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돈황 敦煌

돈황 敦煌 Tun-huang(중)

중국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끝, 곤륜산맥崑崙山脈 북쪽 기슭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사주沙州’ ‘과주瓜州’라고 불릴 때도 있었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재위 기원전 141~88)가 돈황국을 둔 이래,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는 경유지가 되어 왔다. 서역과 중국의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불교가 일찍부터 전해졌고 불교 문화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5세기 중기 북위北魏의 황족인 동양왕東陽王 원태영元太榮이 과주자사瓜州刺史가 되었고, 북위가 멸망한 뒤에도 그 자손이 다스렸으며, 서역의 본토로부터 승려를 불러들여 석굴을 많이 개착하여 천불동이 이루어졌다.
초당(初唐)에서 성당(盛唐)기에는 중국의 지배가 회복되었는데, 781~850년은 티베트가 점거하였고, 851년에 장의조張議潮가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가 되어 하서 일대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주변 지역에는 위구르, 티베트가 할거하였고, 900년경 절도사가 된 조씨曹氏는 돈황 오아시스만을 차지하는 소국을 건설하였으며, 위구르 왕이나 우진 국왕과 통혼 연합하여 중국과 교통하였다. 막고굴莫高窟의 대형 석굴이나 안서 유림굴, 그리고 장경동에서 발견된 고사본 중 많은 것이 이 시기의 것이다. 그 후 10세기 중반부터 탕구트족이 건국한 서하西河의 영토가 되고, 결국에는 몽골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명대(明代) 초기에 일시 회복되었는데, 15세기 초에 명明이 가욕관嘉峪關 서쪽지방을 포기하여 몽골족의 유목지가 되었고, 청대(淸代)에 이르러 다시 한인이 들어와 현성縣城을 세웠다.

돈황석굴군

돈황석굴군 敦煌石窟群

돈황석굴은 천불동千佛洞 또는 막고굴莫高窟이라고도 불린다. 현성縣城 동남쪽 30km 떨어진 명사산鳴沙山의 기슭에 1,600m에 걸쳐 2단 또는 3단으로 파여 있고, 흙이나 모래에 파묻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약 480굴에 달한다. 착굴의 시작은 동진東晋의 영화 9년(353), 또는 전진前秦의 건원 2년(366)에 승려 낙준樂僔이 시작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제275동은 그 양식으로 볼 때, 운강석굴*(雲岡石窟)이 시작된 북위北魏의 화평 연간(460~465)의 것이다. 북위,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 오대(五代), 송宋, 서하西夏, 원元에 걸쳐서 석굴의 개착이나 수리가 계속되었다.
석굴은 승원굴(僧院窟)의 영향을 받아서 방형평면(方形平面)으로 좌우 벽면에 불감*(佛龕)을 만들어 불보살을 안치하는 형식이다. 석질이 거친 반암이므로 네벽과 천장을 칠식(석회와 찰흙을 불가사리로 반죽한 것)으로 칠했고, 그 위에 벽화*를 그리고 소조*로 된 불상*을 안치시켰다. 불상의 종류는 2,415존에 달하며, 한두가지 예외적인 석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상(塑像)으로서 색채가 선명하게 칠해져 있다. 벽화는 당시 성행하던 석가, 미타, 약사 등의 정토변상(淨土變相)과 《법화경》 《유마경》 《보은경》 《화엄경》 등의 변상도*와 본생도*, 불전도* 등의 그림이 있다.
불상이나 벽면의 양식은 인도 서역풍, 중국의 재래 양식, 티베트 양식 등 다양하다. 낙양을 시작으로 하는 목조건축이 없어진 오늘날 돈황석굴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돈황 부근에는 천불동(막고굴) 외에 서천불동, 안서 유림굴楡林窟, 안서 수협구水峽口(小千佛洞)가 있다. 서천불동은 막고굴 서쪽 40km지점에 있고 19굴로 되어 있으며, 북위, 당, 오대의 벽화, 소상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유림굴은 막고굴 동쪽 100㎞, 안서의 남쪽으로 약 80㎞ 떨어진 만불협에 있고, 총 40굴 가운데 29개의 굴에 북위에서 당에 이르는 시대의 벽화가 있다. 또 수협구굴은 안서와 유림굴의 사이에 있고, 현존하는 것이 6굴 정도의 소규모의 석굴이다.
돈황 석굴은 금세기 초 각국의 학자가 방문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07년에는 영국의 스타인Sir Mark Aurel Stein(1862~1943)이 탐험하여 약 15,000점의 한문, 티베트 문자로 된 경전, 고사본과 500여 점의 비단, 종이, 마포에 그려진 불화류를 가지고 돌아갔다. 현재 그것들은 영국박물관, 영국도서관, 인도 국립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1908년에는 프랑스의 펠리오Paul Pelliot(1878~1945)에 의해 석굴의 사진이 소개되고, 약 5,000여점의 고사본, 약 150점의 회화, 공예품이 파리의 국립도서관, 기메박물관에 보관되었다. 1911년에는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1914년에는 러시아의 올덴부르크Sergei Fedororich Oldenburg(1863~1934) 일행이 각각 방문하였다. 오타니 탐험대의 발굴품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그리고 올덴부르크의 발굴품은 에르미타주미술관과 구소련국립동양연구소 성 페테르부르크 지소에 보관되어 있다. 그 뒤 미국의 워너Langdon Warner(1881~1956), 중국의 진만리陳萬里(츠언 완리), 향달向達(시앙 따) 등이 조사했다. 1944년 중화민국 정부는 돈황예술연구소를 창설하였으며 그 후 장대천長大千(즈앙 따지엔) 등의 조사와 벽화모사가 행해졌다.
1952년에는 새 중국정부에 의해서 돈황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가 개설되어 보존과 조사를 진행하고 있고, 현재는 이 연구소의 동굴 번호가 학계의 표준이 되고 있다. 돈황의 유적과 출토된 문물의 연구를 총칭하여 ‘돈황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돈황회화

돈황회화 敦煌繪畵

현존하는 돈황 회화는 두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천불동千佛洞(莫高窟), 서천불동, 안서 유림굴安西楡林窟 등의 석굴 사원군의 벽화*이다. 상하 5m폭의 화면으로 총연장은 무려 25km에 달하며 연대는 5세기 중기(북위北魏)부터 14세기 초(원元)에 이른다. 조굴명(造窟銘)이나 공양자명(供養者銘)에 의거하여 양식적인 편년이 가능하며, 중국 회화사의 중요한 좌표를 제공한다. 즉 5~6세기의 벽화*는 중국 고대회화의 전통에 중앙아시아(특히 쿠차)의 영향이 가미된 독자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불전(佛傳), 본생(本生) 등의 설화를 프리즘처럼 옆으로 길게 전개해 놓은 것이 많다. 7세기에 들어서 당唐이 서역을 지배함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진보된 양식이 직접 도입되었고 유기적인 화면 구성, 세련된 도상에 의한 대규모의 정토국(淨土國) 표현이나 《법화경法華經》 《유마경維摩經》 등의 변상*이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8세기 중반에 절정에 달하였다.
존상이나 공양자의 원숙한 묘사법, 깊이 있는 산수의 표현 등 중국 고대회화의 고전적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가 점령한 시기(787~848)를 거쳐 장씨張氏, 조씨曹氏의 귀의군기(歸義軍期, 9세기 후반~11세기 초반)가 되어서는 도상이나 표현이 번잡한 채로 고정화되었으며, 지방적인 양식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두번째는 비단, 삼베, 종이 등이 그려진 봉납용, 예배용 화폭이나 두루마리*류로서 11세기초에 막고굴의 소굴(藏經洞)에 감추어져 있다가 1900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들의 종류는 양식이나 화법이 세련된 것, 거친 것 등 다양한데, 8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700여점을 헤아리고 있어, 중국의 불교회화 자료로서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