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HT & ISSUE

Le temps. Vide. L`Espace
시. 빈. 들

이진우 〈시. 빈. 들〉리안갤러리 전시 전경 2021

문지르고 긁어낸 빈자리

리안갤러리 서울은 2021년 11월 18일부터 1월 10일까지 이진우 작가의 개인전 〈Le temps. Vide. L`Espace 시. 빈. 들〉을 개최했다. 박서보 화백이 영국 화이트큐브 개인전에서 이진우 작가의 작업을 언급한 것을 계기로 이우환, 김환기에 이어 2017년 일본 동경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진 그는 박서보를 잇는 ‘한지의 거장’ 명칭을 얻었다. 국제무대에서 수요가 많은 단색화라는 공통분모로 세 사람의 작업을 엮을 수 있고, 이진우 작가가 단색화 화백들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진우 작가의 작업은 공간으로 튀어나올 듯하면서도 단단하고 납작한 물성을 탄생시킨 반복적 노동의 결과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단색화와는 다른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시, 빈, 들. Time(Le temps), Empty(Vide), Space(L`Espace)를 의미하는 세 단어를 천천히 발음해 보면, 빈 공간의 냄새와 공기를 동그랗게 말아 입 안에서 굴리는 것 같다. 시간을 모두 태워버린 것 같은 숯, 오랜 시간의 켜를 덧입으며 질겨졌을 한지의 질감이 만져지는 듯하다. 전시의 제목처럼 이진우 작가는 비어 있는 공간 속에서 비교적 오랜 시간을 두고 작품과 관객이 차분해진 감정을 조심스레 주고받기를 원했다. 명상하듯 느린 소통을 이어가다 보면 작품의 독특한 물성에 집중하게 되는데, 손때가 타고 풍화된 것 같은 표면은 작품이 탄생하는 데 걸린 시간이 꽤나 길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작가는 1980년대 프랑스의 전위예술을 거치며 시간의 흐름에 맞춰 천천히 집적되는 그의 노동을 한지 위에 단단히 굳혔다. 작업이 완성되기까지 작가는 아크릴 용액을 바른 리넨 위에 숯과 목탄을 흩뿌리고, 우연히 흩뿌려진 검은 흔적 위에 한지를 덮어 문지르고 긁어내는 과정을 거친다. 작가의 묵직한 손길을 여러 번 거친 한지의 물성은 그 자체로 인고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진우〈Untitled〉 128.5×168cm

〈Untitled〉 137×163.5cm

“한지를 덮고 브러시로 긁어내는 과정을 통해 제가 사라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한지를 덮는 것은 저를 무효화시키는 행위이고, 흰 눈으로 사물을 덮듯 저 자신의 추한 것, 모자란 것, 부끄러운 것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덮으려 한 것입니다. 원래 저의 이탈하려는 마음과 더불어 브러시로 긁어내고, 더럽고 추한 것들이 떨어져 나가길 바랐지요.”

작가의 말에서 ‘수행’을 떠올린다. 필연적으로 어떤 방식의 노동과 반복이 수반되는 모든 작품을 수행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수행(修行)이란 행실, 학문 등을 ‘닦는’ 것, 혹은 ‘불도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이다. 뭉친 한지를 브러시로 긁어낼 때마다 그의 마음속 수치와 죄도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며 생살을 드러내는 수행의 과정이었다. 수십 번 덧씌워진 한지와 숯의 육중한 몸체에도 불구하고 빈 공간의 평화와 무아(無我)가 느껴지는 이유다.

이진우 〈Untitled〉(부분) 128.5×168cm

염하연 기자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 기사 자세히 보기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월간미술》 2022년 2월호 SIGHT&ISSU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