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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그룹

11월 그룹 Novembergruppe(독)

베를린에서 다다*에 참여했던 독일 표현주의* 지도자들이 모여 1918년 12월에 형성한 급진적인 좌익 성향의 그룹. 그 명칭은 같은 해 11월에 일어난 11월 혁명을 연상시킨다. 이들은 전례 없는 정치적 동요 속에서 진보적인 미술가들과 노동자로 대표되는 대중 간의 더욱 밀접한 관계를 통해 전쟁과 혁명으로 혼란한 국가의 부흥을 돕고자 했다. 펙슈타인Max Pechstein(1881~1955)을 비롯한 창설자들은 1919년에 ‘예술을 위한 노동자 협의회Arbeitsrat für Kunst’를 만들고 미술과 대중 간의 거리를 좁히고자 시도하였다.
미술에서는 표현주의와 입체주의*로부터 기하하적 추상*, 구축주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었던 11월 집단은 1920년대 초반에 많은 전시회를 개최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우익으로 바뀌면서 대중의 지지를 잃어 1921년에 해산되고 결국 1924년경 와해되었다. 이 그룹의 사회주의적 사상과 기계적인 형태에 대한 관심은 신즉물주의*와 바우하우스*에서 다시 실현되었다.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토기. ‘즐문토기櫛文土器’라고도 한다. 일반적인 형태는 바닥면이 포탄모양으로 뾰족한 첨저형(尖低形)과 편평한 화분모양의 평저형(平底形)이 있다. 우리 나라 빗살무늬토기와 유사한 토기는 핀란드, 스웨덴 남부, 북부 독일, 서북 러시아의 카렐리아 지방에서 오카강, 볼가강 상류지방에 걸친 북유럽 일대, 우랄산맥을 넘어서 오브강, 예니세이강 유역 일대, 바이칼호 지역, 몽골지방 그리고 연해주 일대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빙렬

빙렬 氷裂

도자기의 유약 표면에 생긴 작은 금. 도자기에 유약을 씌워 가마에 넣고 굽기 시작하면 유약의 수분이 마르면서 수축할 때 유약 표면에 작은 금이 가득 생긴다. 온도가 더 높아지면 유약이 녹아 유리질이 되고 금들은 없어지게 되지만, 번조가 끝나고 도자기가 식기 시작하면서 태토와 유약의 수축도가 달라 유약에 금이 생기는데 이것을 빙렬 또는 식은태(龜裂)라고 부른다.
빙렬은 본래 소성시의 결함이지만 고대의 도공들은 이를 독창적으로 장식처럼 사용하기도 했는데 남송南宋의 관요*(官窯)와 가요(哥窯)의 도자기는 빙렬로 유명하다.

사경

사경 寫經 hsieh-ching(중)

경전(佛典; 經, 律, 論, 疏 등)을 베껴 쓰는 일, 또는 베껴 쓴 불전을 통칭하는 말. 즉 사경은 경율, 논의, 삼장 곧 대장경, 일체경(一切經)이라 통칭되는 불교경전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 때로는 위경(僞經)도 포함된다. 초기의 사경은 불경을 후손에게 전하거나 독송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서사(書寫)한 것을 말하나, 목판화*의 유행으로 사경의 목적을 상실한 이후부터 부모를 비롯한 조상의 공양, 국태민안의 기원 등 ‘서사의 공덕’이라는 신앙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중국에서는 인도 불교의 불전을 베껴쓰는 관습을 본떴으며, 한역(漢譯) 불전이 유포되었던 3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당唐에서 송대(宋代) 무렵까지의 유품을 보통 ‘고사경(古寫經)’이라고 부른다. 청대(淸代) 말기에 서역으로부터 많은 사경이 발굴되었고, 대부분은 돈황*의 막고굴에서 나온 것이다. 용지는 마지, 곡지, 저지 등이며 체제는 대개 두루마리*로 된 권자본(卷子本)이다.
한국에서는 공식적인 불교수용과 함께 사경이 유래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사경은 ‘서사의 공덕’을 강조한 것이 대부분이다. 최고(最古)의 사경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권43이다. 고려시대에는 화려한 장식경이 주류를 이루는데, 겉표지 그림에는 보상당초문을, 안표지에는 경전의 내용을 쉽게 묘사한 변상도*가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사경의 형상은 절본(折本)이 많으며, 용지는 감지, 상지, 자지, 홍지, 갈지, 마지 등이 쓰인다. 특히 고려시대의 사경은 불상복장이나 탑사리의 내용물이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 사경이었다. 고려사경의 우수성은 충렬왕 이후에 원元나라에서 사경승과 경지를 요구한 여러 문헌과 비문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군자

사군자 四君子

동양 화훼도*의 한 화제(畵題).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군자에 비교해서 그린 그림으로 문인화*의 영역에 속한다. 매화는 겨울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우는 특성으로 인해 군자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고, 난초는 담백한 색과 은은한 향기로 인해 군자의 고결함을 나타낸다고 여겨졌다. 또 국화는 서리 내리는 늦가을까지 꽃을 피워 군자의 은일자적함에 비유되었으며, 대나무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 때문에 군자의 높은 품격과 강인한 기상으로 여겨져 왔다.
원래 사군자는 화조화*의 일부로서 취급되었으나, 그 상징성으로 인해 북송北宋 때부터 문인들이 즐겨 그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나의 독립된 화목으로 정립되었다. 묵죽(墨竹)을 사대부 화목으로 발달시킨 사람은 북송의 소식蘇軾(쑤 스, 1306~1101)과 문동文同(원 통)이며, 묵매화(墨梅花)는 화광중인華光仲仁(화구앙 쭝르언)에 의해 많이 그려졌다. 이들은 ‘흉중성죽(胸中成竹)’이라는 문인화론을 형성하면서 그 이론적 토대를 뒷받침했다. 처음에는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으로 그려졌으나 북송 이후부터는 문인화가들에 의해서 주로 먹을 사용한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려졌다. 원대(元代)에는 몽골족에게 나라를 잃은 한족 문인화가들 사이에서 지조와 저항의 표현으로 자주 그려졌다. 대표적인 예가 정사초鄭思肖(즈엉 쓰차오)의 난초그림으로, 뿌리없는 난초를 그려 몽골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명明의 신종神宗 만력 연간(萬曆, 1573~1619)에 황봉지黃鳳池(후앙 펑즈)가 《매죽란국사보梅竹蘭菊四譜》를 편집했고, 문인 진계유陳繼儒(츠언 지로우)는 ‘사군’이라 불렀는데, 후에 ‘사군자’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군자’라는 명칭은 명대(明代)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청대(淸代)의 왕개王槪(우앙 까이)가 편집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제3집은 바로 매난국죽에 관한 사보(四譜)이다. 청대의 정섭鄭燮(즈엉 시에)이 사군자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송宋, 원元 회화의 영향으로 고려시대의 사대부들이 묵죽, 묵매를 그렸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사대부들은 물론 화원(畵員)들도 사군자를 많이 그렸다. 조선 중기에는 독자적인 양식이 선보였고, 후기에 들어오면 남종화*(南宗畵)의 유행으로 더욱 많이 그려졌다.

사녀도

사녀도 仕女圖

중국 인물화*의 한 화제(畵題). 원래는 봉건사회의 상층 사대부와 부녀들의 생활을 제재로 한 중국화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는 인물화 가운데서도 상층 부녀생활을 제재로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특히 궁정에서 생활하는 부인들을 주제로 한 미인도이다.
한대(漢代)에 시작되어 당대(唐代)에 성행했다. 당대의 주방周昉(저우 황)이 그린 <휘선사녀도揮扇仕女圖> 두루마리*와 장훤張萱(즈앙 쉬앤)이 그린 <괵국부인유춘도虢國夫人遊春圖> 두루마리 등은 사녀도 양식의 전형이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심미관이 달라지면서 서로 다른 풍격과 특징을 보이는 점도 있다.
송대(宋代)의 곽약허郭若虛(구어 루어쉬, 11세기 후반 활동)는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에서 사람들을 신분에 따라 제왕, 불교인물, 사대부, 무사, 전가(田家), 사녀 등 10여 종으로 나누고 “사녀는 마땅히 부유하고 수려하고 색(色)이 있는 미녀상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대(五代) 주문구周文矩(저우 윈지)의 <중병회기도重屛會棋圖> 두루마리, 북송北宋 왕거정王居正(우앙 쥐즈엉)의 <방거도紡車圖> 두루마리, 명대(明代) 구영仇英(처우 잉)의 <열녀도列女圖> 두루마리, 청대(淸代) 비단욱費丹旭(훼이 탄쉬)의 <사녀책仕女冊> 등이 유명하다. 중국 민간 목판 연화(年畵) 가운데 있는 <미녀도美女圖>도 역시 사녀도에 포함된다. 작가로는 주방, 장훤, 주문구, 구영뿐만 아니라 백묘*(白描)로 상상적 사녀도를 그렸다는 북송北宋의 문인화가 이공린李公麟(리 꽁린, 1040~1106)과 청대(淸代)의 개기改琦(까이 취)의 이름이 높다.

사도

사도 使徒 apostles(영)

기독교 미술에서 복음을 전달하는 12제자를 지칭한다. 때로는 마가와 요한이 추가되기도 한다. 그들은 대개 예수 주위에 무리를 지은 모습으로 재현된다. 주요한 사도의 모습은 고정되어 있는데, 둥근 얼굴과 흰머리와 흰수염의 베드로, 수염이 나지 않은 청년 모습의 요한, 하얗게 올려진 머리칼의 안드레아가 그에 속한다. 사도들은 모두 긴 튜닉과 한쪽 어깨로 쏠려 내려진 망토를 걸친 모습이다. 4세기에 로마 지하 묘소에 그려진 사도들의 그림에서 사도들은 반원으로 예수를 둘러싸고 앉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런 모습은 교회의 애프스* 부분과 석관*에 많이 그려졌다. 사도들이 예수의 좌우 한쪽에 서있는 것도 초기에 사도들이 취한 또다른 배열 형태이며, 그들의 머리 위 창공에는 복음을 상징하는 짐승들이 그려져 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사도들을 떠나 보내는 모습은 특히 15~16세기 프랑스와 독일의 그림에서 애호된 소재였다. 16세기부터 사도들은 교회 장식물에서 두드러지게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스바티

사라스바티 Sarasvatī(범)

‘흐르는 자’라는 의미로 베다 시대에는 북인도 지역에 있는 강물의 여신이었으나 후에는 언어의 여신인 ‘박Vac’과 동일시되어 학문과 예술의 수호신이 되었다. 또한 브라흐마*의 배우자이기도 하여 ‘브라흐마니’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북인도에서는 비슈누*의 배우자로 여겨지고 있다. 비파를 지물*로 들고 있으며 그녀의 바하나*는 공작새인 마유라Mayūra이다. 불교에서는 변재천辯才天이라고 한다.

사르나트

사르나트 Sārnāth(범)

인도 북부 우타르 프라데쉬주에 위치한 바라나에서 북쪽으로 약 6km 떨어진 대규모의 불교 유적지이다. 불타가 처음으로 설법을 했던 성지로서 ‘녹야원鹿野苑’으로 한역(漢譯)된다.
사르나트에서는 기원전 3세기부터 12세기까지의 많은 조각품들이 출토되었고 스투파*나 비하라*의 유지(遺址)도 발견되었다. 여기서 발견된 마우리야 시대*의 〈아쇼카왕 석주*〉는 네 마리의 사자가 서로 등을 대고 있는 주두*와 법륜*(法輪) 조각이 매우 뛰어나다. 쿠샨 시대*에 제작된 보살상은 승려 발라Bala가 카니슈카왕Kaniska 3년에 봉헌했다는 명문*이 있는 중요한 상이다. 굽타 시대*의 사르나트는 마투라*와 더불어 조각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사르나트의 상들은 마투라와 달리 옷이 몸에 밀착되고 옷주름도 없는 점이 특징적이다.
사르나트 대사원의 스투파와 비하라들을 장식했던 불, 보살상들은 추나르Chunār에서 생산되는 회색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이 곳에서 출토된 초전법륜(初轉法輪)상은 굽타 시대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사르나트의 불교 조각은 타이*나 캄보디아*의 초기 불교 조각상 및 보로부두르*의 불상*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리구

사리구 舍利具

부처의 사리를 넣은 용기. 일반적으로 탑안에 봉안한 것으로 외함(外函)과 내함(內函),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리병이 한 짝을 이룬다. 외함과 내함은 금, 은, 금동으로 만들어지며 표면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불, 보살, 신장상 등을 비롯한 비천*문, 당초문* 등의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사리병은 금속이나 돌, 점토, 유리, 수정 등을 재료로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감은사지탑感恩寺址塔 출토의 청동사리구〉(682)를 비롯해 〈송림사탑松林寺塔 출토 금동사리구〉 〈불국사탑佛國寺塔 출토 금동사리구〉, 고려시대의 〈익산 왕궁리탑王宮理塔 출토의 금제 사리구〉가 대표적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