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Book -새로운 존재양식으로의 몸

김원방 《몸이 기계를 만나다》 예경 2014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미술을 설명하는 주요 이론으로 공공연히 인용되고 있다. 김원방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가들과 미술이론가들의 이론을 면밀히 분석하고 테크놀로지아트 혹은 뉴미디어아트에 적용하여 해석한 《몸이 기계를 만나다》를 출간했다. 저자가 1997년부터 2013년까지 저술한 첨단미디어예술에 대한 기존의 논문들을 발췌하고 새로운 연구를 추가하여 엮은 책이다. 뉴미디어아트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끊임없이 발전되어 적용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책을 출간할 때 그 리서치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리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과거가 되어버린 이론이 아닌 동시대에 적용 가능한 이론을 강조한다. “이론이란 시간과 무관하게 적용될 수 있을 때에 붙일 수 있는 말이다”라며 리오타르, 라캉, 데리다, 바타이유 같은 후기구조주의 철학이론부터 로잘린드 크라우스, 디디 위베르만 같은 70~80년대 이후 후기모더니스트 미술이론가들의 이론을 뉴미디어아트에 적용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론가를 나열하기보다는 그들 이론의 “기술에 대한 철학적이며 미학적인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새로운 적용을 보여준다.
저자는 첫 장에서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형상성의 개념을 설명하며 디지털 이미지가 고전적 언어학과 기호학이 가진 특징을 넘어선다고 말했다. 디지털 이미지의 액체성과 형상성에 대한 특징은 조르주 바타이유의 잔혹, 비정형, 위반 등을 다루는 4장과 이에 대한 논의를 연장시켜 상호작용예술과 인공생명예술에서의 재현의 문제를 다룬 5장에서 부연설명된다. “바타이유의 (반)미학과 이를 현대미술에 적용한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이론은 뉴미디어아트에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며 바타이유의 이론을 소개했다. 바타이유는 기호의 해체학을 하는데 이는 고정된 기표 기의가 없고 끊임없이 와해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타이유는 이러한 “액체성”을 초현실주의에 적용하여 설명했다. 저자는 뉴미디어아트를 해석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브 알랭 부아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저술한《비정형》은 이러한 설명을 뒷받침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한편 2장과 3장에서는 가상공간과 사이보그에 대해 논한다. 저자는 가상공간을 “실제로 전개되는 실제적 공간”으로 상정하며 최근에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터랙티브한 가상현실, 기계장치 및 혼성기계 등은 몸이 부재하다면 존재할 수 없다. 결국 몸에 의해서 점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매체와 이론가들은 기계에 대한 논의에서 몸을 배제했다. 이는 잘못된 착각을 줄 수 있다. 테크노페미니즘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여성의 영역을 배제하고 마치 기계가 몸에 대해 승리하고 종국에는 삭제하는 것을 이상향이라고 부추기는 군사산업적인 발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저자도 이에 동감하며 “테크놀로지는 신체 자체를 확장, 변화 새롭게 갱신한다”며 기계와 몸이 종합되어 공진화하는 상태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몸에 대한 보편항은 기계 존재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러므로 테크놀로지의 발달된 기계의 등장으로 몸에 대한 이론이 바뀐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적 접근으로 뉴미디어아트의 해석을 시도했지만 저자는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미디어아트는 후기모더니즘을 심화시키는 과정일 뿐 최종 종착점이 아니라”고 한다. 저자는 “현대미술은 ‘미’를 배제하고 미술의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며 .예술적 감각, 승화를 배제하고 개념주의와 탈승화를 강조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한계를 꼬집었다.《몸이 기계를 만나다》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접목한 뉴미디어아트 해석을 마치고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부분적으로 흡수하되 그 한계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 저자의 다음 목표다.
임승현 기자

김원방은 1958년 출생했다. 파리 1대학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9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포스트모던미술평론, 미술평론, 미디어아트 이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잔혹극 속의 현대미술: 몸과 권력 사이에서》가 있고 역서로 《기술매체시대의 텍스트와 미학》《동시대 한국미술의 지형》등이 있다. 이 외 다수의 논문과 평론이 있다. 2008년 〈부산비엔날레> 예술감독을 지냈다.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Portrait in Jazz 11 – 비극으로 장식한 장엄한 복고주의

1990년 뉴욕 존스 비치 극장. 그날 마지막 출연자로, 이제 삶을 대략 1년 밖에 남기지 않은 재즈계의 황제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가 무대 위에 오르자 음악팬들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뮤지션들은 무대 앞을 메우기 시작했다. 마일스는 힙합 비트에 록의 강렬한 디스토션 사운드를 깔고 그 위에서 즉흥연주를 시작했다. 그의 최신음악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음악을 더 이상 재즈라고 칭하지 않았으며 단지 ‘흑인음악(Black Music)’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무대 뒤편. 야외로 이어진 코트에는 농구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한 청년이 그곳에서 홀로 집중하며 자유투를 연습 하고 있었다. 마일스보다 먼저 무대에 올랐던 이 스물아홉 살의 청년은 오로지 농구공을 림 안으로 넣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를 본 한 기자가 물었다. 모두들 마일스의 새로운 음악을 궁금해 하는데 당신은 궁금하지 않으냐고. 그러자 이 청년, 윈턴 마살리스는 여전히 림만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저런 음악엔 관심 없어요.”
마일스의 퓨전 음악에 대한 윈턴의 이러한 냉소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미 9년 전 약관 20세에 자신의 첫 음반을 발표하던 당시부터 이 당돌한 청년은 자신의 아버지뻘인 ‘살아있는 재즈의 역사’ 마일스 데이비스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물론 마일스에 대한 비판은 그가 재즈-록으로 급선회한 1969년부터 동년배의 뮤지션, 평론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재즈의 배신자로 모두들 마일스를 지목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력적이었던 마일스에 비해 인공호흡기를 차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채 침상 위에 누워있는 ‘정통’ 재즈의 실상은 그들의 비판을 한낱 푸념 내지는 질투로 들리게 만들었다. 1970년대가 끝나갈 무렵 기존의 재즈는 더욱 노쇠했고 그래서 그 진영에서 이탈한 연주자들도 슬금슬금 전기 사운드와 펑크(funk) 비트를 빌려 쓸 수밖에 없었으며 더욱이 그들이 일제히 비난하던 마일스가 건강상의 문제로 일선에서 종적을 감추자 퓨전에 대한 비판은 기력도, 상대방도 모두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퓨전과 전통주의의 격돌은 재점화되었다. 1981년 마일스가 5년 만에 재즈계로 복귀했을 때 그 반대편의 대변인은 자신을 “위대한 전통에서 왔다”고 천명한 샛별 윈턴이었다. 그는 하드밥의 ‘사관학교’였던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의 재즈 메신저스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냈으며, 퓨전과 정통을 오가며 활동하던 허비 핸콕(Herbie Hancock)은 자신의 어쿠스틱 사중주단에서 윈턴을 간판 주자로 내세웠다. 윈턴은 최근 10여 년간 사람들에게 들려지던 재즈는 모두 사기며 가짜라고 말하면서 아방가르드 재즈와 퓨전재즈를 모두 재즈의 영토에서 몰아낼 것을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세기가 바뀔 무렵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된 초기 재즈에서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의 역사를 재즈의 본령으로 삼고 그 전통을 되살리자는 ‘왕정복고운동’(재즈 평론가 뤼시엥 말송의 표현)을 전개했다. 이 느닷없는 복고주의는 그의 빛나는 재능을 통해 설득력을 얻었다. 1984년 그는 관현악이 함께한 발라드 음반〈 환락가의 꽃들 (Hot House Flowers)〉(컬럼비아)과 레이먼드 레퍼드가 지휘하는 내셔널 필하모닉과 함께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CBS 마스터워크스)을 동시에 발표해 클래시컬과 재즈 양 부문에서 한꺼번에 그래미를 손에 쥐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전통주의에 강력한 권위를 부여했다.
특히 과거의 스탠더드 넘버만 연주한다는 세간의 비판(그 대표적인 논객은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Keith Jarrett)이었다)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만으로 채운〈 장엄한 블루스〉는 뉴올리언스의 전통적인 장례음악을 끌어와 퓨전음악의 재즈에 대한 시해(弑害)를 알렸던 장송곡 <재즈의 죽음 (The Death of Jazz)>을 통해 전통주의의 논리를 비극적으로 연출했으며 음반표지에는 앙리 마티스의 연작〈 재즈〉중의 대표작인 <이카루스>를 실어 속절없이 추락하는 재즈의 비운을 상징했다.
이 비극은 영리한 연출이었다. 이미 윈턴은 자신의 열렬한 추종자들을 이끌고 있었으며 이때 성장한 소위 ‘영 라이언’(주로 1960~70년대 출생한 전통주의 재즈 뮤지션)들은 적어도 20세기가 저물 때까지 20년간 재즈계를 지배했다. 하지만 이제 중년이 된 이들은 전 세기의 지위를 잃은 채 다양한 재즈 분파의 하나로 물러났다. 이 복고왕정을 퇴위시킨 것은 더욱 냉혹해진 21세기 재즈의 상업주의였다. 그러니까 진짜 비극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황덕호 재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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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턴 마살리스
<장엄한 블루스 The Majesty of the Blues> (Columbia/ CK45091)
윈턴 마살리스 6중주단: 윈턴 마살리스(트럼펫), 토드 윌리엄스 (소프라노, 테너 색소폰), 웨스 앤더슨(알토 색소폰), 마커스 로버스(피아노), 레지널드 빌(베이스), 헐린 라일리(드럼)/ 게스트 뮤지션: 테드 라일리(트럼펫), 프레디 론조(트롬본), 마이클 화이트(클라리넷), 대니 바커(벤조) 1988년 녹음

Korean Beauty – 민간신앙에 녹아있는 도교

<바다 위의 신선들> 비단에 채색 각 150.3×51.5cm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왕모가 요지에서 개최하는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신선들이 바다를 건너는 장면으로 중국의 유명한 고사에 나온 도상이다. 화면 중앙에 노자가 소를 타고 도덕경을 읽고 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도교는 유교, 불교와 함께 우리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지금까지도 세시풍속과 민간신앙, 예술, 대중문화, 건강 수련 등 우리 생활 각 분야에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도교문화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전시 <한국의 도교문화–행복으로 가는 길>(2013.12.10~3.2)이 열렸다. 필자는 특히 도교와 민간신앙의 연결관계에 주목해 한국인의 삶에 녹아있는 도교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본다.

우리 생활문화 속 도교적인 이미지는 도처에 산재하는 복합문화로 공존하지만, 다른 문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분야이다. 광범위한 도교의 실체는 우리 기층문화인 무속과 민간신앙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행복으로 가는 길 한국의 도교문화전>은 매우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생활 속 도교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도교는 불사약 복용이나 심신수련, 온갖 신에 대한 기도 등을 통해 불로장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부와 명예 같은 현세적 이익을 추구하는 중국의 토착 종교이다. 도교가 교리와 조직을 제대로 갖춘 것은 4세기 북위시대부터이며, 이후 많은 종파가 생겨났지만, 그 기원을 살펴보면 신선설과 민간신앙을 핵심으로 하여 음양, 오행, 주역 등의 설과 의학, 도가 철학 등을 보태고, 여기에다 불교와 유교의 성분까지 받아들여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도교에서 받드는 신들은 매우 잡다(雜多)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그것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제사 지내는 신에는 원시천존(元始天尊) 또는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고 이는 다시 무형천존(無形天尊)·무시천존(無始天尊)·범형천존(梵形天尊)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조인 노자, 곧 노군(老君)을 원시천존의 화신(化身)이라고 믿는다. 그 밖에도 현천상제(玄天上帝:北極星)·문창제군(文昌帝君)·후토(后土)·성황신(城隍神) 등 수많은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왼쪽・(오른쪽) 조선 (경남 문화재자료 제214호, 개인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전시광경   오른쪽・김진여  비단에 채색 31×61.7cm 139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자가 제자인 남궁경숙과 더불어 주나라에 건너가서 당시 주왕실의 도서관 사서로 있던 노자에게서 예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고사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러나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그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왼쪽・<밀양 성황신 손긍훈 상>(오른쪽) 조선 (경남 문화재자료 제214호, 개인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도교문화> 전시광경 오른쪽・김진여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묻다> 비단에 채색 31×61.7cm 139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자가 제자인 남궁경숙과 더불어 주나라에 건너가서 당시 주왕실의 도서관 사서로 있던 노자에게서 예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고사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러나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그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염원하면서 이를 이룰 수 있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실천하는데, 전적으로 연단술(鍊丹術)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적덕행선(積德行善)하고 계율을 지켜야 진선(眞仙)이 된다고 하여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도교는 7세기 고구려 때 우리나라에 공식 전래되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그 이전부터 도교적인 문화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도교는 종교로서보다는 문화요소로서 존재하면서, 불교 또는 민간신앙과 혼합되거나, 동학과 같은 신흥종교에 영향을 주었으며, 문학과 회화 등 예술작품의 주제나 소재로 활용되었다. 또한 복숭아나 신선, 십장생 같은 도교적 상징들은 장수와 행복을 가져오는 길상의 의미만 남아 공예품이나 장식화 등의 소재로 민간생활 속에 깊숙이 녹아있었다.

도교가 공식적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624년 당 고조가 고구려 영류왕에게 천존상과 도법을 보내온 기록이 최초이다. 신라와 백제에도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나, 도교신앙은 고구려에서만 성행했다. 그것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천제(天祭)·무속 (巫俗)·산악(山岳) 신앙 등 종교적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수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종교적 신앙보다는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서적을 통해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자체사상과 융합하면서 선도(仙道)·선풍(仙風)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당(唐)나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생(養生) 보진(葆眞)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어 단학(丹學)의 성격을 가지는 수련(修鍊)도교 양상을 드러내는 현상도 나타났다.
도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는 신앙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고 할 만큼 신(神) 중심의 나라였다. 불교가 그 중심 종교이기는 했지만 귀신·영성(靈星)·토지신 그리고 무속(巫俗)과 더불어 도참(圖讖)사상이 병존하면서 모든 것이 기복(祈福)종교의 현상을 띠는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교 역시 여러 민간신앙과 섞이면서 불교 도참사상과 함께 하여 현세이익(現世利益)을 희구하는 양재기복(禳災祈福)의 기축(祈祝)행사가 성해, 그 풍습이 민간생활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국가적으로는 호국연기(護國延基)를 바라는 재초(齋醮:도교식 제사)행사가 크게 행해졌으며, 특히 예종(睿宗:1105~1130)은 복원궁(福源宮)이라는 도관(道觀:도교 사원)을 건립하는 등 도교를 크게 진작시켜 불교보다 더 중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도교의 성행은 민간에 수경신(守庚申)이라는 도교습속(道敎習俗)까지 낳게 하여 그 풍습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로 넘어온 이후에도 재초 중심의 도교는 그대로 이어졌으나 중종(中宗:1506~1544) 때에 이르러서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의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소격서(昭格署:재초 등 도교행사를 관장하던 관청)가 혁파(革罷)되는 등 점차 위축되어갔으며, 임진왜란(1592) 이후에 초제를 행하는 의식도교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궁중이나 민간에 뿌리내린 수경신 등의 도교풍습은 그대로 존속해 내려 왔고 지식인층에서는 노자·장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더불어 양생 보진의 수련도교에 종사하는가 하면 참동계(參同契) 용호비결(龍虎秘訣) 등의 도서(道書)를 주해 및 연구 저술하는 사람들이 있어 도교의 사상적 측면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도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크게 의식도교와 수련도교의 두 맥을 이루면서 종교사상은 물론 문학·예술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도교, 한국 문화의 뿌리

도교의 신들 중에는 중국 토착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 많은데 그중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토착 신들과 상통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고 숭배하며, 삶의 터전이 되는 대지와 강, 산과 나무 등을 신성시하고, 마을이나 성곽, 가정을 지키는 신령이 있다고 믿는 종교관념은 한국인들 역시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두칠성에서 유래한 칠성신이나, 성곽이나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 불을 수호하는 조왕신,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월신장, 동서남북과 중앙의 터를 지키는 오방신장과 같은 도교의 신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 민간신앙과 무리 없이 어우러지면서 점차 그 일부가 생활화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무신도와 함께 민화, 부적, 당사주 등의 기층문화를 이루는 상당부분이 도교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종이에 채색 102×75cm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적토마 관운장> 종이에 채색 102×75cm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그중에서도 중국의 관우신앙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중국 고대의 무장 관우는 원래 중국에서 모셔지던 민간의 재물신이었다. 이 신앙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 관우의 신령 덕에 왜적을 물리쳤다고 믿어 전국에 관왕묘를 건립하였고, 이후 숙종이 관왕묘에 배례하는 등 왕권 강화의 상징으로 활용하면서 그 위상이 높아졌다. 이러한 양상이 점차 민간으로 퍼지면서 무속에서도 관우신을 받아들여 관우신앙이 무속화 (巫俗化)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무속화를 살펴보면 적토마를 탄 장수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19세기 후반 고종대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관우신앙에 대한 한글 전적들이 간행되었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도처에 관우 사당이 새로 건립되기도 하였으나, 20세기 들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우신앙은 점차 쇠퇴해갔다.
한편 중국 무속에서 유래한 도교의 점복과 부적문화 역시 복을 구하고 액을 피하려는 도교에 바탕을 둔 민간신앙의 일종이다. 삼재를 막아준다고 하는 머리 셋 달린 매와 액을 물리치는 뜻의 글귀가 새겨진 부적을 목판에 새긴 것은, 목판으로 찍어서 대량으로 인쇄해야 할 만큼 부적이 널리 사용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도 불길한 일이 있거나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을 때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당사주는 당나라 때 도사로 알려진 이허중(李虛中)이 하늘에 있다고 하는 12성을 인간의 생년월일시와 관련시켜 인간의 길흉을 판단하는 방법을 쓴 책이다. 글과 그림이 같이 있는 형태로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으로 그 뜻을 바로 알 수 있도록 그려졌다. 근대까지도 당사주를 이용하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생활문화 가운데 하나로 도교에 근간을 두고 있다.
사회가 어지러운 혼란기일 때 삶이 팍팍할수록 위안을 찾으려는 믿음과 기원은 인간이 갖는 자연스러운 속성일 것이다. 도교문화의 현대적 의미를 해석해내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가령 도교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인 듯 호들갑을 떠는 것도, 도교를 미신과 동일시하며 과격하게 부정하는 것도 적절한 시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삼교의 하나로서 도교가 유교, 불교와 함께 한국과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뿌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도교문화의 깊고도 넓은 영향력을 역사와 문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 역사에 도교가 존재했다는 사실 그 자체와 도교문화가 세시풍속이나 민간신앙 등으로 남아서 우리의 삶에 지금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많은 부분 우리 삶에 유용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우리 문화의 깊은 연원들, 그리고 그 안에 녹아있는 다양한 삶의 방식들을 들여다보는 매개체로서 자리매김되길 희망한다.●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

강우방의 民畵이야기 1 에 보이는 백호. 그 고귀한 상징-上

호랑이의 장엄한 영화(靈化)가 새해를 영화시킨다

민화는 그동안 촘촘한 포위 막에 둘러싸여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미술작품은 어느 경우든 고차원의 정신세계이므로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정신적 성숙도와 함수관계(函數關係)를 갖습니다. 필자가 민화를 보고 경이를 느낀 것은 30대 초반 경주에서 조자용 선생을 만나면서부터였으며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민화 전시장을 빠지지 않고 다니며 자료를 모아왔습니다. 15년 전부터 필자는 고구려 벽화의 ‘영기문(靈氣文)’이란 조형언어를 처음으로 해독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주에 충만한 영기(靈氣)라는 것은 우주의 대기운의 대순환을 뜻하며, 그 보이지 않는 영기를 다양한 조형으로 표현한 무늬를 ‘영기문(靈氣文)’이라 하며 그 다양한 영기문에서 만물이 탄생하는 광경을 보고 ‘영기화생 (靈氣化生)’이란 용어를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조형이어서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없었고 따라서 명칭도 없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필자는 전공인 조각은 물론 회화, 금속공예, 도자공예, 건축, 복식 등 조형미술의 모든 장르에 걸쳐 새로운 시각으로 심층적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미술에 한하지 않고 동양미술, 즉 일본, 중국, 인도미술은 물론 나아가 서양의 미술도 연구하며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계속 민화작품들을 살펴왔으며 학문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 요즈음, 비로소 민화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냈습니다. 그 마음은 단지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민화를 올바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사를 조감하였기에 생긴 것입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세계미술의 조형언어들을 해독하면서 마침내 필자의 이론의 보편성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비로소 우리나라 민화가 보이기 시작하여 얼마나 위대한 그림인지 깨달았습니다.
아직도 필자는 세계미술 내지 인류의 미술을 해독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방대한 이론인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을 정립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1 이제는 민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백척간두에서 한발 나아가야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심정으로 감히 연재를 하려는 것입니다. 민화는 단지 우리나라 조선후기, 18~20세기에 걸친 서민들의 불가사의한 그림이 아니라, 인류 공통의 본성, 인간의 무의식세계를 기적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임을 알았습니다. 즉 영기화생론으로 인류의 조형미술을 새로이 밝히는 과정에서 마침내 민화가 보였고, 우리가 원래 갖추었던 인간의 무의식을 무한히 확대할 수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말했지만, 바로 그 불가사의한 세계를 하나하나 밝히려 합니다. 그러므로 미술사학은 물론, 민속학, 사상사, 심리학 등 인문학점 관점에서 민화에 널리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민화는 모든 화목(畵目)에 걸쳐 있으나 ‘세화(歲畵)’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원래 임금이 새해를 맞이하여 신하들에게 내리기도 하고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기도 하는 그림이지만, 서민들 사이에도 그런 풍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화 가운데 하나인 ‘까치 호랑이(虎鵲圖)’에서도 그림 솜씨에 따라 궁궐 그림 내지 사대부 그림과 민화는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세화라고 해서 무조건 모두 민화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민화를 공부하면서 필자가 절실히 느낀 것은 바로 ‘민화양식(民畵樣式)’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민화양식을 완벽히 표현한 것이라면 한국회화사에서 마땅히 큰 비중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민화양식’은 앞으로 연재를 하면서 자연히 정립될 것입니다. 세화를 둘러싼 여러 설명은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므로 이 글에서는 반복하지 않습니다. 바로 작품으로 다가가 영기화생론으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류와 상징 추구를 이미 수없이 시도해 왔던 조자용, 김호연, 윤열수, 이명구, 정병모 등 선학들의 추구와 자료 집성이 없었다면 민화에 새로운 접근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마도 필자의 글을 처음 대하는 독자들은 당황할지 모르지만 인내를 가지고 정독하고 그림 분석을 꼼꼼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의도로 연재를 하는지 차차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kang8이른바 <진주 호랑이>라고 불리는 호랑이의 조형에 대해 채색분석해보기로 합니다. 신재현(申在鉉)이라는 화가가 그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진주 호랑이>를 나름의 채색분석법에 따라 새로이 채색하면서 독자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 합니다. ‘채색분석법(彩色分析法)’이란 필자가 조형해석학(造形解釋學)이란 방법론을 창시하면서 영기화생론을 나름의 조형원리에 따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채색하여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진주 호랑이> 그림은 현재 4점 정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2 무늬들을 선으로 그려보면 매우 유려하고 역동적입니다. 필자가 찾아낸 제1 영기싹 영기문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시켜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기문’이란 생명의 생성 과정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조형으로 ‘식물모양 영기문’이 있고 ‘동물모양 영기문’이 있는데 동물모양 영기문은 조형적으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생성과정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줄무늬는 물론 호랑이의 줄무늬에서 유래하지만 그 무늬를 추상적이고 도식적으로 다른 고차원의 영기문으로 변형시켜 호랑이를 영화하는 동시에 호랑이라는 영수(靈獸)를 화생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 다양한 영기문에서 호랑이가 영기화생(靈氣化生)하고 있습니다. ‘화생(化生)이란 말은 종교적으로 초자연적 탄생을 뜻합니다. 우선 꼬리 끝을 보면 동심원이 있는데 이것은 무량보주(無量寶珠)를 나타내며 간단히 말하면 가장 강력한 대 생명력을 함축하고 있는 영기문입니다. 보주는 보석이 아니고 영기가 충만한 우주를 압축한 것입니다. 즉 이 그림에서 호랑이는 바로 꼬리의 맨 끝의 무량보주에서 화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꼬리와 몸에 걸쳐 공간에 따라 길고 짧은 추상적이고 도식적인 갖가지 다른 영기문이 감싸고 있습니다. 앞의 오른 다리 어깨에는 제1영기싹이 있어서 마치 태극무늬 같으며 그 주변에 빨간 색으로 칠한 짧은 영기문과 동심원의 무량보주들이 밀집하여 있는데, 이것은 영기를 힘껏 밀집시켜 다리를 화생시키려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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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원리는 이미 고구려 벽화에서 밝혀냈기에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앞의 왼쪽 다리 어깨는 보이지 않으나 마찬가지로 갖가지 영기문이 밀집하여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네 다리의 발가락들은 모양이 ‘붕긋붕긋’합니다. 이런 형태 역시 사물을 영화시키는 한 방법입니다. 발이 이렇게 뭉게구름처럼 표현된 것은 그려진 호랑이는 호랑이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호랑이의 조형을 ‘영기문의 집적(集積)’으로 표현하여 만물생성의 근원적인 존재로 영화시켰다는 것을 지방 화가는 놀랍게도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뒤의 왼쪽 다리 무릎에도 제1 영기싹 영기문과 짧은 면으로 된 제1 영기싹 영기문이 밀집하여 다리가 화생하고 발은 역시 붕긋붕긋한 구름모양 영기문으로 영화시키고 있습니다. 얼굴은 포악대소상(暴惡大笑相)입니다. 큰 눈은 보주를 상징합니다. 눈썹에는 잘디잔 보주들이 보일 듯 말듯 하고 털이 강력하게 뻗쳐 있는데 보주에서 발산하는 영기입니다. 둥근 콧구멍도 보주입니다. 그 코에서 같은 간격으로 영기문들이 발산하며 등 뒤로 넘어갑니다. 코 양쪽으로 긴 수염이 날카롭게 뻗쳐나가 있는데 이 역시 영기가 힘차게 발산하는 모습입니다. 크게 벌린 입을 보면 날카로운 송곳니가 위아래로 솟구쳐 있는데 역시 제1 영기싹 영기문입니다. 용의 입모양은 바로 호랑이의 입에서 빌린 것입니다. 혀는 짧지만 역시 제1 영기싹 영기문을 입체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턱 아래의 빨간색 작은 보주가 중요합니다. 그 보주에서 제1 영기싹 영기문들이 파동을 치며 양쪽으로 퍼져 갑니다. 가슴이 유난히 둥글게 튀어나왔지요? 이 역시 가슴에 영기를 힘껏 불어넣은 것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보면 이 호랑이는 제1 영기싹의 온갖 변형과 보주로 이루어진 형태들의 집적으로서 영기문에서 호랑이가 화생하는 형상인데, 만물생성의 근원을 상징합니다.3 동물모양의 생성 과정은 꼬리부터 시작하여 머리에서 끝납니다.

호랑이, 영기문으로 이루어진 조형

또 다른 <진주 호랑이> 그림을 살펴볼까요? 김세종 씨 소장 진주 호랑이 그림은, 똑같은 민화양식으로 그린 리움 소장 호랑이 그림의 제발에 쓰인 화가 신재현이 그린 것입니다. 제발(題跋)은 다음과 같습니다. 호랑이 머리 바로 옆에 ‘風聲聞於千里 吼蒼崖而石裂(호랑이의 바람소리 멀리 천리에 이르고, 드높은 절벽을 만나 으르렁 대니 절벽이 깨어져 열리네)’이란 글귀가 오른쪽에 조그맣게 있고, 왼쪽 구석에 ‘虎嘯南山 鳥鵲都會’ (호랑이가 으르렁 대면 까치무리가 모두 모여든다. 리움 소장품에는 鳥鵲 대신에 群鵲이라 쓰여 있다.)가 역시 까치 뒤에 조그맣게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다룬 리움 소장 호랑이 그림에도 같은 제발이 있는데 반갑게도 ‘甲戌 元旦 申在鉉寫’라는 제발이 오른쪽 맨 위에 쓰여 있으나 도장은 없습니다. 즉 두 그림은 모두 신재현이라는 작가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고 그 화가는 다른 화가와 달리 독창적인 화풍을 확립하였음을 알 수 있어 비교해 보면 흥미가 있습니다. 그는 19세기에 전라도 지방에서 활약한 화가라고 합니다.4 부분적으로 다르지만 똑같은 양식입니다. 귀는 더욱 뚜렷한 영기문으로 표현했고, 보주인 눈 위아래에서 면으로 된 제2 영기싹 영기문이 발산하고 있으며, 턱밑의 보주, 앞다리 어깨와 뒷다리 무릎에 밀집하여 다리들을 화생시키고 있는 제1 영기싹 영기문과 무량보주들, 그리고 뭉게구름 같은 발들을 보면, 호랑이는 호랑이가 아니요, 영기문의 집적임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꼬리는 실제 호랑이의 것보다 훨씬 길게 변형시켜 꼬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선 이 호랑이 줄무늬의 정체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우리는 고구려 삼실총(三室塚)과 강서대묘(江西大墓)에서 사신(四神) 가운데 백호가 영기화생하는 조형을 살펴보고 민화의 호랑이와 같은 조형정신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실총의 천장에 그려진 작은 백호는 비록 작은 도상이지만, 백호가 청룡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호랑이가 현실의 동물이라면 상상의 산물인 용처럼 가늘고 길 수 없습니다. 역시 다리 네 군데에 영기문이 있고 등에는 줄무늬가 있는데, 그 줄무늬는 이미 현실의 호랑이의 줄무늬가 영화해서 영기문이 된 것이어서 불화의 조형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 작은 백호의 이마에 빨간 보주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호랑이는 용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호랑이도 보주와 관계가 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민화 호랑이에도 몸에 보주가 많이 표현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호랑이의 줄무늬와 표범의 둥근 무늬가 차원을 달리하여 모두 영기문과 보주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서대묘의 백호를 보면 네 다리에 연이은 빨간 색의 제1 영기싹 영기문에서 다리가 화생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다시 다리에서 녹색의 털 같은 영기문이 발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코 휘날리는 털이 아닙니다. 등에는 간략하게 줄무늬를 넣었습니다. 앞다리의 양 어깨 부분에 강력한 영기문이 밀집하여 있는 것은 다리를 제외한 몸을 화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kang9그러므로 <까치 호랑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랑이이며 그 호랑이의 조형적 성격과 상징은 시대를 거슬러서 고구려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백호의 백색은 다만 오행사상에 따른 관념적인 것일 뿐, 실은 고구려 벽화에서 호랑이를 흰색으로 채색한 예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까치 호랑이 그림에 나타나는 호랑이는 현실의 호랑이가 아니요, 이미 고구려 시대부터 영화시킨 비현실적인 초자연적 존재로서 백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야 청룡도 반드시 청색으로 칠하지 않더라도 초자연적 존재와 같은 가치를 지니며 서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즉 세화의 호랑이는 신령스러운 백호이고 용은 신령스러운 청룡입니다. 사신 가운데의 백호와 청룡입니다. 사신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며 우주에 충만한 영기를 구상화한 것이지 사방의 수호신이 아닙니다.
새해 첫날에 역시 만물생성의 근원인 용과 함께 대문을 장엄했다면 참으로 의미 깊은 그림입니다. 새로운 해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고차원의 영적(靈的)인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기원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면, 새해가 생명력으로 가득 찬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렸다면, 민화가 새로이 보일 것입니다. 조형을 분석해보면 단지 집의 수호신이나 벽사의 역할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명하지 않은 무명화가, 실제로 이름을 남긴 화가도 있습니다만, 그 고차원의 조형 세계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떻게 고구려 벽화에 나타났던 조형들이 조선후기에 눈부시게 부활하는 것일까요? 과연 민화양식이란 무엇일까요? 왜 호랑이는 분노상을 띠는 것일까요? 학계에서는 왜 호랑이와 표범을 구별하지 않는가요?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1 필자가 정립하고 있는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이라는 미술사학 내지 문화 전반에 걸친 방법론에 대하여는 다음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강우방, <제5장 영기화생론과 조형언어>, 《수월관음의 탄생》, 글항아리, 2013, pp.74~90.
2 이러한 화풍의 그림을 진주 지방의 화가 신재현이 여러 점 그려서 ‘진주 호랑이’라 부른다. 윤열수, 《민화 이야기》, 디자인하우스, 1995, p.24.
3 제1 영기싹, 제2 영기싹, 제3 영기싹 등이나 보주와의 관계 등 낮선 용어들이나 그 조형들이 지니는 엄청난 상징들은 충분히 파악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의 책이나 두 해 동안 신문에 연재한 ‘틀린 용어 바로잡기’를 필자의 홈페이지 www.kangwoobang.or.kr에서 자세히 보실 수 있으므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강우방, 《한국미술의 탄생》, 솔, 2007. 이 저서는 모든 장르에 걸친 작품들을 영기-영기문-영기화생으로 풀어내므로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다.
4 이명구, 《文字圖》, Leedia, 2005, p.164. 신재현은 19세기에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화가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甲戌년이면 1874년과 1814년이 떠오른다. 나이를 고려하면 1814년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뉴 페이스 2014] 정지현 – 도시의 기억상실증에 대한 보고서

도시의 기억상실증에 대한 보고서

지금도 대한민국 국토 곳곳에서는 도시 재생이라는 명목으로 개발이 범람하고 있다. 한국은 이른바 ‘아파트 공화국’으로 명명되지 않던가? 정지현의 사진작업은 재개발에 감상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철거가 진행되는 과정 그 자체에 집중한다. 그는 “재개발지역에서 살았던 경험 때문인지 철거민을 바라보는 연민 어린 시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피해자와 수혜자의 입장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재개발의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던 사람도 보상을 많이 받으면 어느새 승자가 되어버린다.
서울 토박이인 정지현은 아파트촌인 잠실에서 자랐다. 그는 잠실 일대가 아파트 재개발지역으로 선정되면서 20년 넘게 살던 곳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주위 친구들조차 어릴 적 추억이 담긴 공간에 대해 어떤 얘기도 없이 그저 우리 동네가 좋아진다, 땅값이 오른다는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그때부터 정지현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속에서 일상의 공간이 얼마나 힘없이 부서져버리는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작업도 2005년 당시 철거를 눈앞에 둔 1세대 아파트들을 기록한 것이다. “저는 사진가이지만 사진이라는 매체를 쓰는 데 분명한 당위성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사라지는 것의 리얼리티를 담아내는 것이 사진만이 할 수 있는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3월 1일부터 31일까지 KT&G 상상마당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데몰리션 사이트>에 선보인 작업은 2011년부터 인천 루원시티와 안양 덕천지구의 변모상을 담은 것이다. 그는 한밤중에 감시망을 피해 곧 철거될 건물에 잠입해 내부 방 하나를 온통 빨갛게 칠했다. 이 같은 퍼포먼스는 철거로 처참하게 무너진 누군가의 삶의 공간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그리고 철거가 진행되면 그는 매일 현장을 찾아가 빨간 방이 사라지는 과정을 기록했다. 빨간 방이 해체된 광경은 마치 건물의 으스러진 심장 혹은 건물이 흘린 피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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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현의 사진은 종종 ‘도시화’, ‘재개발’이라는 키워드로 읽히지만 무엇보다 그의 관심은 파편화된 도시 공간에 있다. 집 옆 공터도 접근 불가능하게 철판으로 가려놓으면 그곳은 어느새 없는 공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의 삶이 녹아있는 공간과 도시의 재개발 사이의 단절을 어떻게 연결시킬지에 관해 집중한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재개발 현장에 주목하는 작업 방향에 대해 고민이 많다. “도시에는 분명 다양한 문제들이 있는데 제가 재개발이란 이슈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답답함이 있습니다.” 딜레마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는 3년 전부터 강원도 태백의 지역성에 관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슬비 기자

[뉴 페이스 2014] 박영진 – 관계를 정의하기

관계를 정의하기

탁자 중앙에 끼워진 가로막은 나무로 만들어진 창살, 거울, 빈 나무프레임, 그림, 얼굴모양으로 깎여 있는 등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어떤 프레임을 끼고 대화를 하든 안하든 상관없다. 그저 이편과 저편에 누군가 앉아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행위는 이른바 내 앞에 앉아있는 그 누구와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다. 박영진의 이 <마주하기로>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관계’다. 그런데 그는 그 ‘관계’에 대한 정의내리기에 주저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관계는 주변의 모든 환경에 영향을 받고, 다양한 확률 속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어느 한 ‘관계’도 그 정의가 겹치기가 어렵지요.” 그러나 정의되어 있지 않은 관계는 없다. 홀로 살 수 없는 ‘관계’의 연속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그렇다. 그렇기에 누군가와의 관계는 일상의 주된 내용이 된다. 하지만 이른바 ‘양방향성’을 근간으로 하는 관계맺기에서 우리는 항상 자신의 주관에 따라 관계를 정의한다. 박영진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접근한다. 그것은 서로의 관계를 좀 더 지속해 보고자 하는 새로운 방법 혹은 새로운 틀을 고민한 것일 수도 있겠고, 지금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작명(作名)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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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해 연작에는 상황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작가적 개입이 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간다. 얼마 전 막을 내린 문화역서울284의 <온(溫)·기(技)전>에 출품한 <커피짐 (Coffeegym)>에서 앞서 언급한 <마주하기로>와 연작을 통해 보여줬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적극적인 프로세스로 이어갔다는 점에서 그렇다. “<커피짐>은 정말 적극적이고 제가 재밌어하는 표현인 ‘착한 작업’입니다. 누구나 너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카페를 이용해서 한번 대화를 해보는 것이지요. 다음 프로젝트를 물었다. “소박한 목표는 이루어졌어요. 앞으로는 적극적인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기보다 어떤 관계인가, 어떤 형식이어야 할까 등등 고민해야 될 문제가 많습니다.”
현재 박영진은 스터디 모임에 열심이다. 전공에 대한 거리가 아닌 다양한 사유의 깊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한단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활을 책임져야 할 사회인으로서의 활동도 하고 있다. “직장 동료들의 삶을 내 삶과 비교해가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면서 감기에 들기보다 건강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고민되는 바는 언제 월급쟁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같은 월급쟁이이면서 기자에게 이렇게 되묻는 박영진은 “제가 문을 두드린다고 활짝 열어줄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바라는 미술판은 끊임없는 기회의 연속인 곳이면 좋겠다”며 희망을 놓지 않는다.

황석권 수석기자

[월드 리포트] 2014 The Whitney Biennial -3명의 큐레이터, 3개의 전시, 하나의 비엔날레

서상숙  미술사

1932년 시작, 2년마다 열리는 휘트니비엔날레 제77회 전시가 지난 3월 7일부터 뉴욕시 맨해튼에 위치한 휘트니미술관에서 개막해 5 월 25일까지 계속된다. 마셀 브루허가 설계한 현재의 빌딩에서 열리는 마지막 비엔날레로 개막 3일 전에 있었던 프레스 프리뷰에서 미술관 직원들은 물론 작가들, 그리고 그 건물을 드나들며 취재를 해왔던 전 세계의 기자들 모두가 미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앞장서서 지켜보았던 휘트니미술관과 비엔날레에 대한 경의와 향수를 표했다. 비엔날레의 도록 표지도 휘트니 건물의 외벽에 물감을 칠하고 종이에 문지른 프로타주로 만들어졌다.
휘트니미술관은 현재 맨해튼 다운타운 미트패킹 디스트릭에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새 건물을 짓고 있다. 2015년 완공 예정인 이 건물에서 다음 비엔날레가 열려야 하지만 공사의 진척 상황에 따라 계획할 예정이어서 2016년 비엔날레는 열리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비엔날레는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관 소속이 아닌 외부큐레이터 3명만으로 진행되었다. 뉴욕근대미술관(MoMA)의 수석큐레이터인 스튜어트 코머(Stuart Comer, 미디어와 퍼포먼스아트부),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현대미술관(ICA)의 부큐레이터이자 작가인 앤터니 엘름스(Anthony Elms), 그리고 작가이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예일대에서 강의하는 미셸 그래브너(Michelle Grabner)다.
이들은 또 뉴욕 이외의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코머는 지난해 9월 뉴욕으로 옮기기 전 테이트 미술관 큐레이터로서 런던에서 10여 년 동안 거주했으며 엘름스는 3년 전 필라델피아로 옮기기 전 시카고에서 7년, 그래브너는 오랫동안 위스콘신 주와 일리노이 주에서 2개의 대안공간을 운영하는등 지역 미술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세 명의 큐레이터는 지금까지 협업형태로 이루어지던 비엔날레의 전통을 깨고 독립적으로 작가 선정에 나섰으며 휘트니미술관 2, 3, 4층 중 한 층씩을 맡아 전시를 꾸몄다. 3개의 전시를 통해 3개의 목소리를 내는 하나의 비엔날레가 된 것이다.
《 뉴욕타임스》의 미술담당 기자 할렌드 카터는 기사에서 이번 비엔날레를 “거대한 3단 케이크”에 비유하기도 했다.
도록도 ‘세 명의 큐레이터에 의한 세 개의 다른 비엔날레’라는 특징을 살려 한 권으로 이루어졌지만 3부로 나눠 각자의 방식대로 편집하고 종이 질도 각기 다르게 만들어진 것이 눈길을 끈다. 큐레이터들 그리고 미술평론가들의 난해한 글 대신 작가 본인, 동료, 낯선 사람들로부터 들은 작가 개개인의 작품 소개에 비중을 둔 것도 신선하다.
이번 비엔날레에 초대된 작가는 모두 103명으로 2012년의 2배에 달한다. 전체적으로 작품들이 빼곡히 전시돼 (특히 4층) 작품 하나하나에 필요한 공간이 적절히 주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전시장 이외에도 층계에 설치된 작곡가 샬레만 팔레스타인(1947~, Charlemagne Palestein, 엘름스 선정)의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휘트니미술관 로비 천장의 전구에 스피커를 설치한 세르게이 체렙프닌(1981~, Sergei Tcherepnin, 코머 선정)의 인스톨레이션, 지하식당의 발코니에 설치된 라다메스 주니 피게로아(1982~, Radames “Juni” Figueroa, 코머 선정)의 하우스 프로젝트, 그리고 시간별로 진행되는 퍼포먼스까지 합치면 다른 어느해보다 많은 양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래브너가 52명, 코머가 27명, 엘름스가 24명의 작가를 각각 선정하였다. 시카고, 위스콘신, 일리노이 등 중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거나 일하고 있는 두 명의 큐레이터의 성원에 힘입어 이례적으로 중부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이 대거 선정되었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성은 ‘하이브리더티(hybridity, 잡종성)’다. 19세기에 처음 언급되고 연구되기 시작한 하이브리더티의 개념은 ‘어떤 문화도 섞이지 않은 것, 즉 순종은 없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20세기에 시작된 포스트 모더니즘은 하이브리더티가 일반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심화된 하이브리더티의 확산은 미술의 정의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2년 전 76회 비엔날레에서 미술과 비디오는 물론 음악, 퍼포먼스, 댄스 등을 함께 초대함으로써 호평을 받았는데 이번 비엔날레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 깊이와 다양성을 과감하게 확장했다. 단순히 장르의 혼합 내지는 크로스오버라는 영역의 확장을 넘어 ‘이것도 미술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할 정도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21세기의 르네상스맨(우먼)이라고 할 만큼 이번에 선정된 작가 중 상당수가 미술작업뿐만 아니라 음악(악기 연주, 작곡, 녹음), 문학, 비평, 사업, 출판, 영화와 연극감독, 배우, 시인, 소설가, 정치운동가 등을 겸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예를 들어 개리 인디애나(1950~, Gary Indiana)는 1970년대부터 미술작가로 활동하면서 소설가, 극작가, 연극감독, 배우 등을 겸업해왔다. 심지어 본인조차 자신이 미술가라고 여기지 않던 사람이 다수 포함되었다. 큐레이터들은 그들의 지적 작업과정이 미술과 다를 게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브너가 선정해 전시되고 있는, 2008년 마흔여섯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소설가 데이빗 포스터 월래스(David Foster Wallace)가 죽기 직전까지 쓰고 있던《 창백한 왕(The Pale King)》의 작업노트는 과연 미술품인지 문학 유품인지 경계가 모호한게 사실이다.
세미오텍스트(Semiotext(e))는 1974년 기호학 등 프랑스의 철학과 예술이론을 미국 미술계에 소개하기 위해 뉴욕의 다운타운에서 소책자를 발간하기 시작한 출판사다. 현재는 캘리포니아로 옮겨 연평균 10권의 책을 발행하고 있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28권 소책자를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세미오텍스트를 선정한 큐레이터 코머는 다음과 같이 그 선정배경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미술가의 목소리(의견)에 관한 것이다. 미술가의 목소리가 그림이나 조각 등의 전통적인 미디엄을 통해서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출판과 저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에게 아이디어의 전파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하게 하며 어떻게 미술가의 목소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지를 진지하게 관찰해보게 한다. 그래서 미술관이 단순히 미술품을 전시하는 상자(display case)로서뿐만 아니라 지식의 생산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리티컬 프랙티스 사(Critical Practices Inc, CPI, 그래브너 선정)는 비엔날레 기간 비공개로 3개의 라운드업 테이블을 개최하고 그 기록을 배포한다는 프로젝트를 비엔날레 작품으로 출품했다. 미술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대안 토론장을 만든다는 것이다.
엘름스가 선정한 수전 하우(1937~, Susan Howe)는 시인이다. 미술가에서 시인으로 전환한 수전 하우는 이번 비엔날레에 미국, 영국, 아일랜드 시인들의 시를 책에서 복사하여 자른 조각을 흰종이의 한가운데에 붙이고 액자에 넣어 시낭송을 하는 자신의 목소리 레코딩과 함께 출품했다. 언뜻 미니멀리즘 드로잉처럼 보이는 하우의 이 작품은 읽기와 보기, 그리고 쓰기와 살펴보기, 듣기와 느끼기 등 복합적인 문학과 미술품의 다중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룹으로 작업하는 컬렉티브가 8개나 선정되었다는 것도 하이브리더티의 확산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꼽을 수 있다. 작가의 이름과 사인은 그 미술품의 소유권을 영원히 증거하는 것으로 미술계의 오랜 관행인데 컬렉티브는 작가 개개인의 이름과 소유권 (그리고 그로써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룹이 작품을 만들고 그룹의 구성원과 인원수는 수시로 바뀔 수 있으므로 작가의 이름은 의미가 없다.
아카데미 레코드(Academy Record, 시카고, 2000년 결성), SEL(캠브리지, 메사추세츠주, 2006년 결성), 다국적 그룹인 HOWDOYOUSAYYAMINAFRICAN?(2013년 결성), 마이 바바리언(My Barbarian, 뉴욕, 2000년 결성), 세미오텍스트(로스앤젤레스, 1974년 결성), CPI(뉴욕, 2010년 결성), 퍼블릭 컬렉터스(Public Collectors, 시카고, 2007년 결성), 트리플 캐노피(Triple Canopy, 브루클린, 뉴욕, 2007년 결성) 등이 그들이다.
하버드대 인류학과 교과과정의 일부로 시작된 센서리 에스노그래피 랩(Sensory Ethnography Lab, SEL, 코머 선정)은 현재 미국에서 역사상 가장 실험적인 영화를 만드는 인큐베이터로 올라섰다. SEL은 미술이나 예술작품으로서의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며 아직도 자신들을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시각환경학과와 인류학과의 합동수업 프로젝트인 SEL은 사라져가는 문화를 기록, 연구하는 에스노그래픽 필름을 만든다. 고고학자이며 필름메이커인 루시엔 캐스팅-테일러(1966~, Lucien Castaing-
Taylor)가 2006년 이 클래스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2009년 작 <스위트그래스(Sweetgrass)>는 여러 영화제에 초대돼 상영되는 등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몬태나에서 양을 치는 두 명의 카우보이를 3번의 여름에 걸쳐 기록한 것으로 그 비주얼의 뛰어난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맥이 끓긴 마지막 양치기의 삶을 기록한 이 다큐멘터리는 훌륭한 예술영화가 주는 감동을 그대로 전한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그가 베레나 파라벨(1971~, Verena Paravel)과 함께 작업하고 있는 새로운 클래스 프로젝트 4부작 <리바이어던(Leviathan)>(2012)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을 출품했다. 리바이어던은 성서에 등장하는 사나운 바다괴물로 한때 세계적인 고래잡이 항구이며 허먼 멜빌의 소설 《 모비 딕》의 출발지인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 어부들의 삶을 기록한 작품이다. 소형 방수카메라를 어부들의 몸과 선박 자체에 부착시켜 근접촬영함으로써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4층 입구에 전시된 게일런 거버(1955~, Gaylen Gerber, 그래브너 선정)의 출품작 <백드롭(Backdrop)>은 거버가 만든 전시벽에 그가 선정한 다른 작가의 작품을 거는 개념주의 작품이다. 거버는 이 벽을 세움으로써 그 자신이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로 역할전환을 한다. 그는 전시기간을 반으로 나누어 무명인 트레버 쉬미즈(1978~ ,Trever Shimizu), 중견작가로 잘 알려진 셰리 레빈(1947~, Sherrie Levine), 데이빗 하몬즈(1943~, David Hammons) 등 세 작가의 작품을 건다. 쉬미즈는 우연히 거버에게 비엔날레 큐레이터 중 한 명인 그래브너가 자신과 작업실을 같이 쓰는 작가를 방문하러 왔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거버는 쉬미즈를 자신의 작품의 일부로 초대했다.
이처럼 자신의 작품으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역초대한 작가는 거버뿐만이 아니다. 코머가 선정한 리처드 하킨스(Richard Hawkins)와 캐서린 오피(Catherine Opie)는 그들의 대학동창이며 1990년 에이즈로 죽은 토니 그린(1955~1990, Tony Green)의 작품을 큐레이팅해 출품했다.
물론 이번 비엔날레에는 미술의 시각적 아름다움의 기본 요소인 선과 색 그리고 형태의 조화를 추구하는 작품 역시 다수 전시되었다. 89세의 고령으로 레바논 출신 시인이자 화가인 에텔 애드난(Etel Adnan, 코너 선정)의 사방 30cm 크기의 작은 오일페인팅과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수채화는 심플하게 그려진 종이그림의 단아한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공예 요소가 강한 작품들도 대거 선보이고 있다. 그래브너가 선정한 스털링 루비(1972~, Sterling Ruby)와 시호 쿠사카(1972~, Shio Kusaka)의 도자기, 셰리아 힉스(1934~, Shelia Hicks)의 섬유작업, 피터 슈프(1958~, Peter Schuyff)의 연필조각, 조엘 아터슨(1959~, Joel Otterson)의 비즈 커튼, 코머가 선정한 리사 앤 아워바치(1967~, Lisa Anne Auerbach)의 정치적 메시지(글자)가 들어간 뜨개질 작업 등은 공예의 특성인 수작업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들이다.
또한 그래브너는 유일한 여성 큐레이터면서 작가로서 여류 추상작가를 의도적으로 다수 초대했다고 밝혔다. 다나 넬슨(1947~ , Dona Nelson), 에이미 실만 (1955~, Amy Sillman), 몰리 주커만-하퉁(1975~, Molly Zuckerman-Hartung), 루이즈 휘시먼(1939~, Louise Fishman), 로라 오웬스(1970~, Laura Owens), 재클린 험프리(1960~, Jacqueline Humphries) 등이 화려한 색과 붓터치가 어우러진 대형 캔버스를 선보이고 있다. 원로 여성작가들의 추상작업이 최근 세계미술시장의 대세로 떠오른 현상을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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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휘트니비엔날레를 기획한 세명의 큐레이터  “하이브리더티를 의미있게 노출했다”

whitney3ok2014년 휘트니비엔날레에는 이례적으로 3명의 큐레이터가 각각 독립적으로 작가를 선정해 휘트니미술관 2, 3, 4층 중 한 층씩 맡아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미셸 그래브너(Michelle Grabner, 사진 가운데), 앤터니 엘름스(Anthony Elms, 사진 오른쪽), 스튜어트 코머(Stuart Comer)다.
그래브너는 시카고 미술대학 교수로 개념미술 작가이자 평론가로서 각종 미술전문지에 글을 기고하고 또 두 개의 대안공간을 소유 운영하는 시카고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인 중 하나다. 밀워키에 위치한 위스콘신대에서 페인팅으로 학사를, 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후(석사) 시카고에 위치한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페인팅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래브너는 미술작가인 남편 브래드 킬리언(Brad Killian)과 함께 대안미술공간 ‘서버번(The Surburban)’과 ‘가난한 농장(The Poor Farm)’을 운영하고 있다. 그랜트도 신청하지 않고 자비로 운영하고 있는
이 두 대안미술공간을 통해 200명 이상의 작가가 전시했다고 한다. ‘서버번’은 자신의 집 뒷마당에 있으며 ‘가난한 농장’은 2008년 실제 농장을 구입해 아티스트 프로젝트 스페이스로 꾸며 전시를 비롯 무료 서머스쿨,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브너는 이번 비엔날레에 대해 “여성 추상미술작가, 재료의 물질성과 그 영향, 그리고 주목할 만한 개념미술의 방법론을 추구하는 작가를 중점적으로 찾았다”고 밝혔다.
필라델피아의 현대미술관(ICA) 큐레이터이자 평론가, 작가인 앤소니 엘터스 역시 2011년 필라델피아로 옮기기 전 시카고에서 작가 겸 큐레이터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이 있다. 미시간 주립대학교 미술학과(학사), 시카고 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페인팅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시카고 지역에 산재한 작가의 전시공간 운영을 맡아 한 것을 시작으로 로나 호프만 갤러리의 프레퍼레이터, 시카고에 위치한 일리노이 대학교의 ‘갤러리 400’의 부관장 등을 지냈다. 미술인들의 글을 출판하며 전시장도 겸하는 ‘하얀 벽(White Walls)’의 편집장 겸 디렉터이며 각종 미술이론지에 평론을 기고하고 있다. “그래브너와는 시카고에서부터 잘 아는 사이”라고 밝힌 엘름스는 “그러나 우리 3명의 큐레이터는 독립적으로 작가선정을 했다”면서 “어쩔수 없이 겹치는 작가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는 진지하게 논의를 거쳐 해결했다”고 밝힌다.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휘트니 현 빌딩에서의 마지막 비엔날레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었다”면서 “설계자인 브루허가 남겨놓은 메모를 참고했는데 그중에서 ‘뉴욕이라는 공간에서 미술관이란 무엇인가’라는 귀절을 마음에 담고 진행했다”고 밝힌다. 그 자신이 드럼 연주자면서 레코드를 수집하는 엘름스는 이번 전시에 시와 문학, 음악에 관련된 미술적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을 포함시켜 눈길을 모았다.
스튜어트 코머는 칼리튼 대학 미술학과에서 미술사를(학사), 그리고 런던의 로열미술대학에서 미술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난해 9월 뉴욕 모마의 수석 큐레이터로 옮기기 전까지 런던의 테이트미술관에서 필름비디오 아트의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실험적인 영화와 비디오를 수집하고 상영하는 ‘탱크 테이트(The Tank at Tate Museum)’의 프로그램이 현재에 이르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큐레이터로 꼽힌다. 이번 비엔날레는 “하이브리더티(잡종성)를 의미있게 노출하는 작업을 관심있게 보았다”면서 “이주(migration), 이중젠더(binary gender), 크로스 내셔널(cross-national) 등을 다루는 작품을 관심있게 보고 있다”고 밝힌다. 코머는 “뉴욕은 아직도 미술의 중요한 생산지지만 더 이상 세계미술의 유일한 중심지가 아니다”면서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중요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며 국제 비엔날레를 많이 가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밝힌다. 

뉴욕=서상숙

Preview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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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달의 변주곡

달의 변주곡
백남준아트센터 2. 26 – 6.29

백남준의 1965년 작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보름달에서 그믐달로 이울어가는 모습을 12개의 TV로 재현한 작품이다. ‘텔레비전’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달은 예나 지금이나 ‘원격시(遠隔視)’의 대표적인 대상이다. 무엇보다도 달의 특성은:1)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그것을 볼 수 있고, 2) 끊임없이 변화하며, 3)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데 있다. 지구의 생명은 달의 영향으로 생겨나고 진화했다. 그것이 조석간만을 통해, 순환의 주기를 통해 지구의 표면을 휘젓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의 운동성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인류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비약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백남준이 달을 떠올리면서 그것의 모습을 일련의 연속사진으로, 아니 연속 비디오로 다루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와 순환의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실제의 달을 촬영한 것이 아닌, 진공관 TV에 자석을 대거나, 구형으로 생긴 물체를 촬영한 것이다. 이번 <달의 변주곡>에 전시된 작품은 2000년에 새로 제작된 것으로, 1997년에 제작된 비디오가 추가되어 총 13개의 TV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기획자인 이채영 큐레이터는 달의 ‘느린 시간성’에 방점을 찍었다. 달은 지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차고 이지러짐 자체가 한 달이라는 시간대를 주기로 느리게 전개된다. 이러한 느린 움직임은 특정한 시간적 한계점까지 지연이 이루어질 때 시각적으로 대상이 정지되어 있다고 느끼게 한다. 달의 스펙터클은 그것의 정지 혹은 극단적 느림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가시-하 지각(infra-percept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review2ok이번 전시에서 특히 놓쳐서는 안될 작품은 벨기에 출신 다비드 클라르바우트(David Claerbout)와 히라키 사와(Hiraki Sawa), 그리고 안규철의 작품이다. 다비드 클라르바우트는 2012년 미디어시티 서울에서 로 소개된 바 있다. 이번에 전시된 2013년 작 에서도, 한 장의 사진을 수많은 각도에서 본 입체적 이미지로 바꾸기 위해 그는 각각의 인물들을 25개의 이미지로 재촬영하여 같은 공간 안에 재구성해 넣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매우 느리게 움직이면서 한 장면을 바라본 것과 같은 동영상이 만들어지는데, 클라르바우트는 여기에 시선의 추상적 이동이라는 섹션을 추가함으로써 매우 형이상학적인 시선을 만들어냈다. 비를 피해 모여 있는 인물들의 군상을 떠나 비에 잠긴 흙탕길을 따라 이동하는 느린 카메라의 움직임은 마치 근원적 상태로 돌아간 것 같은 세계의 물질성을 보여준다. 느린 움직임을 통한 또 다른 작품인 은 처음부터 끝까지 디지털 기법으로 그려낸 가상적 풍경의 가상적 조합으로 이어지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수작이다. 느린 카메라의 이동을 따라 배경음악과 함께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자연의 풍경들로 이어지는 이 작품은 클라르바우트가 ‘시간의 단면’을 다루기 위해 스틸이미지로부터 출발하는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히라키 사와의 2007년 작 역시 이 전시의 중요한 부분이다. 총 6개의 패널 위에 투사된 사와 특유의 굵은 입자(grain)들로 이루어진 영상들은 각각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낡은 벽시계 위에서 현재의 시간을 보여주는 <파편> 외에 짙은 흑백영상들로 이루어진 <새와 바다>, <이끼>, <벽에게 말을 걸다>, <순간을 위하여>, <돌아오는 길> 등의 제목이 달려 있다. 극도로 아름답고 시적인 풍경이나 적요한 실내장면을 보여주는 뒤의 5개 영상에서는 언뜻언뜻 풍경 속에 원자력발전소의 모습이 나타난다. 나중에 일어날 3·11 재난을 놀랄 만큼 묵시적으로 예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상작품은 실제로 사와의 고향을 떠올린 것이라고 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처럼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듯한 시간의 흐름은 이 작품에서도 대기 속에 가득 찬 흐릿한 입자(particle)들로 흩어지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규철의 설치작업들 가운데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2014년 작 <달을 그리는 법>은 이 전시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으로 보인다. 밝은 전시장 안에서 여러 개의 둥근 거울을 이용해 조명을 반사시켜 한곳으로 모은 결과, 벽 위에는 예민하고 둥근 달 모양의 빛이 떠오른다. 이 시적이고 아름다운 설치작품은 그 간결한 형식만큼이나 뚜렷하게 달 모양의 빛을 한곳에 중첩시키는 작업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느림은 여기서 이 중첩의 퍼포먼스를 가리키며, 동시에 여러 개의 레이어로 이루어진 달빛의 흐릿함 속에도 깃들어 있다. 전시장 야외의 잔디 위에 파란색 글씨로 크게 쓰인 는 전시기간 중에 자라게 될 잔디에 덮여 서서히 사라진다고 한다.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선언된 파릇한 ‘새로운 삶의 첫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봄날의 아름다운 생명감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선언이 삶으로 변해가는 느린 시간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 역시 안규철의 시각적 시(詩)세계를 잘 요약하고 있다.
이 외에, 료타 쿠와쿠보의 2013년 작 는 미디어시티 서울에서 선보인 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안세권의 장기 프로젝트인 <서울 뉴타운 풍경> 연작은 전시 주제를 통해 또 다른 측면에서 작품의 해석을 시도했다는 장점을 보여준다. 조소희의 설치작품들 가운데에선 <비과학적인 촛불의 시학 II>가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 속에서 시간의 지각을 손에 잡힐 듯 보여주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달의 변주곡>은 주제의 해석만큼이나 개개 작품의 적확함과 수월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롭게 느끼게 하는 전시라고 하겠다. 

유진상・계원예대 융합예술과 교수

[Review] 네오산수

네오산수
대구미술관 2.11 – 5.18

동양에서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산수화는 특정한 대상으로서의 소재를 넘어서 그리는 사람들의 정신적 자세가 집약된 전통이다. 옛것이 현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고 박물관 속에 있으면 그것은 전통이 아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전통은 과거가 지금 일상 속에서 계속 존재하는 현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예컨대 우리 일상에서 멀어진 한복은 하나의 의례로만 존재할 뿐 더 이상 전통이 아니다. 산수화는 어떤가?
산수화가 예술체계 속에서 전통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은 그 제도와 정신이 온전히 이어지는 것이지, 장르적 양식이 교조적으로 보존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그 생각도 틀리지 않다고 본다. 산수화뿐 아니라 예술 전체에 관해서 우린 통일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그런 점에서, 나는 산수화 개념을 엄밀하게 정해진 기준보다 훨씬 넓게 잡는 쪽이다. 그런데 대구미술관의 <네오산수전>은 이 도식 안에서 애매한 지점에 있다.
전시 제목이 ‘새로운(neo) 산수’다. 새로운 것이 있으면 지난 것도 있단 말이다. 그런데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형식을 중시하는 정통적 견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새로운 게 아닌가? 이 전시는 새로운/낡은 도식으로 평가되는 현대미술의 언로 안에서 새로움을 선언한다. 마치 ‘새 정치’가 부동층에 속한 유권자를 향한 수사적 용어인 것처럼, 새로운 산수는 정통 산수화를 고수하려는 진영과 형식 실험을 중시하는 현대미술의 진영, 두 편에 속하지 않는 시민들에게는 참신한 표제로 다가설 것이다. 그렇다면 공공미술관이 품어야 할 한 가지 미덕은 충족되는 셈이다.
그래도 논의할 주제는 남는다. 새로움에 의해 작동되는 현대미술 속에서 이미 존재하던 ‘새로운 산수화’와 ‘새로운, 새로운 산수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만약 있다면 그 차이는 뭘까? 전시에 참여한 31명의 현대미술가는 그 재진입(re-entry)의 체계 질서를 극단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작가들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네오산수전>은 현대의 과학·기술로 인하여 크게 바뀐 인간의 미적 태도를 끌어들인다. 인공과 자연의 대립 구도 또한 전시에 출품된 뉴미디어나 형식 실험 미술이 굳이 아니더라도 예술사에서 오래된 가정이다. 이처럼 고전적인 예술의 상황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긴 하다.

윤규홍・갤러리 분도 아트디렉터, 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