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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도

한림도 寒林圖

산수화*의 한 화제(畵題)로, ‘한림’이란 잎이 다 떨어진 쓸쓸한 숲을 의미한다. 한림이란 용어는 이미 당시(唐詩)에 보이지만 화제로 취급된 것은 당말오대(唐末五代)부터이다. 주로 화북계(華北系) 산수화가들에 의해 산수화의 점경(点景)이나 주경(主景)으로 그려졌다.
한림도는 이성李成(리 츠엉)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성은 오대 말기부터 북송北宋 초기에 걸쳐 화북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겨울 풍경을 전문으로 했는데, 가지들의 곡선 장식과 더불어 벌거벗은 나무들을 통해 자연의 장엄함과 황량함을 표현하였다. 송대(宋代)의 허도녕許道寧(쉬 따오닝), 곽희郭熙(구어 시) 등의 작품은 이성의 작풍(作風)을 이어 받았다. 한림도에는 풍설(風雪)에 부대껴 끝이 게발톱처럼 표현된 나뭇가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해조묘*라 불리는 이러한 기법은 이성, 허도녕, 곽희와 원대(元代)의 이곽파* 작품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한림도화원

한림도화원 翰林圖畵院

북송北宋 전기의 화원(畵院). 화원 제도의 기원은 당대(唐代)에도 보이며 오대(五代)의 후촉後蜀, 남당南唐에서 제도화되었다. 북송시대에는 태종太宗과 신종神宗 모두가 회화를 좋아해 이를 적극 후원하였다. 따라서 황실에서는 오대의 화원제도를 계승하여 한림도화원을 건립하고 내시성內侍省 밑에 두었다. 대조(待詔), 예학(藝學), 지후(祗候), 학생 등의 직급과 정원, 승진제가 확정되고 무인계 관직이 주어지게 된 것은 진종眞宗(998~1022)에 이르러서라고 추측된다.
진종에서 휘종徽宗(1067~1125)에 이르는 사이에 여러번 제도가 변혁되었다. 특히 휘종의 화원개혁에서는 직업화가로서의 질적 향상이 도모되고 원체화*(院體畵; 화원회화양식)가 확립되어 후세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화원화가는 주로 궁정용, 외국 사신들에게 증여하기 위한 회화, 궁정 사관 관공서에 필요한 장식화 등을 제작하였다. 주로 제왕과 궁정의 심미안을 반영하였고, 북송 전기 예술의 발전과 번영을 보여준다.