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리뷰] 김미루 – 미메시스의 능력 회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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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시스의 능력 회복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통해 인간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작가 김미루의 개인전 <낙타가 사막으로 간 까닭은?>(3.27~4.29)이 트렁크갤러리에서 열렸다. 그동안 도시, 돼지우리 속 누드 사진으로 충격을 던진 작가가 이번에는 사막에 몸을 던졌다. 여자의 벗은 몸을 금기시하는 모슬렘문화권의 이 사막은 옷을 입은 채로도 견디기 힘든 악조건이지만 그녀는 진지하게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김영옥  이미지 비평, 연세대 문화학과 강사

하얀 스카프와 긴 장옷으로 머리와 몸을 감싼 한 여자가 사원 마당에 앉아 있다. 그녀 앞에는 우유가 가득 담겨 있는 함지박이 놓여 있다. 작은 몸의 쥐들이 함지박 둘레에 달라붙어 열심히 우유를 마시고 있다. 우유를 충분히 마신 쥐들은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가 손등을 타고 넘기도 한다. 소소하고 즐거운 놀이를 하듯이 쥐들의 움직임은 가볍고 발랄하다. 가끔씩 그녀 자신도 손바닥으로 우유를 길어 올려 입술을 축인다. 사원을 찾은 마을 주민들 중에 그녀를 여신으로 생각한 사람도 있다. 그녀 앞에서 절을 하거나 아이의 손을 이끌어 그녀의 옷자락을 만지게 한다. 그녀의 축복이 아이에게 가 닿기를 소망하면서. 이것은 아티스트 김미루가 만든 동영상의 장면이다. 그녀는 인도의 북부 비카네르에 있는 까르니마따 쥐 사원에 가서 쥐들과 함께 우유를 마시는 퍼포먼스를 했다. 사원의 뜰은 고요하고 쥐들과 함께 우유를 마시고 쥐들의 사랑을 받는 그녀의 모습은 평화롭다. 쥐들을 무서워하거나 더럽다고 피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퍼포먼스가 꽤나 의아하고 기이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김미루가 어떤 아티스트인지 조금이라도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 앞에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미소를 띨 수도 있으리라. 자신의 웹 홈페이지에서 김미루는 ‘쥐를 사랑하고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실제로 쥐들은 그녀의 아티스트 경력에 중요한 키워드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사랑하고 산에 오르기를 좋아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키우며 돌본 동물이 쥐고, 쥐를 찾아 나선 걸음이 그녀를 지하 터널로 이끌었다. 그녀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언더그라운드 아트’ 작업은 그러니까 쥐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07년 Ted talk에서 자신의 언더그라운드 사진작업을 소개할 때 김미루는 쥐와의 이 인연을 가감 없이 전한다. 검은색 티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서 지하도시 탐험 여정을 설명하는 그녀는 매우 수줍어 한다. 다른 Ted 연사들과는 달리 그녀는 무대 위에서 큰 동작을 만들지도 드라마틱한 목소리 연기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거의 하나의 점처럼 제자리에 서서 가끔 비칠 듯 말 듯 미소를 띠며 일정한 톤으로 지하도시 탐험과 그 결과로 남겨진 사진들을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은 약간 의외라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수줍음을 타는 여자가 <Naked City Spleen>과 <The Pig That Therefore I Am> 처럼 ‘대담한’ 시리즈를 기획하고 수행했단 말인가. 그녀의 작업은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부드럽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말하는 방식, 모습을 직접 경험하고 나면 그녀의 사진이 전하는 느낌들은 더 깊어지고 순전해진다.
김미루는 모든 동물에게 친화력을 느낀다. 그녀에게는 사람 또한 하나의 동물 종(animal species)일 뿐이다. 그녀가 쥐를 그리거나 찍을 때, 혹은 돼지우리에 들어가 돼지와 함께 피부를 맞대고 엎드리거나 기면서 감정을 나눌 때, 쥐나 돼지는 ‘인간의 무엇’을 위한 은유가 아니다. 동물을 은유로 사용한 역사는 이제 너무나 오래되어 동물이 식구의 일종이었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과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은 사람들 뇌리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다. 동물에 대한 그녀의 특별한 ‘친화력’은 아티스트가 되기 전에 그녀가 의과대학 학생이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동물에 대해 그 어떤 ‘인본주의적’ 비유 관습이나 유사 생태주의적 감정을 갖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근원적이고 명료하다. 돼지에 대한 그녀의 감수성은 돼지 새끼를 해부하면서 얻은 지식, 즉 생명체로서 돼지가 인간과 매우 유사한 기관조직을 지녔다는 깨달음으로 더욱 깊어졌지만 그녀에게 인간이나 쥐, 돼지나 새, 꿀벌, 낙타 등은 모두 등가적인 가치를 지니는 종이다. 모두 동물세계의 서로 다른 구성원이다. 쥐와 돼지가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둘 다 인간들이 ‘더럽고 비천하다’고 낙인찍으며 가장 심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회피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녀는 쥐나 돼지를 ‘더럽고 비천함’ 혹은 ‘더럽고 비천한 존재로 내몰리는 사람들’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김미루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내게  그녀의 이미지 작업에 깃든 매혹이나 영감의 많은 부분은 여기에 기인한다. 그녀의 지하세계 탐험 작업에서 쥐는 인간과 똑같이, 어쩌면 인간보다 더 오래, 인간보다 더 깊숙이 도심에 깃들어 살고 있는 도시의 거주민이다. 지상세계에서 상처받다 지하에 내려와 비로소 피난처를 발견한 노숙인이 그렇듯, 카타콤에 잠들어 있는 1300년 된 해골이 그렇듯, 폐허가 된 설탕공장 뜰에 수많은 발자국을 남기는 들개나 토끼들이 그렇듯, 하수구나 지하터널에 기거하는 쥐들도, 살아있는 유기체(a living organism)인 저 도시의 거주민이다. 해부학에서 훈련된 감각으로 도시의 피부 아래가, 도시의 보이지 않은 부분이, 도시의 무의식이 궁금한 그녀에게 쥐는 영리하고 친절한 동반자다. 인류의 역사는 무수히 많은 은유의 전략이나 전술에 기대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고 수정한 예들을 알고 있다. 근대 후기에 서구 남성들은 (타이티로 간 고갱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듯이) 비서구 여성들에게서 덜 오염되고 덜 왜곡된, 그만큼 더 원초적이고 순결한 자아의 은유를 찾았고, 탈근대에 동일성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타자성의 철학을 세우고자 했던 철학가들은 (니체나 데리다, 레비나스가 그랬듯이) 여성을 바로 그러한 비동일적인 타자성의 은유로 재발견했다. 마찬가지로 동물은 인간이 가장 빈번하게 은유로 불러내는 대상이다. 급속도로 추진된 산업화의 과정에서 인간들은 동물들에게서 태곳적 인간의 원초적 동물성의 모습을 찾곤 했던 것이다. 언어적 존재인 인간의 삶에서 은유는 필연적이다. 모든 은유가 대상을 타자화한다고 볼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거의 모든 경우에 은유는 궁극적으로 자아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혹은 반성적 자아의 보존을 위해 대상을 은밀하게 소비하고 타자화한다. <The Pig That Therefore I Am> 에서 벗은 몸으로 돼지와 함께 있는 그녀의 이미지들이 품은 아름다움이나 선한 충격은 김미루가 돼지에게, 돼지가 김미루에게 은유가 아닌 냄새와 촉감이 있는 몸으로 현전하기 때문이다. 철학가 김상봉의 말을 빌리자면 ‘서로-주체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나 꿈꾸는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를 정동적으로(affective) 감응케 하는 미학적 실천은 이토록 감응이 불가능해진 맹목적 자본합리성과 우울한 시물라크르의 시대에 윤리적 열림의 단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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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그리고 사막
도시 탐험가들에게 버려진 장소,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고 시간 속에서 저 홀로 스러져가고 황폐해져가는 장소는 놀이터고 명상과 정화의 사원이다. 사랑을 잃었을 때나 고립감이 심할 때, 소외와 우울로 힘들 때, 버려진 장소(deserted place)는 훌륭한 피난처가 되어준다고 김미루는 말한다. 도시 탐험 사진작업자들은 버려진 채 남겨진 장소를 그 장소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기적인 미적 추구를 위해 착취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화려한 성공과 미래를 약속했던, 그래서 한때는 사람들로 들끓었던 디트로이트 공장들에서처럼 폐허가 된 장소들은 도시의 이루지 못한 꿈의 역사를 품고 있다. 수많은 사람의 희망과 꿈과 좌절이 부서져 나뒹구는 파편들처럼 그곳을 떠돈다. 그래서 폐허 자체의 아름다움에 몰입하는 대신 이야기를 함께 담고자 하는 시도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곳을 채웠던, 여전히 유령처럼 그곳을 감돌고 있는 집단적 소망과 심리적 애착의 숨결을 되살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녀는 버려진 장소를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이것이 진정한 기록이 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그 장소 안에서 장소의 일부가 되기로 한다. 그녀가 <Naked City Spleen>과 <The Pig That Therefore I Am> 사진작업을 하면서 옷을 벗은 까닭은 두 가지다. 옷을 벗음으로써 특정 개별성을 지시하는 문화적 요소를 지우고 보다 보편적인 자연의 상태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리고 관객들이 몸으로 그 공간을 체험할 수 있도록. 벗은 몸은 이미지와 관람객 사이에 촉감적 매개를 가능케 하는  일종의 연결고리 혹은 통로가 된다. 비주얼 포인트로서의 역할도 중요하다.
폐허의 경우 이 두 가지 요인은 폐허 자체의 이중적 의미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한때 기술문명과 역사의 발전, 소비문화의 화려함을 뽐내던 1900년대 초기의 공장들은 너무나 빨리 자연으로 되돌아가버린다. 김미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자연이 먹어버린다.” 거대한 구조물들이 그렇게 쉽게 금방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사람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동안 버려진 것들과 함께하다보니 새것이 얼마나 금방 낡은 것이 될 수 있는지 실감하겠더군요. 집, 사무실, 쇼핑몰, 교회, 등등…다들 금방 낡아버리죠. 변치 않는 것에 대한 우리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지 또 인간이 세월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절감했어요.”
이러한 깨달음은 그녀에게 숭고에 대한 느낌을 일깨웠다. 그러나 그녀가 폐허나 지하세계를 탐험하며 깨달은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그 폐허 같은 공간들이 도시의 잊혀진 기억을 참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 터널이 그렇듯이 한때 도시의 번영을 위해서 지어졌던 구조물들이 지금은 도시민들의 일상으로부터 밀려나 완전히 잊혀져버린 추방자들을 위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는 것 또한 그녀에게는 중요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그 장소에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그때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할 책임과, 그러한 장소를 안식처로 삼고 있는 추방자들의 삶을 기억할 책임은 하나로 겹쳐지며 그녀 사진의 중요한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구성한다. 그녀의 TED 연설에 달린 댓글 중 하나가 말하듯이 옷을 벗은 그녀가 없다면 그 사진들은 단지 아름답고 멜랑콜리한 폐허의 사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옷을 벗은 그녀가 있기에 그 사진들은 초현실주의적 매직의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 도시가 꾸었던 꿈이 어른거리고, 도시의 무의식에서 들려오는 어떤 웅얼거림이 함께 울린다. 벗은 도시의 우울. 근대 초기에 보들레르가 통렬히 감지하고 시로 표현했던 대도시의 우울은 이렇게 21세기 김미루의 폐허 사진에서 다시 한 번 멜랑콜리의 아름다움을 내뿜는다. 보들레르의 시 <백조>는 그녀의 사진에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으리라. 일상의 산보 길에서 새로 생겨난 카루젤 광장을 맞닥뜨린 보들레르는 예전에 이곳에 있었던 백조를 떠올린다. 그의 상상력 속에서 이 백조는 다시 불행한 운명에 처하게 될 앙드로마크를, 앙드로마크는 다시 유배당한 사람들, 패배자들,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비애를 삼키는 사람들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숭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김미루는 버려진 장소, 폐허에 가서 숭고함을 느꼈다고 했다. 으스스해서 두렵고 무서우면서도 참을 수 없이 끌리는 매혹을 느끼면서, 그토록 찬란하고 거대했던 구조물이 그토록 빨리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매우 작게 느껴졌다고 했다. 초월적인 것, 고양된 것, 형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는 숭고함은 재현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비판에서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칸트에게서 불가해한 자연의 무한함과 대결하는 고독한 주체의 원형적인 모습을 가리켰던 숭고함은 포스트모던에 와서는 지배적인 담론, 관습, 의미체계 너머에 존재하는 재현할 수 없는 것의 지표로서 많은 이론가들을 매료시켰다. 김미루의 경우에 그러나 숭고함을 드러내는 자아는 위축된 보잘 것 없는 자아가 아니라 ‘자아 자체’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 ‘범속한 몰아’, ‘범속한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한 자아다. 그녀의 경우 자아는 대결하지 않는다. 형언할 수 없는 것과 그것의 사진적 재현에서 오히려 초월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벗은 몸과 함께 몸적으로 구체화된다. 벗은 몸이 ‘덜’ 사적이고 ‘더’ 보편적이기에 옷을 벗었다는 그녀의 말은 탁월하게 이 부분을 설명해주고 있다. 여기서 자아나 주체는 물러선다. 왜냐하면 그녀는 인간 역시 단지 하나의 동물 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숭고함이 어떤 ‘장소’로, ‘지상세계’의 억압에서 오히려 벗어난 ‘지하생활자’들의 평화로운 공존의 장소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 중요하다. 초월적인 숭고한 힘과 고독한 대결을 벌이는 자아의 모습도 물리치고, 또한 친숙하고 틀에 박힌 기존의 관습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 숭고함의 정취를 표현하는 그녀만의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숭고함에 대한 그녀의 느낌은 자아를 내려놓고, 다시 말해 기꺼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무위의 평화와 해방에 도달한다. 평화를 찾아 사막으로 간 낙타처럼.
폐허를 찾아, 사막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나는 미루의 여정은 도피도 아니고 이전 시대로의 보수주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후퇴도 아니며, 오히려 현존하는 사회질서를 모방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동일성의 세계에서 유사성의 세계로 옮겨감으로써 평화로운 위반을 실천하는 그녀만의 새로운 미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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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루는 1981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톤햄에서 태어났다. 컬럼비아대학교 프랑스어 낭만주의 문학과와 프랫 인스티튜트 회화과를 졸업했다. 2008년 미국 제스타크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Naked City Spleen>을 시작으로 8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