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리포트] 시끌벅적한 추도식장에 펼쳐진 이미지의 향연

contents 2014.2. world report | 시끌벅적한 추도식장에 펼쳐진 이미지의 향연
신원정│미술사
여러 차례 계획의 변경과 연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2013년 겨울 쿤스트베르크에서 막을 올리게 된 전시는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의 작업을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룬 첫 회고전이라는 점에서–지난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의 독일관을 비롯해 그간 열린 전시들은 고인을 추모하는 행사에 더 가까웠기에–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슐링엔지프 작업의 방대한 스펙트럼을 감안할 때 ‘회고’적 성격의 전시를 베를린에서 열기에는 최소한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 정도의 규모라야 어울릴 듯하지만 전시가 실제 열리고 있는 곳은 그리 크지 않은 쿤스트베르크이다. 전시
를 기획한 큐레이터는 작가의 작업을 남김없이 총괄하기란 불가능하기에 그 보다는 관람객이 그의 예술세계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강조했다. 큐레이터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장소가 다소 협소하다는표면상의 단점은 ‘선택과 집중’을 가능케 해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이뿐만 아니라 베를린의 현대미술현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는 전시 기관인 쿤스트베르크가 가진 장점 중 하나인 주전시실 공간을 인상적으로 활용한 점 또한 이번 전시가 이곳에서 열려야 하는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지상과 지하를 아우르는 높이와 상당한 크기의 주전시실은 한때 마가린 제조 공장이었던 쿤스트베르크 건물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소이자 무엇보다 대규모 설치작품을 전시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두컴컴한 홀에 일곱 개의 굵직한 나무 기둥이 설치되어 있고 그 꼭대기마다 사람이 앉아있는 광경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무런 미동 없이 독서를 하거나 드물게 고개를 들다 자신을 관찰하는 관람객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하지만 이내 무심하게 시선을 옮기는 이 <주상 고행자>들은 슐링엔지프의 2005년도 작 <두려움의 교회>의 한 부분이다. 전시실 한가운데에는 회전무대인 <아니마토그래프>의 독일판인 <파르지파크(라그나뢰크)>(2005)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 연극, 음악, 퍼포먼스와 오페라가 한자리에 모여 녹아내리고 서로 섞이는 현장이다. 여러 개의 세트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고 조명이 극적 분위기를 강조하는 회전무대는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은 공간의 밀도를 조율하고 무대 위 오브제, 벽에 붙은 포스터와 그림, 영사기에서 나오는 영상이 빚어낸 이미지들은 전시실 공간을 시각적으로 재단한다. 관람객이 천천히 돌고 있는 무대 위로 올라서서, 쏟아지는 조명과 영상을 온몸에 직접 맞으며 스스로 이 움직이는 극장의 일부가 되는 순간 비로소 작가가 꿈꾸었던 총체예술작품은 완성된다. 한편 바그너의 오페라를 들으며 아돌프 히틀러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어느새 느껴지는 개운찮은 뒷맛에 독일 출신 작가의 전시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강한 정치성을 표방하는 슐링엔지프의 퍼포먼스 작업은 부조리하고 냉혹한 현실을 가감 없이 다루는데 공개될 때마다 온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큼 도
발적이지만 그 전복성과 병행하는 신랄한 조소와 탁월한 비틀기는 다양한
층위를 갖춘 복합적인 작품의 탄생에 일조한다. 서바이벌 방식의 인기 TV프
로그램 ‘빅 브라더’의 포맷을 차용한 퍼포먼스 <오스트리아를 사랑해주세요>
는 2000년 빈 예술축제 기간 중 진행되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빈
국립오페라극장 앞에 설치된 컨테이너, “외국인을 추방하라”는 문구를 담
은 큰 배너가 붙은 이 컨테이너 안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는 외국인 12명이 1주일간 고립된 채 생활한다. 그들의 모습은 TV로 생중계되고 오스트리아 국민은 전화나 인터넷으로 송환자를 뽑는 투표를 할 수 있다. 투표 그 결과에 따라 매일 저녁 8시에 두 명씩 강제 송환을 위해 컨테이너를 떠나게 된다. 최종 우승자를 기다리는 것은 상금과 합법적인 오스트리아 국적 취득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근본적인 윤리적 화두에서부터 인권과 직접(외국인 난민 및 정치적 망명자) 혹은 간접적(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을 대하는 시선)으로 관련된 테마들, 그리고 외국인 혐오 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이 극단의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TV 예능프로그램의 달콤한 탈을 쓰고 평온한 일상을 가장한다.
아힘 폰 파첸스키와 공동으로 제작한 <프릭스타 3000>(2003)는 2002년 6월 8일부터 방영되었던 6부작 TV 프로젝트
를 편집한 비디오작업이다. 당시 독일 청소년들에게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킨 캐스팅 프로그램 <독일이 슈퍼스타를 찾다>와 비슷하면서도 뚜렷하게 다른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바로 넘치는 끼를 주체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다. 캐스팅 과정부터 최종 밴드 멤버 선정 그리고 앨범 발매에 이르기까지 캐스팅 쇼의 전반적인 메커니즘이 화면에 담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회·관습적 구분은 모호해지고, 자연스러운 감정 표출에 제약을 받는 이는 실상 어느 쪽인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된다.
전시의 주인공, 슐링엔지프의 부재(不在)가 아쉬운
슐링엔지프의 작업에서 표출되는 정치성의 정점을 찍은 두 건의 사건을 보자. 먼저 그는 1997년 8월 말 제10회 도쿠멘타가 열리던 카셀에서 당시 독일수상 “헬무트 콜을 죽여라”라는 문구를 담은 포스터를 내건다. 이로 인해 퍼포먼스 현장에 긴급 투입된 경찰이 작가를 체포하고 일시적으로 구금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연방의회선거에 기해 “당신 자신에게 투표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찬스 2000’이라는 이름의 정당을 창설하고 특히 전국 600만 실업자에게 헬무트 콜 총리가 여름휴가를 보내는 볼프강호수가 범람하여 총리의 별장이 물에 잠겨버리도록 <볼프강호에서 수영하기> 퍼포먼스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언론의 엄청난 주목에 비해 실제 참가자 수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비록 최종 선거에서 0.058%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지만 “실패는 기회”라는 창당 슬로건부터 시작해 계속된 미디어의 관심과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영상예술에서 출발한 뒤 1993년부터 연극 쪽으로 활동영역을 넓힌 작가는 2004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초대되어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을 연출하게 된다. 페스티벌 총감독 볼프강 바그너와의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으로 인
해 상당히 시끄러웠던 준비 과정–후에 폐암 판정을 받은 작가는 이때 받은 스트레스를 발병의 원인으로 꼽았다–과 연출을 맡은 슐링엔지프의 존재로 인해 예술계 악동이 만드는 <파르지팔>이 과연 얼마나 센세이셔널할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이 날로 고조되었지만 정작 막이 오르고 나타난 것은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무난한 무대였다. 평단과 관객의 호평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사실 피에르 불레즈가 지휘한 오케스트라였다는 사실이 다소 아이러니하다.
현 시대의 잔인한 현실 앞에서 절대 고개 돌리거나 외면하지 않은 슐링엔지프의 작업은 필터 없이 바라본 세상을 담고 있기에 다소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작가의 진정 어린 진심에서 비롯된 만큼 강렬한 설득력을 지닌다.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년이 성장하며 꿈꾸었던 삶과 예술의 일치는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공화국에 그가 세운 <오페라마을>에서 작가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없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11년 10월에 문을 연 초등학교에서는 현재 아이들이 교육을 받고 있고 약 5헥타르에 달하는 면적 위에는 초등학교와 관련 건물(카페테리아, 녹음실) 외에도 진료소가 완공된 상태이며 그 외 일반 주택과 극장, 작가 레지던스 건물 등이 앞으로 건축될 예정이다.
조형예술과 음악, 연극 장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의 작품세계는 그 복합성과 장르 해체적 급진성 때문에 미술전시장이라는 맥락 안으로 끌어들이기가 결코 용이하지 않다. 많이 알려진 유명한 작업들이 주를 이루는 이번 베를린 전시는 그런 점에서 영리하고 현실적인 기획이었다고 하겠다. 또한 수많은 비디오작업과 설치작품들은 작가의 조형예술가적 면모를 확실하게 각인시켜준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이미지들은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도 하지만 이런 어지러운 무질서함 또한 슐링엔지프 작업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클라우스 비젠바흐가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한 이 전시는 2014년 1월 중순에 막을 내린 후 3월에 뉴욕으로 옮겨가 모마 PS1 현대미술센터에서 다소 달라진 모습으로 개막할 예정이다.
여러모로 성공적인 이번 전시에서 딱 하나 아쉬운 점을 들라면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주인공의 부재를 꼽을 수있을 것이다. 살아생전에 제도적 전시공간을 항상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접근했던 작가가 이번 전시를 함께 기획했다면 그 결과물은 분명히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테니. 외국인에 대한 인종적 혐오와 극우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결코 변하지 않는 정치판에 대한 불만과 불신 등 민감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의성 넘치는 테마를 다루었던 작가가 바라본 2013년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순으로 얼룩진 모습이었을지 궁금하다. ●

이번 전시가 열리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 당신이라고 들었다.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된 상황을 설명해달라.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의 작업은 미술과 정치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관람객이 직접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을 지향한다. 그의 작업에 투영된 독일의 역사와 사회정치적 주제들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시의적이다. 전시를 열려고 생각한 시기는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작가와 구체적으로 논의하며 작업의 조형적 측면을 중점적으로 조명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다루는 주제들은 굉장히 복합적이지만 작가는 스스로의 작업을 강한, 어떤 의미에서는 도상학적인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전시 준비과정에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작가는 하나의 완결된 작품보다 계속해서 현 시대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를 심사숙고하는 작업을 중요시했고 이렇게 과정에 중점을 두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전시를 기획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끝없이 서로 맞물리는 개별 작품들을 전체적인 틀 안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야 했던 점이었다.
주인공인 작가의 부재가 전시에 끼친 영향이 있는가.
그는 생전에 엄청난 창작력을 발휘했으며 쉬지 않고 항상 뭔가를 만들어냈다. 어마어마한 양을 자랑하는 그의 작업은 그럼에도 부분적으로는 잘 기록되어 보관되고 있다.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퍼포먼스 작업의 경우 작가의 직접적인 지휘와 개입, 실행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는 자신의 작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빈자리가 정말 크게 느껴진다.
전시작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는가?
그간 작가가 다루었던 주요한 테마와 장르를 고루 전시하려 노력했다. 작업 초기부터 후기까지 그리고 영화,연극, 오페라, 설치작품과 퍼포먼스 등 모든 종류의 작업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전시는 3월에 뉴욕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독일어가 많이 등장하는 작품과 외국(영어권) 관객 간 원활한 소통을 위해 큐레이터의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나는 슐링엔지프의 작업이 조형적 측면에서 그간 지나치게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업 속 이미지들의 영향력은 매우 강렬하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한편 작가는 <100년 동안의 히틀러>나 <독일 전기톱 살인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 오랜시간 독일의 역사와 전형적인 독일적 주제들을 깊이 탐구해왔고 또 서구권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식민주의나 인종차별, 종교와 교회, 질병과 죽음 등의 주제도 즐겨 다루었다. 그러므로 감상하는 데 언어로 인한 어려움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나머지는 전시실의 작품 설명문과 미술관 교육 프로그램으로 보완할 수 있을 거다.
관람객이 전시를 보고난 후 어떤 것을 얻어가기를 바라는가?
작가는 항상
관람객들에게 스스로 사고하고 사색하며 능동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해
왔다. 우리 개개인이 얼마나 큰 정치적 책임과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전시를 방문한 이들이 숙고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잔네 페퍼(Susanne Pfeffer, 1973년生)는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후 쾰른 쿤스트페어라인과 이후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실무경험을 쌓았다. 브레멘 퀸스틀러하우스 관장을 지낸 후(2004~2006) 2007년부터 베를린 쿤스트베르크에서 큐레이터 겸 예술 감독으로 활동하며 뉴욕 모마 PS1 현대미술센터의 자문위원도 겸했다. 2013년 카셀 프리데리치아눔 쿤스트할레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베를린=신원정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