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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款

관지(款識), 관서(款署), 관기(款記)라고도 한다. ①그림을 그린 후 그림 위에 작가의 자호(字號), 제작년월일, 제작동기, 시문(詩文) 등을 기록하는 것. 넓은 의미에서 도장을 찍는 것도 포함된다. 중국의 송대(宋代)이후 보편화되었고 원대(元代)에는 문인화가 예찬倪瓚(니 짠, 1301~1374)이 긴 문장의 관지를 기록하고 도장을 찍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는 조선 후기 이래 보편화되었다. 관의 위치나 필치, 내용은 그림의 한부분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②고대 종정이기鐘鼎彝器와 같은 고동기(古銅器) 위에 새겨진 글자. 음문을 관, 양문을 지(識)라고 부른다. 고대 중국의 고동기는 제기의 일종으로 왕권이나 벽사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화려한 형태와 장식을 보여주고 있다. 고동기 위에 관지가 새겨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주대(周代)부터로 역사적 사실이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글귀를 새겨 넣었다. 따라서 고대 역사를 탐구하는 학문에서는 이러한 관의 해석을 중요시하고 있다.

관각체

관각체 館閣體

명, 청대(明淸代)의 묵색이 짙고 글씨 크기가 고른 네모 반듯하고 깔끔한 관청의 서체. 명대에는 ‘대각체臺閣體’로, 청대에는 ‘관각체’로 불렸다. 이 서체는 명, 청대의 한림원翰林院의 관료들이 즐겨 사용하였고 과거 응시자에게도 요구되어 청대 건륭乾隆 중엽 이후 크게 융성하였다. 원래 관각(館閣)은 송대(宋代)에 소문관(昭文館), 사관(史館), 집현원(集賢院)과 비각(秘閣), 용도각(龍圖閣), 천장각(天章閣)을 통칭하였으나 명, 청대에는 관각이 모두 한림원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원래 관각체라 하면 한림원의 서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후에는 판에 박은 듯 몰개성적인 서체를 낮게 평가하여 모두 관각체라 부르게 되었다.

관아재고

관아재고 觀我齋稿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관아재 조영석趙榮祏(1686~1761)의 문집. 모두 4권으로 되었으며 건(乾), 곤(坤) 2책으로 엮어졌다. 1권은 소(疏), 시(詩), 2권은 서(序), 기(記), 3권은 찬(贊), 발(跋), 상량문(上樑文), 잡저(雜著), 4권은 제문(祭文), 애사(哀辭), 행장(行狀), 묘지(墓誌) 등으로 이루어졌다.
1984년에 발굴되어 소개된 관아재고는 조선 후기에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출현하게 되는 과정 뿐만 아니라 조영석 자신의 회화관과 당시의 저명한 화가인 정선鄭敾(1676~1759)을 비롯, 화단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중 화론과 관계되는 것을 살펴보면 이병연李秉淵과 같은 회화애호가들과의 교유관계, 정선의 그림에 대한 품평,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나 미불米芾(미 후, 1051~1107)의 그림과 같은 중국회화에 대한 견문을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청명상하도> 그림을 통하여 ‘풍속’과 ‘문물제도’를 인식하게 하는 그림의 유익함에 큰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이는 회화를 잡기(雜技)라고 하여 소홀히 해서는 안되며 회화의 공용성과 실용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이어졌다. 그의 회화관은 사의*(寫意),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 사실주의의 존중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비록 화원(畵員)의 일과 사대부의 일을 명확히 경계짓는 성리학적 회화관을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닐지라도 회화의 가치를 인정한 진보적인 견해로 평가된다. 또 사생(寫生)에 대해 강조함으로써 조선 후기 진경산수의 사실주의를 잘 대변하고 있다.

관요

관요 官窯 guan-yao(중)

궁정용 도자기만을 굽는 관영(官營)의 가마*. 관요에서 생산된 정교한 도자기들은 황제의 어기(御器), 궁중의 제기(祭器), 일상용기, 혹은 신하나 외국사신에게 주는 하사품 등으로 쓰였으며, 주로 명관(名款, 年號名)이 표시되어서 시대와 제작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요로는 북송北宋 때 하남성河南省 보풍현寶豊縣 청량사淸凉寺 부근의 여관요(汝官窯, 汝窯), 휘종황제가 개봉開封에 설치한 북송관요(卞京官窯), 남송南宋 때 항주杭州에 설치된 남송관요(修內司窯, 郊壇窯)가 있고 원대(元代)의 추부요(樞府窯), 명대(明代)의 경덕진요*(景德鎭窯) 등을 들 수 있다. 청대(淸代)에까지 이 제도가 이어져 경덕진 어기창은 더욱 정비되어 강희, 옹정, 건륭대 무렵(1662~1795)에 기술이 매우 향상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관요로는 조선시대의 경기도 광주요*(廣州窯)를 들 수 있다.

관음보살

관음보살 觀音菩薩
Avalokitesvara(범)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관세음자재보살’ 이라고도 한다. 당대(唐代)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리 스민)의 휘자(諱字)를 피하여 ‘세’자를 생략하고 ‘관음’이라고 불렀다.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서원한 보살로서,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 속에 거의 들어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널리 신앙되었다. 《법화경法華經》 〈보문품普門品〉에는 위난(危難)을 당한 중생이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관음이 즉시 33종류의 화신으로 변해 그들을 구해준다고 되어 있으며, 현령(顯靈)하여 불법을 강연하던 도량(道場)이 절강성浙江省 보타산普陀山에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법화경法華經》외에 《화엄경華嚴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능엄경楞嚴經》을 중심으로 관음신앙이 전개되었다.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을 대세지보살과 지장보살*과 함께 협시*하는 경우가 많고, 아미타를 협시하는 8대 보살로서도 많이 표현된다. 형상은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불을 새기고 손에 보병이나 연꽃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절에서 초기에는 남자상이 많았으나, 당대(唐代)이후로는 여자상으로 바뀌었다. 밀교의 관음은 백의관음白衣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羂索觀音 등이 있는데, 이는 중생의 제도를 위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안서安西 유림굴楡林窟 당대 벽화 속에 있는 수월관음*水月觀音과 대족심신거굴大足心神車窟의 오른쪽 벽에 있는 일월관음日月觀音, 산서성山西省 평요현平遙縣 쌍림사雙林寺에 있는 명대(明代)의 니조자재관음泥造自在觀音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관음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십일면관음과 수월관음, 천수관음 신앙이 가장 많이 신앙되었고, 관음보살화로는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가 많다. 관음보살은 관음전 또는 원통전에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