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김종학 컬렉션, 창작의 열쇠

선명하고 화려한 원색으로 상상 속의 자연을 표현하는 작가 김종학은 우리 옛 물건에 대한 수집벽으로 유명하다. 1989년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280여 점의 목가구만으로도 그의 열정을 알 수 있다. 그의 컬렉션 중 전통 목기, 석물, 농기구 등 일상생활용물품을 한데 모은 〈김종학 컬렉션-창작의 열쇠전〉(6.9~8.16)이 구 벨기에영사관을 리모델링한 서울시립 남서울생활미술관에서 계속된다. 김종학의 작품과 우리 옛 물건에 나타난 질박하고 구수한 맛과 심플하고 시크한 현대적 조형미를 동시에 느껴보자.

수집과 창착의 관계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한국 현대미술가들 중에는 손꼽히는 고미술 수집가들이 있다. 도상봉, 김환기, 김영학, 권옥연, 김종학, 이우환, 박대성 등은 알아주는 골동수집가이자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작가들이다. 자연스레 이들은 자신의 수집품을 통해 미의식과 조형감각을 익혔을 것이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작품에 자연스레 수렴되었을 것이다. 김환기와 김종학이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공들여 수집한 ‘옛 물건’을 통해 미와 조형의 의미와 격을 깨달은 김환기와 김종학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심플’하기 그지없는 목가구, 백자 그리고 자연스러움과 해학미가 넘치는 다양한 공예품들에서 아름다움의 비밀을 알아차린 이들이다. 그리고 이를 적절하게 가공해 자신의 개성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물론 이 두 작가 외에도(수집가는 아니더라도) 우리 전통미술을 보는 안목, 이해하는 안목이 대단히 높은 이도 많고 그것을 작품에 원용하는 경우도 무척 많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김종영이 그렇다. 김종영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러한 깨달음 속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돌이 있으면 그 돌의 생김새대로 하고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모양이 파악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불필요한 부분만 떼어낸다. 본래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만들어내는데 어떤 것은 전혀 만들었다는 흔적이 없어서 조각인지 물건인지 몰라보겠다는 것들이 있다.”
많은 작가가 소박미를 한국미의 원형으로 보았고 따라서 “자연으로의 끝없는 동화, 문명 이미지의 자연 회귀, 민족의 문화적 원형과 시원성의 탐구”(이영학)는 한국 작가 대부분의 공통된 과제였다. 그래서 한국 작가들은 물질을 생명체로 다루고자 한다. 이 물활론적이며 자연을 영성스러운 존재로 인식하는 태도는 여전히 한국미술의 독특하고 중요한 지점이라는 생각이다.
서울시립 남서울생활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종학 컬렉션-창작의 열쇠전〉은 나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안겨주었다. 나 역시 현대미술 작품을 보는 시간만큼이나 골동품 가게를 헤매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수집에 열을 올리는 형편에서 그의 수준 높은 안목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가 구입한 옛것들은 기가 막히게 좋은 것들이라, 그가 부러운 안목과 빼어난 눈썰미, 탁월한 심미관의 소유자임을 새삼 느낀다. 특히 남서울시립미술관 공간 전체에 적절히 배치된 유물들은 그 존재 가치가 한층 높아 보였다. 그만큼 공간 연출이 뛰어났다. 입구에 늘어놓은 석물에서 시작해 전시장 방마다 절묘하게 배치된 고미술품들은 김종학이 평생 수집한 목가구, 목안, 조각보, 베갯모, 등잔, 농기구, 토기 그리고 온갖 연장들이다. 이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의 기증품들을 익히 보아왔지만 이번에 선보인 ‘물건’들은 그야말로 무심하고 소박하고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비로소 그의 천진난만한 풍경화가 이것들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깨닫는다.

김종학 (7)

김종학의 그림과 항아리가 함께 놓여있다

김종학 (23)

다양한 색채의 보자기가 있는 전시장 전경

질박한 미의 재구성
앞서 언급했듯이 김종학은 골동품 컬렉터로서 유명하다. 목기를 비롯하여 자수, 석상 등을 수집하는 그의 빼어난 안목은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골동품에 대한 애정과 그로부터 받은 영감은 그의 작업에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우리 선조들이 자연을 관찰하고 소화하여 표현한 질박하면서도 화려하고, 엉성한 듯하면서도 섬세한 작품들로부터 작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은 듯하다. 그 결과 서툰 듯, 혹은 과장된 그의 표현방식은 오히려 좀 더 자유롭게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림 보는 즐거움을 안긴다. 그가 우리 전통미술로부터 깨달아 추구하는 것은 결국 기운생동의 세계이자, 신명(神明)의 세계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것들은 모두 옛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이다. 선비들의 사랑방, 아녀자들의 규방, 그리고 농부들이 노동 현장에서 사용하던 것들이다. 우리 조상들의 생활공간을 치장해주던 소박한 도구들이자 일상에서 쓰이던 연장이자 우리의 체취에 친밀하게 와 닿는 것들이다. 또한 그것들은 기억이 간직된 형태의 생명물질이다. 너무나도 자연에 가깝고 또 단순한 오브제이기에 소박하고 투박하면서도 우리에게 그 어떤 원초적인 삶을 일깨워주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나 이름 없는 한 농부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든 연장이나 도구들은 한국인의 전통문화 속에 간직된 사물관, 자연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우리 조상들의 그러한 미감과 재료에 대한 태도는 현대미술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물론 그러한 매력을 깨달은 자들의 경우에만 말이다. 따라서 한국 미술가들은 재료에 대한 인위적인 가공과 기교를 극도로 제한하고 물질 그 자체가 자연스럽게 ‘스스로 형성된 삶’을 드러내고자 했다. 특정 물질에 일련의 행위를 가함으로써 작가와 사물의 관계를 시각적인 차원에서 인식하게 하는 일이 작업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모종의 이미지를 구현하거나 무엇을 표현하기보다는 물질 그 자체를 최대한 활성화하려 한다.
김종학은 자신이 수집한 목가구, 민화, 농기구와 연장, 보자기 등에서 그림의 묘미를 응용해낸 자다. 여기에 설악산의 자연이 덧붙여졌다. 설악산으로 들어간 이후에 그가 그린 그림은 대부분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표현주의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자연물에 내재하는 생명의 힘과 에너지를 구상과 추상, 감정의 표출과 절제, 대상의 생략과 강조 등 이중적이면서도 다층적인 언어로 표현해왔다. 또한 대상에 대한 감정의 절박함을 이른바 구상적인 묘사와 표현주의적인 색채, 서예적 제스처로 전달하고 있다. 모두 그가 수집한 물건들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상상해서 그린다. 눈을 통해 전달된 시각정보를 그만의 감성으로 거른 후 재구성한다. 작품의 소재 자체는 구상적이지만 작품의 의도는 대상의 재현에 있는 게 아니라 ‘실제 대상이 갖고 있는 형태 중 비본질적이라고 여겨지는 부분들을 추상화해서 대상을 양식화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작가의 정신 자체를 그 추상화된 구체적 대상의 양식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는 회화를 일반적으로 표현주의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작가가 그리는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라 작가의 손끝에서 치밀하게 재구성된 풍경이며 이는 원초적이고 야생적인 생명력이 느껴지는 선명하고 화려한 원색으로 재현된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체화한 후 이를 자신의 심상 속에서 형상화한다. 속도감 넘치는 대담한 원색의 붓질로 자연의 강렬한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자신의 작업을 두고 그는 “추상에 기초를 둔 새로운 구상회화”라고 정의한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서 화려한 색채와 민화적인 구성으로 자연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담아내는 비기교적인 그의 회화적 방법은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민화의 아마추어리즘과 닮아 있다. 멋대로의 형태미와 화려한 색채미, 그리고 자연의 순리와 조화를 보여주는 민화에서 큰 영향을 받은 그림이다. 특히나 원색의 색상은 탁월한데 따라서 그는 민족 고유의 색채정서를 현대에 재창조하고 발현해 놓았다고 평가된다. 사실 민화를 직접적으로 원용하거나 차용한다기보다는 ‘회화에 대한 옛사람들의 순후한 사유의 방식을 현대에 되살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하여간 그는 민화를 비롯해 우리 선조들의 온갖 유물이 지닌 빼어난 조형미로부터 자기 그림의 구도와 색채, 해학과 생동감을 견인해온 이다. 목가구와 농기구의 조형성, 전통자수의 생생한 색감 등을 자신의 의식과 몸 안에 녹여서 자연풍경을 그려내는 것이다. 언젠가 그는 “자연을 열심히 보지 않는 작가는 좋은 작가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고미술이 지닌 조형의 비밀을 아는 자만이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

EXHIBITION FOCUS Aéroport Mille Plateaux

이 자리는 당신 것일 수 없다

실제와 상상, 개인과 사회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아티스트 듀오, 엘름그린 & 드라그셋이 국내 첫 개인전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서울에서 열리는 개인전 〈천개의 플라토 공항〉 (7.23~10.18)에서 이들은 삼성미술관 플라토를 공항 터미널로 탈바꿈시켰다. 시간과 장소의 경계가 모호해진 〈천개의 플라토 공항〉에서 작가들을 직접 만나 ‘미지의 여행’을 함께했다.

엘름그린&드라그셋의 작업은 시적이고 은유적이다. 이들의 작업은 전시장에 놓인 개별 오브제의 디테일도 중요하지만, 공간의 정체성을 흔들어 새로운 장소로 탈바꿈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 받고 있다. 미술관을 병원으로 만들고(〈Please keep quite!〉 2003), 사막 한가운데에 명품 매장을 세우고(〈Prada Marfa〉 2005), 수영장에 익사한 모형으로 컬렉터의 죽음을 알리고(〈The Collectors〉 2009) 미술관을 한 개인의 주택으로 전환(〈Tomorrow〉 2013)하는 등 장소의 규범을 깨는 작업을 선보여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술관을 공항 터미널로 치환하는 시도를 감행했다. 그들이 해석한 공항은 ‘장소에서 장소로 이어지는’ 비-장소적인 공간이며 누구의 소유일 수 없다.

전시장 (4)

〈 Departure 〉(오른쪽) 혼합재료 200×300×15cm 2015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이다. 전시 준비기간은 어느정도 였는가. 그동안 홍콩 도쿄 등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적은 있지만 미술관 전시로는 이번 개인전이 아시아 최초다. 준비기간만 2년 이상 걸렸다. 2013년과 2014년 삼성미술관 플라토를 사전 답사했다. 공간을 둘러보자마자 공항을 떠올렸다.
무엇이 공항을 떠올리게 했나. 비행기 엔진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전면유리로 지은 공항 터미널처럼 투명유리로 된 건물, 비행기 동체의 포물선 같은 곡면 공간, 중앙이 비어있어 안쪽 전시장에서 반대편이 보이는 구조, 일반 전시장처럼 가벽으로 구획되지 않은 점이 신선했다. 갤러리 바로 앞에 위치한 공항버스 정류장도 공항을 떠올리는 데 한몫했다. 미술관과 공항은 어떤 목적지를 향해 찾아가는 장소라는 유사점이 있다. 관객/여행자가 공간을 스쳐가며 ‘이행(transition)’이 일어나는 일종의 ‘비구역’이다. 또한 공항은 가지 못하는 곳, 허락되지 않는 행동 등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 미술관 역시 다양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유연한 공간인 척해도 실상 많은 영역에서 통제를 가한다.
들뢰즈&가타리가 서술한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Mille plateaux : capitalisme et schizophrenie)》과 이번 엘름그린&드라그셋이 꾸민 〈천개의 플라토 공항(Aéroport Mille Plateaux)〉 사이의 언어유희가 돋보인다.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보충설명 부탁한다. 언어유희로 완벽히 맞아떨어질 뿐 아니라,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 전달을 배가했다고 본다. 물질적인 생각에 기반을 두면서 그 속의 생각이 모여 한층 더 깊은 차원의 무언가를 찾아내는 과정으로 《천개의 고원》을 읽었다. 들뢰즈&가타리가 이 책에 대해 “결론을 제외하고 각 고원은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다”고 밝힌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다. 우리 작업도 논리로부터 벗어나있다. 각 작업은 수많은 레퍼런스의 중첩으로 구성되어있다. 전시장에 있는 관객, 장소, 사물이 때로는 각각의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때로는 교집합을 이루며 리좀(rhizome)처럼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무엇보다 공항의 기반시설과 미술관은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리좀적 성격을 지닌다.
로댕의 〈지옥의 문〉이 중앙에 있어 전시 디자인하는 데 어렵지 않았나? 공간을 꾸미면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 로댕의 〈지옥의 문〉이 있는 공항 터미널로부터 커미션을 받았다고 가정하고 나머지 전시장을 채워나갔다. 전시를 준비하며 ‘물리적 특성(physical feature)’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우리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우리는 전시환경에 맞게 기존에 선보였던 작업을 다시 설치함으로써 그 의미를 재맥락화해 매번 다른 감각을 이끌어낸다. 이번 전시에 설치된 〈모던 모세〉(2006), 〈미수취 수하물〉(2005) 등이 그 예로 건축과 상황에 대한 ‘혼동’을 표현했다. 여행가방을 X-ray로 투과해 내용물을 보인 〈2010년 1월 1일로서〉를 보면 생활용품 사이에 2010년 반입이 허가된 HIV(에이즈 바이러스)약이 있다. 세부적인 디테일에 정치적 표현을 담아 전시장 밖의 현실과 마주하게 했다. 결국 건축을 통해 물리적, 가상적 패쇄성의 환경이 인간의 행동을 어떻게 규제하는지를 고찰한 셈이다.
매우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동선을 만들어냈다. 영화 시나리오처럼 탄탄한 스토리 보드가 있는 것 같다. 실제 공항 터미널의 동선에 따르도록 했고, 전시장에는 공항에서 들리는 안내방송도 나온다. 그럼에도 공항의 리얼리티는 없다. ‘1960년대에 상상한 2015년의 공항’을 전제로 ‘과거에 상상한 미래의 판타지즘’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전시장은 1960년대와 현대의 디자인이 혼재하도록 꾸몄다. 대표적인 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콩고드 여객기 의자다. 다양한 기다림이 존재하는 공항처럼 1960년대의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게 했다.
관객이 전시의 구성요소처럼 느껴진다. 관객의 역할은 무엇인가. 관객 없이는 어떤 작업도 성립할 수 없다. 때때로 관객이 작가보다 더 뛰어난 해석을 부여할 때도 있다. 결국 작업은 우리 둘(엘름그린과 드라그셋)사이, 관객과 작가의 대화를 통해 존재한다. 물리적 경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현대인의 사회활동은 노트북 앞에서 이뤄진다. 현대미술가가 사람들에게 제안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지금 여기’ 와 ‘물리적 감각’이다.
사회 정치적 이슈에 대한 발언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작업 내부에 은유적으로 숨기는 방식을 취하는것 같다. 숨겨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파괴적이고 체제 전복적인 메시지를 담지 않는다. 작업에 있어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의 작업은 당대의 사회적 이슈를 격한 감정으로 표출한 편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 비해 우리는 열린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 복잡한 문제를 끌어들일 때는 의도적으로 작품에 풍자와 유머를 더해 숨기거나 가리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취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작가는 거대담론, 진정한 진리를 설파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왜?”라는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왜” 아티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는가. 모든 과정은 우연이었다. 시각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엘름그린은 시를 썼고, 나(드라그셋)는 연극을 하며 감정을 예술형식으로 표현해왔다. 1990년대 초반 코펜하겐의 미술계에선 젊은 작가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자유로운 실험과 표현이 가능한 점이 좋았다. 우리는 다른 장르간의 협업을 통해 생각을 공유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관객을 위한 관람팁을 부탁한다. 많은 관객이 전시를 관람할 때 오독 혹은 오판할까봐 두려워한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바라지 않길 바란다. 개개인의 이야기와 감각을 곤두세우고 즐기는 것이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임승현 본지기자 사진 박홍순

마이클 엘름그린(Michael Elmgreen) 은 1961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잉가 드라그셋(Ingar Dragset)은 1969년 노르웨이 트론드하임에서 태어났다. 엘름그린&드라그셋은 1995년부터 듀오로 협업하고 있다. 1997년 덴마크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영국 독일 노르웨이 덴마크 등 다양한 국가에서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었다. 2012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4번째 좌대 〈Powerless Structures Fig 101〉를 설치하는 등 작업, 큐레이팅, 공공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베를린과 런던을 기반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내년 초 베이징의 UCCA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전시장 전경

전시장 전경

 

 

 

NEW FACE 2015 김원정

“김원정은 나름의 실험적 작업방식으로 자연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타버린 편지를 묘목과 함께 심었는데 이것은 하나의 의식이자 사적 행위였다. 또한 병을 수직으로 심고 그 안에 상추씨를 넣어 다른 참여 예술가들을 위해 상추를 키웠다. 이 모든 소규모 프로젝트들은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수작업이 아닌 “생활 속 예술”로서 또 다른 차원의 섬세한 작업이다.”
– 클라라 청 홍콩 C&C디렉터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어디 있으랴

어떤 대상이나 생각이 ‘쓸모있느냐 없느냐’의 기준은 제각각이고 판단은 ‘상대적’이다. “세상에 잡초라는 말은 없다”는 말을 곱씹어보면 보리밭에서 자라는 벼, 논에서 자라는 보리를 잡초로 보는 우리네 편견에 대한 일갈이다. 상대적 가치에 대한 판단을 통해 얻는 생의 깨달음을 장자(莊子)는 이미 인간세편(人間世篇)을 통해 설파한 바 있다. “쓸모없다고 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쓸모있는 것이 된다. 발상의 전환을 해보면 쓸모없음이란 없다. 우리는 쓸데있는 것의 쓰임을 알지만 쓸데없는 것의 쓰임을 알지 못한다.” 이 말은 19세기 서구 시인의 언어를 통해 재현됐다. “잡초란,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이다.”(랄프 왈도 에머슨(Emerson, Ralph Waldo))
예술이란 바로 이러한 말의 궁극적 지점에 다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술이 삶을 살아가는 데 유용한 가치로 기능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의 거리를 측량하는 것이 진정으로 예술을 알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당장 내 밥상 위의 밥이 되지는 않지만 그 이면의 효용은 분명 존재한다.
김원정은 작업 태도와 방식에서 현인들의 언급을 실천하는 듯 보인다. “자꾸만 쓸모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과연 어떠한 결과를 가져 왔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작가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해온 작업이 바로 <무용지용(無用之用)> 연작이다. “어떤 작물이든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면 가치 없는 잡초일 뿐이라는 말에서 잔인한 인상을 받았어요. 그 말을 풀어보면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관점과 목적에 따라 모든 것이 잡초일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 속에서 우리가 간과했거나 혹은 알아보지 못한 우리들 혹은 여러 존재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잡초에 비유하여 작품으로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잡초란 해당 경작지에 오롯이 자라야 하는 식물의 성장을 저해하는, 제거되어야 할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몇몇 식물학자들은 뿌리가 깊이 박히지 못한 식물을 위해 이른바 잡초들이 토층 깊은 곳에서 양분을 끌어올려줘야 비로소 비옥한 땅이 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잡초는 쓸모없는(無用)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가 명확한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유아독존의 삶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인정하기에 나 자신이라는 가치만 존재하는 삶은 그 어디에서도 의미가 없음을 안다. 그렇지만 이른바 ‘우(愚)’를 계속 범하는 이유는 나의 가치를 지키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 작가의 작업은 대부분 초록의 기운이 가득하다. 아마 그녀가 나고 자란 곳(경남 고성)에 대한 기억을 거부할 수 없었으리라.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갑작스러운 모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꽃을 비롯한 식물을 수집하게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생의 부침이 닥쳤을 때, 결국 작업이 그녀의 탈출구 구실을 했던 것. 그렇다면 김 작가는 잡초의 가치를 발견하면서 인생의 분기점을 마련한 셈이다. 그러한 여정에서 최근 참여한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에 설치했던 <A Journey 상추 프로젝트 : 끝없는 항해>는 이전 작업의 맥락을 이으면서 언어적 유희성을 살린 새로운 갈림길로 접어든 작품으로 보인다. “상추라는 이름에 제가 지나온 시간을 투영하기 위해 생각 ‘상(想)’과 뽑을 ‘추(抽)’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고,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상추 작업의 개념이 되면서 동시에 관객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상추> 작업은 언어로 의미를 직접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상상의 여지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국한했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김 작가의 작업은 푸르름을 담는다. 그 색과 향취는 토양이 없이는 존재하거나 이룩될 수 없다. “총명하고 지혜롭지 못하기에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는 편”이라며 겸양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생명을 담는 ‘화분’이 되고자 한다”는 작가의 말은 작업에 대한 야심찬 욕심으로 들렸다.
황석권 수석기자

김원정은 1981년 태어났다. 경남대 미술교육과와 Pratt Institute Master of Fine Arts를 졸업했다. 지금까지 총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한국과 미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현재 경남 고성에서 작업하고 있다.

 상추, 배, LED간판 가변설치 2015

< A Journey 상추 프로젝트 : 끝없는 항해 > 상추, 배, LED간판 가변설치 2015

 

NEW FACE 2015 박지희

“공간적 구조 변화에 대한 실험만이 아닌 그 공간 속에서의 삶의 방식과 패턴에 대한 실험은 작가의 관심이 그저 과학적인(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공간 변화의 차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공간 속에서의 생활과 삶의 차원에까지 포함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 민병직 대안공간루프 바이스디렉터

비가시적 유기체의 생존실험

시큼털털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음식물 처리장을 방불케 하는 냄새에 이끌려 다가가면 동파이프에 꼬치처럼 꽂혀있는 과일을 마주하게 된다. 가공하지 않은 생과일은 시간이 흐르며 썩어간다. 썩은 과일은 동파이프와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에너지를 생성한다. 변해가는 과일과 낡은 동파이프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는 ‘기초전지’로 변모한다. 실험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 작업은 박지희 작가의 〈과일 전지 시리즈〉 이야기다.
2012년부터 2년간 런던에 거주한 작가는, 에일스버리(Aylesbury)와 헤이게이트(Heygate) 공공지원주택 단지의 재개발 논쟁이 첨예한 런던 남부의 엘리펀트&캐슬에 거주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화된 이 지역에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에 브루털리즘(Brutalism) 양식으로 대규모 주거복합단지가 세워졌다. 일명 ‘콘크리트 왕국’으로 불리는 이곳의 노후한 공공지원주택건물을 둘러싸고 2009년 이후 정부와 거주민은 서로 개발과 유지보수 논리를 펴며 본격적으로 갈등을 드러냈다. 그 중심에서 작가는 짧은 시간이나마 해당지역에 거주하는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맥락과 무관하게 콘크리트 건물 자체가 가진 압도적인 스케일에 경도되는 이방인이었다. 내부인이자 주변인. 박지희의 작업이 개인적인 감정의 동요를 최대한 배제한 채 실험구조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직접 경험한 장소를 주제로 삼지만,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한 동감의 표현을 피하고 수치와 계산을 통해 객관화된 다이어그램으로 풀어낸다.
영국에서 첫선을 보인 〈과일 전지 시리즈〉는 건물 노후의 중심에 있는 배관시설인 동파이프와 그 지역 이주민이 즐겨먹어 쉽게 구할 수 있는 열대과일을 재료로 사용했다.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거나,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기보다는, 그곳의 식문화와 거주문화를 조합해 재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편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린 그녀의 국내 첫 개인전 〈직사각형은 언제 평행사변형이 될까?〉에서는 논현동을 주제로 실험을 이어갔다. 작가가 오래 거주한 공간인 논현동은 재개발 이슈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다. 논현동 주민들은 경제적인 조건에 맞춰 이 지역을 선택했을 뿐, 이 지역만의 특정한 정체성은 없다. 작가가 자신이 속한 동네를 작업으로 끌어들이게 된 계기는 우연히 영화 홍보차 방한한 영화배우 윌 스미스가 주변에 있는 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관광지를 바라보는듯한 시선으로 찍은 논현동 다가구주택지역의 사진 한 장이었다. 작가는 이 사진에서 타자화된 시선을 통한 낯선 풍경과 맞딱드린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논현동 다가구주택 밀집지역의 공간을 실험이라는 도구를 통해 가시화하는 과학/미학적 치환을 시도했다. 논현동이라는 지역을 정의 내리기 위한 실험은 동네 원룸의 공기부피와 무게를 측정하고 이를 구로 만들어 논현고개의 경사각에 해당하는 곡선 구조물에서 굴리는 것이었다. 또 코너모양의 테이블을 만들어 지역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방수천의 녹색 안료가 되는 산화크롬을 발생시켜 공기 중으로 날려 물리적 이동량을 실험했다. 공간과 장소의 존재를 화학과 물리적 실험으로 풀어내는 시도다. 또한 과일과 함께 동네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조리식품을 사용해 <과일 전지 시리즈>를 만들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이름없는 공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죽어있는 공간이 아닌 지속적 변화가 가능한 곳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실험적인 장치를 통해 작가는 가시적인 사실 저변에 깔려 있는 비가시적인 것을 이끌어낸다. 또한 정체성이 모호한 공간에 뚜렷한 명제와 정의를 제시한다. 작가가 평소 “인간의 삶은 전지와 같다”고 생각해서 일까. 숨을 쉬고 있어도 멈춰있는 현대인과 그들이 사는 공간을 건조한 방식으로 재가시화시키고, 에너지를 부여하는듯 하다. 임승현 기자

박지희는 1984년에 태어났다.
이화여대와 동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영국 슬레이드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2013년 영국의 기업 레어드 PLC와 커미션 작업을 했고 2014년 영국 케니스 아미타지 재단으로부터 젊은 조각가상을 받았다. 같은 해 런던의 한미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7월 9일부터 8월 2일까지 대안공간 루프에서 국내 첫 개인전이 열리며 서울과 청주에서 작업 중이다.

 

NEW FACE 2015 조혜진

“<한시적 열대展>은 열대식물이라는 외래종의 유입이 한국적 맥락에서 정착해가는 상황을 추적하며 이 과정에서 기형적으로 변형된 식물과 그 근저에 깔린 생활방식, 문화적 현상을 드러낸다. 작가에 의하면 열대를 경험하는 방식은 아파트 실내에 정원을 만들어 식물을 키우는 과정에서 접하게 되는데, 이러한 생활 방식 안에서 열대식물은 실내에 맞춰진 작은 형태로 변형되어 소비되는 과정을 거친다. 작업은 열대식물이 용도 면에서 제 목적을 다하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낯설게 보여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 노해나 독립큐레이터

한국식 열대의 풍경

작가 조혜진은 사물에 관심이 많다. 아니 사람이 사물을 대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물은 사회 속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계망 속에서 만들어지며,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케이크갤러리에서 열린 세 번째 개인전 <한시적 열대>(5.30~6.28)의 전시장은 비교적 썰렁한 편이다. 하지만 조혜진의 작업은 보기보다 풍부한 맥락을 포함한다. 열대식물을 주요 키워드로 신문기사, 학술자료, 인터넷, 현장 리서치 등 다양한 참고자료를 활용해 시대를 거치면서 외국에서 들여온 열대식물이 한국적 상황에 정착하는 과정을 조명했다.
전시장에 설치된 <이용 가능한 나무>는 행운목, 고무나무 등 열대식물이 죽고 난 이후 버려진 것을 수거해 각목형태로 만든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파트에서 살아온 작가는 원래 베란다에 키우는 식물을 특별히 열대식물이라고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최근 이사간 아파트에서 사람들이 화단에 식물을 가꾸면서 겨울이 되어 죽으면 버리고, 또 새로운 식물을 키우는 반복의 과정을 2년여 관찰하다가 한국사회에 열대식물이 많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고 광범위한 리서치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가정집에서 기르는 이파리가 넓은 관엽 식물은 대부분 열대식물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여름에는 온도와 습도가 열대지방과 비슷하지만 겨울이 되면 급격히 추워져 열대식물을 제대로 키우기가 쉽지 않다. 작가가 아카이브한 자료 중 1958년 한 기사에는 열대식물의 월동관리 방법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으로 실려있다. 1969년에는 서울 중심부 길가에 기존의 향나무를 뽑고 68월남장병들이 보내준 종려나무를 가로수로 심어 이국적인 정취를 내기도 했다. 주택이나 아파트 실내에서 그리고 가로수에 열대식물이 가꿔지는 현상은 상황 그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집단 무의식을 보여준다. 작가는 식물의 형태가 사회 안에서 규격화되고 패턴화되는 모습을 각목의 풍경으로 대체시켰다.
또 다른 모습은 전시장에 배치된 자료집 속에 들어 있다. 작가는 방대한 리서치를 토대로 <종려나무와 도시루 사이에서>라는 한 편의 보고서를 썼다. 열대식물이 화환업계에 공산품화되어 유통되는 과정을 포착한 것이다. 경조사 화환 가장자리 장식에 종려나무 잎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1990년대 말 부산에서 종려나무 잎을 대체할 플라스틱 잎사귀인 ‘도시루’가 개발되었고, 이것이 화환업계를 장악하게 된다. 검소한 생활을 장려하는 정책에 따라 화환 자체의 수요가 줄었다가 1990년대 말 가정의례법이 폐지되고 이후 급격히 늘어난 수요를 감당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종려나무’에서 ‘도시루’로 전환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국가가 사회 문화를 통제하는 방식과 더불어 자본주의 시장 논리가 생활 전반에 반영되는 논리를 추출해냈다.
한편 열대에 대한 환상은 한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엿볼 수 있는 사회적 현상이다. 애초에 관엽식물을 실내에서 키우는 것은 제국주의 시기 유럽에서 희귀 식물을 채집해 소개한 것에서 시작해 우리나라까지 오게 된 것이다. 전시장 다른 방에는 <우산으로 야자수를 만드는 방법>, <페트병으로 야자수 줄기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매뉴얼과 그 모형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이미지를 스크랩해 열대 레시피를 선보였다. 여기에서 작가의 역할은 리서치, 스크랩과 매뉴얼 제작이다.
조혜진의 작업은 조소를 전공한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생산하고 구현하는 것과 달리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에 주목한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이 무엇인가 만드는 행위야말로 실로 강력한 의사 표현이자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일상의 사물은 더 이상 장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 산업에 의해 사물이 형태가 결정되고 상품화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일반인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가 흥미롭기만 하다.
이슬비 기자

조혜진은 1986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12년 유중아트센터에서 열린 첫 개인전 <유용한 사물>을 시작으로 3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교예술실험센터, 갤러리 팩토리, 복합문화공간 에무, 공간291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조혜진 (4)

<이용 가능한 나무> 수집한 열대식물을 각목으로 조각(행운목, 파키라, 녹보수, 고무나무) 가변설치 2015

 위 <우산으로 야자나무를 만드는 간단한 방법>(오른쪽) 설치와 매뉴얼 제작 2015

CRITIC 뉴 스킨: 본뜨고 연결하기

일민미술관 7.3~8.9

안소연 미술비평

한동안 느슨했던 스크린이 다시 팽팽해졌다. 화려하고 매끈한 이미지 뒤에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실재가 봉인되어 있다고 하는 응시에 대한 신화가 스펙터클한 현실을 다소 평평하게 정의해온 터라, 시각적인 이미지 표면에 대한 긴장감이 줄어든 지도 오래다. 인간의 시각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매개하는 상징적 의미의 스크린은, 사실 그 프레임 안에 투사된 이미지로만 실제 세계에 대한 재현이 가능하다. 이는 플라톤의 동굴우화에서부터 라캉의 시각철학으로 이어진 주체의 시각 경험에서 얻어낸 결론이다. 스펙터클한 현실의 이미지도 결국 스크린 위에 투사된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나면, 비로소 볼 수 있음에 대한 희망보다는 끝내 볼 수 없음에 대한 실망감으로 더욱 무색해진다. 그래서 뒤샹과 워홀은 화려한 스크린 위에 거친 흠집이라도 내보려는 심산으로 그처럼 불안한 유희를 즐겼나보다. 때때로 파열될 것처럼 팽팽해진 스크린에서는 어떤 의심쩍은 실체가 곧 뚫고 나올 것 같았지만, 상징적 언어들로 재무장한 환영의 스크린은 어느 순간부터 뻔한 결말로 흘러가는 시나리오처럼 단순해졌다.
그렇게 힘 빠진 스크린이 요즘 다시 팽팽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일민미술관에서 함영준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 <뉴 스킨: 본뜨고 연결하기>(이하 <뉴 스킨전>)를 보고난 느낌이 그랬다. 이 전시는 최근 주목을 받은 몇 개의 전시와 일부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 가장 근래에 개최된 전시로 <필름몽타주>(코리아나미술관, 배명지 기획)와 <김실비: 어긋난 신(들)>(인사미술공간, 이단지 기획)을 들 수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디지털 영상매체를 기반으로 한 무빙이미지가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이목을 끈다. 수많은 영화적 요소에서 비롯된 디지털 무빙이미지는, 그야말로 잡다한 동영상까지 아우르며 그에 대한 오늘날의 경계 없는 시청각적 경험을 유도한다. 그들은 대부분 진부해진 주체의 시각 구조를 새삼 환기시키면서, 무엇보다 물질로서의 스크린 그 자체에 몰두하는 태도를 보인다. 특히 <뉴 스킨전>은 특정 시점부터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스널 스크린”이 확산되면서 겪게 된 시각 메커니즘의 적나라한 변화를 소개하며,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을 일군의 세대적 특성으로 묶는다.
총 6명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 <뉴 스킨>은 세계화와 자본주의 전략으로 가속화된 일약 디지털 세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2010년대에 막 활동을 시작한 젊은 미술가들”로 소개된 그들은 대다수가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적합한 체질을 타고난 세대로, 1990년대식 표현이긴 하지만 소위 “신인류”라 부를만하다. 시공간의 제약을 딛고 새로운 환경, 즉 새로운 영토로 언제든 탈주 가능한 이들은, 환영으로 물든 현실세계 보다 오히려 가상의 미디어 환경을 더욱 크게 체감하고 있다. 그들이 주목하는 미디어 환경은 내부에 무한한 인터페이스들이 잠재해 있기에 이질적인 것들의 손쉬운 결합과 현실에 대한 비선형적 역사기술의 가능성까지 시사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박민하의 경우만 보더라도, 약 5분 분량의 2채널 영상으로 제작한 <전략적 오퍼레이션-비즈니스 카드 A/B>(2015)를 통해 현실에서 모의되는 가상 체험의 실체를 흥미롭게 다룬다. 서로 마주보게 놓인 두 개의 화면 위로 편집된 일종의 몽타주 영상이 흐른다. 박민하는 캘리포니아 모하비사막에 있는 NTC(National Training Center) 군사훈련센터를 배경으로 한 이 영상에서, 한때 스펙터클한 할리우드 영화 세트장으로 조성되었던 장소가 전쟁 시뮬레이션에 이용되는 현실의 모습을 무질서하게 합성해 놓았다. 영화 특수효과와 군사 훈련을 일련의 산업 시스템으로 엮어놓은 기이한 현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광고 영상과 시뮬레이션 기록 영상, CG 영상 등 각각의 상이한 이미지들이 충돌하고 재배치되면서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작가는 두 개의 영상 스크린 뒷면에 초기 텔레비전 박물관에서 그가 직접 열람한 이미지 아카이브의 일부를 공개함으로써 가짜 같은 현실을 적극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강정석은 그들 세대가 공유하는 디지털 화법에 훨씬 노련하다. <시뮬레이팅 서피스 A>(2014)는 게임회사에 출근하는 친구를 그가 몇 개월간 지하철역까지 배웅하면서 그 과정을 아마추어 홈비디오 형식으로 기록한 영상이다. 그는 게임 산업 구조의 허술한 단면을 애써 폭로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실직과 취업을 반복하는 친구의 표피적인 일상에 따라붙어 수없이 열렸다 닫히는 현실의 출구를 상상하는 일에 동참한다. 그렇게 현실에 스며든 불순한 상상은 인터넷 “합필” 영상처럼 <시뮬레이팅 서피스 B>(2014)로 제작되어 구체화된다. 강정석은 <시뮬레이팅 서피스 A>에서 추출한 영상 소스를 인터넷 공간에서 소비되는 “합성 필수요소”로 사용했다. 불법 복제, 저급한 편집, 불완전한 전개 등이 빚어낸 허술한 합성 이미지들은 현실을 스크린 위에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대신 현실에 기생하는 가짜 같은 현실을 본떠서 급속히 유포한다.
한편 김희천의 영상작업 <바벨>(2015)을 한참 몰입해서 보고 있으면, 마치 신체의 모든 감각이 가상의 디지털 표면 위에서 시각적으로 분석되고 일시에 전환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영상은 아버지의 실제 죽음을 몇 가지 데이터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경험에서 시작된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몇 가지 기록을 인터넷 데이터와 지도 같은 가상의 공간 위에 가시화했고, 동시에 쉽게 체감할 수 없었던 현실의 커다란 문제들 또한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화면 위에 재구성했다. 김희천의 영상에서 드러난 것처럼, 우리는 현실을 직접 체험할 능력을 이미 소진한 상황에서 어쩌면 가상의 세계를 경유하여 우리가 처한 모든 현실을 새롭게 경험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김영수의 보드게임 <우주시민 A씨의 데카드>(2015), 달의 움직임을 좌표로 전환시킨 강동주의 <달은 어디에 떠있나>(2015), 그리고 개별 작품들의 보이지 않는 물리적 인터페이스를 설계한 김동희의 공간 구조물들처럼, 적어도 <뉴 스킨전>에서 그들이 주목하는 가상의 미디어 환경은 수많은 이미지 스크린의 병치와 그 행간에 스며들어간 잠재적인 서사를 이용해 현실에 대한 새로운 기술(記述)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위 박민하 <Robert Television Bomber>(가운데) 2015

CRITIC 옅은 공기 속으로

금호미술관 5.27~8.23

조성지 미술비평

금호미술관의 <옅은 공기 속으로>는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 동시대적 풍경의 한 단면을 조망해볼 수 있는 전시다. 권기범, 김상진, 김수영, 김은주, 박기원, 이기봉, 카입+김정현, 하지훈, 홍범 등은 깨어있는 눈과 치열한 작가정신, 예술의 개념으로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형상담론을 추구해온 이들이다. 국내 국공립, 사립미술관과 갤러리, 문화예술기관들이 해외 블록버스터급 근현대 유명작가들로 운영과 소통 성과 올리기에 급급한 가운데, 국내 작가들에 대한 진득한 관심이 참으로 고맙고 반가운 미술관 전시다. 또한 참여 작가군 역시, 현란하고 속 시끄러운 세태를 향해 난해한 개념의 날덩이들로 맞대응하는 집단혈기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공력의 시간을 거쳐 정련된 개념형상을 추구하는 차별성이 눈에 띈다. 흑백을 기조로 한 이들의 특징적인 드로잉, 영상, 사운드 설치는 무채색의 시각적 비움을 연출한다. 어느덧 국내 중진・중견작가로 자리매김한 이들의 작품은 현대미술이라는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된 듯 한결 무난하고 여유로운 느낌이다.
하지만, 일견 시각적 비움으로의 초대는 편치 않다. ‘옅은 공기 속으로’란 제목이 말하듯, 미술관도 전시도 투명한 곳이 아니다. 옅은 공기 속에 지엽적으로 개별 작가의 개념과 의도, 정신성이라는 환영 짙은 공기들이 정체된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견물생심”이라 했거늘, “보고 온몸으로 느끼며 소통하고픈 마음”을 일으키기에는 볼 것이 없다. 관객 입장에서는 이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환영의 미끄러짐과 동일한 환영의 반복에 식상하고 무료함을 느낄 법하다.
난해한 것은 난해한대로 무난한 것은 무난한대로 현대미술이라는 헛것을 따라다니다가 헛것 된 듯 관객의 입장은 무안하다. 관객이 좌절하지 않을 방법은 황망하니 잊어버리거나, 휑뎅그렁 남겨짐에 대해 해명하는 일이다. 전시입장료와 상관없이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 착한 관객이거나, 전시입장료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얻으려는 악착 같은 관객이 후자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감과 휑뎅그렁 남겨짐은 비단 현대미술을 대하는 관객의 경험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참여 작가를 포함한 동시대 국내외 현대미술이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현 상황에서 금호미술관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여러모로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남는 전시다.
금호미술관 <옅은 공기 속으로>는 분명 작가 선별과 전시일정상, 서구 미니멀리즘 이후 개념미술, 공감각적 환영과 상호작용성 등에 관한 다양한 양태의 국내작가 일파를 집중 조명하고 검증하는 프로그램들로 뜻 깊은 전시기획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관객의 경험은 오히려 작가와 관람객, 예술세계와 현실세계를 만나게 하고 특별한 사물로서 현대예술에 대한 문제 제기와 비평적 견해들을 되짚어보며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로 기대해봄직한 전시였다. 그런 만큼 상당 부분을 관객의 능동적 참여와 학습에 맡겨버린 작가와 미술관의 방만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술관 전시와 작가와의 대화가 모든 검증이 끝난 작가의 팬 미팅 자리가 아닌 이상, 참여 작가는 일반인에게나 미술인에게나 대체로 낯선 무명이다. 굳이 반세기 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회고전에서 한 작가가 미술관으로의 역사화, 제도화에 반기를 들었던 해프닝까지는 아니어도, 이번 전시는 흑백의 다채로운 색감과 독특한 개성을 남기지 못하고 무채색 옅은 공기 속에 묻힌 인상을 준다. 미술관의 무난한 관성범위 망 안으로 너무나 온순하게 들어온 거 아니냐고 작가에게 묻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작가들과 함께 꾸준히 시대적 감수성과 현대미술의 방향성을 모색해온 금호미술관의 이번 전시를 눈여겨본다. 현대미술의 크고 작은 집단 혈기와 돌풍이 끊임없이 소진되고 지나간 자리, 그 위로 감도는 살아있는 무언가를 품었으리라. 이번 전시 <옅은 공기 속으로>를 뚫고 나올 참여 작가들의 그 무언가를 기다려본다.

위 권기범 <Jumble Painting 15-1 Gravity> 벽면 회화에 고무줄 설치, 혼합매체 2015

CRITIC 도윤희 Night Blossom

갤러리 현대 6.12~7.12

배은아 독립 큐레이터

밤이 피어오르다. 밤의 개화. ‘Night Blossom’은 도윤희의 열여섯 번째 개인전 제목이다. 갤러리 현대, 4년 만의 개인전, 독일 작업실, 새로운 기법, 색의 출현과 같은 정보를 제치고. 엄습해온 것은 ‘Night’와 ‘Blossom’의 오묘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파장이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영문에서 국문 번역 과정을 점프하는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외래어가 가지고 있는 이국적인 느낌 때문이거나 그것이 차용된 명제이거나 혹은 ‘Night Blossom’과 같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질서에 존재하지 않은, 번역 불가능한 어떤 순간을 드러내기 위함일 수도 있다. ‘Night Blossom’은 언어로 번역되기 이전에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는 무엇이다. 그 무엇은 예측하지 못한 어떤 것이 저 문 너머에 있을 것 같은 설렘을 만들었고, 동시에 언어의 역할 그 자체를 의심하게 했다. 그 문 너머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색들은 여럿이자 하나가 되어 색이 아닌 무엇으로 다가왔고 그것은 몸의 한 기관을 자극한다기보다는 온몸에 내재하는 혹은 온몸 밖으로 벗어나는 무엇이었다. 그것을 울림이라고 해야 할지. 떨림이라고 해야 할지. 열림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애매모호한 것이 되어 오히려 보는 이의 눈을 감게 했다. 나는 그 무엇을 그림도 음악도 언어도 아닌 일종의 ‘포에지(poésie, 시: 영혼의 기반을 움직이게 하는 예술 (Novalis, L’Encyclopédia))’라고 부르고 싶다.
그녀는 매일 아침 무엇을 읽을까. 그녀의 식탁 위에는 어떤 꽃이 꽂혀 있을까. 그녀의 창문 너머로 무엇이 보일까. 무엇이 그녀의 손가락 끝을 움직이게 하는 걸까. 그것은 물리적인 대상이 아닌 그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주체로서 에너지이다. 그것이 신문의 한 칼럼을 장식한 익명의 자살일 수도. 유리병에 꽂힌 작약일 수도. 창문 너머 보이는 하늘색 캐딜락일 수도 있다. 그 주체들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나름의 생존방식을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 존재 방식이 도윤희의 손가락 끝으로 전이된 것일까. 손가락 끝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선, 색 그리고 형은 보는 이의 시각을 자극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감각체계를 통해 음악의 리듬 혹은 춤의 움직임과 같은 공명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 움직임은 즉흥적이면서도 의도적이며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이다. 이번 전시에서 도윤희는 붓이라는 회화의 전통도구를 내려놓음으로써 회화 밖의 언어를 습득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언어조차 거부하고 마치 언어 이전의 존재를 마주하려는 듯 오로지 손가락의 움직임에 도취했음에 분명하다. 보이지 않는 것, 계산되지 않는 것, 말로 전달되지 않는 것, 그리고 해석되지 않는 것에 유난히 무감각해진 오늘날. 매일 아침 쏟아지는 전쟁과 부패, 분쟁과 대립 그리고 재앙과 질병 따위의 뉴스에 자괴감마저 드는 오늘날. 우리는 감히 무엇에 도취해 무엇을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이라는 고독의 섬을 떠도는 한 예술가가 부조리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정의구현도 아니고 억압당할 수밖에 없는 자유의지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비굴한 삶을 존속하게 하는 생명의 담론, 카오스 그 자체이다. 너무 낭만적이거나 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이상적이거나. 그것은 공유를 통해서 공감을 통해서 공명을 통해서 ‘포에지’의 중심에서 우리를 호출한다. 그 호출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타자를 존재하게 하고 타자를 받아들이고 그리고 비로소 자아의 현전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2층에 주르륵 나열된 캔버스들 앞에서. 초라한 벽, 빈약한 조명, 시크한 관람자들, 세속적인 대화가 공간에 울리면서 돌연 색의 향연은 예술(자본)의 틀 안에 갇히고 마는 것일까. 틀에 갇히기 이전에. 번역되기 이전에. 의미로 전달되기 이전에. 문장으로 완성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혼돈의 상태.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Night Blossom 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색채’. 그리고 ‘밤이 되어서야 드러나는 세계’.

위 도윤희 <무제> 캔버스에 유채 2014

CRITIC 임자혁 조금 이상한 날

누크갤러리 6.25~7.23

정신영 서울대학교미술관 책임학예사

2002년 뉴욕 MoMA에서 개최된 <Drawing Now>은 드로잉을 주된 표현방법으로 사용하는 작가들만을 모은 대규모 기획전이었다. 개최를 전후하여 최소한 현대미술에서는 드로잉을 하나의 독립적인 매체로 인정하는 의식이 자리잡았다. 캔버스를 짜고 밑칠을 하는 과정이 생략되고 선적 요소만으로 화면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회화에 비한다면 드로잉은 보다 일상적이고 친밀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변적인 표현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더 이상 밑그림이나 설계도처럼 타 매체에 연관지으며 의지하거나 도전하지 않는 새로운 드로잉이라는 장르는, 일상을 영위하며 수용하는 개개인의 시점을 반영하는 데 있어 최적의 매체로 보인다. 임자혁의 경우 다양한 현실의 단편들은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정보로 다가오는 듯하다. 삼청동 누크갤러리의 2개층에 걸쳐 전시된 총 108점 중 ‘오렌지 드로잉’으로 분류되는 54점의 드로잉은 임자혁이 지난 3~4년에 걸쳐 경험한 일상의 순간이나 사건들의 축적임과 동시에 색, 선, 형상, 구도 등으로 재구축된 현실의 기록들이다. <깃털>은 마치 참빗으로 긁은 듯 등고선이나 기압골처럼 촘촘한 줄문양으로 처리된 거대한 인물의 뒷모습에 흰 오리털이 한 조각 붙어있는 모습이다. <사죄>는 뉴스나 신문에서 접하는 전형화된 광경으로, 무릎 꿇고 깊숙이 고개 숙인 양복차림의 남성들이 줄줄이 열을 이루는 모습이 상하로 반전되어 마치 서로에게 사과하는 듯 코믹하게 배치되어 있다. 짙고 옅은 오렌지색의 유산지에 묘사된 이 같은 이미지들은 모두 작가가 경험한 현실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단독 작품인 1층의 콜라주 역시 시각중심적(ocular-centric)이면서도 어떤 상황에 대한 비일상적인 면모를 감지해내 사건화하는 작가 특유의 예민함이 드러나 있다. <야유회>는 이제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인 중장년층의 등산복 애호에 대한 언급이다. 광활한 초록빛을 배경으로 울긋불긋 모자와 재킷이 일렬로 늘어서 나들이 풍경을 연출한다. <그룹 미팅>은 실내에 설치되어 있어야 할 소화기 여러 대가 야외로 옮겨져 붉은 펭귄처럼 옹기종기 한곳에 모여있는 모습이며, <어떤 덩이>는 지방도로의 목가적 풍경 속에 우뚝 솟은 장승 같은 거대한 비닐묶음들의 특수한 존재감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1층의 작품들의 서술적 요소와 제목의 결합은 때로는 동화처럼, 때로는 난센스한 코믹삽화처럼 해석하는 즐거움을 주는데, 이뿐만 아니라 화면에 펼쳐지는 색, 선, 패턴이 주는 리듬감이나 장식성이 예사롭지 않은 디자인적 감수성을 제시하고 있다.
깨알 같은 잎사귀의 표현이나 원색과 중간색을 미묘하게 섞은 대담한 색면의 배치는 2층에 이어지는 <돋보기> 연작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돋보기> 연작은 1층에 전시된 작품의 한 부분을 원형이나 길쭉한 타원, 평행사변형 등으로 도려낸 후 거대하게 확대하여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한 작업들이다. 원작의 서술적 맥락에서 격리되어 새로운 화면으로 옮겨진 조형요소들은 급격히 추상화되어 있다. 대비되는 색상이나 불안정한 듯하면서도 숙련된 선들의 교차는 이미 북유럽의 패턴화된 디자인과도, 일본 디자인의 절제된 양식과도 또 다른 작가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위 임자혁 <주홍색 드로잉>(왼쪽) 종이에 잉크, 총 54장 2015

CRITIC 김미경 서 있는 시간

갤러리 비원 6.1~30

정현 미술비평

저마다의 욕망으로 가득 찬 도시의 소란스러움은 ‘사색’의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명상과 사색마저 자기 개발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는 성공만능주의 시대에서는 예술도 현실만큼 뒤틀리고 소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사색마저 생활의 지혜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된 셈이다. 김미경의 전시 <서 있는 시간>은 전속력으로 앞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에 길든 사람들에게 시간에 끌려가지 말고 시간을 마주하라고 말을 건넨다. 그녀의 회화는 작은 화폭 위에 미디엄을 이용해 여러 겹으로 색을 입히는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전 작업에서는 이 겹들의 층이 두드러졌다. 반투명한 평면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통해 각 층의 색들은 서로 겹치는데, 이러한 겹침으로 나타나는 색은 광채를 띠기까지 했다. 이전 작업이 일련의 물리적 과정에 의해 겹침의 효과를 극대화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겹침보다는 스며듦을 강조하는 듯하다. <My heart is bleeding>(2013)은 흰 바탕 위에 강렬한 붉은색 직사각형이 화면을 분할한다. 두 개의 화면으로 구성된 <I write a letter(diptych)>(2014)는 마음의 상처를 써내려간 것처럼 붉은색 직사각형이 화면 상부에 수평으로 위치하고, 다른 화면은 빈 종이처럼 다음의 문장을 기다리는 것만 같다.
사실 한국 미술계에서 추상회화는 대중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최근 단색화 붐이 일어났지만, 개인적으로는 단색화에 대한 관심은 추상회화에 대한 관심과는 다른 것 같다. 헬 포스터의 말을 빌리면 “시뮬레이션의 시대에 추상화를 부흥시키려는 시도는 ‘자본의 추상화 과정’을 흉내 내려는 기회주의적 시도라고 생각한다.” 미술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웅장하고 영웅적인 해석을 강요당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으며, 무엇보다 예술을 통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보려는 여러 입장 덕분이었다. 추상을 개인적 차원의 감정이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관습을 파괴한 혁명적 실천으로 볼 것인지는 결국 미학이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W. J. T.미첼은 추상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굳이 거창한 회화론이나 주체성을 운운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한다. 오히려 그는 작품에 다가가는 관객의 자율성과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종의 친밀감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교조적인 추상미술의 강령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신화적 영웅을 알현하기 위해 추상미술을 관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작품에 대한 친밀감이 샘처럼 솟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방과 재현의 패러다임을 벗어나기 위해 형상을 지운 추상미술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미학적 강령 대신 작품 자체에 집중하라는 조언과 더불어 추상적 이미지는 이미 고대부터 존재했다는 익히 알려진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김미경의 회화는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작품은 관객에게 자신에게 관심을 달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명상하라고 주문을 걸지도 않는다. 물론 전시장의 상태와 작품의 배치에 따라 이러한 느낌은 달라지겠지만, 내게 이번 전시는 내가 굳이 작품에게 말을 건네지 않아도 무방할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건 마치 편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드는 기분에 가까웠다. 친밀감은 소통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자유로운 상태일 것이다.

위 갤러리 비원에서 열린 김미경 개인전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