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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키누스

에키누스 echinus(영)

도리아식 원주에 있어서 주두의 둥글게 말아 올린 형태로, 아바쿠스*와 기둥 몸체 사이에 있는 넓은 사발형의 부분. 에키누스란 그리스어로 ‘성게’라는 뜻인데, 이는 옛날 도리아식 주두가 성게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난족(卵族) 무늬로 채색을 하기도 했다.

→ ‘주식’ 참조

에키포 57

에키포 57 Equipo 57(스)

스페인의 젊은 작가들의 그룹. 특히 1957년 에스파시오 그룹(1954년에 결성됨)에서 탈퇴한 코르도바 출신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두아르테José Duarte, 세라노Juan Serano, 두아르트Ángel Duart, 이바롤라Augustin Ibbarola, 쿠엔카 Juan Cuenca등이 주요 멤버이며, 구축주의* 양식을 이론적 근거로 하고 있다. 미술 작품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작가 개인의 역할에 비중을 두지 않기 위해서 집단창작을 선호하였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유럽과 미국에서 전시회를 연 바 있다. 이들의 활동은 1966년으로 마감을 하게 된다.

에튀드

에튀드 étude(프)

‘습작’ ‘연습’ 따위의 뜻이다. 음악의 연습곡도 에튀드라고 한다. 영어로는 ‘스터디(study)’가 같은 뜻에 해당된다. 미술에 있어서는 작품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연구하며 공부하기 위하여 연습으로 그리거나 점토로 만들거나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제작의 준비를 위해 그려지는 습작은, 부분적인 습작이든 전체적인 습작이든 모두 에튀드라고 한다. 또 묘법의 조밀(稠密)에 상관없이, 습작으로 그려진 것은 모두 에튀드라 볼 수 있다.

에트루리아 미술

에트루리아 미술 Etrurian Art(영)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에 걸쳐 이탈리아 중부 에트루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 로마에 지배되기 이전의 에트루리아인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이탈리아 반도의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특히 미술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로마를 비롯한 서유럽의 조형미술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에트루리아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인도, 유럽어족의 침입 이전에 이미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던 토착민이라는 설, 북방으로부터 알프스를 넘어 반도에 이주했다는 설, 소아시아 서부의 리디아인이 바다를 건너 이주해왔다는 설 등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토착적인 빌라노바 문화를 계승하였고 또 동방 및 그리스의 수준 높은 문화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명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술 또한 그리스 미술과는 이질적인, 다이내믹하고 표현적인 에트루리아 미술 고유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여기에는 화려하면서 동시에 생동감과 현실감이 넘치고 신비감마저 감도는 특이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미술과의 관계나 다른 이탈리아 고대민족과의 교류, 에트루리아의 흥망성쇠나 각 도시국가의 독립적 성격 등으로 에트루리아 미술 자체의 연속적인 발전은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스 미술과의 대응에 의해 기원전 8~6세기 중엽의 동방화 양식기, 기원전 6세기 중엽~5세기 중엽의 아르카익*기, 기원전 5세기 중엽~4세기 말의 클래식*기, 기원전 4세기 말~1세기 중엽의 헬레니즘*기 등 네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중 에트루리아 미술이 전성기를 이룬 시기는 아르카익기로서 정치 및 경제적 번영과 궤를 같이 한다. 클래식기의 성격이 불분명한 것에 반해 헬리니즘기에는 에트루리아 미술의 부흥을 보게 된다. 이는 헬레니즘 양식의 사실성과 파토스적 표현성이 에트루리아인의 미감에 적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에트루리아의 미술품은 일상적인 용도에 쓰이는 공예품이 많고 장인적 성격이 뚜렷하기 때문에 <베이오의 아폴론상>의 작가로 알려진 불카Vulca를 제외하고는 미술가의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다. 에트루리아인은 토목, 건축에 뛰어나 로마인에게 도시건설을 가르치는 등 큰 영향을 미쳤다.
에트루리아 도시건설의 대표적인 예는 정연한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볼로냐 근처의 마르차보토를 들 수 있다. 한편 건축 유적은 극히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는데, 페루자의 마르치아문, 볼테라의 디아나문 등 성문(城門)이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아치* 구조는 동방에서 도입된 것으로 보이며, 퇴석법에 의한 아치구조의 원형을 체르베테리의 <레고리니가라시의 묘갱>, 베이오의 <칸파나의 묘>에서 응용하기 시작하여 위의 문들에 이르는 아름다운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궁륭 가구법(架構法)은 로마인들에게 계승되어 서양 건축사상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죽은 사람이 자신의 유해가 안치된 장소에서 계속 산다는 내세관을 가졌으므로 분묘는 에트루리아 건축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 되었다. 바위를 깎아 주택을 본뜬 묘실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다듬은 돌들이 쌓여 원형이나 사각형의 방을 아치 또는 돔처럼 덮도록 된 분묘는 건축기술적으로 뿐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건축을 아는 데에도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이들의 신전은 그리스 신전과 달리 뒷면에 주랑이 없으며, 정면성이 중시되고 기대(基臺) 위에 세워졌다. 이런 특징은 로마의 신전건축에 계승되었다. 또 그리스에서는 일찍이 사라진 목조에 테라코타 장식을 하는 방법이 에트루리아 신전에서는 유지되었다.
한편 조각에 있어서 에트루리아인은 조각의 소재로 응회암(凝灰岩)이나 사암(砂岩), 앨러버스터 등 그 고장의 재료를 사용하고 대리석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트루리아 조각의 뛰어남은 석재 조각보다 테라코타나 청동 조각에서 볼 수 있다. 신전 지붕에 장식되었던 <베이오의 아폴론상>이나 <카피톨리노의 늑대> <부부상관(夫婦像棺)> <연설자> 등이 대표적인 걸작들이다. 에트루리아 조각은 그리스 조각에 비해 평온하고 다이내믹한 표현, 비율에 개의치 않고 머리 부분에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동물, 사실(寫實), 특히 초상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조각 또한 분묘 미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헬레니즘기의 훌륭한 초상의 전통이 로마인에 의해 계승되었다.
에트루리아인은 회화를 건물의 장식으로 널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분묘 안의 벽화뿐이다. 이들은 대개 석벽에 밑바탕을 만들고 프레스코 화법으로 그려져 있다. 타르퀴니아에 있는 <새점쟁이의 묘> <사냥과 낚시의 묘> <암사자의 묘> 등의 뛰어난 벽화군도 아르카익기의 것이다. 이들 벽화에는 연회석이나 경기, 일상적인 정경 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으며 신화적 주제는 극히 드물다.
이에 비해 헬레니즘기의 것은 매우 신비로우며 명계(冥界)의 신이나 귀신이 그려지는 등 내세관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대부분 그리스 도기의 선묘화로부터 암시를 받아 남녀 인간상과 장식 문양을 흑, 백, 적, 황색 등으로 채색했다. 공예는 에트루리아인이 자랑할 만한 분야로서 금은세공, 청동 작품에 특히 훌륭한 것이 많다. 체르베테리에 있는 레골리니 갈라시의 묘에서 출토된 황금제 장신구, 청동제인 <피코로니의 키스타> 등이 대표적이다.

에피고넨

에피고넨 epigonen(독)

후계자, 추종자라는 뜻.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테베 전쟁 때 전사한 7인의 용사의 자식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10년 뒤에 테베를 멸망시켜 아버지의 복수를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것이 전용되어 예술상으로는 뛰어난 선구자의 모방을 일삼은 아류의 뜻으로 쓰인다.

엑조티슴

엑조티슴 exotisme(프)

보통 이국정서, 이국취미라고 번역된다. 그리스어의 엑소티스코스(exotiskos)에서 유래된 말로, 예술상으로는 자기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미지의 이국을 취재하여 비통속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미, 아이디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것. 따라서 낭만주의*와 결부되는 일이 많은데, 프랑스 낭만파 회화의 오리엔탈리즘*이 그 하나다. 후기 낭만파 문학에서도 엑조티슴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고티에Théophile Gautier가 있다. 그에 따르면, 엑조티슴에는 공간상의 것과 시간상의 것 등 두 종류가 있는데,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시대를 취재하는 것도 엑조티슴으로 보고 있다. 금세기 초에 흑인 조각에 대한 관심이 그 한 예이다.

엔카우스틱

엔카우스틱 encaustic(영)

→ 납화법

엔타블러처

엔타블러처 entablature(영)

고대 그리스, 로마건축에서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는 부분들을 총칭하는 용어. 기둥의 윗부분에 수평으로 연결된 지붕을 덮는 장식 부분으로, 가장 기본적인 엔타블러처의 구성은 위로부터 코니스*, 프리즈*, 아키트레이브*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엔타시스

엔타시스 entasis(그)

고대 건축 양식에서 기둥의 중간 부분을 약간 부풀게 하여 위 아래가 가늘게 처리된 모양. 거대한 원주에서 그 굵기를 같게 하면 눈의 착시 현상으로 중간 부분이 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므로, 기둥의 배 부분을 나오게 하여 건축물에 안정된 미감을 주기 위한 기법. 도리아식 기둥에서는 하단에서 전체 높이의 3분의 1까지는 거의 같은 굵기이고 중간지점의 3분의 1은 볼록한 곡선을 이루며 최상부 3분의 1은 급격히 오므라지게 한다. 코린트식 기둥에서는 중간 지점에서 극히 완만하게 축소하는 것이 관례여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고대 건축물 기둥의 엔타시스는 일반적으로 차이가 없어,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에서는 높이의 600분의 1, 에렉테이온 신전은 1,300분의 1, 파에스툼의 바실리카에서조차 120분의 1에 불과하다. 또한 르네상스 이후의 건축은 일반적으로 엔타시스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어 때로는 하단으로부터 5분의 2 혹은 12분의 5 정도의 높이에서 가장 굵게 하고 나머지 아래위에서는 현저히 굵기를 축소시킨 형태를 지니고 있다.

엔트로피

엔트로피 entropy(영)

물질계(物質系)의 열적(熱的) 상태를 나타내는 물리량의 하나로, 한 체계 안에 존재하는 무질서의 정도에 관한 양적인 척도. 물질계의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한다는 개념에 근거한 엔트로피 법칙은 열역학 제2법칙이다.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서, 우주의 에너지가 한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 그 형태가 변화될 수는 있지만 에너지 자체는 일정하여 새로이 창조되거나 소멸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 자연 현상의 변화는 언제나 우주의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 즉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진행한다.
1860년대 독일 물리학계에서 최초로 등장한 엔트로피 이론은 이전까지 서구 문화와 사상의 핵심을 형성해왔던 이성중심주의와 진보적 역사관을 전복시켰으며, 1960년대에 사회학과 문화 조직, 예술 분야에 응용되면서 개념적으로 확장되었다.
예술 심리학자인 아른하임Rudolf Arnheim은 그의 책 《엔트로피와 미술Entropy and Art》에서 우주적 무질서의 증가를 다루는 열역학 제2법칙을 예술적 창조의 영역에 결합시킴으로써 현대미술의 혼란한 상황을 설명하였다. 시각 미술에서는 역학적인 무질서, 즉 엔트로피를 지향하는 경향과 기하학적인 질서를 추구하는 경향의 두 가지 양식으로 구분되는데, 후자의 경우가 말레비치Kasimir Malevich(1878~1935)의 절대주의* 회화처럼 극도로 단순하고 억제된 양식이라면, 무작위적인 우연의 미학을 추구했던 다다*나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의 액션페인팅*이 전자에 속한다는 것이다. 아른하임은 자신의 창조물에 질서를 부여하고 조직화하려는 인간의 성향과 무질서와 엔트로피를 향해 진행되는 물질적 우주 간의 대립과 모순을 해소하려고 시도하였다.
한편 대지미술* 작가인 스미슨Robert Smithson은 《엔트로피와 새로운 기념비들Entropy and the New Monuments》(1966)에서 이성과 진보적 역사관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전통 미술사를 부인하고 엔트로피를 부각시켰는데, 특히 그에게 있어 미니멀 아트*는 미술에서 엔트로피를 산출하는 대안으로 간주되었다. 스미슨은 저드Donald Judd(1928~1994), 모리스Robert Morris, 플래빈Dan Flavin, 르윗Sol Lewitt(1928~ ) 등 미니멀리스트의 작품이 ‘비활동적인 역사’ 혹은 물리학자들이 부르는 소위 ‘에너지 소멸’의 상태를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미니멀 아트를 열역학 제2법칙과 연관시켰다. 작위적인 텅 빈 듯한 느낌, 정적인 효과 등을 창출하는 미니멀 아트의 특성을 설명하는 비평용어로 대두된 엔트로피 개념은 미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후기 산업사회에서 목격되는 혼란과 소외를 설명해주고, 1960년대말 미국의 사회와 문화를 간접적으로 수렴 비판하는 매개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