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서울 강남구 언주로에 새로운 문화공간,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Platform-L Contemporary Art Center)가 들어섰다. 개관 기념전으로 중국의 양푸동과 한국의 배영환의 개인전이 열린다. 양푸동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세 여성과 사슴 등에게 투영해 표현했으며, 배영환은 동시대를 살면서 느끼게 되는 상실감과 억압 등을 새로 은유하였다. 전시는 8월 7일까지.

나선형 역사 속에 비친 남성적 향수(鄕愁)

진휘연 한예종 교수

한 공간에서 동시에 열린 두 개인전에서 한국과 중국의 중견작가가 신작을 선보였다. 양푸동은 오프닝에 맞춰 마련된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자신의 작품세계와 신작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들려줬다. 중국 근현대화와 경제적 팽창에 따른 도시화와 서구화, 그리고 중국 역사의 단면을 세계미술의 흐름에 근거해서 비디오와 설치, 사진으로 제작해온 작가는 이번에 차이추성 감독의 1935년 영화 〈신여성〉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로 〈천색: 신여성 II〉를 제작했다.
신여성은 타지역, 특히 발달한 서구의 영향으로 달라진 옷차림을 하고, 전통이나 관습에 저항하는 모습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지위 향상이나 활동 영역의 확장은 물론, 가정 안에서의 역할 변화, 그것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타자의 수용을 아우르는 복잡하고도 총체적인 인식을 포함할 뿐 아니라, 변화를 선도하는 담론의 주체로서 인정될 때 신여성은 현재진행형 존재가 된다,
그러나 양푸동은 새로운 매체의 시대에서 만나는 여성 이미지로 신여성의 범주를 규정하고 있는 듯하다. 광고나 잡지에 등장하는 여성의 멋진 외모와 상품과 연결된 이미지들, 핀업걸들을 연상시키는 행동이나 포즈를 따라 하는 모습으로 그려낸다. 그의 작품 속 신여성은 결국 대중매체에서 반복해 노출되는 여성의 이미지에 가깝고, 매체가 그것을 재생산하는 방식에 대한 관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점은 이미 1970년대 후반 신디 셔먼의 작품 〈무제: 영화스틸〉에서 다뤄졌고, 이후 여러 작가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여성 둘이 몸에 밀착된 짧은 옷차림으로 서로의 몸에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이나 비키니를 입고 과장된 움직임으로 발랄함과 젊음을 드러내는 모습, 화면 밖 관객을 강렬하게 응시하는 모습 등을 취하며, ‘여성성’과 대중매체의 이미지 체계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발전해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양푸동은 남성 시선의 타자로서 존재할 뿐 아니라, 매력의 주체로서 여성의 자의적 태도를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소위 여성성, 아름다움, 젊음의 허구성을 드러낸다고 했다. 매체의 선정성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여성 스스로가 이미지 제작의 주체로서 모든 장면을 연출하고 있음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신여성은 신디 셔먼의 작품 속 여성들과 또 다른 측면을 갖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강렬할수록 그 뒤에 숨은 허상이 감지되지만, 작품은 실체가 아닌 것을 드러내기보다는 허구를 향한 여성과 매체의 양방향 욕망에 대한 포착이란 점에서 흥미로웠다. 무리 지어 포도를 기어가는 작은 벌레들에서 그의 의도는 절정을 맞는다. 서구 정물화의 전통에서 제기된 ‘베니타스,’ 허무함과 삶의 유한함이란 경구를 빌려와서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경계이자 유희의 함정을 지적한다.
장면마다 프레임의 시간을 조절하고 소리를 더함 으로써 극적이고도 흡입력 있는 영상 작품을 소개해온 작가는 중국 특유의 미적 감각, 여성에 대한 전통적 미학의 유산과 새로운 취향 간의 충돌도 담아낸다. 고대 진나라 황실에서 유래된 〈위록위마(謂鹿爲馬)〉를 기초로 한 〈사슴과 말〉에선 진짜처럼 보이는 사슴 주위를 빙빙 도는 말의 모습에서 2000년의 시간차를 두고 이어지는 중국의 역사와 예술적 감성의 연대가 부각되기도 한다.
경제적 부흥으로 사회 변화가 급격한 곳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언제나 전면에 나타나는 기호가 된다. 작가는 중국 여성을 담아내는 매체의 역사적 흐름을 전제하면서도 이것을 어느 시기에도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상황으로 전환시키려했다. 그래서 이들은 서양 기원의 옷차림에 중국 전통의 머리모양을 결합한, 모호하지만 동시에 탈지역적, 탈시간적 존재로 각인된다.
그러나 현재의 눈과 과거 사이의 거리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무수한 변수가 양푸동 작품에서 점차 정형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여성과 매체, 그리고 진실과 허구라는 익숙하고도 반복적인 주제 너머의 무엇을 제시하기에 이번 작품은 매우 예스러워 보였다. 주제를 압도하는 감각적 영상도 이미 익숙한 느낌이다. 진짜와 가짜가 함께 존재하기 위해 설정된 구분과 분리의 경계가, 아슬아슬하게 숨었다 드러나기를 반복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경계와 거리가 모두 너무 분명하고도 꾸준했다.

양푸동 〈천색: 신여성Ⅱ〉 5채널 HD 컬러 비디오 설치 12~15분 47초 2014

양푸동 〈천색: 신여성Ⅱ〉 5채널 HD 컬러 비디오 설치 12~15분 47초 2014

양푸동 (3)

정제된 공간에서 잠든 반항의 날개
시사적이고도 무게 있는 주제를 능숙하게 비튼 또 다른 작가, 배영환은 〈새들의 나라〉라는 낭만적 제목을 선택했다. 배영환은 자유와 억압, 권력과 욕망이라는 보편적 화두를 다룬다. 영상, 조각, 드로잉, 설치 등 입체적인 형식을 갖춘 전시에서 깃털 옷을 입은 댄서가 크로마키 배경에서 춤추는 모습을 촬영해서 〈추동추사〉란 동영상 연작으로 제작했다. 마치 새의 깃털만이 즉흥적으로 움직이듯 역동적인 모습을 담았다. 북소리의 빠른 비트에 맞추어 움직이는 깃털은 생명, 에너지, 기운, 자유의 상징처럼 보인다.
아래층의 〈말, 생각, 뜻〉과 〈사각 지구본〉은 함께 설치돼 있어서 마치 한 작품처럼 느껴진다. 눈금자 위에 눈을 가린 채 앉아 있는 큰 앵무새는 현실을 거부하는 존재이자 복종을 강요하는 권력의 실체일 수도 있고, 날기를 희망하지만 가린 눈 때문에 제한되고 억압된 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 주변에는 네모난 입방체 위에 대륙과 바다가 뚜렷하게 구분 돼 표시된 변형 지구본들이 놓여 있다. 진실을 거부하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서 평평한 지구만을 신봉했던 과거 인간의 잘못된 신념, 거짓된 착각에 대한 작가의 일갈이다. 이번 전시에서 소리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자 작품의 한 부분이었다. 빠른 비트의 북소리는 경쾌한 움직임을 원시의 힘처럼 느끼게 하고 확성기와 라디오에서 나오는 각국의 뉴스들도 일상이 주는 소음과 정보의 간극을 강조한다.
배영환은 깨진 소주병 조각들로 화려한 샹들리에를 만들고, 각성제로 유행가의 가사를 적거나 악보를 만들면서 권력의 가시적, 비가시적 억압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애정어린 시각과 낭만적 감성으로 제시해왔다. 시각, 촉각, 청각을 모두 자극하는 그의 작품들에서 주제의 무게와 감각적 측면은 늘 균형을 맞춰왔다. 자유로운 움직임을 통해 제도의 모순과 통제를 거부하려는 그의 의도는, ‘지금 이 시간’이라는 시사적 관점과도 연관된다. 다만 매우 설명적이고 친절한 작품과 지나치게 정돈된 표현에서, 배영환의 이번 작품들은 새로운 변형을 앞두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 두 작가의 개인전은 플랫폼-엘의 개관전이라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볼 때, 현대사회에서 매 순간 마주치는 매체의 힘과 시민 간 상호성을 담보하고, 과거부터 연속성을 갖는 시간 안에서 오늘 이 시점의 문제, 역사의 아이러니를 이미지화한다는 점에서 큰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감각적, 감성적 표현과 만듦새도 닮아있다. 그런데, 이들이 분석한 역사와 이미지에는 남성 시각의 편향성도 존재한다. 보이는 것 너머에서 작동하던 권력으로서의 남성 실체에 대해 큰 비판 없는 수용은 동시대 억압과 모순 안에서도 이어질 뿐 아니라, 더욱 견고한 역사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특히 양푸동의 작품들, 자본이 요구하는 여성의 이미지에서는 허구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 드러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여성들의 욕망만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배영환 작품에서 권력과 자유라는 구조 안에서 춤추는 주체의 모습 역시, 체제 안에서 이미 용납되는 수준이자 지극히 낭만적인 반항의 표현으로 보인다.
유사한 궤도를 도는 역사의 흐름이 언제나 확장된다고 믿는다면, 이 작가들의 낭만적 감성이 또 다른 변형을 준비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출발점에 선 미술관 역시 여러 모양의 충돌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시각의 기관이 되길 기대해본다. 지나치게 깔끔해서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듯한 공간의 성격도 앞으로 도전받아야 할 부분이었다. ●

배영환 (15)

배영환 〈말, 생각, 뜻〉 혼합재료 210×225cm 2016

배영환 (9)

배영환 〈추상동사-Can you remember?〉4채널 영상 2016

 

WORLD REPORT | SAN FRANCISCO

SFMOMA (7)

. 위 SFMOMA 1층 로비 (Roberts Family Gallery)에 설치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 Sequence > (2006) photo:© Henrik Kam, courtesy SFMOMA 아래 척 크로스의 작품이 전시된 피셔 컬렉션(The Fisher Collection)의 < Pop, Minimal, and Figurative Art > 전시장 전경 photo:© Iwan Baan, courtesy SFMOMA

SFMOMA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3년간의 공사를 거쳐 지난 5월 14일 재개관한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 새 건물과 함께 전시 공간 면적을 대폭 확장해,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푸른 하늘을 살린 자연채광과 안개를 형상화한 건물의 조화, 광범위한 컬렉션의 만남은 미술애호가들의 발길을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게 한다. 《월간미술》은 샌프란시스코를 직접 찾아 변화하고 있는 그곳의 아트신을 전한다. *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www.sfmoma.org

낯선 건축, 열린 미술관

임승현 기자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이하 SFMOMA)이 3년간의 긴 휴식을 마치고 지난 5월 14일 신축 건물의 베일을 벗으며 재개관했다. 3만3000점에 달하는 소장품, 1억6000만달러의 건축비, 4만3000m2에 달하는 새 미술관 규모, 뉴욕 현대미술관보다 1만8000m2 넓은 전시장. 미술관을 둘러싼 숫자의 나열만으로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SFMOMA는 명실공히 미국 최대 규모 현대미술관으로 자리매김했다. 기자는 일반 오픈을 2주가량 앞둔 4월 28일 프레스 오프닝에 맞춰 현장을 방문했다. 미술관은 아침부터 취재를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기자들과 지역 미술계 인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날 간담회에는 닐 베네즈라(Neal Benezra) SFMOMA 관장, 크레이그 에드워드 다이커(Craig Dedward Dykers) 건축사무소 스노헤타(Snøhetta) 대표 등이 참석했다. 지난 3년간 SFMOMA에는 이슈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재개관에 관한 이슈의 중심은 ‘건축’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1995년 디자인한 붉은 벽돌 건물 위로 솟은 흰색 포인트의 둥근 유리천장의 미술관 건물은 SFMOMA의 상징과도 같았다. 마리오 보타는 삼성미술관 LEEUM 뮤지엄1 건축에 참여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스위스 건축가다.
사실 이 건물은 주변 도시미감과 이질적이라는 의견이 팽배해 첫 공개 당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만큼 이전 건축이 지닌 존재감이 큰데다 컨템포러리 건축에 다소 보수적인 시선을 가진 샌프란시스코의 분위기 때문에 신축의 부담감은 막중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크레이그 에드워드 다이커는 “보타의 건축물과 연계해서 작업해 영광스럽다. 보타의 건물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외관에 있어서 그의 건물과 통일성을 주려 하지 않았다. 사실 보타의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면서 가장 곤란한 부분은 로비에서 천장으로 이어지는 육중한 계단이었다. 우리는 이를 나무계단으로 대체했다. 마리오 보타는 너무나 관대하게 받아들여 주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건축사무소 스노헤타와 SFMOMA는 기존 건축을 보존 및 보완하면서 바로 뒤에 10층 높이의 새 건물을 지어 전시 공간을 3배 이상 확보했다. “공공성의 확대를 새로운 목표로 삼는다”는 닐 베네즈라 관장의 말처럼 새로운 건축은 세부적인 부분에서 ‘소통과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우선 근교와 도시의 연계를 위해 유입 인구가 많은 방향으로 새로운 입구를 추가 설치했다. 이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공공 갤러리가 이어진다. 통유리로 밖에서도 볼 수 있는 이곳은 시민들이 전시관람과 상관없이 드나들 수 있는 휴식공간이다. 이곳에는 현재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상징적인 조각 (2006)가 놓여있다. 한편 자유로운 입장이 가능한 3층 테라스는 야외 조각과 미국 내 최대 크기의 식물 담장(living wall)이 있다. 1만5000종 이상의 지역 식물이 자라고 있어 계절과 시간에 따라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식물 지배엔 빗물과 재활용수를 이용한다. 갑갑한 빌딩 사이로 자연을 끌어드린 효과를 준다.
이외에도 여름에 안개가 많이 끼는 샌프란시스코의 날씨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동쪽 파사드, 기존 건물에서 둥근 유리천장으로 이어지는 육중한 계단을 가벼운 나무 재질로 바꾸면서 신관 역시 같은 재질과 구조의 계단을 층별로 사용해 건물 전체에 내부적 통일감을 살린 점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1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세워진 신축 건물과 기존 건물을 교묘하게 연결했는데 전시장에 작은 창을 뚫어 이 연결지점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 점은 소소한 재미다. 사실 두 건물의 외관은 이질적인 물질성을 띤다. 붉은 벽돌 건물과 언덕이 많은 지형적 특징을 담아 볼록한 수평선으로 입체감을 살린 스노헤타의 건물이 막상 실내에서는 물흐르듯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4. The new SFMOMA, view from Yerba Buena Gardens; photo Jon McNeal, © Snøhetta

Yerba Buena정원쪽에서 바라본 SFMOMA photo: Jon McNeal, © Snøhetta

미술관의 공공성
건축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은 바로 전시다. 재개관전은 미술관이 나아갈 방향과 색깔을 보여주는 장이다. 아쉽게도 SFMOMA의 재개관은 전반적으로 ‘전시’보다는 ‘건축’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무래도 강렬한 주제를 선정하거나 창의적인 담론을 제시하기보다 소장품을 보여주는 다소 밋밋한 설정 때문인 듯하다. 화려하고 거대한 스케일의 전시에 비해 소장품전은 극적인 효과를 내기 쉽지 않다. 소장품을 묶어낸 주제도 뻔하다. 그러나 ‘시대’와 ‘장르’ 중심으로 나눈 교과서적 분류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미술관의 메시지는 뚜렷하다.
앞서 닐 관장의 말을 인용했듯 SFMOMA는 ‘공공성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다. 18세 이하 청소년에게 전시를 무료개방하며, 다양한 시민참여 교육프로그램을 개발, 지역과의 연계를 확대할 운영 방침을 내세운 상태다. 그런데 이러한 맥락에서 공공성의 대상이 미술관만은 아닌 것 같다. 미술관을 찾고,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린듯한 메시지가 전시에서 전달된다.
이번 개관전은 소장품을 크게 3가지 갈래로 나눠 총 19개의 주제로 구성됐다. 그런데 각 전시는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 및 장기대여한 컬렉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마치 SFMOMA에 작품을 기증하면 ‘최고의 환경에서 당신의 작품이 빛날 수 있도록 미술관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는 듯한 무언의 프로모션 의지가 엿보인다.
그 첫 번째는 100년간의 장기 임대 파트너십을 체결한 ‘도리스 앤 도날드 피셔 컬렉션(Doris Donald Fisher Collection)’(이하 피셔 컬렉션)이다. 피셔 컬렉션은 의류브랜드 갭(GAP) 창업자 부부의 소장품으로 전후 미술 부분에서 가장 큰 개인 컬렉션 중 하나다. 260점의 피셔 컬렉션 중에서 미국 추상표현, 팝, 미니멀과 구상미술의 섹션에 해당하는 대표작을 선별해 전시했다. 성곡미술관 개인전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척 클로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엘스워스 켈리 외 아그네스 마틴,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이 대표적인 작가다. 1960년 독일 미술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시그마 폴케,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의 작품을 집약적으로 한자리에 모아놓아 집중도를 강화했다. 이 외에도 통유리벽을 사용해 리빙 가든과 마주보는 전시장에 놓인 1920~1960년대에 걸친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업, 신관과 구관이 연결되는 전시장에 놓인 ‘영국의 조각가’-토니 크레그, 리처드 데컨, 바바라 앱스워스와 리처드 롱-의 섹션은 화이트큐브이면서도 큰 창을 통해 도시의 모습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여 야외에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두 번째 컬렉션은 ‘캠페인 포 아트(Campagin for Art)’이다. 2009년부터 230명의 지역 미술 컬렉터로부터 기증받은 3000여 점의 작품 중 엄선한 600점의 현대미술 작업을 장르별로 나눠 선보였다. 이러한 기증문화는 기증자와 미술관 간의 유대와 공고한 신뢰를 부여준다. 또한 미술관 내에 플리츠커 센터 포 포토그라피(Pritzker center for Photography)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은, 미국 내 최대 사진관련 전시실이자 연구 공간에서 열리는 사진전도 마련했다. 리사 앤 존 플리츠커(Lisa and John Pritzker Family) 재단에 의해 완성된 이 공간에는 다워드 베이, 줄리아 바가렛 바케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등의 작업이 전시되었다. 일련의 전시는 미술관이 대중에게 문을 여는 만큼, 대중 또한 미술관 주요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각인시키며 적극적인 참여를 바라는 미술관의 의도를 여과없이 드러낸다.
SFMOMA는 이제 미국 서부를 넘어 세계 현대미술에서의 역할을 꿈꾼다. 이를 구축해가는 배경에 화려하고 실용적인 건물과 내실 있는 큐레이터도 한 몫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미술관의 미래를 밝히는 부분은 미술관을 구성하고 받쳐주는 자본가와 지역주민들을 미술관의 참여자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시원한 샌프란시스코의 바다처럼 SFMOMA는 재개관을 시작으로 미술관의 외연을 차츰 확장해 나갈 것이다. ●

WORLD REPORT | SAN FRANCISCO

“새로 개관한 샌프란시스코 전시공간 베스트3”

샌프란시스코는 LA에 이어 미국 서부 제2의 도시이자 대표적인 아트 허브다. 이곳은 ‘미국의 유럽’이란 별칭이 있을 만큼 빅토리아시대 건물이 즐비하고, 케이블카가 다니는 고전적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최첨단 기술산업이 발달한 실리콘밸리가 공존하는 차분하면서도 역동적인 도시다. 최근 샌프란시스코는 현대미술에 대한 뜨거운 관심으로 클래식한 도시에 모던한 감성을 입히는 중이다. 미국 서부의 어느 도시보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샌프란시스코의 아트신에서 최근 1년 이내에 개관 혹은 재개관한 ‘핫 플레이스’를 직접 방문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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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iu Zhijie 〈 Sketch of The World Garden 〉(오른쪽)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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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ler Scofidio+Renfro가 건축한 UC Berkeley Art Museum and Pacific Film Archive 외관(2016) Aerial view from the UC Berkeley campus. Photo by Iwan Baan. Courtesy of Diller Scofidio+Renfro; EHDD; and UC Berkeley Art Museum and Pacific Film Archive(BAMPFA)

버클리대학교 미술관
UC Berkeley Art Museum and Pacific Film Archive(BAMPFA)

미술관을 확장 이전하는 경우는 있어도 규모를 줄여 재개관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지난 1월 31일, UC 버클리 대학에서 운영하는 미술관, BAMPFA(이하 밤프파)가 이전보다 실면적을 줄이면서 건물을 신축해 재개관했다. 밤프파는 1997년 내진설계 기준 미달 판정을 받은 후부터 신축 논의가 있었다. 2010년 뉴욕 하이라인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사무소 ‘딜러 스코피디오+렌프로(Diller Scofidio+Renfro)’는 대학의 프린팅 공장 건물을 유지하면서 증축하는 독특한 디자인을 제안했다. 기존의 공장 위에 삼각형 구조를 2층으로 테트리스처럼 쌓아놓은 형태를 띤다. 미술관을 이전하면서 기존 건물보다 실면적은 줄였지만 창의적인 공간구획으로 영화관, 전시장, 카페테리아 등의 공간을 확보했다. 개관전 〈삶의 건축 (Architecture of life)〉은 밤프파의 디렉터 로렌스 린더(Lawrence Rinder)가 직접 기획했다. 미술관 신축에 맞춰 기획된 이번 전시는 건축 드로잉과 모델을 나열하기보다 간학문적 시각 매체를 통해 건축과 삶의 유기적 연결지점을 찾고자 한 독특한 개념의 전시다. 전시 못지않게 눈에 띄는 작품은 로비에 있는 대형 벽화다. 중국 작가 추즈제(Qiu Zhijie)의 〈세계정원의 스케치(Sketch of The World Garden)〉인데 이 작업은 통유리를 통해 밖에서도 누구나 볼 수 있다. 이 벽화 프로젝트의 시작을 중국인 작가에게 맡겼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밤프파는 아시아 미술에 어느 곳보다 애정을 쏟는다. 버클리대는 권위있는 중국미술사학자 제임스 케일(James Cahill)(1926~2014)이 학생을 가르치던 곳이기도 하다. 미술관은 재개관에 맞춰 미술관 한 켠에 그의 이름을 딴 ‘제임스 케일 아시아 아트 스터디 센터’를 마련해 누구나 그가 남긴 연구업적을 포함한 방대한 양의 아시아 미술 자료를 조회하고 리서치할 수 있도록 했다. 밤프파는 영화 분야에도 특화되어 있다. 특히 일본, 소비에트 영화의 최대 컬렉션을 자랑하는 17,500여 편의 영화와 비디오는 미술관의 자랑이다. 새 건물에는 232석과 33석이 겸비된 두 영화 상영관이 마련되어 다양한 영화프로그램을 이어갈 예정이다.

다이닝룸 전경 photo: Henrik Kam, taken November 2015, courtesy 500 Capp Street Foundation

< David Ireland House >다이닝룸 전경 photo: Henrik Kam, taken November 2015, courtesy 500 Capp Street Foundation

데이비드 아일랜드의 집
David Ireland House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지 않을 때 진정한 예술이 된다.” 일상의 오브제를 작업으로 승화한 개념미술 작가 데이비드 케네스 아일랜드(David Kenneth Ireland, 1930~2009)의 말이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한 이 작가의 대표작은 ‘500 Capp Street’에 위치한 〈데이비드 아일랜드의 집> 자체다. 1975년, 그는 1886년에 세워진 빅토리안식 집을 구매했다. 창문의 몰딩을 제거하고, 벽체를 벗기고, 노란색 폴리우레탄으로 바니시 칠을 해서 집을 개조했다. 또한 30년간 생활하면서 생활도구부터 가구까지 점차 그의 작품으로 채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04년 그가 건강 악화로 집을 떠난 후 가족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집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이 소식을 들은 지역 컬렉터이자 후원자인 칼리 윌리엄스(Carlie Williams)는 집을 구매하고 작품의 보존을 위해 거리 이름을 딴 ‘The 500 Capp Street 재단’을 설립했다. 여기에 데이비드 아일랜드의 오랜 동료인 안 해치(Ann Hatch)와 예일대 아트갤러리의 디렉터인 조크 레이놀드(Jock Reynolds)가 협력해 작품 보존 및 복원에 참여했다. 2014년 시작된 복원작업은 2년의 시간을 거쳐 올해 1월 15일 드디어 대중에 공개됐다. 의외의 공간에 놓인 책, 가구, 서신을 포함한 그의 일상 속 작업은 마치 시간여행을 떠난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데이비드의 정신은 일상과 지역 공동체에 깊이 뿌리박혀있다. 그런 그의 삶이 기록된 공간을 유지하고 동시에 대중에 공개함으로써 그의 유산을 확대하는 일에 참여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칼리 윌리엄스의 말은 미술 후원자의 태도와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미네소타 (5)

Minesota Street Project의 '1275 Minesota Street' 외관과 전시장 전경

Minesota Street Project의 ‘1275 Minesota Street’ 외관과 전시장 전경

미네소타 스트리트 프로젝트
Minnesota Street Project

지난해 여름,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위치한 산업단지 도그패치(Dogpatch)에 2층 창고형 건물을 개조한 복합문화공간, 미네소타 스트리트 프로젝트가 들어섰다. 이 프로젝트는 비영리 예술공동체와 상업 갤러리 간 지속가능한 문화적 연대를 목표로 한다. ‘1275 미네소타 스트리트’는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공간으로 현재 10개의 상설 갤러리를 포함해 2곳의 순환 갤러리, 다목적 미디어룸 등이 들어서 있다. 서울에도 한 건물에 여러 개의 상업 갤러리가 모인 경우는 있지만 지역 주민을 위한 비영리적 성격을 띤 공간이 포함된 경우는 드물다. 이곳의 설립자인 앤디 라파포트(Andy Rappaport)와 그의 아내 데보라 라파포트 (Deborah Rappaport)는 실리콘밸리 사업가 출신의 열렬한 아트컬렉터다. 이들은 3년 전 그들이 자주 가던 샌프란시스코 유니언스퀘어에 위치한 몇몇 갤러리가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갤러리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후원자의 도움을 통해 자생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예술 기업의 대안 모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며 설립 배경을 말했다. 미네소타 스트리트 프로젝트는 계속 확장 중이다. 6월부터 작가 스튜디오 건물인 ‘1240 미네소타 스트리트’를 오픈하고 매년 70명의 작가를 수용할 예정이다. 3번째 공간인 ‘1150 25번가 스트리트’는 최근 떠오르는 해안 지역(Bay Area) 작가들의 작업을 보관하는 수장고로 운영할 전망이다. 워낙 큰 규모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다 보니 이 지역은 짧은 시간 안에 샌프란시스코 미술계의 새로운 아트밸리로 부상하고있다. 데보라는 “돈을 벌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다”라며 “작가와 갤러리가 보다 더 자유롭게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돕고싶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임승현 기자

* 샌프란시스코관광청 www.sanfrancisco.travel

 

WORLD TOPIC| SHANGHAI Huang Yongping

 

황용핑 (40)

위 머리(头)> 객차, 철로, 동물박제 가변설치 2011~2016 2011년에 제작된 < Leviathanation >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당시 베이징에서 선보인 은 9.3m 차고와 머리가 없는 동물 40마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는 ‘좌회전 갈림길’ 철도를 함께 설치했다. 아래 < 곡마단(马戏团) > 나무, 대나무, 동물박제, 레진, 철 2012

<뱀 지팡이 Ⅲ: 좌회전 갈림길(蛇杖Ⅲ:左开道岔)>(3.18∼6.19)로 명명된 황융핑(黄永砅)의 개인전이 상하이 동시대예술박물관(上海当代艺术博物馆)에서 열렸다. 전시명은 익히 알려졌다시피 그리스·로마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바,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순적 상황을 제시한다. 큰 스케일의 설치작업으로 유명한 작가는 일종의 경외감까지 자아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가가 직면한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궁금증을 풀어보자.

세상의 모든 충돌

권은영 예술학

중국 동시대 예술의 포문을 연 ‘85신조’ 미술운동의 대표적 단체 중 하나인 ‘샤먼다다(厦???)’의 중심에 서 있던 황융핑(?永?, 1954~)! 중국 저장미술학원(현 중국미술학원) 유화과를 졸업한 황융핑은 1989년 파리 퐁피두센터의〈대지의 마법사전〉을 계기로 프랑스로 건너가 정착했다. 그리고 10년 뒤, 1999년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후한루(侯瀚如)기획으로 3월 18일부터 6월 19일까지 상하이 동시대예술박물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설치작품을 선보이며 대규모 개인전을 연다.
상하이 동시대예술박물관 개관 이래 최대 규모의 설치작품이 등장했다. 바로 40미터에 이르는 황융핑의 〈뱀 지팡이Ⅲ(蛇杖Ⅲ)〉가 그 주인공이다. 〈뱀 지팡이〉는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황융핑의 국제 순회전으로, 본래 2014년 로마 소재 이탈리아 국립 21세기예술박물관(MAXXI)에서 선보인 바 있는 작품이다. 당시 황융핑은 로마 지역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종교 대항’이라는 주제로 총 8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그는 자신의 개인전을 브랜드화하여 지난 2015년 베이징 소재 훙좐미술관에서 〈뱀 지팡이Ⅱ〉를 개최했다. 각각의 전시는 단순한 순회전이 아니라, 매번 소주제를 가지고 구성되는데, 두 번째 베이징 전시에서는 ‘영토 논쟁’을 주제로 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영토’는 뜨거운 감자였기 때문이다.
3회를 맞는 올해 상하이 전시에서 기획자 후한루는 ‘좌회전 갈림길(左?道?)’을 통해서 세계 통치 역량의 운명에 대해 비판적 토론을 시도한다고 밝히고 있다. 가령 세계 경제체제와 중국의 경제체제는 상이하여, 여전히 완벽한 호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또한 세계 대테러 공조는 또 하나의 세계 통치체제의 역량을 시험대에 올리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좌회전 갈림길’은 오늘날 세계의 흐름 속 우리의 운명’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갈림길’은 앞으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표상이다. 세계화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지구 반대편 사건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으며, 유일무이한 정답과 이별한 지 오래다. 선택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에게 ‘좌회전 갈림길’은 어쩌면 매일 맞닥뜨리는 우리 일상의 단편일지도 모른다. 이번 상하이 전시는 총 25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첫 로마 전시 규모와 비교해보면 약 3배에 달한다.
줄곧 동서양의 문화 관계, 인간과 동물의 관계, 이데올로기 충돌의 표현 방식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해 온 황융핑에게 〈뱀 지팡이〉 속 뱀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뱀과 용은 신화 및 종교 경전에 등장하며 지식과 지혜 그리고 동시대 공포와 기만 등 모순적인 의미를 보여줬다. 결국 그의 뱀은 동서양 문화의 접점에서 이데올로기의 충돌을 보여주는 표상인 셈이다. 또한 전시장에 대단한 존재감으로 등장하는 그의 〈뱀 지팡이〉는 관람객에게 일종의 경외감을 자아내며 문화 부호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사색하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머리(?)〉작품은 25도로 기울어진 채 설치된 높이 7미터, 길이 11미터의 대형 설치작품이다. 〈머리〉는 본래 2012년 추즈제(邱志杰)가 기획한 〈상하이 비엔날레〉를 통해 상하이 동시대예술박물관에서 선보이고자 기획안이 만들어졌었다. 하지만 당시 실현되지 못했다가, 2016년 이번 개인전을 통해 비로소 현현되었다. 〈머리〉 작품이 이번 전시에서 갖는 의미 중 하나는 전시의 소주제 ‘좌회전 갈림길’의 은유라는 점이다. 기차의 한 끝에 이어진 철도는 두 갈래로 갈라지며 한 쪽은 에스컬레이터, 다른 한 쪽은 계단에 이어지며 동선으로 연결되고, 관람객으로 하여금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갈림길에서 좌회전할지 우회전할지 말이다.
〈머리〉에는 총 41마리의 머리 없는 동물이 등장한다. 작가는 “머리가 없는 동물은 일종의 위기감을 자아내지만 개체는 각자 따로 존재하며 사실 각자의 의미를 가진다”고 강조한다. 본 전시에는 머리가 없는 동물이 〈머리〉 작품 외에도 몇 번 등장한다. 전체 전시에는 총 75마리의 몸통밖에 없는 동물이, 〈머리〉, 〈곡마단(???)〉, 〈부가라치 산(布加拉什)〉 세 작품 속에 등장한다. 75마리의 동물 머리는 또 어디에 있을까? 작가는 2층 빨간 커튼 뒤 〈우두머리〉 작품 속에 동물의 머리들로만 구성된 작품을 배치하여 연결고리로 삼았다. 개체의 존재성을 강조하며, 그들 각자의 의미를 언급했던 작가의 이야기에서 대중사회 속 소시민의 존재와 그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황융핑의 작품에는 동물 혹은 곤충의 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후한루는 1990년대 초 〈황화(??, Yellow Peril)〉에서 처음으로 메뚜기 형상이 등장했다고 회고한다. 여기서 황화는 황색 인종이 서양 문명을 압도한다는 백색 인종의 공포심을 함의하는 단어로 동양인을 의미한다. 당시 황융핑은 중국과 기타 문화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메뚜기를 이용하여 그는 중국인과 피식민자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즉, 동물의 형상을 통해 양자 대립의 관계뿐만 아니라, 명확한 일대일 대입이 불가능하게 서로 뒤얽힌 복잡한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해외에서 많은 활동을 하는 황융핑은 사실 중국 미술사의 핵심 인물이다.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그는 중국에서 ‘샤먼다다(厦???)’라는 미술 단체를 조직하여 중국 미술사에서 전무후무한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중국 저장미술학원을 졸업한 그는 저장(浙江)성 인근 푸젠(福建)성 샤먼(厦?)시에서 린춘(林春), 린자화(林嘉?), 차이리슝(蔡立雄), 자오야오밍(焦耀明) 등과 함께 ‘샤먼다다’를 조직했다. 단체 이름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이들은 다다이즘 정신을 따르며, 부정, 부조리, 저항, 허무주의 색채가 가득한 작품을 쏟아낸다. 이들이 대륙에서 큰 주목을 받은 계기가 된 것으로 단연 1986년 11월 23일 〈분소사건〉(焚?事件)을 들 수 있다. 당시 황융핑이 이끄는 샤먼다다 그룹은 “예술을 제거하지 않으면, 생활도 안정될 수 없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자신들의 작품을 샤먼신예술광장(厦?新????)에서 소각하는 행위예술을 단행한다. 이렇게 중국 미술사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황융핑의 이번 전시는 미술인들에게 중국 동시대 예술의 선봉에 있던 ‘자랑스러운’ 작가의 금의환향 전시로 포장되어 더욱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정치적인 목소리가 담긴 작품도 적지 않은 이번 전시에 대해 중국 대륙의 예술계는 선배 작가에 대한 존경과 함께 매우 호의적이다. 전설적인 샤먼다다의 중심 인물의 상하이 동시대예술박물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설치 작품 전시일 뿐만 아니라, 후한루와 황융핑의 만남에서부터 본 전시는 개막 전부터 대륙 미술계에서 회자되었으며,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신작으로만 구성된 개인전이 아닌 구작이 다수 포함되었고, 〈뱀 지팡이〉는 세 번째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좌회전 갈림길〉은 중국 미술 애호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호평을 받는 데 성공했다. 물론 〈뱀 지팡이〉는 매번 다른 소주제를 앞세워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었으며, 최근 연이은 테러 사건으로 ‘방향성’에 대해서 많은 이가 고민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과도 밀접하기에 더욱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닐까? 이번 황융핑의 개인전을 통해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청량함마저 느꼈다. ●

 소가죽, 양피, 대나무, 나무, 철 1570×1260×700cm 1997,사진 왼쪽은  알루미늄 2014 전시장 1층 가장 오른쪽에 설치된 화면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작품은 이다. ‘祸’는 냄비를 뜻하는 단어로 양 무리 속에 우뚝 솟은 소를 배치해 ‘양 냄비’ 속 소 한 마리를 비유한다. 소가 소를 먹어 걸리는 병의 원인을 신화적으로 해석해 사람이 소를 먹고, 소가 양을 먹고, 양이 사람을 먹는 구조로 인간의 잔혹함을 역설적으로 꼬집고 있다

< 양과(羊祸) > 소가죽, 양피, 대나무, 나무, 철 1570×1260×700cm 1997,사진 왼쪽은 <뱀 지팡이(蛇杖)> 알루미늄 2014
전시장 1층 가장 오른쪽에 설치된 화면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작품은 <양과(羊祸)>이다. ‘祸’는 냄비를 뜻하는 단어로 양 무리 속에 우뚝 솟은 소를 배치해 ‘양 냄비’ 속 소 한 마리를 비유한다. 소가 소를 먹어 걸리는 병의 원인을 신화적으로 해석해 사람이 소를 먹고, 소가 양을 먹고, 양이 사람을 먹는 구조로 인간의 잔혹함을 역설적으로 꼬집고 있다

 앞에서 포즈를 취한 황융핑

<양과> 앞에서 포즈를 취한 황융핑

 

WORLD TOPIC | BERLIN Julian Rosefeldt Manife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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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Julian Rosefeldt < Manifesto > 2014/2015 ⓒ VG Bild-Kunst, Bonn 2016 아래 Julian Rosefeldt < Manifesto > 2014/2015 ⓒ VG Bild-Kunst, Bonn 2016

함부르거 반호프-게젠바르트뮤지엄(2.10~7.10)에서 열린 율리안 로제펠트(Julian Rosefeldt, 1965~)의 개인전 전시명은 ‘개인이나 단체가 대중에 대하여 확고한 정치적 의도와 견해를 밝히는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매니페스토(Manifesto)’로 명명됐다. 프롤로그 포함 13개의 스크린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이 각각 분장을 달리해 아방가르디스트와 사상가의 발언을 연설조로 늘어놓는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이를 통해 로제펠트가 제시하는 “예술가가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안녕하십니까? 모든 예술은 속임수입니다”

최정미 전시기획

전시를 기획한 안나 카타리나 게버르스와 우도 키텔만은 보도자료를 일레인 스터트번트를 인용해 “To give visible action to words”로 시작했다. 관람객으로 미어터지는 오프닝 그리고 일레인 스터트번트의 알 듯 모를 듯한 문구로 전시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되었다. 긴 기다림 끝에 들어간 전시장은 어두웠고, 총 12개 프로젝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그 사이로 불안하게 움직이는 먼지 그리고 음향의 혼합 때문에 도망치듯 전시장 제일 뒤편에 설치된 스크린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완벽한 웨이브의 빨간 머리와 임플란트보다도 더 완벽해 보이는 가짜 이빨을 낀 듯한 케이트 블란쳇(이하 블란쳇)이 뉴스앵커와 리포터로 1인2역을 하고 있다. CNN뉴스 진행자 같은 발음과 억양으로 솔 르윗, 아드리안 파이퍼 그리고 일레인 스터트번트의 매니페스토에서 편집한 텍스트 “Good evening ladies and gentlemen, all current art is fake”를 외치고 있다. 리포터로 분한 또 다른 블란쳇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공격적이며 영웅다워 보이는 앵커 블란쳇을 받아주고 있다.
맞은편 벽에는 미국 남부 정통 보수파 어머니로 분신한 그녀가 점심 식탁에 둘러앉은 남편과 아들들을 위해 기도하는 형식을 빌려 다음과 같은 독백을 늘어놓는다. “I am for an art that is political-erotical-mystical that does something other than sit on its ass in a museum.” 청소년기 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셋은 눈을 뜨지도 감지도 않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듯한 자세다. 남편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아내의 중압감을 이겨내려는 듯 두 손을 모은 채 참고 있는 듯하다. 단지 식탁 앞에 조각상처럼 앉아 있는 개만 무념무상한 듯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있을 뿐이다. 다른 한 영상에서는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주식투자상담사가 “The iron network of speedy communications which envelops the earth”라고 외친다. 유가 하락, 주가 폭락, 중국 경제위기 등 마치 현재 세계경제를 예언한 듯하다. 베를린 중심에 있으며 단체 관광객의 핫스팟이기도 한 프리드리히스타트팔라스트 극장에서 러시안 악센트가 강한 안무가로 변신한 블란쳇은 외계인과 새를 합성한 듯한 복장 차림의 한 무용수들에게 마치 영웅처럼 “I demand the total mobilization of all artistic forces”라고 명령한다. 그녀의 과도한 연기는 거의 코미디에 가까운 수준이어서 관객은 실소하다가 시원하게 웃고 있다. 이렇듯 각 매니페스토 영상이미지는 설명하는 듯, 웃기거나, 역설적이거나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총 12편(프롤로그 1편)의 영상작품에서 교사, 펑크족, 퍼펫티어, 주식투자상담사, 노숙자, 매니저, 과학자, 장례식 주관자, 생산 근로자, 안무가 등으로 분한 블란쳇은 각 역에 맞는 연기력과 현란한 비주얼로 전시장을 꽉 채우고 있다. 할리우드도 울고 갈 완벽한 세트, 때로는 6시간 이상 걸렸다는 분장, 버즈 아이 뷰, 로 앵글, 클로즈 업 등 현란한 영화적 촬영 구도와 기법을 사용했지만,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과 분위기를 연출했다. 때로는 영상 촬영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며 보이는 실제와 또 다른 실제를 부담 가지 않을 정도로 적절하게 섞어 놓았다.
율리안 로제펠트는 〈매니페스토전〉을 위해 지난 170년간 발표된 예술, 창작인의 매니페스토를 최대한 수집했다. 시인인 트리스탄 차라와 앙드레 브르통, 작가인 카지미르 말레비치, 클래스 올덴버그, 솔 르윗, 무용가 이본 레이너,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 그리고 영화감독 짐 자무시 등 60여 개 매니페스토를 모을 수 있었고 이를 12편의 연설문 형식이 아닌 연기할 수 있는 텍스트로 줄이고, 편집했다고 한다. 작가는 창작하지 않았고 단지 콜라주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텍스트는 각 에피소드에서 역설적이며, 아름답고, 그로테스크한 형식으로 드러난다. 사조는 다다이즘부터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플럭서스, 팝아트,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공산주의적 사고까지 총망라했다.
매니페스토는 과거 남성 전유물이었으며 주로 예술, 정치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이렇게 확실한 의도와 목적을 가진 매니페스토를 여성인 블란쳇에게 주었다. 그렇다면 율리안 로제펠트(이하 로제펠트)에게 예술인의 매니페스토란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가. 2014년 후원자 중 하나이기도 한 바이리셔 룬드풍크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술인의 매니페스토는 예술계를 변화시키려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를 변형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이를 위해 매니페스토의 시조라 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부터 짐 쟈무시의 《영화를 만드는 규칙》까지 정리했다.” 또 한 인터뷰에서는 “예술가의 매니페스토를 통하여 행위 실험적인 에너지(performative Energie von Kunstlermanifesten)를 구현하려 했다. 또한 그 안에서 사고의 아름다움과 시적인 사유를 찾았다. 또한 그녀의 퍼포먼스를 통하여 인기도 없고 잘 읽히지 않는 매니페스토가 사람들에게 좀 더 다가오기를 바랐다”고 했다.
1965년 뮌헨에서 출생한 로제펠트는 건축을 전공했으며 현재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1년부터는 뮌헨 미술아카데미 영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호프만 컬렉션, 쿤스트무제움 본, 쿤스트무제움 볼프스부르그, 올브리히트 컬렉션, DZ 컬렉션, MoMA, CAC 말라가, 버거 컬렉션 홍콩 등 세계 유수 미술관과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매니페스토〉 는 ACMI, 뉴사우스 웨일스 아트 갤러리, 함부르거반호프, 스프렝겔미술관 후원을 받았으며 2016년에는 함부르거 반호프 외에 스프렝겔미술관, 한오버 그리고 루르트리날레에서 순회전이 열린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블란쳇 같은 여배우와 로제펠트의 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약 6년 전 블란쳇이 베를린에 방문했을 때, 베를린 소재 샤우뷰네 연극장의 극단장인 토마스 오버마이어와 함께 베를린니셔 갤러리에서 열린 로제펠트의 전시를 방문했다고 한다. 이때 이들은 우연히 만나게 됐고 로제펠트의 작품에 감동한 그녀가 작가에게 즉흥적으로 재능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로제펠트는 이후 작품 콘셉트를 준비했고 이들은 작가와 영화배우로서의 단순한 기능적인 측면이 아닌 예술인으로서 아이디어를 긴밀히 교환하는 등 협업 형태로 일을 진행했다고 한다. 배우와 리서처로 융합된 블란쳇은 하루에 전혀 다른 두 역을 연기해야 하는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한다. 촬영은 2014년 베를린에서 12일간 매일 이루어졌으며 작가와 여배우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촬영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시리즈는 매니페스토 뿐만 아니라 블란쳇의 오마주(homage)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작가와 영화배우의 협업은 미디어아트 분야에서는 종종 이루어졌다. 하지만 연예인으로서 배우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여 콘셉트가 이를 덮어쓰고 예술작품으로서 완벽하게 융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배우가 작품 제작 과정에 깊이 연관된다거나 아이디어를 공유, 교환하는 일은 더울 드물 것이다. 〈매니페스토〉에서는 이러한 전례와 우려를 한 방에 날려준다. 각 영상작품 분량은 전시장에서 소화하기 쉽지 않은 약 10분 정도이다. 모든 작품을 다 감상하려면 약 두 시간 가량 소요된다. 관객은 영화관의 푹신한 의자가 아닌 등받이도 없는 딱딱한 전시장 나무의자나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거나 벽에 비스듬히 서 있다. 음향도 겹친다. 그러나 놀랍게도 상당수의 관객은 각 매니페스토를 마치 책을 숙독하듯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매니페스토〉는 크지 않은 공간에 이들을 약 두 시간 정도 잡아두는 데 성공한다. 작가가 말하는 ‘사고의 아름다움과 시적인 사유’가 전해지는 모양이다. ●

NEW FACE 2016 라선영

인간을 말하다

더 이상 ‘조각’이라는 장르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설치, 영상 등이 대세를 이루는 지금의 미술계에서 나무로 인체 형상을 제작하는 라선영의 작업은 조금 특별해 보인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작업은 아니다. 어쩌면 나무로 만든 인물조각이 전통적이라는 인식은 어디까지나 편견에 불과할 것이다. 작가는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라가지 않고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할 뿐이다.
인간의 다양한 행태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작업 초기부터 70억 명의 인물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나무를 깎는 행위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가장 잘 맞는 표현방식이다. 나무 특유의 따뜻함도 인물 형상과 잘 어울린다. 그녀가 만든 인물조각은 특별한 기교도 디테일도 없다. 하지만 채색 작업을 통해 형광색 조끼를 입은 경찰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여중생 등 조각 하나 하나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작가는 나무 특유의 물성을 압도하거나 압도당하지 않고 사람 형태라고 인식할 만큼만 깎는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모든 작품은 그녀의 평생 프로젝트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다양한 인간 군상은 그 시대의 삶의 풍경을 반영한 거대한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런던>, <서울, 사람> 시리즈가 주변에서 관찰한 사람들의 풍경이라면 <빔(Beam)>, <타워>, <벽(Wall)> 시리즈는 인간의 내면세계, 특히 욕망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인물조각은 당대의 열망 또는 염원을 그대로 담아낸다. 예를 들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석기시대 다산의 상징이었고, 거대한 동상이 다수 제작된 시대에는 이데올로기 전달이 중요한 목표였다. 30cm 남짓한 크기로 바닥에 낮게 배치된 라선영의 목조 군상은 신이 사람을 내려다보듯 관객에게 전지적 시점을 부여해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만든다. 작가에게 조각품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지만 그것들이 연출된 상황도 중요하다.
6월 카이스갤러리에서 선보이는 개인전 <반짝이는 것들>에는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작가는 모두가 주목받고 싶어하는 동시대 세태를 담아내기 위해 목조로 제작한 신부(新婦) 형상을 도자기로 대량 제작했다. 깨지기 쉬운 재료인 도자기는 현대인의 연약한 자아와도 맞닿아 있다. 도자기로 만든 신부 부대를 바닥에 깔고 천장에는 반짝이는 종이로 만든 낙하산 부대를 매달을 계획이다. 능력이나 자질 없는 낙하산 인사처럼 이들 형태는 반짝여서 눈에 띄지만 옆에서 보면 제대로 안보일 만큼 얄팍하다. 이처럼 동시대 삶의 모순을 담아내다 보니 라선영은 목조각이 아닌 새로운 표현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녀의 작업에서는 하고 싶은 말과 재료적 특성, 표현방식이 일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슬비 기자

라선영
1987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조소과와 영국왕립예술학교 조소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대중의 새발견>(문화역서울284), <플라스틱 신화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에 참여했다. 6월 23일부터 7월 22일까지 카이스갤러리에서 3번째 개인전 <반짝이는 것들>을 개최할 예정이다.

 나무에 채색 가변 크기 2015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전시광경

<타워> 나무에 채색 가변 크기 2015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플라스틱 신화> 전시광경

NEW FACE 2016 김하나

불안전한 시대의 온화한 풍경

고요한 풍경, 느슨한 움직임. 새하얀 빙하는 세월의 흔적을 겹겹이 담고 이동하며 일상에서 볼 수 없는 낯선 풍경을 선사한다. 작가 김하나는 일상과 동떨어진 백색의 빙하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작가는 빙하가 지닌 수만년의 시간과 하얀 빙하 벽에 흡수되고 산란되는 수많은 빛과 빙하 층의 결, 사이의 틈과 구멍에 집중했다. 그는 실견한 빙하를 캔버스에 옮기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본 빙하 이미지와 영상자료를 통해 그만의 빙하를 상상한다. 실견하지 않은 물질을 그리다 보니 표현의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 거대한 자연에 억눌리지 않고 재해석할 수 있는 해석의 자유로움을 얻는다. 이미지를 통해 자연의 모습을 접하니 거대한 자연에 압도되지 않고 미시적인 부분에서 새로운 시각적 미학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빙하의 새하얀 ‘색’은 작가가 빙하를 선택한 첫 번째 이유다. 흰색은 빛을 머금고, 내뿜으며 빛의 스펙트럼을 키우는 특징이 있다. 빙하 주변에 빨간 토양이 있으면 빙하는 붉은 빛을 띤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흰색은 다양한 옷을 입는다. 작가에게 빙하는 프리즘과 같다. 빙하가 빛을 흡수해 새로운 색을 뿜어내듯 작가는 순백의 캔버스를 다양한 색의 온도로 채운다. 흰색과 다른 색의 자연스러운 만남은 그의 작업을 안온한 분위기로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다. 그의 작업에 차가운 빙하는 존재하지 않는다. 빙하가 바다를 부유하듯 안단테로 그어진 붓의 속도감과 봄날의 꽃망울 같은 따뜻한 색이 유독 많이 사용됐다. 차가운 빙하가 아니라 따뜻한 빙하다.
빙하가 지닌 시간성은 작가의 불안감을 표현하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는 ‘도구’로 빙하를 선택한 데에는 그것이 지닌 불안한 운동성과 시간성도 한몫 한 듯하다. 빙하풍경은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물 위에서 천천히 흐르고 서서히 변화한다. 그러나 빙하가 녹아내릴때는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파괴력으로 소멸한다.
작가가 가진 불안감과 빙하의 관계를 살피다 보면 “왜 빙하일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 질문은 작가 스스로도 자주 던지는 물음이다. 처음 시작은 개인의 불안감에서 비롯됐다. 작가는 “졸업 후 작가로의 전환 과정에서 ‘나’를 찾고 안정이 되면, 그때 작업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작업 속에서 안정을 찾는 자신을 발견했다”며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 자체가 그림을 그리는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빙하는 곧 시간의 유한함을 나타낸다. 젊은 작가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작업과 동행하는 숙명과 같다. 어쩌면 작가는 빙하의 가변성에서 그가 느끼는 불안함을 찾은 것은 아닐까?
이번 전시에는 2년 반 정도 준비한 작업이 출품됐다. 젊은 작가의 개인전 준비기간으로 꽤 긴 시간이다. 작가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에 불안감은 느끼지만 조급함이 없어 보인다. 느리게 흐르면서 다양한 색을 머금고 풀어내는 빙하는 작가의 모습과 닮아있다. 물론 앞으로의 작업에서 다른 풍경이 펼쳐질 수도, 작업을 해나가는 속도에서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 인터뷰 내내 작업을 시작하는 작가로서 작업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두는 그에게서 그림에 녹아있는 찬찬한 부드러움과 침착함이 느껴졌다. 작업의 소재나 주제가 바뀌더라도 작품을 닮은 그의 모습이 작업에서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임승현 기자

김하나
1986년 태어났다. 첼시 런던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이다. 2015년 커먼센터 그룹전 〈오늘의 살롱 2015〉에 참여했고, ‘2016년 Shinhan Young Artist Festa’에 선정되어 5월 2일부터 6월 8일까지 신한갤러리 광화문에서 개인전이 열린다.

〈 Untitled 〉 캔버스에 유채 130.3×162.2cm 2016

〈 Untitled 〉 캔버스에 유채 130.3×162.2cm 2016

최예선의 달콤한 작업실 8

옛날 음악을 들으러 갔다

집에 있던 J의 오래된 턴테이블을 작업실로 옮겼다. 뽀얗게 먼지가 앉은 LP판들도 박스에 담아왔다. 오랫동안 내버려둔 물건이라 제대로 소리가 날까 모르겠다. 망가진 바늘칩을 새것으로 바꿔 끼우고 카트리지를 이리저리 움직이니 플래터가 뱅글뱅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아무 판이나 꺼내서 얹었다. 존 덴버가 희생양이 되기로 했다. ‘퍼햅스 러브’. 존 덴버의 미성이 매끄럽게 뻗어나가면 플라시도 도밍고가 바이브레이션 바리톤으로 중후하게 이어가는 그 노래.
판이 돌아가자 클래식 전주부터 울렁울렁하더니 존 덴버의 미성은 어디 가고 테이프 늘어진 노랫소리를 뱉어낸다. 존 덴버가 머쓱해할 만큼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벨트가 늘어진 모양이다. 회전 속도를 조절하는 버튼을 눌러보고 카트리지의 이음새를 살펴보고 여러번 돌려보니 본래의 속도를 찾아간다. 존 덴버의 울렁증도 줄어들었다. 그제야 나는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종이재킷에 든 LP들을 박스에서 꺼낸다.
“세상에! 이게 언젯적 물건이야!”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피아노, 폴 모리아 앙상블의 추억의 영화음악, 1980~1990년대 유행했던 음악들이 뛰쳐 나온다. 들국화, 015B, 이문세, 팻 매스니, 비틀스 베스트, 퀸, 조지 마이클, 그리고 유재하.
한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서 영면에 든 유재하. 그 빛나는 목소리를 들으며 뭉클한 시간이 흘렀다. CD의 선명한 음질과 다른,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하면서 조금은 느린 사운드가 스피커에서 울린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나 ‘여행스케치’처럼 낭만이 풀풀 쏟아지는 이름들 앞에서는 그만 머쓱해진다. 직경 30cm짜리 재킷을 더듬어보니 엉성한 레이아웃과 강렬하지만 빛바랜 컬러가 눈에 안긴다. 지금의 산뜻함, 세련됨과는 다른 손맛 나는 물건이라고 해두자.
1990년대의 풋풋한 대학생 밴드인 ‘015B’는 혜성처럼 등장했었지. 보컬 윤종신의 목소리가 더할 나위없이 맑고 곱다. 나는 무한궤도의 신해철을 더 멋진 아티스트라 여겼지만 윤종신의 감미로움을 멀리할 수는 없었던 기억이 난다. 20년 전에 말소된 소리들이 기억처럼 퍼져나온다. 음악은 기억과 접목되어 있다. 지금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내 몸이 떠오른다. 음악을 듣고 노래를 따라 부르던 나, 혹은 우리. 영화 <더티 댄싱>의 사운드 트랙은 영화보다 아름다웠다. ‘헝그리 아이즈’의 신나는 리듬, ‘쉬 라이크 더 윈드’의 나긋한 발라드. 리듬이 분명하고 흥겨운 가사가 명쾌하다. 그땐 음악이란 들으면서 몸을 흔드는 거였다. 어쩌면 온몸을 관통하는 감미로운 ‘음악의 시대’였다. 지금과는 다른 음악의 시대를 살아왔던 것 같다.
턴테이블을 가져다두었다고 하니 친구들이 구경하러 왔다. LP를 모으고 듣던 세대들이라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책장 어딘가에 꽁꽁 싸인 채 꽂혀 있던 LP들, 그러나 아무렇게나 처분할 수 없는 것들을 작업실에 가져다주기도 했다. 하나하나 꺼내서 먼지를 닦아내고 플래터에 올리면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 잠깐의 무음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영화가 시작된 직전의 암전에서 느끼는 기대감과 같다고 할까? 아날로그 시대의 음악이란 그런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검은 비닐을 고르고, 먼지를 닦고, 바늘을 제자리에 두기 위해 움직이고 바늘이 검은 홈 사이의 굴곡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고 굴곡의 신호가 모여 음악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되기 전 약간의 쉼표, 두어 마디 정도 튀거나 지지직거리는 소리도 감수하는 것. 수고로운 노력이 필요한 것들은 더 큰 아름다운 무언가를 돌려준다.
한번은 J가 LP가 한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왔다. 오래 알고 지내던 선배의 LP라고 했다. 그는 하던 일이 잘 안 되어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야 할 상황이었다. 오죽했으면 낡은 LP까지 모두 꺼냈을까. J는 LP 상자를 홍대 앞 중고 LP가게에 가져갔다. 가게에서는 이유를 대며 선배의 LP를 구입하지 않았다. J는 미안한 얼굴로 묵직한 상자를 선배에게 도로 가져갔다.
“차라리 다행이래.”
그날 저녁 J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옛 추억이 담긴 물건들인데 그것마저 모두 팔렸다면 얼마나 쓸쓸했겠냐며.”
LP 상자를 다시 받아들고 안심했을 선배를 생각하니,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버릴 수 없는 추억이 있음을 알겠다. 먼지가 자욱한 다락 한 켠에 놓여있더라도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어서 우리의 슬픔은 줄어드는 지도. 무용해 보이지만 간절한 물건들이 있다. 이 물건들은 삶의 드라마를 하나씩 품고 있다. ●

CRITIC 한운성 디지로그 풍경

이화익갤러리 5.4~24

박영택 경기대 교수
한운성의 그림은 항상 특정한 형상이 화면 중심부를 차지하고 주변은 단호한 색면으로 마감되어 있는 형국이다. 구상(재현)과 추상이 공존하고 은유적인 이미지와 평면의 화면이 맞물려 있으며 익숙한 일상의 편린들이 느닷없이 발췌되어 나앉는다. 구체적인 삶의 공간에서 분리되어 적막한 화면에 내던져진 듯한 그 이미지는 작가가 현실에서 발견한 이미지이자 생각거리를 안겨준 이미지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마치 실존하는 것처럼 단단한 존재감을 구현하며 직립해 있다. 오로지 그 이미지만을 독점적으로 강조하는 연출은 사실적인 묘사와 경쾌하고 활력적인 붓질과 짙은 그림자를 거느리며 등장한다. 그리고 배경은 그 이미지를 강조해주는 모종의 막 기능을 하면서 펼쳐진다. 일종의 도상에 해당하는 그 이미지는 작가에게 있어 자신의 시대를 드러내 의미심장한 상징일 것이다. 찌그러진 콜라 캔을 비롯해 1980년대 초에 등장한 받침목과 이후 문, 벽, 매듭, 신호등, 박제, DMZ 풍경, 과일. 그리고 이번 전시에 출품된 건물의 외관을 그린 그림 등이 모두 그러하다. 특정 오브제를 채집하고 이 오브제를 평면의 화면에 배치, 배열한 후 그것의 존재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일련의 조형적 장치를 세심하고 감각적으로 부려놓은 그림들이다.
근작인 <디지로그 풍경> 시리즈는 디지털로 채집한 건물의 파사드 사진을 아날로그 방식인 그리기로 옮겼다는 의미인 듯한데 이를 통해 건물의 외관 뒤에 자리한 본질이 뭔지 질문하거나 괴이한 껍데기로 치장한, 천박한 한국의 풍경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 작업은 이미 2011년 초반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운성이 채집하고 배열한 상징적 이미지들, 오브제들은 산업사회와 인간 소외, 분단, 유전자 조작,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 등을 암시하는 징표들이다. 생각해보면 그가 오랫동안 그려온 이미지는 현대 문명과 동시대 한국사회가 대면한 여러 문제를 골고루 건드리고 있는 모종의 징후적인 이미지들이고 그 이미지를 빌려 현실을 응시하는 자신의 내면을 은연중에 투영해왔다고 본다. 작가는 감각적인 재현술을 지닌 그의 손의 기능을 발화시키면서도 일반적인 구상화의 관행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현대미술로서 편입될 수 있는 구상, 다시 말해 평면성과 추상적 요소가 공존하는 구상화를 고려하는 한편 내용주의와 형식주의의 긴장감 있는 균형을 고려한다. 보편적인 구상화로 보이지만 실은 그 이미지는 매우 얇은 물감의 물성의 흔적, 납작한 화면의 평면성이 두드러지게 검출되는 화면이자 그러면서도 매우 환영적인 이미지를 다소 기이하게 드러낸다.
그 같은 그림은 결국 지난 1960~1970년대의 추상 일변도의 화단과 1980년대의 민중미술, 그 양극단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그 모두를 아우르는 나름의 전략적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캔버스의 2차원성과 이미지의 3차원성을 혼재시키는 한편 미니멀리즘과 색면 추상을 껴안고 있고 다시 그 위에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올려놓으면서도 여전히 손으로 그려지는 그림의 맛과 환영성을 올려놓고 있는 것이 한운성의 그림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써놓고 보면 한운성의 그림은 너무 많은 고려 속에서 풀려나온다는 느낌이다. 그것들은 기실 작가 작업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온 것들이자 그만의 그림 특성을 구현해온 것들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운성의 그림을 일련의 틀/경계 안에서 제한해왔던 것은 아닐까?

위 한운성 <생텍쥐페리 기념관>(맨 왼쪽) 종이에 아크릴 2015

CRITIC 이상길 Contact

미부아트센터 5.13~6.23

김승호 동아대 교수
Contact. 조각가 이상길의 주관심사다. 형태가 공간으로, 공간이 형태로 드러나는 중견작가의 노정이다. 대작과 소작이 면적이자 구형적인 조각에 첨가되어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이 공존하고, 차갑고 화려한 형태들로 물질적이자 정신적인 경계마저 무색해지는 콘택트다. 중견조각가의 주관심사를 파악하는 기준이 보편적인 기준을 넘어선다. 이상길이 선택한 ‘콘택트’는 칼 세이건(Carl Sagan)이 1985년 발표한 공상과학소설의 제목이자 1997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서둘러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중견작가의 노정이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콘택트>는 우주에 있다는 베가성의 아름다운 해안에서 아버지의 형상과 짧은 만남을 이룬 엘리 애러웨이(조디 포스터)가 지구와 우주를 넘나든다는 줄거리의 공상과학영화다.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경험한 은하계의 수많은 정보와 여행 중 카메라에 찍힌 영상자료가 시청각적 증거물로 채택되었다. 우리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고, 공상이 공상으로만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남겼다. 지구라는 현실세계가 가상세계인 은하계를 인식하는 조건인 반면에, 조디 포스터의 탐구 욕구와 교신 연구는 그를 마침내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내몰았고 불가능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까지 담았다. 우주선이 발사된 직후 바다에 추락하여 실패로 끝났다는 주변의 주장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8시간이라는 은하계의 시간이 기록되어 실재/우주와 가상/베가성의 경계마저 되물은 <콘택트>다.
Contact. 서구에서는 문화산업의 축이 된 반면에, 우주는 볼 수 있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아우르면서 우리들 삶 속에 스며 있다. 달에 계수나무와 토끼가 있다는 이야기는 우주를 눈으로 보려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자극했고, 볼 수 없는 우주는 신비로움과 동시에 경외감을 갖게 하여 우리에게 이상길의 조각세계에서 경험해보라고 초대한다. 관조로 초대한 콘택트의 미술세계에 응할지 머뭇거릴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더라도 우주에 대한 호기심은 “보이는 것 너머에 대해 상상할 수 있을 때 예술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최태만, <내 마음의 우주선에서 보내온 신호>, 2006, 전시도록에서 인용)는 작가의 주장과 상반되지 않을 것이다. 물질과 제작 방식이 빚어낸 형태미를 꼼꼼히 뜯어보자. 촘촘하게 용접한 흔적이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원추형과 반원추형, 크기가 다양한 입방체의 작품들이 배치되어 우주공간으로 향하는 관객의 상상력이 풍요로워지고, 네거티브와 포지티브가 조우한 강한 원색의 추상적 형태(타원형)들로 촉각의 세계는 풍부해진다. 색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강령이 내포된 최근의 신작들, 오목과 볼록의 각기 다른 형태가 상호 보완하는 변곡점들도 다양하다. 그러한 이계도함수f(x)의 부호가 바뀌는 방법마저 두 가지 색이 합쳐져 오목과 볼록의 상태가 바뀌는 지점들이 다채롭다. 수학적이자 과학적인 작품 제작 원리로 현대미술을 관통한 신작들이 눈에 띈다. 서둘러 해명하자. 볼 수 없는 우주가 작가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형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선사한 반면에, 미술은 색이 형태이고 형태가 색이라는 형식미에서 구체화되었고 오목과 볼록의 변곡점들이 작품의 제작 방식에 예속된다는 것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2016년 이상길의 전시 는 공간으로 상상하고 볼 수 없는 세계와의 교신을 요구한다. 전시에서 작업 방식의 다양성이 획득된 반면에, 관조로 초대 받은 우리는 미지의 세계를 가시화하는 것이 미술의 임무라는 진리에서 상상하고 교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 이상길 <Contact> 스테인레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