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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청동기시대 미술

한국 청동기시대 미술 韓國靑銅器時代美術

주로 청동기 유물을 대상으로 해서 그들의 형식 변천과 공반관계(共伴關係)를 고찰하면, 대체로 기원전 10년경부터 시작하여 서기 4세기 전후까지를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다. 이를 다시 대표적 유물인 동검(銅劍)의 형식 분류에 따라 , 제1기를 요녕식(遼寧式) 동검시기, 제2기는 Ⅰ식 세형 동검시기, 제3기는 Ⅱ식 세형 동검시기로 나눈다.
제1기의 청동기는 기원전 700~600년경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요녕지방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슷한 형식이며 공반유물로는 석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제2기에 이르러서는 석묘(石墓)계통의 분묘에서 출토되며, 종교적 색채의 청동기도 출토되기 시작한다. 공반유물로는 비실용화된 마제석촉(磨製石鏃), 천하석제식옥(天河石製飾玉),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흑색장경호(黑色長頸壺) 등이 있다. 제3기에서는 공구(工具), 용기(容器), 거여구(車輿具) 등 일상생활의 실용품들이 토광묘(土壙墓)에서 출토된다. 공반유물로는 석기가 소멸되고 철기가 대량으로 나타난다. 또한 낙랑고분(樂浪古墳)의 출토품과 동일한 종류의 한식유물(漢式遺物)이 동반되고 있다.
분묘:가장 전형적인 것은 네 벽과 바닥 및 뚜껑을 각각 1장의 판돌로 조립한 석관묘(石棺墓)이다. 또한 북방식(탁자식)과 남방식(바둑판식)으로 구분되는 지석묘(支石墓)가 있다. 동검이 부장되며 돌로 구축된 동검석묘(銅劍石墓)는 지석묘와 석관묘 사이에 새로이 채택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매장 시설로서 목관이나 목곽이 사용된 토광묘는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로 변천함에 따라 나타나는 고분구조이다.
토기: 청동기 시대에 사용된 토기* 전체를 가리켜 무문토기(無文土器)라고 명명한다. 이들 토기의 종류들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음식을 끊이는 자비용(煮沸用)으로 사용한 원통형의 토기이다. 그리고 저장의 용도로 쓰인 호형(壺形)토기와 음식물을 담기 위한 접시, 굽접시, 대접 등이 있다. 무문토기는 태토 속에 굵은 모래알이 포함되어 있어, 표면을 매끈하게 하는 작업이 뒤따른다. 이 표면처리의 특수한 기법으로 홍도(紅陶), 흑도(黑陶)가 있다.

한림도

한림도 寒林圖

산수화*의 한 화제(畵題)로, ‘한림’이란 잎이 다 떨어진 쓸쓸한 숲을 의미한다. 한림이란 용어는 이미 당시(唐詩)에 보이지만 화제로 취급된 것은 당말오대(唐末五代)부터이다. 주로 화북계(華北系) 산수화가들에 의해 산수화의 점경(点景)이나 주경(主景)으로 그려졌다.
한림도는 이성李成(리 츠엉)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성은 오대 말기부터 북송北宋 초기에 걸쳐 화북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겨울 풍경을 전문으로 했는데, 가지들의 곡선 장식과 더불어 벌거벗은 나무들을 통해 자연의 장엄함과 황량함을 표현하였다. 송대(宋代)의 허도녕許道寧(쉬 따오닝), 곽희郭熙(구어 시) 등의 작품은 이성의 작풍(作風)을 이어 받았다. 한림도에는 풍설(風雪)에 부대껴 끝이 게발톱처럼 표현된 나뭇가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해조묘*라 불리는 이러한 기법은 이성, 허도녕, 곽희와 원대(元代)의 이곽파* 작품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한림도화원

한림도화원 翰林圖畵院

북송北宋 전기의 화원(畵院). 화원 제도의 기원은 당대(唐代)에도 보이며 오대(五代)의 후촉後蜀, 남당南唐에서 제도화되었다. 북송시대에는 태종太宗과 신종神宗 모두가 회화를 좋아해 이를 적극 후원하였다. 따라서 황실에서는 오대의 화원제도를 계승하여 한림도화원을 건립하고 내시성內侍省 밑에 두었다. 대조(待詔), 예학(藝學), 지후(祗候), 학생 등의 직급과 정원, 승진제가 확정되고 무인계 관직이 주어지게 된 것은 진종眞宗(998~1022)에 이르러서라고 추측된다.
진종에서 휘종徽宗(1067~1125)에 이르는 사이에 여러번 제도가 변혁되었다. 특히 휘종의 화원개혁에서는 직업화가로서의 질적 향상이 도모되고 원체화*(院體畵; 화원회화양식)가 확립되어 후세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화원화가는 주로 궁정용, 외국 사신들에게 증여하기 위한 회화, 궁정 사관 관공서에 필요한 장식화 등을 제작하였다. 주로 제왕과 궁정의 심미안을 반영하였고, 북송 전기 예술의 발전과 번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