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MICHIGAN & NEW YORK

 

Nabil Mousa

American Landscape: An Exploration of Art & Humanity


Trigger: Gender as a Tool and a Weapon


문화계를 강타한 성추문 사건의 본질은 불평등한 성의식과 그로인해 빚어진 권력의 남용이 아닐까? 성의식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사회학적 의미로 일찌감치 바뀌었으나 그것이 전통적 가치관과 윤리관이 견고한 집합체인 사회에서 용인되기란 난망한 현실이다. 그래서 미술관이 먼저 움직였다. 게이아티스트 나빌 무사(Nabil Mousa)의 개인전(2017.11.17~4.8, 아랍아메리칸 국립미술관)과〈Trigger전〉(2017.9.27.~1.21, New Museum)은 성소수자 작가와 격렬한 젠더 논쟁의 지금을 보여준다. 다양성과 차이의 존중은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수 조건이다. 미술이 사회변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 두 전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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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빌 무사(Nabil Mousa) 〈미국의 지평(American Landscape) #22〉 캔버스에 유채 120×152.5cm Photo courtesy of Arab American Nation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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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미술의 메인 스트림에 들어선 L.G.B.T.Q. 작가들

서상숙 |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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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는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연쇄 고발운동인 “미 투(Me Too, 나에게도 일어났다)” 운동이 최근에는 성소수자도 동참, ‘그에게도 일어났다’는 뜻의 “힘 투 (Him Too)”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온라인 사전인 메리엄 웹스터는 지난해 가장 많이 검색된 ‘올해의 단어’가 “페미니즘”이라고 발표했다. 그 배경에 미투운동과 더불어 성소수자와 여성 그리고 이민자들의 인권 보장을 약속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선전으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무너진 데 대한 실망과 분노가 섞여 있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정부는 남성/백인/ 시스젠더(cisgender: 사회적 성과 생물학적 성이 일치하는 사람들) 우월주의가 확연히 드러나는 정책을 펴고 있다.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처음 쓰인 것은 19세기였다. 21세기에 들어선 이제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사회적 성, 즉 “젠더(gender)”에 대한 이슈가 대두되었다. L.G.B.T.Q.(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er) 등 모든 젠더에 대한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페니미즘 논쟁이 한창이던 1970년대, 작가 주디 시카고는 여성의 생식기를 도자기로 형상화한 <디너 파티>를 발표해 성차별을 논의했다. 이 작품은 현재 브루클린 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 20년이 되어가는 요즘 젠더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이 격동의 시대에 미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최근 미국의 메인 스트림 미술관에서는 L.G.B.T.Q.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그들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스미소니언 계열 미술관 중 하나인 아랍 아메리칸 국립미술관(Arab American National Museum, Michigan, AANM)에서 4월 8일까지 열리는 아랍계 게이 작가 나빌 무사(Nabil Mousa)의 <미국의 지평: 미술과 인간성을 탐구함(American Landscape: An Exploration of Art & Humanity)전>, 그리고 1월에 막을 내린 뉴뮤지엄의 <방아쇠: 도구와 무기로서의 젠더(Trigger: Gender as a Tool and a Weapon)전>이 그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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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빌 무사 〈미국의 지평(American Landscape) #45〉 캔버스에 유채 162.5×135cm Photo courtesy of Arab American National Museum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를 근거로 활동하는 나빌 무사는 시리아에서 태어나 1978년 기독교인인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온 작가로 2000년 아랍인으로서는 물론 작가로서도 드물게 커밍아웃했다. 무사는 게이로서, 그것도 아랍인 게이로서 미국에서 살아가며 겪은 삶을 담은 페인팅 시리즈 <미국의 지평>(2008~2012)을 전시하고 있다. AANM이 기획한 첫 게이작가전이다. 전시장소가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미시간 주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 타임스 및 아트 인 아메리카 등에 크게 소개되었다.

이 시리즈는 미국 국기를 배경으로 삼아 그 위에 경계 및 위험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낡은 청바지, 남녀 화장실 표지, 임산부, 시리아의 심벌 등이 거친 붓질로 그려져 있다. 시리즈 #1의 붉은 스트라이프는 손에 손을 잡고 있는 남자 화장실 표지로 채워져 있고 왼쪽 상단의 사각형 안은 미국의 주를 뜻하는 별들 대신 인권운동의 상징이자 수학에서 같은 값을 뜻하는 노란색 등호(=)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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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콸스(Christina Quarles 〈아름다운 애도(Beautiful Mourning)〉 캔버스에 아크릴 121.9×152.4cm 2017 Courtesy the artist and David Castillo Gallery Collection David Castillo, Miami

뉴뮤지엄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올 1월까지 <방아쇠: 무기와 도구로서의 젠더(Trigger: Gender as a Tool and a Weapon)전>을 열어 큰 관심을 모았다. L.G..B.T.Q.I. 즉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트랜스젠더(Transgender), 양성애자(Bisexual), 퀴어(Queer), 인터섹스(Intersex) 작가 및 컬렉티브들의 지난 10년간 작업을 모았다.

뉴뮤지엄이 설립 40주년을 맞아 기획한 <트리거전>은 미술계의 가장 새로운 흐름을 최전선에서 포착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뉴뮤지엄의 전통을 이은 전시다. 40명의 참여작가 연령은 25세부터 60대 중반까지 세대를 넘나든다. 야심만만한 이 전시는 권위 있는 미술기관에서 기획하고 전시함으로써 미술계에서 그들의 존재 및 능력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성(性)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넓혀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반화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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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린 보드리/리나티 로렌즈(Pauline Boudry/Renate Lorenz, 2007년부터 협업)
〈독성(Toxic)〉 Super 16mm film transferred to HD, 13 min. 2012 Courtesy the artists, Ellen de Bruijne Projects, and Galerie Marcelle Alix

그림, 조각, 비디오, 설치, 사진, 퍼포먼스, 공예를 포함한 다양한 장르에 걸쳐 남성 대 여성이라는 기존의 두 가지 성 체계는 물론 나아가 성의 구별 자체를 깨트리려는 언-젠더링(ungendering) 혹은 유동적 성(gender-fluid)을 표방하는 작업들이 미술관 3개 층에 걸쳐 전시되었다.

뉴뮤지엄은 1982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동성애 작가들의 서베이전 <연장된 감성들: 현대미술에서 동성애자들의 존재(Extended Sensibilities: Homosexual Presence in Contemporary)>를 기획, 전시했고 이어 <차이점: 표상과 성(Difference: On Representation and Sexuality) 1984-85>, <홈 비디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HOME VIDEO: Where We Are Now) 1986-87,>, <나쁜 여자들(Bad Girls) 1994> 등 성소수자들의 작업을 소개해왔다.

이번 전시의 새로운 점은 게이와 레즈비언은 물론 트랜스젠더와 퀴어, 그리고 인터섹스까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남성(He) 여성 (She)의 이중체계를 넘어서 최근 “그들(They)”로 불리길 바라는 “유동적 젠더(Gender- Fluid)”의 대두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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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라라 셀프(Tschabalala Self)〈(사자나 말의) 갈기(Mane)〉 캔버스에 린넨, 유채, 파스텔 2016 Lewben Art Foundation Collection. Courtesy the artist; Pilar Corrias, London; T293, Naples and Rome; and Thierry Goldberg, New York. Special thanks to Pilar Corrias and T293

27세의 흑인작가 샤발라라 셀프(Tschabalala Self, 1990~)의 페인팅은 여러 개로 자른 조각들을 바느질로 이어붙인 일종의 콜라주 혹은 아상블라주다. 화면에 나타난 형상은 그만의 아바타로 여자와 남자 혹은 성별이 불가능한 인물들이 서로 엉켜 있다..

네이랜드 블레이크(Nayland Blake, 1960~)는 전시 중 ‘노멘(Gnomen)’이라 이름 붙인 곰과 들소의 하이브리드 의상을 입고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관객들과 소통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털이 많은 동물 의상을 이용한 롤플레이 <퍼르소 (Fursona)> 작업이다. 털의 부드러움이 주는 ‘포함’ ‘돌봄’ ‘측은지심’ 등을 진하게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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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  세이블 엘리스 스미스(Sable Elyse Smith)〈풍경III(Landscape III)〉 2017   || (가운데) 아니카 이(Anicka Yi) 〈한사람을 위한 테이블(슬픈 카페에서)(Table for One(at the sad café))〉 2011 || (오른쪽) 〈나는 이제까지 내가 만난 모든 여성이다(I’m Every Woman I Ever Met)〉2011
“Trigger: Gender as a Tool and a Weapon,” 2017. Exhibition View: New Museum. Photo: Maris Hutchinson / EPW Studio

이번 전시에 초대된 유일한 한국인이자 지난해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휴고 보스상 수상전으로 관심을 모은 아니카 이(Anicka Yi, 1971~)의 2011년작 두 작품은 침묵 속에서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투병 비닐에 진공 봉인된 진주목걸이를 역시 투명한 플래스틱의자에 앉히듯 걸쳐 놓은 <한 사람을 위한 테이블(슬픈 카페에서)>, 벽에 반달 모양의 플렉시 글라스를 설치하고 껍질땅콩과 진주 목걸이를 진공 포장해 길게 늘어뜨린 “나는 이제까지 내가 만난 모든 여성이다”는 고정된 사회관념 속에 갇힌 여성성의 숨 막힘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 작업들은 2010년 시스젠더 규범성이 포함된 군사기밀을 위키리크스에 유출한 트랜스젠더 군인 첼시 매닝 스캔들에 반응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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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 천작업) 조시 파우트(Josh Faught) 〈마브 디케이드(The Mauve Decade)〉2014 || (사진 위) 시몬 리(Simone Leigh) 〈영양교환(trophallaxis)〉 2012 || (사진 맨 오른쪽) 시몬 리 〈컵보드IV(Cupboard IV) 〉 2015
“Trigger: Gender as a Tooland a Weapon,” 2017. Exhibition View: New Museum. Photo: Maris Hutchinson / EPWStudio

 

울리케 뮐러(Ulrike Mller, 1971~)의 작은 기하학적 추상들도 원색적인 이미지와 계속해서 움직이는 비디오의 소리가 섞인 전시장에서 무인도처럼 고요하다. 뮐러는 페니미스트 젠더퀴어 컬렉티브인 LTTR과 1970년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운동의 슬로건과 이미지를 찾아내는 협업 프로젝트 “허스토리 인벤토리(Herstory Inventory) 2012”등에 참여하고 있다.

많은 참가작이 게이들의 선정적인 이미지를 다루고 있고 순수미술로서의 작품 수준을 따지기에 앞서 너무나 절실한 작가 개개인의 메시지들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인 조앤나 버튼(Johanna Burton)은 전시도록 서문에서 “이 전시는 퀴어전도, 트랜스젠더전도 아니다. 이 같은 이슈에 대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성별의 불안정함과 성별을 통합, 혹은 몽땅 거부하는 방식을 포함하는 현상에 일종의 통로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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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ARTIST] 김세진

 
미디어 아티스트 김세진은 거대담론과 미시세계 사이를 오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심화 단계에 진입한 동시대 신자유주의 환경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개인의 내밀한 모습을 포착한다. 공공영역의 이면에 존재하는 엄중한 역사적 현실에 감추어진 개인의 일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있다. 그가 영상으로 포착한 이미지는 영화적 표현과 다큐멘터리의 객관적 시선이 혼합되어 있다. 독특한 영상언어와 스크리닝으로 자신이 주장하고자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김세진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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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Chronology about the bad blood)〉 싱글 채널 HD 비디오, 5.1 채널 서라운드 사운드, 12분 50초 2017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여성 도착하다〉에 출품된 작품과 작가 김세진 | 사진 : 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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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의 연대기〉, 불리거나 사라짐의 통로

이단지 | 독립 큐레이터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Chronology about the bad blood)〉 2017 스틸 컷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출발해 보자. 가방을 들고 길을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 저 멀리 명랑한 달빛이 잔잔한 바다의 파도를 비춘다. 카메라는 서서히 뒤로 빠진다. 배우의 모습 너머로 배경 스크린에 그려진 붉은 바다가, 마이크가, 촬영용 모니터가, 카메라 레일이 등장한다. 덕수궁미술관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의 실제 주인공이 1951년에 사망한(사망했다고 추정되는)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 ‘김명순’이라는 사실은 이 비디오를 김세진의 작업 중 가장 ‘영화’적인 것으로 만든다. (1896년 평양에서 출생한 김명순은 진명여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동경 국정여학교에서 1년 수학하고 귀국하여 숙명여학교에 편입, 1917년에 졸업하였다. 동경음악학교 재학 등의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951년 4월 일본 청산(아오야마) 뇌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설로 〈조모의 묘전에〉, 〈처녀의 가는 길〉, 〈꿈 묻는 날밤〉, 〈돌아다볼 때〉등 15편이 있다. 1925년 한성도서에서 출간한 창작집《생명의 과실》이 있다.)

(모든) 영화는 우리에게 재현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것이 어떤 시대이든 인물이든, 어디까지가 재현 가능한 것인지, 한계 지점에는 무엇이 있는지, 한계에 닿았을 때 드러나는 것, 혹은 한계를 통해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지, 혹은 그 곳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같은 질문들을 말이다. 더구나 영화가, ‘아직 우리에게 당도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어떠한가. ‘당도하지 않은’ 것은 비단 미래나 과거에 대한 상상일 뿐 아니라 알지 못하는 현재에 대한 기대를 포함한다. 사실 나에게 ‘움직이는 이미지’는 늘 -혹은 대부분의 동시대적 예술 경험이란 늘- 그런 것이다. 재생되는 순간부터 예측하지 못하는 다음 장면을 기다리는 응시의 연속이며 동시에, 채 종결되지 않은 과거의 순간을 다시 확인하려고 애쓰는 현재를 느끼는 일 말이다. 오늘의 글은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를 중심으로 김세진의 영화를 구성하는 대상과 (비)재현을 위한 영화라는 물질성에 대해 적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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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파크(Victoria Park)〉 2 채널 비디오, 3분 53초 2008

높은 집세에 지낼 곳이 없어 주말 낮 시간을 공원에서 보내는 홍콩의 어린 식모(〈빅토리아 파크_ 2006〉), 좁은 의자에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징수원과 건물 경비원(〈야간 근로자_ 2009〉), 잘 정리된 미술관의 한 켠에서 공간을 응시한 채 서있는 전시장 지킴이(〈도시 은둔자_ 2016〉)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김세진은 인물에 기대어 어떤 시간들을 담아낸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들. ‘제7의 인간’에서 존 버거가 이야기하듯,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양육되지도 않고 나이 먹지도 않으며 지치지도, 죽지도 않는다. 실존에 대한 김세진의 다큐멘터리들은 시스템의 선택과 망각된 익명, 그 사이를 부유하는 실존에 주목함으로써 근대 이후 ‘개인’이라는 개념이 순간적이고 미시적인 ‘상태’로 전환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미술관에서 찍은 〈도시 은둔자〉에서 잠시 스쳐간 사물들을 떠올려본다. 세제통과 걸레처럼 창고 안의 어딘가로 들어가 있어야만 하는 건조한 대상들 말이다.

이제는 사라진 한 소설가, 어림잡아 1967년 전에 작고한(1951년에 사망했다고 추정되는)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사라진 망자를 호명하는 영화들을 상기해 볼 때 흔히 배우의 모습이나 목소리는 인물의 실재성을 보강해줄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기실 이러한 방식은 허구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뿐이다. 영화는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보는 동안에도 지워지고 사라진다. 〈나쁜 피의 연대기〉는 (그러한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데, 왜냐하면 실존했던 소설가에 대한 재현의 조건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반대로) 부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 또는 영화는 단지 재현된 것만이 아니라 재현 가능성 자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비디오의 주인공 김명순은 근대 시기 기생의 딸로, 외군 장교에게 강간당한 어린 여학생으로, 여성 소설가로, 자유연애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으로 인해, 탄생과 사망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추방당한 여성이다. 김세진은 오직 스스로가 남긴 글 안에서만 살아 있는 소설가를 위해 배우의 연기와 화면의 쇼트, 서사를 암시하는 듯한 오리지널 사운드, 내레이션 등, 지극히 영화적인 문법으로 인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영화는 현실을 보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허구임을 영.화.화하는 것이다. 작가의 카메라는 존재의 은밀함을 파괴하는 일이며 대상이 망각될 권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패러독스 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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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근로자(Night Worker)〉 2 채널 HD 비디오, 6분 58초 2009

뒷모습과 목소리

나는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를 두 번 봤는데, 첫 번째는 덕수궁미술관의 전시장에서 봤고 그다음 번은 작가에게받은 비디오 링크를 모니터에 띄워 놓고 헤드폰을 낀 채 봤다. 두 번의 경험 안에서 영화는 영상/비디오 트랙과 사운드/오디오 트랙, 두 개의 중심으로 확연히 분리되었다.

김세진은 〈밤을 위한 낮〉, 〈도시 은둔자〉 등 대부분 작업에서 대사나 내레이션 없이 정적과 공백의 흐름으로 서사를 만들어 왔다. 스크린은 하나의 화면을 반사하는 분할된 면들과 분절된 싱크로 흩어지며 관람자의 동선을 만들어낸다. 무빙 이미지, 편집, 프레임, 현장의 스크린 싱크 플레이, 공간의 조명설치 등으로 전달하던 ‘시각적 서사’에 비하면 이번 작업은 ‘낭독 영화’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청각적이다.

무엇이 ‘시각적 서사’를 청각적 서사로 이동하게 했을까. 소설가 김명순이 1951년에 죽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어딘가에 생존하여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한다는 가정하에서 시작된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는 그녀가 남긴 시, 소설, 희곡 그리고 에세이에서 발췌한문단들과 단어들로 지극히 개인적인 내적 욕망, 이상, 좌절, 외로움, 희망, 고립감에 대한 고백적 텍스트의 조각으로 구성된다. 라디오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오리지널 사운드, 김명순의 시를 낭독하는 목소리, 배우의 목소리, 주인공을 비난하는 남성들의 목소리, 숲에서 녹음된 필드 레코딩, 파운드 푸티지, 중창으로 얽혀드는 불협화의 목소리,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는 소리들은 일련의 추상적인 드로잉이 된다. 목소리의 떨림은 보이지 않는 인물을 성립시키는 듯한 암시가 된다. 조너선 스턴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시원〉에는 근대 축음기의 발명 목적 중에 하나가 ‘가족 구성원이 자기 목소리로 직접 대화, 회고담, 유언을 녹음하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즉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의 목소리를 언제든지 현재로 불러오는 능력, ‘사라진 것의 소환술’로 망자의 음성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녹음된) 목소리는 실존이면서 동시에 주술적인 존재 상태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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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은둔자(Urban Hermit)〉 2 채널 HD 비디오, 6분 25초 2016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의 첫 장면은 어린 범네와 특실이의 이별이다. 두 소녀는 손을 동그랗게 모아 입에 대고 이쪽과 저쪽으로 멀어져가는 서로를 향해 이름을 부르며 이별 인사를 나눈다. 영화의 시간은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니라, 타자에게 다가가는(혹은 떠나가는) 시간이자 실존을 향해가는 시간이 그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경험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서, 현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시간 위에서, 경험 속에서 고정되거나 공통적으로 붙들 수 없는 것, 즉 불리는 형식이거나 사라짐의 형식. 호명과 이별의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어쩌면 영화의 정의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다시 〈도시 은둔자〉의 장면을 기억해 본다. 유리창과 복도엔 티끌도 없다. 미술관의 곳곳을 조용히 걸어 다니며 걸레를 훔치던 미화원의 뒷모습, 김세진은 그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를 뒤로 감아 잠시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남겨둔다. 감각을 낚아채는 이미지는 인물의 뒷모습이다. 〈밤을 위한 낮〉, 들판에 서서 손에 든 핸드폰 불빛을 밝히던 소녀,〈잠자는 태양〉, 〈일시적 방문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뒷모습. 침묵의 순간이다. 김세진은 뒷모습에 대해 ‘익명성이 함축된 이미지’로 설명한다. 어느 곳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군중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장면은 우리에게 실존에 대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가방을 들고 길을 떠나는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의 여자. 이제 그 뒷모습들은 우리가 무엇을 보았는지 묻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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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세 진
1971년 출생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영상미디어과 석사, 영국 슬레이드 스쿨 오브 파인아트 석사를 졸업했다. 2005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이상사회〉를 시작으로 금호미술관, 브레인 팩토리, 미디어극장 아이공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제4회 다음작가상’(2005), ‘블름버그 뉴 컨템퍼리즈’(2011), ‘Henry Tonks Prize’(2011), ‘송은미술대상’(2017)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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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HT & ISSUE Gangwon International Biennale 2018

 
〈강원국제비엔날레 2018〉(강릉녹색도시체험센터 일원)이 2월 3일부터 3월 18일까지 강릉에서 열린다. 올해부터 명칭을 변경하고 국제 미술행사로 치러지는 〈강원국제비엔날레〉는 58명(팀) 작가의 작품 110여 점을 선보였다. 하나의 독보적 가치만으로는 세상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한 주제 ‘악의 사전(The Dictionary of Evil)’이 어떻게 전시장에 구현됐는지 확인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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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도&이사벨 아퀼리잔 (Alfredo&Isabel Aquilizan) 〈Bounds〉 트럭, 현지에서 구한 물품, 끈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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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 이유를 찾는 것이 당면과제가 된〈강원국제비엔날레〉

라파엘 고메스 바로스(Rafael Gómez Barros)〈House Taken〉 레진, 나무, 모래, 혼합재료 가변설치 2008~2017

국내에서 국제미술행사가 열릴 때마다 항상 듣는 말이 있다. “비엔날레의 홍수” “비엔날레의 과잉” 말의 온도에서 느껴지듯 결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적의 근원은 그간 국내에서 열린 숱한 비엔날레 행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실한 구성 등 여러 이유가 꼽히지만 미술이 시장의 시대로 접어든 마당에 비엔날레는 더 이상 동시대미술의 양상 혹은 미래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에 비엔날레는 그냥 열어야 하는 당위만 존재하는, 미술계 사교의 장이 되어 껍데기만 남았다는 극단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강원국제비엔날레〉는? 알려졌듯 〈강원국제비엔날레〉는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와 개최를 기념하여 열린 〈평창비엔날레〉를 확대한 국제규모의 미술 행사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비엔날레가 차고 넘치는 현실에서 〈강원국제비엔날레〉에 대해서도 당연히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비판을 최대한 유보해도〈강원국제비엔날레〉의 탄생 이유였던 평창올림픽 이후 행사의 존속이 걱정되는 상황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강릉행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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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더욱 밝은 내일을 위하여〉금속,  스티로폼 2018

이번 〈강원국제비엔날레〉 홍경한 예술총감독이 내세운 주제는 ‘악의 사전(The Dictionary of Evil)’이다. 일견 그로테스크한 세계의 일면을 내세우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전시장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서 보면 세계를 움직이고 구조화한 가치가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읽힌다. 즉 이른바 ‘선(善)’만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 그 대척점으로서 ‘악(惡)’은 세계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축이 된다는 점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홍 감독은 《월간미술》과의 인터뷰(2월호)에서 올림픽이라는 화려함의 이면에 숨은 위선의 양상을 설명하고 그 존재의 당위성을 설파하면서 그것이 바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라 강변했다.

그렇다면 이 주제가 과연 전시에 어떻게 발현되었을까? 이번 〈강원국제비엔날레〉는 알려진 바대로 주전시장인 강릉녹색도시체험센터와 인근에 세워진 가건물에서 진행되었다. 우선 주전시장인 체험센터 내부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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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치 〈가리왕, Tree Man, 孔雀夫人 Sings〉 영상, 설치 2018

양아치는 〈가리왕, Tree Man, 孔雀夫人 Sings〉를 통해 욕망이 발하는 악의 극한적 발현에 대해 이야기하고있다. 영상과 설치로 구성된 그의 전시장은 욕망이 그것의 출현을 매개하거나 도움을 주는 대상을 만나 등장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실제로 벌어진 각종 재난과 정치적 사태를 배경으로 해 현실에 대한 응시를 이끌어낸 작업도 선보였다. 영상 다큐멘터리 작가 故 박종필은 〈잠수사〉를 통해 전 국민적 트라우마를 야기한 세월호 이야기와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사를 담은 〈장애인이동권투쟁보고서-버스를 타자〉 등을 통해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침↑폼, 겐지 구보타, 에바&프랑코 마테스, 제이슨 웨이트가 참여한 큐레이터 그룹 Don’t Follow the Wind는 후쿠시마 지진 때 파괴된 원전에서 누출된 방사능으로 인해 폐쇄된 구역을 360도 영상으로 보여준다. ‘위기’에 대해 지속적으로 환기하고 있는 셈이다. 까맣게 벽면을 채운 대형 개미를 설치한 라파엘 고메스 바로스는 콜롬비아 내전으로 분리된 사회상을 보여준다. 두 개의 해골이 붙어있는 형태의 개미는 전 세계의 보편적 문제로 지적되는 이민자와 난민 문제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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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승욱〈안정화된 불안_8개의 이야기가 있는 무대〉(부분) 아연도금강, 알루미늄, 사운드, 혼합재료 400×400×440cm 2018 최수진이 퍼포먼스를 벌이는 광경

체험센터 뒤편의 공터에 컨테이너와 철제 구조물로 만든 임시 전시장은 의외의 효과를 자아냈다. 가공되지 않은 공간에 설치된 작업들은 체험센터의 말끔한 화이트 큐브와 극명한 대비를 이뤄, 다양한 가치가 공존한다는 점을 드러낸 전시주제에 맞추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프레스 오픈 당시 열린 심승욱의 〈안정화된 불안_8개의 이야기가 있는 무대〉를 배경으로 벌어진 최수진의 퍼포먼스와 신제현의 〈해피밀〉 퍼포먼스도 극명한 효과를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이 공간에는 이민자와 난민, 잊힌 산업세대로서 광부(鑛夫), 소통하기 힘든 비동일 언어권의 만남 등 인간의 보편적 문제부터 전쟁,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한 피해자의 현실, 공공미술의 문제 등 동시대미술이 그간 적극적으로 취해온 다양한 주제의 작업이 선보였다. 주제와 작업, 공간이 조화를 이뤄 전시기간이 끝나면 철거되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근래 보기 드물게 완성형의 전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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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영 〈타워〉 폐스피커, 사운드 2011〈Reflection〉(사진 앞 쇠사슬 작업) 2016

전시장을 나서며 이제 〈강원국제비엔날레〉가 숙고해야 할 과제는 개최의 지속여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 행사 개최의 이유였던 올림픽이 종료되었다. 미술행사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강릉에서 국제행사급의 미술행사를 지속할 이유를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전 〈평창비엔날레〉와 이번 비엔날레가 비평적으로, 운영 면에서 그렇게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고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냈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 행사에서 주제와 전시형태가 상호 부합하는 나열식으로 이뤄졌다는 점은 주효한 전략이었다고 보인다. 물론 작품의 배경과 그 세부적인 내용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전시 맥락에 엮을 수 없는 예외적인 사이트도 있었지만 전시의 맥락에 크게 무리가 없었다고 보인다. 이에 앞으로 〈강원국제비엔날레〉가 새로운 개최의 계기를 어떻게 마련하느냐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강릉 = 황석권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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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TOPIC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

정강자 50 YEARS OF WORK

작가 故정강자(1942~2017)의 첫 회고전이 아라리오갤러리 천안(1.31~5.6)과 서울(1.31~2.25)에서 열렸다. 작가가 2015년 위암 투병 중에 그린 작품제목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와 동명인 이번 전시에는 정강자의 대표작과 근작이 대거 출품되며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를 선보인다. 사회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감당해내며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는 퇴폐와 선정적 이미지로 인해 평생 체제 밖을 떠돌아야 했던 정강자의 예술가적 열정과 애환이 느껴지는 현장을 만나본다.

 


자화상 속의 신체

고동연 |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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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여인들(감비아)〉(사진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릭 160×200.5cm 1989 |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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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벗었다는데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어요. ‘누드’ 자체가 하나의 ‘오브제’로 쓰이고 있을 뿐인데…”라면서 속안(俗眼)을 탓한다.

비평가가 작업이 지닌 미학적인 측면에만 집중하고자 할 때 작가 개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방해가 되곤 한다. 작업 대신 작가의 ‘독특한’ 삶에만 독자의 관심이 집중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정강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1968년 세시봉 음악감상실에서 열린 〈투명풍선과 누드〉에서 팬티만을 입은 채 가슴 부위에 투명풍선을 달고 터뜨리는 행위예술의 주인공이었던 그녀의 ‘스타성’은 미술계뿐 아니라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진 것 역시 작가 개인의 신체 이미지였다. 국내 여성작가들이 자화상을 제작하는 일은 흔히 있지만, 자신의 신체를 중점적이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인 맥락에서 활용하거나 재현한 경우는 흔치 않다. 전시된 작가의 유품 사진들 중에 관광지 유적 앞에서 찍은 모습은 자화상과 신기할 정도로 일치한다. 특히 1970년대 초 명동 거리의 중심을 활보하는 여성으로부터 1990년대 작업복 차림의 여성,2000년대 들어서 간략화된 자연추상과 여성의 몸을 중첩시킨 최근 풍경화에 이르기까지 정강자는 행동하는 자신(여성)의 신체를 전면에 내세운다. 1960년대 말 이젤 앞에 놓인 자화상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나 1990년대 이후 그녀의 거대한 자화상들이 필자의 이목을 끈 것도 이 때문이다.

정강자는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 참여하면서 ‘아방가르드 여성 1세대’로 불려왔다. 1960년대 국내에 오브제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국내 미술계에서도 순수미술의 지위에 대한 철학적인 논쟁이 제기되면서 미술계의 권력구조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들이 전개되었다. ‘무동인’, ‘신전’, ‘오리진’ 등의 소그룹이 벌인 전시나 해프닝은 작업의 재료나 형태가 비물질적이거나 완결된 형태를 띠지 않았고, 내용에서도 〈한강변의 타살〉(1968),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1970)은 1972년 유신체제로 향해가는 억압적인 사회 현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풍자하였다. 정강자는 〈투명풍선과 누드〉등의 행위예술 이벤트를 통하여 남성 멤버들 위주로 조직된 소그룹 운동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동시에 보수적인 성문화에 과감하게 맞섰다. 그를 한국 여성미술의 선구자로 언급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1세대 여성 실험예술가로 분류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번 전시를 위해 다시 제작된 〈억누르다〉(1969)는 정강자의 여성주의적인 관점을 암시하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업이다. 엄청난 무게의 쇠 파이프가 대형 목화솜을 누른다. 쇠 파이프는 무거워 보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솜과 밀착되어 있지 않기에 위치를 변경하거나 제거할 수 있다. 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쇠 파이프가 상징하는 사회적 억압을 극복해보려는 작가의 ‘의지’를 짐작게 한다. 뿐만 아니라 설치작업〈키스미〉(1967)는 동료작가 심선희의 〈미니1〉(1967)과 함께 대중문화 친화적이었던 젊은 세대 여성작가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전후 한국 화단을 대표한 여성작가 천경자가 꿈의 이미지나 뱀과 같이 문학적이고 상징적인 소재를 가지고 순종적인 여성상을 거부했다면,〈키스미〉에서 여성의 성적 해방은 립스틱이나 선글라스와 같은 대중소비문화의 파편을 통해서 구현되었다.

물론 1960년대 말부터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대중소비문화를 성적 해방과 직결하는 부분은 논쟁의 소지가 있다. 대중문화의 편린을 사용해서 보수적인  유교문화에 제동을 걸고자 한 정강자의 시도는 군부독재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서구 대중문화를 활용해서 민중이나 대학생, 지식인들의 사회비판적인 관심을 분산시켜온 역사에 비추어 보아 비판받을 만하다. 여성의 성을 자발적으로 대상화한 ‘키스미’라는 문구도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스미〉가 1960년대 말 남성 위주의 성적 관념이나 순수예술에 대한 젊은 여성작가의 솔직하고 저돌적인 발언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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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작가의 자화상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청바지 162×130cm 1992 © Estate of JUNG Kangja. Courtesy ARARIO GALLERY

1974년 한국을 떠난 정강자는 이후 몇 차례 개인전을 갖기는 했으나 국내에서 최근 자화상을 포함해서 그녀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이에 작가가 타계하고 처음으로 열린 〈정강자: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전〉에서 한복 변형 시리즈, 동남아시아의 바틱 기법을 사용한 2차원 작업, 암투병기에 제작된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선보였다. 

그런데 최근 작업들에서 필자의 이목을 끈 것은 역시 신체가 강조된 자화상이었다. 〈자화상〉(1992)에서 작가는 푸른 청바지를 입고 연장에 해당하는 붓을 들고 있고 1996년 자화상에서는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입은 작가가 팔레트를 옆에 두고 서있다. 이국적인 풍경이나 모티프들 속에 위치한 자화상은 타문화를 탐구하고 해석해가는 화가의 적극성을 암시한다. 여기서 팔레트와 붓은 창조의 원천이나 도구로서 남성작가들의 자화상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소재이다. 재스퍼 존스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마초적인 창조적(성적) 에너지를 풍자하고자 붓을 거꾸로 붓통에 꽂아놓은 모습을 브론즈로 주조한 바 있다. 따라서 거대한 팔레트 옆에 서있는 정강자의 자화상은 여성 작가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통상적인 젠더 구분에 도전장을 내민다. 또한 살결이 검은 남태평양의 원주민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한 모습은 일찍이 서구권의 남성작가들이 비서구권의 문화를 대상화해온 관행을 꼬집는다고도 볼 수 있다.

정강자의 자화상은 철저하게 여성의 신체를 타자화하는 방식으로부터도 비껴나 있다. 말년 자화상에서 여성의 신체에는 수술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캔버스 밖에 위치한 여성은 자신의 모습을 측은하다는 듯이 손을 뻗어서 쓰다듬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작가는 최후까지 자신이 그림 속 대상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림 안과 밖,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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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자의 행동하는 몸으로부터 배우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진행된 전시 전경

결론적으로 정강자에게 몸은 직접 경험하고 행동하는 인간 실존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단 하루를 더 살더라도 자신의 열망을 숨김없이 표현해야 한다’는 작가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1960년대 말 행위예술 분야에 적극적으로 몸을 던진 것처럼 작가는 외국으로 이주한 후에도 이국적인 풍경의 중앙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그 부분이 되고자 애썼다. 덕분에 필자는 1960년대 말〈투명풍선과 누드〉에서 그가 보여준 저돌적인 작가의 자의식과 존재감을 최근 자화상들과도 쉽게 연관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강자의 신체 이미지를 통하여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갖고 있는 위상에 대하여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성의 해방을 부르짖은 지 5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여성의 몸은 공공의 장소에서 기이하고 불편한 존재이며, 최근 우리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이 제기하는바 남성의 욕망을 ‘본의 아니게’ 자극한 여성의 성은 처단되어야 할 대상이다. 정강자의 파격적인 용기가 다시금 필요한 때다. ● 고동연 |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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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HT & ISSUE 화성에서 온 메세지

사라 다허/마르쿠츠 베를리 (사진 앞) 소변, 씨앗, 인명 식물 키우기 세트, 유리시험관 가변크기 2016

사라 다허/마르쿠츠 베를리 <Aquaforming, Mars>(사진 앞) 소변, 씨앗, 인명 식물 키우기 세트, 유리시험관 가변크기 2016

1.23~5.30 한국화학연구원 디딤돌플라자

화성에서 쓴 지구 환경 보고서

그간 미술은 발전한 과학을 도구화하여 시각적 재현물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문법을 따르는 것이 주류였다. 따라서 과학의 발전은 미술에 있어 매체 다양화라는 응용의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술의 상상력은 과학적 진보의 저변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과학의 발전은 왜 그것을 이뤄야만 하는지 당위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화성에서 온 메시지전〉은 이러한 양상을 확인하고 예술적 상상력이 전지구적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단서를 제공하는 전시로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지구를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전시 타이틀이 암시하듯 지구의 문제를 지구에 발을 디디고 있는 상황에서 타개하는 것이 아닌, 지구 밖에서 지구를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영화화되면서 인기를 끈 앤디 위어(Andy Weir, 1972~)의 소설 《마션(Martian)》을 연상하게끔 한다. 전시 타이틀을 인지하고 전시를 본다면 제2의 생존장으로서 화성의 가능성에 대해 참여 작가들이 화학전공자들과 협업하며 벌인 상상력 퍼레이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참여작가는 7명(팀)으로 미국의 생태과학예술가인 아비바 라마니(Aviva Rahmani), 화학예술가 서일 사프렌(Cheryl Safren), 스위스와 브라질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마르쿠츠 베를리(Markuz Wernli) / 사라 다허(Ssrah Daher)팀, 인공적 화학물을 이용해 작업하는 길현, 탄소를 주제로 게임을 작품으로 선보인 안가영, 사막화에 반대하는 작품을 선보인 김지수, 그리고 생체활동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한 박형준 등이다. 이들은 전시장이 화성에 구축된 것을 전제로 작업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마르쿠츠 베를리/사라 다허의 작품은 소변을 발효시켜 물의 존재가 요원한 화성에서 식물을 재배할 수 있는 팁을 제시한다. 마치 과학실험실을 연상하게끔 하는 연출 같지만, 이 작업은 실제 기증받은 소변을 재료로 민들레나 허브 등을 발아시켜 키워낸다. 이런 방식은 박형준의 작업에서도 보이는데, 이산화탄소 얼음, 즉 드라이아이스를 고순도로 뽑아내는 화학실험을 방불케 한다. 김지수는 화성에 이끼를 키워 산소를 만든다는 영화 〈토탈리콜〉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 작업을 선보였다.

전시를 기획한 유현주 큐레이터가 이 전시에서 주목한 요소는 바로 ‘탄소(炭素)’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기본적 존재 단위이자, 인류의 생존에 꼭 필요한 화석원료의 구성물질이고 현재 지구에 가장 큰 위험을 가하는 이산화탄소 등을 구성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인간 역시 대단히 복잡 미묘하게 진화한, 탄소와 물을 기초로 하는 화학복합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시는 과학적이고 지리적인 지식을 동원하기도 하고, 탄소와 이산화탄소, 요소(urea), 구리와 화학복합물의 페인팅 및 바이오화학적인 실험 등 화학 재료들을 사용해 화학을 예술의 언어로 전환하고자 애쓴 예술가들의 작업을 보여줍니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듯하다!’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화성, 그곳은 지구 생명체가 살아남기엔 척박한 환경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이런 작가들의 제안이라면 화성에서도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으로 그 척박한 화성에서도 작가들이 제안한 방법으로 생존이 가능하다면, 당장 지구에서는 더 수월하게 행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전시는 화성에서 거주를 위한 상상적 방법을 제안함과 동시에 이 제안을 생존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지구에 당장 적용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대전 = 황석권 수석기자

THEME FEATURE 광주화루

위 이호억 〈수덕사 대웅전 곁에서〉 2017

명칭부터 논쟁거리인 ‘한국화’는 익숙한 우리 그림을 서구 회화와 비교할 목적으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화는 너무 익숙한 나머지 현재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은 아닐까? 이를 환기하는 한국화 공모전 〈광주화루〉(주최 광주은행)가 이목을 끌고 있다. 《월간미술》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선정된 10명의 한국화 작가를 소개한다. 이들의 한국화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은 한국화의 현주소와 가능성을 알리는 리트머스지일지도 모른다. 또한 한국화에 특화된 이 공모전을 계기로 공모에 대한 일반의 시선을 반성적으로 정리해본다. 작품들은 〈광주화루 10인의 작가전〉 (4.4~23,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ACC))에서 직접 만날 수 있다.

동시대 한국화의 젊은 보루
〈제1회 광주화루〉 공모전 선전작가 10인

구본아프로필구본아 Koo Bona
1976년 生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 미술학과(박사)
개인전_국내외 상하이, 타이베이 등
기획전 및 그룹전_
〈긍정의 아포리아〉(2015, 모스크바)
<자연으로 들어가다〉(2014, 오사카)
〈한중일 3인전〉(2011, 상하이)
바람난 미술공모(2014)
신진여성문화인상(2011)
송은미술대전(2005)

〈Physical Objects〉 한지 콜라주에 먹과 채색 100×280cm 2016

〈Physical Objects〉 한지 콜라주에 먹과 채색 100×280cm 2016

“폐허를 통해 미완성과 붕괴라는 이중성을 표현하며 일생동안 미완과 붕괴의 과정을 거치는 인간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벽이라는 물(物)을 화두로 삼아 내가 말하려 하는 물은 단순한 사물이나 물성으로서의 물이 아닌 유기적 생명체들의 연장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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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1

김원 Kim Won
1982년 生
전북대 예술대학 미술과, 동 대학원 졸업
개인전_서울, 전주 등 4회
기획전 및 그룹전_
〈서울디지털대학교 미술상 수상전〉(2017)
〈전북미술의 현장〉(2016)
〈시대정신과 동양회화의 표현의식〉(2014)
서울디지털대학교 미술상 우수상(2017)

 

 

〈 alcoholic 〉 한지에 먹과 아크릴 200×488cm 2016

〈 alcoholic 〉 한지에 먹과 아크릴 200×488cm 2016

“나는 반복되는 상황과 그 안에서 버티기 위한 몸부림의 일부가 아마도 불안감과 불확실성, 강박과 폭발, 흥분 등과 연관되어 중독이라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있다고 바라보았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순과 내면의 우울과 불안함, 공격성 등을 고리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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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묵티프박경묵 Park Kyongmug
1981년 生
동아대 회화과, 홍익대 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개인전_서울, 부산, 양산 8회
기획전 및 그룹전_
〈영호남 수묵화교류전〉(2016),
〈나는 무명작가다〉(2015),
〈열림 筆歌墨舞〉(2015)

 

 

 

〈경회루 무진(慶會樓 無盡)〉 종이에 먹과 채색 290×380cm 2011

〈경회루 무진(慶會樓 無盡)〉 종이에 먹과 채색 290×380cm 2011

“내게 예술이란 스스로를 찾아가는 놀이다. 놀이의 도구는 ‘붓’이자 그려진 자국은 캔버스에 담아진 마음의 흔적이며 사고된 작가의 감성이다. 작가는 실경을 근간으로 원경과 근경을 오가며 형상 속에 감춰진 뼈(骨)의 본질과 정서를 스며들게 하려 한다. 무념으로 바라본 자연에서 기존의 의미를 떠나 고정된 형태와 색상에 구애하지 않는 붓놀이로, 옛법을 배우되 머물지 않은 질서로 그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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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1

이지연 Lee Jiyun
1979년 生
홍익대 동양화과,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개인전_2007년부터 8회
기획전 및 그룹전_
〈한중 서예교류전〉(2016)
〈바람〉(2015)
〈여백 현대한국화-여성중심〉(2013)

 

 

 

〈바람에 물들다〉 한지에 수묵 97×236cm 2017

〈바람에 물들다〉 한지에 수묵 97×236cm 2017

“나는 자연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현상과 형상이 환경에 따라 유기적으로 무한히 변화하고 있으면서도, 소란스럽지 않다. 자연은 미추(美醜)와 선악(善惡)이 없다. 가치의 대소(大小)가 없다. 나에게는 구원의 세계이고, 화엄의 바다를 보는듯한 장엄함을 느낀다. 감정의 파도 속에서 헤매는 중에도 자연은 나를 숨 쉴 수 있게 한다. 자연의 변화는 나에게 현실에 대한 표상(表象)이면서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理想)에 대한 열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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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채영)이채영 Lee Chaeyoung
1984년 生
덕성여대 동양화과, 동 대학원 동양화전공 졸업
개인전_2009년부터 4회
기획전 및 그룹전_
〈Sensitive Reality〉(2016)
〈The Great Artist〉(2016, 2014)
〈안견회화정신〉(2014)
제4회 에트로미술대상 금상(2015),
종근당 예술지상(2015),
파이낸셜뉴스 미술공모전 입선(2010)

 

〈섬〉 한지에 수묵 130×162cm 2016

〈섬〉 한지에 수묵 130×162cm 2016

“이처럼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간과하기 쉬운, 그래서 오히려 독특한 정서를 자아내는 장소들이 있다. 본인은 이러한 도시의 풍경들 즉. 일상에 연관된 장소들, 나 또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거리들, 도시의 주택가와 낡은 건물들의 주변 풍경들에서 느껴지는 비정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주 고독하기도 한 것들이 뒤섞여 있는 풍경들을 보여주고 싶었고, 주변의 풍경들 사이에서 다른 시간과 공간이 가동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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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량 컬러이태량 Lee Taeryang
개인전_미국, 프랑스, 중국 등 총 27회
기획전 및 그룹전_
〈인왕산프로젝트_특별전〉(2017)
〈안평의 시간〉(2016)
〈트라이앵글 프로젝트〉(2015) 등 190여 회

 

 

 

 

〈무경산수(無境山水)〉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94×97cm 2017

〈무경산수(無境山水)〉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94×97cm 2017

“내게 있어 작업은 ‘좋은 작업을 해야 한다’ 라는 명제에 대한 시도가 아니라 ‘좋은 작업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그 자체이다. 내 그림형식의 명제가 그림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것은 본질은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이기에 어떤 형식으로든 표현하려는 것을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문제에 대한 하나의 논리적 판단이나 근거를 주장하거나 강요하는 명제는 아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명제를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명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다.” 결국, 내 그림은 중요하지 않으며 정작 중요한 것은 내 그림 밖의 모든 것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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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억수정이호억 Lee Houk
1985년 生
중앙대 한국화학과 및 동 대학원 예술학과 박사과정 수료
개인전_2012년부터 6회
기획전 및 그룹전_
〈불안〉(2017)
〈한국화의 유혹〉(2016)
〈오토픽션-한국화의 유혹과 저항〉(2013)

 

 

 

〈시간을 움직이는 것과 살아있는 것〉 장지에 먹, 분채, 식물성 안료 125×193cm 2017

〈시간을 움직이는 것과 살아있는 것〉 장지에 먹, 분채, 식물성 안료 125×193cm 2017

“현장에서의 모필 사생을 통해 시간성과 감정을 필선에 담아, 작업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여기에 박제된 듯 고정된 동물의 그림자 따위를 분채로 칠해 올린다. 움직이는 식물과 멈춰진 동물. 개체의 속성에 반하여 연출하고 작업의 의도에 따라 숲에서 채집한 식물성안료로 염색하기도 한다.
유한한 삶의 가치를 움직이는 것과 멈춰진 것의 대비로서 드러내고자 한다.
우리는 시간에 속박된 유한한 존재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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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슬인물2장예슬 Jang Yeseul
1988년 生
청강문화산업대 및 조선대 대학원 미술학과 석사과정
기획전 및 그룹전_
〈Asia Young Art Festival〉(2016)
〈온새미로〉(2016)
〈현대한국화 길을 묻다〉(2016)
대한민국한국화대전(2016)
무등미술대전(2016)
행주미술대전 특선(2016)

 

 

〈순환 Ⅱ〉 한지에 수묵 130.3×162.2cm 2016

〈순환 Ⅱ〉 한지에 수묵 130.3×162.2cm 2016

“우주의 순환과 움직임을 한국화의 가장 기본이자 정신이 되는 지(紙), 필(筆), 묵(墨)을 이용해 표현하고자 하였다. 작품에서 순환하는 먹의 형상성은 우주를 채우고 움직이는 에너지이며, 기운이 충만한 생기의 근원이다. 묵(墨)의 색(色)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담고 있으며, 우주의 색이자 하늘의 색으로 작가의 감성을 재해석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작가는 작품 속의 우주를 통해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본연의 섭리에 따르는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순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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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흡1하성흡 Ha Sungheub
1962년 生
전남대 미술학과 졸업
개인전_1994년부터 총3회
기획전 및 그룹전_
〈김광석 20주기 추모전〉(2016)
〈잊지 않겠습니다〉(2014)
〈5·18 민중항쟁 30주년 기념전〉(2010)

 

 

 

〈금강전도〉 한지에 수묵담채 92×137cm 2016

〈금강전도〉 한지에 수묵담채 92×137cm 2016

“전통회화는 물론 전통적 미감을 고수한 진경산수와 인물화를 현대적으로 적용해 1980년 이래의 사회와 삶, 풍경과 자연을 먹을 이용한 간결한 색을 가미해 그려내려 했습니다. 또한 색에 대한 굶주림으로 인해 자유분방한 틀을 깨뜨리는 데 주력하는 동시에 서사적 인물, 우리 산천의 의미 있고 아름다운 풍경을 주된 소재로 삼았고, 최근에는 화면공간을 크게 확장한 수묵과 채색의 실험을 다양하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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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주2하용주 Ha Yongjoo
1979년 生
조선대 미술대학 한국화과, 중앙대 대학원 한국화학과(석사) 및
동국대 대학원 미술학과 박사과정 수료
개인전_2007년부터 총8회
기획전 및 그룹전_
〈수묵시각 2016〉(2016)
〈구인전〉(2015)
〈신세계갤러리 선정작가전〉(2013)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 장지에 먹, 분 244×546cm 2012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 장지에 먹, 분 244×546cm 2012

“나와 타자, 원활한 소통과 걸러진 소통을 통한 관계의 수많은 레이어의 위장을 부정하면서도 개인과 집단, 구조, 체계 안에서의 익숙하며 필연적인 상황을 인정합니다. 작품의 형식에서 보이는 방식은 화면 안에서 친절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상을 온전히 그리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사람인지, 사람 모양을 한 것인지, 풍경인지 풍경 같은 느낌인지는 시지각을 통해 1차적으로 판단하고, 작품을 경험하는 자의 정서와 가치관을 통한 주관적 요소로 인식되고 정의됩니다. 보이는 것의 최소 기준입니다. 감각하는 것과 사유하는 작품의 화면 속 이미지는 그 무엇의 이미지일 뿐 그 무엇 자체일 수 없습니다.
사회 안에서 당신이 속한 시간, 공간, 상황, 입장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작업입니다.”

EXHIBITION FOCUS Imaginary Asia

AES+F 〈신성한 알레고리〉 5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9분 39초 2011
Ⓒ AES+F, Courtesy of the artist & Multimedia Art Museum Moscow and Triumph Gallery

상상적 아시아

서구를 중심으로, 승자를 중심으로 기술되어온 역사의 관습에 순응하지 않는다.
아시아 권역 고유의 역사와 시간 그리고 그 과정에 축적된 기억을 좀 더 주체적으로 반추하고 현재로 소환한다. 이에 관한 일련의 이야기가 지난 3월 9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상상적 아시아전〉을 통해 펼쳐지고 있다.
무엇보다 전시 제목 ‘상상적’에 주목하자. 일방적인 서술과 기록이 아니다. 17명(팀)이 참여해 23가지로 풀어낸 ‘무빙 이미지’에 눈과 귀를 집중해보자. 여유 있는 관람시간은 필수 지참이다. 전시는 7월 2일까지.

호 추 니엔〈미지의 구름〉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0분 2011

호 추 니엔〈미지의 구름〉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0분 2011

확실성에 관하여

이병희 | 독립큐레이터

기획 의도이자 이 전시의 특징은 우선 “무빙이미지”로 총칭하는 시간매체들을 주로 싱글채널로 그룹상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역사에 대한 내러티브를 기존의 공식적인 서술이나 해석과 평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적, 상상적 시간 이미지를 통해서 재구축하려는 점이 특징적이다. 나아가 경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것이, 패러다임의 전환, 새로운 감각과 정서적 공동체 형성이나 소통방식의 공유, 새로운 수평적 관계상을 상상적으로 전망할 수 있느냐의 문제까지 던지고 있다.

참여 작가들을 일별해보면 우선 공통적으로 ‘아시아’의 근대성을 포스트 식민적, 포스트 민족주의적, 해체 혹은 다중 매체 차원에서 다뤄온 작가들임을 알 수 있다. 비판된 지점은 전지구화와 새로운 착취에 기반을 둔 자본-신자유주의적 경제-정치적 거래로부터 초래된 문제와 갈등, 소외, 고립 등이고, 나아가 생명의 단독성 차원에서 귀환을 감각적, 정서적인 차원에서 다뤄온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지금은 새로운 보수화와 파시즘(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대두라는 ‘경직’의 시기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첨단 기술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 등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개발하고자 하는 ‘소프트한’ 미디어 세대들의 출현이 다소 아이러니한 레이어를 형성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 전시를 단순한 반복 소개 차원에서 보기보다는 다각도로 접근해 미래적 시간(가능성의 지점)을 단지 메시아적 ‘기다림’으로써가 아니라, 실천의 측면에서 그리고 나아가 트라우마적 조우와 정서적 귀환, 충동의 재발굴 측면에서 가늠해보는 기회로 볼 필요가 있다.

전시 출품 작품군을 몇 가지로 엮어볼 수 있는데, 우선 ‘지역’ 중심의 역사서술과 내러티브 위주의 작품군이 있다. 다음으로 근대적 내러티브가 포스트 근대적 매체 해체와 재조직의 과정에 등장하는 작품군으로, 여기서는 근대 주체의 소외, 재고립, 확장, 상실 이후 타자성들의 다양한 형태로의 귀환을 볼 수 있다. 다층감각과 정서의 전환 지점에 아피찻퐁의 다섯 개의 싱글채널 에피소드를 둘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전환의 지점으로 볼 수 있으며 이어서 다음으로 감각적, 정서적, 새로운 판타지적 역할이 어떻게 소비가 아닌 새로운 확실성의 영역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담지하면서, 마지막 지점으로 넘어가게 된다.

우선 ‘지역’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선형적 시간성에 근거한 작품군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처음에 보게 되는 것은 아이다 마코토의 작품이다. 자칭 일본 수상이라는 자의 퍼포먼스 연설인데, 이 작품에서 연설자는 ‘영어’ 공용화의 불편함을 퍼포밍하면서 전지구화를 적극 철회하고 역사를 되돌려 민족주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날리니 말라니와 양푸동의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제안의 배경에는 사실 아시아 역사의 실질적인 이유와 그 중심에 ‘폭력’이 있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여기에서 아시아 고유의 민족주의와 가부장제, 혹은 계급주의가 전지구화를 통해 청산되었다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으로 세탁되었고, 이어 보다 중층적인 ‘피해자’를 반복 재생산하고 심지어 미디어적으로 소비하고 있음을 성찰적, 정서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포스트 전쟁 증후 혹은 트라우마를 매체적으로 다룬다고 볼 수 있는 작품군에서는 근대적 시간성의 해체와 내러티브의 트라우마적 귀환을 볼 수 있다. 디지털 이미지로 재연된 비무장지대(DMZ)에서의 추억과 ‘지뢰’라는 매몰-잠재된 살상을 서정적으로 다룬 권하윤의 〈489년〉과 베트남 전쟁에서 일본의 패배라는 소재를 갖고 현대 일본 사회의 측면을 강박적인 리인액트먼트(재연) 방식을 통해 다소 증상적 후유증의 상태로 다룬 딘 큐 레의 〈모든 것은 재연이다〉가 조우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메이로 고이즈미의 〈영원한 처녀〉는 민족주의가 초래한 민족 주체성의 상실과 전지구적 소비대상화에 대한 포스트 트라우마적, 메타 미디어적 작품이 된다.

이어서는 아시아의 전지구화가 가져온 신자유주의적 파괴성이 단지 인권적, 지리적인 차원과 같은 타자화의 영역뿐 아니라 고유한 주체의 단독성의 영역에서 자리 잡고 있던 주술성, 판타지, 심지어 마술성과 미신성 등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미신적 혹은 판타지의 영역이 물질성의 차원으로 비천해진 것을 보여주는 호 추 니엔의 〈미지의 구름〉과 아흐마드 호세인의 작품 〈제4단계〉는 여기에서 한 쌍을 이룬다.

염지혜 〈분홍 돌고래와의 하룻밤〉싱글 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1분 30초 2015

염지혜 〈분홍 돌고래와의 하룻밤〉싱글 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1분 30초 2015

아래 쉬빙 〈지서(地書): 팝업북(낮)〉(왼쪽)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6분 20초 2015〈지서(地書): 팝업북(밤)〉 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3분 50초 2016 © Xu Bing Studio

 쉬빙 〈지서(地書): 팝업북(낮)〉(왼쪽)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6분 20초 2015〈지서(地書): 팝업북(밤)〉 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3분 50초 2016 © Xu Bing Studio

키워드로서 무빙이미지의 진면목

보다 일상적으로 친근해진 디지털 매체들의 다중시간적, 혼성적 타자성과의 조우 차원을 볼 수 있는 작품군에 염지혜의 〈분홍 돌고래와의 하룻밤〉이 있다. 이어 점차로 “무빙이미지”의 ‘반복-다중 시간성’과 새로운 소통방식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어 감을 알 수 있고, 여기서 쉬빙의 디지털 시각언어_기호 책을 흥미롭게 열람할 수 있다. 쑹둥의 〈시작 끝〉의 무한 반복적 이미지와 직접적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시적 접근과 딘 큐 레의 〈네 순간의 무역센터〉로부터 우리는 전지구적 트라우마가 공유 (불)가능한 것인지, 혹은 불가능성 자체로 추상적으로 봉합되어 잠재성의 차원으로만 드러나는 것인지를 보게 된다.

아피찻퐁의 5개의 싱글채널 공간은 전체 전시에서 갈라짐의 지점, 경계 지점의 구실을 한다. 그동안 알려졌다시피 아피찻퐁은 포스트 식민주의의 관점에서 온정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배제된 생명의 영역이 어떻게 미디어적으로 귀환하는지를 보여왔다. 이에 우리는 역사와 한 국가, 지역의 이야기가 보다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시·공간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반복되며 웅얼거리는 차원에서 폭로될 수 있음을 보았다. 이를 통해 전설, 과거, 꿈, 트라우마, 판타지 등과 같은 비언어적, 비제도적, 상상적, 상징 이전의 상태, 혹은 무의식이나 전의식 상태와 같은 단독성의 영역이 어떻게 역사성이 실재적인 차원 즉 파편적 전체로, 혹은 이미지적 서술로, 혹은 주체-타자 간의 관계 항 속에서만 부상할 수 있는지를 역설케 된다.

만일 우리가 이 기점을 지나, 언뜻 어떤 변환의 기점을 감지할 수 있었다면, 하룬파로키의 다큐멘터리는 단지 다양성의 비교가 아니라, 세계의 전지구화와 그 역사의 궤적을 다시 걷게 되는 길잡이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와엘샤키와 문경원과 전준호의 작품에선 에피소드 혹은 소문이 단지 개인적인 상상적 내러티브로서 이국적이거나 흥미로운 차원이 아니라, 심각한 실재성의 차원일 수 있음이 드러난다. 여기서 잠시 새롭게 획득될 확실성은 혼성적이고 다중적 시간의 패러다임에서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거론할 작품군에서는 일종의 봉합과 무한반복이 어떻게 하여 근대적인 시간성을 넘어선 다른 차원의 시간성에서 정서와 감각으로 확장되는지를 보게 된다. 전시장의 마지막 지점에서 문틴&로젠블룸, AES+F의 작품을 보게 되는데, 파토스적 인물들의 다소 장엄해보일 수 있는 포스트 휴먼적 매체퍼포먼스 이미지가 특징이 된다. 즉 근대의 잠재성이란 것이 전지구화와 신자유주의적으로 ‘소비’되고 남겨진 ‘이미지’들이 되었을때, 과연 이들이 다시 다층적인 감각과 복합적인 감성, 정서와 순수 형식으로의 충동 등을 통해 산-죽은 상태가 아닌 생동하는 포스트 휴먼적 내러티브를 새롭게 구축해 나갈 수 있을지, 그리고 이때 어떤 확실성에 기반을 둘지, 혹은 요청되는지를 되묻게 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과연 새롭게 감각적 정서적으로 귀환해온 단독성의 영역들과 새로이 발굴될 세대성이 새로운 패러다임과 혼성적 (포스트 휴먼적 관점의) 시간을 내다볼 때 어떤 기틀이자 잠재성이 되며 또한 어떤 기점이 될 수 있겠는가. 물론 전시 관람의 시작에서 꿈꾸고 상상했던 새로운 내러티브, 혹은 시간적 경험이 비록 꼬박 하루가 걸리는 관람이라 할지라도, 그 짧은 시간에 획득될 리는 없다. 실천의 시간은 아마도 분명한 확실성에 기반을 둘 것이며 현대성이란 갈라짐의 연속이고, 역사란 파편화된 고유 요소들이 순수 형식으로서의 충동처럼 출몰하는 시간이라는 점은 확실한 듯하다. ●

 

CRITIC 아이작 줄리언 〈플레이타임〉

2.22~4.30 플랫폼  -  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박제철 | 영화 ·  미디어 이론 연구자

2004년 부산비엔날레, 2008년 광주비엔날레, 그리고 2011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가진 개인전까지 이미 몇 번의 전시를 통해 국내 관객에게 이름을 알린 영국의 흑인 게이 영화감독이자 영상설치 작가 아이작 줄리언의 7채널 스크린 설치작업 〈플레이타임(Playtime)〉(2014), 2채널 스크린 설치작품 〈자본 KAPITAL)〉(2013), 싱글 채널 비디오 〈표범(The Leopard〉(2007)이 플랫폼-엘에서 전시 중이다. 이 작품들은 주제와 매체 미학 양면에서 최근 그의 작업 경향에 어떤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서구에 거주하는 흑인들의 복잡한 인종적, 성적, 성별적 정체성과 할렘 르네상스의 연관성을 탐구한 시적 다큐멘터리 〈랭스턴을 찾아서(Looking for Langston〉 (1989)나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 영화의 역사를 탐구한 다큐멘터리 〈배다스 시네마(BaadAsssss Cinema〉(2002)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줄리언의 관심은 주로 흑인 디아스포라의 불안정한 정체성과 그것의 문화적 의의에 집중돼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래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서구에 동화된 2세대나 3세대 흑인 디아스포라보다 최근 전지구화의 흐름과 더불어 새로운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는, ‘남반구(global South) 주민들의 북반구(global North)로의 이주’로 관심의 초점을 옮기고 있다. 또한 극장 상영을 겨냥한 단일 스크린 기반의 필름이나 비디오 매체를 사용함으로써 인종 간 동성애에 연루된 남성의 신체를 육감적으로 묘사하는 데 치중하던 과거와 달리 그의 최근작은 대형 갤러리나 뮤지엄에서의 전시를 염두에 둔 다수의 스크린을 기반으로 한 설치 형식을 주로 취하며, 디지털 합성을 통해 가상적 신체와 현실적 신체 간의 경계를 부단히 넘나드는 양상을 보여준다.
〈표범〉은 이러한 변화의 이행기적 성격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주목할 만하다. 최근 중동 지역 난민들이 지중해를 통해 서구로 대규모 이주하는 현상을 시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줄리언의 새로운 관심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인종 간 동성애에 연루된 남성 신체의 육감적 묘사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원래 3채널 스크린 형식으로 전시했었으나 이곳 플랫폼-엘에서는 싱글 채널 비디오로 재편집되어 상영됐는데, 이 점 역시 매체 미학적 측면에서 봤을 때 이행기적 성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플레이타임〉과 그 자매작 〈자본〉은 그가 더 이상 흑인 디아스포라 남성의 퀴어 정체성이라는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본, 인간, 이미지의 전지구적 흐름이 가져오는 파국적 효과라는 새로운 관심사로 작업 방향을 완전히 선회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건축학적으로 배치된 7개의 스크린을 통해 마치 한 편의 음악을 연주하듯 이미지를 전개하는, 〈플레이타임〉에 드러나는 매체 미학적 특성은 그가 어떻게 다채널 영상설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물론 〈플레이타임〉은 내러티브 영화의 관습을 상당 부분 차용하고 있다. 장만옥, 제임스 프랭코 등 유명한 전문배우의 캐스팅이나 매끄럽고 유려한 미장센과 촬영을 보자면 가히 이 작품을 다채널 스크린 설치의 블록버스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또한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상이한 방식으로 겪고 있는 지리적, 계급적, 인종적으로 다른 세 인물-파산한 아이슬란드인, 승승장구하는 런던의 미술품 경매사, 자식 부양을 위해 가사 노동자로 두바이에 온 필리핀 여성-의 상황을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전지구화의 파국적 효과를 비판하는 이 작품의 내러티브도 이제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신선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오직 관객이 7개의 스크린 중 중앙에 위치한 가장 큰 스크린 위주로, 즉 단일 스크린 기반의 영화 관람 양식으로 〈플레이타임〉을 감상할 때만 가능하다.
조나단 벨러의 ‘주목가치이론(attention theory of value)’에 따르면 미디어가 산출하는 이미지의 경제적 가치는 그 이미지에 대한 관객의 주목이 축적됨에 따라 증대된다. 따라서 자연히 가장 주목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중앙의 가장 큰 스크린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가장 큰 경제적 가치를 잠재적으로 획득할 것이다. 하지만 스크린 7개의 불균등한 배치를 통해 줄리언은 이미지 경제가 공평한 자유로운 경쟁에 열려있다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중앙의 스크린으로부터 배제된 여타의 가능한 이미지들을 주변에 위치한 6개의 스크린을 통해 회복시킴으로써 독점적인 전지구적 미디어 산업에 대항하는 대안적인 주목 경제적 실천을 매체 미학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플레이타임〉은 줄리언이 이 작품의 자매작이라고 말한 〈자본〉을 매체 미학적으로 보충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자본을 안무하기(Choreographing Capital)’라는 제목으로 줄리언이 기획한, 데이비드 하비의 강연을 기초로 제작된 2채널 스크린 다큐멘터리인 이 작품에서 하비는 자본은 본래 비물질적으로 객관적이며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 속에서 불균등하게 분배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본에 관한 마르크스의 고전적 통찰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이 때 청중으로 참여한 유명한 문화연구학자 스튜어트 홀(이후 2014년 2월 타계)이 생산 과정과 계급에만 초점을 맞추는 마르크스의 고전적 이론은 소비와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어야 한다는 반론을 펼친다. 〈플레이타임〉은 줄리언이 스튜어트 홀의 이러한 반론을 고려하여 〈자본〉을-줄리언의 영상 작품 〈자본〉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저작 〈자본〉까지   -   매체 미학적으로 “다시 쓰는,” 즉 데리다적 의미에서 “대리-보충”하는 시도의 산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위 아이작 줄리언 〈플레이타임 Playtime〉 7채널 영상설치 67분 2014

CRITIC 서윤희 기억의 간격; 畵苑

3.9~4.22 OCI미술관

고충환 | 미술비평

서윤희가 자신의 그림에 부친 주제 〈기억의 간격; 畵苑〉에는 실제 혹은 실재가 빠져있다. 일종의 생략법인 셈인데, 이렇게 생략된 부분을 되살려 복원해보면 ‘기억의 간격’이란 주제는 사실은 ‘기억과 실제 혹은 실재와의 간격’이 된다. 여기서 기억은 현재에 속하고, 실제와 실재는 과거시제에 속한다. 그리고 실제는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뜻하고, 현재시점에서 그 일을 기억으로 되불러오는 것이다. 그렇게 실제와 기억 사이에는 과거와 현재 사이만큼의 거리가 있고 간격이 있다. 그러므로 기억을 그린다는 것은 사실은 시간을 그린다는 것이고, 기억의 간격을 그리는 행위는 사실상 시간의 간격을 그리는 행위와도 같다.
이렇게 실제가 시간과 관련이 있다면, 실재는 욕망과 관련이 깊고 특히 억압된 욕망과 관련이 깊다. 이를테면 기억에는 되새기고 싶은 기억이 있고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 여기서 잊고 싶은 기억이 기억을 억압하고, 그렇게 억압된 기억이 억압된 욕망의 형태로 실재계로 밀려난다. 그러므로 기억은 실제와의 간격만큼 모호해지고 때로는 억압된 탓에 애매해진다. 다시, 그러므로 기억을 그리고 시간을 그리는 그림에서는 이처럼 모호해진 실제를, 그리고 애매해진 실재를 그림의 표면으로 불러내는 것이 관건이고, 다른 유의 그림들에 비해 유독 분위기가 강한 것도 이 관건과 무관하지가 않다.
멀리서 작가의 그림을 보면 그저 무분별한, 알 수 없는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좀 더 다가가 보면 비정형의 구김과 주름, 섬세한 얼룩이나 크랙과 같은 추상회화의 성분요소들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더 다가가 보면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산행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쯤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그림 속 사람들이 점경을 이루기 위해서 그림은 배경화면이 되어야 하고 풍경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추상회화처럼 보이던 그림이 불현듯 풍경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멀리서 볼 때 다르고, 가까이서 볼 때가 다르다.
그 풍경은 친근하면서 낯설다. 비록 선입관 속 풍경을 닮았지만 실제 그대로를 재현한 풍경이 아니기에, 엄밀하게는 작가가 지어낸 풍경이기에 낯설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풍경에 비해 눈에 띄게 점경을 이룬 사람들과의 대비가, 그리고 여기에 도대체 가장자리가 따로 없는 무한정 열린 풍경이 막막하고 아득한 기분에 빠져들게 만든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데자뷰를 보는 것도 같고, 망각 직전에 겨우 건져 올린 희미한 기억의 한 자락을 보는 것도 같고 색 바래고 빛바랜 기억의 화석을 보는 것도 같다. 현생을 넘어 전생의 기억을 보는 것도 같고, 존재를 넘어선 기억의 원형 혹은 원형적 기억을 보는 것도 같고, 존재가 처음으로 유래한 흑암, 암흑, 카오스를 보는 것도 같다.
그림에 보이는 풍경은 사실은 작가가 지어낸 풍경이라고 했다. 비정형의 구김과 주름, 섬세한 얼룩이며 크랙이 어우러져 하나의 가상적인 풍경이 재구성된다. 이러저런 약재로 우려낸 광목천이나 장지로 풍경을 조성하는데, 그 풍경 그대로 기억의 결이며 시간의 질감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결이며 질감 속에 서사가 깃드는데 개인적인 서사와 시사적인 서사, 종교적인 서사와 존재론적 서사가 깃드는 품 같고 주름 같고 자궁 같다. 그 자궁을 작가는 예술가의 정원이라고 부른다. 기억과 실제(그리고 실재)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아마도 작가의 정원은 그 사이 어디쯤엔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예술이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의 문제라고 작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작가에게 기억은 치유를 의미한다. 기억하면서 치유하는 것이다. 굳이 약재로 풍경이며 정원을 우려낸 것은 그 치유 행위와 무관하지가 않다.
작가의 영상작업을 보면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데, 마치 기억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것 같다. 흡사 시간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것 같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밀려오는 기억 앞에 서게 만들고, 밀려가는 시간 앞에 서게 만든다.

서윤희 〈기억의 간격_벌랏Ⅱ〉 면천에 혼합매체 210×800cm 2015~2016

CRITIC 배윤환 서식지

3.1~29 두산갤러리 서울

유은순 | 미학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배윤환의 다섯 번째 개인전 〈서식지〉는 작가 자신이 처한 다양한 현실적 상황과 내적이고 외적인 갈등, 창작에 대한 고민 등을 주제로 한 드로잉, 회화, 영상작업을 선보인 전시였다. ‘서식지’는 특정 생물이 살아가는 생태적, 환경적 조건을 뜻한다. ‘주거지’가 집을 짓고 터를 다듬어 인간이 살기 좋은 상태로 환경을 적극적으로 바꾼다는 함의를 가지는 반면, ‘서식지’는 계절, 날씨, 천재지변 등 환경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응하려 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배윤환의 ‘작업하기’ 방식이 이와 비슷하다. 작가는 그때그때 작업실 환경에 맞춰 작품의 스케일이나 재료를 달리하고, 주어진 전시 환경에 따라 작품을 다르게 연출한다. 이와 동시에 언제나 서식지의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생물처럼 작품으로서의 이미지와 상상으로서의 이야기, 작가노트 등의 불일치에서 불거지는 글과 이미지의 갈등,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과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충돌에서 끊임없는 (작품 제작의)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작가에게 글과 이미지의 불화는 언제나 주요한 작품 동기가 되었다. 〈그리즐리 서식지〉와 〈퓨마 서식지〉에는 각각 그들의 서식지임을 나타내는 팻말이 있지만 내팽개쳐 있고 각각에는 그리즐리가 없으며 퓨마가 없다. 대신 각각에는 퓨마가 있고 관광객이 있다. 퓨마에겐 글 자체가 이미지일 뿐이고 관광객에게 그곳은 단지 관광지(라고 착각한 서식지)일 뿐이다. 작품은 작품 제목(글)과 이미지 자체로 불일치를 보여주며 작품 내부의 상황으로도 글과 이미지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과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관한 작품은 〈부리게임〉, 〈뿔과 붓〉 등 캔버스 회화이다. 작가는 과거 〈내가 본 게 고양이야?〉(2014)에서 캔버스 천 한 롤에 자유 연상되는 이미지를 채워 넣는 열정을 보여줬지만, 이번엔 재단된 캔버스에 정제된 에너지를 붓는다. 요컨대 캔버스에 안착된 서식지는 내용 측면과 형식 측면에서 서로 갈등 중인 셈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애니메이션 작업 〈자화상〉(2017)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박제사, 박제된 동물, 의뢰인은 모두 작가 자신의 변형이다. 미술가로서 작가(박제사)는 끊임없이 자신(의뢰인)과 대화하며, 이를 중간 종결인 작품(박제동물)으로 남기고, 충분할 수도 불충분할 수도 있는 메시지(박제사는 박제동물에 의뢰인의 이야기를 담는 재주가 있지만, 박제동물에 담긴 이야기는 동물로부터 새어나와 자음과 모음으로 흩어진다)를 던지며 또다시 다른 작품(또 다른 박제동물)으로 미끄러진다. 마지막 장면의 비질은 결국 처음의 비질과 이어지는데, 이를 통해 작가 자신이 작업하는 방식과, 그 순환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2015년 개인전 〈능구렁이같이 들개같이〉에서 선보인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현대미술 환경을 거대한 공장시스템으로 은유하고 자신을 공장주, 능구렁이와 들개에 비유하면서 현대미술을 풍자적으로 표현했다면, 〈자화상〉에선 작가의 내적 갈등이 보다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능구렁이같이 들개같이〉에서는 자막이 영상 외부에 위치해 있었지만 〈자화상〉에서는 자막이 이미지를 휘둘러버릴 정도로 작품과 일체가 되어 있고 이미지는 비선형적으로 흐른다. 이는 글과 이미지에 대한 작가의 고민뿐만 아니라, ‘작업하기’에 대한 작가의 근원적인 고민을 포함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서식지〉의 작품 전체가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제나 양 극단 사이의 위험에 처해 있다. 언어냐 이미지이냐의 문제가 작품 내적 갈등의 두 축이라면, 캔버스냐 실험이냐는 작품 외적 갈등의 축이다. 작가가 이러한 두 극단 사이에서 작품을 계속 해나가는 한 현실과 꿈, 생계와 예술, 글과 이미지 사이에서 끊임없는 줄타기를 해야 할 것이다.

위 배윤환 〈퓨마 서식지〉(사진 왼쪽) 종이에 목탄 202×400cm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