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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미술

초기 기독교 미술 early christian art(영)

고대 말기에 기독교가 나타난 뒤, 5세기 전반 경우에 따라서는 6세기에서 중세로 넘어갈 때까지의 기독교 미술을 말한다. 중세 유럽의 미술이 대부분 기독교 미술이지만, 초기 기독교 미술(300~700)은 그 중에서도 주로 이탈리아와 지중해 서쪽 지역의 미술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 시기의 동유럽은 이른바 비잔틴 미술*과 새로 유입된 게르만 족의 투박한 미술이 유행하였다. 물론 동서 유럽 미술의 경계가 확실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중복은 불가피하다.
보통 기독교의 공인(4세기 초)을 구획으로 하여 ‘카타콤* 시대’와 ‘승리 교회 시대’로 구분한다. 전자는 기독교 탄압이 이따금 행해지던 시기로, 중앙 권력이 비교적 약한 시리아의 두라 에우로포스 유적에서 발견된 소성당이 있고, 또 2세기에는 시리아나 소아시아에 교회가 있었던 것을 문헌에 의해 알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성당 건축은 발달하지 못했다.
유적은 카타콤을 주로 하고 미술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었다. 현재의 카타콤의 대부분은 로마 교회에 집중되어 있고, 벽면을 장식하는 벽화가 주목된다. 대부분 3세기 이후의 것으로 주제, 기법, 양식 등에 있어서 고대적인 성격이 강하다. 로마 이외에는 근래에 니슈(유고슬라비아), 페치(헝가리), 이즈니크(터키) 등에서 벽화가 있는 카타콤이 발견되었다.
또 카타콤에서는 석관부조(石棺浮彫), 석관선조(石棺線彫) 외에 소조각, 소공예품 등이 나왔다. 카타콤 시대의 미술은 고대 로마 미술이나 유태교 미술과도 많은 관련이 있는데, 두라 에우로포스에 남아 있는 유태교 신전벽화(3세기 중엽)도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들어와 각지에 일제히 성당이 세워졌다. 원칙적으로는 동향의 바실리카식 플랜으로, 2열 기둥으로 구획된 삼랑식 플랜의 동쪽 끝에 반원형의 애프스*가 돌출되고 서쪽에 종종 나르텍스와 아트리움*이 붙는다. 옆 복도는 트리뷴을 갖는다.
대성당에는 독립된 세례당이 부속된다. 그 외에 묘당, 순교자 기념당, 세례당과 같이 둥근 지붕의 원당 또는 팔각당이 있다. 외벽은 모두 장식이 없으나 내벽은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색감, 소재(색유리를 많이 이용)도 종래의 벽면 장식법을 일변시켰다. 카타콤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적인 것도 남아 있지만 기독교 교의를 나타내는 새로운 그림이 급속도로 발달했다.
건축활동은 로마에 그치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천도 330), 안티오키아, 나아가 기독교 성적(聖跡)이 많이 남아 있는 예루살렘 부근에도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집중식과 절충식 플랜도 나타났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이은 4~5세기에는 특히 건축가들의 창조적인 노력이 나타났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에 큰 결실을 보게 되었는데 이를 비잔틴 미술*이라 한다. 조각은 주로 석관 조각이 대표적이며 그 공방은 서쪽에서는 로마, 아를르, 타라고나(스페인)였고, 동쪽은 소아시아 방면이었다. 전반적으로 말하면, 초기 기독교 미술은 고대 로마의 전통에 대한 동방적 기술과 감각을 가미하여 이를 기독교 정신에 의거, 종교적 성격을 높여 갔다.
기독교 미술은 도상적 관념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주로 고대 고전기의 우상숭배적인 양식과 예술 언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전기의 미술이 채택되었지만, 그것은 미의 이념이라든지 시각적 아름다움, 또는 기술적 완전성 따위보다도 상징적 의의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미술 양식은 나타나지 않은 반면 새로운 도상학*이 나타났다. 예컨대 초기 기독교 미술은 고전 후기(300~500)와 비교해서 양식상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기교상으로는 보다 저급하며, 도상학적으로는 아주 새로운 것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 중에서도 특히 회화의 경우, 그 예를 카타콤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좁은 카타콤의 벽면(주로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들이 당시 회화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기독교의 상징주의*에 입각하여 그림의 모티브*가 신중하게 선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양치기, 하늘의 연회, 불멸성을 상징하는 수탉, 영혼을 의미하는 비둘기, 희망을 상징하는 닻 등이 종종 쓰이고 있으며,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 등이 구원의 전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기적 장면을 묘사하는 경향은 점점 일반화되었고, 이 시기의 그리스도는 주로 수염이 없는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건축에서는 바실리카*라는 커다란 교회당이 나타난다. 이 건축들은 서유럽 교회당 건축의 기본적인 모델이 되었지만 불행히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며 내려오지 못했다.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는 집회당과 신전, 사저(私邸)의 종합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당시 교회 건물의 구성 요소 중 특징적인 것으로 모자이크*가 있는데, 이것은 소박하고 단순한 건물의 외경과는 달리 그 찬란한 광채로서 신의 영적인 위엄을 환기시키는 장엄한 세계를 연출했다.
조각은 회화나 건축에 비해 보수적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우상 숭배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등신대의 인물상이나 대형 예배상의 제작을 꺼렸던 당시 상황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조각은 처음부터 모뉴멘털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그리스 로마 조각의 공간의 깊숙함이나 당당한 규모가 없어지고 소규모의 형태와 레이스 같은 평면 장식으로 기울어졌다.

초기 영국 양식

초기 영국 양식 Early English Style(영)

영국 고딕* 초기의 양식. 대개 1190년부터 1310년까지의 작품이 이에 해당하고, 프랑스 초기 및 전성기 고딕을 도입하여 영국적으로 수정한 것. 특색은 트레이서리가 없는 란세트창, 비교적 낮은 볼트 천장, 장대한 복도, 별스럽지 않은 플라잉 버트리스* 등이다. 솔즈베리 대성당이 대표적인 작품이며 링컨 대성당이나 웨일스 대성당의 대부분, 웨스트민스터 사원, 로체스터 대성당 등도 이 양식에 속한다.

초상화

초상화 肖像畵 potrait(영, 프)

특정 인물을 묘사하는 회화*의 한 분야. 초상화는 인물화*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현대와 같이 사진에 의한 초상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초상조각과 함께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많은 초상화가 그려졌다. 그 중에서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자화상*은 오늘날에 와서 역사나 풍속의 연구 자료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초상의 종류는 두상(頭像), 반신상, 전신상, 군상(群像)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초상화는 르네상스* 이후 개인의식이 확립되면서 회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라파엘로Raffaello(1483~1520), 티치아노Tiziano(c.1485~1576),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a Y Velasquez(1599~1660),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 반 다이크Anton van Dyck 등이 나타난 바로크* 시대는 초상화의 전성기이다.
동양의 초상화는 단순히 인물을 그리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 정신까지도 옮겨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중국에서는 당대(唐代)에 가장 성행하여 〈제왕도권帝王圖卷〉 <진언오조상眞言五祖像〉등의 명작이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고분벽화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회화분야로 이어졌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왕의 어진제작과 공신상, 유교서원에 봉안된 각종 초상화가 많이 그려지면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였다. 조선의 초상화는 전신*(傳神), 즉 인물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얼굴 표현에 전념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른 분야에 비해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탁월한 분야로 손꼽힌다.

초서

초서 草書 ts’ao-shu(중)

서체*의 일종. 처음에는 초고(草稿)의 서체를 의미하여, 전서*에도 전초(篆草)가 있었다. 그리고 예서*에도 초서가 가능했다. 그러다가 한대(漢代)에 이르러 비로소 초서는 서체로 인정되었는데, 생략체인 실용적 서체로서 간단한 기록이나 편지에 사용되었다. 아직 형식이 정비되지 않은 한漢나라 초기의 것을 ‘고초(古草)’라고 한다.
전한前漢 후반기에 이르면 점차로 파책(波磔)을 수반하게 되며, 후한後漢에 이르면 형식이 완비되면서 장초*(章草)의 체가 인정받게 된다. 그 후 점차 장초가 쇠퇴하고, 후한 말께에 새로운 서체가 유기하여 동진東晋 무렵에 금초(今草)가 완성되었다. 금초에도 한 글자씩 쓰는 독초체(獨草體)와 붙여서 쓰는 연면체(連綿體)가 있으며, 당대(唐代)에 이르러 광초(狂草) 또는 대초(大草)가 쓰였다.

초은도

초은도 招隱圖

동양 산수인물화의 한 화제(畵題). ‘초은’이란 은자(隱者)를 찾아 방문한다는 뜻이다. 이 화제에는 문인 묵객들이 세속을 떠나기를 갈구하며 이상향을 동경하는 염원이 반영되어 있다. 흰구름이 피어 오르는 모습과 암혈(巖穴) 맑은 시내 울창한 수목 등이 있는 산길을 한 두 명의 인물이 누추한 모옥(茅屋; 띠로 얽은 집)을 향하여 오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간혹 화면 안에 사람의 자취가 없는 완전한 무인지경을 그리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명明의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이 그린 <형계초은도권荊溪招隱圖卷>이 있다.

초익공

초익공 初翼工

한국 목조건축에서 창방*과 직교하여 기둥머리에 끼이고 보를 받는 익공쇠서가 한 개로 짜여진 그 공포* 또는 부재. 기둥 중간에는 창방과 도리*, 장여* 사이에 소로를 끼운다. 익공*을 ‘쇠서’ 또는 ‘촛가지’라고도 하며, 익공의 옆면에는 초새김을 하고 끝머리는 쇠서모양으로 하거나 초엽이 말린 것처럼 새긴다.

초충도

초충도 草蟲圖

화조 영모화*의 한 화제(畵題). 풀과 벌레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꽃과 과일 등에 벌 나비 잠자리 여치 등을 그린다. 곤충을 궁전의 벽화* 등에 그리는 일은 육조(六朝) 시대부터 있어 왔지만 당말(唐末) 오대(五代)에는 독립된 형식으로서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남당南唐에서는 초충으로 궁전의 벽면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채색화*가 보통이지만, 수묵화*도 성행하였다. 송대(宋代)에는 더욱 발전하여, 강소성江蘇省의 상주常州에서는 지방적 화법으로 계승되었다.
한국에서는 회화성 높은 초충도가 12세기 전반에 제작된 고려청자*의 문양에 나타나 주목된다. 청자의 문양으로서 초충문(草蟲文)은 희귀하지만, 12세기 전반의 〈청자철회절지조충문병靑磁鐵繪折枝鳥蟲文甁〉(개인소장)과 13세기의 〈청자철회영락청령문합靑磁鐵繪瓔珞蜻蛉文盒〉(호암미술관),〈청자상감국접문호靑磁象嵌菊蝶文壺〉(간송미술관) 등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일반회화 속에서도 초충도가 그려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는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의 <초충도팔곡병草蟲圖八曲屛>,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괴석초충怪石草蟲〉 <화훼초충花卉草蟲> 등이 유명하다.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 超現實主義 Surréalisme(프)

제1차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부터 제2차세계대전 발발 직후까지 약 20년 동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던 전위적인 문학 예술운동. 다다*과 미래주의* 등 20세기에 등장한 다른 전위운동에 비해 양차 세계대전 동안 가장 폭넓게 확산되었으며, 논쟁적인 예술 운동이 되었다. 이성의 지배를 거부하고 비합리적인 것, 의식 아래의 세계를 표현하는 예술 혁신 운동으로 추상미술과 함께 20세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예술 사조의 하나이다.
초현실주의는 근본적으로 경험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애썼으며, 현실을 본능적이고 잠재적인 꿈의 경험과 융합시켜 논리적이며 실재하는 현실,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시키려 했던 바 이것은 절대적 혹은 초월적인 현실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직접적으로는 다다의 연속과 반동으로 생겼고, 그 명칭은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의 희곡 《테레지아의 유방》(1918)의 부제 ‘초현실주의의 테마’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주의로서 확립된 것은 브르통André Breton(1896~1966)이 1924년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에서이다. 그는 ‘말로든 글로든 그 외의 어떠한 수단에 의해서든 사유의 현실 작용을 표현하려고 하는 순수한 심적 오토마티슴*, 이성에 의한 아무런 통제 없이, 미적, 도덕적인 선입관 없이 행해지는 사유의 옮겨쓰기’라고 정의했다. 브르통은 또 초현실주의의 목적을 ‘이전의 꿈과 현실의 모순된 상황을 절대적 현실, 초현실적 상태로 변형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일반적인 목적 안에서 서로 상이하면서도 모순되지 않는 수많은 주장과 기술을 상호 혼합시키면서, 이성과 의식적인 통제의 지배를 거부하려고 한 다양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해에 브르통은 아라공Louis Aragon, 엘뤼아르Paul Eluard 등과 《초현실주의 혁명》지(1924~1929)를 간행하였다. 1929년에 제2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이 시기를 경계로 해서 사회적 관심을 강화시킨 공산주의에 접근하는 일파(아라공)와 순수한 예술 운동으로서 나아가는 일파(브르통)로 분열된다. 1930년에 《초현실주의 혁명》지는 《혁명에 봉사하는 초현실주의》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5년 파리에서 최초의 국제 초현실주의 종합전이 열려 아르프Jean Arp,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데 키리코Georgeo de Chirico(1888~1978), 마송André Masson, 만 레이Man Ray 등이 여기에 출품했다. 또한 1938년에 파리에서 열린 국제 초현실주의전이 이 운동의 정점이었는데, 1947년에 파리의 국제전을 다시 부활시켰지만 이전의 왕성함은 없고 추상미술의 세력에 억눌리는 경향을 보였다.
이 운동의 문학적 전제가 되는 이들로서 랭보, 보들레르, 로트레아몽 등이 있었다. 미술사에서 이 운동을 예시한 미술가들은 보슈Hieronymus Bosch(1450~1516), 아르킴볼도Giuseppe Arcimboldo, 파라네시, 고야Francisco de Goya(1746~1828), 롭스Felicien Victor Rops,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르동Odilon Redon(1840~1916), 데 키리코 등으로, 환상적이면서도 기이한 면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보였다. 이들과 유사한 특징 때문에 샤갈Marc Chagall(1887~1985) 또한 이 운동의 선두 주자로 언급된다. 이들은 무의식이 프로이트의 이성의 통제를 뛰어넘은 잠재된 충동과 상상의 세계를 해방시킨다는 학설을 원용하여 자동기술법*에 의한 다양한 방법을 개발했다.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자동기술적인 글을 썼고 미로Joan Miró(1893~1983), 아르프, 마송, 에른스트와 같은 화가들은 프로타주*와 꿈의 현실적 재생산 사이를 넘나드는 기법을 통해 시각적인 등가물을 창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회화나 조각의 복잡한 기법들은 순수한 자동기술법으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최소한 어느 정도의 의식적인 작업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발견된 오브제*’와 꿈이 강조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회화의 가장 특징적인 면은 과거에 꿈을 그린 그림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즉, 꿈의 공간에 단순한 재생산(예컨대 탕기Yves Tanguy(1900~1955)의 그림 속에서 볼 수 있듯)과, 논리적으로 서로 상관이 없는 대상들을 암시적으로 병치해 꿈의 특정한 감성적 특징을 전달하는 것과의 차이점이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은 비기능적이거나 전혀 기능성이 없으면서도 정교하게 구성된 물체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대상(물체)을 그들의 규범적인 대(臺)에서 끌어내려 진열함으로써 다다이스트인 뒤샹Marcel Duchamp(1887~1968)과 피카비아Francis Picabia(1879~1953)의 방법을 이어받고 있다. 비논리적인 병치 방법은, 환상의 구조에 객관적 실재의 환영을 부여하려 했던 19세기 후반의 아카데믹한 그림이나, 라파엘전파*의 매우 섬세한 양식과 유사한 사진 기술과의 결합 속에서 달리Salvador Dali(1904~1989)와 마그리트René Magritte에 의해 특히 발전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혼란스러운 인상은 사실주의적 처리와 비현실적 주제 사이의 혼합에 의해 강화되었다. 달리, 만 레이, 벨머Hans Bellmer(1902~1975) 그리고 다른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막연한 잠재의식적 연상을 유발시켜 모호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기법을 개발했다.
특히 달리는 회화를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색채 사진이라고 보고 편집광적 비판*방법, 즉 착란 현상을 해석하고 끼워맞추는 연상에 근거한 비합리적 인식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 소위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는 물체를 그것의 실용으로부터 분리시켜 주관 속에서 작용하게 하는 예술품으로 전화(轉化)시킨 것이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연극, 영화, 사진, 상업미술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이 운동의 미학은 브르통과 엘뤼아르, 레베르디 같은 프랑스 시인들에 의해 정립되었다. 브르통은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1924년과 1929년에 발표된 <초현실주의의 선언문>을 책임 집필하였다. 1928년 그는 《회화와 초현실주의》를 출판하기도 했다. 1926년에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들의 전용 전시장 ‘초현실주의 화랑’을 설립했고, 1936년(런던)과 1947년(파리)에는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전시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열광은 1930년대 이후 점차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소규모로 유지되고 있다. 20세기 미학에서 이 운동의 중요성은 이러한 것에 대한 관심이 없던 때에 놀랍고도 이국적인 것의 부활을 보여 주었다는 것에 있다.

초현실주의 선언

초현실주의 선언 超現實主義宣言
Manifeste du Surréalisme(프)

다다*에서 발전한 초현실주의*는 원래 문학 운동인데, 이 조직적인 운동은 브르통André Breton(1896~1966)에 의해 결성되고, 1924년 그의 초현실주의 제1선언이 출판되었다. 그 근간을 이루는 사상은 인간 상상력의 해방이며, 합리주의가 도달한 관념적인 막다른 길에 대한 반격과 타개였다.
그는 그 선언에서 “초현실주의는 구두(口頭), 기술(記述), 기타 온갖 방법으로 사고의 참된 작용을 표현하려고 하는 순수한 심적 오토마티슴*이다.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 없이, 또한 미학적, 윤리적인 일체의 선입관 없이 행해지는 사고의 진실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1929년에 발표된 제2선언에서는 “예술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거의 자각하지 않는 미*(美)나 애정, 재능으로 훌륭하게 빛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표현되지 않았던 것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미개척 분야를 밝히는 것이 초현실주의의 목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브르통은 프로이트Freud의 학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즉 이성의 통제가 없는 초현실성을 인정하여 이를 상상력이나 환각력(幻覺力)에 의해서 무의식 속에 표출하려고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