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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국

포국 布局

‘포치(布置)’라고도 하는 구도법(構圖法)의 하나. 육법* 중의 ‘경영위치(經營位置)’에 해당한다. 주위(主位)로 가져올 것과 옆으로 돌릴 것, 점경(點景) 등의 위치, 전후 또는 원근 관계, 전체적 균형 등을 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화론*에서는 화면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구사(立意)를 중요시하며, 포국의 개념은 그러한 심상(心像)까지를 포함한다.

포디엄

포디엄 podium(영)

건축 양식에서 기둥이나 조각, 또는 벽을 지지하는 데 사용된 돌출한 토대나 주춧대. 고대 로마의 원형 극장이나 신전,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데, 건물이 서 있는 토대로서 평지에서 조금 올라와 있다.

포럼

포럼 forum(영)

고대 로마의 중심 광장. 로마를 건설한 로물루스의 무덤, 감옥, 원로원, 베스타(vesta) 신전을 위시한 여러 신전 등이 그 안이나 주변에 있다. 기원전 1세기 후반 율리어스 시저와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하기로 계획한 후 4세기까지 개조와 증축이 계속되었으나 중세에는 원로원 건물 등 소수의 건물만이 사용되고 보호를 받았을 뿐 대부분이 방치된 상태여서 많은 유적이 훼손되었다. 19세기 후반 발굴, 정비가 이루어짐으로써 외관은 깨끗해졌으나 옛 매력은 많이 상실됐다.

포류수금문

포류수금문 蒲柳水禽文

버드나무와 물위를 한가로이 오가는 오리와 하늘을 나는 새들의 전원풍경을 묘사한 것. 고려시대의 금속제 정병*이나 청동향완(靑桐香垸), 도자기에서 자주 쓰이던 문양이다.

포름

포름 forme(프)

형(形), 형식*, 형태 등 때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미술 용어로서의 포름은 색깔에 대한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용에 대한 ‘포름’이라는 말과는 일단 구별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 두 가지 뜻이 뒤섞여 쓰이고 있어 애매한 느낌이 있다. 미술에서의 포름이란 색깔과 함께 대상의 시각적 경험을 형성하는 감성적 요소의 기본 개념이므로 이것이 없으면 대상의 시각 체험은 불가능하게 된다.
포름이란 일반적으로 말하면 대상에 있어서 공간의 자기 한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반드시 윤곽이 있는 시공간(視空間)의 추상적인 한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공간 체험의 전체적인 충실상(充實相)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공간 체험의 구성에 미치는 주요한 감성의 양상에 따라, 때로는 보다 많이 시각적으로, 혹은 촉각적으로 또는 운동 감각적으로 된다.
한편 이러한 감각적인 측면 이외에 관념적인 측면도 첨가되므로 내용이니 형식이니 하는 말의 관계가 애매해진다. 또 인상주의* 이후의 근대 회화에 있어서의 포름이란 관념은 색과 완전히 떨어져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반대로 색의 관념에는 포름이란 관념이 반드시 결합되어 있다. 색면에 의한 공간구성이 가능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포비슴

포비슴 Fauvisme(프)

→ 야수주의

포수

포수 鋪首

→ ‘귀면문’ 참조

포스터

포스터 poster(영)

전달할 내용을 일정한 크기의 지면(紙面)이나 천 등에다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표현하는 선전광고 매체. 포스터란 명칭은 기둥을 뜻하는 ‘포스트’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 기둥에 붙여 표시했던 사실에서 이런 호칭이 나왔다.
15세기 중기의 인쇄 기술의 보급과 함께 일반화되었으나, 19세기부터 급속히 발달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860년대에 대형 인쇄기가 발명되자 포스터의 크기는 급속히 확대되어 소위 포스터 시대가 시작된다. 이 개막 시대에 특히 포스터의 디자이너로서 활약한 사람은 프랑스의 세레Jules Chéret였다. 그는 독특한 기법으로 포스터를 그려 그의 스타일은 이후 포스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포스터계에서 주목할 점은 세레와 함께 많은 화가들이 포스터에 손을 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은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으로, 그는 거의 30여점의 포스터를 남겼다. 툴루즈-로트렉과 함께 활약했던 뮤샤Alphonse Mucha(1860~1939) 등도 초기 포스터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포스터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즉 ‘문자가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이란 성격에서 포스터 전체의 통일적인 시각적 효과를 자각한다는 성격이 부각되었다.
또 각국에서는 포스터의 제작량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그 내용도 새로운 회화*의 동향이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다양해졌다. 또 포스터에 사진*이 이용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혁명 후 구소련에서 일어난 구축주의*에 의해 창안된 포토콜라주, 포토몽타주*와 같은 기법은 포스터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또한 형태의 단순화, 색채가 갖는 효과의 탐구라는 점에서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활동도 무시될 수 없다. 바우하우스에서 만든 포스터는 실험적인 것이 많았으나, 여기에서 개척된 새로운 시각 언어는 포스터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제2차세계대전 사이의 포스터는 이러한 여러 가지 수법이 도입되어 매우 다양해졌는데, 특히 프랑스의 카상드르A.M. Cassandre(1901~1968)는 격조 높은 포스터를 많이 그렸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정치 포스터가 중심이 되었으나, 전후에 포스터는 다시 전전(戰前) 이상의 활기를 보였다. 전후의 세계 포스터계의 움직임에서 몇 가지 특색 있는 현상으로 우선 ‘비주얼 스캔들’로 클로즈업된 프랑스의 사비냑Raymond Savignac의 유머 넘치는 포스터를 들 수 있다. 사비냑은 포스터가 웃음을 유발한다는 것을 실증시킨 점에서 특히 큰 공적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위트와 유머는 전후 포스터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요소로서, 이런 경향은 넓은 의미에서 초현실주의*의 기발한 이미지에서 촉발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벤 샨Ben Shahn(1898~1969)에 의한 선묘(線描)에 기초를 둔 독특한 포스터가 제작되었으나, 전후는 시장 조사를 근거로 한 광고의 합목적성이 강조되어 포스터도 분업을 토대로 한 아트 디렉터* 시스템을 확립했다.
여기에서는 개인으로서의 포스터 디자이너가 아니라, 포스터에 마지막 손질을 하는 아트 디렉터로서의 디자이너의 역할이 중시되는 것이다. 그 결과, 포스터는 광고의 한 분야로서 상대적으로 보다 효용이 높은 광고 매체, 이를테면 텔레비전의 상업광고 등에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한편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포스터의 사회적 의미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포스터가 광고, 선전의 매체로서 제시된 다음,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회화와 같이 컬렉팅(→‘컬렉션’ 참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양면성을 가지며, 포스터가 회화에 접근함과 동시에 회화 또한 표현 방법이 다양해져 1950~1960년대의 팝 아트*에서 보여지듯 광고 매체를 주제로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도 무시될 수 없다.
즉 회화도 포스터나 간판에 접근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포스터와 회화가 전적으로 동일화됐다고는 할 수 없고, 전시 또는 게시된 시각적 형식으로서 공통성이 있는 부분이 크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포스터의 기능은 광고, 선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 있어서의 또하나의 회화’란 점도 오늘날의 포스터의 기능으로서 주목할 부분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영)

포스트 모더니즘은 지난 20세기에 걸쳐 서구의 문화와 예술, 삶과 사고를 지배해 온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19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의 통일된 사조나 운동은 아니지만, 그 중심적 동기는 모더니즘을 통해 수립된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엄격한 구분, 예술 각 장르 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다.
다니엘 벨Daniel Bell, 하산Ihab Hassan, 오더허티Brian O’Doherty, 로젠버그Harold Rosenberg(1906~1978) 등 많은 사상가들이 모더니즘의 종말을 선고했다. 벨은 “오늘날 모더니즘은 쇠잔했다. 거기에는 긴장도 없고, 창조적인 충동의 기운도 빠져 버렸다. 모더니즘의 반란적 충동은 제도화되었고, 그 실험적인 형식은 광고와 고급문화의 기호와 구문으로 흡수되어 버렸다”고 썼다. 모더니즘의 확립된 양식들이 의심을 받게 되자, 양식에 대한 확실성이 무너지고, 다양성이 대두된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건축 비평가들이었는데, 1960년대까지 유행하던 엄격한 사각형 형태의 국제적 양식에 대한 반발로 나온 건축물을 일컫는 데 사용하였다. 포스트모던 건축에 있어서는 직선과 사각형의 고착된 형태를 탈피하여 삼각형과 원의 형태가 도입되었다.
‘포스트모던’ 경향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분화되지 않은 과거의 예술을 소생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시대, 다른 문화로부터 양식과 이미지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엄격한 구분을 파기하고 장르*의 장벽을 넘나들기 위해, 여러 가지 대중문화의 현상들(신문기사, 광고, 만화, 통속물)과 갖가지 신화적 요소들을 작품에 차용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미술가로는 워홀Andy Warhol(1928~1987),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1942~ ), 카스텔리Luciano Castelli, 키아Sandro Chia(1946~ ),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1952~ ), 쿠키Enzo Cucchi, 살로메Salome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음악에서는 클래식과 팝을 혼합한 필립 글래스나 테리 릴리 같은 작곡가들이 해당된다.
독일 신표현주의*의 기수 페팅Reiner Fetting과 살로메는 독일 표현주의*의 시대로 되돌아간다. 클레멘테와 슈나벨Julien Schnabel(1951~ )은 1930~1940년대에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신낭만주의적이고 의사(擬似) 초현실주의*적인 측면을 골라낸다. 그들은 콜라주* 기법을 통한 재료의 자유로운 합병을 시도하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회화, 값싼 종교 성물 등을 작품에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차용과 혼합의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평론가들도 있는데,
예를 들어 제임슨Fredric Jameson은 그러한 차용행위가 당대의 언어로 당대의 현실을 표현할 능력이 고갈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가들의 또다른 주된 특징은 모더니즘적 문화와 사고방식이 세워놓은 엄격한 지배의 틀을 거부하는 데 있다. 즉 후기 산업사회는 자본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모든 삶의 영역에 부과하며 그러한 이념을 떠받치는 것은 엄격한 합리주의이다. 따라서 각각의 문화의 영역에서의 고도의 전문화를 지향하고, 다른 영역과는 소통이 안 되는 전문적인 언어로만 자체소통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러한 소통불가능한 상태를 타파하고 삶과 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예술에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끌어들여 비판적으로 다룬다. 특히 크루거Barbara Kruger와 하케Hans Haacke(1936~ )에서 보이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적 생활방식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정치적 색채를 띤다. 또한 골럽Leon Golub(1922~ )은 제3세계의 고문과 쿠데타를 작품으로 다뤄 첨예한 정치적 쟁점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반발하는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페미니스트 아트*이다. 그것은 기존 사회에 통용되고 있는 남성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사진과 글을 적절히 결합하여 비판적 환기력을 높이는 바바라 크루거, 스스로 갖가지 형태의 여성으로 분장하여 사진의 모델이 되는 셔먼Cindy Sherman(1954~ ), 비디오, 영화, 패션사진으로 작업하는 다라번바움이 그 예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그러한 정치 지향적인 성격은 모더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 채, 몇 가지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추가한 것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모더니즘의 지속적인 존립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한 요인으로는, 현대화에 따르는 부작용, 현대 건축과 도시계획의 실패, 미니멀 아트* 및 개념 미술가들이 모더니즘 이론의 몇 가지 단초를 자신들의 논리적 귀결로 이끌어간 데서 비롯된 부조리, 모더니즘 자체 내에서의 자기 파괴적 경향, 1960년대의 문화혁명이 야기한 태도 변화, 마르크시즘의 영향, 그리고 모더니즘에 기초하지 않은 문화와 예술을 가진 공산주의 국가의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아직은 확정되고 일관성 있는 사상의 체계는 아니며,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욕망에 의해 촉발된 회의주의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필연적으로 모더니즘의 폐허를 헤치고 나아가 그 대안을 세우려 노력한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의 많은 개념들을 전용(轉用)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다른 목적에 맞도록 이용할 것이다.

포스트모던 디자인

포스트모던 디자인 post-modern design(영)

팝 디자인이라고도 한다. 1945년 이후 많은 젊은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은 현대 디자인의 대가들이 수립해 놓은 가치에 대항해 왔다.
그들은 현대 건축 및 설계가 전통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그들은 또한 현대 디자인의 기능 이론-목적의 적합성, 재료의 충실성, 기능적 효율성-은 정서적, 심리적, 비합리적인 인간 욕구, 즉 대중 문화의 존재, 저속한 공예품의 지속적인 매력, 그리고 소비재들에 대한 수요에 의해 명백히 드러나는 욕구를 수렴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부적합한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믿는다.
최근 몇 년 동안 표현주의적이고 환상적인 전통을 부정하고 합리적인 건축 형태에 너무 큰 비중을 부여해 온 불균형을 수정하기 위해 현대 건축의 발달사가 다시 쓰였다. 1960년대에 팝 아트*와 ‘팝 디자인’의 출현-런던의 카나비가에 의해 예시된-은 현대 전통에 대한 하나의 반발이었으며, 포스트모던디자인의 시대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