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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령

금강령 金剛鈴

→ ‘불구’ 참조

금강역사

금강역사 金剛力士

불탑 또는 사찰의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외호선신(外護善神) 가운데 하나. 원래 인도의 신으로, 무인(武人)의 모습으로 창을 들고 있는데 팔라바 왕조 이후의 남인도에서는 곤봉을 들고 있는 경우도 있다. 불전에서 금강수(金剛手) 혹은 금강밀적천(金剛密迹天), 집금강신(執金剛神), 인왕역사(仁王力士) 등 여러 이름으로 등장한다. 《오분율五分律》에는 “모든 부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500의 금강신이 부처님을 호위하며 모신다”라고 하였고, 80권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부처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몸을 나타내어 항상 부지런히 외호한다”고 하여 부처님의 수호신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을 모시면서 비법(非法)의 무리들을 금강저(金剛杵)로 물리친다. 금강(金剛)은 ‘지(智)’를 의미하므로, 지혜의 불법을 수호하는 천신이다. 한국에서는 사찰이나 불상, 불사리를 지키는 수문장으로 사찰의 문이나 불전의 입구, 불상의 좌우, 탑의 문 등에 조각이나 그림으로 등장한다. 분황사 모전석탑 사방문의 인왕상이 최고(最古)의 예이며, 석굴암의 인왕상이 절정의 조각 양식을 보여준다. 사찰의 금강문 오른쪽은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왼쪽은 밀적금강(密迹金剛)이 봉안되어 있는데, 얼굴은 분노형이고 상체는 나체형이다. 나라연금강은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배나 되고, 밀적금강은 야차신의 우두머리로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事迹)을 모두 듣겠다고 서원하였으므로 ‘밀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금강저

금강저 金剛杵 vajra(범)

→ ‘불구’ 참조

금대 미술

금대 미술 金代美術

금金(1115~1234)은 중국 동북지방 만주의 퉁구스 계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나라. 처음에는 거란족이 세운 요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1120년 송宋과 제휴하여 요를 멸하고 1127년에는 송의 수도였던 개봉開封을 함락한 후 화북전역을 지배하였다. 금대(金代)의 문화는 대체로 요 문화를 계승하면서 송의 제도를 채용했다. 또한 불교미술과 도자미술 등에서 당唐의 양식을 의도적으로 부흥시킨 면이 보인다.
건축:대부분 산서성山西省에 많이 남아 있는데, 산서성 오대현五臺縣의 〈불광사佛光寺 문수전文殊殿〉(1137) 삭현의 임오 〈숭복사崇福寺 미타전彌陀殿〉(1143) 등 요遼의 양식이 남아 있는 비교적 웅대한 사원이 있다. 〈평요현平遙懸 문묘文墓 대성전大成殿〉(1163), 태원太原의 〈진사晉祠 성모묘聖母廟 헌전獻殿〉(1168), 〈응현應縣 정토사淨土寺 대전大殿〉(1184) 등과 산서성 남부에 몇 개의 유적이 있다. 불탑은 거의 전탑(塼塔)인데 〈하남성河南省 심양현沁陽縣 삼성탑三聖塔〉(1171), 낙양 근교 〈동백마사東白馬寺 석가사리탑釋迦舍利塔〉(1175) 등은 모두 당 양식의 사각13첨탑이다. 요 양식의 팔각첨탑은 화북지방에 보급되었고, 하북성 정정현의 〈임제사臨濟寺 청탑淸塔〉(1185)에서 그 정형을 볼 수 있다.
조각:불상은 전탑 속에 소상(塑像)이 남아 있는 예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요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풍만하고 단아한 표현은 당대의 지방 양식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창明昌 6년(1195) 평양부平壤府 홍동현洪洞縣의 명문*(銘文)이 있는 목조 채색의 〈관음보살입상觀音菩薩立像〉은 송 양식의 영향이 강하다.
회화:금이 송의 휘종과 흠종 이외에 3,000명의 귀족과 화공 등을 납치하여 송의 궁정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화가에는 장종(章宗, 1189~1208)대에 활약한 무원직武元直(우 위앤즈)과 그의 제자 곽민郭敏(구어 민)도 수묵산수화에 뛰어났으며, 원대 산수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외에 인물을 잘 그린 완안윤공完顔允恭(이엔윈꽁, 顯宗), 대나무그림에 능한 위엔 완안량完顔亮(이엔리), 화조화*에 서영지徐榮之(쉬 잉즈) 등이 유명하다.
서예:초기에는 미불米芾(미 후, 1051~1107)의 사위 오철吳澈(우지)과 우문허중宇文虛中(위원 쉬쫑), 고사담高士談(까오 스탄), 왕긍王競(우앙 징), 임순任詢(르언 쉰) 등의 서예가가 알려지고 있다. 특히 장종은 수금체瘦金體를 잘 썼고 서화수집에도 열의를 보였다. 궁정에는 미후 양식의 행초법行草法이 인기였으며, 특히 왕정균王庭筠(우앙 띵쥔, 12세기)과 소식蘇軾(쑤 스, 1036~1101)을 배운 당회영黨懷英(띵 회이잉), 조병문趙秉文(자오 삥원) 등에 의해 전반적으로 북송北宋의 글씨체가 유행했다.

금릉팔가

금릉팔가 金陵八家 jinling bajia(중)

명말청초(明末淸初)에 금릉金陵(현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에서 활약한 여덟 명의 화가를 지칭하는 말. 공현龔賢(꽁 시앤), 번기樊圻(판 인), 고령高岺(까오 천), 추철鄒喆(처우 즈어), 오굉吳宏(우 훙), 엽소葉訴(이에 쑤), 호조胡慥(후 짜오), 사손謝蓀(시에 쑨)을 가리킨다. 이들은 그림의 제재와 양식은 서로 다르나, 같은 지역, 같은 시대에 칭송을 받았으므로 함께 불려졌다. 이들의 출전은 청대(淸代) 장경張庚(즈앙 껑)의 《국조화정록國朝畵征錄》에 보인다. 건륭 연간(乾隆, 1661~1722)의 《상원현지上元縣志》에서는 진탁陳卓(츠언 주어)오굉, 번기, 추철, 채림윤蔡霖淪(차이 린룬), 이우이李又李(리 이어우리), 무단武丹(우 탄), 고령 등을 ‘금릉팔가’라 부르기도 한다.

금문

금문 金文

은, 주(殷周)시대의 청동기 위에 주조되거나 새겨진 명문*(銘文). ‘종정문鐘鼎文’ ‘길금문吉金文’이라고도 한다. 은대(殷代) 금문의 경우, 글자체는 갑골문*(甲骨文)과 흡사하고 명문의 글자수도 비교적 적었으나, 주대(周代) 금문은 점차 정제되면서 글자수도 상대(商代)보다 비교적 길어져서, 〈모공정毛公鼎〉 명문처럼 그 자수(字數)가 491자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이 때 금문의 내용은 제사(祭祀), 사명(賜命), 정벌(征伐), 계약(契約) 등에 관한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이르면 글자체는 점차 소전*(小篆)에 근접하고 명문방법도 주조*(鑄造)에서 조각*(彫刻)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때는 글씨가 매우 작아져서 책과 맞먹는 분량의 내용이 새겨진 금문도 있다.

금벽산수

금벽산수 金碧山水

청색과 녹색을 많이 사용하여 그린 청록산수*(靑綠山水)에 금색을 첨가한 그림. 금니(金泥)를 써서 산이나 바위의 윤곽선 안쪽에 선을 그려 넣거나 준법*(皴法)을 구사하는 화려한 형식의 산수화*를 말한다. 화원(畵員) 등의 직업화가들이 짙은 채색과 꼼꼼한 필치로 장식적이고 화려하게 그린 북종산수의 대표적인 양식이다. 중국 당대(唐代)의 이사훈李思訓(리 쓰쉰)과 이소도李昭道(리 사오따오)가 이 방법을 썼고, 송대(宋代)의 조백구趙伯駒(자오 뿌어쥐)가 유명하다. 그 후대의 작품들은 대개 옛 수법을 모방한 것이 많다.

금석학

금석학 金石學

중국의 고동기(古銅器)의 명문*(銘文)이나 석각(石刻)을 연구하는 학문. 문자학(書學)의 주요 분야로서 갑골문*(甲骨文), 새인(璽印), 전폐(錢幣), 문자, 목간(木簡), 죽간(竹簡)까지 포함된다. 법첩*(法帖)을 주로 연구하는 첩학파*(帖學派)에 대하여 비학파*(碑學派)의 연구분야를 지칭한다. 청대(淸代) 중기 이후에 발전하였으나 이미 송대(宋代)에 이에 대한 저술이 출현하고 있어서 구양수歐陽修(어우 이앙서우)의 《집고록발미集古錄跋尾》, 조명성趙明誠(자오 밍츠엉)의 《금석록金石錄》이나 여대림呂大臨의 《고고도考古圖》, 휘종의 칙명으로 편찬한 《선화박고도록宣和博古圖錄》, 설상공薛尙功(쉬에 상꽁)의 《역대종정이기관지법첩歷代鐘鼎彝器款識法帖》 등을 들 수 있다. 청대에는 고염무顧炎武(꾸 이앤우)의 《금석문자기金石文字記》를 비롯해서 다수의 학자와 저서가 나와 종래 지나쳐 버렸던 금문*(金文)과 북비(北碑)의 미(美)를 발견하고 청조(淸朝)의 서풍(書風)을 변화시켰다. 조선시대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이 방면에 업적을 남겼다.

금은니

금은니 金銀泥

금이나 은가루를 아교풀에 개어 만든 안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흰 바탕의 종이 등에서는 효과를 제대로 낼 수 없으며 감지(紺紙)와 같이 어두운 바탕에 사용되어 독특한 효과를 낸다. 주로 사경*(寫經)과 같은 종교용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일반서화에서도 간혹 쓰였다. 은니는 나중에 변질되는 결점이 있다.

금현묘

금현묘 琴弦描

→ ‘인물십팔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