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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왕립미술원

영국왕립미술원 Royal Academy of Art(영)

1768년 조지 3세의 인가를 받아 본격적인 미술학교의 개설, 연례 전람회 개최, 예술가에 대한 전시 수입 분배 등을 통해 영국의 순수 미술을 육성하고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레이놀즈Sir Joshua Raynols(1723~1792) 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협회. 정회원이 40명, 준회원이 20명(1876년부터 30명)이고 투표에 의해 선출된 회장 1명과 8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평의회가 운영됐다. 로열 아카데미는 1824년 런던에 내셔널 갤러리가 창설되기까지 예술가와 학생들에게 거장들의 명작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연차 전람회는 1780년부터 펠멜에서 개최되었으며 1868년 현재의 본부인 바린튼하우스로 옮겨져 매년 2회의 전람회를 개최하고 있다.

영남화파

영남화파 嶺南畵派
ingnanpai(중)

명, 청(明淸) 이래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에서 시작된 화파. 영남은 광주의 옛 이름이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명대(明代)의 임량林良(린 리앙)으로 수묵 화조화*에 뛰어났는데 필체가 간결하고 힘차면서 호방하여 영남 일대의 화풍을 향상시켰다. 그 기법을 본받은 사람으로 고엄高儼(까오 이앤, 산수화), 진서陳瑞(츠언 루웨이, 화조화)가 있고, 려간黎簡(리 지앤), 이괴李魁(리 쿠에이) 등이 계속해서 활약했는데, 주로 광동 지방 산수의 특색을 묘사하는 데에 치중했다.
앞의 두 사람은 창윤(蒼潤)함이 오진吳鎭(우 즈언)과 흡사하고, 담원(淡遠)하기는 예찬倪撰(니 짠, 1301~1374)과 근사하며 뒤의 두 사람은 화공*(畵工) 출신으로 기법이 정밀하였다. 청대 건륭 연간(乾隆, 1736~1795)에 소육명蘇六明(쑤 리우펑), 소장춘蘇長春(쑤 즈앙츠운) 등이 인물화*에 뛰어났는데, 소육명은 민중의 생활과 시정의 풍속을 그림의 제재로 삼았고, 소장춘은 신선, 불상을 그렸지만 남방의 일반인들을 모델로 하였다. 청말(淸末)엔 거소居巢(쥐 츠아오), 거렴居廉(쥐 리앤)이 화조충어화(花鳥蟲魚畵)에 뛰어났는데, 이들은 운수평惲壽平(윈 서우핑)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현대의 번우番禹(판 위), 고검부高劍父(까오 지앤푸), 고기봉高奇峰(까오 치펑), 진수인陳樹人(츠언 수르언) 등도 일찍이 거렴을 스승으로 섬겼다. 고씨 형제와 진수인은 후에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였고, 작품의 제재도 중국 남방의 풍물을 묘사한 것이 많은데, 중국화의 전통 기법을 운용하면서 일본 남화*(南畵)와 서양화 기법을 융합하여 사생에 치중하였다. 선명한 색채와 충분한 물기로 부드럽고 깨끗한 현대 영남화파의 새로운 풍격을 빛내며 전파시켰다.

영련

영련 楹聯

→ 대련

영모화

영모화 翎毛畵
ling-mao-hua(중)

중국화의 화제(畵題). ‘영’은 새의 날개, ‘모’는 짐승의 털을 뜻한다. 곧 영모화란 새나 짐승의 깃이나 털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꼼꼼하게 그리는 그림이다. 주로 작은 동물을 그리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새를 소재로 한 것을 영모화라 부르고, 짐승은 축수도(畜獸圖)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북송北宋의 화원(畵員)들 사이에서 특히 발달하였다.

영자팔법

영자팔법 永字八法

서예의 기본 필획을 ‘영(永)’자의 여덟 필획에 의해서 보여주는 방법. 측(側), 늑(勒), 노(努), 적(趯), 책(策), 약(掠), 탁(啄), 책(磔)을 말한다. 당唐 장회관張懷瓘(즈앙 후에이꾸완, 8세기 전반기 활동)의 《옥당금경玉堂禁經》 등에서 보이므로 당대(唐代)부터 이미 성행하였다고 여겨지나 그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전설에는 예서(隸書)로부터 생겨나 후한後漢의 최원崔瑗(츠웨이 위앤), 장지張芝(즈앙 즈), 삼국시대 위魏의 종요鍾繇(쭝 야오),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우앙 후에이즈)에 전해져 수隋의 지영智永(즈 융)이 그 내용을 명확히 하고 당대의 우세남虞世南(우 스난)에게 전수된 이후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영정

영정 影幀

고승들이 입적한 후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린 초상화*. ‘정상(頂相)’ ‘진영(眞影)’ ‘조사도(祖師圖)’라고 많이 불린다. 조사도는 달마선사達磨禪師를 초조(初祖)로 하는 선종에서 중요시했다. 따라서 영정은 달마선사나 선종승려들의 초상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종파에 관계없이 고승들의 초상을 가리키게 되었다.
영정은 사자상승(師子相承)의 증표로서 법통을 확인하고 각 종파의 가르침과 전통적 유대를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초조 이하의 조사상을 법당에 걸어 공양하며 이것을 ‘괘진(掛眞)’이라 한다. 정상의 형식은 앉아서 오른손에 대나무 지팡이를 잡은 전신상이 많으며 특히 얼굴은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중국 송대(宋代)에 성행하였으며, 남송南宋의 〈무준사범상無準師範像〉(1238, 교토 東福寺) 등이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성행, 특히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다. 조선시대 사찰의 조사당이나 국사당(國師堂)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송광사 국사전의 16국사진영도〉(1789) 등 120여점의 작품이 남아 있다.

영첩

영첩 楹帖

→ 대련

영청자

영청자 影靑瓷

→ ‘경덕진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