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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공

박공 博栱 gable(영) pignon(프)

고전 건축에서 경사진 지붕의 양쪽 끝부분에 만들어진 지붕면과 벽이 이루고 있는 삼각형 모양의 공간으로, 보통 처마에서 지붕 끝까지 뻗어 있다. 양쪽으로 뾰족하게 경사진 지붕을 ‘박공지붕’이라고 하며, 이 지붕의 측면에 있는 삼각벽을 ‘박공벽’이라고 부르는데 박공이라는 용어는 이 두 가지 모두의 약칭으로도 사용된다.
로마 건축에서는 호(弧) 모양의 박공이 나타나며 이것은 지붕 끝에 설치했던 원래의 용도 외에 창문과 출입문 위에 설치해 비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일반 건축물에서 박공이 등장한 것도 벽과 지붕이 만나는 곳의 방수 문제에 대해 미학적으로 만족할만한 해결 방안을 찾으려는 시도 때문이었다. 바로크* 시대의 건축물에서는 장식적 용도로 사용된 꺾임 박공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북유럽이나 서유럽에서는 깎아지른 듯한 경사를 갖는 지붕이 대부분으로 박공은 층계 모양이나 곡선 형태로 풍부하게 꾸미고 항아리나 조각상, 오벨리스크* 등으로 장식 효과를 높였다. 박공은 중국이나 일본 건축에서도 중요한 특징이다. 동양에서 박공은 돌출된 지붕 기와, 용마루와 처마선에 있는 기괴한 동물상 그리고 때때로 박공 표면에 새긴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박물관학

박물관학 博物館學
museology(영)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존재, 활동에 관한 이론적, 실제적 연구를 하는 학문. 본래 미술관 활동의 기본인 예술작품의 보존, 전시, 수집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뮤제오그래피(museography)가 있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보다 적극적인 미술관 활동의 연구가 진척되고, 미술관과 미술관 활동의 목적과 성격, 기능을 연구하는 박물관학이 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의 활동 외에 특히 컬렉션*의 보급이나 미술에 대한 이해가 시청각적 수단에 의해 행해지며 강연, 영화, 세미나, 심포지엄의 기획 및 실시, 도서실과 자료실의 정비 및 공개, 카탈로그, 모노그래프, 연보 등의 출판, 특별전, 순회전 등의 기획과 개최가 행해진다.

박산향로

박산향로 博山香爐
bo-shan-xiang-lu(중)

산형(山形) 뚜껑을 가진 향로(香爐)의 일종. 대개는 하나의 버팀대와 용*(龍)이 장식된 기저부가 산형 뚜껑을 받치고 있다. 산형 뚜껑에는 야생동물과 이상하게 생긴 신기한 동물, 수렵꾼, 신선 같은 인물 등이 주출되어 있어서 중국의 신산(神山)을 조형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부 기록에 의하면 ‘박산博山’을 본뜬 것이라고 하나 박산이 어느 산인지는 불분명하다. 산형 뚜껑에는 산봉우리 사이로 향연구(香煙口)가 뚫려 있어서 분향시에 향연(香煙)이 산의 서기(瑞氣)처럼 감싸며 피어오른다. 그리고 산형 뚜껑에 보이는 수렵문과 동물문에서는 유목미술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박산향로는 한漢 무제武帝 무렵부터 출토되기 시작하는데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무릉茂陵 1호묘에서 출토된 기원전 135년 명의 〈도금은죽절훈로鍍金銀竹節薰爐〉와 기원전 113년 이전의 것인 하북성河北省 만성滿城 1호 유승묘劉勝墓에서 출토된 〈금상감박산로金象嵌博山爐〉 등이 초기의 예이다.
한대(漢代)의 왕실은 청동제 박산향로를 가장 정교하게 제작해서 의식 중 분향시에 사용했고 무덤에도 많이 부장했다. 이후에는 간략해진 기형을 지닌 조악(粗惡)한 도기*(陶器)가 주로 부장품으로 출토되고 있으나, 불가(佛家)에 수용되어서는 불단(佛壇)을 장식하는 화려한 주요 기물로서 비상(碑像)이나 불상의 하단에 조각되었다.
중국에서 출토된 박산향로는 한대 이후에 점차 쇠퇴하는 추세를 보이는데 비하여, 정교한 기술수준과 다채로워진 물상(物像)을 보여주는 대형의 걸작이 한국에서 1993년에 발견되었다. 6세기말~7세기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용봉향로百濟龍鳳香爐〉는 전체높이 64cm로, 하단에서 용틀임하는 용이 상단의 신산(神山)을 받치고 있으며 산꼭대기에는 봉황이 날아오르듯 날개를 펼치며 장엄하게 서 있는 위용을 보여준다.

박지기법

박지기법 剝地技法

도자기의 문양을 시문하는 기법 중의 하나. 분청사기*의 태토(胎土)로 그릇을 빚은 다음 그릇 전체에 백토로 분장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문양을 그린 뒤, 문양 이외의 배경부분을 긁어내고 그 위에 투명한 회청색의 유약을 발라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연화(蓮花), 연어(蓮魚), 모란 등이 박지기법으로 자주 나타나며, 15세기에 박지기법이 절정을 이룬다. 발굴된 도편의 분포지로 보아 박지기법은 주로 전라도 지방 가마*에서 애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트리아 미술

박트리아 미술 Bactrian Art(영)

박트리아는 알렉산더 대왕 사후 이란 지역을 지배하던 셀레우코스 왕조가 기원전 250년경부터 와해되기 시작하자 그리스인들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세운 독립 왕국으로 수도는 박트라Bactra(현 발흐Balkh)이다. 지역은 북쪽으로 자라푸샨 산맥 이남의 구소련령에서부터 남쪽으로는 힌두쿠시 산맥 이북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분포하며, 시대적으로는 기원전 3세기의 박트리아 왕국시대부터 서기 7세기 후반 쿠샨 시대까지 미친다. 그리스계 왕들이 통치했으나 기원전 100년경 파르티아에 패배하여 그리스인의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그 후 샤카족에게 점령된 박트리아 지역은 쿠샨의 등장 이전까지 샤카-파르티아 Śaka-Parthia계 왕들이 지배했다.
아므 다리아Amu Darya(오크서스강) 중류에 위치했던 그리스계의 박트리아 왕국은 헬레니즘 문화를 계속 유지, 그 후 이 지역에서 전개된 간다라 미술*로 이어져 중앙아시아* 지역에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가 되었다. 도시 유적지인 아이 카눔Ai Khanum에서는 그리스계의 신상과 영웅상들, 코린트식의 주두*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테르메즈Termez 근처의 아이르탐Airtam에서는 그리스의 대리석을 모방한 백색 석회암을 소재로 하여 아칸서스* 문양 사이에 악사(樂士)와 인물상을 배치한 프리즈*와 코린트식 주두에 이란적인 사자 무늬를 새긴 독특한 조각들이 발굴되었다. 박트리아의 건물은 태양에 건조시킨 연와(煉瓦)와 돌을 병용해 지었으며, 인 안디스 식의 집이나 이완 풍의 현관이 있는 궁전 등이 있고 아티카 식의 초석이 사용되었다. 또한 테라코타*로 만든 등신 인물상도 발굴되었다.
박트리아 왕국의 유적은 아이 카눔 이외에는 별로 없으며 미술 자료도 많지 않으나, 그 전통은 쿠샨 시대에도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파르티아나 인도계의 문화가 유입되어 이들을 혼합한 독특한 미술이 탄생하였으며, 이를 ‘오크서스파(派)’라고 부르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