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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

상감 象嵌 inlay(영)

공예품의 표면에 다른 재료를 감입(嵌入)해서 문양을 나타내는 장식법. 원래 금속공예의 은입사(銀入絲) 기법이 발전한 것으로, 나무, 도자, 유리 등에도 사용된다. 상감재로서는 그 외에 돌, 조개껍질, 뼈, 뿔 등이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초기왕조와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던 오래된 기법으로,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12세기 전반에 청자*에 상감기법을 최초로 응용하여 상감청자*를 만들어냈다. 상감기법의 종류로는 상감재를 실처럼 끼워넣은 선상감(線象嵌), 평면으로 끼워넣는 평상감(平象嵌), 상감재를 튀어나오게 끼워넣는 고육상감(高肉象嵌), 끊어넣는 절상감(切象嵌) 등이 있다.

상감청자

상감청자 象嵌靑磁

고려시대에 상감*기법을 독창적으로 도자에 응용하여 장식한 청자*. 성형한 그릇이 반건조 상태일 때 문양을 조각칼로 음각하고 그 부분에 백토니(白土泥), 자토니(豕土泥)를 붓으로 발라, 마른 후 기벽에 덧묻은 이토를 깎아내면 음각한 부분에만 이토가 남아 문양이 표현된다. 여기에 청자유를 입혀 구우면 백니는 백색으로, 자토는 흑색으로 발색되어 문양은 투명한 청자유를 통해서 아름답게 비친다.
고려 의종 13년(1159)때 죽은 문공유묘文公裕墓에서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대접靑磁象嵌寶相唐草文鉢〉은 완숙한 상감기술을 보여주고 있어, 12세기 전반기부터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세기 중엽까지 전성기를 누렸으며 조선시대 분청사기*에도 사용되었다.

상남폄북

상남폄북 尙南貶北

남종화*(南宗畵)를 숭상하고 북종화*(北宗畵)를 배척한다는 내용의 중국회화 이론. 상남폄북은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 막시룡莫是龍(모 스롱) 등의 남북종론(南北宗論)에 기초하고 있다. 이들이 제기한 남북종론에서는 역대의 화가들을 문인화가와 직업화가로 나누고 그 작품들을 각기 남종화와 북종화로 나누었다. 나아가 문인화가들이 그린 남종화는 고아하고 미적 가치가 높으며, 직업화가들이 그린 북종화는 천박하고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문인화*를 위주로 사인기(士人氣) 넘치는 흉중구학*의 화도(畵道)를 추구해야 한다는 논조로 북종화를 폄하했다. 이러한 주장은 ‘상남폄북’이라는 개념으로 귀결되었다.
동기창, 막시룡 등의 상남폄북론은 문인화가와 직업화가의 신분적 차별과 동시에 양자의 화풍이 상이한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상남폄북론은 중국의 근대, 현대회화사는 물론 한국의 조선 후기 이후 최근의 회화사에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쳐왔다. 그러나 현대의 회화연구가인 유검화兪劍華(위 지앤화)는 남북종론이나 상남폄북론이 문인화가였던 동기창, 막시룡 등의 관념적 기호에 의한 단순한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 ‘남종화’ ‘문인화’ ‘북종화’ ‘화지’ 참조

상륜부

상륜부 上輪部

한국 탑*의 옥개석 위쪽에 있는 장식물들로 일반적으로 방형의 노반(露盤)에 복발(覆鉢)과 앙화(仰花)를 얹고 그 위에 찰주(刹柱)를 세우면서 보륜(宝輪), 보개(宝蓋), 수연(水烟) 그 다음으로 용차(龍車)와 보주(寶珠)를 놓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 ‘탑’ 참조

상면석

상면석 床面石 stylobate(영)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건축의 기둥을 받쳐주기 위하여 대개 땅 위에 크레피스(돌계단)라고 부르는 세 단의 토대석을 쌓는다. 이 위에 계속 상면석을 깔고 다시 그 위에 기둥을 얹혀 놓는다.

상상

상상 想像 imagination(영) Phantasie(독)

현실에서 획득될 수 있지만, 지금 현재에는 실재하지 않는 인상을 기반으로 하며, 사고를 통해 의식 속에 새로운 직관적 심상(心象)을 떠올리는 작용. 사람들을 현실로부터 분리시키는 몽상(夢想)과 구분되는 건전한 상상은 일반적인 사회적 요구와 결부된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현실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그것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을 준다. 예컨대 과학자는 상상의 도움을 받아 가설(假說)을 만들기도 하고 모델을 고안하기도 한다. 예술가는 예술적으로 의미가 있는 상(象)을 생생하게 그려, 그것들의 실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의 능력을 창조하기도 한다. 생활에서도 존재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만들어 낸 이상(理想) 역시 상상의 산물이며, 이것은 사람들을 계발하는 힘이 된다.
상상은 지각(知覺)과 달라서 외계의 사물을 대상으로 갖지 않으며, 더욱이 명백한 직관성을 갖춘 심상을 의식 중에 생기게 한다는 내발(內發)적인 직관성을 첫번째 특징으로 한다. 처음부터 상상에 의거하여 생기는 심상도 어떤 의미에서는 지각심상의 경험에 의존하며 거기서 소재를 얻는 수가 많으므로 상상은 과거의 지각경험의 재생작용인 기억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 또 상상하는 의식 태도와 지각하는 의식 태도는 본래 별개의 것이다. 지각심상은 일단 기억심상으로 바뀐 다음, 비로소 상상심상과 관련을 맺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상에 대한 기억의 의미는 크다.
그러나 지각과 기억이 결국은 현실의 경험에 따르며 이것을 수동적으로 파악 혹은 재생한다면, 상상은 반드시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다. 독자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능동적 성격을 갖는 상상은 종종 사고(思考)와 비교해서 논의된다. 즉 상상은 직관적 심상의 흐름에서 성립하는 전체적 의식체험이며 일종의 능동적 구성작용을 가진다는 점에서 광의의 사고와 비교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협의의 사고에서는 표상 계열의 논리적, 개념적 연관이 그 본질을 이루며 심상의 직관성이 부수적인 의미를 갖는데 불과하다. 이와 반대로 상상은 심상에 의한 사고로서, 심상의 흐름 그 자체에서 성립한다는 점에서 사고와 분명히 다르다.

상상력

상상력 想像力
Einbildungscraft(독)

상상*을 하는 심적 능력(心的能力). 구상력(構想力)이라고도 한다. 칸트Immanuel Kant의 인식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용어. 철학상으로 칸트,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등에 의하여 독특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특히 이것은 칸트가 말한 감성적(感性的) 경험을 오성(悟性)의 범주에 매개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상상력은 오성에 대하여 이것에 적응하는 직관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상상력은 감성에 속하지만 그 종합 작용은 자발성의 작용이고, 감성을 선천적으로 규정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오성적인 것으로도 되며, 감성, 오성의 매개 역할을 한다.

상석

상석 床石

일반 분묘나 능원(陵園)의 봉분 앞에 설치해 놓은 넓적한 장방형의 돌로 된 상. 왕실의 예전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석상(石牀)으로, 일반사대부의 예서인 《상례비요喪禮備要》 등에는 석상(石床)으로 표기되어 있다.

상업미술

상업미술 商業美術
commercial art(영)

상업적인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조형적 표현으로 자본주의와 더불어 발전하였다. 상품 자체를 색채, 장식, 재료, 내•외관 등의 측면에서 미적으로 형태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방식의 진열이나 모든 종류의 광고를 통한 상품의 전시와 관련된 전반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원시적인 형태로서의 상업미술은 고대부터 존재해왔으나, 획기적으로 발달한 것은 포스터*나 선전만화 등의 선전미술이 대중의 선동이나 계몽에 막대한 힘을 발휘하는 것을 경험한 제1차세계대전 이후이다.
상업적인 목적의 디자인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상품 디자인, 광고, 포장, 제본, 디스플레이 등을 통한 조형적 커뮤니케이션을 전문으로 다루는 상업 디자이너들도 등장했다. 이들은 포스터, 신문이나 잡지, 책, TV 등의 매체 및 시각적 환경 전체를 무대로 공급자와 상품을 알리고 수요자의 흥미와 구매욕구를 일으키고자 한다. 상업미술이라는 정확한 명칭이 정해진 것은 1926년 영국에서 발간된 잡지 《상업미술Commercial Art》에서였다. 상업미술에서는 선전 대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따르는 적절한 표현방식인가, 호소력이 있는가, 근대적 조형미를 가지는가, 대중적인가, 경제적인가, 대량생산성이 있는가 등의 요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상왕조 미술

상왕조 미술 商王朝美術

상商왕조의 수도인 은허殷墟(현 安陽)는 기원전 1400년경 반경盤庚에 의해 세워졌으나 그 후 주周에 의해 기원전 11세기 후반에 정복된 것으로 알려졌다. 안양의 청동기는 고도로 발전된 것이며, 당시 금속공들이 만든 제기류 등은 이미 그 이전 수세기에 걸쳐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갑골문*에는 반경 이전 18명의 왕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으며 수도를 다섯번이나 옮긴 뒤에 마침내 안양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고학적으로 이들 수도들이 증명된다면, 전설상으로만 존재하는 신석기말에서 안양의 청동기 문화 사이의 공백이 밝혀질 것이다.
건축:19세기말경 하남성河南省 안양현의 소둔 일대에서 상대(商代) 후기의 도읍지인 은허가 발견되고 다시 1950년대에는 정주 이리강에서 상, 중기의 도성터가 발견되었다. 1960년대에는 언사 이리두에서 전당(殿堂) 유적이 발견되었다. 전당지는 동서 108m, 남북 100m로 흙을 쌓아올려 굳힌 토단(土壇) 중앙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전당지에는 여덟 칸의 도리간과 세 칸의 들보간으로 된 굴립주(掘立柱) 건물이 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당지에는 거주 흔적은 없으며 그 규모로 보아 전례(典禮)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당의 주위에는 청동기를 주조하는 공방이 있으며, 토기를 굽는 가마장도 있다. 정주 이리강의 도성터는 상대 중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성벽은 판축법에 의해 구축되었다. 성내의 동북부에는 토단이 몇 개 있고 굴립주의 주혈이 늘어서 있다. 성벽의 남북 바깥쪽에는 청동기 주조 공방터가 발굴되었다. 북벽 밖에는 골기(骨器) 가공장이 있었는데, 원료를 동물의 뼈 뿐만 아니라 전쟁의 포로였을 사람의 뼈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공예:상대 초기의 이리두 제3기 유적에서는 청동제인 작은 칼, 송곳, 화살촉, 방울 외에 작(爵)이 나오고 동(銅)을 주물하는 거푸집도 발견되고 있다. 상대 중기의 이리강 유적에서는 청동 용기는 크고 그릇의 벽은 두꺼워지고 문양은 도철문* 등이 볼록선으로 평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문양대 이외에는 유정문(乳釘文)이나 여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 후기에는 청동기의 수도 많고 〈사모무정司母戊鼎〉 같이 높이 133cm, 무게 875kg이나 되는 거대한 것도 있다. 주조방법은 동의 원료인 공작석과 석광을 채굴하여 정련한 다음, 도제 도가니에서 녹여 거푸집에 흘려 넣어 청동기를 만들었다. 식기(食器), 주기(酒器), 악기(樂器) 등의 청동기의 종류가 많아진 것은 지배자의 생활수요가 점점 확대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상대의 토기는 초기에는 회도(灰陶)가 주류를 이룬다. 회도의 표면에는 승문과 네모형, 뇌문의 전신 문양이 인문(印文)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법으로 새겨진 문양의 토기는 중국 남부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상대의 토기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백색토기이다. 백색토기는 자기로 취급될 정도로 섬세하게 만들어졌는데, 순수한 고령토*로 물레 위에서 마무리한 뒤 1,000℃정도에서 소성한 것이다. 또한 하남성과 호북성湖北省에서는 유약을 바른 그릇들도 출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