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BOOK

불온한 시대를 떠도는 미광(微光)의 미학

조르주 디디 – 위베르만 지음 / 김홍기 옮김 《반딧불의 잔존 : 이미지의 정치학》 길 2012

1960~1970년대에 유럽에서는 전후 네오파시즘의 등장과 산업화에 대한 반발로 정치적인 비관론과 절망의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1975년,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는 (후에 〈반딧불에 대한 논고〉로 재출간될) 〈이탈리아 내 권력의 공백〉이라는 짧은 소고를 통해 동시대에 자행되는 “문화적 집단학살”에 대해 절망적인 어조로 이야기했다. 파솔리니가 “권력의 공백”이라 일컫는 이 “무차별성의 권력”, “상품으로 변형된 권력”은 지금껏 여기에 저항해온 대항문화를 무너뜨리고, 예술의 단독성을 획일화시키며, 문화를 그 스스로 전체주의적인 야만의 도구가 되게 만들어 종국에는 파솔리니로 하여금 반딧불의 죽음을 선언하게 만든다. 이보다 30여 년 전, 이탈리아의 진정한 파시즘 시대에도 파솔리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욕망의 춤을 추던 (“빛나고, 춤추고, 떠돌고, 잡히지 않고, 저항하는”) 반딧불, 즉 민중에 경탄을 보냈건만, 이제 그는 “파시즘의 폐허 위에 파시즘 자체가 부활했다”고 절망하며 민중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긍정을 거둔다. 민중이라는 작은 반딧불들은 모든 형태와 모든 차이를 집어삼키는 산업화와 소비주의의 사나운 불빛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반딧불은 소멸했을까?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질문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반딧불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공간, 즉 ‘틈새의 공간’, ‘산발적인 공간’에 여전히 잔존한다고 주장한다. 단지 파솔리니가 (어떤 비관적인 심정으로) 이를 ‘보고자 하는 욕망’이 사라진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유아기와 역사》에서 파솔리니와 동일한 논리로 “경험의 파괴”를 주장하며 정치적인 비관론의 철학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아감벤은 지금 이 시대에 동시대인이 일상적으로 겪는 그 어떤 사건도 경험으로 변하지 못하며 우리는 경험을 몰수당했다고 선언한다. 그는 “반딧불이처럼 멸종되었을 경험”을 언급하며 우선은 근본적인 파괴를, 그 후 절대적 구원이 펼져질 묵시록적인 풍경(지평)을 제시한다. 그리고 디디-위베르만은 아감벤의 이런 비관론을 반박하기 위해 발터 벤야민을 소환한다. 일상적인 저항의 몸짓으로 이미지를 통해 ‘비관주의를 조직’하려 시도하는 벤야민에게 경험은 ‘퇴조’하는 것일 뿐 ‘파괴’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이미지는 ‘예전’이 ‘지금’과 충돌하며 생겨나는 단속적이며 유동적인 이미지로 디디-위베르만은 벤야민의 이 “변증법적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에 대한 사유를 정치적인 범위까지 확장시킨다. 무엇보다 디디-위베르만에게 “산발적이고, 취약하고,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출현하고, 소멸하고, 재출현하고, 재소멸”하는 이미지는 연약하지만 끈질긴 미광(微光)을 발산하는 반딧불과 다르지 않다. 이 이미지-반딧불은 끊임없는 소멸의 상태지만, 이 소멸은 경험의 파괴가 아닌 소멸과 재출현의 순환을 창조하기 위한 변모이며, 이미지-반딧불은 새로운 형태로 영원히 재등장하며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낸다.
이 책에서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와 지평이 다른 것이라고 얘기한다. “이미지는 가까이 있는 여러 미광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지평은 멀리 있는 강한 빛을 우리에게 약속한다.” 그는 우리에게 시선을 광대한 지평이 아닌, 우리와 매우 가까운 곳을 지나가는 미세하고 유동적인 이미지로 돌리라고 말한다. 지평을 본다는 것은 우리를 산발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이미지들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말처럼 스스로 반딧불이 되어 미광을 발산하고 사유를 전달하는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 은밀한 공동체가 후퇴하고 소멸한다 해도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반딧불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미술사학자로 이미지의 역사와 이론을 다룬 3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다방면에서 전방위적으로 활동 중이다. 특히 그는 〈L’Empreinte〉(1997년, 퐁피두센터), 〈아틀라스〉(2010년,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Nouvelles histoires de fantomes〉(2014년, 팔레 드 도쿄)를 비롯한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2016년 10월부터 2017년 1월까지 파리의 주드 폼 국립미술관에서 미학적, 정치적 의미의 ‘민중’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Soulevements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강영희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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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뗡뀫_먤뀽_뉌뀸__(4)뒤샹 딕셔너리
토마스 기르스트 지음/주은정 옮김
작가를 연대기별 혹은 작품별로 살펴본 기존의 연구서와 달리 마르셀 뒤샹의 삶과 예술에서 추출되는 단어 208개를 사전처럼 A부터 Z순으로 풀이했다. 현대미술사의 판도를 바꾼 뒤샹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디자인하우스 296쪽·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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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뗡뀫_먤뀽_뉌뀸__(3)현대미술 현실을 말하다
신채기 외 지음
오진경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의 석·박사 제자들이 연구해온 논문을 책으로 엮었다. 19세기 말 상징주의에서 1960년대 신구상 미술에 이르기까지 미술이 시대를 증언하는 인간의 창조물이자 기록임을 드러내고자 했다.
GOHG 371쪽·2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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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뗡뀫_먤뀽_뉌뀸__(8)전통공예와 현대공예의 개념
용주 지음
공예를 형(形)·기(氣)·신(神)이 결합된 총체로 보고, 철학적 차원에서 연구 분석하였다. ‘공예형기신론’이라는 공예 중심의 이론체계를 제시하며 이를 토대로 인본주의와 천인합일을 추구하고자 했다.
역사비평사 320쪽·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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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뗡뀫_먤뀽_뉌뀸__(9)당신의 그림을 보면 마음이 보여요
이윤희 지음
오랜 기간 미술 심리치료를 진행해온 저자와 함께 17장의 그림을 그려가며 내면의 상태를 파악해간다. 유명 화가의 작품과 내담자의 그림 등을 사례로 들어 상세한 설명까지 덧붙여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팜파스 304쪽·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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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뗡뀫_먤뀽_뉌뀸__(1)예술, 역사를 만들다
전원경 지음
《런던의 미술관 산책》의 저자인 전원경의 예술 3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 저자는 고대 이집트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를 아우르며 예술과 역사가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시공아트 632쪽·2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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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뗡뀫_먤뀽_뉌뀸__(2)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
프리다 칼로 지음/안진옥 옮기고 엮음
1995년에 발견된 프리다 칼로의 일기를 모은 책이다. 그녀의 친필 편지와 글, 그림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정신과 육체적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 내면의 진솔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비엠케이 300쪽·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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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뗡뀫_먤뀽_뉌뀸__(5)무엇이 삶을 예술로 만드는가
프랑크 베르츠바흐 지음/정지인 옮김
‘삶, 예술, 일’이 통합된 삶, 이른바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혼자 있기, 침묵하기, 연습이 바로 그것. 저자는 근원적인 자기 성찰과 헌신적인 몰두가 평범한 일상에서 창조성을 발휘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불광출판사 256쪽·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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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뗡뀫_먤뀽_뉌뀸__(12)애드호키즘
찰스 젠크스·네이선 실버 지음/김정혜·이재희 옮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 새로운 디자인/건축 시대를 규정하는 용어로 이해되어 온 이 용어를 미술, 영화, 도시계획… 에서부터 정치혁명, 진화론, 우주론까지 관통하는 삶의 근거를 구축하는 뜻으로 확장시켜 바라보았다.
현실문화 424쪽·3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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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뗡뀫_먤뀽_뉌뀸__(6)취미는 전시회 관람
한정희 지음
다년간 에듀케이터로 일하며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담았다.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주는 막연한 거리감과 궁금증을 해소하고, 예술을 통한 풍요로운 삶을 실현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었다.
중앙북스 284쪽·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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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서 예술 1, 2
존 듀이 지음/박철호 옮김
경험을 중시하는 질성적 사고가 인간 사고의 전형임을 얘기해온 존 듀이의 철학 사상을 담았다. 일상적 삶과 예술 그리고 이 둘을 통한 경험에 주목해 예술의 성격과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나남 382쪽·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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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뗡뀫_먤뀽_뉌뀸__(7)잃어버린 창조성을 찾아서
박진희 지음
20여 년간 회계 및 세무분야에 종사하다 2012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늦깎이 화가의 작품 98점과 그를 뒷받침한 철학을 담았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예술가의 본질을 발견하여 자신처럼 ‘신생 예술가’가 되기를 제안한다.
북랩 224쪽·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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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뗡뀫_먤뀽_뉌뀸__(10)색의 놀라운 힘
장 가브리엘 코스 지음/김희경 옮김
색이 인간의 심리와 생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한 결과들을 소개한 책이다. 색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부터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색의 비밀, 실생활에 적용 가능한 실용적인 정보들까지, 색의 전모를 알려준다.
이숲 168쪽·13,000원

ART JOURNAL

백남준의 연결고리를 풀다
백남준 10주기 추모전 〈백남준 ∞ 플럭서스〉 열려

백남준 10주기를 맞아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추모전 〈백남준  플럭서스〉가 6월 14일부터 7월 31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백남준의 작업뿐 아니라 그와 교류하며 예술적 영향을 주고받은 플럭서스 작가의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작업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미술사적 연결고리를 짚어낸다. 특히 독일 쿤스트할레 브레멘과 국내기업 및 개인 소장가의 소장품 200여 점을 한자리에 모으고, 백남준 유가족이 소장한 〈시집 온 부처〉(1989~1992)가 대중에 처음 공개되어 주목받고 있다. 전시는 크게 플럭서스 작가들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선보이는 ‘플럭서스는  ’, CCTV에 찍힌 관객의 모습을 컬러코드로 바꿔 관객이 직접 작품 안으로 들어가게 한 백남준의 작품 〈세대의 카메라 참여〉 (브레멘 쿤스트할레 소장)와 함께 작가 양아치가 백남준의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1969~ 1971)를 재해석한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선보이는 ‘참여갤러리’와 플럭서스 초기 멤버인 덴마크 작가 에릭 앤더슨이 백남준을 추모하며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크라잉 스페이스〉, 마지막으로 백남준의 1990년대 전성기 작품을 선보이는 ‘백남준은  ’로 섹션을 나눠 백남준의 예술을 다양한 관계항으로 재해석했다.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에릭 앤더슨은 “미술이 변화하더라도 여전히 살아있다”며 플럭서스의 의미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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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미술품 유통 제도화 추진
<미술품 유통 투명화 및 활성화를 위한 정책 토론회〉 열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김종덕, 이하 문체부)가 주최하고 예술경영지원센터(대표 김선영)가 주관하는 〈미술품 유통 투명화 및 활성화를 위한 정책 토론회〉가 지난 6월 9일 서울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열렸다. 신은향 문체부 시각예술 디자인과장의 정책 방안 발표를 시작으로, 1차 토론에는 좌장 최병식(경희대 교수), 박우홍 (한국화랑협회장), 최윤석(서울옥션 이사), 이상규 (K옥션 대표) 등이 참여해 유통 분야에 관해 논의하였다. 2차에는 서성록(한국미술품감정 협회장), 송향선(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 감정위원장), 김영석(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이사장) 등이 참여해 감정 분야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다. 문체부는 7월 7일 전문가 발제 세미나를 개최해 더욱 구체화된 정책 대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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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과 개인의 관계에 주목한 점이 돋보여
<제2회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에 박경근 최종 선정돼

〈아트스펙트럼 2016〉에 참여한 10팀 중 차세대 작가로 성장이 기대되는 박경근이 작가상 수상자로 최종 선정됐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군대 : 60만의 초상〉은 6세 때부터 외국 생활을 한 작가에게 강한 인상을 준 군대문화를 다룬 영상작업이다. 작가는 집단과 개인의 관계에 주목해 군대라는 특수한 집단 안에서 드러나는 퍼포먼스적 요소와 신체에 대한 강조 등을 관찰자적 시점으로 바라보았다. 이번 심사를 진행한 김성원(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백지숙(미디어시티서울 2016 예술감독), 이준(삼성미술관 Leeum 부관장)은 〈군대 : 60만의 초상〉이 “정교한 연출 감각과 새로운 편집으로 독특한 영상미를 구현한 작가의 실험 정신이 돋보인 작품”이라며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면모가 〈아트스펙트럼전〉의 성격에도 부합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박경근은 “아직 왜 예술이라는 ‘쓸모없는’ 일을 하면서 사는지 잘 모르겠다… 저의 ‘쓸모없는’ 시간낭비에 좋은 후원을 받게 되어 행운”이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시상식은 6월 16일 삼성미술관 Leeum에서 열렸으며 상금 3000만원이 수여됐다. 박경근은 UCLA에서 디자인과 미디어아트를, CalArts에서 영화·비디오를 전공했으며 〈청계천 메들리〉(2010), 〈철의 꿈〉(2014)으로 주목을 받았다. 베를린국제영화제 NETPAC상과 아시아티카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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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에서 꽃핀 예술가들의 열정
<제6회 MEET 2016〉 열려

서울문화재단(대표이사 조선희) 문래예술공장은 6월 10일부터 12월 31일까지 자생적 예술인 마을인 문래예술공장과 문래동 소재 17개의 문화공간에서 문화예술 지원 프로젝트 〈MEET(Mullae Emerging&EnergeTic) 2016〉을 개최한다. 문래동 전 지역과 인근 지역의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사업인 〈MEET〉는 올해로 6회를 맞아 개인 창작자 및 기획자, 예술단체를 대상으로 공모하여 최종 선정된 17개의 프로그램 및 부대행사로 진행된다. 전시, 공연, 퍼포먼스를 비롯해 서적 발간, 문학행사, 예술축제가 다채롭게 소개되며 100여 명의 문래동 예술가가 참여한다. 자생적 예술인 마을인 문래창작촌만의 개성 넘치는 예술색채를 감상하고 열띤 예술 현장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뜻 깊은 기회가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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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한국인 컬렉터
씨킴, 세계 100대 컬렉터에 선정돼

김창일(Ci Kim) 아라리오 회장이 아트넷이 선정한 세계 TOP 100 컬렉터 명단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에 이은 두 번째 선정이다. 작가로도 활동 중인 김창일 회장은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게르하르트 리히터, 신디 셔먼 등의 작품을 비롯해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신진작가들의 작품까지 폭넓게 소장해 세계적인 컬렉터 반열에 올랐다. 올해 선정된 컬렉터들에 대해 아트넷은 “사회적 활동에 헌신적인 것이 특징”이라고 밝혔다. 한편 회장은 2006년부터 2014년까지 9년 연속 아트 뉴스(The ART news)가 선정하는 The World’s Top 200 Collectors에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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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 놀이에 빠지다
유휴열 〈제1회 금보성아트센터〉 작가상 수상

금보성아트센터(관장 금보성)가 주관하는 〈제1회 금보성아트센터〉 한국작가상에 유휴열이 선정됐다. 이번 작가공모전은 6개월간 진행했으며 공모 대상을 국내외 60세 이상 작가로 제한했다. 또한 작가공모전으로는 국내 최초로 상금이 1억 원에 달해 수상자에 관심이 집중됐다. 심사위원들은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재료 탐색, 쉬지 않는 치열함으로 그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했다”며 심사평을 밝혔다. 심사위원으로는 김종근, 고충환, 박영택, 신항섭, 전혜정 미술평론가와 이기영 《월간미술》 대표가 참여했다. 한편 수상자의 작품은 6월 27일부터 8월 21일까지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전시된다. 수상에 맞춰 수상기념 평론집이 발간될 예정이며 출판기념회와 시상식이 8월 7일 전시장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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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갤러리 4곳이 한자리에
스페이스 칸 오픈

지난 5월 28일 LA, 파리, 쾰른, 베이징에 거점을 둔 4곳의 갤러리가 연합하여 청담동 네이쳐포엠 빌딩에 ‘스페이스 칸(Space Kaan)’을 개관했다. 백 아트(BAIK ART, LA), 보두앙 르봉(Baudoin Lebon, 파리), 초이앤라거 갤러리(Choi&Lager Gallery, 쾰른), 갤러리 수(Gallery SU, 베이징)는 수년간 각국에서 해외작가와 활발하게 연계해왔으며 특히 해외에 한국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도 꾸준히 해왔다. 독립 큐레이터이자 아트 컨설턴트인 최선희 초이앤라거 공동대표, 중국 미술시장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김수현 갤러리 수 대표 등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스페이스 칸은 4개의 갤러리가 하나의 장소를 공유해 운영하면서 갤러리 간의 대안적 네트워크 방식으로 주목받는다. 4개의 갤러리는 각 연간 두 번의 기획전과 한 번의 그룹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국제적인 소통망을 통해 다양한 전시의 기회를 확장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김을, 유병훈, 맷 코놀리, 오세열 등이 참여한 개관전은 7월 23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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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생태 네트워크를 조명하다
서울혁신파크 전시동 개관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국립보건원 부지에 시민을 위한 새로운 체험공간인 서울혁신파크가 들어서 한동안 유휴시설로 유지된 이곳이 대규모 문화지구가 될 전망이다. 서울혁신파크는 총 32개 동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시약실’로 사용되던 곳은 전시동으로 꾸며져 앞으로 전시 프로그램을 이어간다.
그 개관을 알리는 첫 전시, 〈일곱 개의 방〉이 6월 17일부터 7월 16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생명 네트워크’를 주제로 7개의 공간에 69명의 작가가 참여해 자본주의의 욕망에 의해 대량생산된 이미지, 코드, 상징체계를 해체하여 대안의 욕망이 생성되는 지점에 주목한다. 전시는 크게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조망한 ‘동물감각’, 역지사지를 통해 타자화되기를 표현한 ‘변용’, 전시공간의 역사와 흔적을 담은 ‘5동의 기억’이란 소주제로 구성되었다. 서울혁신파크는 앞으로 다목적 스페이스, 활동시설 등 다채로운 체험공간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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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당도한 인도네시아 전통예술
<바틱, 인도네시아의 영혼〉전 열려

한세예스24문화재단(이사장 이계우)이 국제문화 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선보인 국제문화교류전 〈바틱, 인도네시아의 영혼〉 오프닝행사가 존 프라세티오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와 최영삼 외교부 문화외교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6월 22일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렸다. 지난해 7월에 열린 〈베트남 현대미술전-베트남의 아우라〉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인도네시아 전통 수공예 직물 염색법을 뜻하는 바틱(Batik)에 담긴 인도네시아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동시대 예술로서의 가치를 엿보기 위해 마련됐다. 전시는 전통과 현대로 나뉘어 구성됐으며 전통 바틱 60여 점과 전통 문양과 기법에서 영감을 받아 섬유예술로 재해석한 현대 바틱 40여 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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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show the star - Ogeum-dong, 2016, Ink and color powder on rice paper, 98x144cm

김선두 〈별을 보여드립니다 – 오금동〉 장지에 먹과 분채 98×144cm 2016

한낮, 한밤, 지금, 여기에 있는 별을 그리다
김선두, 중국 첫 개인전 가져

수묵화가 김선두가 6월 4일부터 7월 3일까지 학고재상하이에서 첫 개인전 〈별을 보여드립니다〉를 연다. 고 이청준의 단편소설에 대한 오마주에서 출발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전시명과 동명(同名)의 새로운 연작을 소개했다. 전시를 기획한 학고재 측은 작가의 이번 신작이 별이 지닌 메타포를 통해 꿈과 욕망을 드러내고 가시적인 이 세상 뒤에 숨어 흐르는 힘, 이 세상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우리를 깨어 움직이게 하는 힘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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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을 맞아 역대 수상작가 한자리에
<2016 김세중조각상〉에 이승택, 박재영, 노명호

2016년도 〈김세중조각상〉 시상식이 지난 6월 24일 김세중기념사업회 복합문화공간 예술의기쁨에서 열렸다. 중견조각가에게 수여하는 김세중조각상에는 이승택, 40세 이하 청년조각가에게 수여하는 제27회 김세중 청년조각상에는 박재영, 제19회 한국미술저작 출판상에는 노명호(《고려 태조왕건의 동상》(지식산업사, 2012))가 각각 선정됐다. 김세중조각상은 김세중기념사업회 (이사장 김남조)에서 우수한 조각가와 미술 연구자를 격려하고자 1987년에 제정됐다. 이후 1990년 김세중청년조각상, 1998년 한국미술저작 출판상이 제정되어 함께 운영되고 있다. 또한 제1회 수상자인 심문섭 작가를 비롯해 강태성, 엄태정, 김청정 등 역대 수상자 29명의 작품을 선보이는 〈30주년 기념전〉이 예술의기쁨 내 전시실에서 오는 7월 23일까지 열린다.

2016년 7월 제378호

특집

한국과 프랑스, 미술로 만나다
1886년 6월 4일. 당시 조선(朝鮮)이었던 한국은 ‘조불수호통상조약’을 맺고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성립했다. 이후 130년이 흘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과 프랑스 전역에서 각종 행사가 2015년부터 올해에 걸쳐 열리고 있다.
문화는 물론 과학, 교육, 경제, 스포츠 등 양국이 접점을 갖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열리는 행사가 300여 건에 이를 정도다. 문화 부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행사는 역시 미술(시각예술) 분야다. 110건에 달하는 각종 전시와 미술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에《월간미술》은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교류에 초점을 맞춘 특집을 준비했다. 알려졌다시피 광복을 전후해 한국의 근현대미술이 정립되던 시기, 한국은 작가들이 프랑스에 학업과 작업을 위해 도불(渡佛)했고 그들의 귀국은 곧 서구미술의 전파를 의미했다. 그에 영향 받아 한국 모더니즘이 일고 비평의 언어체계를 만들어 갔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정리는 곧 프랑스와의 교류사 다름 없음을 확인하기 바란다. 물론 미술을 통한 교류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또한 이번 특집의 발단인 한불상호교류의 해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를 소개한다. 프랑스 현지 취재를 통해 다양한 전시를 소개하고 이번 행사에 참여한 프랑스 측 인사들과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이밖에 한국과 프랑스는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지속적인 인연을 맺고 있다. 참여 작가들의 소감도 들어본다. 주한 프랑스문화원장을 만나 문화원 운영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국과 프랑스는 문화적으로 서로의 거울이 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문화의 우열을 따지기 위한 경쟁이 아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느냐에 달린 것 같다. 그래야 ‘지속가능한’ 교류가 이뤄질 수 있다.

편집장 브리핑 54 東西古今을 아우르는 미술의 가치

모니터 광장 56

칼럼 58
청년세대 미술인으로서 작금의 청년미술에 대한 변백(辨白) | 신시호

기자의 시각 60

변호사 캐슬린 김의 예술법 세상 66
“내 작품이 진짜임을 증명해 보시오!” | 캐슬린 김

핫피플 68
이명옥 열정으로 달려온 사비나의 20년 | 곽세원

사이트 앤 이슈 70
주명덕 그렇게 시간이 모인다 | 황석권

핫 아트 스페이스 72

이태호 교수의 진경산수화 톺아보기8 76
서울이 아름답다 살곶이목장 그림 | 이태호

한국의 미 82
세계적이면서 한국적인 조선시대 명품 민화의 세계 | 박본수

특집 한국과 프랑스, 미술로 만나다 92
그들이 프랑스로 간 이유 | 김영호
프랑스의 다양한 미술의 지점과 조우하다 | 황석권

스페셜 아티스트 112
오를랑 오를랑의 ‘하이브리드 신체’ | 전영백

작가 리뷰 118
김형대 김형대의 ‘환원 B’, 정박되지 않은 한국 모더니즘의 기표 | 김미정
이숙자 요기로운 초록빛 환영과 자아 | 류철하

화제의 전시 130
<그다음 몸展> 몸의 위치에 던지는 질문 | 현시원

월드 토픽 136
<Megacities Asia 展> 시적 도시, 메가 시티 | 최다영

뉴페이스 142
김선영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 황석권
김이박 식물을 고쳐드립니다 | 임승현
송수영 눈으로 만지고 손으로 보다 | 곽세원

크리틱 148
보이지 않는 가족・정지현・윤종석・뿔의 자리・고산금

리뷰 154

프리뷰 156

전시표 160

월드 프리뷰 164

지역 168

최예선의 달콤한 작업실 9 170
달콤한 친구들의 화수목한 공동체 | 최예선

아트북 172

아트저널 174

독자선물 178

편제 180

표지
<책가도>(부분) 종이에 채색 133×53.5cm(각) 18세기 후반
초기 궁중화풍의 이 〈책가도〉는 중국에서 수입된 기물과 책이 서양화법으로 표현되었다. 서양화법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지만 적극 활용하려는 의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런 특색은 책거리가 국제적인 성격의 미술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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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Briefing 54

Monitor’s Letters 56

Column 58 Shin Siho

Editor’s view 60

Kathrin Kim‘s Art Law Society 1 66 
Kathleen E. Kim

Hot People 68
Lee Myeongok |Gwak Seweon

Sight & Issue 70
Joo Nyungduck | Hwang Sukkwon

Hot Art Space 72

Lee Taeho’s Jinkyungsansu Sketch 8 76 | Lee Taeho

Korean Beauty 82
The World of Joseon Minhwa’s Masterpieces | Park Bonsoo

SPECIAL FEATURE 92
L’Année France-Corée 2015-2016 | Kim Youngho, Hwang Sukkwon

Special Artist 112
ORLAN | Chun Youngbaik

Artist Review 118
Kim Hyungdae | Kim Mijung
Lee Sookja | Ryu Chulha

Exhibition Topic 130
<Body Matters> | Hyun Seewon

World Topic 136
<Megacities Asia> | Choi Dayoung

New Face 142
Kim Sunyoung | Hwang Sukkwon
Kim Leepark | Lim Seunghyun
Song sooyoung | Gwak Seweon

Critic 148

Review 154

Preview 156

Exhibition guide 160

Preview of Overseas 164

Region 168

Choi Yesun’s Sweet Workroom 9 170

art book 172

art journal 174

readers gift 178

credit 180

Cover
〈Chaekgeori, Scholar’s Accouterments〉 color on paper 133×53.5cm(each) six-fold folding screen The late 18th century

BRIEFING

무엇이 ‘진짜 미술’인가?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개념미술) 작가 김소라의 전시 소식이었다. <무릎을 뚫고 턱으로 빠지는 노래 – 김소라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이 전시는 ‘시각이미지를 배제하고 비물질인 소리만으로 공간을 채운다’고 한다. 헐~~! 나는 아직 이 전시를 못 봤지만 앞으로도 굳이 애써 찾아가서 볼 것 같지는 않다. 솔직히 말해 뭔가 볼거리가 있어야 가서 보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작가나 미술관 기획자는 “(촌스럽게) 미술을 눈으로만 보려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텅 빈 전시공간을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하세요.”라고 친절하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이메일에 첨부된 보도자료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10대의 스피커에서 퍼져 나오는 각기 다른 소리는 텅 빈 전시 공간을 채우면서 그 파동과 흐름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한다. 관람객은 때로는 단일한 소리의 울림을 때로는 서로 섞인 소리와 마주하면서 청각적 경험을 넘어 촉각적, 신체적으로 지각하게 된다. 이와 함께 논리적인 연속성 대신 자유롭게 교차된 비언어적인 소리는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과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은 소리, 신체, 공간에 대한 사유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소리로 축조된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글쎄, 이런 것도 미술일까? 과연 어디까지가 미술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명색이 미술전문지 편집장이라는 사람이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될 말일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벌거벗은 임금님’을 곁에서 호위하는 간신배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뻘쭘하게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한국작가 뿐 아니라 특히 해외 여러 현대미술가가 다른 장르 예술가와 협업을 꾀한다는 것, ‘소리’를 흥미로운 매체로 여긴다는 것, 미술(관)의 개념을 확장시키며 관객과의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는 것 등 동시대미술 언저리에서 시도되는 경향이나 추세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뒤샹 이후 현대미술사에는 이보다 더 파격적이고 전위적이며 급진적인 전시나 작품이 비일비재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괜히 시비 거는 것으로 오해하지는 마시라.
사실 내가 이렇게 감정을 여과 없이 거칠게 내보이면서까지 언짢음을 숨기지 못한 이유는 <무릎을 뚫고 턱으로 빠지는 노래> 때문이 아니다. 나는 최근 유행처럼 번진 (일부) 젊은 작가의 전시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그런 전시(물)는 ‘미술’이 아니라고 했다. 대신 ‘그 무엇’이라고 일컬었다. ‘굿-즈’가 대표적 예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아트스펙트럼2016>에서 본 옵티컬 레이스의 그래픽 구조물이나 <사회 속 미술 : 행복의 나라> 일부 출품작도 나는 미술이 아닌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자유지만) 제 맘대로 작품이라는 레테르를 달고 겉멋 부린 ‘그 무엇’을 보면 매우 불편하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포장한 껍데기를 보면 공허하다. 이번호 특집기획과 작가꼭지에 나의 이런 생각이 반영되었음을 밝힌다. 마감 기한 직전에 도착한 성완경 선생의 글과 <사회 속 미술 : 행복의 나라>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김동일 교수의 글을 추천한다.
나는 ‘미술이란 철학적 사고에 의한 실체가 있는 물리적 구현’이라는 정의에 99.99% 공감하는 사람이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HOT ART SPACE

리우 웨이 개인전
플라토 4.28~8.14

이번 전시는 중국 차세대 작가를 소개하는 자리인 동시에 플라토의 고별전이다. 1999년 개관한 로댕갤러리를 전신으로 하는 플라토는 그동안 국내외 다양한 작가를 소개하여 현대미술의 흐름을 관망할 수 있는 장이 되었다. 플라토의 폐관 소식이 알려지자 미술계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플라토가 선택한 마지막 작가는 리우 웨이(??, Liu Wei). 1972년생인 작가는 (1999)으로 데뷔해 상하이미술관 최연소 개인전 작가, 광저우비엔날레(2002), 베니스비엔날레(2005), 부산비엔날레(2008) 등 다수의 미술 빅이벤트에 초청받은 세계적 작가다. 전위적 작업을 펼치는 리우 웨이는 서구 시각에 영향받은 중국의 이미지에 반해 자기반성적 작업을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참을 수 없는>(1999), <풍경처럼>(2004), <하찮은 실수 Ⅱ>(2009~2013) 등 세계적으로 작가의 이름을 알린 작업과 근작이 함께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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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나 (1)

코리아나미술관 소장품 기획전
코리아나미술관 4.7~6.25

전시는 ‘백남준을 회고하다’(사진)와 ‘자인(姿人)-한국·프랑스의 미인’ 2파트로 나뉘어 열린다. 백남준의 작품은 2006년 개관전 이후 10년 만에 수장고 밖 나들이여서 그 의의를 더하고 있다. 또한 여성의 모습을 담은 회화와 조각, 사진 등 코리아나미술관의 정체성과 소장품 연구의 방향을 보여주는 작품도 다수 출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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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배, 드로잉, 1995~2016

오원배 개인전
갤러리 밈 5.12~6.7

20여 년간 펼쳐온 드로잉, 콜라주와 프레스코 기법을 이용한 신작 6점을 선보인다. 기존 작업이 삶의 부조리와 인간의 실존 탐구를 추구했다면 드로잉 작업은 단순하고 기호화된 이미지로 한층 더 자유로운 형식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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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 (1)

이지은 개인전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관 4.20~5.2

중견작가 이지은이 지난 20여 년간 해온 작품들을 선별해 개인전이자 회고전을 개최했다.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온 직후 발표한 어둡고 무거운 톤의 추상작품에서부터 밝은 색조로 꽃을 그린 근년의 작품 중 40여 점을 선별해 선보였다. 전체 색감과 그리는 방식의 차이는 있으나, ‘꽃’의 다양한 표정과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작가는 미의 일시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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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효 (1)

2016동시대미감전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5.4~7.3

<2016동시대미감전>의 첫 작가는 이재효다. 25년에 걸친 작업을 회고하는 전시로 성남아트센터 공연장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서 펼쳐진다. ‘Walking with Nature’라는 부제를 단 전시에서 작가는 400여 점의 드로잉과 대표작 130여 점, 그리고 미공개 대형 신작을 선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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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환 개인전
문화예술공간 예술의 기쁨 4.27~5.21

광주교대 교수로 재직중인 조각가 박정환의 8회 개인전이 문화예술공간 ‘예술의 기쁨’에서 열렸다. <서로보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인물 두상작품은 치아가 없으면서도 억척스러운 한식 엄마, 허리가 많이 굽었지만 품위를 지키셨던 수원이 엄마, 마을 농수로를 청소하셨던 말수 적은 아저씨 처럼 그동안 작가가 만난 주변 인물의 모습이다.

SPECIAL ARTIST 최 병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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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모란미술관에서 열린 초대 개인전 <응시> 전시광경

조각가 최병민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다. 해부학적 기초를 바탕으로 제작된 그의 인체조각은 정적(靜的)인 동시에 동적(動的)인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지난 40여 년 동안 일관되게 전통조각어법으로 몰두해 온 그의 작품은 그만의 독특한 조각적 형식과 함축적인 상징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넓고 광대한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인체에 축약해내는 침묵의 음유(吟遊)와 은유(隱喩)의 발성법과 표현법이다. 작가 최병민의 작품세계를 탐구한다.

최병민의 천문?인문?지문 그리고 한국 구상조각의 현실에 대한 한 소회

성완경 인하대 명예교수

어떻게 이런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게 됐는지 어안이 좀 벙벙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연한 일인데 좀 늦게 일어난 것뿐이다. 좀 늦었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면서 2년 전 그의 작업장을 방문했을 때 그와 나눈 대화 중 ‘포기 각서’란 말에 잠시 생각이 머물렀다.(이 얘기 나중에 더 하기로 하겠다). 읽는 분들을 위해 소식부터 적는 게 순서일 것이다. 미래창조과학부 산하기관인 한국천문연구원이 2018년 금년에 개원 40주년을 맞아 천문과 인문, 우주와 인간의 행복한 융합을 기원하는 문화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그 틀 속에서 소백산 연화봉 소백산천문대에 최병민의 작품 <구름을 훔친 사람>(1991)을 구입 설치하기로 했다는 기사다. 좋은 소식은 그 밖에도 더 있다. 파주의 임진각 근처 평화공원이 최병민의 작품 <평화 2>(1996)와 <해바라기>(1995)를 매입했다는 소식이다. 이 공원은 방문객들이 자연 속에서 에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테마파크형 산택로를 이미 조성해놓았으며 인간과 우주, 자연과 전통, 평화와 문화에 대한 명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여러 점을 앞으로 추가 매입하거나 제작 발주할 계획이라고 한다.
최병민은 진지한 인식론적 자각과 뚜렷한 개성과 장인적 공력의 인체조각을 통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과 문화에 대한 깊은 사색과 명상을 표현해온 작가다. “수천 년에 걸친 신화·토템·설화 등을 알고 상상하고 내가 추구하는 인간형의 문화를 형상화하는 게 바로 내 작업의 궤적”이라고 최병민은 말한 적 있다. 바로 그렇게 그는 작업을 해왔다.
그의 작가 경력은 40년이 넘는다. 최병민이 1973년 대학 졸업 후 주로 발표의 장으로 삼았던 것은 화단의 경력 쌓기와는 거의 무관한, 독특한 미술공동체인 <혜화동 화실 동인전>과 서울대 미대 출신의 뚝심 좋은 재야 엘리트 예비사단 비슷한 <12월전>의 연례전이었다. 그는 조각가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거의 15년 만인 1988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제3갤러리) 첫 개인전부터 고집스러울 만큼의 독특한 개성으로 일관된 특이한 음각부조 작품들로 당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구름, 해골, 거품, 이무기, 거인, 사신, 눈, 물고기, 새, 철조망 같은 모티프를 등장시켜 본질적으로 죽음과 존재, 인간의 유한함과 현실이 거역할 수 없는 힘들에 대한 명상을, 체관과 허무, 분노와 연민을 표현한 작업들이었다. 능숙한 기량의 그의 음각부조에서 빛과 어둠의 교차가 거꾸로 빚어내는 볼륨의 허상 — 존재의 허공에서 존재의 환영을 읽게 해주는– 은 존재와 비존재, 탄생과 스러짐이 교차점에 불안정하게 붙잡혀 있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또다른 메타포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의 기량과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준 전시였다.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은 그 4년 후에 있었다. 이 2회전의 내용을 그의 중기 작업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시간적으로는 1회전 이후 4년 만에 열린 전시지만 그 후에도 오래 지속되는 그의 조각작업의 강한 형식적 · 내용적 특징들이 이 전시에서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뼈와 근육만을 남기며 훑어 내려진, 밀도 높은 단순성으로 요약된 강인한 육체들, 마임(Mime)이나 상형문자처럼 거의 기호(記號)에 가깝도록 분명하게 읽히는 갖가지 포우즈나 동작들, 그리고 머리에 이고 있거나 어깨 팔, 등짝, 손끝 등에 걸려있는 구름, 초생달, 번개 따위의 우주적, 설화적 상징물들”이 그것이다(졸고, 위 전시서문. 이하 동일). 이것이 사람들이 비교적 뚜렷이 기억하는 그의 작업의 양식적 표지이다.
초기작의 기질적 색채는 그대로이나 보다 열리고 보편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의 작업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 이 중기작들의 특징이다. 이제 우화는 하나의 신화로, 보편적 언어와 윤리와 세계관으로 통합된 하나의 문화로 변모해가는 느낌이다. 문화의 ‘원형(原型)’을 느끼게 하는, 원형을 찾아서 그 원형을 통해 얘기하려는 예술적 장치가 다양하게 구사된다.
한국 고대문화의 샤먼적, 제의적 색채나 동양문화권 특유의 약간 기괴하고 마술적인 신비한 에너지 – 이를테면 우리는 그것을 기(氣)철학이나 단학, 18계나 봉술, 염력 등 정신의 집중과 엄격한 육체적 단련에서 나오는 에너지 그리고 바람춤이나 구름춤 달춤 학춤처럼 문화와 자연에 독특하게 어우러진 지점에서 나오는 운률의 에너지 같은 것에 연관시켜 상상할 수 있다 -, 天地人의 조화에 기반을 둔 우주관과 그것의 반영으로서의 윤리, 신화적 설화적 분위기 등 대체로 이런 것들이 그의 작품에서 한국적·동양적 문화전통의 냄새나 운률을 풍기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의 상당 부분은 춤, 음악, 민간 전승놀이, 전설, 제의(祭儀) 등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전통문화의 코드들을 활용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놀이문화적인 요소의 활용은 이번 전시작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후기 작업은 그가 양평군에 작업장을 마련한 2000년 이후의 작업들이다. 앞의 시기에 비해 차분하고 정관적인 것이 특징이다. 전시회로 치면 2008년 제5회 개인전 이후 지금까지 작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사이 3회와 4회 개인전에 선보인 작업들은 2회전의 내용과 양식들을 마케트로 다양하게 변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8년 개인전의 기획자 김진하는 이 시기 작업 속 인물상들이 지닌 고요함과 경건함과 부드러움에 특히 주목하며 이것을 앞선 시기 작업과의 차별성으로 인식한다. “하늘을 경배하듯, 땅을 위무하듯, 해를 마주하듯, 비와 바람을 부르듯, 신을 맞이하듯, 운명을 바라보듯 경건하게 서 있는 사람. 머리와 어깨 팔에는 구름, 해, 달, 번개 등을 이고 두 발은 가지런히 대지를 딛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고도 강인한 육체, 절제되고 고요한 동작, 시대와 공간을 구별하는 의복이나 배경이 없는 나신의 직립. 거기에 부드러운 바람이 일며 스치는 듯, 그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김진하, 투명한 인간, 그 아름다움에의 헌사 – 최병민의 근작 ‘응시’에 대하여, 2008)
특히 눈여겨 볼것은 인체를 다루는 방식의 변화이다. 농경적 샤먼, 노동, 놀이, 춤, 제의 등의 소재들은 여전하지만 표현 방식이 달라졌다. 뼈만 남았던 인체는 부드러운 살갗과 강건한 근육으로 덮이고, 움직임과 기울임이 컸던 다채로운 동작의 변화는 직립의 수직으로 고요하게 멈추어 섰다.
팔의 동작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도 움직이지 않는 굳건한 하체에 의해 안정적이다. 여전히 신화적인, 그러면서도 경건한 느낌이 극대화된다. 정지(停止). 시간은 흐르되 동작은 멈추어진 상태. 그 멈춤은 스스로의 의지 혹은 의례 때문인 듯 다분히 의도적인 자세다. 사람이 이런 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의전(儀典)·의식(儀式)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동작이라 하겠다. 무거운 분위기의 어떤 중압감, 수도승 같은 비의(秘儀)적 느낌을 불러일으킨다(위 같은 글).
작가들의 경력을 보면 대개 작품 소장처가 몇 개 나열되어 있다. 최병민의 경우에는 그것이 없다. 단지 금호미술관과 모란미술관 이렇게 두 개 미술관이 있을 뿐이다. 두 미술관은 그의 초대전을 열어준 미술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초대전이니까 의례적인 인사로 한 점 사줬거나 초대 비용의 정산 차원에서 작품 한 점이 미술관으로 건너간 것일 뿐 순수하고 진정한 구매라고 보긴 좀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는 미술관이나 기업의 구매도 화랑이나 일반 고객 혹은 수집가의 구매도, 비껴간 예술가였다.
앞서 말했듯이 최병민은 1999년 고교 미술교사직 퇴직 후 양평군 서종면에 작업장을 짓고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으로 암중 모색해온 신작 40~50점을 모두어 2008년 개인전에 선보였다. 나무화랑 기획에 모란갤러리(화봉갤러리/종로구 관훈동) 초대로 연 전시였다. 1993년과 1995년에 나무화랑 초대로 연 두 차례(제3회와 4회) 개인전에 이어 13년 만에 열린 다섯 번째 개인전이고 ‘응시’라는 타이틀의 주제전이었다.
앞서 1993년과 1994년에 이어 이번에도 이 전시 기획을 맡은 나무화랑의 김진하 대표는 “최병민의 조각은 묵언(默言)을 수행하는 순수한 상태의 인간형 또는 세계와 존재에 대한 직관적인 깨우침을 지향하는 수행자나 예지자로 읽힌다”며 “현자의 침묵이 절제된 조각을 통해 울림으로 다가온다”고 평한 바 있다. 그의 작업의 핵심적 맥을 짚은 말이다. 이 전시는 초대자 쪽에서 작품 한 점을 구매한 것으로 끝났다. 그에 앞선 3회전(1993)과 4회전(1995)의 경우도 작품 판매는 전혀 없이 끝났었다.
나무화랑은 다시 2011년과 2012년에 제6회와 7회 초대 개인전을 열었다. 2011년 6회전은 전시장 전경을 찍은 도판에서도 볼 수 있듯이 깔끔하게 절제된 디스플레이가 최병민 작업의 정신적이고 귀족적인 아우라를 그야말로 금강석처럼 투명하고 단단하게 뿜어내는 전시였다. 별로 크지 않지만 아주 알맞은 크기의 전시공간 전체가 한 작품처럼 통합된 전시였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전시작은 모두 마케트 크기였다. 제7회전은 ‘인간-우주’라는 부제가 붙었다. 관훈갤러리와 나무화랑이 공동으로 초대한 전시다. 7회전, 8회전 역시 판매 성과는 전무했다. 다만 한 평론가가 주물 작업비를 대어 한 작품에서 네 개의 멀티플을 떠내어 돈 댄 사람, 작가, 두 갤러리 주인이 각각 한 점씩 나누어 가져가는 것으로 끝난 것이 유일한 성과라면 성과였다.
2013년 서울 평창동 소재 김종영미술관에서 김영원 홍순모 김주호 최병민 배형경 등 삶의 문제를 탐구해온 5인의 조각전이 열렸다. <인간, 그리고 실존>이란 타이틀의 주제전이었다. 최병민은 이 전시에 <하늘 풍경> 과 <벽> 연작을 선보였다.
김종영미술관 최종태 관장은 위 전시서문 말미에 이 전시에 대한 감회를 이렇게 밝혔다. “이 사람들을 보라. 예술을 왜 하는가. 누구를 위해서 하는가. 예술행위란 무엇을 추구하는 일인가. 예술의 목표는 어데인가? 외진 빈터에서 끈질기게도 무슨 신념으로 이들은 왜 이렇게 인간의 문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런 의문, 그 알 수 없는 함정! 그런 길고 긴 끝없는 이야기를 생각하게 한다.”
최병민이 판화가 이상국이 타계했을 때 그 빈소에서 최종태 관장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작가로 살기가 너무 힘들고 작업장에 쌓여만 가는 작품들을 보면 근심만 깊어져서 한 말일 것이다. 최병민이 제시한 방도가 폐탄광촌의 지하 공간이나 공장 공간을 손봐서 작품 저장 공간(매장 공간? 저장 후 봉인?)을 만들고 안 팔린 작품들이 쌓여 있는, 죽음을 앞둔 작가들의 작품들을 수거해서, 작가는 작품의 ‘포기 각서’를 쓰고 국가는 그 작품들을 일단 후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비유적으로 말하면 타임캡슐 묻듯이 하자는 얘기와 유사해 보이는데) 하자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최 관장이 나라에 건의해주십사고 했다는 것이다. 작가가 생존한 동시대에 관중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냥 버리는 것도, 사후에 뿔뿔히 흩어지는 것도 견디기 힘든 심정이 있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으리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묻어버리라’는 얘기다. 얼마나 부조리하고 웃픈(우습지만 슬픈) 얘기인가.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이며, 기질적 개성과 가치론적 세계관을 함축한 작품들,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그리고 전통과 자연에 관한 진지한 성찰과 탐구를 보여주는 작품들, 민중적인 동시에 귀족적인 깊은 울림을 간직한 정통적인, 정공법적 자세의 작품들이 점점 우리 시야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이것은 생물종의 멸종 위기와 유사할 정도의 미술생태계의 위중한 현실이다. 이 문제를 미술의 사회적 인식 문제 차원에서 그리고 미술 수용의 제도적 틀의 차원에서 잘 살펴보고 나아가 복지와 사회안전망의 차원에서도 대처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기술한 2018년 뉴스 이야기는 한 작가의 작품이 어디에 어떻게 놓였으면 좋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나온 나의 행복한 상상이었다. 2회전 서문에서 나는 전시작 대부분이 나중에 확대해서 완성하는 것을 전제로 한 소형 작품인 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전시작들이 이 같은 ‘완성’을 위한 물적 공간적 조건들을 만날 것인지는 이번 전시 이후의 작가의 행운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지금 최병민의 양평 작업장을 가 보라. 그리고 거기 쌓여 있는 마케트가 대부분인 100여 점의 작품을 보라. 거기 한 조각가의 비극이 만개해 있다. 이 푸른 오월에. ●

최 병 민 Choe Byoungmin
1949년 태어났다. 휘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8년 제3미술관에서의 첫개인전을 시작으로 금호미술관(1992), 나무화랑(1993, 1995, 2011, 2012), 모란미술관(2008), 관훈갤러리(2012)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경기도 서종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있다.

최병민

2011년 나무화랑에서 열린 초대 개인전 전시광경

왼쪽 페이지 <山> 브론즈 34×19×17cm 2011(maquette)

ARTIST REVIEW 나 점 수

조각가 나점수의 작품은 언뜻 보면 추상회화 같다. 구체적 형상이나 색채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조각엔 수많은 이야기와 섬세한 감성이 깃들어 녹아있다. 절제되고 세련된 형태와 촉각을 자극하는 표면의 질감에서 작가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 이면엔 실크로드와 아프리카 대륙 횡단이라는 고된 순례의 체험에서 발현된 철학적 사유가 담겨있다.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에 선정되어 6월 17일부터 김종영미술관에서 <표면의 깊이>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이 열린다.

세상과 더 잘 만나기 위해 詩가 되는 공간

김은영 블루메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세상을 만나는 법이 달라지고 있다. VR(가상현실) 체험 기기가 세간의 관심 속에 있는 것은 그것이 PC와 스마트폰처럼 큰 변화를 이끌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리적 이동 없이 특정 공간에 가 있는 것 같은 가상 경험의 핵심은 프레임 없이 세상을 본다는 것에 있다. 주변의 모든 환경이 캡처된다. 머리를 돌리면 더 많은 것이 보이고 설명되는 방식이다. 이로써 실재 세상을 실재같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조각가 나점수의 작업은 압축적이다. 설명적이기보다 시적이다. 단어 하나로 정신과 몸과 마음을 갑자기 다른 곳으로 옮겨놓는 시처럼 그의 작품은 실재하는 세상을 내 눈앞에 하나하나 가져다 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정서를, 의식을 움직여 어디론가 데려간다. 채워 보여주기보다 비워내어 맞닥뜨리게 하는 식이다.
나를 중심으로 둘러쳐진 세상을 나열하듯 보여주기보다 더는 시각으로 분석될 수 없는, 인식 밖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크기의, 밀도의 세상이 실제이고, 그 실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거리를 극복하려는 노력보다는 고정된 의식이 목적성 없이 무너지는 ‘경이’와 같은 순간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의식이 설명적인, 분석적인 행로를 따라가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장치들을 사용한다.
나점수는 공간을 되도록 비우고 수직적인 또는 수평적인 선으로 남는 형태의 조각들을 만들어왔다. 이를 위해 그는 주로 나무를 사용해왔는데 이는 그 원래 모습이 위로 성장해가는 수직성을 지니고 있거니와 서있거나 누워있는 모습에서 곧 생(生)과 사(死)라는 이성의 범주 밖을 향해 가는 생각들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가 사람의 형상을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손과 발의 행위가 없는 나무 기둥의 침묵과도 같은 포즈로 서있는 인간 형상은 시시각각의 현재보다 더 크고 넓은 시공간을 품어내는 듯 보인다. 그가 만들어낸 수직의 인간형상이 그 자체로서 기념비적인 형태 자체에 주목하게 하기보다 지지대나 통로의 역할로써 그것이 서있는 물리적 공간을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그에게 조각은 형태가 아닌 공간과의 관계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나점수는 사막을 찾아다닌다. 숲이 사람을 감싼다면 사막은 통째로 드러낸다. 그에게 사막은 비어있는 거대한 공간으로, 보이는 복잡한 모든 것이 비워지고 그것에 붙어있던 소리들도 비워지는 곳이다. 그리하여 모든 감각의 초점이 지평선 위에 숨쉬며 흔들리듯 서있는 자신에게 모아지는 곳이다. 광활한 수평선 그리고 그 위에 침묵하듯 서있는 생명 있는 것들이 자아내는 숭고의 감정으로 그를 끌어당기는 사막이라는 장소에서 그는 수직과 수평으로 환원되는 공간의 언어를 가져와 관객의 의식이 작동하기 전 그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에너지 장과 같은 정서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나점수의 조각이 이성적인 설명을 이끌기보다 느낌과 정서로 먼저 관객을 끌어당기는 것은 그것이 바라보는 거리를 전제하기보다 거칠거나 단단함 같은 손끝의 감각을 당겨오기 때문이다. 시각적이기보다 촉각적인 그의 공간 안에서 재료들은 가능한 한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나무, 철, 흙, 마른 풀, 석고, 유리, FRP 같은 대체로 자연적인 재료를 사용하며 그는 작가가 재료를 손으로 제어하는 방식을 최소화한다. 깎아내기보다 거칠게 쳐내는, 빚어내기보다 한두 번 뭉쳐놓고 끝내는 방식을 통해 재료는 본래의 물질성을 잃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의 조각들은 본래 그 재료가 놓인 자리, 그것이 속해있던 장소의 공기까지 머금게 되는 것이다.
굵은 나무 기둥을 턱턱 쳐내 나무의 속살 한 켜를 그대로 세워놓은 듯한 조각, 작업실 주변 마른 풀들을 석고반죽으로 이겨 FRP로 만든 인체형상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작품에서 우리는 한겨울 숲에서 나무의 껍질을 만질 때 전달되는 온기, 풀숲을 흔드는 바람을 느낀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추상으로 또는 형상적으로 귀결되는 것과 상관없이 나점수가 만들어내는 형태의 의미는 물질적인 표면을 통해 전달된다. 그에게 표면은 표피로 맴도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출발점이 되는 끝도 없는 깊이를 지닌 것이다.

13

<식물적 사유-向> 나무 모터 철, 가변크기 2013

17 길위에서다

<~의 방향> FRP(도색) 600×120×120cm 2012

시간성 – 느린 움직임
최근 그의 작품에는 움직임을 만드는 기계장치가 추가되었다. 얇게 쳐낸 나무 기둥에 저속 모터장치를 부착해 나무 조각이 앞뒤 또는 옆으로 느리고 부드럽게 움직인다. 일정 각도 안에서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모습은 동물의 민첩한, 공격적인 움직임보다 은근하고 고요한 식물의 그것과 닮아있다. 그 스스로의 움직임이라기보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의한 흔들림 같은 느낌이다. 왜 이런 움직임일까? 그는 이것이 관객의 정서적 동의에 대한 실험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형태가 느리게, 곧 멈추려는 듯 더딘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 때 그것은 그 자체의 행위로 주목되기보다 공기의 움직임으로 같은 공간 안에 서있는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는 것이다. 이는 찰나처럼 지나가는 시간을 늘여놓은 듯한 느린 움직임 앞에서 유한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행위로 먼저 읽히는 드로잉 기계장치도 마찬가지이다. 검은 석탄으로 흰 종이 위에 선을 긋는 기계장치에서 작가가 무게를 둔 부분은 얼마나 느리게 움직이게 할 것인지다. “선의 반복 행위는 표현을 위함이 아니라 의식의 속도를 지연시켜 현존을 깨우기 위함이다.”라는 그의 의도는 시간성을 느끼게 하는 아주 느린 움직임 앞에서 관객이 나아가고자 했던 방향을 잊고 걸음을 멈춰 지연된 또는 확장된 시간 속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완성된다.
관객으로 하여금 결국 나로 돌아오게 하는 공간. 하던 대로의 생각이 잠시 흔들리며 내가 느끼는 것, 나의 마음이 향하는 것을 더듬어보게 하는 시간의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점수의 작업이다. 봐야 할 것으로 가득 찬 세상을 더 많이, 더 잘 볼 수 있도록 또 무언가를 만들어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멈추고 잠시 떠나 돌아오며 보이지 않던 실재로서의 세상과 내가 더 깊게, 더 실제같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 그것이 그가 하고자 하는 바인 것 같다. 세상을 만나는 법이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유롭게 세상과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느냐에 있다.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이 향해 있다면 가능하다고 말한다. ●

나 점 수 Na Jeomsoo
1969년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1년 갤러리 보다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김종영미술관(2009), 갤러리현대 16번지(2010), 백순실미술관(2013), 갤러리3(2014)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경기도 양주에서 작업하고 있다.

 

ARTIST REVIEW 홍 유 영

홍유영의 작품은 현실과 관계 맺고 있다. 그는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오브제를 채집해서 새롭게 조합하고 재해석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물과 공간의 관계는 구조적인 변형을 거치고 확장된 개념으로 탈바꿈된다. 입체미술이라는 영역을 고수하는 작가의 관심은 공간의 정치학 또는 공간의 사회경제학 쪽으로 옮아가면서 심화되고 확장된다.

홍유영의 오브제 설치, 공간, 제도는 삶을 강제 한다

고충환 미술비평

홍유영은 공간에 관심이 많다. 처음에 그 관심은 생활의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만들어지고 덧붙여지고 해체되고 재구조화되는 공간의 생리며 생태학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가능태로서의 공간개념, 식물처럼 살아있는 공간개념, 이행하는 공간개념,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인 관계에 종속되지 않는, 그 자체 전체인 부분이 만들어내는 파편화된 공간개념이 그 생태학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근작에서 그 관심은 공간의 정치학이며 공간의 사회경제학 쪽으로 옮아가면서 심화되고 확장된다. 덩달아 현실적이고 서사적인 측면이 더 강조된다. 공간, 장소, 영역, 경계에 스며든 권력문제, 그리고 영토의 기획에 반하는 탈영토의 실천논리(질 들뢰즈)를 가로지르면서 넘나드는 일련의 작업들이 헤테로토피아(미셀 푸코)에 대한 또 다른 한 가능성을 예시한다.
이를테면 한 평 공간 속에 물건들이 잡다하다(한 평 공간에 대한 연구). 팬과 형광등, 컵과 생수통, 반찬용기 등 대개는 플라스틱 소재의 각종 용기들, 폐 의자와 빨래건조대, 간이 사다리와 철재 봉, 투명 플라스틱 슬레이트 등등. 언뜻 보면 잡동사니 같지만, 사실은 하나하나가 쓰임새가 있는 일상 용품들이다. 이 기물들이 한 평 공간이 좁다는 듯 빼곡한데, 특이한 것은 어떤 접착제도 사용하지 않은 채 순수한 역학만으로 균형을 잡고 있는 점이다. 그 균형은 허술한 것 같지만 빈틈이 없고 되는 대로 쌓아놓은 것 같지만 엄밀하다. 이처럼 빈틈이 없고 엄밀한 균형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 균형이 빈틈이 없고 엄밀한 만큼 구조물 중 하나만 다르게 놓거나 심지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다. 집이 없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밀려나 수도권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밀려나다 어렵사리 확보한 한 평 공간마저 대개는 임시방편이기 쉽지만, 여하튼 그나마 그 속에서 자족적인 생활이 가능해야 한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공간 활용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은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 그 긴장감의 강도는 너무 팽팽해서 외부로부터의 최소한의 간섭에도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공간이 무너지고, 삶이 붕괴되고, 존재가 내려앉고 만다. 작가의 이 작업은 이런 임시방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공간감, 긴장감, 불안감의 사회심리학적 징후 같다.
그리고 그렇게 떠밀려 다니는 사람들에게 잦은 이사는 일상이다(이사). 지금은 이삿짐을 나르는 일도 전문적인 업종이 되었고 제법 번듯한 이삿짐 전문차량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이삿짐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1톤 트럭이다. 작가는 1톤 트럭의 공간 수치 그대로 알루미늄 프레임으로 짠 것을 무슨 액자처럼 벽에 걸고, 그 위에 이삿짐을 싸는 그물망을 드리워 놓았다. 그리고 그물망 안쪽에는 아마도 이삿짐에 해당할 벽돌꾸러미를 비닐과 고무 밴드를 이용해 꽁꽁 싸 놓았다. 작가의 이 작업은 타의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이며 변방인의 자의식을 내재화한 사람들, 자본주의 시대의 유목민(?)에 대해서 말해준다. 인격으로부터 한갓 짐짝(자본의 페티시? 물신의 페티시?) 신세로 전락한 사람들의 존재론에 대해서 말해준다.
그리고 작가는 공간에 스며든 권력이며 공간의 정치학을 증언하기 위해 거리의 화분을 호출한다(균형 잡기 혹은 불균형한). 거리 정화를 목적으로 거리에 설치해 놓은 거대화분을 무슨 탑처럼 쌓아놓은 것인데, 기우뚱한 지표면 위에 그렇게 쌓은 두 개의 화분 탑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형국이 외적으로 균형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표면 자체가 기울어져 있어서 불안한 느낌을 준다. 결국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균형은 불균형이 잠재하는 균형이며, 안정은 불안정이 내재된 안정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런 거리화분이 외적으로 거리 정화를 수행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제도적인 장치 구실을 수행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인도와 차도를 구별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그렇게 제도가 그어놓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선을, 금지를, 감시를 상징하는 것과 같은. 그렇다고 정색 할 필요는 없다. 그 선은 가변적이고 더욱이 융통성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도에만 그렇지만. 이를테면 포장마차를 철거하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노숙자를 밀어내기 위해서라면 그 선은 언제라도 인도 안쪽 깊숙이 침범할 수도 있는 일이다. 작가의 이 작업은 바로 이런 제도와 공간의 관계, 제도의 유기적인(융통성 있는?) 공간학에 대해서 말해준다.

Water Containers, 2016 (3)

< A Space Made by Thirty Water Containers > 20L통 물, 가변크기, 2016

공간, 자본은 자연을 착취한다
공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제도가 삶의 질을 강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자본이 자연(또 다른 공간개념인)을 착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Squeeze). 사람들은 자연을 압착하고, 짜내고, 끼워 넣고, 쑤셔 넣는다. 그리고 때로 강요하고, 갈취한다. 공기 정화를 위해서.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장식을 위해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증명하기 위해서. 실체를 결여한, 스펙터클한 삶을 증언하기 위해서. 그러고도 더 이상 갈취할 게 없다 싶으면, 자연은 구석에 쑤셔 넣어진다. 이를테면 쓱 봐도 불편하겠다 싶은 천장에 바싹 붙은 좁은 선반 위에. 화분보다는 차라리 팬이 있으면 적당하겠다 싶은 구석에. 이 작업은 구석, 변방, 잉여와 같은 자본주의의 타자들의 지점을 예시해준다. 자연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물신에 의해 변방으로 내몰린 것들이며 폐기될 것들의 운명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자본은 일종의 유사 풍경 내지 의사 자연을 그려 보이기도 한다(구축된 풍경, 입체의 경우). 이를테면 낡은 테이블 위에 소주병이며 맥주병 그리고 우유병과 기타 각종 음료수 병들이 첩첩이 쌓여있거나 배열돼 있다. 여기서 테이블은 한 평짜리 공간처럼 현대인의 자기 공간에 대한 자의식 내지 욕망을 상징하며, 낡은 테이블을 지지하고 있는 네 개의 긴 다리는 불안정한 공간인식과 현실인식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테이블 위에 쌓인 병들이 산이나 숲과 같은 유사 자연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대개는 녹색과 갈색 계열이 어우러진 음료수 병의 색깔이 자연의 그것을 닮아 있는 것에서 착안 했을 터이다. 그리고 음료수 병들이 인공적인 스카이라인을 그려내면서 빌딩숲을 연상시킨다. 병과 숲과 빌딩이 오버랩되는 것을 통해 자연을 흉내 내는 현실(이를테면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아파트)을 풍자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테이블은 공간이 되고 병은 숲이 된다. 아파트촌이 산이며 자연으로 둔갑한다. 자연을 흉내 내면서 억압적인 현실을 감추는 자본주의적 풍경, 물신적 풍경, 욕망 풍경이 된다.
이처럼 자본주의 물신은 자연을 상품화하고,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인공자연으로 자연을 대체한다(대체자연?). 그리고 현대인은 그렇게 대체된 자연이자 상품화된 자연을 소비한다. 이 소비재들 중에는 유원지나 휴양지와 같은 비교적 자연의 원형에 가까운 것도 있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관광엽서에서 보던 것과 같은 이미지로 환원된 경우도 있다. 아마도 이런 자연 이미지야말로 가장 흔하게 소비될 것인데, 그 일면을 공사장 가림막에서 볼 수 있다. 공사장 가림막으로는 여러 이미지가 소용되지만, 그 중 전형적인 경우로 치자면 단연 자연 이미지를 꼽을 수가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공사장 가림막은 공사 현장을 가리기 위한 것이지만, 상징적으로 자본주의 기획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가리기 위해서 자연 이미지가 호출된다. 여기서 재개발 현장에 맞물린 이권의 크기가 클수록, 삶의 터전에서 내몰린 사람들의 처지가 심각할수록 자연 이미지는 더 생생해 보이고 더 그럴듯해 보여야 한다. 이미지 정치학이며 꿈의 산업이 더 잘 가동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작가의 작업(구축된 풍경, 평면의 경우)은 숲 이미지를 보여준다. 자세히 보면 숲의 부분 이미지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콜라주된 풍경이다. 좀 더 들여다 보면 그 속에 건물이 숨어 있는데, 건축 현장에 비치된 조감도 그대로 부분 이미지들을 편집하고 콜라주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숲 이미지지만, 사실은 그 속에 건물 한 채가 숨어있다. 겉으로 보기엔 자연 같지만, 잘 보면 그 이면에 숨은 자본주의의 욕망이 보인다. 마치 가림막 자체는 자연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자본주의의 치부를 숨겨놓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작가는 공간의 사뭇 다른 해석 내지 용법을 예시해준다. 여기에 물통들이 있다(30개의 물통이 만드는 공간). 각 20리터의 물이 담긴 하얀 플라스틱 물통 30개가 가장자리 선을 따라 삼각형의 공간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물통은 아마도 주차금지와 같은 임시방편의 목적을 위해 급조한 장애물, 일종의 생활미술이며 생활 오브제에 착안한 것일 터이다. 그 자체 자기 공간에 대한 현대인의 욕망이며 자본주의의 욕망을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물통들이 그려 보이는 삼각형은 모서리 공간이며 자투리 공간을, 잉여 공간 혹은 공간의 잉여를 상징할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왜 하필 30개의 물통인가. 30이란 숫자에 어떤 상징적 의미라도 있는가. 세월호 현장에서 30명의 아이를 구한 의인? 한 의인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순진무구한 30명의 아이?
이 작업에서 작가는 공간개념을 매개로 모서리와 자투리 그리고 잉여로 나타난 자본주의의 타자들의 지점들을 전유한다. 조르주 바타유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경제성이 없는 것들을 변방으로 내모는데, 그것들을 잉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잉여는 자본주의의 배타적인 논리와 억압적인 욕망이 만든 외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그 외상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출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30개의 하얀 물통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주검을, 순진무구한 죽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

홍 유 영 Hong Euyoung
1975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조소과와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갤러리-윈도우갤러리, 갤러리 인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07년 뉴욕 폴록-크라즈너 재단(The Pollock-Krasner Foundation) 후원으로 뉴욕 ISCP 레지던시,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스튜디오, 2010년 영은미술관 7기 입주 작가로 활동했다. 서울과 런던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EXHIBITION &THEME

행복의나라 (48)

위 함경아 <오데사의 계단>(왼쪽)나무, 폐기물 오브제 가변설치 2007 (경기도미술관 소장) 아래 ‘이면의 도시’섹션 전시장 전경

사회 속 미술 : 행복의 나라
ART IN SOCIETY : Land of Happiness

민중미술을 키워드로 풀어낸 <사회 속 미술: 행복의 나라전>이 5월 10일부터 7월 6일까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당대의 사회·정치적 이슈를 민감한 시각으로 잡아낸 민중미술 1세대 작가부터 2000년대 이후 활발히 활동하는 이른바 3세대 작가들의 작업을 한곳에 모아 주목받고 있다. 더불어 전시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 ‘민중미술’, ‘포스트민중미술’이란 용어를 제거하고 사회·문화적 시각에서 작품 간의 공통적 맥락을 이끌어내고 있다. 현장을 벗어나 미술관에서 ‘사회 속 예술’이란 이름으로 묶인 이 작업들은 과연 비평의 다양성을 어디까지 확장시켜나갈 수 있을까?

이중적 상징투쟁으로서의 민중미술

김동일 대구가톨릭대 교수

나에게 민중미술은 흡사 유령 같았다. 1980년대 말 집회에서 처음 접한 민중미술은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무섭게 타올랐다. 그 화염은 독재가 타도되었다던 1990년대 초 갑자기 사그라져버렸다. 민중의 시대가 왔다는데 민중미술은 오히려 꺼져버린 것이다. 그 민중의 시대가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기괴한 가면 아래 위장된 것이었음이 밝혀진 후에도 그 불길은 다시 타오르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민중미술은 더 유령 같았다. 누가 민중미술가이고 뭐가 민중미술인지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풍경화’가 민중미술의 지배양식이 되었다. 제주 바다, 금강산, 오대산, 설악의 자연은 독재에 대한 과거의 투쟁이 화랑에서 환전되는 가장 무난한 방식이 되었다. 화랑에서 성공한 (극)소수 민중미술가의 전시회가 오픈하는 날이면 인사동은 더 스산해졌다. 한때 그들과 함께, 혹은 그들을 따라 민중미술의 화염을 가슴에 품었던 사람들의 좌절이 거리를 배회했다. 2000년대의 민중미술은 더 이상한 유령으로 나타났다. 사회와 예술의 무력함 속에서 더 이상의 나락을 찾을 수 없는 젊은 작가들의 용기가 되살아났다.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서 이미 사그라져버린 민중미술의 가능성을 보았고, 이른바 ‘포스트민중미술’이란 호칭을 부여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포스트민중미술으로 범주화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1980년대를 계승하지도, 2000년대의 새로운 민중미술도 되지 못한 채 진부한 코미디를 반복하는 듯한 인상이다.
〈사회 속 미술: 행복의 나라전〉은 1980년대와 2000년대 민중미술 사이의 관계성을 복원한다.
그 시도만으로도 이 전시는 훌륭하다! 미학적 ‘사생아’였던 포스트민중미술에 ‘친부’를 찾아준 격이다. 세대를 건너뛴 민중미술가들의 가족사진은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리슨투더시티의 〈옥바라지골목〉(2016)과 플라잉시티의 〈파괴의 땅에서 할 만한 일〉(2002), 김동원의 〈상계동올림픽〉(1988)은 십 수 년을 사이에 두고 개발과 철거가 반복되는 자본의 논리를 보여준다. 그 어울림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주제로 묶인다. 비슷한 어울림은 ‘이면의 도시’, ‘행복의 나라로’ 섹션에서도 훌륭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그 감동적인 어울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전시는 과거의 민중미술이 왜 소멸했는지, 포스트민중미술이 선배들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밝히지 않는다. 소멸된 이유도, 다시 호명되는 이유도 모른 채 소집된 민중미술에서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미학적 성과를 전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시장은 1980년대 민중미술에서 늘 과도하게 주인공 대접을 받던 작가들의 진부함과 2000년대 이후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세대의 자기만족적인 시도들을 섞어놓았다는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혼합은 단순한 식상함을 넘어 이 전시가 문제 삼는 ‘사회 속의 예술’이라는 미학적 지평을 허물고 있다. 예술과 사회의 관계는 사회적 현실을 예술의 소재, 주제로 차용한다거나, 예술을 사회운동을 위한 선전선동의 도구로 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예술의 정치성, 혹은 정치의 예술성이다.
정치는 다양하게 정의된다. 카를 슈미트는 정치를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행위로 보았고, 탈코트 파슨스는 목적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하는 행위로 보았으며, 브뤼노 라투르는 네트워크의 재구성으로 보았다. 정치에 관한 서로 다른 서술은 궁극적으로 예술과 사회의 재구성으로 귀결된다. 예술이 사회의 조성을 바꾸고, 그 변화는 다시금 예술 개념의 확장으로 환류된다. 정치란 예술과 사회의 변화를 매개한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불꽃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민중미술은 예술과 사회를 함께 변화시켰다. 1980년대 민중미술이 소멸한 이유는 민중미술의 지형이 제도권 편입에 성공한 소수의 스타와 정당한 미학적 평가를 거부한 채 민중의 삶 속에 스며들거나, 집회의 선전물로 휘발해버린 익명의 다수로 양극화하면서 예술과 사회의 환류가 깨졌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인정과 성과들을 독점했던 스타들의 ‘배신’과 그에 대한 대다수 민중미술가의 ‘증오’가 상호 작용하면서 민중미술은 거대한 허무의 텅 빈 공동(空洞)으로 황폐해져 갔던 것이다.
민중미술은 이중적 상징투쟁이다. 민중미술은 전시장을 중심으로 한 예술장 내부 투쟁과 이른바 현장으로 호명되는 사회공간에서의 외부 투쟁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 결합을 통해 예술 개념은 진보했고, 또한 사회공간은 민주화라는 벅찬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민중미술의 제도권 내부 투쟁이 젊은 청년 미술가들의 외부 투쟁을 ‘배신’하고 외면했을 때, 민중미술은 실패했고, 학고재, 가나화랑, 가람화랑의 상품으로 전락해버렸다(난 아직도 그 도록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포스트민중미술은 1980년대 민중미술의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다소간 회의적이다. 그것은 이 전시의 한계라기보다는 냉정하게 봤을 때, 포스트민중미술이 아직 예술에 대한 사회의 요구와 사회에 대한 예술의 대응을 담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한 현실 때문이다. 믹스라이스, 리슨투더시티, 옥인콜렉티브, 노순택, 정윤석, 박찬경의 노고는 여전히 인상적이지만, 현장과 예술의 환류를 지탱하기엔 힘겨워 보인다. 고승욱, 김상돈, 홍성민, 조습의 재치와 유머 역시 후기민중미술의 중요한 성과임에 틀림없지만 주재환이나 오윤의 풍자에 비할 때 뭔가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게 사회공간의 폭력적 위계구조를 재구성하기 위한 예술의 확장보다는 사회 속에서 과잉 자각된 개별 작가의 자아가 더 도드라져 보인다. 그러한 자아의 확인이 민중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성취라는 데 이견이 없지만, 그 성취는 이른바 예술계가 부여하는 인정과 명예에 쉽게 도취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 사회의 구성을 바꾸는 빅뱅의 폭발점을 기대하기에는 그들의 내면이 여리고 약하고 섬세해 보인다. 그 섬세한 자아는 거친 삶의 현장보다는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더 편안해 보인다. 그들은 어렵게 얻은 인정과 도취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솔직히 말하겠다. 그저 민중미술을 사랑하고 민중미술가들에게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평범한 관객으로서 나는 사실 이런 종류의 전시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과연 ‘전시장’이 그러한 미학과 사회공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예술가들의 가열찬 왕복운동을 포착하기에 적합한 그릇일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적합하지 않은 그릇이 민중미술의 미학적 파괴력을 합당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젠 도심보다 더 도심스러운 변두리 아파트 동네 한복판에 세워진 근사한 미술관에서 열리는 민중미술 전시라니. 전시장은 권력을 도입한다. 근사한 미술관의 근사한 전시장이 그렇게 근사해지기 위해서 권력과 자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시장을 통해 틈입하는 권력과 자본은 실상 상계동에서, 옥바라지 골목에서 철거민들을 거리로 내몰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민중미술가들은 전시장 밖의 거대한 권력과 싸우면서도 정작 전시장을 통해 투영되는 권력 앞에서는 저항하지 못한다. 예술의 미학적 파괴력을 두려워하는 권력과 자본은 늘 그런 식으로 예술과 예술가들을 길들여왔고, 예술가들은 또 그렇게 자신들에 대한 요구를 배신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대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미술가들이 그들이 원했던 민주화된 사회가 도래했을 때 발견한 것은 정작 헐벗고 가난한 상태로 내팽개쳐진 자신의 모습이었다.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미명 아래 정작 자기 자신은 예술가도 운동가도 아니었고, 자신들이 제작한 ‘찌라시’들은 투척된 돌멩이들과 함께 거리를 나뒹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시장으로부터의 호명은 얼마나 달콤했을까? 그들은 그렇게 무력화되어 간다. 예술가들이 그렇게 무력화되어 갈 때 사회를 변화시키는 예술의 힘은 소멸되어 간다. 이미 지난 몇 년간 사회참여형 예술가들이 〈올해의 작가상〉, 〈에르메스 미술상〉등을 수상할 정도로 우리 예술계의 지형이 변화했지만, 그 변화가 무색할 정도로 민중의 삶을 억압하는 권력과 자본의 힘은 커져가고, 예술가들은 돈 앞에 더 교활해져가고 있다. 사실 나는 최근의 이 ‘난데없는’ 민중미술 부흥의 배후가 지속적인 상품의 공급을 요구하는 미술시장과 그 수요를 지금까지 늘 저평가되었던 민중미술로 대응하려는 시장 세력들, 그리고 시장가치와 미학적 평가에 목말라 있는 민중미술가들의 욕망이 공모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물론 시장중심적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그러한 공모를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새롭게 제기되는 예술과 사회의 환류 요구에 대처하는 정당한 방식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민중미술이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미학과 사회공간을 왕복하는 운동을 지칭한다. 민중미술은 그 왕복 운동 속에서 사회공간을 재구성하고 그렇게 재구성된 사회공간은 예술을 재규정한다. 민중미술은 예술과 사회 사이의 환류를 향한 끊임없는 자기 변화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는 매우 제한적으로 읽혀야 한다. 이 전시는 ‘사회 속의 미술’을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그것도 전시장에 적응 가능한 형태만을 소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 점을 망각할 때 이 전시는 민중미술의 ‘무덤’ 혹은 ‘종말’이라고 회자된 〈민중미술 15년전〉(이하〈15년전〉)이라는 유령의 또 다른 버전에 불과할 수도 있다. 〈15년전〉은 아주 조금만 민중미술적이었던 것들, 혹은 전혀 민중미술적이지 않은 것들에 민중미술이라는 보편적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정작 다수 민중미술가에게서 민중미술을 빼앗아버렸다.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제도미술의 정점에서 행해진 〈15년전〉이 민중미술의 무덤이 되는 역설이 거기에 있다.
1980년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사회를 변화시키고 예술의 정의를 재규정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가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시도들은 공공미술, 뉴장르공공미술, 커뮤니티아트, 장소특정성미술, 예술행동주의, 상황주의, 스125202.jpg 등으로 개념화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삶 속에서 권력과 자본의 작동을 관찰, 폭로, 경계하면서 사회 속에 침투해들어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예술과 사회 사이의 운동, 그 운동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사회의 민주화와 예술개념의 진보를 적절하게 포착하는 비평적 지평을 확보하는 일이다. 민중미술의 선배와 후배세대를 아우르는 적지 않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전시를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인정하는 이유는 우리가 충분히 주목하지 못한 시도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두렁’과 ‘광자협’은 여전히 방치되어 있다. 권력/자본과 대결했던 2005년 〈오아시스 프로젝트〉, 2012년 〈부평구 갈산동 421?1 콜트콜택전〉의 울림은 여전하다.
민중미술이란 어찌 보면 서로 반대편을 비추는 한 쌍의 거울인지도 모른다. 즉 미술을 통해 가능했던 사회의 민주화 그리고 민주화된 사회에서 가능해진 예술의 해방은 하나의 동전을 지탱하는 서로 다른 면들이다. 나는 이 전시를 그 두 면을 잇는 작업의 소중한 일부로서 이해하고 싶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사회 속 예술의 의미를 되묻고 민중미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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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사회 속 미술 : 행복의 나라〉를 기획한 두 주역
기혜경(왼쪽)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과 신은진 큐레이터

최근 민중미술계열 작가 개인전 및 단체전이 연속해서 열리고 있다. 일각에선 서울시립미술관이 ‘민중미술’을 주제로 전시를 열면서 미술시장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 시점에 민중미술 전시를 개최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혜경 비슷한 시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린 〈가나아트 컬렉션 앤솔러지전〉(5.3~2017.7.31)과 연결해 이번 전시를 보는 시선이 있다. 그 전시는 2001년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로부터 기증받은 200점의 컬렉션 안에서 작품을 선정해야 했다. 반면 〈사회 속 미술: 행복의 나라〉는 그 컬렉션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기획전으로서 전시에 부합하는 작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민중미술이 시장과 국제 미술사 안에서 판을 만들어가는 상황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고민했다. 이번 전시는 시장과 연동한 전시가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그 동향과 전혀 무관하게 진행됐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적어도 시장에서 원치 않는 불편한 내용이 있는 작업이더라도 미술사에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미술관다운 방식으로 풀어내려 했다.
신은진 이번 전시에 출품된 70여 점 중 서울시립미술관 컬렉션이 37점, 그중 가나아트컬렉션은 10점 뿐이다. 미술계라는 프레임을 벗어나 전시를 바라보기를 원했다. 문화사회적인 부분에서 ‘민중미술’을 재조명한다면 건설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번 전시 중 사회비판적 내용을 담은 ‘역사는 반복된다’ 섹션의 작품을 보면 동시대 뉴스 타블로이드에 나오는 사건 사고와 30년 전 이슈가 일치하는 지점이 많다. 세대론이 만연한 시점에서 세대를 넘어 공유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점을 부각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연대순의 구성을 피했다. 현재 30대인 젊은 작가와 민중미술 1세대가 30대에 한 작업을 함께 전시했다.

이번 전시는 역사화 맥락을 배제한 의도가 돋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회 속 미술’이라는 거친 범주 안에서 일부 작가는 ‘사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작가’로 묶기에 한계가 있지 않나?

기혜경 전시명 자체가 다소 거친 것은 사실이다. 민중미술이 작가의 태도 측면에서 지금까지 지속된다는 지점을 보기 위해 제목에서 ‘민중미술’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민중미술’이라는 무게감을 덜고자 했다. 그러면서 사회 속에서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간섭하고 틈을 벌리고 그로부터 새로운 대안을 생각하게 하는 미술의 태도를 묶으려 했다.
신은진 여기서 사회란 ‘시스템 비판’에 가깝다.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스며든 무의식적인 권력과 시스템에 대해 발언하는 작가를 보여주고자 한 지점이 있다.

1980년대 활동한 1세대 민중미술 작가들은 거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한반면 요즘 30~40대 작가는 대부분 개인의 메시지에서 시작해 사회적 발언을 하고 있다. 이 두 태도가 한자리에 모여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기혜경 민중미술을 동시대의 흐름으로 보겠다고 했을 때 이러한 전시 구성은 기본적으로 갖는 한계이자 상황일 수 있겠다. 한편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 이후 세대의 작업적 특징을 따로 분리해서 보아야만 하는가? 선배 세대와 후배 세대 작가는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 분명 유사점이 있다. 현재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1980년대 작업을 역으로 찾아갔다.
신은진 2004년 이영철 선생이 기획한 〈당신은 나의 태양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다른 분야를 흡수 통합하고, 출구를 열어보려는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각 섹션별 작가의 태도는 분명 다르다. 1990년대 이후 각자도생이 미술계 흐름이라고 하지만 주재환, 박이소는 집단의 흐름 속에 있는듯하면서도 본인만의 컬러를 보였다. 사사(SaSa)가 1년간 본인이 먹은 설렁탕 그릇 수를 세는 작업을 한다 해서 사회적 메시지를 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1990년대, 2000년대에 들어 작업의 중심이 작가 자신에게로 귀착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사회담론 속에서, 미학의 흐름에서 찾을 수 있다. 박이소, 사사, 양아치, 최정화의 작업을 한 공간에 두고 그들의 스토리 변화를 읽어내면 훨씬 재미있는 전시의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현장의 작업을 보여 줄수 있는 부분은 최열의 아카이브, 동시대에서는 현장사진가-대자보식의 텍스트와 사진-의 자료로 현장성을 강화했다. 리슨투더시티가 작가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들을 넘어서 옥바라지골목에 대한 내용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것에 의의를 뒀다. 이처럼 여러 코드를 읽으려고 했다.

전시에서 신은진 큐레이터의 큐레이팅 색깔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 같다. 이전에 기획한 〈서울바벨전〉과 이번 전시를 연결해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신은진 사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서울바벨〉의 ‘형아뻘’ 되는 전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젊은 작가들이 가진 고민이 지금은 지엽적이라고 생각되지만 선배세대 작가들이 가진 고민과 일맥상통하리라 보았다. 큐레이터로서 그들이 작업을 대하는 태도를 비슷한 시각으로 바라본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의 중심을 사회적 발언을 하는 1~3세대 작가들의 만남으로 봐야겠다.

기혜경 민중미술 3세대까지의 작가를 함께 다루자고 했을 때 신은진 큐레이터가 이들의 연결고리를 ‘박이소’에서 찾는다고 했다. 박이소라는 키를 통해서 달라 보이지만 같은 작가의 태도를 한곳에 모을 수 있다는 점은 전시의 중심축이다.
신은진 1층에 최민화, 최원준, 노재운 박찬경의 작업이 놓인 곳 바로 위층에 박이소의 〈풀〉이 놓여있다. ‘대안공간 풀’과 ‘그냥 〈풀〉’의 만남. 이번 전시의 숨은 디테일이다.
임승현 기자

EXHIBITION FOCUS ARTSPECTRUM 2016

아트스펙트럼 (63)

위 백정기 <악해독단>(오른쪽) 벽돌, 바셀린, 화강암, 혼합재료 560×400×400cm 2016 아래 박경근 <군대:60만의 초상> 2채널 HD비디오 영상 2016

삼성미술관 LEEUM이 2016년 첫 전시로 〈아트스펙트럼 2016〉을 개최한다. 〈아트스펙트럼전〉은 한국 현대미술의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 2001년 처음 시작된 격년제 전시이다. 올해로 6회째를 맞았으며 예년과 같이 작가 선정에 리움의 학예연구원뿐 아니라 외부 큐레이터 및 비평가가 참여했다. 선정된 총 10팀의 작가들은 개인사부터 한국의 근현대사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며, 회화·조각·영상 등의 매체 작업과 퍼포먼스·사운드·통계 및 그래픽 등을 시각화한 작업을 선보인다. 동시대 미술의 변화 양상을 개성 넘치는 형식미로 승화시킨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5월 12일부터 8월 7일까지 삼성미술관 LEEUM 기획전시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부의 다른 아트스펙트럼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뒤샹의 ‘레디메이드’ 덕도 아니고 워홀의 ‘팩토리’ 탓도 아니다. 정확히 짚자면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어지는 세계의 기술, 사회, 산업, 경제 조건 변화와 그에 결부된 인간 삶 전반의 변화가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의 종말(end of art)’ 그리고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다(anything goes)’는 아서 단토 식 미학이념의 뿌리다. 동의하든 않든, 좋아하든 안 하든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남성용 소변기가 예술작품이 되고, 브릴로 세제 상자의 대리/대량 생산이 독창적 창작 방식이 되는 단계를 오래전에 넘어섰다. 현재는 작가의 특정 의도가 효과적이기만 하다면, 미술계에서의 효용 및 이해관계에 부응하기만 한다면 무(無)에서 무(無)로 이어지는 어떤 것도 기꺼이 미술이라고 박수 치는 현실 원칙의 조류 속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아무것도 그리거나 만들지 않는 것은 물론 원칙적으로 도판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티노 세갈(Tino Sehgal)의 작업이 그 세태의 절정을 보여주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잘만 하면 아무거나 미술’이 될 수 있는 미술계의 느슨한 자유가 창작자의 쾌락이자 고통이 되는 지점에서 현대미술의 두 번째 국면이 시작됐다고 본다. 무엇을 할 것인지와 왜 할 것인지가 ‘미술’이라는 선험적 원리 아래 미리 주어져 있지 않기/못하기 때문에 작가들은 끊임없이 이것도 되었다가 저것도 되어야 한다. 과거와는 달리 꽤 다양한 배경과 이질적인 기질 및 능력으로도 충분히 미술계에 진입할 수 있다. 다만 그 배경, 기질, 능력을 미술로 적절히 활용할 때만 제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다. 디자인이나 비디오/영화 연출은 기본이고 작곡, 악기 연주, 밴드 활동, 여행, 자료 조사, 빅데이터 분석, 디지털 프로그래밍, 건축, 엔지니어링, 오타쿠 행태, 수집, 디스플레이 및 연출, 컨설팅, 마케팅, 사회운동 등등을 미술로 이전 융합하고 종합 도금하기. 이미 어디선가 누군가 다 한 것 같은 데서 출발하지만, 그로부터 감각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아주 작은 차이를 만들어내 동시대 미술계의 유력한 맥락 안에 ‘작품’으로 안착시키기.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최한 〈아트스펙트럼 2016〉은 위와 같은 점에서 지금 여기 한국의 젊은 작가들 미술뿐만 아니라 동시대 미술 전반의 실재를 함축한 시그니처 전시라 해도 좋다. 1990년대 후반부터 지난 20여 년간 국내외 미술계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구축한 현대미술의 미학적 경향 및 물질적/정신적 구조가 거기 뚜렷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져 있어서다. 기획 글에 따르면 리움의 학예연구원과 외부(그러나 더 큰 틀에서 보면 미술계 내부) 전문가들이 “한국 현대미술을 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조망하기 위해 (…) 작가 선정”에 나서 참여한 열 명/팀의 작가들 각각에서, 그리고 그 열 개의 미술 입면체가 모인 집합적 구성물로서의 전시에서 말이다.

아트스펙트럼 (21) 사본

김영은 <1달러어치〉스피커 3대, 모니터 4대, 드로잉 2점, 흡음재 3 가변크기 2016

<아트스펙트럼>에서 찾은 미학적 특수성
우선 우리가 올해의 〈아트스펙트럼〉에서 한국 젊은 미술가들의 특성으로 인정해야 할 사실은 이전 세대의 어떤 작가들에게서도 발견하기 힘든 복합적 전문 능력과 잡학적 기술이다. 그것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천부적 미술 재능을 의미하지 않고 다재다능함과도 거리가 있다. 또 복합적이라고 해서 보편성을 띠는 것도 아니지만, 잡학적이라고 해서 수준이 낮거나 쓸모없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전문 능력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지거나 운 좋게 발현되는 미적 재능 대신, 의식적 학습과 지속적인 자기 훈련 및 실용적 조직화를 통해서 쌓은 현실 능력이다. 그런 이유로 여기 해당하는 작가들은 많은 경우 작가 개인의 특화된 경험과 이력, 창작으로의 에너지 투입과 노력의 정도가 작품의 성과 및 독특한 수준을 결정짓는 바로미터다. 이를테면 보헤미안 예술가처럼 방랑과 기행을 일삼아도 어쩌다 보니 뚝딱 천재적인 작품이 나와 있는 형편이 아닌 것이다. 그와 달리 〈아트스펙트럼〉에 근거해 볼 때, 여기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일명 ‘스펙’을 갖춘 전문직업인 혹은 성실 근면한 연구자의 그것처럼 인풋과 아웃풋의 인과관계가 투명에 가깝다. 참여 작가 중 김영은, 옵티컬 레이스, 제인 진 카이젠이 그에 해당하는데, 특히 김영은과 그녀의 〈1달러어치〉 사운드&비디오 설치작품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어릴 때 바이올린을 배웠고, 대학에서 전공 외로 밴드활동을 했고, 국내 대학에서 조각과 매체예술을 전공한 후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서는 음향학(sonology)을 공부한 배경, 그간 쌓은 전문능력은 김영은의 작업 이력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고, 최근에는 〈1달러어치〉로 구현된 것이다. 그 배경 및 능력은 김영은이 시각예술을 청각을 중심으로 자기 조직화하는 데, 소리를 점/선/면/볼륨 등 조형적이며 공간적인 조건들로 교환시키는 데, 디지털 음원 형태로 1.29달러에 팔리는 비물질의 노래를 두부 썰 듯 길이, 높이, 폭으로 절합시키는 데 스며들어가 있다. 그리고 〈1달러어치〉는 애초 계산상 1.29달러짜리 음원을 1달러만큼만 구매하는 것인 만큼 정직하게 분절되는 가사, 파쇄 음정, 삭제된 주파수 대역 때문에 얇아진 소리 형태로 시청각화돼 작가의 의도를 감상자에게 전달한다.
다음, 우리가 현대미술계의 실제적 경향이자 한국 젊은 작가들의 특성으로 반드시 지목할 점은 매체에 대한 다원적 접근이자 사용 역량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나 W. J. T 미셸 등 서구의 여러 이론가가 이미 논한 것처럼, 1960년대를 기점으로 미술에서 매체는 장르적 특성과 매체 자체의 속성이 일치하는 매체특정성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주제, 형식, 의도, 용도, 방법, 기교 등에 따라 얼마든지 광범위해지거나 이질적으로 혼용돼도 좋은 포스트 미디엄의 국면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그 국면은 2000년대 들어 미술의 다른 어떤 역사적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 복합화, 심화했다고 봐야 한다. 그 맥락에서 나는 지금의 미술 매체 환경을 ‘예술 매체의 헤테로토피아(artistic medium’s heterotopia)’라 부르고 싶다. 이 헤테로 토피아적 매체 환경에서 어떤 작가들은 기존의 사실들, 다양한 출처의 이미지들, 기록 파편들, 익명적 정보들, 이질적 객체들을 리믹싱, 리포매팅, 트랜스포팅, 레트로 컨버전스 하는 데 열중하고 능수능란한 수준이다. 〈아트스펙트럼〉에도 여지없이 이 같은 면모를 여러 작품에서 발견한다. 앞서 김영은의 경우도 그렇지만 명시적으로는 박민하, 백정기, 안동일, 제이 진 카이젠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의 작품은 시각적으로는 완벽하게 재현되지 않는 작가의 작업 의도, 매체 사용의 목적 및 논리를 창작의 배경 내러티브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대체로 개념적 미술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 박민하의 〈리믹싱 타임스페이스〉는 우주를 키워드 삼아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비단 미국뿐일까마는)의 우주개발 열망과 그 실패 또는 부정성의 과정을 본인의 탐사 영상과 기성 SF 영화의 다수 풋티지로 리믹스해 만든 한 편의 영화다. 제이 진 카이젠이 취한 방법론도 크게 보면 박민하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작가의 개인사가 작업의 핵심 기저라는 점에서, 자신의 개인사를 한국인 해외 입양, 냉전기 아시아 디아스포라, 일본군 성노예, 제주 4·3항쟁 같은 역사적/동시대적 문제들과 구조적으로 엮어 탐구한 후 비디오(역사 자료, 인터뷰, 답사 등의 필름) 설치 및 포스터 제시로 형식화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면상 모두 논할 수는 없지만 〈아트스펙트럼〉에서 헤테로토피아적 매체성을 띠는 이 작가들의 특이성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매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최종 작품이 예술작품으로서의 미적 기능으로 소급된다는 점이다. 이는 빈 대학의 교수이자 미술비평가인 자베트 브흐만이 미술의 매체특정성과 그 이후를 “기록, 정보, 소통, 참여, 상호작용 등 매체의 특별한 [사용 및] 기능”(Sabeth Buchmann, 《The (Re)Animation of Medium Specificity in Contemporary Art》)에 따라 분류한 점에 비춰보면 다소 제한적이고 내부 지향적인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아트스펙트럼〉에서 주목할 한국현대미술의 미학은 여기 젊은 작가들이 사회현실과의 접점 맺기를 당연히 필요하며 적극적으로 수행해 갈 미술의 미션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예술과 삶/사회의 결합을 꿈꿨던 서구 20세기 아방가르드의 부르주아적 방식을 답습하는 대신 자기 현실의 날것 상태 세부에서, 한국 사회의 비린내 나는 생태에서, 척박한 대한민국 삶의 생활 구조에서 작품의 내용을 구상하고 미학적 형식을 결정짓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사실 이번 〈아트스펙트럼〉에 참여한 열 명/팀의 작가 모두가 그런 속성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지만, 특히 옥인 콜렉티브, 박경근, 옵티컬 레이스의 작업에서 그 특수성은 두드러진다. 옥인 콜렉티브는 거대한 마루와 언뜻 보면 미니멀리즘 영상 같은 모션 그래픽으로 이뤄진 〈아트 스펙트랄〉설치를 통해 현대미술계 내부의 작가이자 사회의 생활인으로서 딜레마에 빠진 이들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 박경근의 영화 〈군대: 60만의 초상〉은 이 전시의 최고 수작이라 평할 만하다. 그가 2010년 〈청계천 메들리〉에서부터 파고든 한국 근현대사의 미시적 실재는 그 영화에서 한국 사회 폐부 깊숙이 각인된 군대문화와 걸 그룹처럼 춤추는 전도사 소녀들 앞에서 넋을 잃는 까까머리 훈련병들의 얼굴을 횡단하며 트리밍 되기 때문이다. 옵티컬 레이스의 경우 그래픽디자이너와 “정보 시각화 연구자”(?)가 한 팀을 이뤄 한국 사회의 여러 현상을 통계/시각화하는 식으로 미술을 한다. 이 전시에서 이들이 건드린 현상은 1979~1992년에 출생한 이들(에코세대)의 〈가족계획〉이고,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 현상은 부모와 자녀의 소득, 결혼, 주거, 미래 설계 등이 걸려 있는 한국 사회의 복잡한 당면 문제로서 전시를 통해서는 수치를 담은 원, 막대그래프 등으로 그래픽 처리되었다. 이들 작품은 이전 세대의 사회적 미술과 비교하면 문맥이 훨씬 정교하고 담론이 풍부해졌는데 그와 동시에 시각적 감상의 대상으로서도 세련된 수준을 자랑한다. 물론 그 점이 지나치면 사회 참여적 예술에 필수 조건인 ‘신뢰’에 관한 한 민감한 지뢰가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국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는 예술이데올로기와 전략이 난무하는 현대미술계에서 〈아트스펙트럼〉 참여 작가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 거의 모든 작가와 그/녀의 작업이 미술에 대한 신뢰와 함께 절묘하게 맞춰야 할 감각의 다른 논리지만 말이다. ●

아트스펙트럼 (75) 사본

이호인< The Tower > (왼쪽) 캔버스에 유채 227.5×162.2cm 2015 <다리를 건너는 자들> (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227×181.6cm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