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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화

해경화 海景畵 Seascape(영)

바다를 주제로 한 그림. 고대의 신화나 해상전투 또는 해적행위 같은 사건들을 묘사한 그림 속에서 즐겨 다루어졌다. 고대 회화*의 주된 관심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바다나 강은 대개 관례적으로 묘사되거나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풍경화*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로마 시대에도 해경화에는 이르지 못했다. 또한 브뤼겔Pieter Bruegel(c.1525~1569) 역시 배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나, <이카루스의 추락>에서 보여지듯이 중심 주제에 부속된 것이었다.
한편 거센 바다 위의 배를 즐겨 다룬 그의 만년의 회화들은 바다 그 자체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데, 이러한 화풍은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들에 의해 주로 시도되었다. 핸드릭 코르넬리스 브룸, 비에링겐 코르넬리스 클래츠 등이 있으며, 1625년경 반 에르트벨트Andries van Eertvelt는 다채로운 플랑드르 양식의 낭만적인 해경화를 보여주고 있다. 18세기의 영국 화가들로는 모나미Peter Monamy, 스콧Samuel Scott 등이 있다. 그 후 터너William Turner(1775~1851)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국 해경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9세기에 이르면 보닝턴Richard Parkes Bonington, 코트맨John Sell Cotman 같은 뛰어난 해경화가들에 의해 풍경화와 해경화 간의 구분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며, 근대와의 간격을 메워주고 있는 윌리W. L. Wyllie는 특히 독특한 물의 색채를 통해 수많은 해경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해삭준

해삭준 解索皴

피마준*에서 약간 변형된 동양화 준법*. 밧줄을 풀어헤친 것같이 꼬불꼬불한 필촉으로 처리되는 것이 특징이다.

해상화파

해상화파 海上畵派

중국유파의 하나로 ‘해파(海派)’라고도 한다. 아편전쟁(1840~1842) 이후 상해上海는 통상항구로 개방되었고, 각지에서 몰려든 화가들의 수가 늘어나 회화 활동의 중심이 되어서, ‘해파’라는 명칭이 생겼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전통의 기초 위에 파격적인 참신함과 자유로운 유파를 추구하여 개성이 분명하다. ②품학수양(品學修養)을 중시한다. ③민간 예술과의 관계 속에서 아속공상(雅俗共賞)의 경지를 이룩한다. ④외래예술을 흡수한다. ⑤그림모임(畵會)들이 일어나 융성한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조지겸趙之謙(자오 즈지앤, 1829~1884), 허곡虛谷(쉬 꾸), 임이任頤(르언 이), 오창석吳昌碩(우 츠앙스, 1842~1927), 황빈홍黃賓虹(후앙 빈홍, 1864~1955) 등이다.
이 밖에 임태任態(르언 슝), 포화蒲華(후 화), 호공수胡公壽(후 꽁서우), 장태張態(즈앙 슝), 오우여吳友如(우 이어우르우), 정장程璋(츠엉 즈앙), 오경운吳慶雲(우 칭윈), 임훈任薰(르언 쉰), 전혜안錢慧安(치앤 후에이안), 사복沙馥(사 후), 황산수黃山壽(후앙 산저우), 예묵경倪墨耕(니 모징), 조자운趙子雲(자오 쯔윈), 왕일정王一亭(우앙 이팅), 빙초연(빙)招然(훵 츠아오르안), 정우창鄭牛昌(즈엉 우츠앙) 등이 있다. 《해상묵림海上墨林》에 기록된 화가의 수는 700여 명에 이른다.

해서

해서 楷書 kái -shu(중)

한자 서체*의 일종. ‘정서(正書)’ 혹은 ‘진서(眞書)’라고도 한다. 예서*의 왼삐침과 오른삐침을 없애고 방정한 체를 이룬 것으로, 옛날에는 예서에 포함되었으나 육조(六朝)시대에 이르러 정서 또는 진서의 명칭이 붙었다. 옛날에는 해법이라고 하여 서법을 모방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서체에만 한정된 명칭은 아니었다.

해양사가

해양사가 海陽四家

→ 신안화파

해조묘

해조묘 蟹爪描

동양화에서 나뭇가지를 그리는 기법. 마른 나뭇가지의 구부러진 형상을 게의 발처럼 날카롭게 그리는 수지법*(樹枝法)이다. 화북계통 산수화에서 앙상하게 헐벗은 한림(寒林)의 가지나 말라 죽은 고목(枯木)의 가지를 그릴 때 사용한다. 이곽파*李郭派 산수에 많이 쓰였으며 조선초기의 안견파*安堅派도 이를 받아들여 애용하였다.

해체

해체 deconstruction(영)

→ 탈구축

해칭

해칭 hatching(영) hachure(프)

판화*나 소묘*에서 세밀한 평행선 또는 교차선을 써서, 대상의 요철이나 음영을 표현하는 묘법이다. 빛의 미묘한 반사의 복잡한 것에서부터 지도, 제도 따위의 간단한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해칭이 있다.

해프닝

해프닝 Happening(영)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주로 행해졌던 비연극적, 탈영역적(脫領域的)인 연극 형식이며, 우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예술의 각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표현운동의 한 가지. 해프닝은 주제, 소재*, 액션*의 변화에 따라 여러가지 형식으로 전개하여 이른바 예술과 일상 생활과의 경계를 없애려는 것이 하나의 특색이다. 특히 미술에서는 화가의 제작 행위 그 자체를 하나의 표현으로 본다는 주장에서 발전한 것으로, 액션 페인팅*의 행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 물체와 만남으로써 바로 눈 앞에 있는 이벤트를 발생시켜 그것을 직접 체험한다는 일종의 ‘실연(實演)’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해프닝의 선구로는 미래주의*와 다다*의 즉흥연기 등을 거론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과 케이지John Cage 등 뉴욕에서 활약한 일련의 화가들과 관련이 있다.
초기에 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던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올덴버그Claes Oldenburg(1929~ )는 회화와 조각의 결합을 꾀하고 대중의 행동을 작품에 끌어들였는데, 그는 현실 전체를 원동력으로 하여 다시 변경된 현실을 창조하려는 욕망 표현의 수단으로서 해프닝을 간주하였다. 해프닝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캐프로Allan Kaprow(1927~ )인데, 그는 이런 매개체를 최초로 실연에 옮긴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움직이는 사람과 사물을 콜라주*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올덴버그, 휘트먼Robert Whitman, 그룸스Red Grooms, 다인Jim Dine 등은 비슷한 경향의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을 위한 그들의 이벤트는 일반적으로 내용이 없는 각본과 즉흥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작가들은 해프닝에서 무용수나 단편 영화, 연설 그리고 조잡하게 제작된 구조물을 이용했다.
우연성은, 해프닝의 현장에 자유롭게 참여한 관중의 예기치 않은 행동을 수용한다. 우연성의 수용은 전위 음악가 케이지의 이론에 영향받은 것으로, 그는 오래 전부터 작품에 우연한 사건을 도입하여 예술과 생활의 경계를 허물어뜨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서 공연한 1952년의 실연을 들어, 케이지를 해프닝의 최초의 대표적 작가로 꼽고 있다. 위의 공연에는 전위 무용수인 커닝햄Merce Cunningham, 화가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피아니스트인 튜더David Tudar 등 많은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1960년에 가까워지면서 여러 작가들은 이 새로운 예술의 특성을 정의하려고 시도했다.
캐프로는 자신의 작품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상점 정면이나 다락방과 같은 상황에서 도시와 농촌의 풍경으로 옮겨가면서 대중을 초청, 거의 의식적이고 계산된 사건의 연속 속에 결합시키고자 했다. 휘트먼은 각기 다른 장치로 연속물을 마련하고 주어진 배경 속에서 행동을 계속하여 연극에 보다 더 접근해 갔다. 다인은 위협적이고 무시무시한 효과가 강조된, 해프닝으로서의 사이코 드라마를 시험했다. 조각가인 올덴버그는 움직이는 대상에 대한 활성화된 반응에 관심을 집중했다.
해프닝은 복합적인 매체에 관심있는 작가들에게 계속적으로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은 춤, 작곡된 음악, 전위적인 연극 형식의 일면을 포용해왔다. 해프닝은 이미지의 단절이나 전통적인 일차원적 구성에서 진전을 보이지 않아 어느 정도는 연극과 구별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어떤 예술 형태보다도 연극적인 면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