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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묘

백묘 白描

고대 ‘백화*(白畵)’에서 유래한 중국 회화의 기법. 묵선(墨線)만으로 대상을 묘사하면서 색채를 칠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넓게는 색채를 칠하기 전의 밑그림, 분본*, 소묘* 등도 포함되지만, 본격적인 백묘화는 선묘(線描)로서 완결시킨 작품을 가리킨다.
당대(唐代)의 오도자吳道子(우 따오쯔), 북송北宋의 이공린李公麟(리 꽁린, 1040~1106), 원대(元代)의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 등은 인물을 그리면서 화장을 없애고 옅고 가벼운 필치로 부드러우면서도 초연절속(超然絶俗)하게 그려내, 백묘의 고수로 추앙받았다. 또 옅은 먹을 약간 번지게 하는 방법도 있다. 송, 원대(宋元代)의 화가들은 모두 백묘 수법을 사용하여 화조화*를 그렸다. 북송의 중인仲仁(쭝 르언)을 비롯해 원대(元代)의 조맹견趙孟堅(자오 멍진, 1199~?), 장수정張守正(즈앙 서우즈)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 벽화고분인 수락암동 제1호분에 문관의 모습을 한 12지신상이 백묘법으로 그려졌다.

백봉시대 미술

백봉시대 미술 白鳳時代美術

→ 하쿠호시대 미술

백우회

백우회 白牛會

1933년 도쿄(東京) 유학생들인 주경朱慶(1905~1979), 심형구沈亨求(1908~1962), 이쾌대李快大(1913~1970), 박영선朴泳善(1910~1994), 최재덕崔載德(1916~?), 김만형金晩炯(1916~1984) 등 데이코쿠(帝國)미술학교 재학생들을 주축으로 창립된 미술단체. 창립 당시에는 양화가들의 단체였으며 이후 도쿄미술학교,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 니혼(日本)미술학교, 문화학원에 다니던 유학생들도 참여하게 되어 동양화, 조각*, 공예* 등 모든 장르를 포괄하게 되었다.
미술이념에 있어서 공통적인 미술이념에 기초한 단체라기 보다는, 당시 한국화단을 주도하였던 일본 유학생들의 친목위주의 단체였으나, 목일회*牧日會와 더불어 1930년대 화단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백우(白牛)’라는 말이 백의민족의 항일의식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 도쿄 경시청의 회칙 변경 강요를 받아 ‘재(在)도쿄미술학생종합전’으로 이름을 바꾸고서 1938년 4월 화신화랑에서 제1회 전람회를 가졌다. 제 2회부터는 졸업생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재도쿄미술협회’로 다시 명칭을 바꾸어 전시를 갖고, 이후 매년 전시회를 열다가 1943년 제 6회 전시회 후 해체되었다.

백자

백자 白磁

거의 철분이 없는 백토로 만들고 장석유(長石釉)를 씌운 후 1,300~1,350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내어 유리질화시킨 치밀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 중국에서는 6세기 중엽부터 태토가 더욱 희어지고 치밀해졌으며 소성온도가 올라가 백자에 가까운 백도(白陶)가 제작되었다. 8세기말, 9세기초의 백자는 백도(白陶)에서 발전된 것이고, 11세기말 이후에 이르러서야 절강성 지방의 전통을 이은 옅은 회색의 도자기들이 백자로 완성되었다.
당대(唐代)의 형주요邢州窯와 송대(宋代)의 정요定窯의 백자가 유명하다. 송대에 화남에서는 청백자*(靑白磁)가 대량생산되었는데 특히 경덕진요*의 것이 이름이 높다. 화북의 형주요 백자는 환원번조되어 차가운 담청색을 머금고 있으나 후대까지 계속된 화북 정요의 것은 산화번조로 담황색내지 베이지색을 나타내며, 화남의 경덕진 백자는 담청색을 지닌다. 원대(元代) 14세기초부터 생산된 추부백자(樞府白磁)라는 양질의 백자가 점차 발달하여 현재의 백자로 이어진다.

→ ‘조선백자’ 참조

백제 미술

백제 미술 百濟美術

백제는 3세기 중엽 고구려계 망명집단이 주축이 되어 세운 성읍국가를 기반으로 하여 점차 발전했으며, 4세기 중엽경 남쪽의 마한馬韓을 멸망시키고 고대왕국을 건설하였다. 초기의 수도는 한성漢城이며, 영토는 서울 강동구의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일대로 추정된다. 475년 한성이 고구려군에 함락되면서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옮겼으나 538년에는 금강으로 남하하여 사비泗布(부여)로 천도함으로써 산지(山地)로부터 강원-김제 평야로 진출하여 서해를 이용한 대외활동, 국내 통치의 효과를 더욱 증가하는 방침을 세웠다. 이 웅진시대에 모든 제도가 정비되고 불교 및 문화도 크게 발전하였다. 7세기 초엽 고구려가 수隋, 당唐과의 전쟁을 하는 틈에 신라의 방위선을 낙동강선으로 후퇴시켰으나, 신라가 당병을 끌어들여 660년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였다.
백제의 미술은 초기에는 고구려와의 친근성이 엿보이나, 중국 남조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미의식이 깃든 점차 우아하고 섬세한 독자적 양식을 형성하였고 특히 일본의 고대문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건축:백제의 건축은 공주, 부여, 익산에 주로 남아있는 당시의 절터와 탑, 고분들을 통해 그 면모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절터로는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군수리사지軍守里寺止〉 〈금강사지金剛寺止〉 〈동남리폐사지東南里廢寺止〉와 익산군 금마면金馬面의 〈미륵사지彌勒寺址〉 등이 있을 뿐이어서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절터는 대부분 중문(中門)과 탑(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을 남북 중심선상의 일직선위에 놓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로서 중국 육조의 영향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배치는 일본의 소위 사천왕사식 가람배치의 근원이 백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탑은 처음에는 중국식의 목탑을 채용하였으나 현존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미륵사지의 석탑과 정림사지의 오층석탑 2기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600년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始原樣式)을 이룬 최대의 유구이자 목조탑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가치가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이른바 백제석탑양식을 완성한 것으로서 후대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백제의 고분은 지역과 특성을 달리하며 분포되어 있다. 한강유역에는 고구려 고분과 유사한 적석분(積石墳)과 토광묘(土壙墓) 등이 주류를 이루며 서울 석촌동, 광장동 지역에 산재돼 있다. 웅진시대의 공주 지방에는 송산리宋山里 1~5호분에서 볼 수 있는 궁륭*식 천장의 석실분과 송산리 6호분, 무녕왕릉과 같은 터널형 전축분(塼築墳)이 나타난다. 부여의 능산리陵山里 고분군古墳群으로 대표되는 사비시대의 백제 고분들은 전대의 영향이 이어지고, 특히 이 시대에는 장방형의 현실(玄室)을 화강암이나 대리석의 거대한 판석(板石)으로 조성하는 석실분이 성행했다. 이밖에 서울의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夢村土城, 공주의 공산성과 부여의 부소산성扶蘇山城 등이 백제시대의 성지(城址)로 남아 있다.
불교조각:백제의 불교는 384년 동진東晉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고구려를 통한 북조미술보다 남조南朝로부터의 영향이 더 크다. 현존하는 불상*은 6세기 중엽 이후의 것들이다. 6세기 불상의 대표적인 부여 군수리 출토의 〈금동보살상〉을 보면, 몸 양쪽으로 지느러미처럼 뻗은 옷자락, 몸의 전반부만 표현되는 정면관위주의 고식(古式)을 보여준다. 7세기로 들어가면, 반가사유상*이 유행하고 마애석불이 출현하며 또한 육조불에서 수당불의 영향이 나타난다.
공예:백제토기는 원삼국시대의 회청색 경질토기의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낙랑과 고구려 토기의 영향을 받았다. 금강 이남지역에는 가야토기의 요소도 보이고, 5세기에는 중국 육조(六朝)시대 토기의 영향도 보인다. 종류로는 항아리나 단지가 주류를 이루고 바리, 접시, 대접, 자배기, 잔, 합, 병, 시루 등이 있다. 이밖에 와당*은 백제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웅진시대 이후 만들어졌다. 전돌에는 산수문, 도깨비, 봉황, 구름 등 도교적 요소가 간취되는 문양들이 회화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장신구로는 관식이 대표적인 것인데,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왕은 금꽃을 꽂은 오라관(烏羅冠; 검은 빛 비단으로 만든 관)을 썼고, 관리들은 은꽃을 꽂은 관을 착용하였다고 전한다. 무녕왕릉, 부여 능산리, 남원 척문리 등에서는 육조양식의 당초문*이 표현된 금꽃이 실제로 출토되었다. 이외에 신촌리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입식을 테두리에 꽂은 외관과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꽂은 내관 양식인데 기본적인 형태가 신라관과 비슷하다.
회화:백제의 회화는 유적과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와 중국 남조, 특히 양梁의 영향을 받으면서 높은 수준을 이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존하는 백제의 회화는 공주 송산리 6호분의 사신도와 신숙도神宿圖, 능산리 고분의 사신도와 연화문, 비운문飛雲文, 무녕왕릉 출토 주칠두침朱漆頭枕 및 다리받침에 그려진 어룡(魚龍)과 신수(神獸)문양 정도이며, 6세기 이전으로 올라간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표현이 동적이고 날카로운 고구려의 회화에 비해 박진감은 떨어지나 안정감이 있고 유연한 필치에서 백제 고유의 감각을 볼 수 있다. 무녕왕릉 출토 은탁잔 뚜껑의 산악문(山岳文)은 고구려 벽화의 삼산형의 산악도가 이미 6세기 전반 백제에서 유행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규암리 출토 산수문전山水文塼(7세기 전반)은 부조형태로 도안화된 공예의 수준이면서도, 나무가 덮인 삼산형의 부드러운 토산(土山)과 암산(岩山)의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배치, 그리고 근경의 수면과 하늘의 구름, 누각과 승려의 표현 등 산수화적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어 당시 산수화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양서梁書》에는 백제와 양과의 회화교류를 나타내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이를 뒷받침 할 만한 작품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제의 미술은 일본에 전해져 그곳 문화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백가白加와 아좌태자阿佐太子 등이 6세기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화가로 알려져 있고, 인사라야因斯羅我와 하성河成도 백제계의 화가로 이름이 전해진다. 특히 아좌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성덕태자급이왕자상聖德太子及二王子像〉의 모사본은 백제시대 인물화의 수준을 짐작케 한다.

백화

백화 帛畵 bo-hua(중)

비단 위에 그린 중국 고대의 그림. 견직물은 고대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중요한 서화용 재료였다. 현존하는 유물은 주대(周代) 말기~전국(戰國)시대 중기에 속하는 것이 3폭, 서한西漢 초기에 속하는 것이 6폭 있다. 주대 말기의 백화는 호남성 장사長沙의 전국시대 초묘(楚墓)에서 발견되었는데, 첫째 폭은 가장자리에 기이한 동식물이 그려지고 가운데에 알 수 없는 문자가 쓰여 있다.
둘째 폭은 〈용봉사녀백화龍鳳仕女帛畵〉로 외발달린 용(용)과 봉황이 여자를 인도하며 승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셋째 폭은 〈남자어룡백화男子御龍帛畵〉로서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학(鶴)을 거느리고 용주(龍舟)를 타고서 승천하는 그림이다. 모두 무덤에서 출토된 이들 백화의 내용은 피장자가 천상(天上) 세계로 승천하고자 하는 희망을 표현한 것으로, 전국시대부터 유행하던 신선사상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 계속 발굴된 서한의 백화로는, 1972년 1월 호남성 장사의 마왕퇴馬王堆 1호 한묘漢墓, 1973년 11월 같은 지역의 3호 한묘에서 내관(內棺)을 덮은 채색백화 5폭이 발굴되었는데 그 형태가 T자형으로, ‘비의(非衣)’라 이름 붙여졌다. 마왕퇴 한묘에서 발견된 백화 중에 2폭은 화면이 상단, 중단, 하단의 세부분으로 나뉘어, 각각 천상세계와 지상세계, 지하세계(黃泉)를 표현하였다. 이 백화들은 장사를 지내기 전에 영당(靈堂)에 펴놓았다가 발인할 때 행렬을 선도하고 매장하면서 관 위에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6년 5월에는 산동성山東省 임기臨沂 금작산金雀山 9호 한묘에서 백화 1폭이 발견되었는데 출토된 장방형의 깃발(旌幡)은 내용이 위 두 그림과 같지만, ‘인간’을 표현하는 데 비중이 더 커졌다. 당시엔 후장(厚葬)의 풍속이 매우 성행하여서 이 그림들도 수장품(隨葬品)이 되었던 것이다. 내용은 고대의 신화, 전설이고, 인물의 조형은 풍속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사실적인 것과 장식적인 것이 교묘히 결합되었는데, 선의 묘사가 간결하면서도 정돈되었고 색채는 현란하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후에 북위北魏의 사마금룡司馬金龍(쓰마 진룽)의 묘에서 나온 칠화(漆畵)와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의 《여사잠도*女史箴圖》 두루마리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백화는 당시의 사후세계관과 조상숭배사상, 후장 풍속 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도가 높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2000여년 전의 중국화로서 훌륭한 인물묘사와 생동적이며 예리한 선, 밝은 색채 등 성숙한 기교를 보여주고 있어서 그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