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본격적으로 국가체제를 수립했으나 시간에 맞서야 했다. 국가는 물론 사람이 모였던 사회 각계의 모든 분야가 그러했다. 그 과정은 말 그대로 ‘굴곡(屈曲)’이었다. 때론 꺾이고 때론 굽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흐름은 지금으로 이어졌다. 미술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월간미술》이 바라보는 우리 미술 70년은 단절의 역사가 아닌 연속성을 갖고 흘러왔다. 그래서 10년 전 광복 60주년의 성대한 기억을 호출했다. 당시 주요한 정치·사회적 사건을 기준으로 구획한 6마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요동친 미술판을 정리했던 필자들이 다시 이번 기획에 참여, 1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에 따른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물론 그 이후 미술계의 10년은 사안별로 정리했다. 또한 미술판과 우리 사회가 별개로 움직이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연보와 차트를 실었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도 소개한다.
광복 이후 우리 현대미술사를 정리한 대전시립미술관의 <예술과 역사의 동행, 거장들의 세기적 만남전>(5.23~8.23)과 분단현실에 초점을 맞춘 <북한 프로젝트전>(7.21~9.29)이 그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전>(7.28~10.11)에 대한 프리뷰도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광복 70주년은 말 그대로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변화라는 말의 또다른 표현일 것이며, 우리 미술도 이에 따라 새로운 양상을 선보였다. 그 흐름을 짚어가며 지금의 나, 너,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자.

시민과 함께 하는 광복 70년 위대한 흐름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7.28~10.11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즐비한 가운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도 이에 대한 전시가 열린다.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전> (7.28~10.11)이 바로 그것. 전시 타이틀대로 이번 전시는 3개 섹션, 즉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으로 나뉘었다.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를 형용사로 규정하여 동시대의 규정할 수 없는 삶을 드러내고자 했다. 3개 섹션은 각각 ‘전쟁으로 분단된 조국’,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민주화’, ‘세계화된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삶’을 그 내용으로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비롯, 총 110여 작가의 작품 270점을 선보인다. 전시 공간 디자인은 최정화가,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한 대중음악은 시인이자 대중음악가 성기완이 맡아 선곡, 각 시대의 분위기를 입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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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운
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조국, 떠나온 고향과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전후의 삶이 펼쳐진다. 전시공간은 분단의 상징인 철조망과 조국부흥 기치 아래 진행된 개발을 상징하는 거푸집으로 꾸며졌다. 정창섭, 김혜련의 작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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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1960~1980년대 단기간에 이루어진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부정된 근대성을 극복하려는 민주화를 주제로 했다. 시인이자 대중음악가 성기완이 협업하여 시대를 풍미한 대중음악이 흘러나온다

넘치는
세계화된 동시대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삶을 보여준다. 최정화의 작업과 백남준의 <이태백> 등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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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익숙하면서도 낯선, 동시대 미술의 제도적 변천

2005년 이후 우리 미술계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2007년과 2008년 전반기 미술시장의 유례없는 활황으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가 하반기 닥친 국제적인 금융위기로 허망하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연관하여 미술계 분위기는 어땠으며 어떤 상황 등이 펼쳐졌을까? 필자는 이를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제도 및 공간 변천을 중심으로” 풀었다고 말한다.
미술계의 지난 10년을 돌아본다.

문혜진 미술이론
자신이 속한 시대를 역사화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2006년부터 현재까지 지난 10년간 한국현대미술의 변천을 정리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다. 평가와 정리는 시간적 거리감을 확보한 ‘밖’에서 가능한 일이지 떠내려가는 강물 ‘안’에서 함께 휩쓸리는 당대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20매가량의 짧은 분량에 갈수록 확장·가속화하는 동시대미술 신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해보였다. 10년간의 잡지 목차와 산처럼 쌓인 복사물을 바라보다가 가능한 선에서 범위를 좁히기로 마음먹었다. 상대적으로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제도 및 공간 변천을 중심으로 지난 10년간의 한국미술 변화를 간략히 정리해볼까 한다. 해당 시기를 대표하는 전시나 작업 선정은 주관이 가미되는 일이라, 매체에서 배제된 전시까지 고려해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시간도 지면도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례없는 미술시장의 과열을 화두로 2000년대 중반을 열어볼까 한다. 세계 경제의 호황과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투기 억제책 및 저금리 정책에 힘입어, 한국 미술시장은 2005년 말부터 2008년 상반기까지 전무후무한 상종가를 기록한다. 상승기류가 정점에 달한 2007년 서울옥션과 K옥션은 낙찰률 70%를 돌파하며 전년대비 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같은 해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박수근의 <빨래터>는 국내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를 경신했고, 11월에는 홍콩 크리스티 아시아 컨템포러리 경매에 출품된 국내 작가들의 작품 52점 중 47점이 한화 약 49억8600만원에 낙찰돼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2007년 한 해 동안 92개의 화랑이 신설되었고, KIAF는 입장객 6만을 돌파했으며 신생 경매사가 속속 등장했다.1
이러한 이례적인 호황은 같은 시기에 나타난 두 가지 현상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중국미술 붐이고 다른 하나는 젊은 작가들의 제도권 진출이다. 신흥 미술시장으로 각광받는 중국 미술시장에 편승하기 위해 2006년부터 2007년 사이 베이징 동부의 지우창, 차오창디, 798 지구에 일련의 한국 화랑들이 입성한다.2 아울러 장샤오강, 팡리준, 웨민쥔, 왕광이 등 블루칩으로 부상한 중국 작가들의 국내 전시도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2008년 후반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고 정치적 팝아트의 유행이 시들해지자 중국미술 열풍은 금세 꺼지고 만다. 불과 몇 년 후인 2010년 전후로 중국에 진출한 한국 화랑 대부분이 철수했음을 떠올리면, 한국화단이 외부 자극에 얼마나 취약하며 시류에 예민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한편, 시장이 활성화하자 새로운 투자 대상을 물색하던 화랑은 상대적으로 작품가가 낮은 젊은 작가들에 주목했다. 젊은 작가들의 제도권 진입절차는 1990년대 말에 등장한 1세대 대안공간들이 이미 마련해 놓은 장치지만, 2000년대 중반 시장의 과열은 과거 유지되던 일종의 검증 절차(대안공간이 발굴한 작가를 일정 기간이 흐른 뒤 미술관이나 상업화랑이 흡수하는 과정)를 무시하고 미술관과 화랑이 직접 젊은 작가를 선발하는 현상을 낳았다. 이 시기 가장 흔한 전시 제목은 ‘신진 작가 발굴’, ‘뉴스타트’, ‘영 아티스트’, ‘젊은 작가 발굴’ ‘이머징 아티스트’ 등이었고, 그 결과 젊은 작가의 기준은 35~45세에서 25~35세로 하향 조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도권이 직접 젊은 작가들을 흡수하는 시기, 1세대 대안공간들이 급격히 노화하여 사실상 대안의 기능을 상실한 것은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2005년 건물을 신축해 재개관한 대안공간 루프는 이러한 변화의 신호탄이 됐다. 다음해 인사미술공간과 대안공간 풀이 임대료 인상으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고 한동안 고립되자, 대안공간이 주류 미술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대안공간이 하던 새로운 작가 발굴 및 전시방식이 이미 일반화한 상황에서 젊은 작가를 직접 지원하는 상위 기관이 늘어나자 이들 기관과의 차별성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2000년대 후반 새로운 미술 공간들이 생겨나면서 담론의 중심은 더욱 빠르게 전환된다.
2000년대 중후반은 오늘날 한국미술계를 가능케 한 물적 토대가 대폭 확충된 시기다. 우선, 현재 주목받는 주요 전시 공간 중 다수가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일례로 중형 기업 미술관 중 상당수가 2006~2007년에 세워졌다. 아뜰리에 에르메스(2006), OCI미술관(2006), 코리아나미술관(2006), 두산갤러리(2007), KT&G상상마당 갤러리(2007) 등이 그 예다. 국공립 레지던시 공간이 대폭 확충된 것도 비슷한 시기다. 국내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실질적으로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으나3, 물리적인 자원이나 프로그램 운영, 실질적 효과 면에서 현재의 지위가 구축된 것은 2000년대 후반이라고 봐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창의문화도시 구현의 일환으로 서울 곳곳의 유휴 공공건물이나 공장이전지를 재활용해 창작공간을 조성한 서울시창작공간이다. 2006년에 출범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를 필두로, 2009년 서교예술실험센터, 금천예술공장, 신당창작아케이드, 2010년 문래예술공장, 성북예술창작센터, 2011년 홍은예술창작센터가 연이어 개관하면서 작가를 지원하는 물적 조건이 확장·개선되었다. 경기도의 대표적인 공립 레지던시 두 곳이 문을 연 것도 같은 시기다. 국내 최대 규모의 경기창작센터와 인천아트플랫폼이 2009년 개관하면서 수도권 레지던시 하드웨어의 기본 골격은 완성된다. 이들 레지던시가 대안공간이 무력화된 빈틈을 메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레지던시는 일차적으로 2008년 이후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활동하기 힘들어진 젊은 작가들을 물리적으로 지원(작업실 제공 및 전시 후원)했고, 이차적으로는 단순한 작업실 제공을 넘어 인맥 형성과 비평가 연계, 국제교류 프로그램, 다양한 워크숍 등을 통해 과거 대안공간이 담당하던 기능(인적 네트워킹 및 정보 교류)을 일정 부분 수행했다.
한편 대형 미술관 및 비엔날레들도 2000년대 후반을 통과하며 꾸준히 증가한다. 백남준아트센터는 2008년, 문화역서울 284는 2011년 개관했고, 비자금 파문으로 잠정 휴관됐던 삼성미술관 리움 및 플라토 (구 로댕갤러리)도 약 3년 만인 2010년 재개관했다. 지방미술관 중에서는 2011년 문을 연 대구미술관이 <쿠사마 야요이전>(2013)의 흥행 돌풍 이후 지역을 넘어선 신화를 새로 쓰고 있다. 2013년에는 미술계의 숙원이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했는데,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전반이 국제적이고 동시대적인 기획으로 무게중심이 조율되었다. 또한 짝수 해마다 의무적 그랜드 투어를 조성하던 대형 비엔날레는 홍보 및 관광 효과를 노린 지자체 간 경쟁에 따라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기존의 3대 비엔날레인 광주(1995~), 부산(2002~), 미디어시티(2000~)에 이어 금강자연예술비엔날레(2004~), 대구사진비엔날레(2006~), 프로젝트 대전(2012~)이 차례로 문을 열었고, 플랫폼 프로젝트(2006~09),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05~),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2009~10) 등 준(準)비엔날레급 행사들이 양적 팽창에 가세했다. 동원을 위한 동원, 작품과 유리된 주제, 역치를 넘어선 피로감 등 비엔날레의 문제는 반복되고 있지만, 백화점식 전시의 효율성 때문인지 대안 없는 행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마지막으로 규모로는 비주류이나 최근 담론을 주도하는 독립 미술공간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들의 대두는 스마트폰의 보급과 맞물려 있는데 2010년 하반기 즈음 활성화된 SNS가 인지도 및 트렌드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예로는 2010년대 초 짧고 굵은 존재감을 보인 이태원의 공간 해밀톤이나 꿀풀, 2010년 오픈한 더북소사이어티와 미디어버스의 독립출판 관련 활동들이 대표적이며, 최근의 사례로는 2013년 말에 생긴 커먼센터와 시청각, 2012~2014년 동시다발적으로 설립된 신생 공간들을4 꼽을 수 있다. 청년 세대의 감성에 맞는 감각적인 전시와 탈장르적이고 유연한 태도가 이들의 장점이겠지만, 일부 여론 주도자와 특정 집단의 취향이 (의도했든/의도치 않았든) 배타적인 권력을 형성한다는 것이 이들에게 불편함을 표출하는 주된 이유다. 이런 우려를 종식시키는 것은 이들이 생산해내는 유무형의 결과물이 기존 미술계에 얼마나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가에 달렸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성 제도권에 편입하기 힘든 젊은 작가들의 생존 실험인 신생 공간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귀결될지는 흥미로운 기대를 품게 한다. 새로운 플랫폼과 운영 방식이 (일시적이나마) 신선한 탈주 가능성을 낳을지 아니면 또 다른 진입 수단을 만드는 데 그칠지. 한 가지 희망사항을 덧붙이자면 운영 주체의 자립과 발언 외에 보는 주체의 권리도 고려했으면 하는 것이다. 힘들게 찾아간 관객이 받을 보상이라면 결국 작품과 전시/행사의 질이 아니겠는가. ●

주)
1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의 두 글 참조. 반이정, ‘2007년. 사건과 시장의 해. 솔드아웃의 일장춘몽’, 《월간미술》, 2013년 9월, 182~185쪽; 서진수, ‘2007년 한국미술시장의 성과와 과제’, 《월간미술》, 2008년 3월, 164~166쪽.

2이음갤러리(798지구, 2005),아라리오 베이징(지우창, 2005), 표갤러리 베이징(지우창, 2006),갤러리 아트사이드(798지구, 2007), 두아트 차이나(2007, 차오창디), PKM갤러리 베이징(2006, 차오창디), 금산갤러리(798지구, 2007) 등이 대표적이다.

3초기의 대표적인 레지던시 공간으로 1998년에 문을 연 암사동 창작스튜디오(쌈지스페이스의 전신), 2000년에 개관한 영은창작스튜디오, 각각 2002년과 2003년에 설립된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와 고양레지던시를 꼽을 수 있다.

4구탁소, 교역소, 지금여기, 합정지구, 개방회로, 800/40, 노 토일렛 등이 대표적이다. 작가 겸 운영자가 기존 제도에 한계를 느껴 공간을 직접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로 임대료가 싼 지역에 위치하며 느슨하고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이젠 우리가 알아서 뜰거야!”

노형석 《한겨레》 기자
10년 전 필자가 쓴 《월간미술》 특집 기고글의 서두는 이런 코멘트로 시작했었다. 당시 제도권 미술에 냉소하며 대안세력임을 자부했던 청년 미술인들의 구호를 집약한 말이었다. 2015년, 지금 글의 서두는 “이젠 우리끼리 터 잡고 놀거야!”로 바꿔야할 듯싶다. 10년 전 선배들은 대안공간과 비엔날레의 든든한 후원, 새 블루칩 작가군을 확보하려는 화랑업자들의 추파 속에서 도발과 실험을 즐겼지만, 지금 청년작가들은 자기세대들 외엔 별로 우군이 없다. 끼리끼리 놀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자본에 짓눌린 제도권 미술판은 더 이상 그들에게 특별한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알아서 전시장을 차리고 작가들끼리라도 소통하지 않으면 도통 존재감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내놓은 존재가 된 지금 잉여세대 삼포세대 작가들은 대도시의 변두리에 그들만의 전시장을 만들고 또 만들어낸다. 특히 올해는 ‘자족공간’ ‘자생공간’으로 불리는 신생공간이 30여 곳이나 우후죽순 생기는 바람이 불면서 청년미술판의 또 다른 지형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10년 전은 젊은 작가군이 쑥쑥 커나가는 ‘벨 에포크(좋은 시절)’였다. 1999년 밀레니엄과 2002년 월드컵을 지나 2005년까지 진행된 시간대는 이른바 K팝과 개념미술의 전형을 만들어내고 시장에서도 컬렉터들의 각광을 받던 시절이었다. 1990년대 장기 불황으로 미술시장이 동면에 들었던 질곡 속에서 당대 청년작가들은 시장의 유통망과 다른 판을 깔고 새 진지를 쌓았다. 왜곡된 근대화가 빚은 산업사회 한국의 기괴한 일상과 사회적 시공간의 잡다한 이미지들을 작품에 녹여넣으며 한국미술판에 새 개성을 불어넣었다. 특유의 미술지형을 생성했고, 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아쉽게도 이런 흐름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강타하면서 훅 꺼져버렸다. 젊은 작가들은 시장에서 내동댕이쳐졌다. 바로 앞 선배들이 화랑가와 경매장에서 각광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그들 앞에는 언제 퇴출될지 모른다는 잉여의 공포감이 짓눌러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난 3~4년 사이 청년미술판의 주변 환경은 퇴행의 징후들로 넘쳐났다. 90을 바라보는 ‘어르신’ 작가들이 40여년 전 벽지처럼 그린 단색조 그림이 화랑들의 마케팅 공세를 업고 ‘블루칩’ 상품으로 뜨는 기묘한 반전이 일어났다. 반면, 전망을 잃은 젊은 작가들은 귀신과 심령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세월호 침몰과 양극화, 종북몰이 같은 사회적 이슈들이 툭하면 터지는데도, 그들은 과거와 달리 무력하게 관망하기만 했다. 청년미술의 또 다른 숨통이었던 비엔날레와 국공립 미술관들은 정부와 지자체들의 전횡에 따른 작품 검열과 낙하산 인사, 채용 비리 등으로 숱한 적폐를 드러냈다.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청년작가들은 ‘성찰’과 ‘저항’을 잃은 채 눈앞 생계와 잉여의 두려움에 휘둘린다. 더 이상 공모전, 레지던시의 간택만 기다릴 수는 없다. 미술판 바깥의 젊은 작가들은 자구책으로 작업실 겸 전시장을 변두리 지하골방 등에 차려놓고 그들만의 기획전과 아트페어 리그를 구상하고 있다. 하나, 확실한 건 1990년대 이래 청년작가들의 안전판 기능을 해온 대안공간과 작업공간 지원(레지던시), 공모전 등이 또 다른 제도의 벽으로 변질되면서 신뢰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실존의 압박에 휘둘리는 청년작가들은 작업하고 전시할 보금자리부터 꾸리는게 급선무다. 일단은 작가들끼리라도 소통하고 작업세계를 공유 하는 게 긴요해졌다. ‘동시대 새로운 도전과 과제’ 보다 ‘일단 서식할 터부터 잡자’로 꿈이 바뀐 것이다.
지금 청년작가들은 소통의 벽 앞에서 고단하다. 대안을 좇던 10년 전과 달리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앉은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장소 특정적인 미술, 사이버 게임과 비슷해지는 미술, 소셜미디어로만 소통하고 담론을 나누는 작가, 기획자들의 기묘한 꿈틀거림을 기존 미술계는 어떻게 받아들이며 소화할 것인가. 임흥순 작가의 노동다큐영화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성취에서 보이듯, 일부 작가들은 세계 무대에서 약진하고, 한국미술의 위상은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것 또한 사실이다. 외부의 도약과 내부의 양극화가 공존하는 미술판의 모순적 상황을 어떻게 역동적인 판으로 탈바꿈시킬지가 과제로 남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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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_1990년대와 한국현대미술의 조변석개

임근준 AKA 이정우 미술비평
1990년 3월 서울미술관에서 심광현의 기획으로 개막한 <동향과 전망: 새벽의 숨결전>(민중미술 그룹전으로는 드물게 큐레이터십이 발휘된 사례), 10월 예술의전당에서 당대의 다양한 흐름을 한자리에 소환한 <젊은 시각 내일에의 제안전>(심광현 서성록 이준 등 5인이 각자 작가들을 선정해 비전을 겨루는 논쟁적 형식) 개막, 1991년 1월 민중미술가 임옥상의 호암갤러리 개인전, 3월 르네 블록이 큐레이팅한 국립현대미술관의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전환전>, 1992년 7월 30일부터 8월 3일까지 서울/경주의 힐튼호텔에서 대전엑스포93의 사전 부대행사로 열린 <20/21세기 예술 심포지엄>(국내 논자들에게 무식의 두려움을 일깨움), 1991년 11~12월 대한민국미술대전의 대상작 <또 다른 꿈>의 표절(패스티시?) 논란과 구체제 권위의 몰락, 1992년 5월부터 1997년 7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서 현대미술계의 새로운 토대를 일궈낸 임영방 관장의 리더십, 1992년 12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비평을 본격화한 현실문화연구(윤석남, 김수기, 엄혁 등)의 출범, 1993년 3월 예술의전당 개관에 맞춘 <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로 김홍희 큐레이터 데뷔, 4월 개막한 호암갤러리의 <미국 포스트모던 대표작가 4인전>을 둘러싼 논쟁과 허황했던 미술계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투쟁 종결, 7월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의 충격과 파장, 10월 뉴욕 퀸즈미술관에서 <태평양을 건너서: 오늘의 한국미술전> 개막, 12월 큐레이터 이영철의 평론집 《상황과 인식: 주변부 문화와 한국현대미술》 출간, 대우의 선재현대미술관과 삼성의 호암갤러리가 경쟁하는 가운데, 1994년 1월 쌍용제지의 스카티 광고에 김선정 출연(큐레이터란 단어를 한국사회에 널리 알림), 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막한 <민중미술 15년: 1980~1994전>(빈사 상태의 민중미술이 ‘역사’로 성급히 정리됨), 3월 페미니스트 미술을 표방한 <여성, 다름과 힘전>에 윤석남, 김수자, 이불, 박영숙 등 참가,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8월 호암갤러리에서 <앤디 워홀전> 개막(이때 <인서울매거진>이 등장, 무가지 시대의 도래를 알림), 1995년(“미술의 해”) 2월 국제화랑에서 제프리 다이치의 기획전 <경계 위의 미술> 개최(데미언 허스트의 대표작 <약국>이 전시됨), 5월 아트선재센터 착공 기념 <싹전>(시대를 전후로 양분하는 지표로 기능), 6월 동아갤러리의 <인간과 기계: 테크놀로지 아트전>(제니 홀처, 토니 아우그슬러, 백남준 등 뉴미디어아트를 선봬), 6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개관과 전수천의 특별상 수상, 6월 금호미술관에서 박모 개인전 개막, 8월 일본위안부 출신 할머니 김순덕 여사 21세기화랑의 그룹전 <못 다 핀 꽃의 외침전>에 출품, 9월 광주비엔날레 출범, 1996년 6월 최정화의 뮤지엄바 ‘살’ 개점, 1997년 3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개원, 9월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의 지원에 힘입어 제2회 광주비엔날레가 성공적으로 개막, 10월 호암갤러리가 자체 소장품으로 현대미술의 역사를 개괄하는 <전환의 공간전>을 개최, 12월의 외환위기와 해외 거주 청년 작가들의 집단적 귀국, 1998년 외환위기의 한파를 맞은 미술계에서 대형기획들이 줄줄이 취소되는 가운데, 동아갤러리와 벽산갤러리는 폐관, 7월 아트선재센터 개관, 7월 쌈지아트스튜디오(암사동) 출범, 8월 가나아트센터 개관, 세대교체가 급격히 이뤄지는 가운데, 10월 <98 도시와 영상-의식주전> 개막(대성공!), 1999년 2월 대안공간 루프 개관, 4월 대안공간 풀 개관, 9월 예술의전당에서 <99 여성미술제 – 팥쥐들의 행진> 개막, 9월 아트선재센터에서 하세가와 유코의 큐레이팅으로 일본청년현대미술전 <팬시댄스> 개막, 10월 프로젝트스페이스사루비아다방 개관, 그리고 뉴밀레니엄의 도래.
1995년 여름 이후의 한국현대미술에선 전지구화 시대의 당대성을 감지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한국현대미술계도 그간의 양적 팽창을 발판 삼아 질적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던 시절이었다. 20(00)년대의 도래와 함께, 지속적으로 새로운 청년미술가들이 나타났기에, 세대 교체를 통해 구시대의 어두움을 금세 타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사고에 빠지기도 했다. 크나큰 착각이었다. ●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미술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의 시기

오세권 대진대 교수, 비술비평
1980년대는 한국 미술문화의 양상에서 크게 ‘모더니즘’ 부류와 ‘리얼리즘’ 부류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의 시기로 볼 수 있다. ‘모더니즘’ 부류는 1980년대 후반기에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한 이들을 포함시킨 것이며, ‘리얼리즘’ 부류는 ‘민족주의’와 ‘민중주의’ 미술문화를 추구한 이들을 말한다.
1980년대 전반기 한국 모더니즘 미술은 1970년대에 형성된 미니멀리즘 미술에 의존하면서 지배구조를 더욱 돈독히 하는 시기였으며 지난 약 20년간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모더니즘 미술문화의 최대 전성기였다. 그러나 세계 미술문화의 새로운 지형도는 ‘한국적 미니멀리즘 미술’에 대한 자기 합리화 논리에 한계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또한 리얼리즘 미술세력의 급속한 확장으로 위기에 직면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198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한창이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유입함으로써 리얼리즘 미술과의 대응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미술계에서는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전개 과정을 정리할 때 1985년 ‘난지도’, ‘메타복스’ 등이 ‘탈모던’의 문제를 제기했고, 〈현·상전〉, 〈로고스와 파토스전〉, 〈엑소더스전〉, 〈현대미술의 최전선전〉, 〈상하전〉 등의 표현이 점차 포스트모더니즘 미술표현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주로 유학파들에 의해 1980년대 중반기에 소개되다가,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확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어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1980년대 말기와 1990년대 초반에 한국 미술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리얼리즘 미술은 1969년 선언문만 남기고 사라진 ‘현실’ 동인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1979년의 ‘현실과 발언’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리얼리즘 미술은 1980년대 초기에는 ‘민족·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여 점차 조직적이고 이념화했다. 그러던 것이 1985년 7월 〈20대 힘전〉을 계기로 ‘민족미술 대토론회’가 열렸으며 11월에는 ‘민족미술협의회’가 발족했다. 이로써 1980년대 전반기 난립하던 리얼리즘 미술의 양상을 정리하고, 산발적인 활동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며, 체계적인 미술운동을 위하여 전열을 정비하는 구심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민족미술협의회’가 발족하면서 ‘민족미술’로 불리다가 후에 ‘민중미술’로 불리는 등 이미 그 개념에서 ‘민족’과 ‘민중’의 의미를 포함하는 미술문화운동이었다.
1987년은 리얼리즘 미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특히 총선과 대통령선거 등 사회적 상황들과 연결되면서 집회 현장에서는 깃발그림을 비롯한 벽화, 걸개그림, 만화, 전단과 각종 시각매체가 대중투쟁 현장과 같이하였고, 이것은 사회 현실에 직접 참여하는 선전·선동미술이 되어갔다. 그리하여 대중투쟁의 확산에 따라 걸개그림 등이 리얼리즘 미술표현의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집회 현장에서 열기를 돋우는 미술운동이 되었다. 특히 리얼리즘 미술은 비평의 적극적인 이론적 지원을 바탕으로 삼아 미술운동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며, 조직화·체계화하면서 대중정치 선전사업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와 88올림픽 이후 1980년대 말기에는 조직이 노선 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고 분화되면서 점차 그 힘이 흩어지게 된다.
한편 1980년대 미술문화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부류들이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 속에서 서로의 이념적 합리화를 위하여 치열한 이론 논의를 하였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작가가 중심이 되어 미술계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론가들이 앞장서서 미술문화를 제시하고 이끌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상과 같은 ‘모더니즘’ 과 ‘리얼리즘’ 미술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의 시기 속에서 그 변화를 보면 1980년대 초반기에는 미니멀리즘 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모더니즘 미술이 활발했으며, 1980년대 중반기에는 리얼리즘 미술이 맹위를 떨쳤고, 1980년대 말기에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정착하던 시기로 정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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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의 70년, 역동의 1970년대

박계리 미술사
지난 10년간의 미술계를 돌이켜보면, 한국현대미술의 역사 중 특히 1970년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시기가 아니었나 자문하게 된다. 단색화 다시 (평가해)보기 열풍이 촉발되었고, 이러한 공격적인 재평가 작업은 역설적인 듯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단색화전 성공과 해외미술시장의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단색화 열풍을 다시 불러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각되는 데는 단색화의 그림자에 가려 있던 1970년대의 다양한 실험적 미술에 대한 관심이 기폭제가 됐다. 학계의 관심에 화답이라도 하듯, 김구림, 박현기 작가의 대대적인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루어지면서 이 시대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전이 거의 유일한 등용문이던 시대를 마감하고 민전 시대가 열린 것이 1970년대이다. <한국미술대상전>,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이 민전 시대를 이끌었다. 신인 등용문의 확장은 미술계의 역동성을 추동해내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 말 청년작가연합회전과 회화68, 한국아방가르드협회(약칭 A.G.)가 창립되면서 추상표현주의의 강력한 흐름에서 벗어나 미술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활기차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신체제, S.T. 에스프리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젊은 세대들이 잇따라 등장했고, 1972년 한국미술협회가 <앙데팡당전>을 신설해서 젊은 세대에게 실험 무대를 제공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물질과 상황에 대한 실험을 지속해왔던 일련의 움직임들과 흐름을 같이하던 A.G.와 S.T. 등 젊은 세대들은 미술 개념에 대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1970년대는 1975년 ‘에꼴 드 서울’의 등장을 중심으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되곤 한다. 전반기는 A.G., 신체제, S.T., 에스프리 등에게 무대를 제공한 <앙데팡당전>의 실험적인 시도가 한창이던 시기이다. 미술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질문과 물질에 대한 실험이 매재의 확대를 자극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술개념의 확대는 이전의 장르개념인 ‘회화’ 또는 ‘조소(조각)’라는 용어에서 벗어나 ‘평면’과 ‘설치’와 같은 다양한 매체를 포함할 수 있는 용어를 확산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은 탈회화화, 탈조각(조소)화의 움직임으로 확장되어갔다. 이와 더불어 장소와 환경, 공간과 시간, 상황과 예술이라는 미술의 존재론적 화두를 파고 들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퍼포먼스도 활발해지고, 대지미술과 같은 화이트 큐브 바깥에서의 미술도 시도되었다. 이렇듯 미술이 확장되던 전반기와는 달리 1970년대 후반기는 다시 회화라는 평면구조로 환원되면서 단색화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회화로의 회귀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리지 않는 회화라는 점에서 드로잉의 전통적 맥락보다는 1970년대 전반기의 개념미술과의 연결선상에 있다. 단색화의 부각은, 1975년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다섯 가지 흰색전>에서 촉발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막혔던 일본과의 교류가 열리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 일본미술시장과의 관계 속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리는 행동의 반복을 통해 그린다는 행위에 대한 본질적 물음은, 무아(無我)와 무위(無爲)의 세계를 지향하며 정신의 문제와 자연세계로 화두를 확장시켰다. 한국 단색화는 당시 국제적인 흐름이었던 개념미술, 미니멀리즘의 자장 속에서 국제미술계와 공존할 수 있는 소통력을 지니면서 화단에 강력한 자장을 형상해냈다.
이렇듯이 1970년대는 국제 교류의 포문이 열리면서 남관, 이성자, 이응로 등 파리를 근거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선전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1970년대 말이 되면 다시 표현의 회복이라는 새로운 기류가 싹트기 시작한다. 1978년의 ‘사실과 현실’ 그룹은 거창한 정신세계가 아닌 일상으로 눈을 돌려 극도의 사실주의 기법으로 대상을 묘사하였다. 이들의 화면은 하이퍼리얼리즘 또는 포토리얼리즘과 연계되면서도 비판적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적 화면을 생산해내며 또 다른 세대의 등장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처럼 역동적이던 1970년대에 대한 관심이 21세기에 들어 다시 부각되면서, ‘짝퉁’인가 아닌가 하는 원형에 대한 기존 논의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와의 동시대성이 갖는 소통의 확장성에 대한 주목과, 타자적 시선이 포착해내는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환기가 1970년대에 대한 논의를 보다 풍성케 하고 있다는 점에서 1970년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청산되지 못한 식민주의, 좌절되는 우리미술의 정체성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비평
식민지를 거쳐 6·25전쟁을 막 치러낸 1954년은 전쟁의 상흔과 공포, 가난 그리고 분단 속에서 신음하던 시기였다. 당시 남한의 미술계는 식민미술의 청산, 민족미술의 수립, 전통미술의 계승, 그리고 서구미술의 수용이라는 여러 과제를 동시에 껴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우선 광복 이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부는 친일 청산과는 거리가 멀다. 이후 분단과 전쟁, 쿠데타를 통해 반민족, 친일세력들이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왜곡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이는 그 이전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현재 한국 미술계에도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전쟁 후의 한국 화단에는 일제강점기의 화풍과 영향이 변함없이 온존해 있었고 한편으로 젊은 세대들은 서구미술에 급속히 경도되었다. 우리는 한 번도 서구를 (직접적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세계의 다른 피식민지 국가의 민중과 달리 서구를 대립과 투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구원과 동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특이한 점이다. 서구가 어떤 나라인지 분별할 수도 없었으며 당연히 서구미술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검증 절차도 없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저 서구에 대한 열렬한 추종만이 있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 동안은 일본미술 혹은 일본화 된 서구미술의 어법을 충실히 모방했다가 광복과 전쟁 이후에는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미술 어법을 추종해왔다는 얘기다. 이렇듯 식민지 청산에 실패함으로써 우리의 독자적인 미술문화를 일구는 일은 무척이나 지난했으며 끊임없이 좌절되었다.
친일세력을 등에 업고 집권한 이승만 정권은 4·19혁명으로 마감되었다. 독재정권이 시민의 힘으로, 민중의 이름으로 꺾인 것이다. 1960년대는 이렇게 4·19혁명 정신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4·19를 주도한 젊은 학생들은 일제 식민지의 유산과 단절된 세대였으며 가장 민감한 10대 때 4·19혁명이라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민중적 에너지’를 직접 보고 경험했다. 그러나 이내 박정희의 집권과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통해 이른바 굴욕적인 한일 외교 관계의 정상화 역시 접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개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가슴에 품고 자란 이들”(강헌)이 후에 1970년대 청년문화를 태동시키는 주체가 된다. 그리고 이 영향이 바로 1980년대 미술을 만들어낸다. 나로서는 오윤이 그 대표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마치 대중음악에서 신중현과 김민기의 존재처럼 말이다.
한국의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보다도 4·19혁명이었다. 단 한 번도 공화주의 공화제의 가치를 경험한 적이 없었던 한국인에게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교과서였던 것이다. 한편 4·19혁명을 시작으로 열린 1960년대는 전후의 폐허와 허무를 딛고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가치에 대한 열망이 확산된 시기이자 곧바로 이어진 5·16군사정변으로 인한 굴절과 좌절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제 1·2·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시대이자 정치적으로는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시대였다. 재벌 대기업과 수출 중심 경제구조의 원형이 바로 이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 탄생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1960년과 1961년에 연달아 일어난 그 시기, 연간 한국 총수출액은 100만 달러를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산업적 기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 즉 제3공화국의 어젠다는 ‘조국 근대화’였고, 그가 지은 노랫말처럼 ‘잘살아보세’였다. 박정희 체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친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시대를 일컫는다. 이념적으로는 반공이데올로기가 지속되면서 조국 근대화와 민족주의 이념이 강화된 시기다. 박정희는 문화를 집권 연장과 독재 강화 그리고 경제 성장의 도구로 인식하였기에 문화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시간이 지날수록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문화정책도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문화예술 전반에 광범위하게 개입했으며 정치적 통제와 활용방법 매우 구체화했다. 그에 따라 작품의 창의성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 및 진보적 성향의 예술이 싹을 틔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문화산업은 철저히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표현의 자유는 극도로 제약당했다. 정권 역시 예술작품이 정권의 홍보물에 머물 것을 요구했으며 정권의 이데올로기인 반공과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차원에서만 기능하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했다. 대다수 미술작품이 그에 순응해서 제작되었다.
1969년 9월 14일 국회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의결한다. 이후 11년을 규정짓는 불행한 정치적 사건이자 이로 인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어둡고 불행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는 그렇게 저물어갔으며 1970년대는 또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참혹한 시대에 단색주의라는 화풍이 발아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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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잃어버린 기회

조은정 미술사
광복 이후부터 6·25전쟁이 휴전으로 종식되기까지의 시기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선택적 이데올로기의 공간이었다. 친일(親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맞은 광복은 친일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전 반공이데올로기에 편입되었다.
광복을 기념하기 위한 ‘해방기념예술대축전’에 당시 남쪽에 거주하던 미술인 대다수가 포함되어 있던 조선미술건설본부는 <해방기념미술전>을 열였다. 전시를 마친 1945년 11월에 미술인들은 ‘조선미술가협회’를 창설하고 고희동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정치에 대한 절대 불간섭과 엄정 중립, 미술문화의 독립적 향상을 꾀함, 민족미술을 창조하여 건국에 이바지함’ 등이 강령이었다. 하지만 고희동이 회원의 의사에 관계없이 정치적 성향이 강한 비상국민회의에 참가하고, 1947년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맞선 우익단체인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 협회를 가입시키자, 탈퇴한 몇몇 회원은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조형예술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진보적 미술인들은 다시 단체를 통합하여 조선미술동맹을 결성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조선미술가협회’는 협회명을 ‘대한미술협회’로 변경함으로써 대표성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광복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구태를 벗고 새로운 화단을 설계하려던 미술계는 당시 사회 전반이 그러하였듯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친일의 상대편에 선 반제국주의적 성격의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강력한 반공정책을 편 미군정에 의해 억압되었던 것이다. 반공은 친일의 면죄부가 될 수 있었고, 이것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구축된 화단의 헤게모니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하여 강조된 반공이념의 실현처로서, 미술가들의 좌익 참여 금지 방편으로 〈국전〉을 이용했다. 작가들이 좌익에 경도되는 경로를 차단하고, 정치적 혼란에 따른 미술·문화정책의 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이른바 민주진영이라 일컬을 수 있는 미술가들에게 합법적인 활동무대를 제공하는 데 〈국전〉 설치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친일미술인으로 낙인찍혔던 김인승, 윤효중, 이상범 등이 전후 재개된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부각된 것은 그러한 실상을 드러낸다.
6·25전쟁은 광복 이후 남과 북이 만난 유일한 지점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미술인은 동시에 남과 북 두 체제를 모두 경험했고, 두 권력 아래 미술작품을 생산하였다. 이념전이었던 6·25전쟁의 특성상 선전화(宣傳畵)가 많이 제작되었으며, 국가 동원체제 아래 미술은 어느 때보다 국가의 부름에 강하게 응답한 시기이기도 했다.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미술인들은 동원되었고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서울이 수복되자 대한미협은 ‘화단 수습과 전시하의 국가정책에 호응할 것’을 천명하였고 인민군 점령기간에 인민군에 협조한 미술인들에 대해 부역자 심사도 하였다. 서울에 잔류하던 미술인을 임의로 정한 원칙에 따라 부역 정도를 구분해서 법적인 제재를 받을 것이 뻔한 조사위원회에 회부하였다는 사실은, 이들 도강(渡江)파에게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미술동맹에서 이 미술가들을 조직하고 지도하던 미술인들은 이미 모두 월북한 뒤였기 때문이다. 6·25전쟁은 국가가 미술을 통제할 수 있고 동원할 수 있으며 그 힘에 반할 때는 처단할 권력을 부여하였다. 전쟁에서 미술인은 종군화가로 국가에 봉사하였고 국가가 요구하는 미술작품을 생산하였다. 전쟁의 경험과 공산주의적 양식은 리얼리즘, 자유주의 양식은 자유주의 국가의 미술, 즉 추상주의라고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파악되었다. 민족미술에 대한 합의와 이념적 결집을 이루지 못한 광복 이후 화단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열로 인해 새로운 민족적 미술양식은 산화되었다. 국가 통제의 반공주의 앞에서 미술의 사조나 도덕적 명분은 생존의 법칙을 넘어설 수 없었다. 반도덕적 기회주의의 산물인 미술계 내부의 권력은 자본의 논리, 즉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이 ‘상품’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토대를 이미 이념의 분열을 통해 배양하였던 것이다. ●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zoom in
<북한프로젝트> 7.21~9.29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시각문화로 바라본 북한의 오늘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이한다. 그러나 분단의 현실 앞에서 광복은 미완의 상태이다. 오늘(2015년 7월 23일자) 뉴스 보도를 들으니 광복 70주년 남북 공동행사를 논의하기 위해 남북한 민간단체가 개성에서 사전접촉을 했다고 한다. 여러 갈등과 어려움이 예상되기에 구체적인 합의와 성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럼에도 분단을 넘어서 남북한이 함께 광복을 기념하고자 논의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광복의 기쁨과 분단의 슬픔이 교차하는 이 땅에서 통일은 우리의 역사적 과제이다. 그리고 그 과제를 풀어갈 단서는 지속적인 교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곳이다. 60년 이상 분단 상황이 계속되면서 남북한의 문화교류, 특히 미술과 관련된 교류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북한미술을 소개하는 국내 전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북한의 조선화가 주를 이루었고, 그것도 단편적으로 전시되었을 뿐이다.
제대로 된 전시 형태로 북한의 미술을 볼 기회가 적었던 터라 이번 서울시립미술관이 광복 70년 기념으로 개최하는 <북한프로젝트전> (7.21~9.29)은 무엇보다 반가운 전시이다. 북한의 미술과 문화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이번 전시는 흥미롭게도 ‘프로젝트’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전시를 담당한 여경환 학예사는 기획전 서문에서 “프로젝트의 일반적인 의미와 더불어 ‘앞으로 나아가(pro)’ ‘만들어가는(ject)’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의 행위에 방점을 둔 프로젝트의 의미를 강조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체적인 전시 구성에서 이러한 프로젝트의 의미를 살리려고 한 노력이 여실히 엿보인다.
전시는 크게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북한 내에서 제작된 유화, 포스터, 우표 등이 전시된 곳은 북한의 시각문화를 그 자체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북한 포스터이다. 포스터의 대부분은 북한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북한 미술의 조형성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외국 작가 닉 댄지거, 에도 하트먼, 왕궈펑 등이 북한의 문화풍경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는 전시 공간 또한 돋보인다. 작가들은 사진으로 북한의 문화풍경을 기록하는 것에서 나아가 예술적 감성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 작가 강익중, 권하윤, 노순택, 박찬경, 이용백, 전소정, 탈북 작가 선무 등은 북한과 분단의 문제를 저마다의 고유한 시각으로 주제화하고 이를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번 <북한프로젝트전>은 북한의 미술과 문화를 내부, 외부 그리고 경계라는 세 가지 문화적 층위에서 조망하는 듯 보인다. 이는 북한 작가, 외국 작가 그리고 국내 작가의 작품으로 전시를 구성햇다는 점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전시를 기획하기란 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 기획 단계에서 자료 수집 그리고 작품을 선정하기까지 특별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힘든 작업 또한 많았을 것이다. 물론 비판적 시각으로 볼 때, 전시 구성에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문화적 층위들이 다소 인위적으로 혹은 도식적으로 연결된 듯하고, 또한 너무 많은 이야기가 제시된 듯해서 약간 산만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북한의 미술과 문화를 시각문화의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조망하고자 시도한 전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아쉬움은 간단히 뒤로 밀려난다.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북한의 미술 및 문화와 관련된 전시가 해외 블록버스트 전시나 유명한 작가의 특별전보다 더 주목되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분단은 우리의 구체적 현실이며, 통일은 우리의 풀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미술의 한류, 경매, 세계화 등에도 관심을 두어야겠지만, 현재의 한국 미술계가 남북한의 미술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향후 북한의 미술과 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프로젝트’가 촉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임성훈 미학, 미술비평

위 이용백 <우리에게 희망은 언제나 넘쳐나>알루미늄, 흙 350×200×120cm 2015

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zoom in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 5.23~8.23 대전시립미술관

“예술과 역사의 동행, 거장들의 세기적 만남”

<광복 70주년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이 대전시립미술관에서 5월 23일 개막해 8월 23일까지 계속된다. ‘예술과 역사의 동행, 거장들의 세기적 만남’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전시는 오원 장승업에서 최정화, 이불의 동시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뚜렷한 흔적을 남긴 67명의 거장을 초대하여 격렬했던 20세기를 성찰하고, 이중섭, 박수근과 같은 잘 알려진 작품을 직접 감상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한 야심 찬 기획이다. 그간 주목할 만한 한국근현대미술 전시가 주로 서울에 집중되었던 것을 생각할 때 대전에서 마련된 이 대규모 특별전은 한국 근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키는 의미 또한 깊다.
한국 근현대미술 전시의 작품 선별과 배치는 그 자체로 지난 20세기를 바라보는 시각과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번 특별 전시회는 ‘계승과 혁신’, ‘이식과 증식’, ‘분단과 이산’, ‘추상과 개념’, ‘민중과 대중’ 이라는 5개 장으로 나뉘어, 앞의 2개 장은 근대기 전통화와의 변모와 서양화의 도입을 다루고 후자의 2개 장은 6·25전쟁 이후의 흐름을 보여준다. 근대 수묵화는 안중식을 거쳐 이상범의 풍경에서 토착화되었고, 박생광의 강렬한 채색화는 전통의 혁신으로 제시되었다. 고암 이응노의 사실주의, 김기창과 박래현의 파격적인 추상화는 한국미술이 격동의 역사에서도 단절 없이 창안되어 왔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한편 근대기 자아를 표현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새로운 시각매체로 유입된 유화가 결국에는 한국의 서정을 구현해냈음을 오지호, 김환기, 박서보 등의 작품을 통해 증명해 보인다. 조각은 오롯이 김복진에게 초점을 맞춘 후 권진규의 테라코타에 집중하는데, 특히 김복진의 1935년 미륵불은 불교조각의 전통과 현대적 감각을 모두 갖춘 한국 근대미술의 정수로 특별한 조명을 받고 있다.
광복 70주년 특집이라는 전시 콘셉트에 비추어 볼 때, ‘전쟁과 이산’은 핵심이 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을 터, 재일조선인 화가 전화황의 1960년 작품 <낙오자>를 핵심으로 송영옥과 월북화가 배운성의 작품이 여럿 출품되었다. 배운성이 독일에서 그린 조선 풍속화 수점은 대작 <가족도>와 함께 관람객들의 큰 관심을 얻고 있는데, 북유럽 전통의 유입에 따른 도상의 특이함, 가족이라는 우리에게 각별한 주제 때문인 듯했다. 전쟁기 이별과 가난의 기억이 새겨진 이중섭, 박수근의 작은 그림에 우리가 한없이 몰입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우환의 <조응>을 디아스포라의 공간에 배치한 점도 이전에 볼 수 없는 방식이다. 단색조 회화와의 형식적 유사성보다는 일본에서 모노하 미술가로 활동한 이우환의 역사적 위치를 먼저 헤아린 결과였다.
이러한 미묘한 변화는 전시 후반부에서도 드러나는데, 단색조 회화에 뒤이은 분방한 최욱경 작품의 배치라든지 민중미술의 시작을 홍성담의 <5·18 연작-새벽>으로 압도한 것 등이다. 이동훈과 임동식을 비중 있게 전시에 편입시킨 것은 충청지역 대표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을 고려한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이 모든 다채로움은 20세기 한국미술사의 정론을 넘으려는 대전시립미술관의 적극적인 시도가 가져온 즐거운 변주였다.
그렇다면 명작을 앞세워 대중성을 담보하고 새로운 서사로 한국미술사를 재편하려는 애초의 의도는 얼마나 달성된 것일까.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이식과 증식’, ‘민중과 대중’ 같은 반복적 대구(對句)가 혼성의 시공간이었을 역사를 이분법의 프레임에 가두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묵은 계승으로, 채색화는 혁신으로 본다거나, 한국 사회의 탈근대성을 민중에서 대중사회로의 진입으로 쉽게 치환해버리는 것 등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식’이라는 용어는 근대미술을 자칫 모방의 역사로 깎아내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정작 전시는 근대기 양화를 신문화의 포용으로 열린 해석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잘못된 작명이 불러온 오해인 듯싶다.
사실 이 같은 시시콜콜한 지적은 전문가의 삐딱함의 산물일 뿐이다. 차분하면서도 알차게 마련된 근현대미술 걸작들은 가족을 동반한 시민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김달진자료박물관의 세심한 미술교과서 전시도 ‘추억 돋우는’ 코너였다. 그럼에도 ‘2%’ 부족한 것은, 이인성, 변관식, 김환기의 난만한 완숙기 작품이 빠진 것, 동시대 작가 이불이나 최정화 특유의 도발과 요란함을 받쳐줄 전시 스텍터클의 부재였다. 우리가 광복을 기념하는 벅찬 자리에 늘 미술을 빼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은 외압과 내분으로 격렬했던 우리 근현대사의 산 증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혹은 통일 논쟁으로 부딪혔던 열기마저 사그라져가는 요즈음 광복 70년을 기념하는 한국 근현대미술전람회는 한껏 소란하고 강렬해도 좋을 것이다. ●
김미정 미술사

위 박생광 <무당>(사진 맨 왼쪽) 1961 대전시립미술관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 전시광경

SPECIAL ARTIST 선무

선무라는 작가는 우리 미술계에 상징하는 바가 크다. 이는 탈북자 신분인 그의 개인적인 상황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남북 분단현실에서 그의 작업 하나하나가 갖는 의미가 오롯이 미학의 문법에 기반하여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지만, 분단의 씨앗이 잉태된 지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의 또 하나의 이름 ‘선무(線無)’처럼 그의 작품이 어떤 테두리 없이 읽힐, 이 땅에 경계가 사라질 그날은 언제가 될까?

꺄악oil on canvas2010 60x72cm

<꺄악> 캔버스에 유채 60×72cm 2010

야구공1

야구공2

야구공에 유채로 남북한 국기의 요소를 표현했다

당대적 존재로서의 선무, 혹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김동일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10여 년 전 선무를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작가가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가 겪은 탈북작가에 대한 편견에는 내가 마치 그가 된 것처럼 함께 분노했다. 그때 우리는 어리고 여렸으며 필요 없이 신경질적이고 또 독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다시 만난 선무는 그때와 다르지 않았지만, 예술가로서는 더 과감하고 확신에 차 있었으며 인간적으로도 더 성장해 있었다. 나 역시 예술가들이 세상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확신은 그때보다 더 확고해져 있었다. 그 확신 속에서 선무는 이미 의미 있는 궤적을 그려가고 있었다. 선무는 예술을 통한 사회의 변화, 나아가 사회에 대한 변화의 요구를 예술이라는 통로와 수단을 통해 제기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예술에 대한 사회의 요구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예술가란 매우 한정되어 있고 선무는 그 요구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것도 매우 자기화한 방식으로 응답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분단의 모순과 선무의 비극
선무에게 사회의 영향은 매우 개인적 비극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비극은 조선 말의 혼란과 일제 식민지배, 그리고 끝내 6·25전쟁이라는,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민족의 모순과 분리되지 않는다. 선무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비극의 연속된 전개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그는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그것도 시대착오적 권력 세습과 불가해한 우상화가 강제되는 한반도의 북쪽에서 태어났다. 북한 사회의 모순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는 ‘탈북’이라는, 분단사회에서 한 행위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로 대응했다. 선무는 자신과 가족에게 가해지는 굶주림과 정당성 없는 폭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또 다른 꿈을, 또 다른 열망을 품었다. 탈북은 그 꿈과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시도였다. 흥미로운 점은 선무가 예술을 통해 탈북자 선무 개인의 험난한 경험뿐 아니라 분단과 냉전, 이산으로 점철된 한반도와 세계 정치의 모순을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무에게 예술은 압도하는 사회적 모순에 대응하는 무기였던 것이다. 선무의 붓끝은 사회적 모순에 대한 미학적 대응의 가능성의 경계를 모색하고 있다. 당대 예술은 언제나 사회의 요구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예술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했던 모더니즘 예술의 경우에도 이 점은 예외가 아니었다. 예술의 자율성과 독자성은 산업화와 자본주의, 그리고 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의 결과였다(특히 우리의 경우 추상미술의 도입은 이른바 ‘미군의 군홧발’로 상징되는 광복 이후 정치경제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예술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이 지리멸렬한 한국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면, 선무의 미학적 실천은 특별한 방식의 하나일 수 있다.

탈북자 대 예술가, 선무의 이중적 정체성
선무는 탈북자인 동시에 예술가이다. 이 점은 가장 분명하지만 가장 쉽게 잊혀지는 사실이기도 하다. 여기서 선무와 선무의 그림들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와 혼란이 비롯된다. 즉 정치적 관점에서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가 탈북자인 것은 맞지만 그의 그림을 탈북자의 것으로만 치부하는 관점은 옳지 않다. 그의 그림들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선동)를 뛰어넘는다. 선무는 예술가이며, 따라서 그의 그림은 당연히 예술로서 다루어지고 해석되어야 한다. 선무의 작품들이 예술로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는 의외로 예술의 본질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예술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소망을 형상화하는 가장 의미 있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선무의 그림은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그 소망은 그 자신만의 개인적인 소망일 뿐 아니라 통일을 기원하는, 한반도의 모든 사람의 소망이다. 나아가 북핵을 걱정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모든 사람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이 미국과 독일을 비롯한 세계인의 관심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여기 남한 사람들보다 더 간절하고 순수하게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에 관심을 갖는지도 모른다(그의 작업들은 이미 슈피겔, 뉴스위크, 타임, BBC 등에 의해 심도 있게 소개된 바 있다). 정작 그의 작품을 민감하게 다루는 것은 한반도 내부의 상황이다. 그의 작품들이 전시장에서 철거되거나, 때로 관객보다 경찰이 전시장에 더 많은 경우는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냄
선무의 작업이 매우 특수한 미학적 실천인 또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보다 섬세한 비평적 분석이 요구된다. 선무는 오직 유능한 미학적 행위자들만 실천할 수 있는 정교한 미학적 방법론을 구사하고 있다. 이 미학적 방법론은 탈북자의 정치적 선동과는 명백히 구분된다. 선무가 구사하는 미학적 방법론의 핵심은 눈앞에 놓인 ‘기표’(記表, signifier)와 그가 부여하는 ‘기의’(記意, signified) 사이의 간극을 정교하게 재조직하는 작업이다. 예컨대 2007년 청와대 뒤편 부암동의 한 대안공간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조선의 신>은 겉보기에 위풍당당한 북한의 지도자(김정일)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그를 경찰에 신고한 주민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최고 존엄의 머리 위에 날카로운 별을 거꾸로 위치시킴으로써 시각적 비판을 가하려는 시도였다. 비슷한 상황은 2008년 부산비엔날레 전시장에서 철거되는 수모를 겪은 <조선의 태양>에서도 반복되었다. 겉으로는 김일성의 상반신을 북한식 선전화 방식으로 표현한 듯 보이지만 그 아래 놓인 꽃(김일성화)은 조용히 ‘NO’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김일성, 나아가 그가 수립한 북한정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화가라기보다는 시각적 기호학자로 볼 수 있다.

중의와 내포의 이중 해석학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에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방식은 그의 초기작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북한 어린이들의 기쁨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과 행복은 도무지 자연 상태의 어린이로서는 가능해 보이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그러한 불가사의한 기쁨을 ‘강요’하는 인위적이고 강압적인 사회체제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효과를 갖는다. 드러나는 것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의미를 내포하는 미학적 방법은 팝아트 양식을 차용한 작품들에서도 발견된다. 나이키 운동복과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서 익살스럽게 미소짓는 북한 지도자의 모습에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그리고 북한 동포 대부분을 가난과 굶주림으로 몰아넣은 폐쇄정책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개방 요구를 동시에 내포한다. 그가 자신의 작품이나 전시 제목으로 사용하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세상에 부럼없어라” 등의 표현 역시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부러움 없이 행복한 세상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반도의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한다.

해방된 상상의 공간으로서의 예술과 소통
중의(重意)와 내포(內包)의 이중의미화(double signification)는 선무가 수행하는 미학적 실천을 단순한 정치적 수사로부터 분리한다. 선무가 분단과 탈북의 정치적 층위에 위치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그가 예술가이며, 이 점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려 할 때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오히려 화가로서 선무의 정체성은 탈북자로서의 그것보다 선행할 수 있다. 그는 탈북 이전에도 이미 화가였다. 예술가로서 선무는 선무를 선무이게 만드는 본질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조국의 분단이 그에게 정치적 구속성을 행사한다면, 예술은 선무에게 그러한 정치적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는 상상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구속성으로부터 자유롭다. 또한 해방된 상상의 공간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로운 소통을 가능케 한다. 정치적 맥락에서 선무는 이편 아니면 저편에 서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북에서나 남에서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해방된 상상력의 공간에서 그는 그 어느 일방을 옹호할 필요가 없다. 해방된 상상의 공간에서 선무는 민족의 통일과 행복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소망을 정치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방식으로 전달한다. 분단과 굶주림을 극복하고 행복한 한반도, 평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선무의 요구는, 소중한 가족을 북에 두고 온 선무 자신의 개인적 소망일 뿐 아니라 남과 북을 막론하고 같은 소망을 갖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보편적인 메시지가 된다.

광복 70년 그리고 선무
이러한 해방된 상상력과 자유로운 소통의 조건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려온 정치적 궤적과 미학적 궤적을 서로 교차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선무 자신의 성취라 할 수 있다. 선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한국 현대미술의 현장 속에서 선무는 대단히 반가운 존재이다. 그의 비극은 그 자신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지만 그가 그 아픔을 형상화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예술과 사회의 관계라는 지평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다. ‘광복 70년’은 단순히 해방 이후 시간의 총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의 과거의 질곡을 극복하고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가능성을 전망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광복 70년의 시대적 요구에 예술이 대응해야 한다면, 그 가능성은 선무의 작업을 통하지 않고서는 유의미하게 논의되기 어렵다. 그만큼 선무라는 개인, 그리고 그의 미학적 대응은 모두 당대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선무 Sun Mu
선무는 1972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8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한국을 비롯해 멜버른, 뉴욕, 베이징 등지에서 1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한국과 독일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경기도에서 작업하고 있다.

DF2B4867

서울시립미술관 <북한프로젝트전> 전시광경 바닥 설치작업은 <평양의 자유>와 <우리 식대로> 나무판에 유채 30×25×2cm(각)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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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나 자신을 어떤 것에 가두고 싶지 않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묘사가 매우 직접적이다. 예컨대 정치 지도자가 그렇다. 그런데 그들이 등장하는 작품 메시지가 매우 직접적이라면 아이들이 등장하는 작업은 어떤 희망(예를 들면 통일된 세상이나 보다 나아진 남북관계, 정치적 상황 등)을 비유하고 있다고 본다. 한반도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특히 북녘에 있는 지도자들을 보면서 오직 권력을 위해 백성의 삶은 안중에도 없는 통치를 일삼고 있으니 이는 분명히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아이들을 통해서 우리들의 미래를 이야기하려 한다. 작품에 무엇이 나오든지 간에 남과 북의 허무하고 쓸데없는 이념대결이 낳은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야말로 남북이 처한 정치적 상황의 딱 중간, 경계에 서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로서, 정치적인 상황이 판이한 두 곳에서 생활해본 시민으로서 경계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특별할 것이다. 몇 년 전에 재독동포 송두율 교수의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의 생각이 나랑 많이 비슷한 것 같더라. 나 역시 경계에서 이쪽과 저쪽을 바라보면서 무엇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상처가 되는지를 알기에 경계에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경계, 중간에서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예술의 역할도 중요하다. 예술이야말로 경계에서 자유롭게 비판하고 구애받지 않고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고 그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 미술판에서 작가 선무는 분단 현실의 상징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분단 현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남한에 정착하면서 생겨난 또 다른 종류의 한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이 세상에서 선무라는 존재가 어떻게 불릴지는 더 두고 봐야겠다. 분명히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체제로 반세기 넘게 살아왔고 나라 이름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외국 사람들은 좀 다른가 보다. ‘북코레아, 남코레아(north Korea, south Korea).’ 이게 다다. 여기에 조선은 뭐고 대한민국은 뭐냐 이거다.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입은 상처는 남과 북이 고스란히 가지고 있고 치유되지도 못했는데. 랭전은 끝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허무한 이념대립. 이런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경을 넘기 전 바라봤던 중국령 지역과 경계를 넘고 바라봤던 북한령 지역’을 떠올린 말은 가슴 저릿했다. <국경선>(2007), <두만강>(2007, 2008), <어디가 동쪽이냐>(2005) 등은 국경을 넘기 직전 작가의 상황을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보인다. 가만히 앉아서 잡혀 죽느니 내 갈 길 가다가 죽어야 후회 없을 것이란 생각에 무작정 남쪽으로 가기 위해 노력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세상과 마주하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탈북 후, 중국에서 이른바 ‘낭인(浪人)’처럼 지냈다고 했는데 그때 경험이 바탕이 된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유가 있는가? 이유가 있다. 실제 인물들을 작품에 담기가 조심스러워서다. 지금도 나고자란 마을을 그리지 않는다. 혹시나 모를 이념 전쟁에 희생양이 되거나 불행해질 수도 있기에 아직은 미루고 있다. 물론 스케치는 생각나는 대로 해두었지만 나중을 기약하고 있다.
남쪽에 정착해 이런 저런 현상을 목격하면서 그간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가장 많이 바뀐 생각은 무엇이며, 그것이 드러난 작품은 무엇인가? 가장 인상 깊은 사건은 광화문 초불(촛불)시위였는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현장을 직접 보고 느끼려고 광화문 네거리에 직접 나가 보았다. 광화문의 초불을 보고 김일성광장의 회불(횃불)을 떠올렸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나와 앉아서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광경은 참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래서 종이를 칼로 오려서 <초불>이라는 작품을 하기도 했다
작업은 정치 상황을 희화화(유머러스하거나)한 듯하다가도 분단의 엄혹한 현실이 섬뜩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현 상황에 대한 시사적인 내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다채롭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뭘 모르니까. 보통 예술이라는 장에도 여러 방법, 방식이 있고 의도적으로 원하는 방법과 방식을 따라 할테지만 그런 저런 지식이 없으니 생각 나는 대로 막 할 수 있었고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나의 생각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 생각하고 그냥 하는 것인데 주변에서 이것을 정리해 팝아트라 불러주더라. 하지만 이 또한 잘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나 자신을 어떤 것에 가두고 싶지 않다.
“나는 끝까지 조선사람으로 남겠다”는 생각으로 남한행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작가로서 활동하면서 변화하는 남북관계에 따라 무엇인가 할 일, 이른바 소명(召命)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무엇일까? 남쪽에 와서 처음 전시를 시작하면서 어떤 사명감 같은것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그 사명감이 뭐냐. 어떤 철학교수가 말하기를 사명감 또한 이데올로기 아니냐고 하더라. 그래 나는 나로서 산다, 나는 누구냐, 뭘 하는 놈이냐, 내가 나로서 당당히 살아갈 때 가치가 있다. 이제는 조선 사람도 좋지만 지구인으로 살려한다. 조그만 지구에 살면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편 나누고 아주 그냥…,
앞으로 전시계획, 작업계획에 대해 알려달라. 올해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여는 분단에 관한 전시에 참여한다. 내년에는 홍대 주변에서 개인전을 열 생각이다. 작업은 계속 해서 사람 사는 세상과 한반도의 비극과 미래를 이야기하려 한다.
황석권 수석기자

EXHIBITION TOPIC 세밀가귀 細密可貴:한국미술의 품격

한국미술은 ‘여백의 미’만으로 정의할 수 없다.
삼성미술관 Leeum에서 열린 <세밀가귀細密可貴 : 한국미술의 품격전>(7.2~9.13)은 한국미술사에서 최고의 섬세함과 완성도를 추구한 작품을 총망라해 한국미술의 또 다른 면모를 집중 조명한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금속공예, 나전, 도자, 회화 등 전 분야의 국보・보물급 작품들이 세밀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현재 전 세계에 남아 있는 고려 나전 17점 중 8점이 공개되는 등 그동안 국내 전시에서 볼 수 없었던 명품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미술의 화려한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11 불상 (8)

<금동 천수관음보살 좌상> 71.5cm(높이) 고려~조선 초 (대한불교조계종 홍천사 소장)

2 금관 (4)

국보 138호 <금관> 11.5cm(높이) 가야 5~6세기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세밀의 미, 한국미의 또 다른 아름다움

김홍남 이화여대 명예교수,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전시 제목, <세밀가귀(細密可貴): 한국미술의 품격>에 등장한 ‘세밀가귀’란 표현은 다소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세밀함이 가히 귀한 경지에 이르렀다”라는 뜻으로 1120년대 초 한국을 다녀간 중국사신 서긍(徐兢)(1091~1153)이 남긴 그의 견문록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고려나전에 대해 남긴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한국미술의 품격을 세밀함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전시기획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제목이다.
전시는 “文문양: 정교함의 극치, 화려함의 정수,” “形형태: 손으로 빚어낸 섬세한 아름다움,” 그리고 “描묘사: 붓으로 이룬 세밀함”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고, 이 세 특징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금속과 도자공예, 나전칠기공예, 불교미술, 회화작품 등에서 찾아보고자 하였다. 전시품들은 국보와 국보급 미술품들로서 자체 소장품에서는 50점만 엄선하고 국내 16곳, 해외 21곳에서 대여받은 80점을 합한 총 130점이 기획전시실 2개층을 메우고 있다. 전시 주제도 만만치 않은데다 해외 대여는 성사되기도 어렵고 또 막대한 예산이 들어 “과연 리움만이 가능한 전시”라는 감탄사를 자아낼 만하다.
1부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 2부에서는 고려옻칠나전경함, 3부에서는 조선시대 초상화가 단연 돋보인다. 이 전시에서 풀기에 가장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되고 실상 비교적 취약한 부분이 3부, “描묘사: 붓으로 이룬 세밀함”이다. 유교국가 조선은, 세밀과 장엄의 미학이 일관성을 보인 불교국가 고려와 달리, 소박·담백의 유가적 미학이 부상하면서 기교미와 세밀미를 추구한 장인예술전통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중국은 9세기 말 이후부터 이미 철학, 사상, 종교 그리고 예술사조에서 이론적 사고가 직관적 사고로, 인위에서 무위자연으로, 기교에서 무기교로 점차 확산해 나갔다. 그 결과 정밀함이 지성사회에서나 순수예술세계에서 이탈하고 급기야는 퇴출되는 위기를 맞는다. 중국문화권인 한국에서도 조선시대부터 서서히 두 가치의 공존과 충돌이 일어난다. 이러한 미학적 이중구조 속에서 세밀가귀의 기획의도를 관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3부 전시공간을 들어서면서 데자뷔(기시감)가 몰려왔다. 20여 년 전 미국 순회전 <18세기 한국미술>(1993년 뉴욕 Asia Society에서 시작) 준비과정에서 고민했던 일들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전시의 영문제목, “Korean Arts of 18th Century: Simplicity and Splendor”는 고심 끝에 두 가치의 공존을 인정하고 정면 돌파하는 해법을 택했음을 말해준다. 조선시대미술에 단순·소박미와 더불어 화려의 미가 산발적이 아닌 일관성을 띠고 민간, 궁궐, 종교미술(전시의 세 부분)에 보이며 이 예술혼을 살리고 주도해 온 궁궐미술이 조선시대미술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전시이다. <세밀가귀전>은, 깊은 곳에서 18세기전과 강렬한 연속성을 느끼게 하면서, 나아가 조선시대 필의 힘을 휘두른 유림 미학에 떠밀리고 폄하된 장인 예술과 그 공묘함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따라서 초상화와 궁중기록화는 물론이고 두 가치의 경계를 넘나드는 수묵화도 세부묘사가 출중한 작품들을 끌어들였다.

6 나전 (6)

<나전 국당초문 경전함>(왼쪽) 24.8×47.2×25.8cm(높이) 고려 13세기 (보스턴미술관 소장)

16 일반 회화 (8) - 원본

보물 1493호 이명기 <오재순 초상>(오른쪽) 비단에 채색 152×88.9cm 조선 18세기 말~19세기 초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한국미의 새로운 기준
지난 몇 년간 리움이 기획한 전시들, <조선화원대전> (2011)과 <금은보화: 한국전통공예의 미전> (2013), 그리고 올해의 <세밀가귀전>의 기획 의도에는 근대한국예술론과 미술사 서술의 편향성과 왜곡에 대한 질타와 수정주의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편향성은 근대일본의 미학자이며 조선민예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로 더욱 공고해졌다. 그가 펼친 “질박과 무기교의 기교”야말로 한국미의 본질이라는 예술론은 오랫동안 “한국적인 것”을 규정하는 잣대로 적용되고 현대 한국인들마저 마치 집단최면에 걸린 양 이 ‘잠언’을 되뇌곤 한다. 그 결과 조선시대 예술의 총체적 이해는 물론이고 그 이전 시대 예술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방향감과 균형감을 잃어버렸다.
이들 리움 전시에 더 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기교와 ‘순수예술’의 분리현상이 빚어낸 사태, 바로 근대 이전 중국·한국미술의 불완전성을 직시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이다. 이 분리 현상은 기교와 사실주의로 꽃피울 수 있었던 예술혼의 잠재성과 창의력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가는 서양미술의 발전사를 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문제는 한중 양국이 이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분리된 예술언어의 재통일을 시도하지도 못한 채 20세기 들어 세상이 바뀌고 서양문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만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문화사적, 미술사적 사고의 틀도 그 안에 갇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시들은 이토록 오랜 세월 기교와 무기교로 분리된 예술언어를 중개하고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가리키려고 한다. 그리고 그 결의를 전시기획자 조지윤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전시를 통해 세밀하고 정교한 표현이 우리 미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해석의 기준이라고 제시함으로써… 지금껏 주목받지 못하였던 한국미술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 전시가 “한국미술을 더욱 다각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삼성미술관 Leeum의 시각을 집대성한 전시이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누군가 말했다. “가장 원대한 비현실을 붙드는 사람만이 가장 원대한 현실을 창조해낼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 전시에 들어 있는 미래의 잠재성이 아닐까 생각하며 깊은 사색에 빠져든다.
좋은 전시는 “놀랄 줄 아는 능력”을 잃어가는 현대인에게 느끼는 법을 되살리고 경이감을 되찾아준다. <세밀가귀전>이 주는 “아 우리에게도 이러한 섬세함이 있었구나!”하는 경이감은 자각과 반성을 유도한다. 한국인이 놓아버린 듯한 세밀의 정서와 기교의 미를 찾고 기억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는 설치기술에 세심하게 배어 있다. 곳곳에 설치된 인터랙티브 디지털 영상의 세부확대기능은 시각적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이 전시는 느리게 움직여야 하는 전시이다. 작품 한 점 한 점에 집중하고 작은 세부까지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세심한 관찰력이 필요한 전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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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전 (14)

<나전대모 국당초문 삼엽형합>10.2cm (지름), 4.1cm(높이)고려 12세기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해외소재 고려나전 8점 한자리에

김홍남 이화여대 명예교수,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특별공간이 주어진 고려나전은 이 전시의 화중왕(花中王)이다. ‘세밀가귀’가 고려나전을 향한 찬사였던 만큼 제목 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대개 사진으로만 접하던 해외 소재 고려경함이 일본뿐 아니라 구미 각국의 소장품까지 포함해서 총 6점이나 집결했다. 앞으로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고려경함은 고려불화와 함께 세계적인 미술품 반열에 들어있고 세계미술시장에서 그 부문의 동아시아미술품 중 가장 고가로 거래된다. 2006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나전칠기, 천년을 이어온 빛전>이 고려경함에 한해서는 일본 소장처에만 의존하여 관장으로서 못내 아쉬웠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이 전시가 그때의 한을 풀어주는 것 같아 감회가 깊다.
서긍은 중세중국의 문화최성기 북송 말의 예술가황제 휘종(徽宗, 재위 1100~1125)의 신하로 시·서·화에 능한 인물이었다. 휘종은 세밀화의 대가였고 그가 이끌던 한림도화원은 화조화, 영모화 등 세밀화 부문에서 걸출한 화가들을 배출하였다. 황실 관요는 청자와 백자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골동수집 열기도 뜨거웠던 때로 감식안이 고도로 발전하였다. 궁궐 밖에서는 소식(蘇軾)일파의 평담천진(平淡天眞)과 불속(不俗)의 사인(士人) 예술론이 중국예술의 미래 방향을 예견하고 있던 시절이었으나 궁궐과 화원의 기조는 정교한 기교의 장식성이었고 세밀함을 귀히 여긴 시대였다. 서긍이 휘종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인 <고려도경>은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찰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특히 공예에 대해 예리한 감식력을 보인다. 전시에 나온 경함 6점은 제작 시기가 모두 나전문양의 도안화가 가속된 13세기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극히 정교하고 화려하다. 그러하니 서긍이 보았던 12세기 초의 고려나전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이 궁금증을 다소나마 해소해주는 유물이 소품이긴 하나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보스턴미술관에서 온 삼엽형합(三葉形盒)과 화형합(花形盒) 2점이다. 이들 12세기 사례에서는 뛰어난 기형 제작은 물론이고 재료사용은 현미경으로나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약 0.3mm 정도의 얇은 자개절단기법과 석황과 진사로 뒷면을 채색한 대모복채기법 및 극세의 황동금속 꼬기기법 등을 혼합사용하여 화려하고 섬세한 결과를 낳았다. 12세기의 나전경함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하는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포류수금문 나전향상이 있다. 이 시기의 명품 중 명품이나 현재 복원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상태가 심하다. 재현이라도 되어 세상에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11세기에 고려왕실이 중국황실에 나전칠기를 선물했다는 《동국문헌비고》의 기록으로 보아 12세기 전부터 이미 고려나전공예가 자신감과 국제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휘종황제 재임기까지 고려왕실의 화가와 공예가가 파견되어 휘종의 칭찬을 받기도 하고, 화원에 들어가 기예를 닦을 정도로 북송황실과 긴밀한 문화예술교류를 유지하고 있었다. 13~14세기 몽골이 지배하던 원대에는 화원이 쇠락하고 궁중예술이 전반적으로 침체되자 원황실은 고려조정에 불화와 경함을 공물로 요구할 정도였다. 실로 동아시아에서 고려의 불화와 나전칠기공예의 수준을 따라갈 나라는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