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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미술

백제 미술 百濟美術

백제는 3세기 중엽 고구려계 망명집단이 주축이 되어 세운 성읍국가를 기반으로 하여 점차 발전했으며, 4세기 중엽경 남쪽의 마한馬韓을 멸망시키고 고대왕국을 건설하였다. 초기의 수도는 한성漢城이며, 영토는 서울 강동구의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일대로 추정된다. 475년 한성이 고구려군에 함락되면서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옮겼으나 538년에는 금강으로 남하하여 사비泗布(부여)로 천도함으로써 산지(山地)로부터 강원-김제 평야로 진출하여 서해를 이용한 대외활동, 국내 통치의 효과를 더욱 증가하는 방침을 세웠다. 이 웅진시대에 모든 제도가 정비되고 불교 및 문화도 크게 발전하였다. 7세기 초엽 고구려가 수隋, 당唐과의 전쟁을 하는 틈에 신라의 방위선을 낙동강선으로 후퇴시켰으나, 신라가 당병을 끌어들여 660년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였다.
백제의 미술은 초기에는 고구려와의 친근성이 엿보이나, 중국 남조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미의식이 깃든 점차 우아하고 섬세한 독자적 양식을 형성하였고 특히 일본의 고대문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건축:백제의 건축은 공주, 부여, 익산에 주로 남아있는 당시의 절터와 탑, 고분들을 통해 그 면모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절터로는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군수리사지軍守里寺止〉 〈금강사지金剛寺止〉 〈동남리폐사지東南里廢寺止〉와 익산군 금마면金馬面의 〈미륵사지彌勒寺址〉 등이 있을 뿐이어서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절터는 대부분 중문(中門)과 탑(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을 남북 중심선상의 일직선위에 놓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로서 중국 육조의 영향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배치는 일본의 소위 사천왕사식 가람배치의 근원이 백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탑은 처음에는 중국식의 목탑을 채용하였으나 현존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미륵사지의 석탑과 정림사지의 오층석탑 2기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600년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始原樣式)을 이룬 최대의 유구이자 목조탑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가치가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이른바 백제석탑양식을 완성한 것으로서 후대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백제의 고분은 지역과 특성을 달리하며 분포되어 있다. 한강유역에는 고구려 고분과 유사한 적석분(積石墳)과 토광묘(土壙墓) 등이 주류를 이루며 서울 석촌동, 광장동 지역에 산재돼 있다. 웅진시대의 공주 지방에는 송산리宋山里 1~5호분에서 볼 수 있는 궁륭*식 천장의 석실분과 송산리 6호분, 무녕왕릉과 같은 터널형 전축분(塼築墳)이 나타난다. 부여의 능산리陵山里 고분군古墳群으로 대표되는 사비시대의 백제 고분들은 전대의 영향이 이어지고, 특히 이 시대에는 장방형의 현실(玄室)을 화강암이나 대리석의 거대한 판석(板石)으로 조성하는 석실분이 성행했다. 이밖에 서울의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夢村土城, 공주의 공산성과 부여의 부소산성扶蘇山城 등이 백제시대의 성지(城址)로 남아 있다.
불교조각:백제의 불교는 384년 동진東晉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고구려를 통한 북조미술보다 남조南朝로부터의 영향이 더 크다. 현존하는 불상*은 6세기 중엽 이후의 것들이다. 6세기 불상의 대표적인 부여 군수리 출토의 〈금동보살상〉을 보면, 몸 양쪽으로 지느러미처럼 뻗은 옷자락, 몸의 전반부만 표현되는 정면관위주의 고식(古式)을 보여준다. 7세기로 들어가면, 반가사유상*이 유행하고 마애석불이 출현하며 또한 육조불에서 수당불의 영향이 나타난다.
공예:백제토기는 원삼국시대의 회청색 경질토기의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낙랑과 고구려 토기의 영향을 받았다. 금강 이남지역에는 가야토기의 요소도 보이고, 5세기에는 중국 육조(六朝)시대 토기의 영향도 보인다. 종류로는 항아리나 단지가 주류를 이루고 바리, 접시, 대접, 자배기, 잔, 합, 병, 시루 등이 있다. 이밖에 와당*은 백제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웅진시대 이후 만들어졌다. 전돌에는 산수문, 도깨비, 봉황, 구름 등 도교적 요소가 간취되는 문양들이 회화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장신구로는 관식이 대표적인 것인데,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왕은 금꽃을 꽂은 오라관(烏羅冠; 검은 빛 비단으로 만든 관)을 썼고, 관리들은 은꽃을 꽂은 관을 착용하였다고 전한다. 무녕왕릉, 부여 능산리, 남원 척문리 등에서는 육조양식의 당초문*이 표현된 금꽃이 실제로 출토되었다. 이외에 신촌리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입식을 테두리에 꽂은 외관과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꽂은 내관 양식인데 기본적인 형태가 신라관과 비슷하다.
회화:백제의 회화는 유적과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와 중국 남조, 특히 양梁의 영향을 받으면서 높은 수준을 이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존하는 백제의 회화는 공주 송산리 6호분의 사신도와 신숙도神宿圖, 능산리 고분의 사신도와 연화문, 비운문飛雲文, 무녕왕릉 출토 주칠두침朱漆頭枕 및 다리받침에 그려진 어룡(魚龍)과 신수(神獸)문양 정도이며, 6세기 이전으로 올라간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표현이 동적이고 날카로운 고구려의 회화에 비해 박진감은 떨어지나 안정감이 있고 유연한 필치에서 백제 고유의 감각을 볼 수 있다. 무녕왕릉 출토 은탁잔 뚜껑의 산악문(山岳文)은 고구려 벽화의 삼산형의 산악도가 이미 6세기 전반 백제에서 유행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규암리 출토 산수문전山水文塼(7세기 전반)은 부조형태로 도안화된 공예의 수준이면서도, 나무가 덮인 삼산형의 부드러운 토산(土山)과 암산(岩山)의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배치, 그리고 근경의 수면과 하늘의 구름, 누각과 승려의 표현 등 산수화적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어 당시 산수화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양서梁書》에는 백제와 양과의 회화교류를 나타내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이를 뒷받침 할 만한 작품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제의 미술은 일본에 전해져 그곳 문화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백가白加와 아좌태자阿佐太子 등이 6세기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화가로 알려져 있고, 인사라야因斯羅我와 하성河成도 백제계의 화가로 이름이 전해진다. 특히 아좌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성덕태자급이왕자상聖德太子及二王子像〉의 모사본은 백제시대 인물화의 수준을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