태소설들과 테마, 분위기, 정조, 표현방식 등에서 상당한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혜원은 유곽이 있는 뒷골목과 거기 사람들의 생태를 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책가의 소설본들을 빌려 읽는 데도 관심이 아주 많았던 듯하다.
내가 풍속화와 판소리에 견인되었던 이유의 하나는 화공과 광대의 그 치열했던 삶에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숱한 난관에도 불굴의 의지로 그림과 소리를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판소리 광대들은 천민으로부터의 계급적 해방, 그리고 무당 집안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비원을 소리에 담아내고 있고, 풍속화 화공들도 신분의 한과 사회적 냉대 등의 환경 속에서 시대정신을 화폭에 담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들의 도전적인 실험정신과 투철한 장인정신이 없었다면 전대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조선 후기에 찬연하게 등장한 아방가르드 예술로서의 풍속화와 판소리가 그렇게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지는 못했으리라.
내가 문화사적인 전체 맥락 속에서 조선후기 문학과 판소리를 보고 있는 한 풍속화는 아마도 역동적인 모습으로 항상 내게 다가올 것 같다. 거울처럼 상대가 되는 장르를 비추면서 문화론적인 반사작용을 할 것이므로. ●

김현주는 서강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춘향전의 연행론적 연구》를 박사학위논문으로 썼다. 현재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고전서사체 담화분석》 《구술성과 한국서사전통》 《판소리 담화 분석》등을 저술했다. 판소리와 풍속화를 소설과 회화적 상상력으로 서로 소통하는 존재로 보고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연구한 《판소리 소설을 읽으며 풍속화를 보다》를 펴냈다. 이 저서에서 정조시대 문학과 회화에 주목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그림이 법의학과 만나니 억울함의 탈도 벗겨지더라_문국진

그림이 법의학과 만나니 억울함의 탈도 벗겨지더라

법의학자 문국진

인권이 침해된 범죄사건이 발생하면 법의학적 감정(鑑定)을 의뢰하게 된다. 이때는 사람만이 아니라 각종 증거물들이 대상이 되며, 사인(死因)을 밝히기 위해서는 시신도 부검한다. 만일 시일이 오래 경과하여 시신이나 증거자료가 없는 경우에는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게 되는 것이 지금의 법의감정 분야 실정이라 하겠다. 필자는 이러한 경우 고인과 관계되는 문건이나 창작물이 남아 있다면 이를 분석해 법의학이 목적하는 인권의 침해 여부를 가려낼 수 없을까를 생각해왔다.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정신의학에서의 병적학(Pathography)
이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문호나 장인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정신분석을 실시함으로써 살아생전 작가의 정신적 질병이나 당시의 심리상태 등을 알아내는 것이 바로 병적학이다. 현존하지 않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문헌이나 작품 분석을 통해 고인의 정신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법의학계에서도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생각 되었다. 따라서 고인의 유물이나 문헌 및 작품 등을 통해 법의학 분야에서도 사인이나 인권의 침해 여부를 추출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가능성 여부를 시험해보기에 이르렀다.
spec19첫 번째 시험 대상은 화가 반 고흐의 작품이었다. 그는 권총 자살을 시도했는데 이틀이 지나서야 사망했기 때문에 타살 또는 사고사라는 의견이 분분했으며 사인에 대해 많은 의문을 남겼다. 필자는 그의 작품과 문헌들을 면밀히 검색하여 그의 사인은 ‘총상으로 인한 급성법발성 복막염’이며 ‘자살’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이를《 반 고흐 죽음의 비밀》(2003)
이라는 저술로 펴낸 바 있다. 각종 문건의 분석을 마치 시체를 부검(剖檢)하듯 시행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문헌검색을 ‘문건부검(Book Autopsy)’이라 칭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창작물 등의 흔적을 탐지하고 탐구하여 진실을 밝힌다는 의미에서 법의학의 이런 분야를 ‘법의탐적론(Medicolegal Pursuitgraphy)’이라 칭하기로 했다. 법의탐적론의 대상이 되는 각종 창작물 중에서도 미술작품이 가장 좋은 분석 대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화가는 역사화나 인물화 등을 그릴 때 시대가 부여하는 목적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고증을 참작하고 철학적 지성과 자신만의 미적 혼(魂, 예술적 영감)을 융합해 작품을 완성하기 때문에 미술작품은 곧 그 환경과 시대를 증언하는 무언의 증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보는 이의 안목과 전문성에 따라 그 해석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 행위자체가 제2의 창작행위라 할 수도 있다. 이는 그림을 보는 감상자 각자의 경험과 전문성에 따라 마음속에는 자기만의 독특한 감상결과가 생겨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림을 감상할 때 화가의 미적 기교보다 현 시대적 비판에서 우러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봤다. 그 결과 명화들 가운데는 인권에 대한 침해를 경고하고, 인권의 수호를 찬미하는 등의 여러 형식으로 표현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때로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것도 있었다. 즉 스페인의 거장 고야의 <벌거 벗은 마하>(1800)의 모델이 누군가에 대하여 작가가 함구하였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로 비화해 200여 년간 의문의 화제가 되어 오던 것을 작품들의 법의탐적론적 분석으로 모델은 알바 공작부인이 아니라는 것을 가려내어 오랫동안 불명예스러운 소문에 시달리던 알바공작 가문이 이제는 떳떳해질 수 있게 되었으며, 고인이 된 알바 공작부인의 영혼도 시름을 풀고 고이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미술작품의 법의탐적론적 분석으로 억울했던 누명을 벗길 수 있었다는 것은 이 학문의 필요성을 말해주는 쾌거라 하겠다. 동시에 앞으로 이 분야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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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진은 대한민국 1호 법의학자이자 국과수 창립 멤버이다. 1925년생으로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국과수에 들어가 법의관으로 활동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본 후루하다 다네모노가 쓴 《법의학 이야기》에서 “사람에게는 생명도 중요하지만 권리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하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법의학의 길에 들어섰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예술가의 사인(死因)과 작품을 의학적 관점에서 규명하고 해석하는 ‘법의 예술 병적학’ 분야로 여전히 수사 중이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미술을 위한 화학, 미술재료학_전창림

미술을 위한 화학, 미술재료학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전창림

미술대학에서 강의하며, 미술대학 교재를 출판했고, 명화를 해설하는 책을 내기도 했는데, 디자이너들이 모이는 색채학회에서 제가 내미는 명함을 본 분들은 대개 깜짝 놀랍니다. 미술 전공이 아니라 생소한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화학과 미술이 무슨 관계인가? 진학 상담을 할 때도 미술계로 가는 사람이 화학에 관심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미술가와 과학자가 거의 동의어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특별한 천재가 아니라도 중세의 화가들은 직접 물감을 만들며 상당한 화학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공학과 재료에 관한 높은 지식을 갖춘 미술가들이 있었기에 기술적으로도 실현이 쉽지 않은 조형구조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저는 미술대학을 진학하려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미술의 꿈을 못 버리고 유학지를 프랑스로 정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으나 화학이 너무 어려워 한눈을 팔지 못하였고 결국 화학과 교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화학에 눈을 뜨고 보니 이 화학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벤젠의 구조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육각형 조형물입니다. 특히 이 육각형 고리에 약간의 방울(산소 원소 표시가 O2이기 때문)이 달린 아스피린 구조를 보면 조화와 균형과 약간의 파격이 어우러지면서 심플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환희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화학자 중에 미술에 관심을 가진 분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전공하는 화학을 비롯하여 기술공학 분야는 효율성과 유용성을 놓고 다툽니다. 아름다움은 그 다음이죠. 그러나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진리는 어느 분야에서나 통합니다. 이 말의 역(逆)도 진리입니다. 맛 좋은 떡이 아름답습니다. 요즘은 제품마다 성능은 거의 비슷하여 디자인이 중요하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나오기까지 성능을 발전시키려는 피눈물 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제야말로 기술과 미학의 완전한 융합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화학은 기본적으로 어떤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학문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새로운 물질은 새로운 성질과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물질로 새로운 조형물을 만들면 새로운 예술이 되겠지요. 전통적인 재료로 만드는 작품에 수많은 미술가가 끝없이 도전하여 이제는 하늘 아래 새것이 있겠는가 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지금까지 써 왔던 재료만으로는 표현양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재료를 바꿔야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이제 재료에 대한 연구가 미술가에게 필요합니다. 화학이 미술에 절대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미술은 시각적 결과를 작품으로 만듭니다. 그 시각적 결과물을 만드는 재료를 철저히 알지 못하고 어떻게 그 재료가 나타내는 모든 성질과 형태적 변화를 미술에 응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저는 미술대학에서 미술재료학과 색채화학을 강의합니다. 또한 미술작품에 숨어 있는 과학적 요소들과 화학적 문제들에 대한 글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저의 책《 미술관에 간 화학자》가 미술과 화학을 융합하였다고 대입 논술교재로도 쓰인다고 합니다만 저는 ‘미술과 화학의 융합’이라기보다는 ‘미술가를 위한 화학’을 제 필생의 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미술가들에게 꼭 필요한 화학과 재료에 관한 지식을 발전시키고 학문으로 정립하여 각 미술대학에 강좌를 개설하고 그 강좌를 담당할 미술과학자를 길러내는 일입니다. 이러한 미술과학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미술가는 자기 작품을 세대를 넘어 보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추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재료를 사용하여 다양하고 새로운 표현 기법도 응용할 수 있습니다. 융합과 통섭을 외치는 시대에 우리 미술가들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새로운 재료와 미술재료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많지 않지만 미술을 위한 화학과 융합학문을 정립하는 데 뜻을 같이 할 분이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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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은 한양대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물감과 안료의 변화나 색의 특성 등 미술과 화학의 접점을 찾고자 노력한다. 현재 홍익대 과학기술대학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대학원 색채전공 강의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한화학회, 공업화학회, 한국화학공학회 회원이자 한국색채학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조선 초상화는 왜 자랑스러운가_이성낙

조선 초상화는 왜 자랑스러운가

피부과 의사 이성낙

필자가 초상화에 눈을 뜬 계기는 반세기 전 의과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뮌헨 의과대학 마르히오니니(Alfred Marchionini) 교수는 학기 마지막 피부학 강의를 ‘미술품에 나타난 피부 질환’이란 주제로 마무리하였다. 저런 시각에서도 예술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우쳤다. 그 강의는 필자가 피부학을 전공하며 서양 초상화에서 병변(病變)을 찾는 ‘습관’을 가지게 된 동기가 된다.
1975년에 귀국하며 동양화에서는 피부 병변을 찾아볼 수 없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였다. 부끄럽지만 동양화 하면 아름다운 산수화만 생각하였나 보다. 그런데 어느 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시대 초상화를 만난다.
《 한국귀인초상대감(韓國貴人肖像大鑑)》을 편찬한 이강칠(李康七, 1926~2007) 선생을 만나는 큰 행운이 따랐다. 선생은 조선시대 초상화가 얼마나 꾸밈없이 정교하면서 정직하게 제작되었는지를 강조하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숙종 14년, 1688)에 정확히 기록된 초상화 제작 지침을 필자에게 가르쳐주었다. 즉 ‘한 가닥의 털(一毛), 한 올의 머리카락(一髮)이라도 달리 그리면 안 되었었다’고. 이는 필자의 논문 <초상화에 나타난 백반증(白斑症) (Vitiligo auf einem historischen Portrat)>이 독일 피부학 전문 학술지《DerHautarzt》(1982)에 실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논문에서 초상화에 나타난 병변인 ‘하얀 피부’와 정상 피부의 경계 부위가 불규칙하게 더 검게 그려진 것은 초상화의 안료(顔料)가 변색된 결과가 아니라, 백반증의 전형적 증상인 경계과색소침윤(境界過色素浸潤, marginal hyperpigmentation)이 선명하게 묘사된 것임을 지적했다. 즉 병변이 임상적으로 활성화하면 더 검게 되었다가 하얗게 변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번져 나가는 임상적 현상과 일치한다고 했으며, 조선시대《 승정원일기》를 인용해 임상적 신빙성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편집위는 이 논문의 임상적 과학성을 인정해 학술지에 게재하였다. 이는 조선 초상화가 과학적으로 인증 받은 생생한 증언이다. 한국 미술사에 큰 이정표라 아니할 수 없다.
spec15-4대학원 과정에서 필자는 조선시대 초상화를 더 넓게, 더 깊이 연구하면서 초상화에 담긴 사회성에 눈을 돌리게 된다. 유럽 초상화에서는 예상보다 적게 피부 병변을 확인할 수 있고, 동양 초상화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초상화에서도 드물게 볼 수 있으며, 일본 초상화(고승의 초상화 예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뜬다.
특히 두창(痘瘡), 일명 마마병(媽媽病, small pox)과 초상화를 키워드로 동양 초상 미술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명(明) 태종(太宗)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 두창에 감염되었던 점. 17~19세기에 한반도는 물론 중국과 일본 열도에서도 전염성이 강한 두창이 만연했는데도 두창의 상흔(傷痕)을 중국 초상화에서는 아주 드물게 볼 수 있고 일본 초상화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데 반해 왜 조선시대 초상화에서만 두창의 상흔을 쉽게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화가가 대상자의 얼굴을 화폭에 옮기면서 두창의 상흔을 ‘있는데도 못 본 듯’ 주관적으로 그렸고 조선의 화가는 대상자의 얼굴에서 보이는 피부 병변을 우직하리만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화폭에 옮긴 것이다. 조선 초상화는 과시성과는 거리가 먼, 거부감을 줄 수 있을 피부 증상마저 가감 없이 화폭에 옮겼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한다.
더욱 경외(敬畏)스러운 것은 심한 두창 상흔이 있는 ‘외모 장애자’인데도 초상화의 대상자들이 영의정을 비롯해 높은 관직에 올랐다는 사실에서 당시 사회의 포용성을 보았다. 당시 선비 사회의 정서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조용하지만 강한 메시지이다. 조선 초상화에는 자랑스러운 조선의 시대정신(Zeitgeist)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다. ●

이성낙은 피부과 의사를 은퇴하고 미술사학을 전공하기 위해 일흔이 넘은 나이에 명지대 미술사학과 대학원생으로 돌아갔다. 2014년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병변(病變) 연구》로 석사논문을 썼다. 독일 뮌헨 유학에서 귀국 후, 1975년부터 전국 박물관과 사찰, 사당을 찾아다니며 조선시대 초상화를 살펴보고 우리 그림에 나타난 피부병을 연구해왔다. 현재 가천의대 명예총장이자 (사)현대미술관회 회장직을 맡고있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암에 대한 시각예술적 리서치_노상익

암에 대한 시각예술적 리서치

외과의사 노상익

‘C25.0 췌장암, 전씨, 81세/남, 서울 홍은동 거주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통증, 황달, 전신쇠약은 해소되었다.
3기 췌장암 수술 후 항암/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14개월을 생존하였고 2011년 1월 12일 사망하였다.’

연작 ‘Biography of cancer’ 중 세 번째 부분 ‘RESULTs’ 작업에 포함된 도큐먼트의 일부이다. 환자의 개인자료, 임상차트 기록, 여러 가지 감시 장치의 모니터링, 다양한 검사결과, 수술 등 일반인이 보기엔 난해하고 이해불가능하며 무미건조한 기록물들이 병원의 캐비닛과 전자차트에서 튀어나와서 전시장에 걸릴 수 있는 이유는 이런 기록물들이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 때문이다. 이 작업은 고통을 받고 있는 ‘암환자’에 대한 것이 아니다. 동시대에서 감추기에는 너무 흔해진 ‘암’이라고 하는, 불멸하는 질병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성격을 이해하고 행동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려는 시도이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비유적, 의학적, 과학적, 사회적 함의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2008년 전 세계적으로 760만 명이 ‘암’으로 사망하였다. 이런 비극적인 세계지표 위에서 작업이 시작되었다. 의학 논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리서치였다. ‘암’을 둘러싼 다양한 함의에 대하여 시각예술적 질문을 던지려고 하는데 그것이 어쩔 수 없이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나서 우선 과거의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미 흘러갔지만 아직 흘러가지 않고 정지 상태에 있는 엄청난 분량의 자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지나간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아직도 에너지를 가지고 살아 있음을 느꼈다.
먼저 자료 수집의 룰을 만들고 리스트를 완성한 뒤 다양한 루트를 통한 접촉을 시도했다. 자료의 양이 많아지고 현대예술이 포용할 만한 수사를 포함시키기 위한 사고의 전개와 고리를 풀기 위해 체계적인 방법론이 필요했는데, 이미 말랑말랑한 머리는 한참 지난 후여서 어쩔 수 없이 가장 익숙한 의학 논문의 형식을 차용했다 (효과적이기는 하다). 의학 논문과는 전혀 별개의 작업을 하려는데 방법은 그것과 똑같은 것을 사용하니 아이러니했다. 작업을 ‘Introduction’ ‘Material and Method’ ‘Result’ ‘Conclusion’ ‘Discussion’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었고 현재와 미래의 자료를 위해 전향적 데이터베이스도 구축했다.
실제 작업에서는 다양한 함의의 내러티브를 포함하기 위한 이미지의 컨텍스트가 중요했고 도큐먼트와 사진자료의 발굴, 생산뿐만 아니라 수용되는 지점까지 고려해야 했다. 이러한 것들에 실패하면 어떤 수사를 가져다 붙여도 단순히 자료를 수집해서 나열하고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업은 ‘암’을 매개로 만나게 되는 의사, 환자, 그 주변사람들의 그칠 줄 모르는 투쟁, 환상, 희망, 절망, 죽음과 생존에 대한 작업이다. 작업에 등장하는 환자들은 존재하며, 실제로 내가 만난 이들이다. 신원을 보장하려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인지 못하는 와중에 공개된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부디 그들의 신원과 영역을 존중해 주기 바라고, 이러한 시각자료가 훗날 2000년대 초반을 살았던 한 외과의사가 남긴 가치 있는 아카이브가 되기를 희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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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익은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간담췌외과 전문의로 서울중앙보훈병원에서 근무 중이다.  암 환자들의 진단에서부터 진료, 수술, 수술 이후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과정을 기록한 자료들을 선별하여 작업을 하는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2012년에는 란 타이틀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된다.
홈페이지: http://jasonnoh.com/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패션은 안경이다_김홍기

패션은 안경이다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

사람들은 나를 패션 큐레이터라고 부른다. 책을 쓰면서 저자 소개란에 그렇게 적은게 화근이었을까? 사람들은 특화된 직업명에 대해 궁금해 했다. 미술사를 공부했는지, 혹은 패션계에서 일한 이력을 갖고 있는지, 심지어는 올 계절에 유행하는 패션 트렌드에 대해 알려달라고 한 이도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지만, 나는 대학에서 미술사를 비롯한 패션관련 영역을 공부한 적이 없다. 패션에 대한 관심은 대형 유통업체에서 패션 바이어로 우연하게 일하게 되면서, 내 업무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독한 맘을 먹고(?) 독학을 시작했던 게 그 출발점이다. 아동복 바이어로 성장하면서 다양한 패션기업들과 디자이너들을 만나야 했는데, 그때마다 느낀 건 패션에 대한 누적된 지식 없이 관련 업무를 깊게 이끌어가는 건 힘들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매년 봄/여름 가을/겨울로 나뉘어 생산된 수많은 옷 중, 시장에서 먹힐 만한 것들을 선별하고 관리하는 일,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왜 특정한 옷을 선택하고 다른 것은 버릴까 하는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해야 했다. 어떤 상품은 세일(Sale)을 위해 가격을 인하하고 업체와 함께 시장을 만들어가야 했다. 책임을 함께 지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특유의 복식업계 및 디자인계 언어들에 친숙해져야 했다. 대학시절 영화를 부전공하면서 영상미학을 비롯해 문화이론, 기호학 등을 공부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요즘 뜨는 말로 인문학적인 패션 공부를 하게 된 셈이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이질적인 영역들을 결합시켜서 제3의 것들을 만드는 걸 좋아한다.
유학을 위해 떠난 영국 여행길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봤던 시각의 구조〈 Fabric of Vision전〉은 내 인생을 바꿨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그림 속 패션에 나타난 주름의 의미를 통해 각 시대의 미감과 사회적 체계, 사람들의 열망의 코드를 읽어내는 전시였다. 머리를 탁 칠 수밖에 없었다. 패션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해왔다고 했고, 대학시절부터 갤러리를 자주 다니며 작은 판화작품부터 컬렉팅을 해왔던 내가 미술사를 비롯한 인문학이 패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두 개의 영역이 어떻게 공동의 땅을 경작하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지를 몸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독학해온 복식사에 대한 나만의 입장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 결과물이《 샤넬 미술관에 가다》이다.
서양미술사의 명작에 나오는 옷의 의미들을 다층적으로 풀었던 것. 책을 쓰는 문제를 앞에 두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내게 용기를 준 이가 있다. 바로 영국 법조계의 스타 변호사 앤소니 줄리어스다. 그는 홀로코스트 문제를 변호하다가 관심을 갖게 된 유대인 미술에 대해 연구하며《 미술과 우상》이란 책을 냈다. 무엇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미술을 역사적으로 공부하고 자신의 일과 관심사를 결합시켜 풀어내는 작업을 한다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4년에 걸쳐 자료를 다시 모으고 편집하면서 책을 썼다. 이 과정에서 패션이란 렌즈로 미술전시를 하게 될 경우, 생산적인 교집합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구체화했다.
패션의 역사는 당대의 옷 스타일을 묘사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패션은 일상에서 입는 옷이란 오브제를 미학적으로 표현, 승화시키는 기본적인 문화 활동인 동시에 지역적 차이와 시대적 변화의 방향을 반영하는 변화의 바로미터다. 인간이 입는 사물이란 점에서 일상성을 사유할 수 있고, 특정한 지리적 경계 내부의 사람들, 즉 공동체가 수용할 수 있는 미감의 수준에서 입을 수 있는 것들, 패셔너블(fashionable)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점에서 사회성을 띤다. 패션은 그 자체로 삶과 예술, 실천과 미학, 생산과 소비, 개인의 취미와 집단정신을 연결하는 삶의 현장이 된다. 되짚어보면 패션이란 단어가 그저 한 벌의 옷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많은 발언을 할 수 있는 오브제인지를 알게 된다. 나는 옷에 담긴 이런 정신성들을 전시란 양식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지금껏 저술에 온 힘을 쏟은 것은 옷이란 사물을 전시하기에 앞서, 패션이란 개념의 외연을 확장하고 지금껏 ‘패션’을 규정해온 우리 사회가 협소한 시각을 넘고자 한 시도였다.
최근에 나온《댄디, 오늘을 살다》도 그런 연장선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사회는 새롭게 등장하는 유통체계와 패션의 논리로 뒤덮였다. 이때 새롭게 부상하는 지배적 스타일에 저항하는 정신의 소유자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을 댄디라고 부른다. 댄디즘은 일종의 생활철학으로서 삶의 많은 부분에 적용될 수 있다. 음식을 먹고 소비하는 섭생의 방식에서 옷차림, 신체를 가꾸는 일,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는 방식 등 다양한 측면을 성찰할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 속에 나타난 소비문화와 패션에 대한 해석들을 함께 소개함으로써, ‘우리나라’ 작가들의 감성을 통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큐레이팅이란 어떤 점에서 보면 삶을 위한 편집된 태도를 갖는 것이다. 패션이한 벌의 옷을 넘어, 그것을 입는 인간의 표정과 태도를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인간의 행위는 항상 이해관계로 연결된 이들의 시각 속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패션을 큐레이팅하는 일은 제2의 피부라 불리는 옷을 해석하는 안경을 사람들에게 씌워주는 일이다. 좌와 우를 가로지르며(안경에서 코에 걸치는 부분을 브리지(Bridge)라고 한다) 누군가의 가교가 되는 일을 하고 싶다. 평생 패션이란 황홀한 소울메이트와 업고 빨고 사랑하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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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는 국내 1호의 패션 큐레이터.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연극영화와 의류학을 복수전공했다. 졸업 후 신세계에 입사해 아동복과 상품기획을 익혔다. 현대미술과 패션을 독창적인 시선으로 결합한 저술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방송활동을 통해 대중과의 소통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샤넬, 미술관에 가다》 《하하 미술관》 등이 있으며 《패션디자인 스쿨》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등을 번역했다. 그의 글을 읽고 소통을 원한다면 www.facebook.com/fashioncurator1 혹은 twitter.com/fashioncurator에 들어가보면 된다.

[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사진, 처음 만나는 자유_신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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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처음 만나는 자유

아나운서 신성원

무거워진 마음을 끌어안고 지낼 자신이 없을 때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 금세 마음이 사뿐사뿐 가벼워질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카메라를 들었고 일단 나갔고 일단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시간을 버티다 보면, 입술 끝도 살짝 올라가 있고 머릿속도 텅 비워졌다. 일에 치여 놓쳐버린 수많은 일상의 순간들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며 감동받고 행복해 하는 지인들을 보면 내가 먼저 행복했다. 그러다가 누구도 포착하지 못했을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찍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뿌듯하기까지 했다. 이 오래된 습관은 사진을 좋아하던 친구와 어울리던 10년 전쯤부터 시작되었다. 셔터스피드나 조리개 수치, 심도 같은 카메라의 기술들은 잘 몰랐어도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프레임 안에 담고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었다. 정확하면서도 맥락에 딱 맞는 적확한 단어로 말해야 하는 방송과는 다르게 사물과 상황에 감성적으로 접근하고 표현하는 사진은 마음마저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사진에 집중하는 동안의 나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았고 남의 시선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무엇에 그렇게 몰입해본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언젠가부터 집을 나설 때는 무조건 카메라가 동행했다. 찍고 싶은 장면은 한 번 놓치면 다시는 찍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 생긴 버릇이기도 했다. 함께 여행할 친구가 없어도 카메라를 들고 떠나면 든든했고 사진을 찍으면서 자유로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이름도 낯설고 지리적으로도 머나먼 나라, 쿠바다. 내가 갔을 땐 우기에 접어들 무렵인 5월이었는데, 적도 부근의 나라라서 그런지 하루 종일 뜨거운 햇빛이 쏟아졌다. 아침에 샤워를 하고 길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그 무더운 곳에서 나에겐 남보다 항상 짐 하나가 더 있었다. 카메라와 렌즈 몇 개를 넣은 묵직한 가방은 마치 달팽이의 집이나 거북의 등처럼 늘 내 등 뒤에 붙어 있었다. 그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로 여기저기 다녔다. 체 게바라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 산타클라라에 갔을 땐 쨍쨍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무려 2km를 걸은 적도 있었다. 시내 광장에서 체 게바라 기념관까지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고 걷는 그 길은 누군가에게는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거리겠지만 나에겐 고행의 길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도 더위에 괴로운데 무거운 카메라 가방 때문에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티셔츠는 이미 흥건하게 젖었다. 카메라 따위 던져버리고 싶었다.
이 풍경들 다 머릿속에 담아가면 될 텐데 왜 굳이 사진으로 남기겠다고 하는 건지. 스스로를 책망했다. 얼마나 좋은 풍경을 담겠다는 건지. 그리고 이 무거운 카메라가 무슨 소용인지.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래도 끝끝내 포기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고생해서 찍은 사진들에는 나조차 잊고 있었던 내 생각과 감정들이 오롯이 투영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보고 있으면 기억과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시간과 공간에서 가졌던 생각들과 감성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돌파구가 필요했던 때,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열정을 다 바칠 무엇이 절실했던 때 사진을 만났다. 카메라의 파인더를 통해서 팍팍한 현실을, 지루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아름다운 풍경에 푹 빠지기도 했고, 매일 반복되는 우리네 소박한 삶의 또 다른 이면을 찾아보려 애쓰기도 했다. 사진작가 다이앤 아버스(Diane Arbus)는 “사진이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허가증”이라고 말했다. 사진을 알게 되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위한 무언가에 푹 빠져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다이앤 아버스의 말처럼 자유로 향하는 허가증을 갖게 되었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보는 동안만큼은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복잡했던 세상의 모든 고민은 내려놓은 채로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어서 살 것 같았다. 나는 살아있었고, 나는 자유로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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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원은 <문화공감 신성원입니다>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밤10시 라디오에서 인사하고 있는 KBS의 아나운서다. 1997년 KBS 24기 아나운서로 입사해 KBS음악실, 문화탐험 오늘, 시사플러스, 문화읽기 등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맡아왔다. 2009년 3월 <신성원의 사진일기전>을 열었고 같은 해 12월 에세이 《속삭임》을 출간했다. 얼마 전 상명대 문화예술대학원을 졸업하며 방송국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연작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