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능 陵

제왕과 후비의 무덤.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봉토(封土)에 호석(護石)을 둘러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기고, 주위에 석난간(石欄干)을 두르며,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사자(石獅子)를 세우는 제도를 갖춘 신라능묘는 흥덕왕릉興德王陵대에 이루어졌다. 고려는 대체로 신라의 양식을 그대로 따랐으나,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및 정자각을 세우고 봉분 주위에 석양, 석호를 배치하는 것 등이 다르다. 대부분의 고려 왕릉들이 북한에 소재하여 학문적인 연구가 부족하나 공민왕恭愍王이 노국대장공주와 자신을 위해 조영한 정릉正陵(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봉명산, 1365)과 현릉玄陵(1374)이 조선시대 왕릉형식의 표준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시대 최초의 왕릉으로 조영한 태조太祖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자 태조의 수릉(壽陵)인 정릉貞陵(사적 제208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1397)이 축조되었다. 그러나 1408년(태종 8년) 태종太宗이 태조의 능을 현재의 건원릉建元陵으로 모시고 다음 해에 제왕의 능분은 도성내에 두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이를 동소문 밖으로 이장시킬 때 그 원형이 파괴되어 공민왕릉과 비교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정릉은 태조 건원릉 축조의 범본으로 알려진다. 건원릉은 능역 입구의 홍살문*으로 이곳이 성역임을 표시하고, 박석을 깐 참도(參道)로 이어진다. 이 입구 바로 오른쪽에 왕이 능행시 북방을 향해 네 번 절하는 통과의례를 치르는 장소인 정방형의 판위(版位)가 있다. 참도는 정자각의 정면으로 이어지다가 동쪽으로 돌아서 동쪽계단에 연결된다. 이것이 다시 정자각 후면 정중앙으로부터 능언덕 밑까지 이어지고 둥근 구릉으로 된 능원은 1단의 낮은 석축으로 보호된다.
능 전체의 구성요소는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능상구역(陵上區域)과 능하구역(陵下區域)이다. 능상구역은 바로 봉분을 중심으로 곡담, 석물, 석계를 포함하며, 정자각 후면의 신문(神門)이 의미론적으로 바로 이 구역으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다. 능하구역은 제의식(際儀式)의 장소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이를 좌우에서 보완하는 수복방(守僕房)과 수라간, 그리고 이 구역의 입구에 홍살문이 있으며 이들을 연결지어 주는 참도, 왕의 자리를 나타내는 판위가 있다. 능상구역에서 능원상에는 3단의 장대석을 쌓아 능전에 2단의 넓은 공간에는 문인석, 무인석과 그들이 탈 수 있는 석마(石馬)들이 각각 1쌍씩 있다.
첫째단에는 두손으로 장검을 빼어 들고 선 무인석이 있고, 둘째단에는 문인석이 두 손으로 활을 잡고 서 있다. 맨 윗단에는 봉분 앞 정면 중앙에 장방형의 두꺼운 판석 한 장으로 된 상석이 북모양을 한 네개의 돌로 받쳐져 있다. 그리고 봉분 주위로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각각 두쌍씩 밖을 향하여 능실을 호위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상석의 좌우로는 중국에서는 화표주(華表柱)라 불리는 석망주(石望柱) 두 개가 서있다. 석망주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상부에 연꽃이 새겨진 띠로 위, 아래를 받치고 그 사이에 긴 팔각주를 세운 모습이다. 12면의 석난간으로 봉분을 보호하고 하부에 12면의 병풍석(屛風石)으로 보호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제도를 보여준다. 각 면에는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전통이 된 십이지신상 조각이 문관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관에는 각 동물의 모습이 장식되었다. 모서리돌에는 금강저*(金剛杵)가 호신의 상징으로 새겨졌으며, 이 금강저에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만물생성의 원리인 태극이 장식되었다. 이러한 능분은 다시 동서북 3면에 걸쳐 기와를 올린 담장 혹은 곡장(曲墻)에 의해 보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